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희망이 아니라 늙어감에 대한 냉철한 성찰.
1912년생 저자가 1968년 초판 56세 때의 성찰로 비난도 있었으나 10년 후에도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인. 1977년 4판. 1976년 자유죽음 발간. 1978년 자살.

늙어가는 사람을 A로 약칭. 첫번째 A로 마르셀 프루스트, 즉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내레이터 소환.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얼굴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동시에 비로소 자신이 된다는 역설. 늙어 가는 낯선 얼굴과 몸을 인식하게 됨과 동시에 몸으로부터 소외된다. 몸이 아플 때에야 몸을 인식하게 된다. 그 노인 자체가 시간이다. 시간 안에 머무르는 존재가 된다. 젊음은 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이고 세상 그 자체이다. 시간 안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이 나아간다. 건강한 사람은 자아와 뗄 수 없이 맞물린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이고 자기 바깥에 머무른다. 외화한다. 노화는 세계의 상실이고 늙어가는 사람은 정신과 몸의 기억을 끌어모은 과거로 즉 살아낸 시간 살아낸 자연이 된다. 내화한 노인에게 아픈 몸은 그렇게 감옥이 된다. 동시에 마지막 안식처이자 껍데기가 된다. 시들어가는 몸은 우리 자신이 부정하는 것이자 지극한 진정성이다. 마지막까지 생명의 권리를 담보하는 것은 언제나 몸이다.

사회적 노화(사회적 연령). 변화에 저항하며 적응하기
문화적 노화. 통속에 머무르지 않기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의 불평등. 가난
죽음이라는 무로 들어가며 처음으로 완전하게 인생을 극복한 우리의 승리. 그것은 우리의 총체적 붕괴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다. 이둘은 전혀 사정이 다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시간은 언제나 우리 시간, ‘살아낸 시간‘ temps vecu일 따름이다. 이런 시간을 성찰하면서 우리는 두 개의 위험지대 사이를 지나간다. 둘 다 똑같이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치명적이다. 한쪽에서 우리는 공허한 말장난과 천박한 캐물음의 위협을 받는다. 다른 한편에서는뭔가 배운 것 같은 울림을 주기는 하지만, 알아야 할 최소한의가치도 제시하지 못하는 이른바 전문 철학자의 인공 언어에 휘둘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두 위험지대를 돌파하려 시도해야만 한다. 시간은, 살아낸 시간 혹은 (그렇게 표현하길 원한다면)주관적인 시간은 우리 모두의 가장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 이런 단어는 잉크 냄새가 코를 찌르는 신문에서나 나오는 게 아니던가! 시간은 우리의 숙적인 동시에 가장 친한 친구다. 우리가 저마다 각자 전적으로 홀로 소유하는 게 시간이다.
그리고 시간은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게 결코 아니다. 우리의 고통이자 희망인 게 시간이다. 시간 이야기를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 P23

그러나 결국 문제 삼지 않았던 것 곧 자연적인 시간 감각은 쓸모 있음 이라는 법칙에 굴복한 편안함과는 다른 것임을 깨닫지 않을까? 자신이 저 무의미한 성찰이나일삼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여기며 매달렸던 바로 그 ‘자연적인시간 감각‘ 말이다. 아마도 그게 ‘자연‘이니까,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는 있다. 이 자연은 과학으로부터 이끌어낸 물리적이고수학적인 질서의 자연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로 변형을 준다면 ‘살아낸 자연‘nature vécue이라는 반론이!
그래야 그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상처를 입었다고 가정해보자. 상처는 쉽사리 아물지 않는다. 곪아 통증을 일으켜공간적인 외부가 그의 몸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몸은 가지지 않아야 완전히 소유한다. 다시 말해서 느껴지지 않는 몸이 건강하다. 그러다가 점차 상처가 아문다. 감염과의 싸움을 그의 유기체가 이겨내 상처가 아문다. 그러니까 이제상처를 지워버리는 것은 돌연 시간이다. 매일 흘러가는 하루와 더불어 새로운 조직이 상처를 덮어버림으로써 이제 시간은 더욱 살아낸시간이자 살아낸 자연이 된다. 드디어 시간이 승리하는 날이 찾아온다. 바로 그래서 시간은 모든 상처를 치유한다고 세상사람들은 말하는 모양이다. - P53

A는 암울한 사태를 밝히 풀어보고자 하는 희망을 가졌으며, 또 그럴 수 있는 처지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애매모호함에 흠칫 놀라 굳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이 애매모호함을 여자 친구와 함께 ‘중의성‘重義性(ambiguite)이라 부르기를 즐겼다. 그 안에 꼼짝도 할 수 없게 사로잡혀 상황을 명백하게 정리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만드는 게 ‘중의성‘이다. 거울 앞에 서서 자기 권태와 자기 보상을 동시에 느끼는 풀 길 없는 아포리아, 곧 난제라는 사실 때문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자기 소외와 자아 신뢰 사이의 불협화음이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바람에 그녀는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 P64

나인 동시에 내가아니라는 이런 생각은 하는 것만으로도 어지럽다. 나는 내가갈수록 낯설어진다. 나의 세포에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래서나 자신의 실체를 보면 볼수록 나는 낯설기만 하다.
비유의 언어를 빌릴 때 비로소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물론과학의 탐구정신은 그런 비유의 언어를 애매하다며 거부하리라. 그러나 지금 우리의 고찰에는 좋든 나쁘든 비유의 언어만쓸 수 있다. 비유컨대, 나는 몸을 통해 늙어가면서 몸을 적대시하는 나다. 젊었던 시절 나는 몸을 등한시하면서도 몸과 더불어 나였다. - P79

사회의 모순은 어디서 성립하는지, 이 모순을 거부할 기회에는 어떤 게 있는지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만 한다. 왕성하게활동을 벌이던 젊은 시절부터 눈치 채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짙어져가는 합의, 곧 우리를 바라보는 사회적 판단의 합의는 그러니까 미리부터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사회적 존재, 우리 존재 그 자체라 불러도 좋을 사회적 존재는 본격적인노화의 과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로 공방을 주고받는 가운데 그 윤곽을 드러낸다. 우리가 이야기를 하면 사회는 대답한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사회라는실의 1막이다. 2막은 1막을 재조명하는 것으로, 반론 혹은 대답으로서의 행동이라는 차원이다. 우리는 작가로서 말하면 받아들여지리라는 믿음으로 작가적 표현으로써 사회에 도전한다. 우리가 활동하는 작가로 실제 영향력을 발휘하느냐는 물음은 사회가 우리의 도전을 받아들이는지 그여부에 달렸다. - P102

노인은 자기 부정과 파괴에
"안 돼!" 하고 저항하는 동시에 "알았다" 하고 그것을 인정한다.
아무런 전망이 없는 부정에서만 노인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은 자아의 포기를 강요당하는 획일적 일상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노인은 정신병원에서 묵을 거처를 찾는다. 여전히 젊음이라는 마스크를 쓴 것처럼 자신을 기만하며, 거짓으로 묵직한 황혼의 노년이라는 목가적 풍경에 매달린다.
노인은 사회가 요구한 바로 그대로다. 노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할 때에만 누군가다. 노인은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안에 녹아 있는 부정이 자기문제임을 알아차리고 그에 저항하려 몸을 일으킨다. 노인은 실행할 수 없는 일을 하려 과감히 떨쳐 일어난다. 아마도 이게 노인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 진정 품위 있게 늙어갈 유일한 가능성이리라. - P131

폭소를 터뜨리게 만드는 동시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창피한 것, 곧 통속은 언제나 어제 유행으로 체험된 것이라고 A는생각했다. 그러니까 역사로 자리 잡지 못한 어제의 유행만 낡고늙은 것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헤세, 귀엽다는 형용사를 붙일수 있는 그의 문학은 어제의 것이며, 어제 인기를 누렸다. 다시말해서 대량소비로 닳아버렸으며 가치를 잃고 말았다. 헤세가귀여움에 몰두하던 때와 같은 시기에 차갑게 인간 실존의 전율을 써내려간 카프카는 통속화 과정에 조금도 사로잡히지 않 - P147

았다. 카프카의 작품이 헤세의 귀여운 그것과 전혀 다른 요소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말이 나온 김에 짚어보자면 다른 누구도 아닌 헤세가 카프카의 문학을 읽어보라고힘주어 권고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게 순전한 우연의 일치일까? 카프카가 통속화 과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것은이 프라하 시민이 슈바벤 출신의 스위스 남자와 반대로 단 한번도 동시대의 유행으로 부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카프카 열풍은 그가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았을 때 비로소 일어났다.
오히려 카프카 열풍은 일종의 안티 유행이라는 태도로 출현했으며, 역사적인 동시에 미래를 제시하는 성격을 갖추었다. - P148

문화적으로 늙는 일의 품위는, 그것이 그 가운데 자리 잡은 사회적 노화의 품위와 마찬가지로 다시금 오로지 모순된 저항, 모순과 철저히 싸우는 저항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새로운 체계들은 이미 찾아왔다. 늙어가는 사람은 아무 희망도없이 매일 새로운 체계를 해독하려는 싸움터로 나가야만 한다.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포기하지 않고자 하는 한, 부패하는 질서를 버려서는 안 된다. 자신의 정신적 태도가 시체를 붙들고 못 다한 성욕을 풀려는 음울한 네크로필리아"라는것을 잘 알면서도,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부패한 체계에 무가치할지라도 충절을 보여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무망한 시도로 자신의 부정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거부해야만 한다. - P169

"틀렸어, 그건 그냥 죽음이야."Le faux, c‘est la mort. 장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이 말로 철학자는 죽음을 거절했다. 인간의실존을 불투명한 본질로, 돌처럼 굳어진 ‘존재‘etre로 만드는죽음을 거부한 것이다. ‘에트르‘être(존재)는 그저 ‘아부아레테‘
avoir-été(현재완료형으로 ‘갈수록~하다‘라는 프랑스어 문법옮긴이)일뿐이다. 죽음과 대결하려는 사람은 단지 과거와 현재를 맺어주는 위험한 결합 그 이상의 부담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가 저지르는 일은 자신을 연모한 나머지 스스로를 굳어진 존재로 만드는 음란한 근친상간이다. 그러나 유일한 진리는 죽음이라고도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어쨌거나 죽음은 미래 가운데 미래, 모든 미래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떼는 모든 발걸음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행보다. 우리가 품는 모든 상념은 결국 죽음에서 깨어진다. 죽음의 완전히 공허한 진리, 그 비현실적인 현실성은 우리 인생이 가지는 무의미함의 완성이다. 무無로 넘어들어가면서 처음으로 완전하게 인생을 극복한 우리의 승리는 곧 우리의 총체적 붕괴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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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조세희 선생이 타계하시고,
집에 있던 이 책을 다시 읽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한다.

난장이 연작을 실은 이 책의 첫 작품 <뫼비우스의 띠> 문장처럼, 알량한 독서와 지식이랍시고 자신의 이익에 맞춰 쓰이진 않도록 하자. 그저 바람직한 생각들이 바람직한 실천으로 이어지길…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이제 나의 노력이 어떠했나 자신을 테스트해볼 기회가 온 것 같다. 다른 인사말은 서로 생략하기로 하자. - P29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어머니 · 영호·영희,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섯 식구의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말할 수 있다. 나의 ‘모든 것‘ 이라는 표현에는 ‘다섯 식구의 목숨‘ 이 포함되어 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 P80

지도자가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희생이라는 말은 전혀 위선으로 변한다. 나는 과거의 착취와 야만이 오히려 정직하였다고 생각한다. /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세대와 세기가 우리에게는 쓸모도 없이 지나갔다. 세계로부터 고립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 하나 주지 못했고 가르치지도 못했다. 우리는 인류의 사상에 아무것도 첨가하지 못했고 남의 사상으로부터는 오직 기만적인 겉껍질과 쓸모 없는 가장자리 장식만을 취했을 뿐이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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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2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2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23-01-16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쓰실 때였군요…
 

채석장이나 광산에 버려진 돌로 만든
친환경 미네랄 페이퍼.
나무 종이에 비해 저탄소제품.
환경도 돕고 질기고 매끄럽다.
물방울 떨어뜨려보니 물얼룩이 안 생긴다.
손가락에 침 묻혀서 책장 넘기기도 자유, 신기하다.
워터프루프 책갈피랑 방수 케이스도 덤.

올해 마지막 독서.

정확한 목적도 없이 매년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 아닌가. 아마도 절망에 빠진 젊음과 열정의 비극은 절망에 빠진 노년과 속된 바람의 비극보다는 덜 비참하리라. - P54

그래서 우리 영혼은 인생의 호흡과도 같은 의구심과 희망, 노력을계속 유지하기 위해 무언가 감추어지고 불확실한 것을 반드시 요구하기 마련이다. 만약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래가 완전히 벌거벗겨져 드러나게 된다면 인류의 관심사는 오늘과 미래 사이에 펼쳐진 시간에 오롯이 집중될 것이다. - P55

더불어 우리는 아침과 오후의 불확실성에만 주의를 기울이게 될테고, 마지막으로 남은 투기, 성공, 실망의 가능성을 좇아 온갖 거래소로 죽어라 달려갈 것이다. 스물네 시간 이내에 위기가 닥칠지 닥치지 않을지를 두고 무수한 정치적 예언이 터져나오리라. 여름날이 저물 무렵에야 모든 것이 자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 하나만을 제외하고 그사이에 갖가지 주제나 가설, 논쟁들이 명백해진다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 해가 지면 그 즐거움 또한 끝나리라는 것을 알기에 벌들이 꿀로 가득한 꽃으로 모여들듯 예술과 철학, 문학과 과학으로 다들 몰려들게 될 터다. 이제 인간의 충동과 정신 활동은 허망한 미래와 심장 박동, 근육의 과민함에 더는 자신을 맞추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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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01-01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지요? 저도 물방울 조금만 떨어트려봤어요 ㅋㅋ 물에 담그지는 못하겠더라구요, 무서워서.
책갈피 은근 맘에 듭니다. 북마크도 붙여두고 잘 쓰고 있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 한 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프레이야 2023-01-01 00:26   좋아요 1 | URL
ㅎㅎ 그렇죠.
다 읽고 푹 담궈볼까 해요, 요정님 :)
고맙습니다 해피 뉴이얼~^^

꼬마요정 2023-01-01 00:22   좋아요 0 | URL
담그시면... 알려 주세요^^

2023-01-01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1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방금 도착한 따끈한 선물이네요 ㅎㅎ
책읽는고양이 다이어리 귀여워요 ;)
한 해 동안 구석진 방을 찾아주신 님들 많이 고맙습니다.
일일이 찾아가서 인사 못 건넨 님들에게도 마음 전하고 싶어요. 모두 모두 내년에도 두루 보람되고 평안하시면 좋겠어요.
저는 꾸준히 읽고 쓰며 인간으로서 조금은 나아지길 소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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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1-02 09: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따님과 함께 지내는 즐거운 날들 이어가시고 좋은 글도 많이 써주시고요.

프레이야 2023-01-02 13:08   좋아요 1 | URL
자목련 님 올해도 건강하시고 좋은 페이퍼 많이 부탁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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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서두에서, 메리 셸리가 그토록 무시무시한 생각을 어디서 받아들였는지 생각해 보다가 수수께끼 같은 여성 문인인 히스클리프의 창조자에게서 닮은꼴을 찾았다는 문장은 의아하다. (번역 오류일 수 있으니 원서 가지고 있는 분이 밝혀 주시길 바라며^^) 1847년 <폭풍의 언덕>보다 1818년 초판 <프랑켄슈타인>이 먼저 발간되었으니 동시대를 살았다 해도 연도상으로는 맞지 않다. 그렇다면 일종의 예상 표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할까. 수사적이고 은유적 기술이 많은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내용을 감안하고, 여성주의 관점으로 따라 들어간다.


일단 셸리의 작품은 형이상학적 공포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환상 소설이라면 브론테의 작품은 형이상학적 정열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로맨스로 규정한다. 유사점을 든다면 “복잡한 존재론적인 심오함, 정교한 비유의 구조, 모호하지만 강렬한 도덕적 야망을 숨기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문자화된 증거 즉 편지와 일기를 이용한 ‘증거적 서사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 다 처음엔 익명이나 필명으로 출간했고 어머니가 없는 문학적 고아라는 상황에서 ‘기원’의 문제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실낙원으로 대변되는 밀턴의 신화에 대한 두 작가의 태도는 다르다. 문학적 의도를 강화하려고 작품에 밀턴적 구조를 도입한 셸리와 달리 브론테의 적품에는 밀턴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재 자체가 현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밀턴이 상상했던 사람들과 장소에 “고통스러우리만치” 천착한다. <폭풍의 언덕>을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 타락의 이야기로 보는 견해다. 캐서린 스스로 자신을 쫓겨난 추방자이자 망명자로 묘사하며 “왜 나의 피는 몇 마디 말에 격정의 지옥 속으로 달려가는 걸까” 라고 탄식한다. 하지만 추락의 방향이 밀턴과 다르다. 죽음으로 사랑의 합일을 실현한 양성적 사나운 욕망은 이런 역추락의 과정과 결과로 과연 현실에서 이루어졌을까. ‘추락’이라는 말에서 눈치챘듯 현실이 용납하지 않기에 겉으론 추락이나 안으론 진정한 자신되기의 의지와 열망으로 비상한다.


- 브론테는 이 추락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추락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지옥으로부터 천국으로 추락하는 것이며 (종교적 의미에서) 은총으로부터 추락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의미에서) 은총으로 추락한 것이다. 더욱이 추락하는 여자 주인공에게 순수에서 경험으로 고통스러운 이행을 알려 주는 것은 신의 상실이라기보다 사탄의 상실이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468)


반대방향으로의 추락을 신의 상실이 아니라 사탄의 상실로 본 것은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혐오스러운 생명이 우정과 이해를 바랐던 점,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고 고독하여 사나워졌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공감된다. 죽음은 선택지가 없는 땅에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선택과 결정의 자유가 없는 자에게는 도덕성도 물을 수 없다. 그렇게 천국과 지옥으로 불리는 세상의 모든 경계를 허물며 에밀리는 그 사이를 “반항적으로” 넘나들었다. 겨울을 지나 봄에 피는 히스꽃 핀 언덕과 동의어인 히스클리프(셸리의 괴물과는 달리 이름이 있긴 하다)가 없다면 자신은 없는 것이라 생각한 캐서린. 울부짖는 그 사나운 유령이 떠돌았을 언덕을 제대로 느껴보려면 바람 부는 겨울에 가야할 듯. 봄은 겨울이 지나야 온다.



- 또 다른 면에서 <폭풍의 언덕>은 <리어왕>의 구현된 형이상학적 폭풍과 존재론적인 자연/문화의 갈등을 산문으로 다시 썼다고 할 수 있다. (474)


프랑켄슈타인이 세상에 나오고 저자가 누군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으나 셸리의 존재가 나중 알려지자 병적인 여자의 상상이라고 비난받았다.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도 처음엔 주목받지 못했다. 유일한 소설을 내고 이듬해 세상을 뜬 브론테의 소설적 신화 쓰기는 가부장의 집에 갇혀 사실적인 상상력과 “실용적이고 일상적이며 익살스러운 얼굴”이 동시에 작동한다. 그는 일기에 드러나듯 감자를 깎고 다림질을 하고 글을 쓰는 여성이었다. 브론테에게 환상이 현실과 별개가 아니듯 천국과 지옥도 분리된 거대 공간이 아니라 합일될 수 있는 두 세계로 여겨진다. 그리고 정열적으로 바랐다. 캐서린은 스스로 자신을 히스클리프라고 말했고 “그것됨(it-ness)”과 하나되길 원했다. 괴물로 인식된 여성성과 야생성을 대변하는 히스클리프는 자연이 아닌 문화와 교육의 땅에서 살 수밖에 없는 캐서린의 땅속 뿌리이다.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은 가부장의 권위 안에서 조용히 살아내는 자신 아래 깊고 넓게 자리한 “영원한 바위”이다. 캐서린의 가장 본래적인 존재가 히스클리프이므로.


- 그는 나보다 더 나야. 내가 이 세상에서 겪은 지독한 고통들은 모두 히스클리프의 고통들이었어. 모든 것이 죽어 없어져도 그가 남아 있다면 나는 계속 존재하는 거야. 하지만 다른 모든 것 은 남아 있되, 그가 없어진다면 우주는 아주 낯선 곳이 되고 말 겠지. 린튼에 대한 나의 사랑은 숲 속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되면 나무들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시간이 흐르면 달라지리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사랑은 그 아 래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 는 언제나.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있어. 바로 나 자신으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

-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중



1847년은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가 발간된 해이다. 두 작품과는 달리 폭풍의 언덕에는 샬롯마저도 세간의 혹평에 더해 지독한 말을 얹었고, 그대로 묻혀버렸다. 1846년에는 세 자매가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의 시집>을 자비로 출판했다. 이 때 에밀리 나이 28세. 에밀리는 가부장의 집에서 잃어버린 근본적 잠재력을 자신의 시에서 강렬한 불길로 태우고 병들어 세상을 등지기 전에 자기 생의 흔적을 모조리 없애 버렸다.


어떤 천국의 약속도, 이 사나운 욕망들
모두를 혹은 반만이라도 충족시킬 수 없으리,
어떤 지옥의 협박도, 끌 수 없는 불길로
이 억누를 수 없는 의지를 진압하지 못하리! (551)

(Enough of thought, Philosopher/ Emily Bronte)



— 블레이크는 ‘욕망을 억누르는 자는 그의 욕망이 억제당할 만큼 약하기 때문에 억누르는 것‘이라고 경멸한다. 반면 좀 더 세속적이고 상식적인 리비스적 공격(‘성숙‘은 자신의 케이크를 먹지않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검열관다운 생각)은 마크 킨키드 윅스가 ‘그레인지 집안의 관점‘이라고 부른 것을 대변한다. 그러나 캐서린의 타락과 관련해서 (그리고 특히 자기 기만적으로 내린 에드거와의 결혼 결정과 관련해서)도덕성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도덕성이란 유효한 선택의 기회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캐서린에게 유의미한 선택의 기회란 없다. (503)



에밀리는 매일 애견을 데리고 히스 황야를 배회하는 비쩍 마른 처녀의 모습으로 이웃에게 보였다. 가족 중 가장 키가 크고 창백하고 과묵하고 정력적이며 단호하고 열광적이며 피아노 칠 때를 제외하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에밀리. 동생을 생각하며 샬롯 브론테는 <셜리>를 썼다. <폭풍의 언덕>이 나왔으나 외면당하여 창조물의 문학적 죽음과 함께 창조주가 죽음을 맞이하고 난 후다.


— 그녀는 「설리」에서 페미니즘적인 신비주의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폭풍의 언덕」의 서문 일부에서 그녀가 보여준 전략적인 아이러니를 통해서도 에밀리 브론테의 의도를 드러낸다. <셜리>에서 최초의 여자, 진정한 이브는 자연이다. 그녀는 고상하지만, 셜리-에밀리 같은 몇 명의 특권을 지닌 탄원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상실했다. 셜리-에밀리는 캐럴라인에게 (교회에 가자는 초대에 대한 응답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어머니 이브와 (요즘에는 자연이라 불리지만) 여기 있겠어. 나는 어머니를 사랑해. 죽지 않는 위대한 존재!! 어머니가 낙원에 떨어진다면 천국도 어머니의 이마에서 사라졌을 거야. 지상에서 영광스러운 모든 것이 그곳에서도 여전히 빛나지. (550)



- 8장 반대로 보기: 에밀리 브론테의 지옥의 바이블


사진은 영국 하워스 브론테박물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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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07 11: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원서에서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

저도 프레이야님 생각에 동의를!

이 책이 출간 된지 반세기가 넘어서
좀 시대에 맞게 논의 되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

프레이야 2022-12-07 14:17   좋아요 2 | URL
넵. 스캇님 찾아봐 주세요~^^

단발머리 2022-12-07 13: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이 페이퍼 너무 좋네요. 저는 <폭풍의 언덕> 읽었지만 사실 좀 어렵기도 하고 다미여에서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나중에 <폭풍의 언덕> 다시 읽어야지 싶었는데 프레이야님 리뷰 읽고 나니 에밀리가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네요.
밑에서 두 번째 사진이요... 혹 프레이야님이신가요? @@

프레이야 2022-12-07 23:00   좋아요 5 | URL
저 아니어요 ~^^ 저는 핸폰으로 사진 찍는 중이었고요. 브론테박물관을 찾는 외국인들이 많더군요. 사람 안 들어가게 사진 찍기 힘들었어요. ㅎ 어린아이들도 제법 보였어요 귀엽게. 에밀리들은 그 뜨거움을 간직하고 억압 안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싶어요. 폭풍의 언덕, 중학생 땐 그저 정열적인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미친 사랑과 히스언덕에 대한 로망만 간직했는데 이후 다른 관점으로 읽혔고 이번 다미여로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읽히니 새로운 것이 보여 의미 있는 시간이어요. 늘 공부하는 단발머리 님을 본받자!!

yamoo 2022-12-08 11: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헉! 원서다!! 원서를 자르고 읽으시는 프레이야님...이라고 생각하다가 계속 페이퍼를 읽으니...프레이야님이 사진을 갖고 오신거네요..ㅎㅎ
전 아직 브론테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이 한권도 없어요~
언젠가는 완독해야지...하고 있는데...다른 책들 읽느라 기회가 없어요....읽어야할 책탑를 해치워나가다가 다른 관심책이 들어오고...ㅎㅎ 언제 읽을지 몰겠어요..ㅎㅎ

프레이야 2022-12-08 11:49   좋아요 4 | URL
ㅋㅋ 화가 야무님. 눈을 비비고 보시어요. 브론테박물관 유리장 안에 전시된 브론테 자매의 흔적들입니다. 신문을 오려 스크랩했더군요. 그 위 유리에 비친 사람은 저 아니에요 ㅎㅎ 그들의 생활과 글쓰기가 엿보이는 볼거리가 많았어요. 브론테들을 새로이 접근해 봅니다. 세상에 읽을거리가 어찌 많은지요 어떻게 다 읽나요 마음 가는대로요~

Jeremy 2022-12-11 08: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한국어 번역본은 가진 게 없어서
8장의 처음이 정확하게 어떻게 번역되어 시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Frankenstein 과 Wuthering Heights 는 거의 연관성이나 관계가 없는 작품으로
두 작가의 ˝hideous an idea˝ 의 비교일 뿐이지
Mary Shelley 의 Frankenstein 이
Wuthering Heights 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저는 이런 책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수정. 개정판이 나오지 않으면 약간 구닥다리가 되는 경향이 있는)
그냥 Kindle 로 공부하듯이 한 번 읽고 끝낸 뒤 되돌아가는 일이 거의 없어서
오래 전에 본 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프레이야님 덕분에 이 벽돌책의 8장만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처음 부분만 읽어보시라고 발췌해보았고 제가 읽기 쉽게 끊어 썼습니다.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8. Looking Oppositely: Emily Bronte‘s Bible of Hell
<반대로 보기: 에밀리 브론테의 지옥의 바이블>



Frankenstein and Wuthering Heights (1847) are not usually seen as related works,
except insofar as both are famous nineteenth-century literary puzzles,
with Shelley‘s plaintive speculation about where she got so ˝hideous an idea˝
finding its counterpart in the position of Heathcliff‘s creator
as a sort of mystery woman of literature.

Still, if both Bronte and Shelley wrote
enigmatic, curiously unprecedented novels,
their works are puzzling in different ways:
Shelley‘s is an enigmatic fantasy of metaphysical horror,
Bronte‘s an enigmatic romance of metaphysical passion.

Shelley produced an allusive, Romantic, and ˝masculine˝ text
in which the fates of subordinate female characters
seem entirely dependent upon the actions of ostensibly male heroes or anti-heroes.
Bronte produced a more realistic narrative
in which ˝the perdurable voice of the country,˝
as Mark Schorer describes Nelly Dean, introduces us to a world where men battle
for the favors of apparently high-spirited and independent women.


프레이야 2022-12-11 23:39   좋아요 2 | URL
원문 보기 좋게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아했던 부분은 추측대로 번역오류네요. 주어 오류. 문제가 되었던 번역문을 옮겨드릴게요.

“자기가 어디에서 그토록 ‘무시무시한 생각‘을 받아들였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본 메리 셸리는 수수께끼 같은 여성 문인인 히스클리프의 창조자에게서 자신의 닮은꼴을 찾았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458쪽)


유부만두 2022-12-11 08: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락방 원서와 책을 다시 찾아 봤어요.
번역문이 영어 원문의 긴 문장을 둘로 나누고 뒷부분의 주어를 메리 셸리로 했기에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메리 셸리가 어디에서 끔찍한 생각을 얻었을까에 대한 고민, 그에 미스테리한 여성 문인의 대응점으로 (우리가, 독자들이) 히스클리프의 창조자를 찾았(기에 두 작품이 연결 될 수 있)다.

라고 이해하면 어떨까 싶어요.

Jeremy 2022-12-11 13:50   좋아요 2 | URL
영어로 Rephrase 하는 게 저한텐 더 수월하지만
저녁으로 갈비탕 실컷 먹고왔으니까 간만에 힘내서
굳이 제 발해석을 직역과 의역을 섞어 한국어로 달아보자면,

˝일반적으로 <프랑켄슈타인>과 <폭풍의 언덕>은 서로 연관된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
두 작품 모두 유명한 19 세기 문학의 수수께끼라는 점,
ㅡ이런 끔찍한 생각이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셸리에 대한 음울한 추측은
문학계의 신비로운 여성 작가로 분류되는
히드클리프의 창조자에 대한 견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
ㅡ만 빼곤 말이다

뭐, 이 정도가 아닐까요?

프레이야 2022-12-12 06:14   좋아요 2 | URL
유부만두님과 Jeremy님, 고맙습니다.
속이 다 시원하네요. 갈비탕 실컷 드셨어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나 괴물에 버금가는 히스클리프가 ˝종속적 여성 운명˝을 은유하는 캐릭터로도 프랑켄슈타인과 캐서린 언쇼의 또다른 자아로도 읽히니, 두 작품은 서로 연관이 없다해도, 독자와 비평가들은 연결고리를 찾고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연도상으로는 셸리가 먼저이니 영향을 받았다면 에밀리 브론테가 받았겠지요. 번역문에 혹여 주어가 브론테였다면 그냥 그렇구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법합니다.

2022-12-11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11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12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2-12-12 22: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폭풍의언덕, 지금 시대에 읽기에는 꽤 괜찮지만,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는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것 같았어요.
그 시대에 평가가 좋았다면 어쩌면 작가가 조금 더 책을 써낼 수 있었을 것 같긴 합니다.
박물관에 보관된 원서가 보관상태가 좋은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2-12-12 22:26   좋아요 4 | URL
얼마전 랄프 파인즈가 히스클리프로 나온 흑백영화를 다시 보며 예전과 다른 게 보였어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네요 에밀리도 결국. 저 당시 에밀리도 자신의 이름으로 내지 못해 안타깝죠. 제인에어의 작가라니 말이죠. 날이 추워져요 서니데이 님, 감기 조심하시고요 ^^

희선 2022-12-13 03: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이 나온 때를 알아야 뭔가 이상한 걸 알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거 모르는 사람은 그런가 보다 하고 읽었을 것 같네요 원문을 아시는 분이 있어서 번역이 조금 잘못됐다는 것도 알았군요 다른 나라 말을 한국말로 옮기는 건 쉽지 않네요 그걸 읽고 잘못을 알아채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12-13 18:25   좋아요 4 | URL
네. 원문의 의미가 확실하네요.
독자자 엮어가는 의미도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문학적으로 서로 연관성이 있고 없고는 실제 작가의 경험도 그렇지만 어떤 면에선 서로 연관성을 찾는 상상력이 독자의 몫이기도 하니까요. 히스클리프의 창조자와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자 모두 무시무시한 상상력의 기원을 어떤 면에선 공유하고 있어 인상적입니다.

서니데이 2022-12-15 18: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알라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합니다.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2-12-15 18:39   좋아요 4 | URL
오모나 북플마니아요??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님.
내년에도 북플에서 자주 만나요.

희선 2022-12-16 06: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 님 서재 달인 축하합니다 한해가 가는군요 새해 시작하고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이맘때쯤 늘 생각하는 거기도 하네요 프레이야 님 새해에는 걷는 게 더 편해지고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12-16 08:30   좋아요 2 | URL
희선 님 올 한 해도 특별하게 지나가네요.
고마웠고 고마워요. 내년엔 좋은 일 즐거운 일 많으시길 바랍니다

독서괭 2022-12-23 12: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아직 안 읽은 부분인데 댓글에서 번역오류를 정정해주셨네요. 유념하고 읽어보겠습니다^^
<빌레뜨>도 그렇고 <폭풍의 언덕>도 지금 읽어도 재미있고 세련된 소설 같아요. 저도 빨리 다미여 진도를 나가야겠습니다. 프레이야님 즐거운 연말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2-12-23 12:51   좋아요 3 | URL
괭님 댓글 고맙습니다^^ 다미여 읽기는 여러모로 의미있고 즐거운 경험이네요. 다른 분들의 의견과 감상도 서로 연결되고요. 반세기 전의 책이지만 여기 언급된 작품들 다시 읽게 하네요. 일주일 정도 남은 올해 즐겁게 보내세요. :)

서곡 2022-12-23 15: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낼모레가 어느덧 성탄절입니다! 추운 겨울 따뜻하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프레이야 2022-12-23 16:54   좋아요 3 | URL
잠시 버릴 것들 들고 나갔다가 날아가는 줄 알았다고 하기엔 몸이 둔하지만 바람이 완전 쌩쌩~합니다 ㅎㅎ 벌써 성탄절 시즌이군요. 서곡님 한 해 동안 감사했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

순오기 2022-12-26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나는 이번주까지 사업정산 끝나면 제일 먼저 부산 갈려고 초등 단짝한테 맛집 알아두라 했어요.
부산 가면 전화할게요~ ^^
올해는 죽을만치 일해서 번아웃 될까봐... 내년엔 협동조합 폐업하고 쉴려고요!!

프레이야 2022-12-26 10:55   좋아요 0 | URL
그래요 언니 전화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