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 세상을 바로 읽는 진실의 힘 팩트체크 1
JTBC 뉴스룸 팩트체크 제작팀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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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티비가 없다. 브라운관을 부셔버렸더니 TV가 안 나온다.

따라서 JTBC <팩트 체크>를 본 적도 없다.

 

<그것이 알고 싶다>와 같이 읽어서인지 <팩트 체크>는 기대에 못 미친다. 그렇지만 공중파 방송들이 재벌, 권력의 나팔수로 전락한 현실을 고려해보자면 JTBC <팩트 체크>는 그나마 양심을 지닌 언론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의 빛이다.

 

<팩트 체크>에 따르면 9.11 이후, <9.11 조사위>18개월 동안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200명의 사람을 만났고, 12차례의 청문회를 열었다. 부시 대통령, 딕 체니 부통령, 국방장관, 국무장관, 등등 전, 현직 고위 정부 인사가 모두 증언대 앞에 섰다.

 

반면 한국의 세월호는? <세월호 특조위>는 정부와 새누리당의 방해로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세월호가 지겹다는 사람들이 있다. 도대체 뭐가 지겹다는 걸까?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왜 국가가 구조를 방기했는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는데 뭐가 지겹다는 걸까? 지겨울려면 무언가가 이미 결론이 나야 하는 거 아닐까?

 

담뱃값 인상, 정부의 말대로 국민 건강을 위한 조치였을까? 새누리당 김진태 위원은 담배 피울 때마다 흉측한 그림을 봐야 하는 것은 흡연권, 행복 추구권 침해다라고 말했다.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위해 담배에 경고 그림을 올리지 말자는 주장이다. (의원님, 국민의 행복 추구권을 위해 아가리를 다물면 안 되겠니?)

 

대기업의 현금 보유액이 줄어들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장하성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의 자료를 보면 대기업의 사내 유보금은 계속 증가세다. 국민 GDP3만 달러에 육박한다는데 왜 너도 나도 생계에 위협을 받는 걸까?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몫을 자본가들이 제대로 지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 위기가 과잉복지라고 말한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의 주장, 팩트일까? 새빨간 거짓말이다. 복지로 국민들이 나태해진단다. 그리스 연간 평균 노동시간 2037시간이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그리스 경제 위기의 원인을 유로화 화폐 통합으로 보았다. 더구나 그리스 경제위기를 부추긴 건 정치권의 부정부패와 무능 때문이었다.

 

과잉복지? 한국이? 2014년 한국의 GDP대비 복지 지출은 10.4프로 불과하다. OECD 평균 수준인 25퍼센트에 도달하려면 40년이 걸린다는데 과잉 복지라고?

 

서울대 경제학부의 이준구 교수는 과잉복지 논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4대강이나 자원 개발에 몇십조 원을 쏟아부은 정부가, 무상급식 2조원이 아깝다고 호들갑 떠는 모습은 가관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학살이후 대국민담화에서 관피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언했다. 그런데 정작 입법 과정에서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헌법에 위배된다며 법안 통과를 막아버렸다. 기본권에 위배된다나.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관피아 방지법이 시행에 들어갔다. 그런데 고위공직자들은 피해가고, 애먼 하위직 공무원만 잡는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안 들리는 이유를 그동안 나는 저작권 사용료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팩트가 아니었다. 경기가 좋지 않아서였다. 하긴 주머니도 허하고 마음도 허한 사람에게 캐롤 들려 준다고 눈 보고 꼬리치는 개 마냥 기분이 좋아지진 않겠지.

 

공중파 방송, 뉴스, 조중동같은 신문들은 이제 더 이상 팩트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짓을 팩트로 조작하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는 각자가 팩트를 체크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부자와 대기업을 위한 당에 투표한 결과다.

국민을 위한 지식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든지 (예를 들어 경제학이라면 선대인이나 우석훈)

책을 읽던지, 그것도 아니면 생각 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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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03-19 0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공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에 눈을 뜨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는지 알아야 할 텐데요. 가난한사람들이 부자들을 위한 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까요ㅠ?

시이소오 2016-03-19 09:03   좋아요 0 | URL
저도 참 그걸 모르겠네요 ^^; 제 주변엔 부자당 지지하는 가난한 사람들도 없구요 ^^;

eL 2016-03-19 13:38   좋아요 2 | URL
역시 꾸준한 교육 밖에는 답이 없지 않을까요..? 가난한 사람들은 실제 선거에서 더 보수적이라는 연구결과를 본 적이 있는데, 아마 상황이 더 나빠지는걸 두려워해서 지금만큼만이라도.. 하는 맘이 아닐까싶은.

늘 안타까운건 소득이 낮을수록 책을 읽고 강연을 다닐 시간적여유도 물질적여유도 없어서 악순환이 되는것 같아요. 관련테마의 논의가 더 낮은자세로 문턱을 낮추며 다가가야할 것 같아요. ㅠ_ㅠ)ㅇ˝ 불끈

시이소오 2016-03-19 13:43   좋아요 1 | URL
to el님 티비는 또 열심히들 보시니, 참 답답하네요 ^^;

2016-03-19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3-19 11:31   좋아요 1 | URL
답답하죠. 남의 집 티비를 부셔버릴 수도 없구요 ^^:

깜장앨리스 2016-03-19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언론 장악이 이리도 무서운 것인지 요즘 들어 절실히 느끼는 중입니다.

시이소오 2016-03-19 12:56   좋아요 0 | URL
경계를 게을리하면 그런가 싶어져요^^;

깊이에의강요 2016-03-1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울어진 운동장 ㅠ

시이소오 2016-03-19 19:52   좋아요 0 | URL
이 비유가 어디서 나왔었죠?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깊이에의강요 2016-03-19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권이 질때마다 하는 얘기요 ㅋㅋ

시이소오 2016-03-19 20:07   좋아요 0 | URL
오, 글쿤요. 깊이에의 강요님 은근 깊이가 있으세요^^

깊이에의강요 2016-03-19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아시면서 놀리시는거
같지 말입니다 ㅍ^^

시이소오 2016-03-19 20:47   좋아요 0 | URL
전 정말 모르지 말입니다. ^^
 
시민의 교양 (반양장) - 지금, 여기, 보통 사람들을 위한 현실 인문학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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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출판계의 블루칩은 단연 채사장이었다. <지대넓얕>은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시민의 교양>역시 기대를 저 버리지 않는다. 내가 만일 독재자라면 국민들을 붙잡아 삽을 들게 하는 대신 채사장 책을 읽히겠다.

 

<시민의 교양><지대넓얕>의 확장편이라고 볼 수 있지만 후반부의 교육, 환율, 인구 편은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내용들이다.

 

엄기호, 하지현의 <공부중독>에서 상위 10개 대학의 합격률은 전체 4.5퍼센트였고 <시민의 교양>에 따르면 인 서울대학의 합격률은 상위 8퍼센트다. 이걸 수입과 비교해보면 상위 10%의 수입은 한 달 330만원이다. 이에 비해 중간 50%의 소득은 연간 1,070만원, 한 달에 90만원이 채 안 된다.

 

, 상위 10%에 끼어야만 이 나라에선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다. 평균 50%에 끼면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채사장은 경쟁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을 개인이 극복하기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학생들이 의무 교육을 통해 경쟁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을 내재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에 위치한 보통의 사람이 한 달 90만원 벌어야 하는 사회가 과연 정의로운 사회일까?

 

오연호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를 보면 덴마크 사회, 덴마크 학교는 나름의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한국인으로 보기엔 유토피아에 가깝다. 특히나 덴마크 교육은 부럽기 그지없다. 덴마크는 매번 OECD 학생 행복도 조사에서 매번 상위권을 기록한다. 덴마크 학생들은 경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덴마크 고용률은 75%.

 

바야흐로 전 세계적인 저성장 시대다. 인플래이션기에는 물가가 상승하고 실질 임금은 감소하고 서민들의 부담이 커진다. 자본가나 대기업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이익이다. 환율 상승으로 수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대부분의 나라가 인플래이션 정책을 추구하고, 한국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정치권과 기업은 부족한 내수시장의 상황을 이유로 지속적인 고환율 정책을 요구한다. 한국에서는 소비가 줄어드는 추세다 왜? 소비를 담당할 인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보통 6.25 전쟁 이후인 1955년부터 1963년까지의 9년간 태어난 사람들을 1차 베이비붐 세대로 분류한다. 2016년 기준으로 50대 중반부터 60대 초반에 속하는 세대다. 그리고 2차 베이비 붐 세대는 1968년부터 1974년의 7년. 현 40대 초반부터 후반까지의 세대다.

 

이 베이비 붐 세대는 모든 부분에서 팽창을 가져온다. 한편 이 다음 세대는 모든 부분에서 수축을 경험한다. 수축기인 현 시대의 소비 주체에겐 안정된 일자리가 부족하고 임금도 낮다. 한 마디로 부모 세대의 부동산을 구매할 형편이 안 된다. 그러면 부동산 가격 하락은 피할 수 없다. 부동산의 하락은 자산의 축소다. 따라서 소비심리는 저하된다. 소비의 위축은 디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한다.

 

정부는 디플레이션을 피하기 위해 인플레이션 정책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 통화량을 늘릴 것이다. 통화량이 늘어나면 통화 가치가 낮아지고 환율을 상승시켜 수출은 늘어나고 수입은 줄어든다. 수출 중심 대기업은 살아남겠지만 내수 시장은 침체되고 개인 경제 상황은 악화되는 가운데, 수입 가격 상승으로 물가만 상승하는 스테크플레이션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한 자본가와 노동자의 소득 격차는 점점 더 심화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시장의 자유인가? 정부의 개입인가?

 

시장의 자유를 추구한다면 세금과 복지는 낮아진다. 투자가와 사업가의 이익은 극대화 될 것이다. 따라서 빈부 격차는 점차 심회될 것이다.

 

정부의 개입을 선택한다면 빈부 격차는 완화되고 세금의 주체는 소수의 부유층이 될 것이다. 직업에 있어서는 임금 노동자의 이익이 우선될 것이다. 국가는 생산 수단의 개인소유를 제한함으로써 자본가에 의한 부의 독점을 막고, 적극적인 복지를 통해 노동자의 삶을 개선할 것이다. 소득 격차는 줄어들고 고용 안정성은 높아질 것이다.

 

시민은 이러한 양 갈래의 길에서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있다. 투표다.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당에 투표하는 걸까?

부자들이 장악한 교육, 언론에 의해 세뇌되고 있어서일까.

 

어용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낙수효과? 물벼락 맞을 소리 하지도 마라.

자본가의 수입이 늘어난다고 고용이 느는 시기는 끝났다. 자본가들은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기꺼이 아프리카 말리까지 찾아간다. 그것도 아니면 인간을 로봇으로 대체하면 끝이다. 전체 파이가 늘어난다고 노동자의 몫이 커지진 않는다.

 

무조건 박근혜라고 믿는 어르신들이 있다면 채사장 책을 셋트로 사다드리자.

 

다음으로 세상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의 경제체제를 선택하고, 이를 반영하는 하나의 정당을 지지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정당을.

신문을 접고, 티브이를 끄고, 타인의 말에 휩쓸리지 말고, 나의 현실을 직시한 후에 정말 나에게 이익이 되는 세계가 무엇인지 현명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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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밤. 그리고 380만 년의 영원


p256. 960년에는 은자 베르나르라 하는 수도사가 이제 곧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설교하며 돌아다녀 또 소동이 일어납니다. 960년에는 프랑스 로렌 지방에서 이 세상의 종말이 바야흐로 가까워졌다는 소문이 민중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퍼져나가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번에야말로 1009년에 세계가 멸망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도 독자적으로 계산하여 1033년에 인류가 망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p257. 문학이 끝났다는 말도 고래부터 한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극작가이자 시인인 실러조차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신인작가도 새로운 문학작품도 완전히 엉터리다, 모방이나 속악한 것뿐이다, 이제 문학은 죽었다, 고 말이지요. 괴테도 똑같은 말을 하는데, 하지만 뉘앙스가 약간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이 세계는 속악함으로 흘러가버렸다, 나는 이제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시대의 마지막 한 사람일 것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문학이 끝났다, 순문학은 끝났다, 근대문학이 끝났다, 하는 이야기는 수백 년, 수십 년이나 반복해서 말해오는 것입니다.

 

그 후 독일 문학이나 독일 철학에서 누가 나왔는지 아시죠, 횔덜린, 헤겔, 셸링, 클라이스트, 노발리스, 하이네, 슈티프터, 니체, 릴케, 첼란......끝이 없습니다. 경탄할 만한 재능이 무수히 나왔습니다.


p259. 그런데 그리스인들이 쓴 책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요? 천 권 중 한 권입니다. 많이 잡아도 두 권을 넘지 않습니다. 99.9퍼센트는 사라졌습니다. 사멸한 것입니다. 남은 것은 단 0.1퍼센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 문학은 패배했을까요? 괴멸한 것일까요? ....0.1 퍼센트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99.9퍼센트의 사멸을 넘어 그리스 문화는 이슬람 문화를 키우고 유럽을 창출했으며, 우리 세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p260. 다만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자가 탄생한 지 아직 겨우 5000년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5000년 동안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완전한 문맹이었습니다.

 

p268. 그 후 19세기가 되면 출판 종수가 급락하는데, 그것은 또 왜일까요? 1805년에는 유럽에서 4081종이었던 서적의 출판 종수가 1813년까지 2233종으로 뚝뚝 떨어집니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혁명 때문입니다. 프랑스 혁명 전야, 독서에 대한 열광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변절, 프랑스 황제에 대한 대관으로 프랑스혁명이 어떤 의미에서 좌절합니다.

 

p269. 17세기라고 하면 코르네유나 라신, 라파예트 부인의 시대입니다. 프랑스 문학의 한 융성기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1672년 파리의 식자율은 25퍼센트였습니다. 게다가 이 식자율이라는 게 사인을 할 수 있는가의 여부로 판정된 것이었습니다.

 

p272. 1850년대의 잉글랜드는 어땠을까요?가장 선진국이었습니다. 성인 문맹률은 30퍼센트였습니다. 1850년이라고 하면 디킨스가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출판한 해입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떨까요? 40~45퍼센트였습니다. 어떤 책이 출판되었을까요? 우선 이해에는 발자크가 죽은 해입니다. <골짜기의 백합>1835년에 나왔습니다. 스탕달의 <파르므의 수도원>1839,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1857, 보들레르의 <악의 꽃>의 초판도 1857년에 나왔습니다. 이탈리아의 문맹률은 70~75퍼센트였습니다. 에스파냐의 문맹률은 75퍼센트였습니다.

 

좀 더 근사한 것은 러시아입니다. 1850, 러시아제국의 문맹률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90퍼센트였습니다. 최신 연구에는 95퍼센트라고 하는 문헌도 있습니다.

 

p273. 그렇다면 1850년 전후에 누가 무엇을 출판했을까요? 푸시킨이 1836년에 <대위의 딸>을 냈습니다. 고골 리가 1846년에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 톨스토이가 1852년에 <유년 시대>, 투르게네프가 1852년에 <사냥꾼의 수기>를 냅니다.

 

그 당시 러시아 인구는 4000만 명이었습니다. 대충 양보하여 10퍼센트인 400만 명이 도스토엡스키를 읽을 수 있었다....., ,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400만 명 밖에 자산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단적으로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어로 문학 같은 걸 해봤자 소용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파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요?

 

p275.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당연합니다. 문학이 살아남고, 예술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왜 쓸까요? 왜 계속 쓰는 걸까요? 계속 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달리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p276. 그리스인들이 99.9 퍼센트 소멸한 가운데 0.1 퍼센트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처럼 러시아인들도 이겼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0.1 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0.1 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p278. 우리 인류는 생겨난 지 20만 년이나 되었습니다. 문자를 발명한 지는 5000년이 되었습니다.

 

p279. 요컨대 대체로 75천년 전부터 35천년 전까지 넓은 의미에서 예술이라 불리는 행위가 거의 다 나왔습니다. 농경, 목축, 부의 축적에서 오는 경제활동이라는, 이른바 정주에 의한 문명은 12000년 전부터 9000년 전, 대체로 1만년의 역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술의 역사에 비하면 7분의 1의 역사밖에 안됩니다.

 

p282. 우리의 문학은 이 세상에 생을 얻은 지 고작 5000년밖에 안 된 젊은 예술이고, 아직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5000년은 20만 년의 40분의 1입니다. 여든 살 노인의 입장에서 보면 두 살배기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p283. 전대미문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전대미문이지만 과학적인 사실입니다. 세계의 종말은 이미 있었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오지 않지만 말이지요. ‘대대적인 절멸이 있었습니다. 다섯 번이나요. 어떤 고생물학자에게 물어도 이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이 전원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오르도비스기, 데본기, 페름기(이첩기), 트라이아스기(삼첩기), 백악기. 이를 빅 파이브라고 합니다.

 

p284. 생물 의 평균연령은 대체로 400만 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1년간 자연사하는 종은 400만 종에 한 종 꼴입니다.

 

p287 전쟁 전이 발레리라면 전후 프랑스 최대의 비평가라 불리는 모리스 블랑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단적으로 “‘는 죽을 줄을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왜일까요? 행동이라는 것은 뭔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며, 그리고 그것이 끝났다는 것을 확인해야 비로소 끝납니다. 결말을 지켜봐야 끝납니다. 그런데 죽는다는 행위는 그 결말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p2188. 블랑쇼는 사람은 죽을 수 없다라는 이 사고를 더욱 확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는 멸망한다. 하지만 인류는 멸망하지 않는다.”

 

p291. 우리들 호모사피엔스가 400만 년 산다고 하면, 우리가 탄생한 지 20만 년이 되었으니 앞으로 380만 년 정도는 남아 있습니다. 400만 년에 20만 년이니까 20분의 1이네요. 여든 살 노인이라고 보면 네 살에 불과합니다. 네 살치고는 상당히 잘하고 있습니다. 흔히 농담으로 말합니다만, 네 살 짜리 남자아이가 찾아와. “우리 세계는 끝났다. 역사는 끝났다. 이제 우리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바로 파멸의 위기 한복판에 있다.”라고 우쭐하여 빙글거리며 말했다면, 물론 물리적인 징계는 몹시 좋지 않은 일이겠지만, 웃으며 엉덩이를 살짝 꼬집어주지 않으면 교육상 좋지 않을 겁니다.

 

p291. 379만년 양보한다고 해도 앞으로 1만 년은 남은 셈이네요.....그렇다면 1만년 간 우리의 루터, 무함마드, 하디자, 아우구스티누스, 테레지아, 도스토엡스키, 조이스,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 ()들 같은 사람들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을까요? 어차피 1만 년이나 있으니까 예술도 부처도 다시 올지도 모릅니다.

 

들뢰즈처럼 쾌할하게 철학이 끝났다고? 그건 첫 번째 황금시대가 끝났다는 것에 지나지 않아. 앞으로 두 번째 황금시대가 찾아올 거야라고 단언해도 되지 않을까요?

 

p293. 당신은 뭔가를 하고 그것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행해지는 것이다. “당신은 행해진다! 어떤 때라도!”라고 노래하듯이 그는 말합니다. 즉 우리는 우주의 거대한 생성의 일부이고 그 의미인것입니다. 이 방대한 우주의 생성 안에서 이리하여 우리가 말을 얻을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을 자아내가는 것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의미입니다.

 

p295. 자신이 한 일을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요? 그건 그 말 그대로입니다. 예술가에게 예술은 본질적으로 그 과정만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제작하고 lT을 때, 자신의 몸도 마음도 함께 부서지고 변용해가는 과정만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세상에 내놓고 평가를 받는다느니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다느니 하는 것은 그다음 문제입니다.

 

p296. 명예욕을 위해서도 아니고 금전욕을 위해서도 아니라고 한다면,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걸까요? 그것은......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해볼까요?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나 ....발레리가 없었다면 저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나 라캉이 있어주어 다행입니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요. 발소리를 들어버렸던 것입니다. 도움을 받아버린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구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발소리를 내는 것조차 거부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발소리를 내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터입니다. 들려주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입니다. 한 발짝이라도 좋으니까요.


p297.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초판으로 몇 부나 인쇄되었는지 아십니까? 700부입니다. 350부가 반품되어 태워졌습니다. 2판에서 대폭 증보 개정합니다만, 그 또한 비슷비슷합니다. 그중 한 권을 헌책방에서 우연히 산 사람이 바로 스물한 살의 프리드리히 니체였습니다. 그는 깊은 충격을 받아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를 쓰게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겠지요.

 

p298. 그렇다면 철학사상 견줄 것이 없는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부인 제4부가 몇 권이나 배포되었는지 아십니까?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단 7부입니다.

 

니체는 이런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극소의, 그러나 절대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거는 것. 그것이 우리 문헌학자의 긍지고 싸움이다, 라고요. 이것이 미래의 문헉학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미래의 문헌학이란 대천사의 문헌학이다, 라고요.

 

말은 그것을 빠져 나옵니다. 발소리가 들려옵니다. 그것이 들려옵니다. 낮게, 알아듣기 힘들지만, 그러나 확고한울림으로, 한밤중에. 그래요, 들려오고 말았으니까요.

 

p301. 그래도 패배가 두렵습니까? 내기에 지는 것이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역시 최후에는 그를 등장시키지요.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 4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다 높은 인간들이란 니힐리즘에 도달하기까지 철저히 높은 인식 수준에 있어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설명해두기로 합시다. “그대들, 창조하는 자들이여,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잉태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이를 잉태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한 조금 뒤입니다.

 

그리고 그대들이 비록 큰 일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인간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좋다! 가자!

 

높은 종족에 속할수록, 완성하는 일은 드물다. 여기 있는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 모두가 충분히 완성되지 않은 게 아닐까?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인간이 도달할 수 있어야 할 가장 먼 것, 가장 깊은 것, 별처럼 높은 것, 거대한 힘, 그 모든 것이 그대들 항아리 안에서 서로 부딪치며 부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때로 항아리가 부서지는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어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p303 그렇습니다. 지금은 전야입니다. 이 전야가 깊어지는 가운데 우리도 사라지기로 합시다. 우리의 밤 속으로. 우리의 싸움 속으로. 우리의 승리하고 패배하는 환히 속으로.

 

p306. <야전과 영원>에 반응해준 이가 사상이나 비평 주변에서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장에서 뭔가를 창조하고 끊임없이 운동하는 작가, 음악가, 미술가, 디자이너, 활동가들이었다는 역력한 사실은 어느 위대한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등뼈에 철심을 넣고 내 피에 유황을 부어넣었다.” ()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감히 피하기로 한다. 본문에서 은밀하지만 명백한 경애와 연대의 신호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 제목은 파울 첼란의 <빛의 강박>에 실린 한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p309 옮긴이의 말

 

혁명이란 폭력이 아니라 문학이다. 읽는 것과 쓰는 것, 그 자체가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고 이 책에서 저자는 거듭 말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문학은 소설 같은 것이 아니라 더욱 넓은 의미다. 이때의 문학은 문자로 쓰인 모든 텍스트에다 춤이나 음악 등까지 포함한 것.

 

이 책은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책인데,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다는 것이고, 책을 고쳐 읽는다는 것은 고쳐 쓴다는 것이며, 책을 고쳐 쓴다는 것은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이고,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은 곧 혁명이다. 그리고 읽고 쓰는대상이 종이에 쓰인 것에 한정된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극히 한정된 시공에서고 춤, 음악, 노래, 복식, , 회화, 영화 등 온갖 예술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

 

p316. 저자에 따르면 책은 본래 읽을 수가 없다. 읽으면 미쳐버리기 때문이다. 알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가 아니면 일류의 책이라고 부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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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이 미덕에 바치는 오마쥬


요나스 요나손 성석제 이기호

 

의아했다. 피에르 르메트르가 공쿠르 상을 받았다고?! 공쿠르상이 일본 나오키 상처럼 말랑말랑한 상이 아닌데?! 르메트르 소설 중 몇 권은 재미없어 읽다 말았고 그나마 끝까지 읽은 소설은 <알렉스>였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그런 미스테리? ‘끝에 가서 삑사리를 내서 그렇지 르메트르 보다는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가 훨 낫지 않나?’

 

읽으면서 연신 놀라움에 휩싸였다. 이게 같은 사람이 쓴 거라고? 정말, 리얼리?!

이 정도면 가히 비상, 도약이라 할 만하다. 미스테리 소설만 쓰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마르케스 혹은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같은 소설을 쓸 줄이야!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어쩌면 읽기때문일까.

 

이 텍스트를 써가면서 나는 몇몇 작가들을 차용했다. 에밀 아자르, 루이 아라공, 제랄드 오베르, 미셸 오디아르, 호메로스, 오노레 드 발자크, 잉마르 베리만, 조르주 베르나노스, 조르주 브라상, 스티븐 크레인, 장루이 퀴르티스, 드니 디드로, 장루이 에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박토르 위고, 가즈오 이시구로, 카슨 매컬러스, 쥘 미슐레, 안토니오 무뇨스 물리나, 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 마르셀 프루스트, 파티리크 랑보, 라로슈푸코 등등

 

p669. <오르부아르>

 

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전사자 국립 묘지를 만들기로 한다. 이 사업에 악마의 화신 같은 도니프라델 중위가 뛰어든다. 정부 고위 인사에게 온갖 뇌물을 먹여 사업권을 취득한 도니프라델은 오늘날 탐욕스런 자본주의, 대기업의 상징같은 존재다.

 

관은 170cm에서 130cm까지 줄어든다. 전사자들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서는 관에 집어넣을 수가 없다. 전사자들 시체와 무덤 명패도 맞지 않는다. (유족들이 무덤을 파볼 것 같아!) 심지어 프랑스 군인의 묘지에 독일 군 시체를 집어넣는다. 이후엔 아예 시체없이 무덤을 흙으로 채워 넣기까지!

 

전쟁 중 도니프라델의 부하였던 미야르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생계고에 시달리다 전사자 추모 기념비를 만들어 준다며 전국적인 사기를 친다. 과연 누가 더 사악한가?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과 풍자적인 문체 때문에 요나스 요나손이 떠올랐다.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의 노인> 보다는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한국 작가들 중에도 <오르부아르>나 요나스 요나손에 비견할 만한 작가들이 있다. 성석제와 이기호. 한국의 웃픈 현실을 이 두 작가만큼 제대로 보여주는 작가들이 있던가? 성석제로 치자면 아무래도 <투명인간>이 아닐까. 짐승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혹사당하는 만수는 <오르부아르>의 알베르를 떠올리게 한다









<오르부아르><투명인간>보다 더 가혹한 소재를 다루면서 웃음을 잃지 않는 작품은 단연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 이 소설에서 알베르, 만수에 비견될만한 인물은 나복만이다. 더 바보같고 그가 당하는 고통은 더 처절하다.


최근에 이기호의 신작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가 출간되었다.

부디 <오르부아르>만큼 대박 나시길.

 

(20대 때 불문과 다니는 친구는 테레사 수녀, 테레사 수녀라는 말을 못 견뎌했다.

“‘떼레쥐라고 해 줄래?”

 

어찌나 때리고 싶던지. 내가 불문과 가고 나서야 그 친구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제목 <오르부아르>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은건지 모르겠다.

의역을 한 것도 아니고 원제를 다 살린 것도 아니고.

근데, 이 바보 같은 제목이 왠지 소설과 잘 어울린다.

 

아무튼 에두와르와 알베르가 부디 다시,

천국에서 만나길

오흐부아, 라 오

 

 

밑줄 그은 문장

 

p264. 앙리가 보기에 세상은 두 종류로 구분되었다. 하나는 죽을 때까지 뼈 빠지게, 그리고 맹목적으로 일하면서 그날그날을 불쌍하게 연명해 가는 마소 같은 존재들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엘리트들이다. 그들의 <개인적 요소들> 때문에 말이다.

p277. 그녀는 별로 질색하지 않았다. 어머니 쪽으로는 리무진적인 면을 물려받았지만, 평범한 편이었던 아버지 쪽으로는 수레적인 면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p294. 꼭 그녀의 아버지처럼, 정말로 한 켤레의 양말처럼 닮은 부녀였다.

 

p521. 라부르댕은 문장을 만들 때 오로지 음절을 고려하지, 그 안에 담기는 생각을 고려하는 적은 거의 없으니까.... 라부르댕은 일테면 원구형의 천치라고 할 수 있었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항상 멍청한 모습만 보이니까 말이다. 그에게선 아무것도 이해할 게 없고, 기대할 것도 없었다.

 

p550. 난 왜 갈보집들이 그렇게나 기독교적인 이름을 가진 거리들에 그토록 많이 자리 잡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요.......아마도 악덕이 미덕에 바치는 오마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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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3-17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떼레쥐...ㅎㅎㅎㅎㅎ

시이소오 2016-03-17 10:13   좋아요 1 | URL
다시 생각해도 `떼레쥐`고 싶네요 ^^

깊이에의강요 2016-03-17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시이소오님 댓글보고 빵~
ㅋㅋㅋ

시이소오 2016-03-17 15:21   좋아요 0 | URL
웃으셨다니 좋네요
아주 웃긴 글을 쓰고 싶어요^^

깊이에의강요 2016-03-17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잘 쓰실것 같아요^^

시이소오 2016-03-17 18:31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오르부와르 ~~흐흐^^

서니데이 2016-03-17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좋은 저녁 시간 되세요.
오늘도 제 서재에서 퀴즈 준비합니다.^^

시이소오 2016-03-17 19:22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도요. 퀴즈 보러갈께요^^

eL 2016-03-18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오르부와르가 Au revoir 였군요. 상상도 못했네요 ㅎ 저도 떼레쥐에서 빵 터짐 ㅋ

시이소오 2016-03-18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르부와르가 Au revoir 였어요. 이엘님, 오르부아르~~
 

5장 삶과 죽음

 

달빛 아래서의 만찬, 아니타 존스턴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중독자의 의지 부족이나 인격적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대상이 위로와 즐거움을 주거나 삶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중독은 생존을 도와준다. 그러니 지나친 수치심이나 굴욕감, 좌절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런 감정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중독은 누구나 겪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대응일 뿐,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내가 읽은 여성의 섭식 장애 관련서 중에서 관점, 현실 인식, ‘해결책과 스토리가 모두 좋다. 중독 증상 때문에 사회의 경멸적 시선과 자기 비하에 지친 이들이 읽으면 충분히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이야기와 은유는 흥미진진하고 깊이와 통찰이 넘친다. 알코올, 담배, 마약 중독은 니코틴 같은 특정 성분에 대한 중독이다. 그런데 폭식은 먹는 행위 자체에 대한 중독이다.

 

내가 반복해서 읽은 부분은 통나무 이야기다. “폭우 후 물살이 사납게 불어난 강물에 빠졌다. 다행히 통나무가 떠내려 와서 붙잡고 머리를 물 밖으로 내놓고 숨을 쉬며 목숨을 부지한다. .....물살이 잔잔한 곳에 이르자 헤엄치려 하는데, 한쪽 팔을 뻗는 동안 다른 쪽 팔이 거대한 통나무를 붙잡고 있다. 한때 생명을 구한 그 통나무가 이제는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을 방해한다. 강가의 사람들은 통나무를 놓으라고 소리치지만 그럴 수 없다. 거기까지 헤엄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

 

과거엔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지금은 위협이 되는 것. 작가는 중독을 통나무에 비유한다. 인생에서 완전한 기쁨이나 완벽한 절망은 없다.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사람, 생각, 조직....)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 도 있고 대상의 변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잇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 내게 이 이야기는 분리의 어려움에 대한 비유였다. 20년 된 관계, 30년 된 생각, 사라진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

 

한낮의 우울, 앤드류 솔로몬

 

이 책의 한 땀 한 땀은 모두 심오하고 아름답고 비극적이어서 매 순간 감탄하느라 숨을 두 번씩 쉬게 된다. 처음 읽었을 때 연필로 밑줄을 그었는데 그 표시가 두 번째 읽을 땐 방해가 되었다. 책을 다시 사서 표시하지 않고 또 읽었다. 원서로도 읽었다. 참고문헌과 주 내용도 중요해서 분책해,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다.

 

원제는 정오의 악마- 우울증의 모든 것’. 이 책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몇십 년간은 우울증 관련 저술에 도전하는 이가 드물었으리라.

 

내가 아는 한 우울증에 관해 정치적, 학문적, 미학적, 윤리적으로 <한낮의 우울>보다 잘 쓴 책은 없다. 하나의 문장을 고를 수 없는 책이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말처럼 근거 없는 말도 없다. 굳이 비유하자면 에이즈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완치 개념을 적용하기 힘든 질병이다. 잠복성, 만성질환, 치명성, 외로움, 사회적 낙인.......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심각한 면역력 저하다. 면역성이 사라지면서 부드러운 미풍조차 사포로 미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우울증 환자의 증상은 인생의 본질이 순간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우울증은 내 두뇌의 암호 속에 영원히 살고 있다. 그것은 나의 일부다......나는 우울증을 제거하려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정서적 메커니즘들을 손상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과학이든 철학이든 미봉책(half-measures)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나는 이제까지 미봉책을 제대로 꿰매지 않은 상태로 알고 있었다. 완전히 봉합하지 않는 미봉(未縫), 혹은 미봉(未封)인줄 알았던 것이다. 아뿔싸! 사전적 의미의 미봉책은 미봉책(彌縫策)이었다. ()와 봉(), 모두 꿰매거나 깁는다는 뜻으로 흔적과 자국이 남는 것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본질적 해결이 우월하고, 미봉책은 속임수나 일시적 방도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의미가 강한 단어다. 아무런 표시가 남지 않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 찬사인 이유다.

 

흔적 없음은 존재 없음이다. 아름답지도 않고 완전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꿰맨 자리는 아물기도 하고 터지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생명은 미봉의 점철. 그러므로 미봉책은 임시방편이 아니라 영원한 방도다.

 

언니의 폐경, 김훈

 

나는 최근 몇 년 사이 세 번 삭발했다. 아침마다 머리 감기가 귀찮아서였다. 주변의 반응은 머리 감기보다 더 번잡스러웠다. “암이니?”, “(머리가)아프니?”, “논문 스트레스?”......내 진심 (게으름)을 몰라주고 사람들이 너무 걱정해서 잠시 나의 사회성을 의심했지만, 실상 나는 매우 사회적인 인간이다.

 

<칼의 노래>같은 글은 불편하다. 그러나 나는 다음 세 가지를 주장한다. 김훈은 소설, 논픽션, 기사, 수필을 불문하고 모든 글을 잘 쓰는 예술가다. 나는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장르의 구별에 의문을 품는다. 그는 인간이든 자연이든 물상이든 묘사 대상에 대한 대상화를 최소화하는 윤리적인 작가다. 그의 글이 풍경과 상처가 되는 이유다.

 

박완서가 일상에 관한 뛰어난 서술자였다면, 육체에 해당하는 작가는 김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화장>을 읽은 독자는 더욱 동의하리라. 몸은 자원이 아니라 행위자다.

 

삶에 대적하는 화자의 태도. “남편의 속옷에 붙어 있던, 길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에 관하여 나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는데, 마지막 예절과 헤어짐의 모양새로서 잘한 일이지 싶다.” 나는 이 문장을 넘기지 못하고 몹시 몸부림치고 몹시 몸서리쳤다. 나이 들어 영원히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이들과 세월로 인해 잃고 얻을 모든 것들과 이렇게 관계 맺을 수 있기를 소원하면서.

 

, 틱 낫 한

 

진짜 문제는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화를 나게 하는 사람 아닌가? 예전에 읽든 틱 낫 한의 책(<>< <평화 이야기>은 그래도 덜 했는데, <>는 화를 돋우었다. 물론 책마다 타깃 그룹이 있고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분노를 다룬다는 책이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겨우 이정도인가.

 

분노가 무엇인지, 그리고 상처받은 인간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만이 늘어놓을 수 있는 아름답고 한가하고 피상적인이야기들. 이 책은 한때 70만 권 넘게 팔렸다. 위로를 갈구하는 현대인이 안쓰러울 뿐이다. 아시아 출신 도인들은 서구에서 증명받은 뒤 다시 아시아 시장으로 온다. 그들의 내공과 관련 없는 오리엔탈리즘, 불쾌한 지식의 정치학이다.

 

그러다 반전. 나는 단 한마디에 깊고 냉철한 위로를 받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시달려 왔던 개인적 의문까지 풀렸다. “내 행동만이 나의 진정한 소유물이다. 나는 내 행동의 결과를 피할 길이 없다. 내 행동만이 내가 이 세상에서 서 있는 토대다.”

 

내가 아는 한 이 구절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류의 지적 성취를 요약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행위 뒤에 행위자 없고(니체), 행동은 사상의 기반이 되며(비트겐슈타인), 인간의 행동의 반복으로 구성되는 재현(주디스 버틀러)이다.

 

참나는 내 행동뿐이다. 인간사에서 죽음과 더불어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이것이다. 유일한 진실이자 유일한 정의인 것 같다. 알아야 할 것은 분노의 본질이 아니라 분노의 위치다. 행동만이 나를 말해주고 행동만이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이다. 이 부담스런 소유에 나는 안도한다.

 

오늘 부는 바람, 김원일

 

인생을 한 장면으로 요약한 소설이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김원일의 <오늘 부는 바람>을 들겠다.

 

<오늘 부는 바람>1970년대 도시 빈민의 가난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문학과 지성의 본뜻, 문학과 지성의 관계를 배웠다. 빼어난 문장이란 그 자체로 영상이며 읽는 이의 몸에 배어들고 몸을 베는 글이다.

 

작품의 내용은 비극적이지만 분위기는 힘이 있다. “.....이제 엄마 생각에도 서러워지지 않았다. 껌보다도 더 질긴 삶이 내 발을 땅에다 굳건히 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작가 후기 역시 매혹적이다. “나는 구원이나 긍정을 바탕으로 한 화해보다도 어둠이나 죽음의 아름다움, 삶의 어려움이 주는 쓸쓸함과, 고통에 소리 죽여 흐느끼는 절망을 사랑해왔다. (나는 이런 작가를 사랑한다!).....비극의 세계가 부정이나 허무가 아니라 거대한 질서의 운동이요, 생을 절실히 사랑하는 애정의 소산임을 확신한다.”

 

인생의 고통을 놓지 않는 사랑스런 후기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 시대의 비극은 애정의 소산임을 확인할시간이 없는 비극이다. 날마다 전쟁이고 흐느낌이다.

 

병을 달래며 살아간다. 다이쿠바라 야타로

 

홍준표 경남지사에게 공공 의료는 좌파 정책이다. ‘우파 민중은 안 아픈가? 공공 의료는 국가의 기본 역할인데? 그는 아나키스트인가? 내가 분노하자 주변에서는 뭘 기대하냐는 반응이다. 일부 지도층의 이런 발상에 대한 현저한 면역 결핍이 내 지병이다. (내 지병은 홧병)

 

질병은 삶의 부작용이 아니라 본질이다. 의료는 복지 이슈가 아니다. 쌀 수급을 복지 정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질병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용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다. 홍 지사의 사고는 철학의 문제, 그것도 국정 철학의 오류다. 그는 좌파의 국가관을 의심하기 전에 자신의 공동체관부터 검증받아야 한다.

 

일본 출신의 티베트 의사이자 승려인 다이쿠바라 야타로의 <병을 달래며 살아간다>는 티베트 의학의 인식론과 증상에 따른 실제 치료법을 다루고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구현물로 보지 않는다. 동식물처럼 자연의 일부일 뿐, 불완전해도 상관없다.

 

몸의 생애는 곡선이다. 내려갈 때가 있다. 성형 열풍이나 완벽한 몸 이미지는 몸의 과거와 미래를 인정하지 않는 비현실적 행위다.

지금 뭘 하고 있나요?” 알퐁스 도데는 말한다. “아프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의료 수준과 제도를 자랑하는 쿠바는 1986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때 모든 국가가 기피한 원전 난민을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국격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원래 진주의료원 같은 기관은 동리마다 있어야 한다. 폐업이 아니라 더 만들어야 한다.

 

살아남은 자의 아픔, 프리모 레비

 

어떻게 작품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것인가? 작품이 끝날 때마다 나는 한 번씩 죽는다.”이런 사람은 홀로코스트가 아니었어도 매일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레비는 평균 생존 기간 3개월인 오시비엥침(독일어로 아우슈비츠)에서 110개월을 버티고 살아남았다. ....... 그는 투신 자살했다. 지금 우리 사회 보통 사람의 자살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난 무려 100년 참고 참는다....../난 내일 죽음과의 약속을 지킬거다! /하지만 너네 인간들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 내말을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용설란)

 

망각을 거부한 투사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남은 인생이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확신이다. 불확실한 삶이라면 가능성을 희망이라 믿고 살겠지만 확실한 상태에서 선택은 많지 않다.

확실성의 볼모가 된다는 것. <기차는 슬프다>가 바로 그것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와 단 하나의 노선으로/ 정해진 시간에 떠나야 하는 기차보다 / 더 슬픈 게 있을까/ 그 어떤 것들도 이보다는 더 슬프지 않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내 시간이 멈췄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장승수.

 

셋째는, 공부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 최근 임지현은 <홀로코스트와 탈식민의 기억이 만날 때>라는 글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찾아온 대학생 한나 아렌트에게 하이데거가 한 말을 전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네.” 인생에서 어려운 일이 세 가지 있다. 생각, 사랑(관계), 자기 변화.

 

훌륭한 저작을 남긴 지식인이나 작가의 오만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생각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생각은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이다. 나도 조금 생각한 적이 있다. 피학의 쾌락이 있었지만, 공부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무능력도 원인이겠지만 사유는 힘든 일이다. 생각할수록 공부할수록 무지의 공포는 비례상승한다. 나 자신이 작아지고 우울해진다. 우울은 공부의 벗.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태백산맥, 조정래

아는 의사 셋이 같은 주제로 흥분하는 걸 보고, 염 대장의 말이 근대 과학의 패러다임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믹스 커피 성분이 카제인나트륨과 우유를 대립시키는 광고 때문에 시작된 이야기 였다. “카제인(단백질 화학명)이 우유잖아.”, “용각산이 바로 도라지 가루지.” “리튬(조울증 치료제)이 버드나무 잎에서 나는 거거든.” 그들의 요지는 같은 성분인데 우유(‘자연)와 카제인나트륨(’화학의 이미지를 대립시키는 교묘한 광고라는 것이었다.

 






자살의 이해,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

 

<자살의 이해>는 제목 그대로, 자살의 이해를 돕는 책이다. ......이 책은 저술의 모범이다. 사회적 필요, 다학제 관점, 정치적 열정, 전문 지식, 고통에 대한 공감. 생명체인 인간과 사회적 인간, 개인과 구조, 이 쟁점들을 상호 융합적으로 다룬다.

 

이해는 아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선입견이든 지식이든 기존의 앎을 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은 절대 우리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 충돌은 앎의 지름길이다.

 

간혹 매우 총명한 이들과 조우한다. 나는 그들의 비법을 알고 있다. 이해는 영혼이 순수한 사람의 특권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 이해하고 싶어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자신을 보수하지 않는다.



러브 스토리, 에릭 시걸.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미안함에 관련한 표현은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네가 불쾌했다면 미안해.”. 이럴 땐 차라리 싸우자는 게 예의다. 진짜 미안할 때는 할 말이 없거나 멀리서 오랫동안 미안해한다.

 

<러브 스토리>의 연인들은 계급 차이 때문에 남자 주인공(올리버) 집안의 반대로 결혼에 어려움을 겪는다. 올리버가 제니에게 미안하다고 하자, 제니는 사랑하는데 뭐가 미안해.”라고 말한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제니가 죽자 올리버의 아버지는 안됐구나. (i’m sorry.)”“라고 말한다. 올리버는 아버지에게 사랑은 미안해할 일을 하지 않는 겁니다.“라며 원망스레 울먹인다.

최근 의문이 조금 풀렸다. ‘사랑미안은 같은 말일 수도 있고 무관할 수도 있다.

 

가장 친한 친구가 8년 째 아프다. 심각한 병이지만 사회적 낙인이 심해 위로받기는커녕 변명과 거짓말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돈 잘 벌고 착하고 자랑스러운딸이었던 그녀는 걱정거리와 민폐로 전락했고 경력, 경제력, 인간관계 모든 것을 잃었다. 그녀의 고통을 지켜보며 인생을 배우는 나는 미안하다.

 

기대에 부응하는 삶, 아프다/죽고 싶다는 호소.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늘 미안하다고 말한다. 질병의 증상(신체적 통증)으로 고통받는 그녀에게 정신 차리라고 혼내는 사람도 있다. 낙오자 취급은 엘리트였던 그녀의 자아에 사망 선고가 되었다.

 

그녀의 증상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미안한 것이다. 약자는 보호받고 지원받아야 하지만 통치 세력이 노골적으로 약육강식을 지시하는 사회에서 뭘 기대하겠는가.

 

아픈 사람이 미안해할 때야말로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 이 말이 필요하다. 인생은 열렬한 사랑의 순간보다 괴로운 시간이 훨씬 많다. 공감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지막 잎새, 오 헨리.

 

몇 해전에 성별을 기준으로 하여 10대에서 70대까지 열네 개 그룹으로 나누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설문 결과를 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거의 모든 연령과 성별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내 대답 역시 그렇다


여기서 공부10대를 억압하는 입시 공부가 아닌 뭔가 의미있는 인생을 원한다는 뜻일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내가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 무엇인가를 추구했다는 것, 나만의 세계가 있었다는 것 등으로 다양할 것이다.

 

60대 친구가 몇 있다. 돈과 학벌을 따지는 속물이 득실거리는 우리 사회에서 남들 보기에도 비교적 성공한인생들이다. 그들 역시 공부 이야기를 제일 많이 한다. 자신은 이룬 것이 없다며, 가진 것이 없는 내게 말한다. “그래도 너는 책을 썼잖니, 나는 한 것이 없다.”

 

의욕, 삶의 방향, 목적. 사람은 결국 무엇때문에 산다. 삶의 의미는 인간이 묻는 것이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는 몸부림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삶이다.

 

사람들이 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자신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까.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에 몰두하는 사람은 덜 외롭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죽는 것. 모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이다. 버먼은 그렇게 죽었지만 비참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단히 위대하고 행복한 마침표도 아니다. 이것이 오 헨리 작품의 매력이다. 슬픈데 따뜻하고, 찡한데 안식이 있다. 희망과 절망 그런 차원이 아니다. 애상이나 애잔함은 오히려 충만한 느낌이 있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김승옥

 

다른 측면에서 글쓰기는 조금 더 평등하다. 운동, 음악, 미술 분야에 비해 장비가 간단하고 독학 가능성이 있다. 거칠게 말해, 연필 한 자루면 된다. 나는 글이 투자 대비 생산성이 가장 큰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엄청난 양의 독서, 습작, 조사를 해야 하는 데다 삶의 매순간이 연습이다. 좋은 글을 빨리 쓰는 사람이 있다. 비결은 연습(치열한 삶)이다. 글 쓰는 시간은 연습을 타자로 옮기는 시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물론 고뇌를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렇지만 그들을 존경하기만 하면 그걸로써 의무감의 해방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이 문장에 동의한다. 일하지 않고 예술만 즐기고 싶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열 받지 않아도 되는영화와 소설을 읽으며 살고 싶다. (이 책에서 가장 동감하는 구절.)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아름다음만 소비하고 싶다. 비생산의 삶. 죽을 때 연기조차 없는 삶. ‘독자가 된다는 것은 주체로 사는 피로와 죄악을 피하는 길이다. 호랑이나 사람이나 무엇인가를 남긴다? 끔찍하다.

 

하지만 연습을 많이 한 이들이 독자로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은 오만할 자격이 있다. 연습은 끝이 없는 개념이다. 외롭고 지루한 연습이 아무런 보상이 없을 수도 있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 이들이다. 이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다. 진실을 아는 자의 만족스런 불평이다. 김승옥도 알고 있다. “천 번만 먹을 갈아보고 싶다. 그러면 내 가슴에도 진실만이 결정되어 남을까?”

 

하류지향, 우치다 타츠루

 

모 신문에 게재된 채현국 선생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치유란 사람의 매력 그 자체의 효과이지 시대의 멘토해주는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의 언어는 모두 깊고 힘이 있었다. 나를 붙잡은 구절은 모든 것은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였다.

 

지식, 사회,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가 존경스러운 불문학자 우치다 다쓰루의 <하류지향>은 승, 부 중 어느 한쪽을 격려하지 않는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당대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철저히 그들의 입장에서 사고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보고했다는 점이다. 소위 내재점 관점(질적 방법)‘이 잘 적용된 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학생들은 온 힘을 다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학력 저하는 노력의 성과. 그러나 자기 선택은 어느 정도 안전하고 정의로운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약자는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약자다. 자유는 고립 이데올로기다. 스스로 결정하고 결과도 혼자 책임질 것. 위험 사회가 사회적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 혹은 죽음의 방식이다.

 

저자처럼 계몽 의식과 책임감을 지닌 기존 자본주의의 수혜자는 그들의 선한 의지와 달리 시혜자가 되지 못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절박하지만 진짜 현실인식은 안이한 듯하다. 충격은 이제부터다. 룸펜, 의지박약자, 잉여는 구제 대상이 아니라 파국의 주체다.


 

에필로그, 다르게 읽기와 독후감 쓰기.

 

 

좋은 독후감의 전제는 일단 다르게 읽기. 단언컨대 모든 사람이 알 만한 진부한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나는 좋은 책이 반드시 좋은 독후감을 낳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다. 독후감은 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책과 읽기의 상호 작용이기 때문에, 책의 수준과 무관하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쓰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독후감, 책을 다시 쓰는 것, 저자가 쓰지 못한/않은 부분을 쓰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의미, 곧 새로운 정치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읽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읽는 사람도 있는데 그 차이는 왜 발생할까. 대개는 콩쥐한테 동일시하고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계모의 내면 세계나 아버지, 친척, 이웃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한 이들도 있다. 나는 팥쥐는 꼭 딸이어야만 하는가, 아들일 경우 어떻게 될까가 궁금했다. 이런 생각의 차이들은 가치 다양성, 관용, 배려 차원의 내용 확대가 아니다. 정치적 모순, 갈등, 위계의 내용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정치적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독후감은, 내가 쓰고 싶은 독후감은 다른 시각으로 읽음으로써 없는내용을 만들어내는 방법, 즉 지면을 투사하는 것이다. “행간을 읽는다.”라고도 표현한다. 다른 안경을 쓰고 읽음으로써 텍스트를 복잡하고 풍부하게 만들어서,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경합하는 읽기이다.

 

내가 생각하는 독후감의 의미는 단어 그 자체에 있다. 독후감(讀後感), 말 그대로 읽은 후의 느낌과 생각과 감상이다. 책을 읽기 전후 변화한 나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없다면 독후감도 없다.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통과할 수도 있고 몸이 덜 사용될 수도 있다. 터널이나 숲속, 지옥과 천국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딘가를 거친 후에 나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독후감은 그 변화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이다. 변화의 요인, 변화의 의미, 변화의 결과.......그러니 독후의 감이다. 당연히, 내용 요약으로 지면을 메울 필요가 없다. 독후에 자기 변화가 없다면? 왜 없었을까를 생각하고 그에 대해 쓰는 것도 좋은 독후감이 된다. 나는 왜 책을 읽고 아무 느낌이 없을까도 좋은 질문이다. 자기 탐구가 깊어진다는 점에서 더 좋은 독후감이 도리 확률이 높다. 자신의 경험, 인식, 지식, 가치관, 감수성에 따라 여정의 깊이는 달라진다. 독후감의 수준은 여기서 결정된다.

 

 

독자의 위치성, 그 위치성을 의식하고 의심하고 사랑하는 읽기가 책의 위상을 결정한다. 영화든 드라마든 미술작품이든 책이든 모든 텍스트는 철저히 읽는 이의 상황에 의존한다. “저자는 죽었다.” , “책은 독자가 다시 쓴다.” 라는 말은 권력이 결국 읽는 이, 듣는 자에게 있다는 뜻이다. 언제나 문제는 나 자신이다. 물론, (주체, subject)는 사회와 대립하는 개인이 아니라 시회적 몸(social body)이다.

 

책이 되지 못한 책들의 피해, 비평이 되지 않는 비평의 폐해는, 수많은 책을 읽는 들에 의해 청산될 수 있다

어느 출판사의 사훈은 책 때문에 망가지는 나무가 없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한다. 좋은 독자는 지구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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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리뷰가 아닌 필사가 돼버렸다. 우선 내게는 생소한 작가가 너무 많았다. (나의 무지에 죽고 싶었다.) 에필로그에서 작가가 말했듯 그녀가 온몸으로 책을 통과하는 글들에 섣불리 개입할 수가 없었던 것도 결정적 이유다. 단 한 챕터도 그냥 흘러갈 수 없었다. 환호작약, 촌철살인의 문장들로 흘러넘친다.

 

내가 읽은 서평집 중에 최고다. (장정일, 이현우, 이다혜, 정혜윤, 장석주, 정여울, 이동진 모두에게 미안하지만) 그 이유는 아마도 그녀의 독후감의 원칙 때문이 아닐까. 어떤 책을 읽는가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독자의 독서 이후의 변화. 정희진은 자신의 원칙들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정희진만이 쓸 수 있는 유일무이한 독후감을 써냈다.

 

타성적인 서평 백 편을 읽느니

개성적인 독후감 한 편을 읽는 편이 낫다.

그녀가 어떤 책을 칭찬하면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그 책을 읽고 싶었다.

 

그녀가 통과한 책들을

이제 내가 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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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7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3-17 02:43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이렇게 훌륭한 글을 쓰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