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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크고 수수한 새라 아줌마
패트리샤 매클라클랜 지음, 이영아 그림, 아기장수의 날개 옮김 / 고슴도치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어린이독자를 긴장과 흥분으로 몰고가는 동화에 비해 이런 식의 동화를 아이들은 지루해한다. 나른한 일상과도 같은 스토리 전개에는 특별한 사건이나 자극적인 대사도 없이 전체가 잔잔한 바다의 물결이듯 하나의 고요한 리듬을 타고 넘는다. 그 바다에 몸을 맡기고 누우면 햇살이, 바람이 부드럽게 이마를 간진다. 그리고 어느새 마음은 근원 모를 충족감에 젖는다. 작은 것의 귀중함, 사소한 것들의 행복감, 서로를 기쁘게 해주려는 소소한 노력들이 사람의 마음을 참 푸근하게 만든다. 높은 파도를 타고 스릴을 느끼고 싶은 아이들은 이런 류의 동화에 매력을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문학적인 느낌을 가질 줄 알고 문장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에 기쁨을 느끼는 아이라면 충분히 재미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키가 크고 수수한 새라 아줌마>는 원제를 꾸밈없이 번역해 놓은 제목이다. 좀더 글의 분량이 길고 묘사가 많이 나오는 <초원의 집>과 비슷한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미국개척시대의 생활이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의 가족사를 글감으로 하여 쓴 동화라는 점도 닮았다. 삽화는 번역하여 나오면서 그려넣었는데, 글의 내용을 좀 더 삽화로 많이 표현해도 좋았을 것 같다. 마치 외국사람이 그린 것 같다는 평을 아이들이 하는 것으로 보아 글의 분위기와는 맞아떨어졌다고 본다.
화자는 애나라는 소녀다. 남동생과 아빠와 살며 엄마를 대신하여 집안일도 하는 야무지고 착한 아이다. 둘째를 낳은 바로 다음날 저 세상으로 아내를 보내고 집안에 늘 퍼지던 노래소리는 끊겼다. 그런 아빠가 어느날 아내를 구하는 광고를 신문에 내고 얼마 후 기차를 타고 동부해안의 메인 주에서 중부 캔사스까지 한달 예정으로 온 새라아줌마. 그녀는 노란 보닛모자를 쓰고 커다란 천 가방을 들고 왔다. 한눈에 보아도 키가 크고 수수하며 손도 크고 거칠다. 머리도 잘 땋고 목수일도 잘 한다. 특히 그녀는 노래 부르는 걸 무척 좋아한다.
광활한 들판에서 농사를 주로 하는 애나의 가족과 새라가 살아온 해안 마을의 생활 환경은 많은 차이가 있다. 가치관에도 차이가 있어 캔사스의 가족들의 메인 주의 비교적 개방적인 사고와 말을 금세 따라한다. 새라는 하루도 바다를 그리워하지 않는 날이 없다. 그런 기미를 눈치 채는 예민한 애나는 그래서 불안하다. 새라의 딸이 되기를 바라는 애나는 가엾게도 새라가 좋아하는 바다가 우리에게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새라와 애나의 가족이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이 참 섬세하고 소박하게 그려진다. 제이콥씨는 별로 말이 없다. 하지만 누구보다 자상하고 상대를 기쁘게 할 줄 안다. 예전처럼 집안에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계속 울려퍼지기를 바라는 애나가 새라에게 집중하고 고심하는 심리는, 애나가 비스킷 반죽을 젓다가 손동작이 느려지기도 하고 반죽을 섞고 또 섞는 행동으로도 잘 보여준다. 인물들의 소중한 감정을 은근하고 단아하게 보여준다. 부연설명이나 장식이 없이 심리묘사의 방식이 조촐하다. 문장도 길지않고 불필요한 묘사는 거의 자제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웃의 매기 아줌마도 광고를 보고 아내가 되려고 와서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이다. 테네시가 고향인 매기는 새라에게 '어디에 살든지, 늘 그리운 것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라며 정원을 꾸밀 수 있는 납작한 나무상자와 닭 3마리를 선물로 준다. 그리움을 달래는 수단이 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새라의 마음 속 그리움의 뿌리는 언제나 바다이다. 파랑, 회색, 초록색의 3가지 색을 띠는 바다를 내내 걸어두기 위해 새라는 읍내에서 3가지 색의 색연필을 사오고 새 가족이 되는 이들의 집에는 옛노래와 함께 새 노래가 울려퍼질 것이다. 애나와 케이럽 그리고 제이콥씨도 죽은 엄마와 아내를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늘 그리워하며 살아갈까.
4학년 아이들과 이 책을 함께 읽고 얘기 나누며 지금 그리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거의 모두 돌아가신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지금 내가 그리워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다시 오지 않을 지나간 날들이라고 말하기엔 아이들에겐 이해되지 않을 먼 나라의 그리움이라 난 입을 다물고 종알거리는 아이들의 착한 눈을 응시했다.
가족은 서로 닮아가나보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최대한 배려하고 기쁘게 해 주는 것이 참가족일 거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도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는지. 가정의 달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의 사건들이 신문의 사회면에 끊이지 않는 요즘, 무슨무슨 날들을 형식적으로 챙기는 것보다 어느날 문득 조용히 내 가족을 위한 작은 기쁨을 마련해보는 건 어떨까. 바닷가 모래언덕을 그리워하는 새라를 위해 아빠가 만들어준 헛간 반 높이의 건초더미 모래언덕 같은 것처럼 말이다. 그 언덕은 이름하여 '우리의 모래언덕'이다. 네명은 점점 자신들도 미처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라는 이름으로 가족이 조심스레 되어가고 있다.
이 책은 한번 두번 문장을 되새기며 인물의 심리를 내것처럼 느끼면서 읽는 게 좋겠다. 담백해서 아름다운 문장과 잔잔한 감동을 만나는 즐거움도 신나는 사건이 펼쳐지는 이야기의 즐거움 못지않게 좋더란 걸 아이들이 느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케이럽의 이야기는 <종달새>에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