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Eclipse / 아그네츠카 홀랜드
바다로 간 태양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스물한 살에 연기한 랭보는 그냥 살아 있는 ‘랭보’다. 데이빗 듈리스가 연기한 폴 베를렌도 못지않다. 광기 어린 두 시인의 이단아 같은 삶을 보면 우리 삶의 머리는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죽은 랭보를 그리워하며 그들이 자주 마셨던 초록 압생트 두 잔을 주문하는 베를렌. 그는 “나의 위대하고 찬란한 죄악”을 하루도 잊은 날이 없다고 회상한다.
1871년 9월 랭보는 베를렌을 만나러 파리역에 도착한다. 이미 문단의 인정을 받고 있었던 상징주의 시인 27살 베를렌과 스스로 천재이길 선택한 16살 랭보의 만남은 시작부터 위태롭다. 두 사람은 눈빛으로 처음부터 서로를 깊이 이해한다. 세기를 앞서 서구 문명과 종교를 비판하는 혁명적인 시를 쓴 랭보에게 베를렌은 유일한 지지자이며 후견인이었다. 베를렌은 다들 혐오하는 랭보의 난해한 시를 두고 한마디로 ‘something new’라며 녹슨 자신의 영감에 자극을 얻고자 한다.
보들레르를 숭배한 랭보는 재능을 놓치지 않고 스스로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 힘겨운 여정을 마다하지 않은 인물이다. “감각의 타락을 통한 선지자 - 견자(見者), 절대자 - 가 시인”이라고 말하는 랭보는 세상 모든 경험을 직접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방랑하며 거친 자유의 세계를 추구한다. 자신은 미래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베를렌의 장인이 아끼는 개 조각상을 깨어버리고 추궁하는 부자 영감에게 “개들은 원래 제멋대로예요(Dogs are liberal).”라고 말하고 수정으로 만든 십자가 따위를 절도하며 자비심 없는 종교를 조롱하는 자도 랭보다. 아버지를 일찍 잃은 후 유난히 엄격한 어머니의 굳은 얼굴과 목까지 단추를 채운 검은 옷에 숨 막혔던 그는 종교뿐만 아니라 가진 자들의 위선에 분노했다.
랭보는 자신의 시를 스스로 낭송하지 않는다. 이유를 묻자 그러고 싶지 않다고 대꾸한다. 수사적 기교에 치우치는 당시의 낭만시를 반격하듯 그의 시어는 과격하고 생경하고 남성적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어머니에게도 그냥 말일 뿐이라고, 말은 말일 뿐이라고 쏘아붙인다. 누구의 비평도 거부하겠다는 뜻이다.
베를렌이 이제 떠나겠다는 랭보에게 권총을 쏘고 동성애가 발각되어 200프랑의 벌금을 내고 2년간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랭보는 시골로 돌아가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쓴다. 불과 몇 개월 동안 파격적인 산문시를 줄줄 써 내려가고 일부는 선별하여 불에 태운다. 격식과는 거리가 멀었던 랭보는 인간의 내면을 독파하는 예민하고 조숙한 눈을 지녔다. 사랑이나 결혼, 연애의 심층까지 십 대의 나이에 그토록 예리하고도 냉소적인 눈으로 ‘보는’ 미소년 랭보는 3년간의 미친 듯한 시작(詩作)으로 분노와 격정에 종지부를 찍고 1875년 절필을 선언하며 스스로 ‘침묵의 대가(Master of Silence)’라고 호명한다.
‘저주받은 시인’이자 시인의 왕으로 뽑혔던 베를렌의 시는 충동적인 행적과는 달리 곱고 애절하다. 특히 감옥에서 나와 쓴 시집 『예지』에서는 신을 찬양하고 회개한다. 베를렌이 ‘검은 숲’에서 랭보를 만나 마지막 작별을 하며 충고한 한마디는 “재능은 있지만 비현실적인 면만 좀 벗어난다면”이었다. 신비하고 몽상가다운 천재 랭보는 누구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듯 베를렌의 충고 또한 쓸모없는 것으로 내다 버린다. 랭보는 사랑을 담은 눈으로 베를렌에게 말한다.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 줄 알고 당신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 줄 안다.”
천사의 날개인 양 하얀 깃발을 매단 장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랭보는 바다로 들어간다. 그는 평생 동경했던 태양을 발견했고 태양이 바다와 만나는 그곳이 바로 ‘영원(Eternity)’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나눈 편지의 내용이 베를렌의 내레이션으로 흐르고 태양이 바닷속으로 뒤섞여 녹는다. 바다는 영원한 모성본능, 거친 자유의 상징으로서 빛난다. 자신의 험악한 언행을 받아주고 미래를 ‘보는’ 시의 세계를 이해한 유일한 사람에게 사랑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랭보의 가엾은 영혼을 영화는 그렇게 바다로 안치해 위로한다. 서른일곱 살에 목발을 짚고 더러운 파리의 거리에서 암세포가 전신에 퍼진 생을 마감한, 태양처럼 뜨거웠던 랭보는 수식어 없이 그냥 인간 랭보로 이세상에 속하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질사회를 비판하던 저항시인 랭보는 생의 말기 10년을 에티오피아에서 무기 매매상으로 살았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남들을 도와야 한다.”고 동생 이사벨에게 호소한다. 이사벨은 랭보의 과격한 시를 실제로 고치기도 하고 없애기도 했지만 냉정한 어머니가 보는 데서 죽어가는 오빠를 손수레에 태우고 태양을 보여주려고 데려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랭보가 죽은 후 베를렌을 찾아와 오빠의 원고를 돌려달라고 하지만 베를렌은 이사벨이 주고 간 주소를 찢어 버린다. 베를렌이 지켜낸 랭보의 시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견자(見者)의 시를 완전히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압생트 두 잔을 앞에 둔 베를렌 앞에 랭보가 마치 살아 돌아온 것처럼 앉아 그의 손바닥에 입맞춤한다. 고통을 수반한 진정한 사랑을 위로하듯 오래전 랭보가 칼끝으로 찔렀던 그 손바닥에... 개기일식처럼, 예술도 사랑도 어둠처럼 찬란할 것이라는 듯, 스스로 바다에 흡수되어 버린 천생 시인!
두 영혼의 완전한 잠식과 합일을 그린 폴란드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영화 <토탈 이클립스Total Eclipse>(1995)를 보면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하게 만들어간 시인, 타인의 잣대에 맞춰 자신의 재능을 소모하지 않은 오만하고 영감이 번득이는 영혼이 그리워진다.
- 배혜경 / 부산수필문예 2021겨울(45호)

꼬리_

예지Sagesse / Paul Verlaine
1873년 7월 10일 브뤼셀에서 폴 베를렌과 아르튀르 랭보는 관계의 급전환점을 맞는다. 이날의 사건은 그들 생의 물길을 돌린다. 선회한 그 물길로 두 사람은 결정적으로 이별하고 각각 <예지>와 <지옥에서의 한철>을 낳는다. 다른 공간 같은 시간에서 시의 배아를 잉태한 건 훨씬 오래전이다. 각자 나름의 결핍된 환경에서 싹튼 기질이 훗날 빚어낸 시어에 놀라울 따름이다. 어머니에게도 아내에게도 광포했던 베를렌의 시는 <예지> 이전 마틸드를 만나고 감각적인 시어를 낭만적으로 쏟아낸다. 1881년 발간한 <예지> 이후의 시는 다소 도덕적 훈계로 들릴 수도 있지만 회한과 회억, 기독교 신으로의 복귀를 소망하며 단순함과 정결함에 복무한다.
1844년 출생한 베를렌은 1858년 최초의 시 <죽음>을 빅토로 위고에게 보낸다. 1862년에는 법과대학에 등록한다. 이후 보험회사와 시청에 근무한 베를린은 1866년 <우수 시집>을 출간하고 1869년 마틸드와 약혼, <고운 노래>, <사랑 축제>를 출간하며 아름다운 사랑의 밀어를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결혼 후 일 년도 안 되어 드러난 그의 난폭함은 아내 마틸드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1871년 랭보를 집에 처음 맞이해 들이고 첫 아들도 출생했으나 랭보와의 어울림은 부부간의 불화를 가져왔다.
베를렌 시의 극명한 전환점 <예지>는 사생활에서 엉망이었던 절망적인 베를렌에게서 시적으로 남다른 영혼의 고귀함을 느끼게 한다. 자신의 과오를 회심하고 단순함에 귀의하고자 하는 신실한 마음이 가만히 전해져온다. 그것이 개인적인 반성이라 해도 보편적으로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건드리기에 기꺼이. 감옥에서 세상을 향해 신을 향해 건네는 예술가의 비전이 그의 광기와 폭력마저 애틋한 것으로 만든다. 여생이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누군들 오욕으로 점철한 후회의 나날을 돌아보지 않을까. 하지만 베를렌은 서른 즈음에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했다는 사실. 요즘 서른이야 어린애이지만 시대적인 걸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젊은 나이다. 누구에게나 선택의 기회는 오지만 놓치고 외면하기 십상이다. 그게 편하니까. 위대한 영혼은 자신의 타고난 결함과 오점과 만행을 도마 위에 올리고 살코기 다지듯 자근자근 다져서 예술적으로 승화한다. 수구초심이랬는데, 우리 삶의 머리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지난날? 앞날? 1995년 나온 이 영화를 다시 보면 랭보보다 베를렌이 다시 보인다.
하늘은 지붕 위로
하늘은 지붕 위로/ 저렇듯 푸르고 조용한데,
지붕 위에 잎사귀를/ 일렁이는 종려나무,
하늘 가운데 보이는 종/ 부드럽게 우는데,
나무 위에 슬피/ 우짖는 새 한 마리,
아하, 삶은 저기 저렇게/ 단순하고 평온하게 있는 것을.
시가지에서 들려오는/ 저 평화로운 웅성거림.
-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울고만 있는 너는.
<예지, 10쪽>
오, 희어지라, 그리고 이곳을 떠나라, 천천히, 두 손을 잡고
그 어제의 나날들이 우리의 아름다운 내일의 나날들을 삼켜 버린다면?
지난날의 광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면?//
그 기억들은 다시 죽여야 할 것인가?
이 미친 듯한 유혹의 공격, 아마도 더 이상 없을!
오, 저 뇌우와 싸우기 위해 기도를 드려라, 기도를 드려라.
<거짓된 아름다운 햇살이, 일부 / 예지 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