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나 혼자서 집안일을 다 하라구? 아나스타샤 5, 미국동화
로이스 로우리 지음, 최덕식 옮김, 신혜원 그림 / 산하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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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헤아리며>라는 감동적인 동화를 쓴 로이스 로우리가 일곱편의 시리즈물로 아나스타샤를 주인공으로 재미있는 동화를 썼는데, 이 책은 그 다섯 번째 이야기이다. 아나스타샤는 사춘기의 예민하고 영리한 여자아이이다. 생각도 많고 성장의 이런저런 과정을 겪고 있는 주인공이다. 미국동화이지만 우리에게도 그리 거리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유머가 깃든 통통 튀는 대사가 재미있고 일상의 이야기이지만 흐름도 빠르다.  

이 책의 삽화는 <하느님의 눈물>에서도 그림을 그린 신혜원님이 그렸다. 담고 있는 생각거리는 얕지 않지만 계몽성을 강조하지 않는 위트있고 가벼운 터치의 이야기처럼 삽화도 마치 만화처럼 그려놓았다. 쓱쓱 진한 연필로 그려 놓은 것 같이 어릴 때 본 명랑순정만화의 분위기이다. 아나스타샤는 올빼미안경을 쓴 13살(중1 정도)의 여자아이이고 세살 난 남동생(우리나이론 다섯 살쯤)이 있다. 시인이자 영미문학교수인 아빠와 화가인 엄마 사이에서 별 어려움없이 평범한 보통의 가정에서 산다.

이 다섯번째의 이야기에서는 엄마가 대부분 담당하는 집안일을 아나스타샤가 몸소 겪고 그 어려움을 이해하게 되는 내용이 주된 흐름이다. 중간에 끼어있는 또다른 이야기는 이성에 대한 것이다. 남자친구에게서 첫번째 데이트 신청을 받고 낭만적인 꿈을 꾸고 열정적인 저녁준비를 했다가 어설프게 꿈이 깨어지는 비애(?)도 겪는다. 그와 동시에 아빠도 첫사랑의 아름다운 환상이 깨어지는 배신감을 겪고 마음의 열병이 몸에 나타난건지 수두를 앓는다. 아빠의 첫사랑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개방적이고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좋다. 5학년 아이들도 이 부분을 그리 이질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춘기 소녀 아나스타샤의 이런저런 생각들이 꽤 그럼직하고 실감난다. 이름으로 특이한 별명을 지어 부르고 브래지어끈을 잡아당기는 남자친구들에 화가 나기도 하는 아나스타샤를 엄마는 옛날 자신의 솔직한 경험과 감정을 이야기하며 다독인다. 솔직히 좋은 감정도 들었다고, 하지만 이젠 아무런 느낌이 없어진 나이가 돼버린 걸 엄마는 오히려 씁쓸해한다. 친구같은 엄마와 딸 사이 같다. 나도 이런 사이로 딸과 지내고 싶다.  

아나스타샤는 일을 가지고 있는 엄마가 다른 엄마들처럼 맛있는 간식도 못해주고 그외의 가사일도 얼렁뚱땅 하는 것에 대해 이해를 못하겠다고 아빠와 작당한다. 엄마는 조직적이지 못해 그러니까 시간표만 짜면 모든게 해결될 거라고 득의양양하게 키득거린다. 하지만 그런 아나스타샤에게 미소만 짓고 있는 엄마는 모든 걸 알고 있다. 시간표대로 일이 다 되는 것도 아닐뿐만 아니라, 예기치 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를 말이다.

딸 아나스타샤는 엄마의 생활과 엄마의 답답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아나스타샤에게 가정주부로서 역할을 해야하는 열흘이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엄마의 출장 때문이다. 시간표를 빡빡하게 시간대별로 짜놓고 출발하여 시작은 순조로운 것 같았지만 날이 갈수록 시간표는 예기치 못한 일로 자꾸 수정되고 생활은 거의 뒤죽박죽이다.  첫 이름은 <성차별에 반대하는 크루푸닉 가족의 시간표>로 시작하지만  대폭 수정된 '낭만적인 밤을 위한 시간표'를 거쳐, 마지막의 그냥 '집안일 시간표'에서는 '후유증이 엄청나다'고 하며 '엉엉 울었다' 라고 쓴다.

아나스타샤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로스앤젤레스에 가 있는 엄마에게 앞당겨 오라고 전화를 하고 돌아온 엄마는 엉망이 되어 있는 집안을 세 시간만에 정돈한다. 엄마의 가사일에 도움을 주는 해결책도 마련되었다. 냉동식품을 해동하기 위한 전자레인지와 지겨운 가사일에 활력을 주기 위한 '탭댄스 강습권'이 그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엄마는 해결 못하는 게 없는 놀라운 사람'이란 걸 이제 인정하고 항복한다.

탭댄스 신발을 신고 춤을 추며 2층을 오르락거리는 엄마가 아나스타샤가 보기엔 좀 '주책스러워 보였지만 아주 재미있기도' 하다. 5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고 얘기 나누며 우리 딸에게 엄마가 주책스러워보이지만 재미있을 때가 언제냐고 물어보니, 공연보러 가서 좀 오버할 때라며 환하게 웃었다. 엄마를 친구처럼 생각하는 딸이 좋다. 아나스타샤는 엄마를 이해하는 폭이 성큼 커졌다. 엄마도 똑 같은 일상에 활력소가 필요한 사람이고 가사일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예기치 못한 일들이 복병처럼 나타나는 것이 하루의 일상이고 우리의 인생 자체이다.

삶이란 그리 녹녹하게 조직적으로 엮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상치 못하는 것들의 경이로운 변종으로 나타나는 것이란 걸 더 살면 느낄 것이다. 정말 되돌아보면 계획대로 된 것이 없다. 따져보면 무엇이든 계획하고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안개속 희미한 윤곽을 부여잡고 뿌연 길을 걷다가 아주 우연한 것이 필연인 것처럼 나에게 붙박혀온 것 같다. 우리의 하루가 그러한데, 하물며 긴긴 삶이 그렇게 불확실하고 돌발적인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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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5-18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정말 제대로 준비하고 시작한 건 없는 것 같아요. 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딸과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로 가고 싶어요. 계속...

starrysky 2004-05-18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시리즈입니다. 아나스타샤. ^^ 시인이자 교수인 아빠와 화가인 엄마, 사춘기에 접어든 엉뚱한 딸 아나스타샤와 천진난만 꼬마 천재 샘의 이야기가 사람을 정신없이 책 속으로 빨아들이지요. 예전에 모아둔 시리즈가 거의 없어져 속상했는데 이렇게 다시 나왔군요. 기회 되면 사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프레이야 2004-05-18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arry sky님, 반갑습니다. 저도 이 시리즈 무척 좋아합니다. 산하출판사에서 나와있더군요.
님의 서재에서도 뵙기로 해요.^^

ROSE 2004-05-20 0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의 대부분의 (저를 포함해서...) 딸들이 엄마를 아니, 엄마의 생활과 답답함을 이해하기
힘들어하고 그때문에 엄마와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엔 엄마를 이해하고 그래서 닮아가는 게
아닐까 하네요.....
많이 컸다고 생각하지만 엄마에겐 항상 어린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왠지 엄마한테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