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밤. 그리고 380만 년의 영원


p256. 960년에는 은자 베르나르라 하는 수도사가 이제 곧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설교하며 돌아다녀 또 소동이 일어납니다. 960년에는 프랑스 로렌 지방에서 이 세상의 종말이 바야흐로 가까워졌다는 소문이 민중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퍼져나가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번에야말로 1009년에 세계가 멸망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도 독자적으로 계산하여 1033년에 인류가 망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p257. 문학이 끝났다는 말도 고래부터 한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극작가이자 시인인 실러조차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신인작가도 새로운 문학작품도 완전히 엉터리다, 모방이나 속악한 것뿐이다, 이제 문학은 죽었다, 고 말이지요. 괴테도 똑같은 말을 하는데, 하지만 뉘앙스가 약간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이 세계는 속악함으로 흘러가버렸다, 나는 이제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시대의 마지막 한 사람일 것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문학이 끝났다, 순문학은 끝났다, 근대문학이 끝났다, 하는 이야기는 수백 년, 수십 년이나 반복해서 말해오는 것입니다.

 

그 후 독일 문학이나 독일 철학에서 누가 나왔는지 아시죠, 횔덜린, 헤겔, 셸링, 클라이스트, 노발리스, 하이네, 슈티프터, 니체, 릴케, 첼란......끝이 없습니다. 경탄할 만한 재능이 무수히 나왔습니다.


p259. 그런데 그리스인들이 쓴 책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요? 천 권 중 한 권입니다. 많이 잡아도 두 권을 넘지 않습니다. 99.9퍼센트는 사라졌습니다. 사멸한 것입니다. 남은 것은 단 0.1퍼센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 문학은 패배했을까요? 괴멸한 것일까요? ....0.1 퍼센트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99.9퍼센트의 사멸을 넘어 그리스 문화는 이슬람 문화를 키우고 유럽을 창출했으며, 우리 세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p260. 다만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자가 탄생한 지 아직 겨우 5000년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5000년 동안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완전한 문맹이었습니다.

 

p268. 그 후 19세기가 되면 출판 종수가 급락하는데, 그것은 또 왜일까요? 1805년에는 유럽에서 4081종이었던 서적의 출판 종수가 1813년까지 2233종으로 뚝뚝 떨어집니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혁명 때문입니다. 프랑스 혁명 전야, 독서에 대한 열광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변절, 프랑스 황제에 대한 대관으로 프랑스혁명이 어떤 의미에서 좌절합니다.

 

p269. 17세기라고 하면 코르네유나 라신, 라파예트 부인의 시대입니다. 프랑스 문학의 한 융성기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1672년 파리의 식자율은 25퍼센트였습니다. 게다가 이 식자율이라는 게 사인을 할 수 있는가의 여부로 판정된 것이었습니다.

 

p272. 1850년대의 잉글랜드는 어땠을까요?가장 선진국이었습니다. 성인 문맹률은 30퍼센트였습니다. 1850년이라고 하면 디킨스가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출판한 해입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떨까요? 40~45퍼센트였습니다. 어떤 책이 출판되었을까요? 우선 이해에는 발자크가 죽은 해입니다. <골짜기의 백합>1835년에 나왔습니다. 스탕달의 <파르므의 수도원>1839,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1857, 보들레르의 <악의 꽃>의 초판도 1857년에 나왔습니다. 이탈리아의 문맹률은 70~75퍼센트였습니다. 에스파냐의 문맹률은 75퍼센트였습니다.

 

좀 더 근사한 것은 러시아입니다. 1850, 러시아제국의 문맹률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90퍼센트였습니다. 최신 연구에는 95퍼센트라고 하는 문헌도 있습니다.

 

p273. 그렇다면 1850년 전후에 누가 무엇을 출판했을까요? 푸시킨이 1836년에 <대위의 딸>을 냈습니다. 고골 리가 1846년에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 톨스토이가 1852년에 <유년 시대>, 투르게네프가 1852년에 <사냥꾼의 수기>를 냅니다.

 

그 당시 러시아 인구는 4000만 명이었습니다. 대충 양보하여 10퍼센트인 400만 명이 도스토엡스키를 읽을 수 있었다....., ,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400만 명 밖에 자산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단적으로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어로 문학 같은 걸 해봤자 소용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파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요?

 

p275.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당연합니다. 문학이 살아남고, 예술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왜 쓸까요? 왜 계속 쓰는 걸까요? 계속 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달리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p276. 그리스인들이 99.9 퍼센트 소멸한 가운데 0.1 퍼센트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처럼 러시아인들도 이겼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0.1 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0.1 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p278. 우리 인류는 생겨난 지 20만 년이나 되었습니다. 문자를 발명한 지는 5000년이 되었습니다.

 

p279. 요컨대 대체로 75천년 전부터 35천년 전까지 넓은 의미에서 예술이라 불리는 행위가 거의 다 나왔습니다. 농경, 목축, 부의 축적에서 오는 경제활동이라는, 이른바 정주에 의한 문명은 12000년 전부터 9000년 전, 대체로 1만년의 역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술의 역사에 비하면 7분의 1의 역사밖에 안됩니다.

 

p282. 우리의 문학은 이 세상에 생을 얻은 지 고작 5000년밖에 안 된 젊은 예술이고, 아직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5000년은 20만 년의 40분의 1입니다. 여든 살 노인의 입장에서 보면 두 살배기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p283. 전대미문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전대미문이지만 과학적인 사실입니다. 세계의 종말은 이미 있었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오지 않지만 말이지요. ‘대대적인 절멸이 있었습니다. 다섯 번이나요. 어떤 고생물학자에게 물어도 이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이 전원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오르도비스기, 데본기, 페름기(이첩기), 트라이아스기(삼첩기), 백악기. 이를 빅 파이브라고 합니다.

 

p284. 생물 의 평균연령은 대체로 400만 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1년간 자연사하는 종은 400만 종에 한 종 꼴입니다.

 

p287 전쟁 전이 발레리라면 전후 프랑스 최대의 비평가라 불리는 모리스 블랑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단적으로 “‘는 죽을 줄을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왜일까요? 행동이라는 것은 뭔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며, 그리고 그것이 끝났다는 것을 확인해야 비로소 끝납니다. 결말을 지켜봐야 끝납니다. 그런데 죽는다는 행위는 그 결말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p2188. 블랑쇼는 사람은 죽을 수 없다라는 이 사고를 더욱 확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는 멸망한다. 하지만 인류는 멸망하지 않는다.”

 

p291. 우리들 호모사피엔스가 400만 년 산다고 하면, 우리가 탄생한 지 20만 년이 되었으니 앞으로 380만 년 정도는 남아 있습니다. 400만 년에 20만 년이니까 20분의 1이네요. 여든 살 노인이라고 보면 네 살에 불과합니다. 네 살치고는 상당히 잘하고 있습니다. 흔히 농담으로 말합니다만, 네 살 짜리 남자아이가 찾아와. “우리 세계는 끝났다. 역사는 끝났다. 이제 우리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바로 파멸의 위기 한복판에 있다.”라고 우쭐하여 빙글거리며 말했다면, 물론 물리적인 징계는 몹시 좋지 않은 일이겠지만, 웃으며 엉덩이를 살짝 꼬집어주지 않으면 교육상 좋지 않을 겁니다.

 

p291. 379만년 양보한다고 해도 앞으로 1만 년은 남은 셈이네요.....그렇다면 1만년 간 우리의 루터, 무함마드, 하디자, 아우구스티누스, 테레지아, 도스토엡스키, 조이스,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 ()들 같은 사람들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을까요? 어차피 1만 년이나 있으니까 예술도 부처도 다시 올지도 모릅니다.

 

들뢰즈처럼 쾌할하게 철학이 끝났다고? 그건 첫 번째 황금시대가 끝났다는 것에 지나지 않아. 앞으로 두 번째 황금시대가 찾아올 거야라고 단언해도 되지 않을까요?

 

p293. 당신은 뭔가를 하고 그것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행해지는 것이다. “당신은 행해진다! 어떤 때라도!”라고 노래하듯이 그는 말합니다. 즉 우리는 우주의 거대한 생성의 일부이고 그 의미인것입니다. 이 방대한 우주의 생성 안에서 이리하여 우리가 말을 얻을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을 자아내가는 것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의미입니다.

 

p295. 자신이 한 일을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요? 그건 그 말 그대로입니다. 예술가에게 예술은 본질적으로 그 과정만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제작하고 lT을 때, 자신의 몸도 마음도 함께 부서지고 변용해가는 과정만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세상에 내놓고 평가를 받는다느니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다느니 하는 것은 그다음 문제입니다.

 

p296. 명예욕을 위해서도 아니고 금전욕을 위해서도 아니라고 한다면,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걸까요? 그것은......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해볼까요?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나 ....발레리가 없었다면 저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나 라캉이 있어주어 다행입니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요. 발소리를 들어버렸던 것입니다. 도움을 받아버린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구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발소리를 내는 것조차 거부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발소리를 내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터입니다. 들려주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입니다. 한 발짝이라도 좋으니까요.


p297.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초판으로 몇 부나 인쇄되었는지 아십니까? 700부입니다. 350부가 반품되어 태워졌습니다. 2판에서 대폭 증보 개정합니다만, 그 또한 비슷비슷합니다. 그중 한 권을 헌책방에서 우연히 산 사람이 바로 스물한 살의 프리드리히 니체였습니다. 그는 깊은 충격을 받아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를 쓰게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겠지요.

 

p298. 그렇다면 철학사상 견줄 것이 없는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부인 제4부가 몇 권이나 배포되었는지 아십니까?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단 7부입니다.

 

니체는 이런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극소의, 그러나 절대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거는 것. 그것이 우리 문헌학자의 긍지고 싸움이다, 라고요. 이것이 미래의 문헉학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미래의 문헌학이란 대천사의 문헌학이다, 라고요.

 

말은 그것을 빠져 나옵니다. 발소리가 들려옵니다. 그것이 들려옵니다. 낮게, 알아듣기 힘들지만, 그러나 확고한울림으로, 한밤중에. 그래요, 들려오고 말았으니까요.

 

p301. 그래도 패배가 두렵습니까? 내기에 지는 것이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역시 최후에는 그를 등장시키지요.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 4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다 높은 인간들이란 니힐리즘에 도달하기까지 철저히 높은 인식 수준에 있어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설명해두기로 합시다. “그대들, 창조하는 자들이여,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잉태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이를 잉태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한 조금 뒤입니다.

 

그리고 그대들이 비록 큰 일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인간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좋다! 가자!

 

높은 종족에 속할수록, 완성하는 일은 드물다. 여기 있는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 모두가 충분히 완성되지 않은 게 아닐까?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인간이 도달할 수 있어야 할 가장 먼 것, 가장 깊은 것, 별처럼 높은 것, 거대한 힘, 그 모든 것이 그대들 항아리 안에서 서로 부딪치며 부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때로 항아리가 부서지는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어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p303 그렇습니다. 지금은 전야입니다. 이 전야가 깊어지는 가운데 우리도 사라지기로 합시다. 우리의 밤 속으로. 우리의 싸움 속으로. 우리의 승리하고 패배하는 환히 속으로.

 

p306. <야전과 영원>에 반응해준 이가 사상이나 비평 주변에서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장에서 뭔가를 창조하고 끊임없이 운동하는 작가, 음악가, 미술가, 디자이너, 활동가들이었다는 역력한 사실은 어느 위대한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등뼈에 철심을 넣고 내 피에 유황을 부어넣었다.” ()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감히 피하기로 한다. 본문에서 은밀하지만 명백한 경애와 연대의 신호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 제목은 파울 첼란의 <빛의 강박>에 실린 한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p309 옮긴이의 말

 

혁명이란 폭력이 아니라 문학이다. 읽는 것과 쓰는 것, 그 자체가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고 이 책에서 저자는 거듭 말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문학은 소설 같은 것이 아니라 더욱 넓은 의미다. 이때의 문학은 문자로 쓰인 모든 텍스트에다 춤이나 음악 등까지 포함한 것.

 

이 책은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책인데,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다는 것이고, 책을 고쳐 읽는다는 것은 고쳐 쓴다는 것이며, 책을 고쳐 쓴다는 것은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이고,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은 곧 혁명이다. 그리고 읽고 쓰는대상이 종이에 쓰인 것에 한정된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극히 한정된 시공에서고 춤, 음악, 노래, 복식, , 회화, 영화 등 온갖 예술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

 

p316. 저자에 따르면 책은 본래 읽을 수가 없다. 읽으면 미쳐버리기 때문이다. 알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가 아니면 일류의 책이라고 부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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