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딘 고디머의 《거짓의 날들》을 읽고 완전 반해서 집에 있는 고디머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고 있다. 주로 단편들. 그이의 단편이 실린 책들도 대부분 절판 상태이다. 단편 <최고의 사파리 The Ultimate Safari>는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에 실려 있다. 고디머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왕은철 번역가가 ‘<최고의 사파리>를 중심으로 본 타자 재현의 문제-네이딘 고디머에 대한 애도를 겸하며’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다는 것을 보고, 이 작품을 좀 더 주의 깊게 읽기 시작했다.

《거짓의 날들》은 문체가 유려하고 서정적이었던 데 비해 <최고의 사파리>는 투박한 단문으로 이루어져 있어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조금 놀랐다. 그러나 곧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작품 화자는 아프리카의 어린 소녀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날 밤 어머니는 가게에 간다며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모르겠다. 아버지도 어느 날 집을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전쟁터에 나간 것이었다. 우리도 참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직 어렸기 때문에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같은 신세였다. 우리에겐 총이 없었다. 정부가 늘 노상강도라 부르던 아버지의 적군은 사방을 마음대로 다녔으며 우리는 개에게 쫓기는 닭처럼 도망 다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어머니는 식용유를 구할 수 있다는 말에 가게에 갔다. 식용유를 맛본 지 너무나 오래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행복해했다.’

시작 부분을 이렇게 길게 소개하는 까닭은 이 길지 않은 문장에  작품의 주요 상황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이다. 전쟁터에 나가 부재하는 아버지, 식용유조차 쉽게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식용유 한 병을 구하려고 가게에 간 뒤 돌아올 줄 모르는 엄마. 정부가 늘 노상강도라고 부르는 약탈꾼들의 존재, 남겨진 아이들과 할머니, 할아버지…….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다. 소녀의 엄마는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노상강도들이 세 번이나 마을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이제 마을에는 남은 것이 없다. 강도들이 불을 질러 소녀네 집 초가지붕은 무너져 내렸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지붕이 없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 그 약탈꾼들은 소녀의 집에 오지 않았다. 겁에 잔뜩 질려 아이들은 밤을 지새운다. 소녀의 오빠는 부러진 나무 조각을 한 손에 쥔 채로 다 타 버린 집 기둥에서 밤을 지새운다. 노상강도에게 들켰을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학교도, 교회도 모두 파괴되었으므로 소녀와 남동생, 그리고 오빠는 시간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는 채 어머니를 줄곧 기다린다. 그러나 끝내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고, 아이들만 남았다는 소리를 듣고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와서 손주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도 한 달 가까이 엄마를 기다리지만 엄마는 돌아올 줄 모른다. 할머니의 집도 사정은 형편없어서 굶주림이 날마다 이어진다. 할아버지에겐 전에 소와 양이 있었지만 그 또한 노상강도들이 모두 빼앗아갔다.

굶주림 속에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자 할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아이들은 떠나게 되어 기쁘다. ‘어머니가 있지 않은 곳’, ‘항상 배가 고픈 곳에서’ ‘노상강도도 없고 음식이 있는 곳’으로 아이들은 떠나고 싶었다. 집을 떠나 할머니가 목표로 삼은 ‘그곳’에 가려면 크루거 공원을 지나야만 한다. 아이들은 크루거 공원을 잘 알았다. ‘동물들만 사는 거대한 왕국, 코끼리, 사자, 자칼, 하이에나 하마, 악어, 모든 동물이 사는 곳’이다. 마을에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런 동물들이 이었는데, 노상강도들이 코끼리를 잡아 상아를 팔고, 사슴을 다 먹어 치웠다. 소녀는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 마을은 사람이 사는 곳이었지 동물의 왕국은 아니’라고. 크루거 공원을 잘 아는 이를 안내자 삼아 소녀의 가족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떠난다. 크루거 공원에서는 울타리를 돌아 더 먼 길로 돌아가야 한다. 울타리를 손으로 만지는 순간 살이 타들어서 죽기 때문이다. 말이 ‘공원’이지, 소녀가 묘사하는 내용을 유추해 보면 크루거 공원은 ‘사파리Safari’임을 알 수 있다.

공원에서는 모닥불을 피울 수가 없다. 연기 때문에 그들이 공원에 있다는 사실이 탄로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관과 공원 관리인이 이들의 존재를 알면 그들을 돌려보낼 것이 틀림없다. 때문에 그들은 ‘동물들 사이에서 동물처럼’ 움직인다. 소녀는 이곳에서 코끼리, 수사슴, 멧돼지 등을 맞닥뜨린다. 동물들의 뒤를 쫓다가 물웅덩이를 발견하면, 동물들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물을 마신다. 소녀가 볼 때마다 동물들은 풀이나 나무나 뿌리를 먹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인간이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할머니가 가져온 곡물 가루도 이미 다 떨어졌고, 소녀는 개코원숭이들이 먹는 음식이나 겨우 먹을 수 있다. 인간이면서도 이곳에서는 인간이 아닌 존재와 마찬가지인 그들은 그렇다고 ‘동물처럼 행동하기’도 어렵다. 소녀는 날씨가 아주 더운 낮에는 누워서 잠든 사자들을 본다. 자신도 사자처럼 눕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누워 잠들면 사자에게 먹힐지도 모른다. 남동생은 점점 더 야위어 가고, 오빠는 어느새 말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여행은 지속되어 그들은 낮에도 밤에도 걷는다. 야영지에서 백인들이 요리하며 피우는 모닥불을 본다. 연기 냄새와 고기 냄새에 이끌려 일행 중 한 여인이 그들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자고 한다. 여인은 ‘쓰레기통에 버린 음식을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말하며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안내자는 크루거 공원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를 도우면 그들은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우리를 봐도 못 본 척할 수밖에 없다고. ‘그들이 본 건 단지 동물뿐’이라고. 크루거 공원을 지나는 동안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볼일을 보기 싫었는지 풀숲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일행들은 길을 떠나야 한다고 재촉하고, 할머니와 소녀와 오빠는 할아버지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지만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을 굶겨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결국 일행을 따라 길을 나선다. 할아버지는 어딘가에 남겨둔 채. 아빠와 엄마에 이어 할아버지마저 사라진 것이다.

드디어 소녀 앞에 저 멀리 아주 큰 천막이 보인다. 파랗고 하얀 천막이다. 소녀의 고향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 진료소 수녀의 말에 따르면 아기들을 제외하면 그 수가 200명쯤이다. 각 가족에게는 집 대신 큰 자루나 종이 판지 등 찾을 수 있는 것들로 사방을 막은 작은 구역이 주어진다. 이 공간이 자신의 것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이다. 문도 창문도 지붕도 없지만 이 공간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문도, 창문도 지붕도 없기에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남의 집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일종의 사파리와도 같다. 진료소에서 나눠 준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배급을 받고, 옷을 얻어 입고 소녀와 오빠는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되었지만 남동생은 또래 아이들처럼 놀지 못한다. 할머니는 진료소를 찾아가고, 수녀는 남동생이 충분히 먹지 못해 머리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다. ‘전쟁 때문에,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크루거 공원에서 굶주렸기 때문에 남동생은 종일 할머니 무릎 위에 누워 있거나 할머니한테 기대어 있기를 좋아한다.’

시간은 흐른다. 천막에서 얼마나 오래 생활했는지 소녀는 열한 살이 되었고, 동생은 세 살이 다 되어 간다. 동생은 여전히 몸집은 작지만 머리는 크다. 몸이 건강한 할머니는 일자리를 구했고, 소녀네 가족들은 굶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크루거 공원에서처럼 천막 안 공간도 비좁아 서로 가깝게 누워 있어야 할 만큼의 자리밖에 없다. 어느 날 백인들이 천막에 사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으러 왔다. 그들은 영화를 만든다고 한다. 한 백인 여자가 소녀네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가 할머니에게 묻는다. 백인 여자의 말을 알아들은 어떤 사람이 그 말을 통역해서 되물어 준다.



언제부터 이렇게 살고 있나요?
이곳을 말하는 겁니까? 할머니가 말했다. 이 천막에서 이 년하고 한 달 살았어요.
앞으로 바라는 것 있어요?
아무것도요. 여기에 있잖아요.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요?
아이들이 교육을 받아 좋은 직장을 구하고 돈을 벌기를 바랍니다.
고국으로, 모잠비크로 돌아가고 싶나요?
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이곳에 머물지 못할 텐데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할머니는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할머니가 그 백인 여자의 질문에 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백인 여자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더니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최고의 사파리>,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 389쪽)


이 짧은 단편에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이 아닐까. 이 년 넘도록 천막 안에서 지내는 소녀의 가족. 남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자루나 종이 판지 등으로 사방을 막아도, 문도, 창문도, 지붕도 없기에 누구라도 마음먹으면 집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공간. 그 공간을 백인이 ‘영화’를 찍는다면서 ‘비집고’ 들어와 자기들의 언어로 질문을 퍼붓는다. 그러고는 소녀네 가족을 향해 ‘미소’ 짓는다. 야생동물의 생활 터전에 마음대로 들어가 그들의 생활을 염탐하고는 제멋대로 그 삶을 낭만화해 미소 짓거나 즐거워하는 사파리 관광객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크루거 공원을 지날 때 백인들의 음식 냄새에 이끌려 도움을 청하자고 했던 여인에게 안내자가 했던 말도 그런 의미에서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보여도 못 본 척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그들. 크루거 공원에서 그들은 동물처럼 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동물보다 그 존재가 뚜렷하게 인식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동물은 타인의 눈에 보이는 존재여도, 이들은 결코 보여서는 안 된다. 할머니는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집도 없다고 말하지만 소녀는 할머니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전쟁이 끝나고 노상강도도 없어지면 집에서 엄마가, 그리고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렇기에 다시 크루거 공원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는다. 소녀의 이 소망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사파리Safari'는 잘 알다시피 야생 동물을 놓아기르는 자연공원에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차 안에서 구경하는 일을 뜻한다. 원래는 스와힐리어의 ‘여행’이라는 뜻으로, 사냥을 하기 위해 사냥감을 찾아 원정하는 일을 이르던 말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이 작품 <최고의 사파리 The Ultimate Safari>라는 제목은 작품 내용과 어우러져 무척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부가 늘 ‘노상강도’라 부르던 아버지의 적군, 코끼리를 잡아 상아를 팔고, 사슴을 몽땅 먹어 치운, ‘노상강도’들은 그저 단순히 아프리카의 또 다른 종족들을 말하는 것일까? 만지는 순간 살이 타들어서 죽는 울타리를 크루거 공원에 친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이 아프리카 땅에서 사냥은 누가 했으며 진짜 사냥감은 누구였을까. 한쪽에서는 그렇게 집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난민들에게 천막을 제공해주는 하얀 얼굴의 백인들이 있지만,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난민의 삶을 영화로 만들겠다며 다정히 다가와 카메라를 들이대며 미소 짓는 백인들도 있다. 차 안에 편히 앉아 유리창 너머로 사파리를 돌아보는 관광객이나, 카메라 렌즈를 통해 난민의 삶을 담고 전시하는 백인이나 모두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삶을 ‘사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아프리카에서 긴 ‘여행’을 할 것이 분명한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아 보인다.

네이딘 고디머의 시선과 통찰력은 이렇게 짧은 작품에서도 빛이 난다. 그렇다고 고디머의 작품이 아프리카의 현실을 고발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다른 단편 <발견>(《견딜 수 없는, 미쳐 버리고 싶은》)에서는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해, 여자라면 환멸을 느끼게 된 남자가 홀로 바닷가 휴양지로 떠나 겪는 일을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이런 작품들을 읽노라니 당연히 네이딘 고디머의 작품을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절판된 책들도, 그리고 아직 한 번도 번역되지 않은 그 많은 작품들도 속히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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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3-29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 읽었어요. 옛날 옛적에요. ㅎㅎㅎ 그래서 기억 안 나요. 암튼, 저도 예전 제 글을 보면서 제가 나딘 고디머를 잠자냥님처럼 엄청 좋아햤더라고요. ㅋㅋ 암튼 <보호주의자> 주제넘게 추천합니닷! 읽으시고 멋진 글 써주세요. (근데 정말 우리 취향 비슷해요!!😅)

잠자냥 2021-03-29 21:45   좋아요 0 | URL
<보호주의자>는 현재 절판이라 구할 수가 없네요. 나중에 읽게 되면 꼭 리뷰 남기겠습니다.

다락방 2021-03-30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를 읽었다는 기억은 나거든요. 그래서 혹시 뭔가 써놓은게 있나 싶어 검색해봤더니, 2014년에 밑줄긋기 단 한 건을 했더라고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문장이 나딘 고디머의 것은 아닌듯 합니다.

잠자냥 님의 글로만 봐도 참 좋은 단편일 것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기억은 전혀 없을까요. 대체 책은 왜 읽는 걸까요... 하아-

잠자냥 2021-03-30 10:06   좋아요 0 | URL
단편은 금방 잊히긴 하죠. 제가 이 책 링크 하느라 옛 리뷰들 좀 찾아보니 다락방 님은 페이퍼를 몇 개 쓰셨더라고요. 그때 이 책에 실린 <아들의 죽음>을 인상 깊게 읽으셨나 봅니다. 물론 지금은 기억 못하시겠지만...*힐끔*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3-30 12:06   좋아요 0 | URL
페이퍼도 썼어요, 제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혀, 기억이 안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아. 독서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021-04-12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2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케이 2021-04-21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밑의 [견딜 수 없는 미쳐버리고 싶은] 저 책 대학생 시절 밀란 쿤데라 단편 때문에 빌려 읽었던 책이네요. 원래 쿤데라 단편 제목이 [히치하이킹 게임] 인데 왜 이상한 제목을 갖다 붙였을까 의문스러웠던 기억만 나고 쿤데라 소설 외 다른 소설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네요..십수년전 읽었던 책 표지를 보니 기분이 묘해요.

잠자냥 2021-04-21 09:45   좋아요 1 | URL
ㅎㅎㅎ <견딜 수 없는....> 이 책 제목 참 이상하죠. 단편 모음집의 단점이라면, 몇 년 지나면 그 안에 실린 단편 대부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ㅎㅎ 하긴 요즘 저는 장편도 좀만 지나면 아주 강렬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기억이 희미해집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