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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설탕 두 조각 ㅣ 소년한길 동화 2
미하엘 엔데 지음, 유혜자 옮김 / 한길사 / 2001년 5월
평점 :
언젠가부터 나도 아이에게서 물러설 줄을 안다. 큰아이가 3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내겐 아주 충격적인 일이 있고난 이후로 그렇다. 무슨 일로 그랬던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난 아이를 심하게 야단하였고 아이는 자물쇠가 달린 비밀일기장에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갈겨놓은 걸 그 다음날 우연히 발견했다. 빨간 필기구로 박박 신경질적으로 모나게 써놓은 글귀를 보는 순간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그날 난 나의 어린시절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난 어른들에게 그리 고분고분한 아이가 아니었다. 보기엔 말수가 적으니 온순한 형으로 보이지만 내부에선 불만과 비판과 내 나름의 잣대가 항상 촉수를 세우고 있었다. 나의 심기를 유독 긁은 분은 지금은 벌써 돌아가시고 안 계신 외할아버지였다. 다섯살 아래의 남동생을 편애하고 나에겐 별로 따뜻하게 대해주시지도 않았다. 내딴엔 그게 참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난 더 어릴 때부터도 엄마가 버스타고 가자고 하면 택시 타고 가겠다고 길바닥에서 딱 버티고 있기 일쑤였단다. 그래서 엄마는 살살 꼬셔서 나를 집까지 데려가서 심하게 때리곤 했단다. 한번은 우물에 빠뜨리겠다고 거꾸로 날 들고 내 고집을 꺾으려하기도 했다. 내려놓으니 난 죽는다고 펄쩍펄쩍 뛰면서 난리를 부리더란다. 고1 땐 담임선생님이 무슨 시집을 학급의 아이들 의사와는 관계없이 모두 다 사라고 하셔서 이의를 제기했다가 쓴소리를 들어야했다. 아무래도 만만한 아이는 아니었지싶다.
그래도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을 위험부담을 안고서도 자기가 먹겠다고 결정하는 렝켄은 나보다 열배는 착한 아이인 것 같다. 모두가 지나온 그 시절에 거대한 벽과도 같은 부모님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 한 번 안 가져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문제가 렝켄은 부모님의 큰 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키가 좀 작았더라면 대화가 될텐데, 키가 너무 커서 말이 안 돼.' 이렇게 단순한 아이다운 발상에서 출발하여 렝켄은 환상을 경험한다. 렝켄은 마법을 쓸 줄 아는 요정을 자기 마음의 나라에 불러들인다. 빗물거리에서 사는 그 요정은 손가락이 여섯 개이다. 길다란 손가락을 깍지 끼고 앉아 렝켄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렝켄의 소원을 들어준다.
렝켄이 요정을 두번째로 찾게 될 줄은 자신도 몰랐다. 자신의 소원대로 부모님이 성냥갑 속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졌지만 정작 기쁘기만 한 게 아니라 두려움과 슬픔이 덮쳐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고아가 된 것처럼 세상에 저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막막함은 물론 외롭기까지 하다. 렝켄이 두번째로 요정을 찾아가는 길은 더욱 매력적이다.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날아온 요정의 편지 한 장으로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려서 그것을 따라 하염없이 뛰어가는 것이다. 바람거리로 옮긴 요정의 집은 꽁꽁 언 겨울풍경이다. 이곳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과는 다르다. 12라는 숫자만 있는 벽시계안에는 수리부엉이가 있고 밤 12시 아니면 낮 12시에만 마법은 발효한다.
부모님을 되돌려놓기를 위해서 요정은 렝켄에게 힘든 결정을 스스로 내리게 한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시간을 놓쳐버리는 꼴이 될 것이다. 렝켄은 드디서 '시간을 돌려주세요!' 라며 소리친다. 판타지의 세계에서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고 돌아갈 수 있는 현실이 있다는 건 행복하고 다행한 일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불합리한 현실이 있기 때문에 환상의 세계가 더 진실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일 게다.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은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에 아이들이 한 입에 톡 집어넣기 좋아하는 각설탕 두 개가 있다. 입에 들어가면 까끌한 느낌과 달콤함이 모순되게 느껴지지만 사르르 녹으면서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가.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판타지의 공간에서는 시간을 돌린다는 식의 시간장치가 가능하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는 소망은 누구든 가져봄직한 환상의 출발지점이다. 역시 미하일 엔데는 '시간'이라는 끝없는 주제를 놓지못하는 것 같다.
- 물론 그 결정은 지금 네가 이 자리에서 내려야 해.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 계속 그렇게 지내야 되거든.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종종 있잖아. 이해할 수 있겠지? 정말로 계속 이렇게 지내길 원하니?-
지금도 나의 어른들과 마음의 갈등을 하며 사는 나는 이 글귀가 마음에 꽂혔다. 3학년 아이들은 렝켄의 당찬 행동이 좀 심한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그동안 부모님께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섭섭한 것을 표현하는 대목에선 봇물 터지듯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고싶은 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기도 했다. 역시 아이들은 착하다. 어른들의 눈이 비뚤어져있을 뿐이다.
렝켄은 환상을 경험한 후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렝켄은 부모님의 말씀을, 부모님은 렝켄의 말을 무턱대고 반대하지 않고 꼭 필요할 때만 그렇게 했'다. 나도 우리 아이들도 서로 물러나야하는 아름다운 지점을 안다. 참 많이도 전쟁을 겪고 얻은 지혜이다.
이 책은 환상적인 이야기에 걸맞게 삽화가 멋지다. 삽화가 주는 기묘한 분위기가 이야기를 더욱 극적이게 한다. 빗물거리와 바람거리의 요정의 집으로 들어가는 풍경은 그야말로 환상이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그 풍경을 담기에 지면이 부족한 것 같다. 오히려 눈을 감고 머릿 속으로 그려보는 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