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미란 음식의 향기로운 맛, 풍미란 음식의 고상한 맛이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이 말만 가지고 보면 향미보다 풍미는 훨씬 광폭의 맛으로 느껴진다. 와인의 맛을 품평할 때 향미보다는 풍미를 자주 써 부피감과 무게감을 표현하는 건 그래서일까. 비슷한 말로 '맛매'를 쓰는 '풍미'에 '풍'은 바람 풍, 가르침 풍, 풍속이나 습속 풍의 한자를 쓴다. 바람의 맛, 이 뜻도 괜찮게 와닿네. 풍미의 또 다른 뜻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 됨됨이'가 그래서 있는 듯하다. 그 사람에게서 풍미가 느껴진다,라고 하지 향미가 느껴진다,라고는 하지 않으니. 코로나에 걸리면 후각과 미각을 상실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다. 당장 감기에만 걸려도 후각이 마비되어 맛을 잘 느끼지 못한다. 향미를 느끼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은 좀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은/는, 연희동
사루비아 다방 대표 김인의 두 번째 책 <고유한 순간들>은 그야말로 향미와 풍미가 모두 느껴지는 책이다. 만듦새도 참하다. 이 책을 보고 나는 사루비아 다방으로 당장 달려갔다. 빨리 가서 차 맛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비행기를 타고 공항철도를 타고 길은 멀어도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다. 서울 친구들도 만나도 두 딸도 만나고 겸사겸사 며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덤으로 감기몸살이 2차전으로 덤볐지만 주사 한 대 맞고 이제 콧물만 조금 난다.
이 책에는 벤야민의 유년 생경한 골목 이야기와 바르트의 이야기 등 품 넓은 독서와 굴드 등의 취향이 보인다. 특히 조 말론과의 인연과 <향수>의 그루니에 이야기는 차의 향에 몰두하고 대세를 따르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향미를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연구한 특별한 출발점으로 읽혔다. 차는 맛이기 이전에 향! 이라는 걸 깨달은 저자는 향미를 "이미지들의 결합"이라고, "기억과 시간들의 콜라주"였다고 쓴다. 나아가 "쓰지만 달콤했고 쓸쓸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눈부시게 중첩된" 게 향미라고 기억한다. 우리의 흘러간 시간과 기억은 그렇게 현재에 향미를 남기지 뭔가. 그런 이미지들의 결합을 차로 구현해 내고자 오롯이 하나의 길을 걸어온 저자가 존경스러워졌다. 어려움이야 왜 없었겠는가. 모든 걸 이겨내고 담담히 걸어오기까지 그 심지에 박수 보내고 싶어진다. 저자는 자신만의 고유한 블렌딩 티를 만들고 싶었고 사루비아 다방 특유의 개성 있는 블렌딩 티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향기에서 공간이 그려지는 티, 그 차를 마시면 어떤 공간으로 사람을 데려가는 티, 그런 걸 만들고 싶은 사람의 순정과 진심이 느껴지는 책이다.


비하인드 리메인,에서 마신 분홍반지
작은딸이랑 연희동 골목을 거닐었다. 바람이 조금 차가웠지만 그런대로 다닐 만하였다. '시오'라는 일본가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조금 걸어내려가니 우측으로 이층 양옥집을 그대로 개조해 은/는,이라는 공간이 보였다.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그냥 가정집 마당, 그곳에 네 가지 소담한 공간이 자리했다.
사루비아 다방에서는 차를 시향하고 구매할 수 있고 이층의 작은 찻집 '비하인드 리메인'에서 차를 마셨다. 대표가 나와 있으면 사인 받으려고 했는데 직원만 둘 있었다. 죽이 잘 맞는다는, 함께 일하는 '세 마녀' 중 두 분인 것 같다. 시향을 해 보았는데 각각의 차마다 향이 참말 좋았다. 2층 '비하인드 리메인'에 올라가 나는 '분홍반지'를 딸은 '모로칸 매드니스'라는 민트차를 마셨다. 분홍반지는 부드럽고 향기롭고 편안한 향미였다. 어느 봄날, 오월의 순간으로 나를 데려가는 느낌. 민트차는 맑고 시원한 수풀로 데려가는 기분이었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만추의 나무가 보기 좋았다.
다시 내려가 큰딸에게 줄 '봄봄'(요건 녹차 100%)이랑 작은딸에게 줄 '모로칸 매드니스'를 구매하고 유리창 밖으로 소소한 마당 풍경을 바라보고 나왔다. 이 책 <고유한 순간들>에는 블렌딩 차의 작명에 대해서도 나오는데, 특히 '분홍반지'는 김인 대표가 특히 사랑하는 이름이고 차 이름 잘 짓는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고 자부하는 이름이다. 그럴싸하다는 소리를 듣는다는데, 정작 김인 대표는 정확하게 지으려 애쓰는데 그럴싸하다고 말해서 아쉬워한다. 정확한 이름!!!

정확한 이름,이라고 하면 참 하고픈 말이 많아진다. 김인 대표도 그러했는지 '분홍반지' 작업노트에 쓴 글귀가 마음에 와닿는다.
이름은 사물에 깃든 영혼을 깨운다는 말이 있다. 단 정확해야 깨운다. 정확해야 사물이 자신ㅇ르 부르는지 알고 이름에 응답한다. 사루비아 다방의 차 중에서 이름이 분홍반지라는 차가 있다. 가장 사랑받는 이름이다. 분홍반지는 정확히 지은 이름이다. 분홍반지는 처음부터 분홍반지여야만 했다. 그것은 지어낸 이름이기보다 끄집어낸 이름이다. 나는 그것이 분홍반지인 줄 첫눈에 알아봤다. 그것은 루이보스와 체리, 크랜베리 등이 혼합된 허브차가 아니라 처음부터 분홍반지였다.
완성된 차의 이름을 지으려 차를 마신다. 이때는 개별 향미나 밸런스를 감수하지 않는다. 오직 이름을 찾으려 차를 마신다. 로미오!를 찾고 줄리엣!을 찾는다. (139-140쪽)
금옥당 양갱이랑 연희양과점 과자도 맛났다. 그다음날은 망원동 '참숲'(뱅쇼랑 라따뚜이 오믈렛 추천)에서 두 딸과 셋이서 점심 먹고 오상진, 김소영 아나운서 부부가 하는 북플랜트, 합정동 서점에 갔다. 낙엽 구르는 거리가 한산한데 날은 점점 흐려지고 빗방울 한두 방울 떨어지려는 늦은 오후, 늦가을 분위기 물씬했다. 거기서 작은딸에게 사 준 책은 <음악,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피아노를 좋아하고 연주를 놓지 않는 딸. 한때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지만 지금은 다른 길로 가고 있다. 응원한다, 딸!! 자리에서 60쪽까지 읽고 나왔는데 잘 산 것 같다고 흡족!
나는 머리가 맑아지는 페퍼민트차, 작은딸은 얼죽아.

저 위 2층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작은딸. 2월이면 졸업이다.


은/는, 의 2층에는 유어마인드,라는 작은 서점이 있다. 그 서점은 아주 작았고 구비된 책도 다양하진 않아 썩 마음에 들진 않았는데 올라가는 철재계단에서 저렇에 붉게 타는 단풍잎과 눈맞춤했다.^^ 실컷 태우고 또 태워라.
(덧)
사루비아 다방 조금 못 가서 '바늘이야기'라는 뜨개 핫플이 있다. 하얀 건물에 주황색 상호가 포인트로 눈에 확 들어왔다. 들어가보니 주로 20대로 보이는 여성들이 복작복작 소담소담. 색상 고운 실타래와 각종 뜨개바늘, 소품, 소도구들이 즐비했다. 작은딸이 여기서 실도 사고 뜨개 취미도 붙여서 이거저거 좀 뜨는데 내 선물로 작은 손가방을 떠서 줬다. 이게 통짜로 뜨는 거라는데 귀엽다. 똑 같은 게 전시되어 있어서 신기했다.^^

사진 안 찍어서 업체사진 가져옴

바르트는 "작가란 그가 생산을 끝낸 순간이 아니라, 그가 생산하고 있는 순간에만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책 쓰기를 끝내자마자, 그리고 그것이 출판되자마자 진실로 그 책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도 했다. 할 말을 책에 다 써버린 작가에게 그 책에 대해, 쓴 말에 대해 또 말하라는 것은 가혹하다. 차도 글도 내가 쏟는 관심, 혐오와 애정은 생산하는 순간에 집중돼 있고, 집중의 강도가 높았을수록, 그것에 충실했을수록 털어내는 일이 쉽다. 어떡해서든 털어내고 싶어 한다. 나는 완성된 차를, 글을 털어낸다. 그러면 더 이상 그것은 내 것이 아닌 게 된다. 그것에 대한 관심도, 혐오와 애정도 내 것이 아닌 게 된다. - 고유한 순간들, 중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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