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 김수영전집1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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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하루종일 봄비가 내리더니 지금은 화창한 하늘 아래 꽃들이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
올해 첫 낭독도서로 김유담 소설집 <돌보는 마음>을 골랐다. 부산원북원도서 후보작이라 미리 녹음을 해둔다. 어제는 14번 파일로 녹음을 완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쏟아졌다. 앞유리에 와이퍼가 바쁘게 움직이고 차창 밖은 어둡고 시야가 침침하였다. 한 곳엔 접촉사고가 나 길게 차량이 막혀 있었다. 천천히 가자고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배캠을 들으며 오는데 “비는 움직이는 비데”라고 김수영 시인이 그랬다고. 엉? 철수씨도 눈이 침침한가 보다 싶어 어찌나 웃었던지. 곧바로 정정하면서도 특유의 배짱으로 “비데도 움직이는 거 아니냐고.“
비가 오면 와이퍼 움직이듯 우리 마음이 작동한다.
마음이 조급해지기 쉽지만 와이퍼와는 반대로 느리게 움직인다.
시인은 비를 움직임을 제하는 결의… 라 했다.
밖으로 내달리는 속성과 마음의 속도를 붙잡아야 한다.
집으로 들어가 내 머리와 심장에 좀더 매달려 볼 일이다.
“비는 움직이는 휴식…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
무사히 집에 당도했다.
그동안 안부를 건네준 상냥한 마음과 묵묵히 기다려준 마음 그리고 단단한 목소리를 전해준 마음들을 잊지 않는다. 늘 그렇듯 어느 한 시기를 지나면 새봄이 와 있고 꽃들이 피어 있다. 고양이가 발소리도 없이 내 발치에 와 있듯이.
_ 돌보는 마음 / 김유담
여성의 돌봄 노동 그 회로를 다각도로 비추는 이야기 열 편이 담긴 소설집이다. 산후조리원 요양병원 맘카페 등 여성의 오랜 돌봄노동도 사회적 회로를 가지는데 그것이 노동을 덜어준다기보다 가중되거나 여전하다. 여기저기서 그 실태가 드러난다. 남성은 빠져 있고 그 자리에서 여성은 중첩된 돌봄을 이어간다. 실제 우리 사회의 이야기라 공감되는 내용이다. <이완의 자세>를 쓴 밀양 출생 83년생 저자가 직간접적 몸과 마음으로 체험했을 이야기. 어떤 단편은 82년생 김지영이 떠오른다. 경상도 사투리 대사 읽기, 재미있었다.
_ 바이닐 / 마이크 에번스 / 박희원 옮김
번역을 한 이는 1993년에 태어난, 나의 첫 분신이다. 이 일을 시작한 후 출판되어 나온 첫 도서다. 좋아하는 분야의 책이라 더욱 즐거웠던 것 같다. 내가 보는 그는 욕심없이 꼬박꼬박 사는 삶을 추구하며 정확하고 성실한 번역가이다. 번역가로서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바이닐, 책도 문장도 반듯하고 야무지다. 무선제본이라 책장 넘기는 것도 마음에 든다. 양쪽이 활짝 편평하게 펼쳐져 컬러 화보와 자세한 내용을 읽기에 편안하다. 팝과 엘피와 디자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반가운 도서일 듯.
작년 말에 나왔는데 이제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