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소설은 어릴 때 조금 읽고 성인이 된 이후로는 많이 읽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미스터리, 특히 누아르 영화는 좋아해서 종종 찾아보는 편인데, 그런 영화나 문학 작품 속 여성 이미지는 대개 팜파탈로 그려진다. 그들은 대부분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요부형 여자들로 거의 모든 범죄의 원흉이다. 한때는 레이먼드 챈들러나 대실 해밋의 작품도 즐겨 읽었는데, 거기 나오는 여자들도 대부분 팜파탈로 남자들을 범죄로 몰아간다. 이런 작품들을 즐겨 읽고, 보던 시절에는 그저 재미에 방점을 두고 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럼에도 마음이 조금 불편해진다. 에, 또 여자 때문이야? 왜 범죄는 자기들이 저지르고 여자 탓이야? 못마땅한 마음이 든다.

사라 파레츠키는 그런 못마땅한 마음을 바탕으로 범죄소설에서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창조한다. 여성 사립탐정 ‘V. I. 워쇼스키’가 바로 그 인물이다. 파레츠키는 미스터리 소설 팬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십대 때부터 미스터리를 많이 읽고 자랐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친구가 레이먼드 챈들러를 알려준다. 빅슬립, 기나긴 이별 등 파레츠키는 챈들러를 통해 누아르 소설의 주요 요소를 접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이런 작품 속에서 여성은 엉망진창으로 꼬여 가는 모든 일의 원흉이었고, 성적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데도 능수능란하다.빅슬립의 ‘카멘 스턴우드’는 이런 팜파탈의 전형으로, 이 작품에서 일어난 살인 대부분은 카멘의 성적 매력 때문에 이성의 끈을 놓쳐버린 남자들이 저지른 것이다. 챈들러를 처음 접한 그 겨울, 파레츠키는 많은 시간을 ‘카멘’과 그 무렵 임신 중절 수술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겼던 룸메이트를 생각하면서 보낸다. 성적 능력을 이용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이는 이브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왜 여자는 항상 남자를 유혹하고 파멸로 몰아가는 존재로 그려지는가? 결혼하거나, 하지 않았거나 태아를 낙태하는 여성은 왜 죽어 마땅한가? 이런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다 결국 ‘남자들이 지어낸 이 모든 이야기는 나를 규정하고, 종잇장에 가두고, 삶의 변두리 한구석에 몰아넣으려 설계된 것’임을 깨닫는다.


그해 겨울 수많은 책과 대개의 영화와 셀 수 없는 광고가, 또 역사가, 가족이, 심지어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조차 넌지시, 내가 오로지 몸뚱이로만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거듭거듭 들려주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내 몸뚱이를 이용해 착한 남자애들이 나쁜 짓들을 하게끔 조종하는 게 나의 천성이라는 이야기. 만약 남자를 꾀는 데 성공한다면, 몸뚱이로만 존재한다는 죄를 마땅히 처벌하는 의미로 임신을 하게 되리라는 이야기. 만약 임심을 중단하기로 결정한다면, 내게 내려진 응보를 회피하는 셈이니 죽어야만 한다는 이야기. 그 시절 영화와 소설에서는 젊은 여자가 낙태를 했다면 필시 죽어야만 했다. (《침묵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 105~106쪽)


파레츠키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여성의 도덕성은 섹슈얼리티로 결정된다는 점을 여실히 깨닫게 되고, 문학과 사회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지배적인 관점을 뒤엎어 버리는 여성 주인공을 창조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는 첫 소설인 《제한 보상》을 쓰면서 집안의 천사나 괴물이 아니라 한 사람인 여성을 만들어 내고자 심혈을 기울인다. 그가 처음부터 고민하던 탐정 캐릭터의 한 측면은 ‘그녀의 섹슈얼리티와 소설 속에서 섹스가 차지하는 기능’으로, 파레츠키는 여성과 어린이를 고문하는 연쇄 살인범이나 여성과 어린이를 먹잇감으로 노리는 강간범이 소설에서 매우 자극적인 역할을 하며 아주 큰 수입을 불러오는 상황에서도 섹스를 이용해 등장인물이나 독자를 착취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런 배경 아래 탄생한 ‘V. I. 워쇼스키’는 성적인 존재인 동시에 도덕적인 사람이다. 파레츠키가 보기에 현대 미스터리물에서 직업이 있는 비혼 여성은 부도덕한 성욕을 지녔으며 결국 죽어야만 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파레츠키가 창조한 인물을 달랐다. V. I.는 때때로 감정에 휩쓸리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V. I.에게는 연인들이 생기지만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데 그녀의 섹슈얼리티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V. I.가 완전무결한 사람은 아니다. 남자들이 행동하고 움직이고 결정을 내리고 사랑에 빠지고 성을 경험하고 심지어 잘못 생각할 자유가 있듯 V. I. 역시 똑같은 자유를 가진 성인일 뿐이다. V. I.는 허세 부리지 않는다. 그녀는 세상을 구하려고 들지 않는다. 자기 힘으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싼 작은 환경에서 상처를 붕대로 싸매고, 되도록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려 노력한다. 이 얼마나 멋진 캐릭터인가?

파레츠키가 스스로 페미니스트로 인식하고, 그런 캐릭터를 창조하기까지는 집안 분위기가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좋은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로. 파레츠키는 부모님과 오빠 한 명, 남동생 셋으로 이뤄진 가족에서 유일한 딸로 자랐다. 이런 분위기는 단번에 파레츠키의 집안에서의 위치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자신이 여러모로 풍요로웠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회상하지만 ‘심각한 가정 폭력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침묵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을 읽는 내내 이 ‘심각한 가정 폭력’이란 주로 딸이었던 파레츠키에게 자행된 게 아닌가 의심이 드는데, 특히 다음과 같은 사례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폭력이다. 파레츠키의 부모는 둘 다 고등 교육을 받았고, 박학다식했다. 연구과학자였던 파레츠키의 아버지는 독일어와 이디시어는 물론 그리스어도 읽을 줄 알았고, 어머니는 소설과 역사 분야를 폭넓고 깊게 읽었다고 한다. 교육과 지식에 대한 애착이 강해 돈을 빌려서까지 집에서 멀고 등록금이 비싼 학교에 형제들을 보냈다. 그런데! 그런데! 딸인 파레츠키에게는 대학 교육을 받고 싶다면 스스로 학비를 충당해야 한다고, 게다가 캔자스를 떠나는 건 전혀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파레츠키는 국비 장학생이었지만 이런 부모에게 하도 세뇌를 당해서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게 된 탓에 두 가지 제약을 다 순순히 받아들인다. 폭력은 여기서만 그치지 않는다. 1968년 파레츠키가 시카고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곳이 일류 학교인 반면, 네 지성은 이류이니, 만일 실패하더라도 놀라지 말라.” 부모라는 인간이 딸에게 어떻게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교육에 집착한 유대인 부모덕에 아들들은 다들 잘난 인물이 된 것 같은데, 그 아들들보다 더 유명한 작가가 된 딸에게는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아직도 네 지성은 이류이니 어쩌고 할까?

파레츠키의 어머니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가족 중 유일한 여자아이인 탓에 아홉 살 때부터 파레츠키는 강제로 유년기를 포기하고 어린 남동생들의 보호자가 되어야만 했다. 게다가 파레츠키가 살던 로렌스 시내에서 그들 가족은 몇 안 되는 유대인 가족 중 하나였다. 그들 가족이 이사 오면서 유대인 남자들 머릿수가 열 명을 채웠기에 공동체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할 수 있었는데 이런 ‘다름’은 파레츠키를 더 외롭게 만든다. 그들은 마을에서 ‘기린’과 같다. ‘호기심 어린 시선을 쏠리게 만드는 별난 존재’- 성차별에 인종 차별까지 고스란히 받고 자란 파레츠키는 그런 부분에 민감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버지로부터 받은 심리적 폭력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아버지는 파레츠키의 인생 초반 스무 해 동안 그의 거의 모든 면을 좌지우지한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심지어 어떤 강의를 들어야 하는지까지 결정한다. 파레츠키는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종류의 심리 치료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70년대 여성 운동으로부터의 지지를 받고나서야 비로소 독립적인 존재로 목소리를 얻었다고 회고한다.


1971년 겨울에 본격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되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무력함-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또한 가부장적인 역사학과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무력감-과 사회가 모든 여성에게 골고루 선사해 준 무력감에 분노하게 되었다. 그 겨울 나는 내 존재가 섹슈얼리티로 규정되는 것을 거부했고, 정부, 교회, 그 밖에도 남성 권력의 여러 화신들이 내 몸을 통제하는 것을 거부했다. (108쪽)


파레츠키는 자신의 작품이 결국 ‘목소리와 힘’과 관련한 문제임을, 목소리나 힘 둘 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삶이라는 문제에서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것을 끊임없이 상기한다. 그는 발언권이 없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 알고 있었고, 목소리를 낼 수 없어 무력한 이들의 고통을 인지하고 공감할 줄 알았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해 주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시카고 탐정 ‘V. I. 워쇼스키’는 도시의 인종 분열만이 아니라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분열까지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함하는 캐릭터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집안일에 대해서는 될 대로 되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아마도 ‘집안의 천사’는 어린 시절 파레츠키가 작가로서의 소명을 품지 못하게, 아니, 사실상 어떤 소명도 품지 못하게 했고 여전히 그의 머리 주위로 날아와서는 ‘이기적으로 굴지 말라고 가정이나, 공익을 위한 의무에 투신하라고, 《작은 아씨들》의 조 마치와 마찬가지로 집필 활동은 나중에 해도 된다’고 파레츠키를 끊임없이 괴롭혔기 때문에 자신이 창조하는 여성인물만큼은 ‘집안의 천사’가 되기를 거부한 것이리라.

《우아한 크리스마스의 죽이는 미스터리》에 실린 파레츠키의 단편 <세 점박이 포>에서도 ‘V. I. 워쇼스키’를 만날 수 있다. 짧은 이야기라 캐릭터의 모든 면면을 살펴볼 수 없는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 이야기 속 V. I.는 아침부터 달리며 몸을 단련한다. 몸매를 가꾸는 것이 아니라, 운동에 방점을 두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하게 반응해, 이웃이 물에 빠져서 거의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물에 뛰어 들어가 그를 살리려고 갖은 애를 쓴다. 손놓고 ‘어머나, 어떡해 어떡해’ 외치고만 있지 않다. 그런 데다가 주인을 잃은 이웃의 개를 돌봐주는 따뜻한 면도 있다. 쓸데없이 외모를 치장하는 데 공을 들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결국 죄를 뒤집어 쓴 사람의 억울함을 생각해 끝까지 파고들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야 만다. 챈들러가 창조한 ‘필립 말로’, 대실 해밋의 ‘샘 스페이드’도 나름 개성 넘치고 멋있지만 파레츠키의 ‘V. I. 워쇼스키’도 그들 못지않게 개성적이고 강인하며 매력 넘치는 캐릭터이다. 국내에서는 현재 사라 파레츠키의 많은 책이 절판되어서 V. I. 워쇼스키를 더 생생히 만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침묵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글쓰기에 관한 책이 아니라, 가부장과 극도로 성차별적인 집안에서 자라나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일에 늘 억압받고 살아왔던 한 여성이 침묵에서 벗어나 발언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기나긴 길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목격한 바가 어떻게 자기의 말을 빚어냈는지를 되짚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자신이 하나의 캐릭터를 창조해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이끌어 내려는 노력을 어떻게 기울였는지를 그려나간다. 때문에 ‘침묵은 동의를 뜻하지 않는다. 침묵은 죽음을 뜻한다.’(185쪽)는 말도, ‘우리를 침묵시키고, 우리의 목소리와 소중한 자유를 빼앗으려는 세력에 맞서, 나의 말, 사포의 말, 또한 우리 헌법의 말, 한낱 숨결에 불과한 이 모든 말이 그저 묵묵히 버텨 내는 데 그치지 않고 끝내 승리를 거두는 것이 나의 유일한 희망’(218쪽)이라는 말도 아주 인상 깊게 남는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1-04-21 1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나라, 어느 시대가 안 그랬겠습니까마는 특히 유대인의 ‘여성 혐오‘는 강력했던 거 같아요. 그런 아버지 밑에서도 이런 성과를 이뤄낸 작가가 정말 멋지고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침묵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도 읽어야겠지만, 그 세계를 파헤치기 위해서 <빅 슬립>도 읽어야겠어요.
이 좋은 리뷰에 대한 바른 이해 맞겠지요? ㅎㅎㅎㅎㅎ

잠자냥 2021-04-21 10:20   좋아요 1 | URL
아 증말, 파레츠키 아버지가 ˝네 지성은 이류˝ 운운하는 구절 읽을 때 제가 그 옆에 있었으면 그 입을 찰싹 때려주고 싶었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라고요. 휴.... 암튼 그런 집안에서 자기가 틈틈이 번 돈에 장학금 보태서 대학 가고, 결국 자기 목소리를 내는 글을 쓰게 된 작가에게 존경심이 듭니다.

참, 네 맞습니다. 챈들러나 대실 해밋 책을 읽어야 파레츠키가 하드보일드 작품에서 어떤 점을 느꼈을지 알 수 있지요. <빅슬립>, <기나긴 이별>, <몰타의 매>는 게다가 하나같이 재미있습니다.

단발머리 2021-04-21 10:52   좋아요 0 | URL
이거 비밀인대요. 제가 <빅 슬립> 읽었다고 하네요. 이번 설에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둘 다 안 읽은 줄 알았는데 이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 나머지 작품들도 부지런히 따라 읽어볼께요.

제가 체력은 약한데 주먹은 쎕니다. 파레츠키 아버지 제가 어퍼컷 날릴께요!!!

잠자냥 2021-04-21 10:3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이상하다 싶었어요. 제가 단발머리 님 서재에서 챈들러 이야기 읽은 것 같은데.... 으음. 그랬답니다. ㅋㅋㅋ 네네 비밀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04-21 10:55   좋아요 1 | URL
실은...... 저도 빅 슬립 단발머리님 서재에서 보았는데..... 하고 댓글 달려다가 조용히 있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어젯밤에 읽은 구절들도 다 없어져요 그냥 증발하는 느낌 같아요;;;;; 뭐 다시 읽으면 되니까~ ^^

잠자냥 2021-04-21 11:34   좋아요 0 | URL
사실 원래 책은 잊으라고 읽는 겁니다. (응?)

수이 2021-04-21 11:36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 너무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맹렬하게 읽고 격렬하게 잊겠습니다.

단발머리 2021-04-21 11:44   좋아요 1 | URL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읽었어요’의 목격담에 한없이 겸손해지는 아침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오늘 읽을거에요, 무언가를!! 격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