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신의 <생각이 나서>를 낭독하다가, 에이즈로 요절한 미국 사진 작가 Peter Hujar의 사진 제목이 나와,

녹음을 잠시 멈추고 바로 검색 들어갔다. '그로테스크하다'는 표현을 썼길래 하도 궁금해서...

 

 

 

 

Candy Darling은 트랜스젠더 여성이었던 모양이다.

죽음을 앞두고 짙은 눈화장에 진한 립스틱을 바르고 새하얀 시트에 싸여 텅빈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얼굴.

그 뒤로는 하얀 국화, 그 왼쪽 앞으로는 병에 무심히 꽂혀있는 한 다발 야생화. 그리고 그녀 앞에 헌사된 (마른) 꽃 한 송이.

흑백의 강렬함에 절묘한 구도!!!   캔디가 응시하는 곳은 죽음 저 너머의 곳일까. 아무곳도 아닌 그 어디일까.

 

우리영화 '헬로우 고스트'에는 호스피스 병동이 나온다.

며칠 전 우연히 티비채널을 돌리다 이 영화가 나오는 걸 잠시 보다가

몇 해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본 기억이 새록새록.

호스피스 병동은 상대적으로 명확해진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가 모여있고 정말이지 매일 죽음이 있고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말이 그저 관념이 아니라 일상인 곳이겠다 싶었다.

호스피스 병동은 가보지 못했지만 올봄 언젠가 노인요양원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엔 50대에서 90대까지 병든 노인들이 계셨고 부지런히 움직이며 노인들을 돌봐주는 요양사들이 일하고 있었다.

각 병실엔 6-8명 정도의 침상이 있고 화사한 이불 아래 거동이 힘든 노인들이 천장을 그저 보고 누워 있거나

모로 누워있거나 요양사의 도움으로 물리치료실로 이동하기 위해 휠체어로 옮겨 앉고 있거나

(전적으로 요양사에게) 용변처리를 도움 받고 있었다. 각 병실의 문앞에는 명패처럼 이름표와 나이가 붙어있어서

침상의 그것에 맞춰 남녀 노인들을 눈으로 찾아보았다. 뭐라 말하기 쉽지 않은 게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나는 요양사 한 분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좀 들었고, 순전한 봉사는 아니어도

이런 일에 자신의 몸과 시간과 마음을 나누는 그분들이(대개 4-50대 여성) 달리 보였다.

한 분 요양사가 4-6명 정도의 노인을 돌보고 있었는데,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까 단련되어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뭐든 자발적으로 즐겁게 하는 일이면 몸은 조금 힘들다해도 마음은 가벼운 거지.

바깥 햇살이 그분들 표정만큼이나 밝은 날이었다. 

 

 

 

 

 황경신의 <생각이 나서> 중, 99장 "죽음 또는 삶의 기록"에는

죽음의 사진, 그러니까 죽기 직전과 죽은 직후의 얼굴 사진이 실려있다.

독일의 한 사진작가와 저널리스트가 호스피스 병원을 찾아가

죽음을 앞둔 스물세 명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 삶과 죽음의 기록을 남긴 것.

이 책에는 어느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담은 사진과 6세 남아의 사진을 대조적으로 실어놓았다.

 

사람은 눈을 뜨고 있는 모습과 감고 있는 모습이 참 다르다.

눈동자에 담긴 빛과 어둠, 눈가의 주름, 눈언저리 표정, 눈썹의 모양까지 다르다.

물론 눈을 감으면 눈동자는 덮힌다. 고요히, 평화롭게.

그리고 눈을 감으면(엄밀히 말해 눈이 감기면) 입모양도 달라진다.

눈 아래 그림자 모양까지 달라보인다.

 

 

 

황경신은 엉뚱하게도, "나도 죽은 다음에 누가 사진을 찍어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주위 반응이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니, "됐어. 셀카로 찍을래. 죽기 직전이라도, 라고 말했다네. ^^

 

이 장의 마지막 줄 문장,

 

죽음도 삶의 일부고, 삶도 죽음의 일부다. 삶을 나눠 가진 우리는 서로의 일부다. (1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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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17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도 삶의 일부다...
아 졸려서 깊게 생각을 못하겠어요.
으윽, 그래도 문장은 참 좋다. 으윽.
프레이야님 안 졸려요? 저는 이제 자야겠어요.
안녕히 잠자리에 드셔요 ^___^

프레이야 2012-05-17 23:51   좋아요 0 | URL
벌써 그런 생각 깊게 하실 필요 있을까요 ㅎㅎ
나중에 나이 더더 먹어가면 안 하려고해도 자꾸 하게 될 걸요.
소이진님 저도 졸려서 이제 자려구요.^^ 굿나잇~~~

다락방 2012-05-18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저는 죽음도 싫고 사진 찍는것도 싫은데요, 이 페이퍼에서 황경신의 말을 읽노라니 저도 죽은 다음에 누가 제 사진을 찍는것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약간 무섭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건 괜찮을 것 같아요.

좋은 아침입니다, 프레이야님! (위에 소이진님과는 밤인사를 나누셔서 저는 아침인사로. 흣)

프레이야 2012-05-18 09:5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좋은아침이에요!!!
저도 저 문장 읽을 때 마음속에서 반짝, 누가 제 마지막 눈 감은 순간의 사진을 찍어주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요. 모든 건 내려놓은 평화의 얼굴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요.^^
 

 바쇼의 하이쿠 기행 1,2,3권 중 3권/ 바다출판사

 

1권은 일시품절이라서 2,3권만 사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연락이 없더니 오늘 생각이 문득 나서 찾아보았다. 1권이 착하게도 있네.

그런데 왜 연락 안 해준거지? 알라딘? ^^ 너도 나처럼 깜박하는구나^^

1권 장바구니로~

 

 

 

 

 

 

 

 

첫 문장

백 개의 뼈와 아홉 개의 구멍을 지닌 나의 이 몸속에 무언가가 있다.

 

 

평생 은둔과 여행으로 살아간 바쇼의 하이쿠 한 자락.

 

여행에 지쳐

숙소 빌릴 시간이여

화사한 등꽃  (48쪽)

 

      

 

요즘 아파트 공원 벤취 위 등꽃이 눈부시다.

꽃은 지면서 연초록 잎들에게 제 자리를 내어준다.

연연해 하지도 않는다.

꽃 진 자리,

그래서 더 애틋하고 살가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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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5-17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머리가 그냥 멍해요.
맑지 못 하고 느끼지 못 하고 오감이 혼미한 느낌이예요.

이 모든 것은, 너는 지쳤어, 이런 의미겠죠? 오늘 하루종일 놀아야겠어요. ^^

프레이야 2012-05-17 22:13   좋아요 0 | URL
마고님, 오늘 하루종일 잘 놀았어요?^^
머리도 생각도 좀 비우고요.
잘 놀고 잘 쉬는 것도 일하고 공부하는 것만큼 중요하겠지요.
저도 잘 못하지만요.ㅠㅠ
 

새 카테고리를 만들었어요.

지금 읽고 있거나 읽었던 책 중,  나누고 싶은 첫 문장을 주세요. 어떤 책이든 좋아요.

간단한 책소개와 사연 등 책뽐뿌질 마구마구 해주시는 거, 고마워 하고 환영합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허용해뒀으니 여기에 페이퍼로든, 댓글이나 먼댓글이든 자유로운 형식으로 나눠주세요.~~~

 

 

그럼 저부터,

 

아흔 살이 되는 날, 나는 풋풋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랑의 밤을 나 자신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처음 읽은 건

2009년 1월 9일이었다.

다시 읽게 된 건 <은교>를 읽고, 아니 보고 나서였다.

이적요, 박범신 그리고 마르케스... 자연스러운 연상작용이었던 것 같다.

 

이런 글귀도...

 

늙는다는 것의 매력 중 하나는 우리를 용도 폐기된 존재로 여기는 젊은 여자 친구들이

도발적인 말과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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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첫문장
    from ♪새벽비가 주룩주룩 얼굴을 적시네~ 2012-05-15 11:45 
    프레이야님 덕분에 정리해봅니다. 최근에 읽은 소설의 첫문장.. 엔더들은 항상 소름끼치는 존재였다. 처음엔 실수로 시작되었다. 강 건너 들판 끝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똥주한테 헌금 얼마나 받아먹으셨어요. 칠 년 전, 나는 동화작가로 떡! 등단을 했다. 읽기 전에, 그야말로 처음 책을 폈을때 읽는 첫문장과이렇게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다시 읽는 첫문장의 느낌이 정말 정말 다릅니다.
  2. 그 소설의 첫문장
    from 유리동물원 2012-05-16 00:56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나를 처음 데리고 갔던 그 새벽을 기억한다.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바람의 그림자>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총살형 집행 대원들 앞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에게 이끌려 얼음 구경을 갔던 먼 옛날 오후를 떠올려야 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레프 톨스토이 &l
  3. 첫 문장을 드립니다
    from 어느 푸른 저녁 2012-05-16 22:04 
    요즘 열광하면서 읽고 있는 책은 이 책이에요. 서문과 목차를 지나 첫 페이지엔 이렇게 써 있지요. 진실은 어떤 신화보다, 미스터리보다, 기적보다 더 마법적이다. 이 책은 정말 읽기 가슴 뛰는 책이에요. 리처드 도킨스가 쓰고 데이브 매킨이 그림을 그렸어요. 신화와, 그 신화보다도 더 마법같은 과학적인 사실을 한 가지씩 얘기해 주지요. 도킨스는 이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얘기해요. ... 세 번째 '시적 마법'은 내가 이 책의 제목에
  4. 봄과 여름 사이
    from 빨간바나나의 서정시대 2012-05-19 02:16 
    올해의 독서계획 중 하나는 세계문학 읽기였다. 이번 달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로 정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책장에 꽂혀 있는 세계문학 중 두 권이 눈에 띄었는데 그 중 한 권이었을 뿐.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문장을 읽는데 뭔가가 툭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형제의 결혼으로 가족이 된 사람이었고 스치듯 두어 번 만났을 뿐이라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들은 바로는 그는 생에 대한 열망이 아주 강한 사람
 
 
blanca 2012-05-15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프레이야님, 이거요! 로맹가리 <새벽의 약속>의 "끝났다." 너무 짧은가요? 그래도 너무 강렬했어요.

프레이야 2012-05-15 22:30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언젠가 기억나요. 그 페이퍼^^
끝났다!!! 너무나 강렬하고 두근대는 문장이에요.
호호~ 고마워요 선물^^

oren 2012-05-17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케스와는 다소 어긋나는 발상일지 몰라도, 아무튼 제가 기대하는(?) '늙는다는 것의 매력 중 하나'를 '책 속의 글을 빌려와' 덧붙여 봅니다.

* * *

노인의 경우에는 쾌락의 쑤석거림 같은 것은 그리 크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아예 바라지도 않는다네.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지. 이미 노쇠기에 소포클레스는 아직도 성생활은 즐기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멋지게 대답했다네.
"이런 맙소사! 거칠고 포악한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처럼, 거기서 빠져나오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는 중이오."
· · · · · ·
노년에, 말하자면 육욕과 야망, 투쟁, 적대감, 그리고 온갖 욕망에 대한 복무 기간이 끝나, 마음이 스스로 만족하는, 이른바 마음이 자기 자신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정말 연구와 학문이라는 양식이 얼마든지 있다면, 한가한 노년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네.

- 키케로, 『노년에 대하여』 中에서

프레이야 2012-05-17 22:32   좋아요 0 | URL
온갖 욕망에 대한 복무 기간이 끝나고 마음과 자신이 하나 되는,,
마르케스 할배와는 욕망에 대한 생각, 그걸 다루는 내용이 극과 극 같이 들리지만
극과 극은 통하듯, 하나로 귀결되는 이야기 같기도 하구요.
늙음에 대한 참 좋은 글 감사합니다.^^
외부에서 바라는 것 없이 자족하는, 내적 충만감의 삶, 그런 게 제대로 오면 좋을텐데요.


마녀고양이 2012-05-17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을 주세요....

언니, 저는 이 문장 자체로도 가슴이 뛰어요, 가장 아름다운 첫 문장인걸요. 시작과 나눔을 주는.

프레이야 2012-05-17 22:34   좋아요 0 | URL
'첫'이라는 말이 대개 설렘을 주지요.
이 문장 뒤로는 마고님이 이어주세요~~ ^^

맥거핀 2012-05-18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의 취지와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지만, 저는 이상하게 힘든(그리고 무시무시한) 첫문장들이 기억에 남네요.^^;

"내가 가진 것은 모두 가지고 간다. 달리 말해, 내 모든 것이 나와 더불어 간다. 내가 가진 것은 모두 가지고 갔다. 사실 내 것은 아니었다."- 헤르타 뮐러 <숨그네>

"아내는 알암이의 돌연스런 가출이 유괴에 의한 실종으로 확실시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악착스럽게 자신을 잘 견뎌 나갔다."- 이청준 <벌레 이야기>

이후에 이어질 힘든 이야기들.

프레이야 2012-05-18 09:53   좋아요 0 | URL
숨그네, 저 문장 정말 무시무시한걸요.^^
"내가 가진 것은 모두 가지고 간다." 역설이겠지요.
벌레이야기,는 저도 읽은 책인데, 저 문장 이후 정말 힘든 이야기가 이어지지요.
영화 '밀양'의 모티프가 된 거라 영화 본 이후 읽었답니다.
<숨그네> 고맙습니다. 전에 패스한 책인데 아무래도 다시 담아요.^^

글샘 2012-05-2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강신주, <김수영을 위하여>의 첫 문장입니다. 이성복 시인 말이라네요. ^^ 멋지죠?
 

 

 

 

 

 

 

 

 

 

2012년 5월 11일 녹음시작. 절반 좀 못 되는 127쪽까지 녹음.

황경신/ 소담출판사

 

 

 

 

월간 PAPER 편집장 황경신의 한뼘노트,  152 True Stories & Innocent Lies.

부산 태생, 연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황경신이 사진 찍고 글을 쓴 <생각이 나서>는

어떤 장에서는 약간 여고생 같은 감수성이 엿보이지만 대체로 스쳐지나기 쉬운 것에서 얻게 되는 통찰이 빛나는,

따뜻한 글과 사진을 담고 있다. 오랜 동안 모아뒀던 소중한 기억의 조각과 소소한 단상을 부담없이 실은 느낌이다.

다음 녹음할 책으로 넘어가기 전 비교적 글의 양이 적고 가벼운 느낌으로 읽을 책을 고른 건데,

152개의 작은 제목에 사진과 단상이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뜨겁고 때로는 냉철하다.

아마도  이루지 못한 열정적인 사랑과 극심한 이별의 고통을 겪었을 작가의 글이

어느 순간 가슴 한복판 진심을 치고 들어온다.

책장 한 장 한 장 모두가 다채로운 색상의 사진이고 편집도 틀에 매어있지 않고 변주가 많아 자유롭다.

 

앞쪽 책날개에 적혀있는 황경신의 머릿말,

변하고 사라질 것들에 너무 무거운 마음을 올려놓지 않으려 한다.

내일이면 변할지도 모를 사랑을 너무 절실하게 전하지 않기로 한다. 아주 오래 생각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이야기는 꼬깃꼬깃 접어서 열리지 않는 서랍에 넣어두기로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치는 걸음을 문득 멈추고 조금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로 가벼운 인사만을 건네기로 한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드러낸 것 같아 부끄러워지고 미안해질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리석도록 깊고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말이다.
생각이 나서. 라는 그 말은

 

152개의 단상 중, 15번째  '천 년 동안'을 읽으며 영화 '건축학 개론'의 기조를 이룬, 건축과 사랑의 연관성이 떠올랐다.

 

한 천 년 버틸 집을 지으려면 한 천 년 사는 나무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은 천 년을 살지 못해도 집은 천 년을 살아야 한다며, 목수들은 천 년 살 나무로 천 년 살 집을 짓는다고 한다.

천 년 살 나무를 자를 때는 나무의 휘어짐을 따른다고 한다.

휘어짐을 무시하고 직선으로 자르면 나무는 천 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고 한다.

누군가를 천 년 동안 사랑하려면 그의 휘어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가 그 사랑 안에서 살아 숨쉴 수 있도록 그의 굴곡을, 그의 비뚤어짐을, 그의 편협함을,

그의 사소한 상처와 분노와 아픔을 이해해야 한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을 향해 휘어졌는가. 나의 휘어짐을 당신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의 휘어짐은 서로를 내치는가, 아니면 받쳐주는가. 우리는 사랑을 지을 수 있는가.

천 년 동안 지속될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당신과 나는.  (p30)

 

 

97세 장수 부부, 60여 년을 함께해온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건강하고 온화하고 다정한 어느 외국인 장수부부에게

인터뷰어가 물었다. 비결이 뭐냐고.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아야 한다." 가 대답이었다.

나의 휘어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상대의 휘어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 

굳이 박완규의 노래가 아니어도, 그게 아니라면 천 년의 사랑이란 건 허울 좋은 유행가 가사일 뿐.

 

 

 

 

 

 다음으로 찜해둔 녹음도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다시 읽을 생각에 설렌다.

올리브의 목소리는 어떻게 내야할까. 조금은 투박하고 무심한 듯 해야할텐데.^^

그외 많은 등장인물들, 읽다가 다시 생의 쓸쓸하고도 충만한 풍경에 잠겨 목이 잠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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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5-11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좋네요. 천 년의 사랑을 하려면 그의 휘어짐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니. 사랑은 환상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차 환상이 부서지면서 완성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환상을 걷어내고 그 사람 그대로를 볼 수 있게 되면서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프레이야님이 녹음하실 <올리브 키터리지>, 저도 듣고 싶은데요? 히히. 특히 두 번째 단편은 어떻게 녹음하실까 몹시 궁금하네요 :)

프레이야 2012-05-11 23:25   좋아요 0 | URL
네, 수다쟁이님^^ 좋은 말씀, 진리네요.
휘어짐을 받아들인다는 것도 그 사람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과 통하는 말이겠지요.
두번째.. '밀물'이요. '밀물'이 가장 마음에 드셨나봐요?^^

순오기 2012-05-11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걸 실천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상대를 바꾸려 하다가 포기하는 게 보통의 부부들 모습이려니 생각하며 살았는데....

프레이야 2012-05-12 00:08   좋아요 0 | URL
우연히 티비에서 봤는데 외국의 어느 장수마을 부부였어요.
의사가 천직이었던 97세 할아버지가 부인을 바라보며 그렇게 간단히 대답하더군요.
언니말씀대로 바꾸려하다가 포기하는 과정에서는 서로 힘들고 상처입고 그렇게 되겠죠.
전쟁이 싫거나 진심으로 들어주고 싶어 바꿔주더라고 일방적으로 거듭되다보면 분노가 쌓이고
결국 언젠가는 터지게 되는 것 같아요. 자신의 본모습, 본래의 성정대로 휘어지면 휘어진대로요.
상대를 바꾸려는 그게 일종의 억압이고 구속인데 말에요.ㅠ
사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사람관계에서 해당되는 금언이다싶었어요. 실천의 문제^^
작은딸도 저더러 며칠 전 그래요. 왜 엄마는 엄마취향을 강요하느냐구요.ㅎㅎ
엄마 눈에는 그게 좋아보여도 자긴 안 그렇다구요. 그때 문득 제가 그만한 때가 생각났어요.
그때 저도 참 제 엄마의 취향이 맘에 안 들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입 닫고 말았어요.ㅋ

가연 2012-05-12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녹음을 하시나요? 저는 목소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했는데, 푸하하하, 억양이 지방억양이 강해서 녹음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하던데, 풋.

위 말은 농담이구,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아야 된다, 라는 말은 서로의 휘어짐을 애초에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막상 오래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또 바꾸려 하지 않아야 함을 전제하니깐.. 그냥 처음부터 많이 사랑해야 오래 사랑한다, 라는 말이 되어버리는구먼요, 풋. 정말 어렵습니다.

프레이야 2012-05-12 09:46   좋아요 0 | URL
가연님, 토요일 좋은아침이에요^^
뭐 어렵게 생각할 것 있나요? 진심이라면 통하게 되어있지요. 진심이나 진실이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일 거에요. 주머니 안 송곳처럼요.^^
전 목소리 별로고 저도 종종 지방억양 튀어나와 식겁해요ㅎㅎ 되돌려 다시 한답니다.
즐거운 봉사에요^^

네꼬 2012-05-13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참, 나는 이런 종류의 책 별로 안 좋아하는데...프레이야님이 이렇게 쓰시면 또 막 귀 막 얇아진단 말이죠. 잉. 근데 저 목소리 좋아요. 낭랑해요. 진짜예요. 언제 한번 녹음해드릴게요. (응?)

프레이야 2012-05-15 10:08   좋아요 0 | URL
히히~ 귀얇고 귀여운 네꼬님 ^^
목소리 낭랑할 거라고 마구마구 혼자 생각했어요, 이미요 ㅎㅎ
 

5월은 무슨무슨 날이라고 이름 지은 날이 유독 많은 달이다.

5월 전체를 가정의 달로 부르기도 한다. 굳이 무슨무슨 날이라고 정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때론 그렇게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잘 모르고 있거나 지나치기 쉬운 걸 알게 해주고 돌아보게 하니까.

 

5월 11일은 입양의 날이다. 몰랐던 사실이다. 좀 억지스럽긴 해도 11일의 의미는

하나의 가정에 한 아이가 들어온 날이란 뜻이란다. 그거야 어쨌든 입양의 날을 5월에 정한 건 의미 깊다.

모 아침방송에 목회자의 부부가 나왔다. 21살 딸과 18살 아들이 잘 자라 있고 그 아래로 9살과 7살 남동생이 또

잘 자라고 있는 화목해 보이는 가정이었다. 남편은 부산의 모 기독교 교회 목사고 부인은 성악을 전공하고 현재도

음악회 등 활동을 하고 있는 분이란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다 함께 부르는데

아버지와 큰아들이 통기타를 치고 부인의 청아한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고 맏딸 조온유양의 얼굴이 유독 예뻐보였다.

타지에서 대학 다니고 있는 온유(이름도 예쁘지)양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겠지만 입양아도 기르고 싶다고 했다.

중학생 때, 자기도 안젤리나 졸리처럼 입양해서 아이 기를 거라고 장담하던 우리집 큰딸이 떠올라 싱긋 웃었다.

 

 

 

 

 

 

 

 

 

 

 

조병국 지음 / 삼성 출판사

2012년 4월 25일 녹음시작, 총 11시간 소요 녹음완료.

 

 

 

이 책은 '6만 입양아의 주치의이자 엄마였던 홀트아동병원 조병국 원장의 50년 의료일기'다.

할머니 의사 조병국은 어깨 통증으로 진료가 어려워져 2008년 10월 퇴임했다가 2010년 복귀해

현재 홀트일산복지타운/요양원에서 아이들과 장애인들을 진료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평생 서울시립아동병원,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에서 버려진 아이들과 함께하며 마음에 새겨진

만남과 이별, 절망과 기쁨, 기적, 감사, 감동... 그 많은 기억과 기록,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을 소박하고 진솔하게 풀어놓은 책이다.

흔히 입양아를 가슴으로 낳은 아이라고 하는데 진부한 말이 진리이듯 이 말보다 더 정확한 말은 없을 듯하다.

읽으면서 놀랍고도 눈물 나는 이야기들에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조병국 의사가 몸으로 행하고 얻은 고귀한 사랑에 대한 성찰이 담긴 글귀들은 꼭지마다 하늘색종이에 따로 적어뒀는데

모두 새겨둘 만한 감동스런 문장이다. 오래된 귀한 실제 사진과 그 아래 사진 설명도 몇 줄로 적어 놓았다.

이런 경우 사진을 보여줄 수 없으니 "사진 설명 있습니다"라고 코멘트 하고 사진 아래의 문장을 녹음한다. 

 

누군가의 거울이자 본보기, 슬픔을 치유하는 안식처이자 세상으로 나갈 용기를 주는 전진기지,

세상을 바라보는 창, 햇빛이자 물이자 공기, 아니 우주, 세상의 전부... 

이런 어마어마한 존재는 신이 아니라 바로 당신, 부모다.

 

모든 아이는 가정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말도 와닿았다.

 

'버려진 아이'와 '발견된 아이', 그 차이는 엄청나다.

'버려진 아이'는 슬프지만 '발견된 아이'는 희망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입양 서류에 '**에 버려졌음'이라 쓰지 않고 '**에서 발견되었음'이라 쓴다.

 

 

아침방송에 나온 가족의 부부에게 사회자가 이런 말을 묻더라.

아이들을 입양할 때 어떤 아이가 올지 불안하지 않았냐고. 대답은,

- 입양을 결심할 때는 부부가 아이를 갖기로 결심한 때와 같다. 뱃속의 아이가 건강할지 예쁠지 공부는 잘할지

속은 썩이지 않을지 과연 어떤 아이일지 바라는대로 선택할 수 없듯이, 입양하는 아이도 마찬가지다.

주시는 대로 받는 것이다.  (!!!)

 

장애를 가진 아이를 오히려 골라서 입양하는 양부모도 있는데, 이들 부부는 7살 막내 입양아가 오히려 너무 건강한

아이로 자신들에게 주어져 다른 입양부모들에게 미안할 정도였다고 한다. 오직 사랑을 실천하는 게 입양의 이유였다니.

대개는 마음에서 먼저 가리고 고르고 바라고, 이런 것이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요인인 것 같기도 하다.

'불평불만은 나를 위한 기도에서 비롯된다'와

'베푼 다음에 뭔가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좋은 인생의 방식이다' 

이 두 문장이 떠오른다. - [죽기 전에 답해야할 101가지 질문]

방송을 보며 딸 둘을 입양하여 기르고 있는 친구가 생각났다. 많이 컸겠다.

결혼 후 오랜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하더니 딸 자랑에 입에 침이 마를 줄 모르고 행복해 하던 착한 친구. ^^

 

 

장신구 살 돈으로 부모 잃은 아이들 입에 들어갈 딸기를 사고

생활비를 아껴 아픈 아이들 약값을 대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을 가꾸지 않으면 더욱 아름다워지고, 아끼지 않으면 더욱 귀해진다는 걸

그들의 삶을 통해 배운다.  (29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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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5-11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양이라는 거 아이 키우면서 참 대단하다 생각합니다 내 아이도 짜증나고 미울 때가 있는데 말이에요.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2-05-11 20:3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말에요.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들이에요.
근데 저자는 우리들에게도 그런 사랑의 씨앗이 다 품어져있다고 하더군요. ^^

순오기 2012-05-11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은 이런 분들의 사랑으로 살만한 곳이 되는 거 같아요.
뭉클하고 뜨뜻한 것이 출렁~~~
5월 11일, 입양의 날~~~ 잊고 있었네요.

프레이야 2012-05-11 23:35   좋아요 0 | URL
세상은 그래서 살만한 곳이다, 세상엔 여전히 기적이 행해지는 곳이다,
그렇게 저자도 썼더군요. 예전보다는 공개입양과 국내입양 하는 경우가 늘어나
바람직한 것 같아요. 자신을 위한 기도만 하며 부족한 걸 불평하는 사람들(저 포함^^)보다
참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 존경스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