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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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theater 내기 The Live

7월부터 11주간 매주 월요일 영화의전당에서 하는 시민참여 프로그램, 시네마낭독극장에 참가했다. 15명씩 두 반이 선착순으로 선발되어 네 분의 강사와 함께 배우고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9월 24일 저녁에 야외극장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애니메이션에 목소리 더빙을 하는 역할이다. 보는 영화에서 영화 속으로 들어가 참여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내가 속한 반은 “할머니의 꽃신”.
다른 반은 “옥자의 관부재판”.
모두 위안부 옥자 할머니의 이야기다.
2022년 생존자 11명.
현재는 9명이라고 한다.
다들 울컥하는 순간을 잘 넘기고
각자의 캐릭터에 몰입해 잘해낸 것 같다.
그날 야외극장 저녁바람이 무척이나 상쾌했다.

11주간 온몸으로 열강해주셨던 주강사 님의 초대로 오랜만에 연극을 보았다. 그분은 극단 배관공 배우다. 몸 전체로 보여주는 연기자들을 존경한다. 신체언어 쓰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라 부럽기도 하고.

<The Live>는 체호프 단편 <내기>를 모티프로 무성 단편영화 기법을 결합해 재기 넘치고 감동적인 연극이었다. 원작의 의미를 잘 살려냈다. 태어나서 죽음을 맞기까지 종신형에 빗댄 “삶” 혹은 “목숨”을 걸고 우리는 어떤 내기를 해야 할까.

마치고 오는 길에 가을이 완연한 비가 내린다. 함께한 글벗이 집까지 우산을 씌워 주고 갔다. 고마워요. 돌아와 민음사 책을 뒤져 십 년 전에 그어놓는 밑줄을 발견하고… 연극에서 저 대목을 그대로 읽는 목소리가 좋았다. 스스로 형을 마친 자의 자유와 호방함이 느껴져 카타르시스가 왔다.
책을 진정 경멸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과감히 버리라고 했듯. 아직은 강 물결에 몸을 맡긴다. 제대로 맡길 수 있기만이라도…

오늘날의 입장에서 미디어를 결합해 다채로운 감각 경험을 하게 한 연극이었다. 연극 중에 나온 책이 여러 장르로 여럿 있다. 특히 레미제라블을 책장에 꽂아 무대와 영상에 배치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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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0-08 0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니메이션 더빙도 해 보시다니 멋진 경험이었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였던 분 이야기여서 마음 아프기도 했겠네요 이제 아홉분 남았다니... 시간만 가는 느낌도 듭니다 남은 분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3-10-09 16:41   좋아요 2 | URL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잊혀져가는 분들이 안타까워요.

페크pek0501 2023-10-09 22: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체호프 단편선이네요. 작품이 다 좋았어요. 재독할 만한 책 같아요.
‘내기‘는 인상적으로 읽어 제 책에 내용을 넣기도 했죠.
프레이야 님, 오랜만의 출현이십니다. 자주 출현해 주십시오. 반갑습니다.^^

프레이야 2023-10-19 14:26   좋아요 2 | URL
페크님 반갑습니다.^^

yamoo 2023-10-20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일반인들이 하기 힘든 경험을 하셨네요! 부럽습니다~~

아..근데 두번째 이미지...내기 포스터가 매우 인상깊네요. 그림 그릴 때 참고해야 겠습니다!ㅎㅎ

프레이야 2023-10-20 13:15   좋아요 1 | URL
그죠 ㅎㅎ 포스터 그림 저도 눈길 갔어요. 내용을 잘 나타내기도 했고요. 그림 날로날로 성장하고 있겠네요 야무님.

2023-11-19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6.29 녹음완료 총14파일

신형철 님은 윤상 덕후^^
그를 닮고자 하는 자신이 “내가 가장 덜 싫어하는 나”라고 쓴다.
가치 있는 인식, 정확한 문장, 공학적 배치.

다음 도서는
하루 한 장 고전 수업 / 조윤제 지음
녹음시작 2023.6.29
1,2,3번 파일(59쪽)

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머리말에서 글쓰기의 단계별 준칙을 이렇게 정리해본 적이 있다. (물론 내가 쓴 글들은 내가 설정한기준에 언제나 미달한다.) 첫째, 가치 있는 인식을 생산할 것. 좋은글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취향이나 입장이 아니라 인식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뜻한 바를 백 퍼센트 담아낼 수 있는 문장이 써질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모든 문장이 제자리에 놓이도록 만들어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 요건은 내가 윤상의 음악에서 경탄하며 발견하곤 하는 것들이다.
첫째, 글에서의 인식은 음악에서의 주제theme와 같다. 존재할 가치가 있는 독창적인 주제 라인을 거의 모든 음악에서 생산해내는 작곡가는 흔하지 않다. 이례적인 코드 워크를 구사할 때조차도멜로디의 대중적 설득력을 잃지 않는 것이 대중음악가 윤상의 자의식이다.
둘째, 정확한 문장에 대응되는 것은 정확한 사운드다.
윤상덕후들은 사운드에 대한 그의 집착이 거의 괴담 수준의 것임을 잘 안다. 《인센서블》 3부작에서 각 트랙에 프로그래밍된 드럼비트는 너무도 적절해서 다른 버전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배반>에서부터 <소심한 물고기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사운드 소스는 마치 처음부터 이 음악에 쓰이기 위해 기다려왔다는 듯이 그곳에 있다. 셋째, 구조적 완결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자. 모든것이 정확히 선택돼서 최상의 방식으로 조합돼 있을 때 그것에 변경을 가하는 일은 불필요하고 불가능하다. - P253

지금껏 윤상의 음악을 재편곡해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은 사람은 단 하나뿐인데, 그것은 바로 윤상 자신이다.

나는 그를 닮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나‘는 내가 가장 덜 싫어하는 ‘나‘들 중 하나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자신의전부를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보들레르의 시나 모리 오가이의 소설을 읽을 때의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었고, 그것이 자기라는 존재를 긍정하는 입구였다고 고백한다. "사랑이란 상대의 존재가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다."(『나란 무엇인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덕질은 우리에게 그런 덕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자꾸만 나를 혐오하게 만드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면서, 이 세계와 맞서고 있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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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시작 2023.5.24.
총326쪽 중 오늘 13번 파일까지 녹음 완료 311쪽
14번 파일 중간 정도로 이 책은 마칠 것 같다.


각 꼭지를 이끄는 시가 한 편 있고 저자는 그 시를 겪어낸 자신과 자신이 통과한 세상을 시를 통해 풀어낸다. 아는 시도 있고 새로이 읽히는 시도 있고 처음 본 시도 있다. 레이먼드 카버와 무라키미 하루키의 우정도 시로 연결된다. 녹음하다보면 보통 산문은 20쪽 정도가 한 파일에 담기던데 이 책은 시가 있어서인지 25쪽 정도가 한 파일이 된다. 하나의 파일은 문단이 바뀌는 지점에서 30분 분량 전후로 담는다.



시를 정의하는 문장은 다양하겠지만 시는 결국 살아가는 일, 인생이라는 역사의 주체이자 객체로 살아내는 일에 대한 자문자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기 위해 시를 쓰고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덜 외로울 수 있는 길을 슬며시 또는 격하게 일러주는 듯도 하다.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각성도 인생을 좀 산 사람의 나이가 되면 동감된다. 이제는 그런 지점에 온 것도 같으나 아직도 길은 멀다. 타자로 사는 일에 더 친숙해져야 하겠다.
“여하튼 작취미성의 시간만큼 우리가 삶의 진실과 가까워지는 때도 드물 것이다.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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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6-15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녹음?! 읽으면서 녹음을 하시는 건지요? 무슨 녹음인가요?! (궁금)
그나저나 이 책 리커버 나온 거 이 글 보고 알았는데 이전 커버가 훨씬 예쁜 것 같아요. 나 아직 안샀는데 왜.....😭

프레이야 2023-06-15 12:03   좋아요 2 | URL
리커버가 더 이쁘네요 ㅎㅎ
점자도서관에서 만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도서에요. 네. 제 목소리로 바로 녹음됩니다.

페크pek0501 2023-06-15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의 역사, 오늘 저도 이 책 수십 쪽을 읽었어요. 깊은 울림이 있는 글이 많아요. 그래서 천천히 읽게 되지요.
프레이야 님은 스토너 읽으셨죠? 녹음하신다고 하니 스토너를 해 보시면 참 좋겠단 생각이 드네요.
오디오북으로 잠깐 듣다가 반해 버려서 종이책을 사기로 했어요. 한참 스토너의 리뷰들이 많이 올라오던 때가 있었는데
제가 많이 늦답니다.^^

프레이야 2023-06-15 22:45   좋아요 0 | URL
스토너는 아마 이미 음성도서로 나와 있을 것 같아요. 물어보고 안 나와 있다면 도전해 봐야겠네요. 도서관 측에서 회의 거쳐 녹음도서로 선정되어야 진행되어요. 저는 일단 권해봐야겠어요.
인생의역사, 참 좋더군요. ^^
 

큰딸이 번역한 두번째 출판도서가 나왔다.
말을 안 해 모르고 있다가 어제 알았다. ^^

——

무성애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적 지향이다. 무성애자들은 사랑과 섹스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 이들에 따르면 로맨틱한 감정이 있어도 섹스를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섹스는 연인 관계에서 꼭 도달해야 할 목표나 둘이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행위가 아니다. 성적 끌림이 부족하다고 해서 아프거나 이상한 것도 아니고,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앤절라 첸은 다양한 무성애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섹스에 완벽한 거부감을 느끼는 루시드, 기독교 사회에서 성장한 백인 남성인 헌터, 아시아인이자 트랜스 여성인 설리나, 장애를 지니고 있는 카라 등 모두 다른 삶을 살아온 만큼이나 무성애자들의 세계 또한 제각각이다. 무성애의 여러 세계를 들여다본다면 사랑과 섹스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 알라딘 책소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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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6-13 1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대단한 딸을 두신 것 아닌가요? 하하~~ 진심 축하드립니다.^^

무성애자는 어디서 읽었는데 백 명의 한 명꼴로 있다고 한 것 같아요. 비정상이라기보다는 취향의 문제가 아닐까 해요.

프레이야 2023-06-13 15:5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페크님 ^^

얄라알라 2023-06-13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프레이야님!!! 모르고 있었다는 게 민망하네요
글쓰시는 어머니와 번역하고 글쓰는 따님
사진 예술가이신 남편님

가족 분들 모두! 예술가!
출간 축하드립니다

프레이야 2023-06-13 15:5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얄라님 ^^

건수하 2023-06-13 1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성애자 궁금했는데, 읽어봐야겠습니다. 따님 두번째 번역서 출간 축하드려요 ^^

프레이야 2023-06-13 15:56   좋아요 2 | URL
수하님 감사합니다 ^^

초란공 2023-06-13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쿨~한 따님이십니다..ㅋㅋ 따님과 글쓰시는 프래이야님을 응원합니다!

프레이야 2023-06-13 15:57   좋아요 0 | URL
초란공님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3-06-13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마한테 알리지도 않고 알아서 잘 하시는 따님!!!ㅋㅋㅋ
두 번째 번역책 출간도 축하합니다.^^

프레이야 2023-06-13 19:34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책나무님^^

stella.K 2023-06-13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벌써 두번째! 대단하고 기특하네요.
무성애가 그런 뜻이군요. 전 무성애 지지합니다.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축하해요.^^

프레이야 2023-06-13 19:36   좋아요 1 | URL
에이섹슈얼. 줄여서 에이스. 저도 영어로는 처음 알게 되었네요. 에이스가 그 에이스가 아니지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스텔라님^^

은오 2023-06-14 0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따님의 두번째 번역서 출간을 축하드리며 ㅋㅋㅋㅋ 이 책 곧 땡투하겠습니다! 정말 흥미로워보여요!!

은오 2023-06-14 05:56   좋아요 1 | URL
급박해져서 바로 했습니다 넘재밌을거같다 빨리와랏

프레이야 2023-06-14 09:49   좋아요 0 | URL
은오님 ^^ 감사합니다. 빠름빠름 ㅎㅎ

새파랑 2023-06-15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족 이시군요~! 완전 대단! 축하합니다~! 읽어보겠습니다~!!

프레이야 2023-06-15 17:29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축하 감사합니다. ^^
흥미로운 내용이네요.

희선 2023-06-17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 님 축하합니다 두번째 책이 나오다니 프레이야 님도 많이 기쁘시겠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3-06-17 21:17   좋아요 0 | URL
네. 희선님 감사합니다. ^^
평온한 유월 보내세요~

기억의집 2023-07-0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전에 학교 선배가 자기는 무성애자라 해서 그때 처음 무성애자라는 단어 들었어요!! 따님께서 번역가의 삶으로 안착 하시네요!! 프님 출간 축하드려요!!

프레이야 2023-07-03 18: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는 에이섹슈얼이라는 말을 처음 알았어요.
관심 가는 내용이더군요. 우리가 깨부수어야할 울타리가 새삼 많구나 느꼈어요.
 
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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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닉 / 아니 에르노 / 문학동네
낭독녹음 시작 2023. 4.12.
완료. 2023.5.17. 총358쪽



녹음하며 가장 많이 발음한 단어는 “전화”다. 먼저 연락할 길 없이 35세 러시아 남자에게서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48세 여자의 일기 대부분은 전화가 왔다 혹은 전화가 오지 않는다,로 시작한다.

페이퍼 제목으로 쓴 문장은 원제가 “Se Perdre”인 이 책의 125쪽 마지막 문장이다. 번역 제목이 좀 더 유혹적이긴 하지만 원제 그대로 “길을 잃다”로 번역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아무튼 에르노가 지극히 개인적인 내면일기를 공개한 이유가 숨어 있을 듯. 육체적이고 구체적인 좀 더 내밀한 감정들, 우리 중 누군가에게도 원초적으로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기에. 1988.9.27. 시작해 1990.4.9. 월요일의 일기로 맺는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 나오고 10년이 흘러 잊고 있던 일기장에서 나온 <탐닉>은 같은 남자와 같은 화자(에르노 자신)가 등장하는 이야기다. 실제 겪은 것만 쓰겠다고 공표한 에르노가 밝혔듯 자신의 실제 이야기이고 지독하게 솔직하게 보이는 방식을 취한다. 자신의 욕망과 욕망에서 오는 고통과 열정에, 그리고 미테랑 대통령이 말했다는, 자기 앞에 둔 시간 즉 젊음을 붙들고자 하는 열망에 솔직하게 보이는 방식이다. 예리한 칼로 저며내듯 고도의 전략이고 따라가기 어려운 특허품. 아, 아니 에르노, 바로 느껴지는 문체. 이 모든 욕구는 결국 글쓰기를 위한 욕망이고 또한 글쓰기가 욕망을 유지하게 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현재를 살아내는 일.

345쪽 이 책의 결미 마지막 문장은 프라하성의 지하묘지로 들어가는, 영화 <카프카>의 카프카, 그 심연을 소환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자 하는 욕구
마치 무슨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지하실의 열린 문
같은. ”

언제쯤이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물을 관찰할 것인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것들을 더는 쓰지 못할 것이다. 그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열정, 욕망, 질투가 빚어내는, 너무나 미세한 인간적인 움직임에 유의할 수 없을 것이다.
오후 끔찍한 기다림. 욕망과 공허. 비육체적인 욕망을 내 몸에서도 구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젖어 있지 않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텅 비고, 울고 싶을 정도로 나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 - P182

질투의 심연과 강렬한 비애. 열여섯 살 때 적어놓았던 프루스트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비애란 끊임없이 저항할수록 점점 더 그 마수에 빠져들어, 지하 통로를 통해 당신을 진실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말없는 하인 같은 존재다. 죽음을 만나기 전에 진실을 만난 사람들은 행복하다." 혐오와 슬픔 속에서 서너 번 자위행위를 한다. 그래도 슬픔은 남고, 그로 인한 피로감 때문에S가 평범한 바람둥이인지 아니면 ‘유혹할 만한‘ 남자인지에 대한 불확실성 사이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소문대로 쿠바 여자들이 저돌적이라면 두 가지 불확실성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도없다. - P185

원인이 꼭 S인 것은 아니다. 우리 관계에 관한 성찰이 조금은 가능해진 현재로서, 글을 써야 한다는 절대적필요성과 4월 말부터 생긴 삶의 고통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죽음, 창작, 섹스가 뒤섞여 있는 구덩이 속에 빠져서, 그 상황을 빤히 보면서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체험을 엮어서 책으로 내야지. - P194

우리가 매번 만날 때 일어나는 일들의 세부사항과 생각들을 적어놓을 걸 그랬다. 1) 내가 입었던 옷, 2) 내가 준비했던 음식.
3) 그가 도착했을 때 내가 있었던 장소. 삶을 낭만적인 문학의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아름다운 연출, 아직도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을까.
3시 10분, 아직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 P220

이렇게 해서 오늘, 스물여섯 해 동안 기록해온 내 일기의 녹음이 현재의 시점과 만났다. 이것은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다만 자기중심적인 고통을 펼쳐놓은 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것을 통해 인류의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교감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P243

나는 이 열정을 1년 동안 살았다.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름을, 7월 중순부터 온 여름을 끝까지 살아내기 위해 이 열정에 바쳤다. 또 한번 전율하며 자문한다. "현재란 무엇인가?" 현재는이곳에 존재한다. 그것은 버거운 미래와 두려움이다. 그를 볼 것이라는 행복감과 서너 시간의 만남이 흐른 후에 그를 더이상 볼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감. 멍청한 노래 한 곡이 머릿속을 맴돈다. - P253

찬란한 가을 햇볕 아래 반짝이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끝없이 작년을 생각한다. 이 열정으로 내 인생의 걸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그것이 걸작품이길 바랐기 때문에 이 관계가열정이 된 것이다(미셸 푸코:"최고의 선은 자신의 인생을 예술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 P256

또한 내게 글쓰는 작업은 도덕적 기능을 지닌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는 글쓰기에 대한 집념을 잃지 않기 위해서 사랑의 모험을 원치 않았다. 오랫동안-아직도 그렇지만글을 써왔기 때문에 쾌락적인 삶은 내게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내 남편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그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용서했다. 글을 쓰지 않는 인생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걸 빼고는. - P267

내가 머물 곳은 어디인가, 사랑은 오직 죽음을 대가로 존재한다ㅡ크리스타 볼프(『어디에도, 그 어디에도 없는 곳)
그녀는 또 이렇게 이야기 한다 때때로 나를 보완하기 위해서 나는 나머지 인류를 필요로 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모자라는 부분 때문이다 - P274

S가 떠난 후로 거의 냉동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그리움과 추억과 사라진 애정으로 눈물 흘리다. 한 남자를 잃는다는 것은 한꺼번에 몇 해를 늙는다는 것, 그가 있었을 때는 흐르지 않았던 그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늙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상상 속의 시간들을 한꺼번에 늙는 것이다. 이 욕망은 내가 어쩌면 다른 누군가와 똑같은 동화 같은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 P315

10~11월 일기장을 다시 읽는다. 벌써 이렇게 많은 것을 잊었다니. 보르헤스의 너무도 아름다운 이 문장, "수십, 수천 세기의 시간이 흘러가지만,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현재뿐이다. 공기 중에, 땅에, 바다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바로 나한테 일어난 일뿐이다." 나는 그 뜻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현재, ‘현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올여름 내내 자문했다.
오로지 나 자신…… 너무나 확실하다. - P318

아버지는 계급에 대한 의식이다. 출신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열두 살의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사건은(아니지, 나는 그걸 알고 있었어. 설명 가능한 일이었어) 그 나름의 동기를 가지고있었다. 내 어머니의 공격성, 그녀의 신분상승 욕망,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 - P337

지난 11월 6일 (내가 S를 마지막으로 본 날) 이래 처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럼에도 이 행복이 아무 동기가 없다는 사실이 약간은 나를 슬프게 한다. 어쨌든 쓸 것을 어떤 한 가지로든 정해야겠다. 이제 그만 망설여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자 하는 욕구. 마치무슨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지하실의 열린문 같은.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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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5-18 0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 글을 본 적 없지만 자기 일을 솔직하게 쓴다니 쉽지 않은 거네요 처음부터 그런 글만 쓰겠다 생각하다니... 아무도 따라하기 어렵겠습니다 아주 없지는 않겠네요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힘들겠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3-05-18 19:59   좋아요 2 | URL
애착과 욕구가 있으니 기다림이 있겠지요. 기다릴 일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도요.
희선님 이곳엔 하루종일 부슬비가 내려요.
에르노는 읽을수록 늪입니다.

페크pek0501 2023-05-18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어 보지 않았는데 호기심은 생깁니다.
인간이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거든요. 장바구니에 담겠습니다.^^

프레이야 2023-05-18 20:03   좋아요 0 | URL
솔직을 연필 삼아 쓰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간혹 구체적 묘사에 확 놀랍기도 합니다. 그보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게 매력이랄까요. 자신의 이야기를 써도 자기검열에 먼저 걸리기 마련인데 말이죠. 이 책부터 읽으면 별로일 수도 있어요 페크님.

그레이스 2023-05-18 23: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탐닉, 집착, 단순한 열정 중 단순한열정만 읽기로 했는데... ^^*

프레이야 2023-05-19 12:11   좋아요 1 | URL
단순한 열정, 예전에 읽고 올해 초 영화도 봤어요 그레이스 님 ^^

얄라알라 2023-06-0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의 음성으로 접하는 아니 에르노는?^^ 바쁘실 텐데, 신경쓰실 일도 많으실 텐데
나눔의 열린 마음으로 사시는 모습에서 자극받습니다 ~~

프레이야 2023-06-05 17:18   좋아요 1 | URL
얄라님 안녕하세요 ~ 깊고 넓은
독서생활에 늘 박수 보냅니다. 여름인가 싶을 정도로 한낮 기온이 높네요. ^^

2023-06-05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