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명성에 비해 토니 모리슨을 너무 늦게 읽기 시작했다. 아직 그의 작품을 다 읽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산문집이 출간되니, 마음이 갑자가 다급해져서 이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잉크>에는 토니 모리슨의 여러 글들이 실려 있다. ‘에세이’라고 하면 왠지 가벼운 산문 위주일 것 같다. 나 또한 얼마쯤 그런 생각으로 책을 펼쳤는데 첫 장부터 조금 당황했다. 글도, 내용도 어투도, 주제도 하나 같이 모두 묵직하다. 이 책에는 소설가이자 영문학자, 편집자, 비평가로서 토니 모리슨의 모습을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에세이와 강연, 연설들이 묶여 있다. 그 주제도 다채로워서 문학은 물론 사회, 문화, 예술 문제에 이르기까지 날카로운 사유의 흔적이 펼쳐진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이 눈에 띠는 것은 ‘인종’, ‘흑인’, ‘여성’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두 아이를 홀로 키우며 출판편집자, 영문학 강사로 일하면서 마흔이라는 어찌 보면 늦은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한 토니 모리슨. 그는 끊임없이 흑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문학 작품을 세상에 선보여 흑인 여성으로는 처음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때문에 그가 미국 흑인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기에 인종차별이나 젠더 갈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 또한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을 펼치며, 아니 펼치기 전에 흑인과 여성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쓰여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어느 정도는 맞다. 그러나 100%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도, 그리고 이 글을 읽을 당신도 토니 모리슨의 사유의 깊이가 이토록 깊을 줄은 예상치 못했을 터이므로.
여러 글들이 인상 깊지만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잉크>는 토니 모리슨 작품의 창작 배경을 이해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토니 모리슨의 팬이라면, 그래서 그의 모든 작품을 섭렵한 이들이라면 이 책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토니 모리슨 정도의 작가에게조차 사람들은 무례하게 이렇게 묻는다. “언젠가 백인에 대해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흑인 작가라는 말이 끔찍하지 않으신가요?”(37쪽) 등등. 다른 작가들에게는 물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기이한 질문이다. 한편, 이 질문은 어느 여성 작가에게 “언젠가 남성에 대해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니까?” “여성 작가라는 말이 끔찍하지 않으신가요?” 묻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때로 이렇게 질문으로도 폭력을 가한다. 이런 불쾌한 질문에도 토니 모리슨은 진솔하게 답한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이 ‘가능한 한 방해받지 않는 동시에 가능한 한 책임지길 원했다.’ ‘문화적으로 특수한 동시에 인종에서 자유로운 세계를 빚고 싶었다.’고 말한다. 서구 혹은 유럽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인종에서 자유롭거나 인종을 초월한다고 믿으며, 그렇게 믿겠다고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토니 모리슨이 보기에 ‘진실은 우리 모두 인종화되어’ 있을 뿐이다.
서구 혹은 유럽 작가들이 가진 자주권을 토니 모리슨 또한 원했기에 자신의 소설, 자신과 그 작품, 자기의 능력을 해방하는 방식으로 창작하고 싶었다. 토니 모리슨에게도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다. 첫째는 인종을 무시하거나 인종을 언급하지 않고 2차 세계대전이나 가족 사이의 갈등을 쓰는 법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자기의 존재와 토니 모리슨 그 자신의 지성에 유일하지는 않지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를 지워버리는 방법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는 객관적 관찰자가 되어 인종 갈등이나 화합에 대해 쓰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이 방법 또한 그렇게 하면 중심 위치에 있는 기존 생각에 무대 한복판을 내어줘야 할 수밖에 없고 주제는 언제나 영원히 인종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도 있다. 상상력을 인종이 지우는 부담과 한계로부터 해방하는 동시에 그것의 중심 위치가 토니 모리슨이 주제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의 삶과 세상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탐구하는 것이다. 토니 모리슨은 여기에서 일단 역사보다는 기억에 의존하고 기억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이 자전적이어서(자전적이고 싶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가 매우 인종화된 사회에서 글을 쓰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고, 이런 사회에서 상상력은 절룩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하는 일은 기억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기억한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책임은 (시대가 어떻든) 세상을 바꾸는 일, 자신의 시대를 더 낫게 만드는 일이다. 그게 너무 야심에 차 보인다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96쪽)
여기서 말하는 기억이란 단순히 한 개인의 기억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역사’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토니 모리슨은 흥미롭게도 ‘과거가 미래보다 더 무한하다’(206쪽) 말하는데, ‘시간적으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데이터 양의 측면에서는 분명히’ 그렇다는 그의 주장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한걸음 뒤로 갈수록 하나의 세상이, 또 하나의 세상이’ 펼쳐진다. 과거는 ‘무한’한 것이다. 때문에 토니 모리슨은 도처의 흑인 예술에서 강렬하게 나타나는 신화적 특성을 글에 담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노예라는 운명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 딸을 죽인 흑인 여성의 이야기 <빌러비드>는 실존 인물인 노예 마거릿 가너의 이야기로 출발한다. 1983년에 <빌러비드>를 처음 구상할 때 토니 모리슨은 역사와 복잡한 관계가 있었기에 이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한다. 역사의 정보성 때문에 역사적 기록에 의존했던 그이지만, 그 기록 역사의 삭제와 부재, 침묵을 예리하게 의식했던 토니 모리슨은 삭제된 어떤 것에서 그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간다. 가너는 농장에서 탈출한 직후 아이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리고 그녀는 ‘아이들을 살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삶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죽이는 쪽을 죽이려고 시도하는 쪽을 시도’한다. 그렇지만 죽이지 못했고 노예폐지론자는 가너의 사건을 크게 문제 삼았다.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토니 모리슨을 괴롭힌다. ‘제 자식을 자신의 일부라고 할 수 없는 노예 여성, 너무 사랑해서 죽일 수 있는 여성, 너무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이 더렵혀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의 용기, 자책, 자기 처벌, 자기 파괴를 상상할 수 있는가?’(207쪽)
한편으로 <빌러비드>는 한 신문 스크랩과 함께 개략적 질문에서 시작되기도 했다. 그 질문의 핵심에는 여성 운동이 추구하고 있는 자유-동일 권리, 접근권, 임금 등 이외에- 어떤 자유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이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을 무렵인 1980년대 초,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가 여성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이었다. 많은 여성은 그 통제권이 아이를 낳을 선택과 이어진다고 확신했다. 엄마가 되지 않는 것이 결함이 아니며, 엄마가 되지 않겠다는 선택이 자유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시기이다. 여성 운동의 또 다른 측면은 여성이 여성을 지지하는 것을 적극 장려했다. 여성의 관계를 남성과의 관계에 종속시키지 말자고 했으며 여성 친구와 보내는 시간은 노는 시간이 아니라 제대로 보내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토니 모리슨은 ‘여성의 중요한 우정’을 <술라>에서 다룬다. 그러나 첫 번째 문제, 즉 ‘내 몸의 주인이 될 자유, 자유의 표식으로서 아이 없는 삶’은 토니 모리슨을 깊이 사로잡았고, 여성 노예의 관점(여기서도 역사적 기록의 침묵, 논쟁에서 소수 집단이 주변화된 상황이 그의 주의를 끌고 탐구의 대상이 됨),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 아닌 아이를 갖는 것, 어머니로 불리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자유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를 낳도록 요구당하는 것이 아니라(젠더, 노예 신분 때문에, 수익을 얻기 위해) 아이를 책임지기로 선택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번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부모가 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미국 노예제도 아래에서 이런 주장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법이고 반정부적이었다. 또한 용인되지 않는 여성의 독립선언이었고 자유였다. 만일 이런 권리 주장이 영아 살해로 이어진다면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가져올 수 있었고 실제로 그랬’다(101쪽). 이렇게 역사적 기록의 빈틈에서 토니 모리슨의 상상력이 더해져 <빌러비드>가 탄생한다.
그뿐만 아니다. 그의 첫 소설 ‘<가장 푸른 눈>은 1963년 한 인구집단이(토니 모리슨이 속한) 역사책과 문학에서 도매금으로 무시당하고 있다는 데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창작된다. 토니 모리슨이 보기에 연민의 감정으로든 멸시의 감정으로든 예술적 검토 대상이 된 모든 인물 가운데 특히 부재가 두드러진 이들은 취약한 흑인 소녀였다. 그들은 문학 작품에 등장해도 그저 웃음거리, 동정의 대상, 이해의 노력이 결여된 동정의 대상으로 그려졌다. <가장 푸른 눈>에서는 인종주의를 개인적 사회적 정신이상의 원인, 후과 그리고 발현으로 보았고 <술라>에서는 인종적 맥락을 넣었을 때 놀라운 의미를 획득했던 젠더 문화, 정체성의 날조에 몰두했으며, <솔로몬의 노래>에서는 공동체와 개별성에 대한 로망에 대한 인종이 끼치는 영향을, <빌러비드>에서는 인종의 안경을 끼고 바라본 육체와 정신, 주체와 객체, 과거와 현재의 대립이 무너지고 매끄럽게 연결될 때 역사 서술의 가능성에 관심을 두었다. <재즈>에서는 인종적 가옥에 대한 대답으로 현대성을 발견하고자 했다.’(150쪽)
나는 내가 누구이고 나의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아는 능력이 부족 내에서 혹은 가족, 국가, 인종, 성별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밀접하게 엮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명확성은 자아의 평가를 위해 필수적이고 다른 부족이나 문화와의 어떤 생산적 교류를 위해 필수적이다. (.....) 쓰고자 하는 갈망 심지어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은 흑인으로서 나의 자각, 흑인과 하는 경험, 심지어 흑인을 향한 경외심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질에서 온다. (45쪽)
이렇듯 <보이지 않는 잉크>에서 토니 모리슨은 자신의 문학 세계를 설명하고자 아주 자세하게 자기만의 창작 노트를 공개한다. 앞서 말했듯 그의 문학을 아끼고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으로 인해 그 세계를 한결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글을 쓰려는 그의 모든 시도가 결국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자기 존중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토니 모리슨의 석사 학위 논문은 <버지니아 울프와 윌리엄 포크너가 다룬 소외된 이들 Virginia Woolf's and William Faulkner's treatment of the alienated>이다. 이 책에서도 그는 포크너로부터 받은 감동을 언급한다. 토니 모리슨이 포크너에게 깊이 감명한 이유는 ‘이 나라에 대해 그리고 역사책에 나오지 않지만 예술을 통해 드러난 이 나라의 과거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니 모리슨은 ‘때로 역사가 거부하는 일을 예술과 소설이 해낼 수 있다. 역사는 과거를 인간 중심으로 볼 수 있지만 아주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에서 종종 그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몇몇 작가는 한 시대의 탐사를 통해 그 시대를 분명히 드러냈고 포크너는 그 탐사의 절정에 있었다.’(203쪽) 말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제 저 포크너가 들어갈 자리에 토니 모리슨의 이름을 넣어도 무방할 것 같다. 모리슨은 끊임없이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 기억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이어 붙여 공통의 흑인 기억을 만들고자 애써왔다. 그 자신이 역사책에는 기록되지 않은, “보이지 않는 잉크”를 알아본 독자였으며 행간에, 그리고 안팎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발굴해 상상력으로, 문학으로 재창조한 사람이다. 독자에게 “보이지 않는 잉크”에 민감하기를 촉구하는 토니 모리슨 자신이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잉크에 민감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이 진솔한 기록들은 어떤 화려한 수사로 가득한 말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