프로필 이미지만 놓고 보았을 때 지옥불로 반신욕을 마치고 돌아온 분노의 불 뿜는 용 쯤으로 추정될 수 있는 syo는, 실제로 만나 보면 의외로 다정한 남자, 라는 식의 진부한 반전 따위 모르는 대쪽 같은 인물로서,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몇 건씩 걸리는 대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프로불편러로 활동 중이다. 중이었다. 주로 아, 치밀어 오르는 걸 어쩌란 말이냐, 하는 식인데, 모 야당 대표, 원내대표, 수석대변인 같은 경우는 얼굴만 시신경에 포착돼도 바로 벌컥, 한심한 발언, 빻은 발언, 물타기 발언, 우리가 남이가 발언, 인면수심자가당착 발언은 읽거나 듣고 나서 한동안 부글부글, 지는 뭐가 그리 정의롭다고 눈과 귀에 포착되는 세상의 이런저런 사건 사고들에 꼼꼼하게 분노하는 희한한 성정으로 자라난 syo는 그래서 친구가 별로 없다. 


분노는 좋은 거라 배웠다. 어른이나 학교나 사회는 분노가 좋지 않은 거라고 가르쳤는데, 그런 가르침이야말로 바로 분노가 좋은 거라는 가장 명백한 증거였다. syo가 읽은 책은 항상 분노를 주문했다. 분노하라. 따져 물어라. 참지 마라. 분노하지 않아야 할 때 분노하는 것보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인내는 마취약으로 만든 창살이고, 혹여 인내가 끝나는 순간 무엇인가를 쟁취할 수 있더라도 그 인내를 끝내는 것은 마지막 순간의 분노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주야장천 분노에 분노를 두텁게 바르며 살고 있었는데,


그 분노의 절반이 기만임을 알았다. 


모든 분노는 타자로부터 온다. 저건 아니지, 하는 마음에서 온다.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조차, 내가 믿어왔던 나의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발견했을 때 내 안의 타자로부터 온다. 즉, 분노는 타자의 만행과 나 사이에 선을 긋는 일이다. 내 분노가 크면 클수록, 나는 결백하고 선량해진다. 그래서 분노는 중독성이 있다. syo는 전 세계에서 13등쯤 분노를 잘하는 사람이었으니, 제 놈보다 고결한 사람이 12명쯤 있을거라 믿고 살았을 것이다. 분노의 랭킹을 올리는 일이 도덕의 랭킹을 올리는 일이 아닌데, 그 차이를 몰랐거나, 무의식중에 무시하면서 열심히 화를 냈을 것이다. 반자동 분노가 자동 분노가 되고, 손가락과 혀가 분노의 자판기가 되었을 것이다. 


분노의 대상을 올바르게 고르는 것은 중요하다. 분노를 행동으로 바꾸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내가(혹은 내 무의식이) 분노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분노해야 할 곳에 분노하고, 그 분노를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엔진이 된다면, 내가 분노를 통해 챙기려 했던 것의 실체가 추앙이나 인정, 도덕적 만족 같은 몹쓸 물건이 아닌지 항상 되짚어 보는 일은, 세상의 변화를 건전한 방향으로 이끄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자신이 겪었고, 겪고 있으며, 겪어야 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가져다주지만, 페미니즘을 모르는 여성도 자신이 겪는 것이 무엇인지는 살갗으로 안다. 그런 경험들은 남성에게 살갗으로 주어지지 않으므로, 남성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한다. 그게 페미니즘이 남성에게 하는 일이다. 똑같은 사건도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이 다가오지 않는다. 이를테면 남성도 성추행을 당할 수 있다. 그 경험이 여성이 당하는 것에 비해 덜 끔찍하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성추행 사건을 둘러싼 전후의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반응과 압박의 경험은 남성과 여성에게 다르게 주어진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이성이 내 엉덩이에 손을 올리는 순간 느끼는 기분은 같을 수 있어도, 그 사건을 중심으로 파문처럼 일어날 추후의 전개들이 같지 않은 것이다. 결국 남성은 여성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없다. 볼 뿐이다.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남성으로서의 syo는, 내가 피해자가 아닌 일에 분노할 때, 내가 겪지 않은, 운 좋게 내가 겪지 않아도 되었던 일에 분노할 때, 분노하든 분노하지 않든 딱히 내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안에 분노할 때, 자신의 분노가 향하는 칼끝을 쳐다보는 것만큼이나 그 분노의 꼬리가 은근슬쩍 닿아 있는 곳이 어딘지 항상 검증해야 한다. 정신차리고 똑바로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축적된 자동적 분노가 척척 쌓아 올려준 왕좌 위에 걸터앉아 스스로를 킹 오브 도덕이라고 믿게 될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을 칼처럼 구분할 수 있는 교황이라도 된 것처럼 올바른 사람들과 폭도를 지명하려 들지도 모른다.


'저건 아니지'를 아무런 손실 없이 '이건 아닌데'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읽고 쓰며 묻는다. 몸으로 실감한 진실힌 표현인지, 설익은 개념으로 세상만사 재단하고 있지는 않는지. 남의 삶을 도구처럼 동원하고 있지는 않은지. 앞으로 삶에 덤비지 않도록, 글이 삶을 초과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_ 은유,『쓰기의 말들』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기만 하면 해결할 수 있는 약자와 빈자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착취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존재들이 느끼는 고통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리고 최소한의 삶의 조건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주저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좌파가 아니다. 만일 세상이란 곳이 원래 그렇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든지, 혹은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좌파일 수 없다. 좌파는 이러한 상황에서 뭔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_ 피터 싱어,『다윈주의 좌파』


'내면의 얼굴 찾기'는 용기와 결단의 문제다.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만연한 것', '사회적 관습 거스르기'를 하지 않고서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의 거울인 얼굴 찾기 역시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짐멜의 말처럼 현상은 영혼을 감추면서 또한 드러낸다. 이 말은 곧 자기 얼굴의 상품화를 멈추는 순간, 얼굴에 영혼이 깃들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_ 이하준,『고전으로 철학하기』 


텔레비전에 출연하거나 칼럼을 쓰는 어떤 오피니언 리더에게는 자신의 말과 글 속에 세상의 의견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하고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는 앞에 마이크가 놓여 있고, 자신이 쓴 글이 신문에 인쇄되어 독자에게 배달된다는 사실 자체만 중요하다. 그의 말과 글은 여론의 힘으로 정치를 올바르게 바로잡겠다는 의지보다는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 싶은 나르시시즘의 욕구와, 혹여 권력자의 눈에 들어 이른바 '한 자리'를 차지하는 바탕이 되었으면 하는 심산에 의해 지배된다.

_ 노명우,『세상물정의 사회학』 




디테일들은 밖으로, 통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거나 더 추악하거나 때론 상상보다 더 절절해서 그걸 듣는 누군가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쉽게 가려지거나, 윤색돠거나 다른 질감으로 변질되곤 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체 구조와 진실성은 그 디테일들이 그것들 자체로 온전히 작용하고 반목하면서 촘촘하게 형성되는 법이다. 소위, 깊이라는 건 그렇게 드러난다. 심층이 얕다는 건 고로, 그것을 구성하는 표면들의 질감이 밋밋하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_ 강정,「돋보기」, 강정 외,『시인의 사물들』


갈수록,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모든 걸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걸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차고 넘친다. 세상은 안개에 갖히고 체제는 콧노래 부르며 힘을 더해 간다.

_ 김규항,『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힘센 자 편에 서기가 쉬운 법이다. 그 행동이 결국은 세상의 악을 더 공고히 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아도 모른 척한다. 대부분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약하다. 

_ 공선옥,『내가 사랑한 여자』


고통받는 사람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어려운 연습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곁에 있을 수는 있다. 있으면서 힘이 되어주려고 노력하고, 특히 판단을 삼갈 수 있다. 고통당하는데 누가 있어준다는 것-아무리 있는 듯 없는 듯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걸 통제한다고 뻐기는 담론보다 훨씬 윗길이다. 눈길 한 번, 미소 한 번, 말 한마디, 이것이 내 몫의 행동이다. 사랑하는 존재가 파멸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그저 곁에 있어준다는 것, 힘을 주는 몸짓을 찾아내려 애쓴다는 것, 이는 어려운 과제다. 그러는 동안 절망이 압도해버린다! 연약한 미소, 불분명한 말, 숱한 노력 끝에 얻어낸 지원, 이런 것들이 부질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없다면 핵심이 빠진 것이다.

_ 알렉상드르 졸리앵,『인간이라는 직업』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prenown 2017-12-0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다독가의 포스를 유지하는 군요.. 대단해요!

syo 2017-12-05 21:40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스크랩 해놓은 것들 재활용하는거예요^^

2017-12-05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5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5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5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12-06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늘상 얘기하지만, 쇼님의 글에 성찰이 있어서 너무 좋아요. ‘이건 아닌데‘ 만큼이나 나를 스스로 돌아보는 것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쇼님의 글에는 그게 있어요. 열심히, 자꾸자꾸 써주세요!!

syo 2017-12-06 08:26   좋아요 1 | URL
그런 척 하는 걸수도 있어요..... 이게 다 자신의 도덕성을 움켜쥐기 위한 반성문일수도!!

단발머리 2017-12-06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댓글 좀 보세요~~
자신의 도덕성을 움켜쥐기 위한 반성문~~~
댓글도 명문이예요.
그러하니, 그러므로, 그래서!!!

열심히 자주자주 써주세요!!
읽는 재미를 위해서요~~~~~~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이 문단이요.
정말 좋네요.
이렇게 페미니즘을 읽는 사람이야말로 페미니즘을 제대로 관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성도 남성도요.

syo 2017-12-06 12:04   좋아요 1 | URL
설마 그렇게까지 괜찮은 놈이려구요 ㅎㅎㅎ

열심히 자주자주 쓰고는 싶은데,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17-12-07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