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음이 좀 정리된다.

어제 아침 서재를 들락거리고 있는데 희원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얼마전 왕따 사건으로 피해자의 아버지가 교장실로 항의를 하는 바람에 오늘 학교로 좀 오시란다. 순간 가슴이 마구 뛰면서 화도 좀 났다. 그만한 일로 담임을 통하지 않고 교장실로 간 그 아버지가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선생님에게 좀 딱딱한 어조로 내 기분이 전달되도록 했다. 그러고 오후 3시에 교실로 가기로 약속을 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난 주 금요일, 생전 처음으로 희원이가 반성문을 썼다며 내게 부모님 말씀을 써달라고 하며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앞장엔 희원이가 쓴 반성문이고, 뒷장은 여학생 몇명이서 직접 끄적거린 왕따리스트 카피였다. 선생님은 '설마 내 아이가....' 이런 의심을 어머니가 가질까봐 증거서류?를 첨부하신 거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속으로 아주 놀랬다. 반듯하고 순진하고(내 아이라서가 아니라) 분별력 있는 아이가 이런 짓을 했다니 말이다. 하지만 아이의 태도와 말투에서 충분히 잘못을 느끼고 문제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난 놀라움을 감추고 겉으론 좀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곤 자초지종을 물었다. 희원이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편이라 자신의 부정적인 요소나 학교에서의 부정적인 일은 거의 말을 하지 않는 편이다. 예를 들어 칭찬을 받은 일은 나에게 얘기하지만 꾸중을 들었거나 자존심에 금이 간 일은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일단 내가 그 반성문 아래에 '부모님 말씀'에 적은 글은 이렇다. '이 일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잘 지도해주십시오'  그 종이를 토요일날 아이가 선생님께 갖다드렸고 아이는 주말에도 나에게 왕따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묻고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아이의 생각은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성격에 문제가 있고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한두번 그러지 말라고 충고를 했는데도 고치려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에 대한 나의 말은 이렇다.

- 어떠한 이유에서든 한 사람을 다수가 모의하여 따돌린다는 건 또 하나의 폭력이다. 사람은 모두 장단점이 있다. 단점을 가지고 그 사람이 따돌림을 당해야한다면 우리 중에 어느 누가 그에 해당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무슨 권리로, 무슨 완벽한 사람이 있다고 말이다.  

희원인 많은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우리 사회에서 큰 문제로 떠오른 이 문제를 이번 기회에 곰곰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고, 아이가 쓴 반성문의 내용처럼, 다른 아이의 말만 듣고 그 아이를 왕따로 지목하는 일에 함께 한 게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오후 학교에 가게 된 것이다. 이 리스트를 만든 여섯 명 아이들의 엄마들과 선생님이 한 자리에 앉았다. 사실, 가담한 사람 앞으로 다 나오라는 선생님 말에 용감하게 나간 아이들은 이 여섯이고 더 적극적으로 한 아이들 몇은 안 나가고 앉아있은 아이도 있단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먼저 손을 든 점에서는 난 희원이를 다독여주었다. 나서지 않은 아이들이 비겁한 것이라고.

아이들이 모두 나가고 조용한 교실에 지우개 가루가 많이 어질러져 있었다. 나와 선생님은 비를 들고 간단히 청소를 하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다른 엄마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건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선생님은 이 일로 스승의 날이고 뭐고 교장실 불려가서 학생지도 잘 못 한 거 아니냐고 꾸중듣고, 피해자 엄마 항의 받고, 주말에 집에서도 아무런 일이 잘 되지 않더란다.

교장실로 찾아간 아버지의 아이는 작년에도 왕따를 당한 아이고 행동과 언어습관이 몹시 거칠고 거짓말도 잘하고 문제가 있다는 걸 선생님도 부모님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3월부터 선생님이 주시하면서 분위기를 세심하게 살피고 그 아이를 격려해주고 그래서, 작년처럼 아이 입에서 학교가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말은 안 나와서 그 엄마도 참 반가워하고 있었단다. 그런데도 반아이들이 그 아이옆에도 가지 않으려하고 수업시간에 발표를 하면 야유하고 따돌리기 시작하더란다. 남몰래 두어달 동안 선생님이 각별히 신경을 쓰신 흔적이 보여 선생님께 죄송했다.

사실 희원이는 좀 억울한 경우라고 하셨다. 내가 놀란 것은, 처음에 희원이도 왕따 리스트에 들어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서다. 그걸 작성한 아이들이 그 리스트를 희원이에게 보여주며 너도 여기에 가담하여 한명을 지목하면 그 리스트에서 빼주겠다고 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난 이 내막을 아이가 아닌, 선생님에게서 들었다. 희원인 그런 이야기일랑 자존심이 상해 엄마에게 못 하나보다. 왕따를 하는 가해자들에게 물으면 그냥 재미로, 장난삼아서,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생님도 이 아이들이 무슨 특별한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란 것도 알겠다고 하셨다. 고학년지도가 이래서 어렵단다. 학습지도보다는 이런 문제 때문에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단다. 선생님은 학교에서 엄마들은 집에서 아이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며 좋은 말로 잘 지도하기로 하고 교실을 나왔다.

어쩌면 이 기회에 꾹꾹 눌러두었던 문제가 표면화되어 더 좋은 분위기로 이끌어질 수도 있겠다고 선생님께 희망적인 말씀을 한마디 던졌다. 왕따를 당한 그 아이의 사례를 몇가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선생님의 얼굴에 안타까움과 힘겨움이 엿보여, 이래저래 걱정을 끼치게 되고도 오히려 발끈했던 내가 부끄러웠고 죄송스러웠다. 선생님의 딸도 중학생이 되고 얼마간을 매일 용돈을 빼앗기고 들어왔단다. 안 주면 왕따 시킬거라고 협박을 하더란다. 그래도 선생님은 담임께 항의도 하지 않고 기다렸단다. 시간이 지나자 그 담임이 알게 되고 일이 해결되었다고 하시며, 담임을 통하면 해결 못 될 일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며 장난으로 던진 돌이 개구리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고 하셨다.

교문을 나서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개성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있는 건 아닌지.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을 가지고 그 사람을 집단적으로 모독할 수 있는지. 학교에서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이 참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오면 좋겠다. 나와 다른 점을 보듬어줄 줄 알면 좋겠다.

오늘 아침에 가방을 메고 나가는 아이의 뒷통수에 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희원아 점심 맛있게 먹어. 그리고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라고 말했다. '응, 여자친구들이랑은 다 잘 지내.' 이러고 가는  아이의 등이 오늘따라 가엾어 보인다. 마음도 몸도 아름답게 자라기를, 내 아이의 다름이 서로에게 눈엣가시가 되지 않는 세상이기를, 그래도 믿어볼 수 있는 건 착한 아이들의 눈망울이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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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4-05-18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의 생각은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성격에 문제가 있고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한두번 그러지 말라고 충고를 했는데도 고치려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은 거 같습니다. 솔직히 저도 왕따 당하는 아이들에게 전혀 문제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보살핌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아이들에겐 그게 안 먹혀 들어갈 때가 많고, 아이들에게 이해시키는 게 힘들어질 때가 많습니다. 저도 화를 내며 '왜 너는 다른 애들처럼 행동하지 못하니?'하고 야단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 아이에게 쏟는 관심을 차라리 다른 애들에게 나눠주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된다는 걸 압니다.
님과 같이 모인 학부모님들은 좋으신 분들이네요. 담임 선생님께서도 현명하시구요. 작년에 우리 학교에 비슷한 왕따 사건이 있었는데,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진 적이 있었습니다.

진/우맘 2004-05-18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놀라셨겠네요. 그래도 참, 차분하게 잘 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런 경우라면...갑자기 자신이 없어지는데요. 뭐라할까...뭐라할까...머리만 긁적이다 가요.

아영엄마 2004-05-18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따 문제.. 저는 늘 걱정입니다.
아영이가 워낙 행동이 느려서-아직도 복도에서 밥 먹곤 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못난 아이로 비치고 왕따당할까봐요...
그리고 왕따 당하지 않으려면 왕따를 시켜야 하는 삭막한 현실도 답답하고.. 선생님들도 여러모로 참 어렵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업무도 과중한데 아이들의 면면을 두루 살피셔야 하니.. 그래도 희원이는 좋은 선생님이랑 엄마를 만나서 다행이에요~

프레이야 2004-05-1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니님, 진/우맘님, 아영엄마님, 네, 병이 깊어지기 전에 잘 발견했다싶어요. 선생님이 참 좋으시더군요. 그 아이에게 하루에 한번씩은 '말조심해. 예쁜 말 써.' 이렇게 주의도 준대요. 계속 왕따를 당하다보니 성격이 더 비뚤어지고 난폭해진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 아이가 사실 불쌍하기도 했어요. 꾸준하게 관심을 갖고 보살펴주어야할 아이 같았어요.

조선인 2004-05-1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2때 친하게 지내던 무리로부터 갑자기 왕따를 당한 적이 있어요.
전 몹시 당황하고 기가 죽어 어쩔 줄 몰라 했는데,
그 중 한 친구가 방과 후 저를 불러 너가 왜 왕따를 당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줬지요.
제가 잘 모르겠다고 머뭇거리자 잘난 척하는 것 때문이라며 그 예를 세세히 들어줬습니다.
그제서야 무심코 한 저의 언행이 친구들에겐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며,
심지어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다행히도 어른스러웠던 그 친구 덕에 다른 친구들과도 금새 화해할 수 있었고,
그날의 일들은 제 인생의 소중한 교훈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희원에게도 오늘의 사건이 귀중한 경험으로 남을 수 있길 바랍니다.

프레이야 2004-05-18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그런 경험이 있었군요. 참 성숙한 모습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 다행스럽습니다.
저도 때때로 내가 물에 기름처럼 한데 어울리지 못하는 이질적인 존재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느낌은 누구든 가질 수 있는 것이겠지요. 고독을 즐기는 성향도 있구요. 웃고 떠들고 난 후의 공허감이 두려울 때가 솔직히 있지요. 하지만 그런 태도가 남들에겐 좋지않게 보일 수도 있겠다싶네요. 조선인님, 희원이게도 귀중한 경험이 되기를 바래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

박예진 2004-05-2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글인데 ... 워낙 글솜씨가 좋으셔서 넋 나간 채로 읽었네요 .... 제가 어렸을 때도 왕따당한 아이가 있기는 있었어요. 제가 왕따시킨 것은 아니였지만 , 보통아이는 아니었구요 , 왜 있잖아요...다른 애...그런 애였거든요 . 저도 왕따 안 당하도록 친구들에게 더더욱 친절히 대해야겠어요.

waho 2004-06-06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무섭네요. 따돌림 당하는 애들은 항상 있지만 요즘은 애들이 넘 무서워져서 따돌림의 정도도 심해지는 것 같아요. 희원이도 맘에 상처가 됐겠네요. 아이에게 좋은 경험으로 남았음 좋겠네요. 님도 많이 놀라셨겠어요.

프레이야 2004-06-06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릉댁님, 힘든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마음 쓰여요. 잘 넘겼으면 좋겠어요.
희원인 요즘 이 일로 많은 생각을 한 것 같고 그 친구도 별 무리 없이 학급에서 잘 지내고 있대요. 선생님께 쓴 편지(일기장에)에서 아이가 이렇게 컸구나, 하는 걸 보고 뿌듯하기도 했어요. 다 자라는 과정이 아니겠어요? 다치고 치유되고 그러면서 강해지기도 하구요. ^^
 
어휴, 나 혼자서 집안일을 다 하라구? 아나스타샤 5, 미국동화
로이스 로우리 지음, 최덕식 옮김, 신혜원 그림 / 산하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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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헤아리며>라는 감동적인 동화를 쓴 로이스 로우리가 일곱편의 시리즈물로 아나스타샤를 주인공으로 재미있는 동화를 썼는데, 이 책은 그 다섯 번째 이야기이다. 아나스타샤는 사춘기의 예민하고 영리한 여자아이이다. 생각도 많고 성장의 이런저런 과정을 겪고 있는 주인공이다. 미국동화이지만 우리에게도 그리 거리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유머가 깃든 통통 튀는 대사가 재미있고 일상의 이야기이지만 흐름도 빠르다.  

이 책의 삽화는 <하느님의 눈물>에서도 그림을 그린 신혜원님이 그렸다. 담고 있는 생각거리는 얕지 않지만 계몽성을 강조하지 않는 위트있고 가벼운 터치의 이야기처럼 삽화도 마치 만화처럼 그려놓았다. 쓱쓱 진한 연필로 그려 놓은 것 같이 어릴 때 본 명랑순정만화의 분위기이다. 아나스타샤는 올빼미안경을 쓴 13살(중1 정도)의 여자아이이고 세살 난 남동생(우리나이론 다섯 살쯤)이 있다. 시인이자 영미문학교수인 아빠와 화가인 엄마 사이에서 별 어려움없이 평범한 보통의 가정에서 산다.

이 다섯번째의 이야기에서는 엄마가 대부분 담당하는 집안일을 아나스타샤가 몸소 겪고 그 어려움을 이해하게 되는 내용이 주된 흐름이다. 중간에 끼어있는 또다른 이야기는 이성에 대한 것이다. 남자친구에게서 첫번째 데이트 신청을 받고 낭만적인 꿈을 꾸고 열정적인 저녁준비를 했다가 어설프게 꿈이 깨어지는 비애(?)도 겪는다. 그와 동시에 아빠도 첫사랑의 아름다운 환상이 깨어지는 배신감을 겪고 마음의 열병이 몸에 나타난건지 수두를 앓는다. 아빠의 첫사랑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개방적이고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좋다. 5학년 아이들도 이 부분을 그리 이질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춘기 소녀 아나스타샤의 이런저런 생각들이 꽤 그럼직하고 실감난다. 이름으로 특이한 별명을 지어 부르고 브래지어끈을 잡아당기는 남자친구들에 화가 나기도 하는 아나스타샤를 엄마는 옛날 자신의 솔직한 경험과 감정을 이야기하며 다독인다. 솔직히 좋은 감정도 들었다고, 하지만 이젠 아무런 느낌이 없어진 나이가 돼버린 걸 엄마는 오히려 씁쓸해한다. 친구같은 엄마와 딸 사이 같다. 나도 이런 사이로 딸과 지내고 싶다.  

아나스타샤는 일을 가지고 있는 엄마가 다른 엄마들처럼 맛있는 간식도 못해주고 그외의 가사일도 얼렁뚱땅 하는 것에 대해 이해를 못하겠다고 아빠와 작당한다. 엄마는 조직적이지 못해 그러니까 시간표만 짜면 모든게 해결될 거라고 득의양양하게 키득거린다. 하지만 그런 아나스타샤에게 미소만 짓고 있는 엄마는 모든 걸 알고 있다. 시간표대로 일이 다 되는 것도 아닐뿐만 아니라, 예기치 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를 말이다.

딸 아나스타샤는 엄마의 생활과 엄마의 답답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아나스타샤에게 가정주부로서 역할을 해야하는 열흘이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엄마의 출장 때문이다. 시간표를 빡빡하게 시간대별로 짜놓고 출발하여 시작은 순조로운 것 같았지만 날이 갈수록 시간표는 예기치 못한 일로 자꾸 수정되고 생활은 거의 뒤죽박죽이다.  첫 이름은 <성차별에 반대하는 크루푸닉 가족의 시간표>로 시작하지만  대폭 수정된 '낭만적인 밤을 위한 시간표'를 거쳐, 마지막의 그냥 '집안일 시간표'에서는 '후유증이 엄청나다'고 하며 '엉엉 울었다' 라고 쓴다.

아나스타샤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로스앤젤레스에 가 있는 엄마에게 앞당겨 오라고 전화를 하고 돌아온 엄마는 엉망이 되어 있는 집안을 세 시간만에 정돈한다. 엄마의 가사일에 도움을 주는 해결책도 마련되었다. 냉동식품을 해동하기 위한 전자레인지와 지겨운 가사일에 활력을 주기 위한 '탭댄스 강습권'이 그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엄마는 해결 못하는 게 없는 놀라운 사람'이란 걸 이제 인정하고 항복한다.

탭댄스 신발을 신고 춤을 추며 2층을 오르락거리는 엄마가 아나스타샤가 보기엔 좀 '주책스러워 보였지만 아주 재미있기도' 하다. 5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고 얘기 나누며 우리 딸에게 엄마가 주책스러워보이지만 재미있을 때가 언제냐고 물어보니, 공연보러 가서 좀 오버할 때라며 환하게 웃었다. 엄마를 친구처럼 생각하는 딸이 좋다. 아나스타샤는 엄마를 이해하는 폭이 성큼 커졌다. 엄마도 똑 같은 일상에 활력소가 필요한 사람이고 가사일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예기치 못한 일들이 복병처럼 나타나는 것이 하루의 일상이고 우리의 인생 자체이다.

삶이란 그리 녹녹하게 조직적으로 엮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상치 못하는 것들의 경이로운 변종으로 나타나는 것이란 걸 더 살면 느낄 것이다. 정말 되돌아보면 계획대로 된 것이 없다. 따져보면 무엇이든 계획하고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안개속 희미한 윤곽을 부여잡고 뿌연 길을 걷다가 아주 우연한 것이 필연인 것처럼 나에게 붙박혀온 것 같다. 우리의 하루가 그러한데, 하물며 긴긴 삶이 그렇게 불확실하고 돌발적인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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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5-18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정말 제대로 준비하고 시작한 건 없는 것 같아요. 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딸과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로 가고 싶어요. 계속...

starrysky 2004-05-18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시리즈입니다. 아나스타샤. ^^ 시인이자 교수인 아빠와 화가인 엄마, 사춘기에 접어든 엉뚱한 딸 아나스타샤와 천진난만 꼬마 천재 샘의 이야기가 사람을 정신없이 책 속으로 빨아들이지요. 예전에 모아둔 시리즈가 거의 없어져 속상했는데 이렇게 다시 나왔군요. 기회 되면 사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프레이야 2004-05-18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arry sky님, 반갑습니다. 저도 이 시리즈 무척 좋아합니다. 산하출판사에서 나와있더군요.
님의 서재에서도 뵙기로 해요.^^

ROSE 2004-05-20 0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의 대부분의 (저를 포함해서...) 딸들이 엄마를 아니, 엄마의 생활과 답답함을 이해하기
힘들어하고 그때문에 엄마와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엔 엄마를 이해하고 그래서 닮아가는 게
아닐까 하네요.....
많이 컸다고 생각하지만 엄마에겐 항상 어린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왠지 엄마한테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어지네요..........
 
마법의 설탕 두 조각 소년한길 동화 2
미하엘 엔데 지음, 유혜자 옮김 / 한길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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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나도 아이에게서 물러설 줄을 안다. 큰아이가 3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내겐 아주 충격적인 일이 있고난 이후로 그렇다. 무슨 일로 그랬던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난 아이를 심하게 야단하였고 아이는 자물쇠가 달린 비밀일기장에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갈겨놓은 걸 그 다음날 우연히 발견했다. 빨간 필기구로 박박 신경질적으로 모나게 써놓은 글귀를 보는 순간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그날 난 나의 어린시절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난 어른들에게 그리 고분고분한 아이가 아니었다. 보기엔 말수가 적으니 온순한 형으로 보이지만 내부에선 불만과 비판과 내 나름의 잣대가 항상 촉수를 세우고 있었다. 나의 심기를 유독 긁은 분은 지금은 벌써 돌아가시고 안 계신 외할아버지였다. 다섯살 아래의 남동생을 편애하고 나에겐 별로 따뜻하게 대해주시지도 않았다. 내딴엔 그게 참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난 더 어릴 때부터도 엄마가 버스타고 가자고 하면 택시 타고 가겠다고 길바닥에서 딱 버티고 있기 일쑤였단다. 그래서 엄마는 살살 꼬셔서 나를 집까지 데려가서 심하게 때리곤 했단다. 한번은 우물에 빠뜨리겠다고 거꾸로 날 들고 내 고집을 꺾으려하기도 했다. 내려놓으니 난 죽는다고 펄쩍펄쩍 뛰면서 난리를 부리더란다. 고1 땐 담임선생님이 무슨 시집을 학급의 아이들 의사와는 관계없이 모두 다 사라고 하셔서 이의를 제기했다가 쓴소리를 들어야했다. 아무래도 만만한 아이는 아니었지싶다.

그래도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을 위험부담을 안고서도 자기가 먹겠다고 결정하는 렝켄은 나보다 열배는 착한 아이인 것 같다. 모두가 지나온 그 시절에 거대한 벽과도 같은 부모님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 한 번 안 가져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문제가 렝켄은 부모님의 큰 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키가 좀 작았더라면 대화가 될텐데, 키가 너무 커서 말이 안 돼.'  이렇게 단순한 아이다운 발상에서 출발하여 렝켄은 환상을 경험한다. 렝켄은 마법을 쓸 줄 아는 요정을 자기 마음의 나라에 불러들인다. 빗물거리에서 사는 그 요정은 손가락이 여섯 개이다. 길다란 손가락을 깍지 끼고 앉아 렝켄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렝켄의 소원을 들어준다.

렝켄이 요정을 두번째로 찾게 될 줄은 자신도 몰랐다. 자신의 소원대로 부모님이 성냥갑 속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졌지만 정작 기쁘기만 한 게 아니라 두려움과 슬픔이 덮쳐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고아가 된 것처럼 세상에 저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막막함은 물론 외롭기까지 하다. 렝켄이 두번째로 요정을 찾아가는 길은 더욱 매력적이다.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날아온 요정의 편지 한 장으로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려서 그것을 따라 하염없이 뛰어가는 것이다. 바람거리로 옮긴 요정의 집은 꽁꽁 언 겨울풍경이다. 이곳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과는 다르다. 12라는 숫자만 있는 벽시계안에는 수리부엉이가 있고 밤 12시 아니면 낮 12시에만 마법은 발효한다.

부모님을 되돌려놓기를 위해서 요정은 렝켄에게 힘든 결정을 스스로 내리게 한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시간을 놓쳐버리는 꼴이 될 것이다. 렝켄은 드디서 '시간을 돌려주세요!' 라며 소리친다. 판타지의 세계에서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고 돌아갈 수 있는 현실이 있다는 건 행복하고 다행한 일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불합리한 현실이 있기 때문에 환상의 세계가 더 진실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일 게다.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은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에 아이들이 한 입에 톡 집어넣기 좋아하는 각설탕 두 개가 있다. 입에 들어가면 까끌한 느낌과 달콤함이 모순되게 느껴지지만 사르르 녹으면서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가.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판타지의 공간에서는 시간을 돌린다는 식의 시간장치가 가능하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는 소망은 누구든 가져봄직한 환상의 출발지점이다. 역시 미하일 엔데는 '시간'이라는 끝없는 주제를 놓지못하는 것 같다.

- 물론 그 결정은 지금 네가 이 자리에서 내려야 해.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 계속 그렇게 지내야 되거든.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종종 있잖아. 이해할 수 있겠지? 정말로 계속 이렇게 지내길 원하니?-

지금도 나의 어른들과 마음의 갈등을 하며 사는 나는 이 글귀가 마음에 꽂혔다. 3학년 아이들은 렝켄의 당찬 행동이 좀 심한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그동안 부모님께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섭섭한 것을 표현하는 대목에선 봇물 터지듯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고싶은 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기도 했다. 역시 아이들은 착하다. 어른들의 눈이 비뚤어져있을 뿐이다.

렝켄은 환상을 경험한 후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렝켄은 부모님의 말씀을, 부모님은 렝켄의 말을 무턱대고 반대하지 않고 꼭 필요할 때만 그렇게 했'다. 나도 우리 아이들도 서로 물러나야하는 아름다운 지점을 안다. 참 많이도 전쟁을 겪고 얻은 지혜이다.

이 책은 환상적인 이야기에 걸맞게 삽화가 멋지다. 삽화가 주는 기묘한 분위기가 이야기를 더욱 극적이게 한다. 빗물거리와 바람거리의 요정의 집으로 들어가는 풍경은 그야말로 환상이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그 풍경을 담기에 지면이 부족한 것 같다. 오히려 눈을 감고 머릿 속으로 그려보는 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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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2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생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죠^^, 차분한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다연엉가 2004-05-12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2학년인 소현이도 서서히 반항의 몸짓이 일고 있다는 것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아이의 말을 반대할때마다 부모의 키가 절반으로 줄여든다면 기꺼이 각설탕을 먹을 아이들이 많을 것 같네요. 리뷰를 읽고 많은 반성을 하게 합니다.^^^

BRINY 2004-05-13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아이들은 착하다-그 아이들이란 몇살부터 몇살인가요.
오늘 신체검사날, 중학생 130명 상대로 시력검사 하고 났더니 힘들어 죽겠습니다. 뒤에선 죽어라 떠들면서, 나와서 시력판 읽으라고 하면 웅얼웅얼.
게다가 스승의 날 전날이라고 법석을 떠는데, 그냥 학생들이 교실 어질러놓고 낙서하고 주전부리하고 소리지르는 이벤트일 뿐이지 뭐냐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선생님, 우리가 이런 거 해줘서 고맙죠?]하고 대답을 강요하더라구요.

호밀밭 2004-05-13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하엘 엔데의 작품 늘 좋아요. 사실 이 책은 읽지 못했지만요. 전 설탕이라는 단어의 어감을 좋아해요. 단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그 느낌에 딱 맞는 이름을 가졌는지 신기해요. 이 동화 언젠가는 읽어 봐야겠네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달아이 2004-05-13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어느 방송에서 엄마의 잔소리란 주제로 토론을 했는데, 어떤 엄마가 그러더군요. 아이를 잘 키워야 하는 의무와 책임감 때문에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게 된다구요. 전 그 소리가 참 마음에 와 닿았는데, 큰애는 아닌가보더군요. 덕분에 또 짤막한 다툼극 하나를 펼쳤답니다. 이러다 우리 아이도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을 원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

BRINY 2004-05-13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를 잘 키워야 하는 의무와 책임감 때문에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게 된다 -> 저도 맘에 와 닿는 소리여요. 지금은 애들 보내놓고, 우리반과 옆반에 한명씩 데리고 애보기하는 중입니다. 어른인 제가 참고 이해해야죠. 음음.

프레이야 2004-05-13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니님, 아이들 때문에 맘이 좀 상하셨군요. 제 생각에도 스승의 날 없애면 좋을 것 같아요. 서로 부담도 되고, 늘 감사한 마음이야 이 날 형식적으로 하는 것보다 어느 때고 마음에서 우러날 때 할 수 있잖아요^^ 님, 이 책은 초등저학년 권장도서로 되어 있구요. 전 3학년 아이들이랑 함께 읽었어요. 한 4학년까지는 아이들, 그래도 착해요. 간혹 아닌 것 같은 아이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착하지요. 그애들 보면 내가 참 착하지 못하다는 생각 많이 하거든요. ^^

치유 2004-05-16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차분하고 좋은 글을 읽고 꼭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읽는나무 2004-05-24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밀렸던 리뷰를 몇편 읽다가....이리뷰가 마음에 와닿아 몇자 적습니다...
저와 같은 감정들을 느끼셨는지.....코멘트가 많네요..^^
많은 뜻을 내포한 책같단 생각을 하며....님의 리뷰 잘 읽고 갑니다.....^^
 
키가 크고 수수한 새라 아줌마
패트리샤 매클라클랜 지음, 이영아 그림, 아기장수의 날개 옮김 / 고슴도치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어린이독자를 긴장과 흥분으로 몰고가는 동화에 비해 이런 식의 동화를 아이들은 지루해한다. 나른한 일상과도 같은 스토리 전개에는 특별한 사건이나 자극적인 대사도 없이 전체가 잔잔한 바다의 물결이듯 하나의 고요한 리듬을 타고 넘는다. 그 바다에 몸을 맡기고 누우면 햇살이, 바람이 부드럽게 이마를 간진다. 그리고 어느새 마음은 근원 모를 충족감에 젖는다. 작은 것의 귀중함, 사소한 것들의 행복감, 서로를 기쁘게 해주려는 소소한 노력들이 사람의 마음을 참 푸근하게 만든다. 높은 파도를 타고 스릴을 느끼고 싶은 아이들은 이런 류의 동화에 매력을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문학적인 느낌을 가질 줄 알고 문장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에 기쁨을 느끼는 아이라면 충분히 재미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키가 크고 수수한 새라 아줌마>는 원제를 꾸밈없이 번역해 놓은 제목이다. 좀더 글의 분량이 길고 묘사가 많이 나오는 <초원의 집>과 비슷한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미국개척시대의 생활이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의 가족사를 글감으로 하여 쓴 동화라는 점도 닮았다. 삽화는 번역하여 나오면서 그려넣었는데, 글의 내용을 좀 더 삽화로 많이 표현해도 좋았을 것 같다. 마치 외국사람이 그린 것 같다는 평을 아이들이 하는 것으로 보아 글의 분위기와는 맞아떨어졌다고 본다.

화자는 애나라는 소녀다. 남동생과 아빠와 살며 엄마를 대신하여 집안일도 하는 야무지고 착한 아이다. 둘째를 낳은 바로 다음날 저 세상으로 아내를 보내고 집안에 늘 퍼지던 노래소리는 끊겼다. 그런 아빠가 어느날 아내를 구하는 광고를 신문에 내고 얼마 후 기차를 타고 동부해안의 메인 주에서 중부 캔사스까지 한달 예정으로 온 새라아줌마. 그녀는 노란 보닛모자를 쓰고 커다란 천 가방을 들고 왔다. 한눈에 보아도 키가 크고 수수하며 손도 크고 거칠다. 머리도 잘 땋고 목수일도 잘 한다. 특히 그녀는 노래 부르는 걸 무척 좋아한다.

광활한 들판에서 농사를 주로 하는 애나의 가족과 새라가 살아온 해안 마을의 생활 환경은 많은 차이가 있다. 가치관에도 차이가 있어 캔사스의 가족들의 메인 주의 비교적 개방적인 사고와 말을 금세 따라한다. 새라는 하루도 바다를 그리워하지 않는 날이 없다. 그런 기미를 눈치 채는 예민한 애나는 그래서 불안하다. 새라의 딸이 되기를 바라는 애나는 가엾게도 새라가 좋아하는 바다가 우리에게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새라와 애나의 가족이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이 참 섬세하고 소박하게 그려진다. 제이콥씨는 별로 말이 없다. 하지만 누구보다 자상하고 상대를 기쁘게 할 줄 안다. 예전처럼 집안에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계속 울려퍼지기를 바라는 애나가 새라에게 집중하고 고심하는 심리는, 애나가 비스킷 반죽을 젓다가 손동작이 느려지기도 하고 반죽을 섞고 또 섞는 행동으로도 잘 보여준다. 인물들의 소중한 감정을 은근하고 단아하게 보여준다. 부연설명이나 장식이 없이 심리묘사의 방식이 조촐하다. 문장도 길지않고 불필요한 묘사는 거의 자제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웃의 매기 아줌마도 광고를 보고 아내가 되려고 와서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이다. 테네시가 고향인 매기는 새라에게 '어디에 살든지, 늘 그리운 것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라며 정원을 꾸밀 수 있는 납작한 나무상자와 닭 3마리를 선물로 준다. 그리움을 달래는 수단이 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새라의 마음 속 그리움의 뿌리는 언제나 바다이다. 파랑, 회색, 초록색의 3가지 색을 띠는 바다를 내내 걸어두기 위해 새라는 읍내에서 3가지 색의 색연필을 사오고 새 가족이 되는 이들의 집에는 옛노래와 함께 새 노래가 울려퍼질 것이다. 애나와 케이럽 그리고 제이콥씨도 죽은 엄마와 아내를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늘 그리워하며 살아갈까.

4학년 아이들과 이 책을 함께 읽고 얘기 나누며 지금 그리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거의 모두 돌아가신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지금 내가 그리워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다시 오지 않을 지나간 날들이라고 말하기엔 아이들에겐 이해되지 않을 먼 나라의 그리움이라 난 입을 다물고 종알거리는 아이들의 착한 눈을 응시했다.

가족은 서로 닮아가나보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최대한 배려하고 기쁘게 해 주는 것이 참가족일 거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도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는지. 가정의 달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의 사건들이 신문의 사회면에 끊이지 않는 요즘, 무슨무슨 날들을 형식적으로 챙기는 것보다 어느날 문득 조용히 내 가족을 위한 작은 기쁨을 마련해보는 건 어떨까. 바닷가 모래언덕을 그리워하는 새라를 위해 아빠가 만들어준 헛간 반 높이의 건초더미 모래언덕 같은 것처럼 말이다. 그 언덕은 이름하여 '우리의 모래언덕'이다. 네명은 점점 자신들도 미처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라는 이름으로 가족이 조심스레 되어가고 있다.

이 책은 한번 두번 문장을 되새기며 인물의 심리를 내것처럼 느끼면서 읽는 게 좋겠다. 담백해서 아름다운 문장과 잔잔한 감동을 만나는 즐거움도 신나는 사건이 펼쳐지는 이야기의 즐거움 못지않게 좋더란 걸 아이들이 느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케이럽의 이야기는 <종달새>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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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5-17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바다에 몸을 맡기고 누우면 햇살이, 바람이 부드럽게 이마를 간진다. 그리고 어느새 마음은 근원 모를 충족감에 젖는다. 작은 것의 귀중함, 사소한 것들의 행복감, 서로를 기쁘게 해주려는 소소한 노력들이 사람의 마음을 참 푸근하게 만든다."
책이었다며 예쁜 색깔로 밑줄을 그어놓았을 구절입니다. 언젠가 어느 소설책을 읽어나가면서 누군가 밑줄을 긋고 자신의 생각을 적어놓은 것들을 보면서 참 놀란 적이 있었어요. 어쩌면 내가 그 순간 느낀 그 느낌들을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해놓았을까하고요. 더욱 놀랐던 것은 책을 다 읽는 순간 그 끝에 적혀있는 코멘트 밑에 제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죠^^::
님께서 표현하신 이 구절도 혹시 예전에 제가 읽고 적어놓은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제 일상의 어느 순간엔가 느낀 느낌을 너무나 구체적으로 형상화시켜 놓으신 것 같아요. 저 스스로는 표현하지 못했었는데 누군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주는 순간에, " 맞아 바로 그거!"라고 대답하는 그런 느낌이네요.
제가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문해보지만 저 역시 쉽게 대답이 떠오르질 않네요. 분명 제 몸은 무엇인가를 목마르게 그리워하고 있는데, 제 의식이 삶의 속도에 취해 그 목마름을 망각하게 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늘 그렇듯이 잃어버려야, 그 부재를 통해서 목마름을 깨닫게 되는게 아닌지....삶의 행복이란 고통스러운 목마름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족....얼마전에 어느 TV프로에서 독신 여자, 자녀 없이 살려는 부부, 이혼한 어머니 둘과 그 자녀들이 함께 이룬 가족에 대한 내용이 방송된 적이 있었습니다. 관습에 의해 형성된 가족의 틀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더군요. 님의 글에서도 그 장면들이 떠올라습니다.
한 편의 동화를 읽고 적어놓으신 짧은 글이 제게 참 많은 상념들로 울려옵니다.^^

프레이야 2004-05-1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무늬님, 님의 글에서 느껴지는 감수성이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삶의 행복이란 고통스러운 목마름에 있는 것' 이란 님의 글이 와닿으네요. ^^

예성림 2004-05-30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달새>까지 얼마전에 읽었습니다.
작가가 그리는대로 그대로 우리는 볼 수 있고 느낄수 있는 책이죠.
격렬함도 때로는 좋지만 때로는 이렇게 잔잔함도 좋지요.
작가의 장식없는 문체가 많이 부러웠습니다.
 

한달에 한번 꼴로 돌아오는 어머니 교육두레의 날이다. 나는 급식과 관련한 일을 돕는 것으로 조가 짜여졌다. 오늘은 급식재료를 검수하는 일을 하였다. 4명이 한 조인데 한 분은 갑자기 남편이 병원에 입원을 하는 바람에 못 오셨다. 아침 일찍 요가를 하고 와서 바로 아이 학교로 갔다. 희령인 혼자서 씻고 옷 갈아입고 있으라고 어젯밤 미리 당부를 해 놓았다.

8시30분 급식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영양사께서 사람 좋은 웃음으로 맞아주셨다. 전에도 한 번 뵈었는데 어쩜 그리 편안한 웃음으로 사람을 대하는지 참 좋아보였다. 급식 재료들은 벌써 도착하여 재료실에 쌓여있었다. 우리는 흰 가운을 걸치고 신발도 갈아신고 손에는 위생비닐장갑을 끼고 재료실로 들어갔다. 나는 리포터화일과 볼펜을 들고 재료 하나하나에 대한 포장상태, 위생상태, 온도, 수량, 원산지, 제조일 같은 것들을 체크하여 기입하는 일을 하였다. 다른 분들은 일일이 재료를 뒤적여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세심한 눈으로 상태를 살펴보는 일을 했다.

냉동식품(명태포) 같은 경우에는 오는 과정에서 약간의 해동이 되어 박스 아랫부분에 있는 것은 괜찮은데 윗부분에 있는 것은 거의 다 녹아있었다. 운반과정에서 최대한 급속으로 하는데도 어쩔 수 없다고 배달원이 말했다. 영양사와 우리 검수단은 직송으로 배달 받는 걸 고려해봐야겠다고 말했다. 갑오징어는 원양산인데 냉동되었던 것을 냉장상태로 보관하였다가 가져온 것이었다. 이것도 윗부분에 있던 것에서 약간 콤콤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여러번 맡아보다가 한 마리를 들어냈다. 아깝게 어쩔 것인가 했더니 영양사는 과감하게 버린다고 말했다. 난 괜찮은 것 같던데 다른 두 분이 그렇게 까다롭고 꼼꼼하게 검수를 했다. 다 우리 아이들이 먹을 것이고 온도도 점점 높아가는 요즘이라 위생에 더 신경을 쓰이는 모양이다. 

야채(콩나물, 부추, 대파, 마늘)는 모두 무농약으로 쓴다. 콩나물이 참 건강하고 깨끗해보였다.  오는 과정에서 온도는 다소 높아졌지만 상태는 양호했다. 이 학교는 화학조미료를 일절 쓰지 않고 음식을 만든다. 오늘은 콩나물국의 국물을 내기 위한 넙적한 멸치(이름이 뭐더라?)가 두 박스 있었다. 원산지는 기장군이었고 잘 말려져 때깔도 고왔다. 그외 참기름, 식용유, 카레가루, 부침가루, 김, 어묵 같은 것들도 다 좋았다. 그런데 재료실 타일바닥이 물기가 있어 좀 질척거리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한 사람이 급식재료운송차도 상태를 점검하였다.

오늘 아이들 급식식단은 쌀보리밥, 콩나물국, 흰살생선카레튀김, 어묵오징어무침, 김구이, 비지미김치다. 맛있겠다. 난 아이들 아침을 빵으로 하기 때문에 학교나 유치원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는 걸 상상하며 그나마 위안한다. 게으른 엄마의 변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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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5-11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내일 중으로 급식업체 방문이 있다고 들었는데...처음이고, 게다가 살림엔 소질이 없는지라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BRINY 2004-05-11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곳은 자체급식하시나보네요. 저희는 S그룹 계열사에 위탁급식하는데, 학부모 급식 검수는 없어요. 저도 가끔 학생식당 가서 밥먹는데, 괜찮더라구요. 반찬은 김치 빼고 3가지. 도시락 반찬으로 환영받는 것을이 주로 나와요. 냉동식품 튀김류가 자주 나오는 거 아니냐고 가정 선생님은 지적하시지만, 저야 워낙 찬 도시락 밥이 싫어서 학교 다닐 적엔 거의 빵 싸가지고 다녔기에, 따뜻한 밥과 국을 먹을 수 있고 도시락 안 싸갖고 다니는 것 만으로 감사하답니다.

프레이야 2004-05-11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자체급식을 합니다. 급식실 설비를 잘 해놓았어요. 전교생이 급식실에서 갓 나온 따끈한 밥과 국으로 식사를 하죠.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해요. 저도 도서실 도우미 하는 날이면 급식을 먹는데 아주 맛있고 깔끔해요. 신설학교라 내년엔 6학년은 교실에서 먹게 될 거라네요. 학생수가 늘어나니까요. 이번 주 금요일 식단이 뭐더라, 현미밥, 추어탕, LA갈비찜, 오이소박이, 배추김치네요. 꼴딱 침 넘어가요, ^^

이리스 2004-05-11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추어탕.. 같은 것도 나오는군요.. ^^

파란여우 2004-05-12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급식수준이 거의 호텔식에 버금가는 수준이군요...요새 애들은 정말 좋겠다.^^

호랑녀 2004-05-13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추어탕에 갈비찜이라구요?(아무래도 이사해야겠군요)
우리학교도 올해부터 어머니회에서 급식검수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참 어렵네요. 일단 내 아이 놔두고 급식검수하러 일찍 나오는 것도 부담이시고...
가끔 엿보는데, 참 열심히 하시네요. 도서실도우미도 하시고.
배혜경님 아이들네 학교는 참 좋겠어요.

프레이야 2004-05-1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호랑녀님, 침나오죠? ^^
이번 금요일(5월14일)의 급식식단은 특별히 스승의 날 축하급식이랍니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식단이 좀 고급^^으로!! 다른 때도 맛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