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희망이 아니라 늙어감에 대한 냉철한 성찰.
1912년생 저자가 1968년 초판 56세 때의 성찰로 비난도 있었으나 10년 후에도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인. 1977년 4판. 1976년 자유죽음 발간. 1978년 자살.

늙어가는 사람을 A로 약칭. 첫번째 A로 마르셀 프루스트, 즉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내레이터 소환.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얼굴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동시에 비로소 자신이 된다는 역설. 늙어 가는 낯선 얼굴과 몸을 인식하게 됨과 동시에 몸으로부터 소외된다. 몸이 아플 때에야 몸을 인식하게 된다. 그 노인 자체가 시간이다. 시간 안에 머무르는 존재가 된다. 젊음은 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이고 세상 그 자체이다. 시간 안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이 나아간다. 건강한 사람은 자아와 뗄 수 없이 맞물린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이고 자기 바깥에 머무른다. 외화한다. 노화는 세계의 상실이고 늙어가는 사람은 정신과 몸의 기억을 끌어모은 과거로 즉 살아낸 시간 살아낸 자연이 된다. 내화한 노인에게 아픈 몸은 그렇게 감옥이 된다. 동시에 마지막 안식처이자 껍데기가 된다. 시들어가는 몸은 우리 자신이 부정하는 것이자 지극한 진정성이다. 마지막까지 생명의 권리를 담보하는 것은 언제나 몸이다.

사회적 노화(사회적 연령). 변화에 저항하며 적응하기
문화적 노화. 통속에 머무르지 않기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의 불평등. 가난
죽음이라는 무로 들어가며 처음으로 완전하게 인생을 극복한 우리의 승리. 그것은 우리의 총체적 붕괴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다. 이둘은 전혀 사정이 다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시간은 언제나 우리 시간, ‘살아낸 시간‘ temps vecu일 따름이다. 이런 시간을 성찰하면서 우리는 두 개의 위험지대 사이를 지나간다. 둘 다 똑같이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치명적이다. 한쪽에서 우리는 공허한 말장난과 천박한 캐물음의 위협을 받는다. 다른 한편에서는뭔가 배운 것 같은 울림을 주기는 하지만, 알아야 할 최소한의가치도 제시하지 못하는 이른바 전문 철학자의 인공 언어에 휘둘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두 위험지대를 돌파하려 시도해야만 한다. 시간은, 살아낸 시간 혹은 (그렇게 표현하길 원한다면)주관적인 시간은 우리 모두의 가장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 이런 단어는 잉크 냄새가 코를 찌르는 신문에서나 나오는 게 아니던가! 시간은 우리의 숙적인 동시에 가장 친한 친구다. 우리가 저마다 각자 전적으로 홀로 소유하는 게 시간이다.
그리고 시간은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게 결코 아니다. 우리의 고통이자 희망인 게 시간이다. 시간 이야기를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 P23

그러나 결국 문제 삼지 않았던 것 곧 자연적인 시간 감각은 쓸모 있음 이라는 법칙에 굴복한 편안함과는 다른 것임을 깨닫지 않을까? 자신이 저 무의미한 성찰이나일삼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여기며 매달렸던 바로 그 ‘자연적인시간 감각‘ 말이다. 아마도 그게 ‘자연‘이니까,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는 있다. 이 자연은 과학으로부터 이끌어낸 물리적이고수학적인 질서의 자연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로 변형을 준다면 ‘살아낸 자연‘nature vécue이라는 반론이!
그래야 그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상처를 입었다고 가정해보자. 상처는 쉽사리 아물지 않는다. 곪아 통증을 일으켜공간적인 외부가 그의 몸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몸은 가지지 않아야 완전히 소유한다. 다시 말해서 느껴지지 않는 몸이 건강하다. 그러다가 점차 상처가 아문다. 감염과의 싸움을 그의 유기체가 이겨내 상처가 아문다. 그러니까 이제상처를 지워버리는 것은 돌연 시간이다. 매일 흘러가는 하루와 더불어 새로운 조직이 상처를 덮어버림으로써 이제 시간은 더욱 살아낸시간이자 살아낸 자연이 된다. 드디어 시간이 승리하는 날이 찾아온다. 바로 그래서 시간은 모든 상처를 치유한다고 세상사람들은 말하는 모양이다. - P53

A는 암울한 사태를 밝히 풀어보고자 하는 희망을 가졌으며, 또 그럴 수 있는 처지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애매모호함에 흠칫 놀라 굳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이 애매모호함을 여자 친구와 함께 ‘중의성‘重義性(ambiguite)이라 부르기를 즐겼다. 그 안에 꼼짝도 할 수 없게 사로잡혀 상황을 명백하게 정리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만드는 게 ‘중의성‘이다. 거울 앞에 서서 자기 권태와 자기 보상을 동시에 느끼는 풀 길 없는 아포리아, 곧 난제라는 사실 때문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자기 소외와 자아 신뢰 사이의 불협화음이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바람에 그녀는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 P64

나인 동시에 내가아니라는 이런 생각은 하는 것만으로도 어지럽다. 나는 내가갈수록 낯설어진다. 나의 세포에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래서나 자신의 실체를 보면 볼수록 나는 낯설기만 하다.
비유의 언어를 빌릴 때 비로소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물론과학의 탐구정신은 그런 비유의 언어를 애매하다며 거부하리라. 그러나 지금 우리의 고찰에는 좋든 나쁘든 비유의 언어만쓸 수 있다. 비유컨대, 나는 몸을 통해 늙어가면서 몸을 적대시하는 나다. 젊었던 시절 나는 몸을 등한시하면서도 몸과 더불어 나였다. - P79

사회의 모순은 어디서 성립하는지, 이 모순을 거부할 기회에는 어떤 게 있는지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만 한다. 왕성하게활동을 벌이던 젊은 시절부터 눈치 채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짙어져가는 합의, 곧 우리를 바라보는 사회적 판단의 합의는 그러니까 미리부터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사회적 존재, 우리 존재 그 자체라 불러도 좋을 사회적 존재는 본격적인노화의 과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로 공방을 주고받는 가운데 그 윤곽을 드러낸다. 우리가 이야기를 하면 사회는 대답한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사회라는실의 1막이다. 2막은 1막을 재조명하는 것으로, 반론 혹은 대답으로서의 행동이라는 차원이다. 우리는 작가로서 말하면 받아들여지리라는 믿음으로 작가적 표현으로써 사회에 도전한다. 우리가 활동하는 작가로 실제 영향력을 발휘하느냐는 물음은 사회가 우리의 도전을 받아들이는지 그여부에 달렸다. - P102

노인은 자기 부정과 파괴에
"안 돼!" 하고 저항하는 동시에 "알았다" 하고 그것을 인정한다.
아무런 전망이 없는 부정에서만 노인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은 자아의 포기를 강요당하는 획일적 일상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노인은 정신병원에서 묵을 거처를 찾는다. 여전히 젊음이라는 마스크를 쓴 것처럼 자신을 기만하며, 거짓으로 묵직한 황혼의 노년이라는 목가적 풍경에 매달린다.
노인은 사회가 요구한 바로 그대로다. 노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할 때에만 누군가다. 노인은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안에 녹아 있는 부정이 자기문제임을 알아차리고 그에 저항하려 몸을 일으킨다. 노인은 실행할 수 없는 일을 하려 과감히 떨쳐 일어난다. 아마도 이게 노인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 진정 품위 있게 늙어갈 유일한 가능성이리라. - P131

폭소를 터뜨리게 만드는 동시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창피한 것, 곧 통속은 언제나 어제 유행으로 체험된 것이라고 A는생각했다. 그러니까 역사로 자리 잡지 못한 어제의 유행만 낡고늙은 것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헤세, 귀엽다는 형용사를 붙일수 있는 그의 문학은 어제의 것이며, 어제 인기를 누렸다. 다시말해서 대량소비로 닳아버렸으며 가치를 잃고 말았다. 헤세가귀여움에 몰두하던 때와 같은 시기에 차갑게 인간 실존의 전율을 써내려간 카프카는 통속화 과정에 조금도 사로잡히지 않 - P147

았다. 카프카의 작품이 헤세의 귀여운 그것과 전혀 다른 요소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말이 나온 김에 짚어보자면 다른 누구도 아닌 헤세가 카프카의 문학을 읽어보라고힘주어 권고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게 순전한 우연의 일치일까? 카프카가 통속화 과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것은이 프라하 시민이 슈바벤 출신의 스위스 남자와 반대로 단 한번도 동시대의 유행으로 부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카프카 열풍은 그가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았을 때 비로소 일어났다.
오히려 카프카 열풍은 일종의 안티 유행이라는 태도로 출현했으며, 역사적인 동시에 미래를 제시하는 성격을 갖추었다. - P148

문화적으로 늙는 일의 품위는, 그것이 그 가운데 자리 잡은 사회적 노화의 품위와 마찬가지로 다시금 오로지 모순된 저항, 모순과 철저히 싸우는 저항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새로운 체계들은 이미 찾아왔다. 늙어가는 사람은 아무 희망도없이 매일 새로운 체계를 해독하려는 싸움터로 나가야만 한다.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포기하지 않고자 하는 한, 부패하는 질서를 버려서는 안 된다. 자신의 정신적 태도가 시체를 붙들고 못 다한 성욕을 풀려는 음울한 네크로필리아"라는것을 잘 알면서도,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부패한 체계에 무가치할지라도 충절을 보여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무망한 시도로 자신의 부정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거부해야만 한다. - P169

"틀렸어, 그건 그냥 죽음이야."Le faux, c‘est la mort. 장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이 말로 철학자는 죽음을 거절했다. 인간의실존을 불투명한 본질로, 돌처럼 굳어진 ‘존재‘etre로 만드는죽음을 거부한 것이다. ‘에트르‘être(존재)는 그저 ‘아부아레테‘
avoir-été(현재완료형으로 ‘갈수록~하다‘라는 프랑스어 문법옮긴이)일뿐이다. 죽음과 대결하려는 사람은 단지 과거와 현재를 맺어주는 위험한 결합 그 이상의 부담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가 저지르는 일은 자신을 연모한 나머지 스스로를 굳어진 존재로 만드는 음란한 근친상간이다. 그러나 유일한 진리는 죽음이라고도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어쨌거나 죽음은 미래 가운데 미래, 모든 미래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떼는 모든 발걸음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행보다. 우리가 품는 모든 상념은 결국 죽음에서 깨어진다. 죽음의 완전히 공허한 진리, 그 비현실적인 현실성은 우리 인생이 가지는 무의미함의 완성이다. 무無로 넘어들어가면서 처음으로 완전하게 인생을 극복한 우리의 승리는 곧 우리의 총체적 붕괴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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