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음이 좀 정리된다.

어제 아침 서재를 들락거리고 있는데 희원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얼마전 왕따 사건으로 피해자의 아버지가 교장실로 항의를 하는 바람에 오늘 학교로 좀 오시란다. 순간 가슴이 마구 뛰면서 화도 좀 났다. 그만한 일로 담임을 통하지 않고 교장실로 간 그 아버지가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선생님에게 좀 딱딱한 어조로 내 기분이 전달되도록 했다. 그러고 오후 3시에 교실로 가기로 약속을 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난 주 금요일, 생전 처음으로 희원이가 반성문을 썼다며 내게 부모님 말씀을 써달라고 하며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앞장엔 희원이가 쓴 반성문이고, 뒷장은 여학생 몇명이서 직접 끄적거린 왕따리스트 카피였다. 선생님은 '설마 내 아이가....' 이런 의심을 어머니가 가질까봐 증거서류?를 첨부하신 거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속으로 아주 놀랬다. 반듯하고 순진하고(내 아이라서가 아니라) 분별력 있는 아이가 이런 짓을 했다니 말이다. 하지만 아이의 태도와 말투에서 충분히 잘못을 느끼고 문제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난 놀라움을 감추고 겉으론 좀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곤 자초지종을 물었다. 희원이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편이라 자신의 부정적인 요소나 학교에서의 부정적인 일은 거의 말을 하지 않는 편이다. 예를 들어 칭찬을 받은 일은 나에게 얘기하지만 꾸중을 들었거나 자존심에 금이 간 일은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일단 내가 그 반성문 아래에 '부모님 말씀'에 적은 글은 이렇다. '이 일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잘 지도해주십시오'  그 종이를 토요일날 아이가 선생님께 갖다드렸고 아이는 주말에도 나에게 왕따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묻고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아이의 생각은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성격에 문제가 있고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한두번 그러지 말라고 충고를 했는데도 고치려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에 대한 나의 말은 이렇다.

- 어떠한 이유에서든 한 사람을 다수가 모의하여 따돌린다는 건 또 하나의 폭력이다. 사람은 모두 장단점이 있다. 단점을 가지고 그 사람이 따돌림을 당해야한다면 우리 중에 어느 누가 그에 해당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무슨 권리로, 무슨 완벽한 사람이 있다고 말이다.  

희원인 많은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우리 사회에서 큰 문제로 떠오른 이 문제를 이번 기회에 곰곰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고, 아이가 쓴 반성문의 내용처럼, 다른 아이의 말만 듣고 그 아이를 왕따로 지목하는 일에 함께 한 게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오후 학교에 가게 된 것이다. 이 리스트를 만든 여섯 명 아이들의 엄마들과 선생님이 한 자리에 앉았다. 사실, 가담한 사람 앞으로 다 나오라는 선생님 말에 용감하게 나간 아이들은 이 여섯이고 더 적극적으로 한 아이들 몇은 안 나가고 앉아있은 아이도 있단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먼저 손을 든 점에서는 난 희원이를 다독여주었다. 나서지 않은 아이들이 비겁한 것이라고.

아이들이 모두 나가고 조용한 교실에 지우개 가루가 많이 어질러져 있었다. 나와 선생님은 비를 들고 간단히 청소를 하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다른 엄마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건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선생님은 이 일로 스승의 날이고 뭐고 교장실 불려가서 학생지도 잘 못 한 거 아니냐고 꾸중듣고, 피해자 엄마 항의 받고, 주말에 집에서도 아무런 일이 잘 되지 않더란다.

교장실로 찾아간 아버지의 아이는 작년에도 왕따를 당한 아이고 행동과 언어습관이 몹시 거칠고 거짓말도 잘하고 문제가 있다는 걸 선생님도 부모님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3월부터 선생님이 주시하면서 분위기를 세심하게 살피고 그 아이를 격려해주고 그래서, 작년처럼 아이 입에서 학교가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말은 안 나와서 그 엄마도 참 반가워하고 있었단다. 그런데도 반아이들이 그 아이옆에도 가지 않으려하고 수업시간에 발표를 하면 야유하고 따돌리기 시작하더란다. 남몰래 두어달 동안 선생님이 각별히 신경을 쓰신 흔적이 보여 선생님께 죄송했다.

사실 희원이는 좀 억울한 경우라고 하셨다. 내가 놀란 것은, 처음에 희원이도 왕따 리스트에 들어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서다. 그걸 작성한 아이들이 그 리스트를 희원이에게 보여주며 너도 여기에 가담하여 한명을 지목하면 그 리스트에서 빼주겠다고 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난 이 내막을 아이가 아닌, 선생님에게서 들었다. 희원인 그런 이야기일랑 자존심이 상해 엄마에게 못 하나보다. 왕따를 하는 가해자들에게 물으면 그냥 재미로, 장난삼아서,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생님도 이 아이들이 무슨 특별한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란 것도 알겠다고 하셨다. 고학년지도가 이래서 어렵단다. 학습지도보다는 이런 문제 때문에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단다. 선생님은 학교에서 엄마들은 집에서 아이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며 좋은 말로 잘 지도하기로 하고 교실을 나왔다.

어쩌면 이 기회에 꾹꾹 눌러두었던 문제가 표면화되어 더 좋은 분위기로 이끌어질 수도 있겠다고 선생님께 희망적인 말씀을 한마디 던졌다. 왕따를 당한 그 아이의 사례를 몇가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선생님의 얼굴에 안타까움과 힘겨움이 엿보여, 이래저래 걱정을 끼치게 되고도 오히려 발끈했던 내가 부끄러웠고 죄송스러웠다. 선생님의 딸도 중학생이 되고 얼마간을 매일 용돈을 빼앗기고 들어왔단다. 안 주면 왕따 시킬거라고 협박을 하더란다. 그래도 선생님은 담임께 항의도 하지 않고 기다렸단다. 시간이 지나자 그 담임이 알게 되고 일이 해결되었다고 하시며, 담임을 통하면 해결 못 될 일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며 장난으로 던진 돌이 개구리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고 하셨다.

교문을 나서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개성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있는 건 아닌지.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을 가지고 그 사람을 집단적으로 모독할 수 있는지. 학교에서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이 참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오면 좋겠다. 나와 다른 점을 보듬어줄 줄 알면 좋겠다.

오늘 아침에 가방을 메고 나가는 아이의 뒷통수에 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희원아 점심 맛있게 먹어. 그리고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라고 말했다. '응, 여자친구들이랑은 다 잘 지내.' 이러고 가는  아이의 등이 오늘따라 가엾어 보인다. 마음도 몸도 아름답게 자라기를, 내 아이의 다름이 서로에게 눈엣가시가 되지 않는 세상이기를, 그래도 믿어볼 수 있는 건 착한 아이들의 눈망울이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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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4-05-18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의 생각은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성격에 문제가 있고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한두번 그러지 말라고 충고를 했는데도 고치려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은 거 같습니다. 솔직히 저도 왕따 당하는 아이들에게 전혀 문제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보살핌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아이들에겐 그게 안 먹혀 들어갈 때가 많고, 아이들에게 이해시키는 게 힘들어질 때가 많습니다. 저도 화를 내며 '왜 너는 다른 애들처럼 행동하지 못하니?'하고 야단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 아이에게 쏟는 관심을 차라리 다른 애들에게 나눠주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된다는 걸 압니다.
님과 같이 모인 학부모님들은 좋으신 분들이네요. 담임 선생님께서도 현명하시구요. 작년에 우리 학교에 비슷한 왕따 사건이 있었는데,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진 적이 있었습니다.

진/우맘 2004-05-18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놀라셨겠네요. 그래도 참, 차분하게 잘 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런 경우라면...갑자기 자신이 없어지는데요. 뭐라할까...뭐라할까...머리만 긁적이다 가요.

아영엄마 2004-05-18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따 문제.. 저는 늘 걱정입니다.
아영이가 워낙 행동이 느려서-아직도 복도에서 밥 먹곤 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못난 아이로 비치고 왕따당할까봐요...
그리고 왕따 당하지 않으려면 왕따를 시켜야 하는 삭막한 현실도 답답하고.. 선생님들도 여러모로 참 어렵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업무도 과중한데 아이들의 면면을 두루 살피셔야 하니.. 그래도 희원이는 좋은 선생님이랑 엄마를 만나서 다행이에요~

프레이야 2004-05-1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니님, 진/우맘님, 아영엄마님, 네, 병이 깊어지기 전에 잘 발견했다싶어요. 선생님이 참 좋으시더군요. 그 아이에게 하루에 한번씩은 '말조심해. 예쁜 말 써.' 이렇게 주의도 준대요. 계속 왕따를 당하다보니 성격이 더 비뚤어지고 난폭해진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 아이가 사실 불쌍하기도 했어요. 꾸준하게 관심을 갖고 보살펴주어야할 아이 같았어요.

조선인 2004-05-1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2때 친하게 지내던 무리로부터 갑자기 왕따를 당한 적이 있어요.
전 몹시 당황하고 기가 죽어 어쩔 줄 몰라 했는데,
그 중 한 친구가 방과 후 저를 불러 너가 왜 왕따를 당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줬지요.
제가 잘 모르겠다고 머뭇거리자 잘난 척하는 것 때문이라며 그 예를 세세히 들어줬습니다.
그제서야 무심코 한 저의 언행이 친구들에겐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며,
심지어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다행히도 어른스러웠던 그 친구 덕에 다른 친구들과도 금새 화해할 수 있었고,
그날의 일들은 제 인생의 소중한 교훈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희원에게도 오늘의 사건이 귀중한 경험으로 남을 수 있길 바랍니다.

프레이야 2004-05-18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그런 경험이 있었군요. 참 성숙한 모습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 다행스럽습니다.
저도 때때로 내가 물에 기름처럼 한데 어울리지 못하는 이질적인 존재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느낌은 누구든 가질 수 있는 것이겠지요. 고독을 즐기는 성향도 있구요. 웃고 떠들고 난 후의 공허감이 두려울 때가 솔직히 있지요. 하지만 그런 태도가 남들에겐 좋지않게 보일 수도 있겠다싶네요. 조선인님, 희원이게도 귀중한 경험이 되기를 바래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

박예진 2004-05-2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글인데 ... 워낙 글솜씨가 좋으셔서 넋 나간 채로 읽었네요 .... 제가 어렸을 때도 왕따당한 아이가 있기는 있었어요. 제가 왕따시킨 것은 아니였지만 , 보통아이는 아니었구요 , 왜 있잖아요...다른 애...그런 애였거든요 . 저도 왕따 안 당하도록 친구들에게 더더욱 친절히 대해야겠어요.

waho 2004-06-06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무섭네요. 따돌림 당하는 애들은 항상 있지만 요즘은 애들이 넘 무서워져서 따돌림의 정도도 심해지는 것 같아요. 희원이도 맘에 상처가 됐겠네요. 아이에게 좋은 경험으로 남았음 좋겠네요. 님도 많이 놀라셨겠어요.

프레이야 2004-06-06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릉댁님, 힘든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마음 쓰여요. 잘 넘겼으면 좋겠어요.
희원인 요즘 이 일로 많은 생각을 한 것 같고 그 친구도 별 무리 없이 학급에서 잘 지내고 있대요. 선생님께 쓴 편지(일기장에)에서 아이가 이렇게 컸구나, 하는 걸 보고 뿌듯하기도 했어요. 다 자라는 과정이 아니겠어요? 다치고 치유되고 그러면서 강해지기도 하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