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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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은 장면 내각 출범시 장면에게 육군참모총장으로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몸소 실천했던 이종찬을 강격 권고했지만 장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훗날 박정희는 사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선배인 이종찬 장군이 만일 장면 정권의 국방장관으로 계속 앉아 있었더라면, 우리가 과연 5.16 궐기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장면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장도영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앉힌다. 미군 지원설은 포함, 장도영이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이유에 대해 적어도 7가지 설이 난무한다. 장도영 장인 로비설, 정치자금설, 뇌물설, 어머니설, 박정희 로비설, 지연설 등등.

 

614월 초순, 박정희의 예편은 기정 사실화 되었으며, 예편 일자는 5월 하순경으로 돼 있었다. 박정희는 4.19 1주년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 폭동진압작전을 명분으로 내세워 쿠데타를 감행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대규모 시위를 만들어 내야 했다. 김종필은 박종규에게 ‘4. 19 데모 유발 공작총책을 맡긴다.

 

한편 해병대 김동하 역시 해병대 창설 기념일인 415일 쿠데타를 계획하다 박정희와 손을 잡는다. 드디어 4.19일 박정희는 목을 빼고 기다렸으나 오후 내내 시위 소식은 없었다. 저녁 8시 경 드디어 데모가 일어났다. 그러나 창녀들과 포주들 30명이 서울역 앞에서 매춘 합법화를 외치며 데모를 벌였을 뿐이었다.

 

23일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가 창간된다. <민족일보>는 통일문제에 가장 큰 신경을 썼다. 장면 정권의 악랄하고 교활한 탄압을 맹비난하던 <민족일보>는 쿠데타를 지지한다. 그러나, 불과 몇 일만에 박정희에 의해 폐간될 뿐만 아니라 발행인 조용수는 사형 당한다.

 

장면은 총리 재임기간 동안 10여 차례나 쿠데타 정보를 보고 받았었다. 그럴 때마다 장면은 미군이 있는데 어떻게 쿠데타를 하겠소라는 말로 응대했다. 56일에도 민주당 의원 윤병한, CIA 한국지부장 피어드 실바가 쿠데타가 일어날 거라고, 박정희 이름까지 알려주며 경고했지만 장면은 미국이 있는데 설마라는 주기도문만 암송했다.

 

516일 새벽 330분 제 6군단 포병단은 육본을 점령한다. 장면은 330분 경 혜화동 칼멜 수녀원으로 도망친다. 쿠데타 군은 415분 경 KBS를 접수한다. 혁명공약이 장도영의 이름으로 방송된다.

 

오전 10시 육군 중장 이한림은 고민하고 있었다. 휘하에 5개 군단을 거느린 그는 쿠데타를 저지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이한림은 장면에게 출동 명령을 요청하는 밀서를 전달하나, 장면의 행방을 아무도 몰랐다.

 

11시경, 매그루더와 그린이 윤보선을 방문해, 무력진압에 동의해 달라고 요청하나 윤보선은 거절한다. 그린은 윤보선에게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이라는 경고를 남기고 돌아간다.

 

330, 장면의 운전기사를 추궁했으나 운전기사는 끝까지 모르다고 부인한다.

6시 경, 장면의 경호관 조인호에게 장면의 행방을 추궁하나 역시나 모른다고 부인한다. 이영신에 따르면

 

이 시간까지는 아직도 희망은 있었다. 그러므로 조인호가 장면의 은신처를 노영균에게 밝히기만 했어도 역사의 궤도를 제자리로 수정해 놓을 충분한 시간적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조인호는 모른다고 딱 잡아뗐던 것이다. 곤두박질하려는 역사를 바로잡을 절호의 기회가 조인호의 고지식함으로 해서 또 다시 그 기회가 잃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

 

장면은 도망가고 윤보선은 쿠데타 세력에 계속 협력했다. 미국은 과연 쿠데타를 저지하려 했던 것일까. 이완범은 이렇게 말했다.

 

장면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쿠데타를 진압할 수 없었다는 미국의 사후 변명은 사실과 다른 책임회피였음이 판명된다. 또한 윤보선이 쿠데타를 지지해서 할 수 없었다는 미국의 사후 변명도 자신들의 고차원적 정치 개입을 호도하고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정치지도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책임회피였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장면에 대한 대안을 일찍부터 고려하고 있었고 박정희가 거사하자 이 대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면서 장면에 대한 고려를 끊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일 오후 7시 육군 첩보부대 중령 최영택이 쿠데타 군의 사기를 위해 혁명군 완장을 차게 해주자고 제안한다. 완장을 찬 군인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검문 태도가 건방지다고 신문 기자에게까지 집단 구타를 가한다. 완장시대의 개막이었다.

 

육사 교장 강영훈은 쿠데타에 반대한다. 반면 이상훈과 전두환 등 육사 11기 동기들은 쿠데타를 지지하는 육사생도들의 가두행진을 주도한다.

 

18일 낮 1230분 경, 잠적 55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장면은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다.

 

20일 전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는 군사정권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통해 가장 훌륭한 정부라고 찬양한다. “한국에는 민주정치가 시기상조라는 사족을 달아.



 

5. 16 쿠데타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품었다. 한국군의 0.5% 정도 밖에 안 되는 병력, 게다가 민주당 정권 수뇌부, 총리, 육군 참모총장, 유엔군사령관 까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가장 그럴듯한 이론은 미국의 배후조정설이다. 이미 미국은 미 정보기관 대령인 크레페가 장면 정권을 전복하고 장도영 집권을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었다. 김종필의 중정에 의해 밝혀져 미국 공작원들이 추방당한 일명 크래퍼 사건5.16 이전에 있었다.

 

당시 CIA 국장이었던 앨렌 덜레스는 영국 BBC에 출연 내가 재직 중에 CIA의 대외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이 혁명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주간지는 이렇게 보도했다.

 

“CIA는 약하고 무능한 장면 내각을 무너뜨리고 강력한 반공정부로 교체하기 위하여 군부에게 쿠데타를 감행하도록 교사하였고, 그 후 그런 전략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미 국무성을 배후에서 조종하여.....장면 지지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3세계에서 쿠데타 사주는 미국의 상습적인 수법이었다. 과연 한국이라고 예외였을까.

 

5.16 쿠데타가 벌어지자 북한은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알고서 환호했다. 쿠데타 이후 미국은 박정희의 사상을 캐고 다녔다. 미국 측 눈에 들기 위해 기회주의자 박정희는 보도연맹 관련자, 진보정당 관련자, 좌파 지식인, 사회단체 지도자, 노조 지도자 등 4천 명에 이르는 좌익활동 경력자들을 체포, 수감한다.

 

미국에게 자신이 더 이상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려는 박정희의 강박은 계속된다. 심지어 빨갱이 아닌 사람도 빨갱이로 몰아 때려잡았다. 억울한 죽음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는 빨갱이로 몰려 사형 당했다. 박정희는 심지어 민족일보의 자산은 물론 조용수 가족의 전 재산을 몰수한다. 재산몰수는 박정희의 특기일까 취미일까?

 

박정희는 사무라이 정신이 골수에 박힌 친일파여서 반미기질이 강했지만 쿠데타 성공 이후에는 미국에 점점 더 비굴하게 굴었다. 미국에 비굴하면 비굴할수록 박정희는 자신이 만들어낸 빨갱이들에겐 더욱 더 가혹하게 굴었다. 한 전향자의 좌익 콤플렉스로 인해 무고한 국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숱한 피눈물을 흘려야 했으니

 

 

군사정권은 민심의 호응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 수법을 동원한다. 21일 오후, 군사 정권은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를 비롯하여 200여 명의 깡패들에게 깡패 생활 청산하고 바른 생활 하겠읍니다와 같은 플랭카드를 들고 시내 중심가를 행진하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깡패들뿐만 아니라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인간 개조 운동을 펼친다. 박정희가 꿈꾼 이상적 인간은 군사적 인간이었다. 교원들에게 국민복을 입히고,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머리를 삭발해야 했다. 고급 요정도 부패와 사치의 온상으로 지목돼 탄압당했으나, 고작 1년도 못 가서 요정 앞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연쇄강간범 박정희가 요정을 탄압하다니?



 

빨갱이로 몰려 사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말로를 의식해서였을까? 5. 16 쿠데타 이후 신문들은 알아서 기었다. 쿠데타 세력에 대학교수들은 적극 협조한다. 박정희는 또한 문인들과 자주 어울린다. 김팔봉, 장덕조, 이은상, 모윤숙(안 끼는데가 없다), 최정희, 박종화, 구상 등. 장준하 역시 쿠데타를 지지했다. <사상계>7월호에 가서야 쿠데타를 비판하는 함석헌의 글을 실었다.



 

610, 중앙정보부가 창설된다. ‘한국 위의 한국온갖 조작질과 부정부패의 산실. 쿠데타가 완수되었으니, 남은 일은 토사구팽. 장도영은 반혁명 사건으로 구속된다.

 

517, 쿠데타 다음 날 주요 기업인 17명이 체포되었다. 이병철은 일본으로 도피중이었다 26일 귀국, 다음날 박정희와 회동을 갖는다. 감옥에서 풀려난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717일 경제재건촉진회가 조직, 이후 68년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으로 명칭을 바꾼다.

 

군사정권은 말로는 부정축재 처벌이었지만 실제로는 부정축재 이용으로 돌아섰을뿐만 아니라 부정부패의 수렁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간다.

 

박정희는 미국에 가기 전 동경에 들러 일본 수상 이케다 하야토와 회담을 갖는다. 박정희는 만주군관 시절 교장 나구모 쥬이치를 초청해 달라고 요청해, 공식 만찬 자리에서 나구모 쥬이치에게 큰 절을 올리고 술을 따른다.

 

케네디를 만난 박정희는 미국에게 베트남 파병을 제의한다.

 

61년 봄에 이범선 원작,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이 상영된다. 쿠데타 후 군사정권은 <오발탄>을 상영중지 시킨다. 61년 영화계 가장 큰 화제는 김지미와 최은희의 대결이었다. 영화감독 홍성기와 신상옥의 대결이기도 했다. 홍성기는 아내인 톱스타 김지미를 춘향으로 하여 컬러영화 <춘향전>을 만들었고, 신상옥 역시 아내인 톱스타 최은희를 춘향으로 내세워 <성춘향>만들어 설날 맞대결을 벌였다. 신상옥과 최은희의 <성춘향>의 완승이었다. <성춘향>75일간 36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60년대는 가히 신상옥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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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4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르그 2016-08-0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훌륭한 요약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읽히고 싶은 글입니다
그런 시절입니다

시이소오 2016-08-04 10:11   좋아요 0 | URL
ㅋ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6-08-0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범죄와의 전쟁`은 정통성이 없는 정부의 민심회유 정책 1번 매뉴얼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8-04 12:24   좋아요 1 | URL
겨울 호랑이님, 제가 감사하죠 ^^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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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5 부정선거 이후 시위 주체는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가에서는 418일 고대생들이 처음으로 시위에 참가했다. 오후 720분 경 유지광이 지휘하는 반공청년단과 조폭 100여명이 쇠파이프, 쇠갈고리, 몽둥이, 벽돌, 삽 등을 휘두르며 고대 학생들을 습격한다. 고대 학생 수십 명이 부상을 입고 길바닥에 쓰러졌으며, 그 일대는 피바다로 변한다

 

이튿날 시위대 군중의 수는 10만 명으로 불어난다.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발포한다.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벌어진다. 시위대에 박수를 치던 시민들이 시위대에 합류한다. 총성이 요란한 가운데 시위대는 20만 명으로 불어난다. 오후 3시를 기해 서울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된다. 15사단이 서울로 진주한다. 19일 하루, 사망자 수는 민간인 111, 경찰 4명이었고 부상자 수는 민간인 558, 경찰 169명이었다.



 

420일 계엄령 하에서 서울에서는 시위가 중단되었지만, 대구, 인천, 전주, 이리, 수원에서 학생 데모가 계속된다. 425일 대학 교수들마저 시위에 동참한다. 교수데모를 주도한 교수들 대부분은 철학과 역사학에 몸담고 있는 사립대학의 노교수들이었다. 다음날 426일 아침부터 쏟아져 나온 시위 군중은 10시 경 10만을 넘어선다. 경찰의 발포로 학우 전한승을 잃은 수송초등학교 학생들까지 국군 아저씨들, 부모 형제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선다. 오전 1030분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발표된다.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나오자 10대 청소년들은 파고다공원으로 달려가 이승만 동상을 파괴하고 새끼줄을 동상에 묶어 길거리로 끌고 다녔다. 4. 19 이후 희생자는 사망 186, 부상 6259명이었다. 이기붕과 박마리아 이강석은 28일 새벽 540분 경 일가 전원이 자살한다. (세상에, 몰랐는데 2011년에 이승만 동상을 다시 올렸군요) 



 

427일 허정 과도 정부가 들어선다. 615일 내각제 개헌안을 통해 양원제가 채택된다. 7. 29 총선은 민주당의 대승으로 끝났다. 민주당은 민의원 재적의원 233명 중 175(75.1%), 참의원 재적 57명 중 31(53.4%)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둔다. 민주당은 81개 선거구에선 신구파가 동시에 출마할 정도로 신파와 구파로 갈려 무한 내분 상태였다.

 

812일 민, 참의원 합동회의는 윤보선을 제 4대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윤보선은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한다. 신구파의 갈등이 첨예화되자 구파는 신당 발기를 결의, 이후 신민당으로 발족한다.

 

장면은 미군측과 군대와의 사전 협의를 거치지 않고 ‘10만 감군 계획을 발표한다. 미국이 즉각 반발하자 감군 계획은 폐기된다. 910일 김종필과 김형욱 등 육사 8기생 중령 11명은 국방장관 현석호를 방문해 정군을 단행할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이들은 이날 저녁 충무장이라는 음식점에서 쿠데타를 결의한다. 5.16 쿠데타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른바 충무장 결의였다.

 

미국의 대한 정책에 대한 권고를 담은 콜론 보고서59111일 미국 상원 외교분과위원회에 제출된다.

 

젊은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지고, 또 양심이란 것을 지키는 사람은 전부 소외되거나 배척되고,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만이 출세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불원 한국 사회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나는 어째서 오늘날 한국에 대한 보고서라고 착각했을까. 콜론 보고서는 또한 군사 쿠데타를 기대하는 미국 정계 일각의 기류를 반영하기도 했다. 일본 주재 미국 대사 라이샤워는 한국을 계승할 사람은 전쟁 마당에서 자라온 새로운 젊은 군인이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군 역시 부정부패가 극성을 부렸다. “별은 짚차 도둑, 말똥은 부식 도둑이란 말이 나돌 정도였고, 죽어나가는 건 사병들이었다. 휴가 나온 사병들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유는 배가 고파서였다. 군의 부정부패는 정부 정책의 문제기도 했다. 심지어 준장 월급만으로도 생계 유지가 어려웠다.

 

박정희 다카키 마사오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는 19171114일 오전 11시경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의 금오산 자락에서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의 5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백남의는 박정희를 낙태시키려고 온갖 민간요법을 총동원하였다고 한다. 간장 한 사발 마시기, 밀기울 끓여서 마시기, 섬돌에서 뛰어내리기, 자작더미 위에서 곤두박질치기, 수양버들강아지 뿌리 달여 먹기,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 대고 뒤로 자빠지기, 뒷동산에 올라가 밑으로 뒹굴기 등등 해보지 않은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고. , 한 가지 방법이라도 통했더라면.

 

박정희는 긴 칼 차고 싶어서만주군관학교에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보내, 404월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한다. 박정희는 444월엔 일본 육사까지 졸업한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 시절 이름을 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개명한다. 박정희는 447월 일본 만주군 소위로 부임해 칼 차는 기쁨을 누린 것도 잠시, 곧이어 해방을 맞는다. 박정희는 465월 중순 거지꼴로 고향에 돌아온다. 4개월간 무위도식하던 박정희는 9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제 2기생으로 입학한다. 이후 박정희의 군대생활은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4881일 소령으로 승진한 박정희는 10월 여순사건이 터지자 우습게도 토벌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차출된다. 당시 박정희는 군부 내 남로당 우두머리였다. 숙군작업의 와중 1111일 체포된다. 해방정국에선 공산주의가 우세였다. 최상천은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는 절대 대세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일생을 통해 단 한 번도 정의로운 소수에 참여하거나 동조한 적이 없었다. 사회적 약자의 편을 든 적도 없다. 대세에 편승하더라도 그냥 끼어드는 정도가 아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핵심부에 들어갔다......얼마 후 그는 좌익의 사회적 주도권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조선국방경비대까지 좌익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눈에는 사회주의 승리가 요지부동의 대세로 보였다.”

 

- 최상천, <알몸 박정희>

 

만주군에서 광복군으로 변신했던 박정희는 좌익으로 변신했다가 사형을 당할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 박정희는 숙군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모두 털어놓고 만주군 선배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박정희의 배신으로 사관하교 중대장 시절 동료들과 생도들이 주로 처형된다. 김영수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어떤 인간으로 하여금 단순히 생존을 위해 열 번씩 자신의 신념을 버리도록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할 것이다. 특히 김창룡의 조건은 박정희가 어떤 인물을 목전에서 지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때 동지거나 친구였던 누군가에게 죽음을 선고하라는 의미였다.....그것은 이념과 친구를 함께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더 큰 대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어떤 상황에서는 최악의 생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

 

김종필은 사병으로 지원 입대했다가, 탈영했다가, 몇 개월 후 교도대 졸병으로 들어갔다가 육사 8기로 들어간 별난 케이스였다. 박정희가 근무하던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육사 8기로 졸업한 15명의 신임 소위들이 배속된다. 이들 중 한 명이 김종필이었다.

 

김종필은 8기생 중심으로 대한음주당을 만들고 박정희를 당수로 삼아 거의 매일 막걸리를 마셨다.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큰 딸 영옥은 51, 김종필과 결혼한다. 박정희에게 현역 복귀의 절호의 기회가 왔다. 6.25가 터진 것. 박정희는 장도영에게 눈물로 호소해 육군 소령으로 복직한다. 박정희는 진급을 거듭, 55년 강원도 인제 5사단장으로 발령 받는다. 당시의 직속 상관은 3군단장 송요찬이었다. 박정희는 52, 59년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여의치 않아 다음 기회를 노린다. 박정희는 60년 초부터 4월까지 20여회에 걸쳐 쿠데타를 위한 모임을 갖는다. 박정희는 58일을 기해 또 다시 쿠데타를 획책하지만 4. 19 혁명으로 유예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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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2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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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일 이승만을 총재로 모시고 이기붕을 부총재로 모시는 대한반공청년단이 발족한다. 초대 단장은 김용우였으나, 812일부터 신도환이 단장으로 취임하여 대한멸공단, 반공통일청년회, 계몽회 등 기존 9개 청년단체를 해체시키고 대한반공청년단으로 통합한다. 대한반공청년단은 200만 당원과 그 가족 약 400만 명을 선거운동에 총동원시켰다


전국 89개 시, 군 단부 조직, 서울시 종로구 단장에는 임화수, 동대문 특별단부는 이정재가 맡았다. 반공예술인단을 조직한 임화수는 여배우 성상납을 통해 경무대 경무관 곽영주와 내통하며 세를 불린다. 임화수가 지휘한 반공예술인단의 활동은 4.19 혁명 후 많은 연예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긴다. 예를 들어 자유당 지지 연설을 했던 배우 김승호의 집은 시위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반공청년단과 반공예술인단 못지않은 이승만의 친위부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대한노총이었다. 이승만은 591년 동안에 90여 개의 노조를 해산시켰다. 58년 조선방직에서 어용 노조에 반대해 새로운 노조를 결성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598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구성되었다.

 

북한은 57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데 있어 노동력 부족이라는 난관에 직면한다. 이에 일본에 재일교포 북송을 제안한다. 213일 일본 정부가 북송 추진을 결정하자 이승만 정권은 그제서야 관제 시위에 나섰다. 대대적인 반대 시위에도 불구, 아무런 변화가 없자 이승만은 615일 대일 경제단교 및 일본왕래금지 성명을 발표한다. 아놔, 외교가 애들 장난도 아니구. 이승만의 반일 운동에 대해 서중석은 이렇게 말했다.

 

“1950년대가 특히 더 심하였지만, 민중들이 지니고 있는 강렬한 반일 감정을 이용하여 자산의 권력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그 권력을 강화하려는 동원정책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반공은 이승만의 정치 활동에서 뗄 수 없는 것으로, 이승만은 반공을 통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분단을 공고히 하였다. 이승만이 반공운동과 결합된 반일운동을 집요하게 일으킨 중요한 이유는 북진통일운동과 마찬가지로 반공체제와 자신의 독재 유지 또는 강화를 위해서였는데, 이승만한테 반공운동을 떠난 반일 운동은 그다지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 ”

 

430일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자초한 <경향신문> 폐간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경향신문>20만부를 발행하는 발행부수 2위의 신문이었다. (동아일보 35만부, 한국일보 16만부, 조선일보 10만 부) 자유당이 <경향신문> 폐간을 위해 적용한 법률은 미군정 법령 88였다. <경향신문>효력정치가처분신청을 냈고 서울고법 특별1부 재판장 홍일원은 <경향신문>에 승소판정을 내렸다.

 

곧장 자유당 정권은 홍일원에 대한 보복에 들어갔다. 자유당 정권은 승소 판결 이후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 “ 법원의 결정에 따라 발행허가취소처분을 철회하는 대신 동 신문의 발행을 무기정지 처분한다.”는 기상천외한 대응책을 발표한다. 경향신문은 불복, 또 한 차례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내지만 다른 재판부에 의해 기각된다.

 

227일 대법원은 조봉함에게 사형 판정을 내린다. 재판장, 김세원, 주심 김갑수, 간여 검사 대검의 오제도였다. 김갑수는 730일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다음날 731일 오전 11시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조봉암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이승만은 조문객들의 상가집 출입마저 통제했다. 연시중은 조봉암을 제거한 이승만의 음모는 매우 비열했다. 구속된 진보당 간부들에게 모진 고문을 자행하면서 살려줄 테니 조봉암이 간첩이었다는 사실만을 진술하라고 강요하면서 사건 조작을 위해 파렴치한 짓을 일삼았다고 말한다. 진보당 사건 수사관이었던 한승격은 당시 상부로부터 진보당은 없애고 죽산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사건을 엮지 않으면 네가 죽을 것이라는 협박도 받았다고 말했다. 미국과 민주당 역시 조봉암을 외면했다.

 

죽산 조봉암, 한국 진보 정치의 큰 별이 이승만이 거느리던 사법 살인마들에 의해 결국 목숨을 잃었다. 알라딘 7월 캘린더에는 19일에 이승만 사망이 표기되어 있다. 반면 731일 운명한 죽산 조봉암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한민족 500만 명을 살해한 국제적인 전범, 이승만은 국부가 되어 있고,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조봉암은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이라니! 후손인 우리는 죽산 조봉암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들고 말았다. 너무 늦었으나, 죽산 조봉암 선생님의 명복을 기원한다. (오늘은 죽산 조봉암 선생님의 기일입니다. ) 




자유당은 제 4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국회의장 이기붕을 지명한다. 반면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가 갈려 조병옥과 장면의 갈등이 심화된다. 친일파 앞잡이들끼리 서로 친일파라 욕했다니. 결국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부통령 후보에 장면이 지명된다. 조병옥은 60129일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으로 위장 수술을 받으러 떠났다. 자유당은 5월 예정된 선거를 농번기를 피한다는 핑계로 315일 실시한다고 발효한다. 215일 밤, 조병옥은 병원에서 사망한다. 지난번 대통령 후보 신익희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돌연사였다.

 

 

시설은 귀속업체의 불하로부터, 원료는 원조 원면으로부터, 그리고 기업자금은 대충자금으로부터확보할 수 있었던 기업들은 권력과 선이 닿아 있으면 하루아침에 재벌이 되는 시대였다. 50년대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의탁하던 시대였다. 일명 만가 융자의 시대. 이승만은 결재서류에 자기 이름의 끝 글자인 을 따오고 오케이라는 뜻의 를 붙여 만가라는 한문 사인을 하여 통과시키곤 했는데, 그야말로 완전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수입대체 산업화의 최대 수혜자는 삼성 이병철이었다.


 

이승만은 이병철한테 제일제당과 제일모직과 같은 이전의 일본 기업들을 두드러지게 유리한 구매가격으로 내어주었다. 삼성은 이런 호의를 기억해두었다가 선거철에 보답하는 것이었다.....주한 미군의 존재 역시 군대식의 수입대체화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다. 이승만 정권과 미 제8군의 젖줄을 차지하는 경쟁에서 역대의 승리자는 나중에 대한항공까지 거느리게 된 한진기업의 사장인 조중훈이었다. 1950년대 내내 그는 주한 미군과 운송계약을 맺었는데, 그 금액은 1960년에 이르러서는 연간 228만 달러에 이르렀다. 그는 또한 미군으로부터 잉여의 버스도 얻어 서울과 인천 사이의 버스노선을 개설할 수 있었다.”

 

-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578월부터 본격적으로 재벌 중심으로 은행 민영화가 시작되었다. 삼성은 4개 시중은행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어 한국 최초로 완전한 재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삼호그룹이 저축은행(제일은행), 대한제분이 상업은행, 개풍그룹이 서울은행을 소유,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지배하게 된다. 재벌의 금융자본 지배는 기업의 마구잡이 인수라고 하는 문어발 작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원동력은 삼성그룹이 4개 시중은행의 최대 주주가 됨으로써 은행의 자금을 활용하여 다각화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1950년대 말 삼성그룹은 상업, 조흥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의 최대 주주로서 산하에 16개 계열기업군을 거느린 국내 최대의 금융콘체른을 형성한다.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으로 전환하면서 보다 용이하게 다수의 기업들을 수중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

 

 

6.25이후 군인들 사이에 가장 널리 불린 애창곡 중 하나는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구전가요였다. 성냥공장 아가씨는 빈곤을 견디지 못해 농촌을 탈출한 젊은 여성을 상징했다.

 

금성사 구인회에 의해 1115일 국산 라디오가 처음으로 출고됐다. 415일 한국 최초의 민간상업 라디오 방송인 부산문화방송(HLKU)이 개국한다. 부산에서는 KBS를 압도하는 인기를 누렸다.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국내 신문에 처음 등장한 해도 1959년이었다. 1957년 한국 최초의 컬러 영화 <선화공주>가 개봉하였고, 58년 이강천의 <생명>은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였다.

 

19603. 15선거를 앞두고 반공청년단, 반공예술인단, 대한노총 뿐만 아니라 가계에서 만송족이 동원되었다. ‘만송 찬송의 지휘자는 <서울신문>이었다. <서울 신문>419일 국민들에 의해 불태워진다. 소설가 김동리와 박종화도 만송족이었다. <사상계> 4월호 <권두언>에서 장준하는 문화 예술계와 학계의 추태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부정과 불의에 항쟁은 못할망정 오히려 야합하여 춤춘 일부 종교가, 작가, 예술가, 교육가, 학자들의 추태다. 선거통에 한몫보자고 교우의 수를 팔아가면서 쪽지를 들고 돌아다니는 목사 장로 따위의 축복을 바라고 그가 높이 든 팔 아래 머리를 숙이고 ~으로 기도하는 신도들에게 신의 저주가 임할 것이다


지조없는 예술가들이여 너의 연기를 불사르라. 너의 연기는 독부의 미소 섞인 술잔이다. 부정에 반항할 줄 모르는 작가들이여 너의 붓을 꺽으라. 너희들에게 더 바랄 것이 없노라. 양의 가죽을 쓴 이리떼 같은 교육자들이여 토필을 던지고 관헌의 제복으로 갈아입거나 정당인의 탈을 쓰고 나서라. 너희들에게는 일제시의 노예근성이 부리깊이 서리어 있느니라. 지식을 팔아 영달을 꿈꾸는 학자들이여 진리의 곡성은 너희들에게 반역자란 낙인을 찍으리라.”

 

60227일 대구에서는 자유당 유세가 이었다. 이날 자유당은 이발소, 목욕탕, 음식점 등 당국의 허가를 요하는 모든 영업체들에게 휴업 명령을 내렸다. 유세장에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이튿날 역시 대구에서는 장면의 유세가 있었다.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은 교육감과 학교장들에게 지시해 학생들을 등교케 하였다. 경북고는 학기말시험, 대구고는 토끼사냥, 경북사대부고는 임시수업, 대구상고는 졸업생 송별회, 대구여고는 무용발표회 등,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일요일 강제 등교령은 장면 유세장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28일 유세장에는 대구 유권자 29만 가운데 20만 명이 모여들었다.

 

경북 고등학교 학생들은 학교를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 시위에 나섰다. 이른바 대구 학생 사건. 이후로 38일 대전, 310일 수원, 충주, 12일 부산, 청주, 13일 서울, 투표 전날인 14일 밤에는 서울, 부산, 포항, 인천, 원주, 문경 등지에서 대대적인 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315일 마산시의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 투표를 비롯한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하고 1030분 선거 포기를 선언, 시위를 준비한다.

 

시위대는 수천명의 군중으로 불어나 밤 9시경에는 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 파출소가 습격당하자 경찰이 발포 7명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을 당했다. 마산 사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이기붕은 이렇게 말했다.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

 

411일 정오경 마산 앞바다에서 교복차림의 10대 소년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된다. 소년은 315일 밤 실종된 마산상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주열이었다. 마산 시민들은 분노했다.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시위 군중은 15만 명에 이르렀다. 자유당 정권은 이 시위를 공산분자들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다. 이에 <동아일보>14일자 사설 <마산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지 말라>를 통해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고 마산시민을 옹호하였다. 강준만은 이렇게 말한다.

 

언론의 자유가 살아 있었다는 것, 바로 이 점이 이승만 시대와 훗날에 나타날 독재정권 시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만약 당시의 언론이 이후 탄생한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처럼 엄격한 통제하에 있었다면 4.19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신문에 실린 김주열의 한 장의 사진이 역사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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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31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31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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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4대 민의원 총선거를 4개월 남겨둔 시점에서 조봉암,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등 진보당 주요 간부 10여 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된다. 정부는 재판도 열리기 전인 225일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시킨다. 왜 조봉암 이하 진보당원들은 체포되야 했을까? 조봉암이 주장한 평화통일론때문이었다. 북한괴뢰가 사용하는 문구이니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재판이 점점 진보당 측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검찰은 뒤집기를 시도한다. ‘간첩 양명산카드. 조봉암이 간첩 양명산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것. 훗날 검찰의 조작으로 밝혀졌다.



 

512, 4대 민의원 총선거는 진보당 죽이기이후에 치러졌다. 자유당의 정치자금 조달 방식은 이제 폭력 조직과의 유착 형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박태순과 김동춘은 이를 관료 폭력 독점자본의 유착이라고 부른다.

 

“‘폭력 주식회사’ - 이것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소설가가 착안한 소설 제목이 아니라 50년대 남한 사회에 실제로 존재했던 막강한 이득 창출의 사업 조직체였다. 연희전문 출신의 홍영철이 이끌었던 이 회사는 문자 그대로 폭력을 자원으로 삼고 있었던 바, 미군의 불하물자를 주먹의 힘으로 독점 입찰하여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하지만 그 수익의 8할 이상은 자유당의 정치자금과 안 되는 일이 없고 못하는 일이 없다던 막강한 삼권부인 경찰, 특무대, 헌병대 그리고 그 외곽에 군웅 할거하는 각종 정치 폭력집단들에게 분배됨으로써 나름대로 관료 폭력 독점자본의 유착이라 할 수 있는 것을 형성시켜 나갔다.”

 

조봉암은 721심 재판에서 간첩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은 가운데 징역 5년을 언도받는다. 판결뒤 이기붕 수하의 반공청년단 수백 명이 법원청사로 들어와 난동을 부린다. 이승만은 1심 판결이 내려지자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라고 분노하였다. 겁을 먹은 검사 조인구는 2t심 재판에서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대한민국 법대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가인 김병로는 조봉암 1심 판결 뒤 벌어진 폭력배들의 난동에 대해 정치깡패들과 그 배후자들을 통렬히 비난했다. “법관을 가리켜 용공 판사운운한 것은 법관 모욕죄 가운데서도 가장 악질에 속하며 그들 행동은 살인 강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며 분노했다. 김병로는 이승만에 대해 옛날 군주와도 달리 법에 대한 관념이 결여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함석헌은 <사상계> 8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88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다. 이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우리가 일본에서는 해방이 됐다 할 수 있으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 셋이다. 남한은 북한을 쏘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노름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 없지 않은가. 잘못이 애당초 전주 이씨에서 시작됐다. ”

 

사상계는 이 필화사건으로 인해 더욱 인기가 치솟아 59년에 이르러선 판매 부수가 5~ 8만으로 뛰어오른다. 당시 최대 신문의 발행 부수가 20만 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기록이었다.



 

1118, 자유당은 간첩 색출을 명분으로 하는 전문 340조 부칙 2조로 구성된 신 국가보안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인권 탄압의 위법 조항 때문에 야당과 언론인, 법조인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은 1219일 법사위에서 10명만 참석한 채, 신국가보안법을 날치기 통과시킨다. 

 

야당의원들이 무기한 농성에 들어가자 자유당은 전국의 무술 경찰관 300명을 임시국회 무술 경위로 특채해 급조, 농성중인 야당의원들을 끌어내 지하실에 감금한다. 1224일 벌어진 일이라 해서 이를 ‘2.4 국가보안법 파동이라 부르게 된다. 자유당은 야당의 저지로 통과시킬 수 없었던 27개 의안을 무더기 통과시킨다. 지방자체단체의 장을 선거제에서 임명제로 개정, 이후 도지사, 시장, 군수, 면장, 동장 등 말단까지 모두 자유당원만을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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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30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31 0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6-07-30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검찰의 역사는 참 뿌리깊네요.... 우리 사회의 많은 병폐가 일본제국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시이소오 2016-07-30 18:41   좋아요 2 | URL
독재정귄에서 견찰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거짓판결을 내렸다면 오늘날 견찰은 돈에 눈이 뒤집혀 스스로 개새키가 됐다는 차이점이. ^^;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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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은 585.12 총선에 대비해 장경근을 내무부장관에 앉힌다. 장경근에게 떨어진 임무는 국민반조직이었다. 대통령 선거 대 국민 대책반. 이승만은 국민들을 서로 감시시키지 않고 이대로 방치해 두면 야당 사람들에게 농간을 당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국민반을 조직, 막대한 예산을 지원한다.

 

자유당은 국민반 운영과 함께 선거법 개정을 추진한다. 야당 선거운동을 탄압을 목적으로 한 선거법 개정에 반발, 야당은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를 구성한다. 520일 장충단 공원에서 개최한 시국강연회에 20여만 명의 시민이 참석한다. 조병옥의 연설이 시작되고 불과 5분도 안 돼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나 앰프에 휘발유를 뿌리는 등 횡포를 부렸으나, 경찰들은 본체만체였다. 괴한들은 이정재의 부하 유지광 일파였다. 자유당의 지시로 이날 동원된 깡패들은 700여명이었고 이들에게는 모두 일당이 지급되었다.

 

326, 이승만의 83세 생일에 맞춰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이 이승만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후 이기붕을 2의 이승만으로 모시는 어용지식인들, 이른바 만송족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이승만과 이기붕 의 조상은 이씨 왕조 양녕대군으로 시작된다. 이승만은 17, 이기붕은 18대 후손이었다. 이승만은 이씨 이강석을 양자로 삼아 이씨 왕조를 재현하려 했던 게 아닐까. 이강석의 위세는 실로 대단했다고 한다. 이강석은 백주에 헌병을 구타하고 파출소 기물을 부수고 다녔다. 서울 법대에 부정으로 입학하기도 한다.

 

821, 무직자 강성병이 경북 동해 일대에 출현, 이강석을 사칭하고 다닌, 이른바 가짜 이강석 사건이 벌어진다. 가짜 이강석은 경찰서장, 시장, 군수등으로부터 금품 465천 환을 탈취한다. 이강석은 법정에서 내가 시국적 악질범이면 나에게 아첨한 서장, 군수 등은 시국적 간신도배이다라고 말해 방청석의 열띤 박수를 받았다. 리영희는 가짜 이강석 사건이 해방 후 백성들의 13년 묵은 체증을 내려주었다고 말했다.

 

영국이 대북한 수출금지령을 해제하자 이승만은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 선언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당시의 군대는 폭력과 병역부정이 횡행했다. 51년부터 56년까지 유학 간 3769명 중 입대한 자는 57년까지 한 명도 없었다. 국방부 모 고관실에는 인사청탁 처리부가 놓여 있었고, 청탁자는 거의 전부가 저명인사로 국회의원이 반 이상이었다.

 

519, 인천 만국 공원엔 맥아더 동상이 제막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나 위인들 동상은 없었다. 8월 소련은 대륙간 탄도탄 발사 실험에 성공한 이후, 104일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무인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했다. 이후 미국은 미사일 부대, 핵포병대 펜토믹 사단’, 팬텀기 편대를 배치하는 등 한국의 군사기지화를 강화한다. 59년부터 한국군과 공동으로 전술핵무기 사용을 포함하는 전술 훈련이 시작된다.

 

한국 전 이후 얌생이 몬다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얌생이 몬다라는 말은 계획적으로 다른 일을 빙자해 무언가를 훔쳐내는 일을 의미한다. 4양주 열차강도 사건이 발생한다. 한국인들이 미군 상사 윌슨과 공모해 벌인 일이지만 모든 책임은 한국인이 뒤집어쓴다. 김정자는 이렇게 말했다.

 

철로 속으로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 열차가 멎었을 때 미군의 군수품을 훔치는 바라크촌의 떠돌이들. 그들은 미군의 보초병에게 들키면 총살당하고 만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목숨을 담보하는 한계상황에서 그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도둑질을 감행한다. 그러나 도둑질을 하는 것은 비단 한국인 부랑민들만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술과 계집을 사기 위해서 도둑질을 하고 한국인은 먹고 살기 위해서 도둑질을 한다.’(오상원, <난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으로 몰리는 것은 오직 한국인뿐이다. 미군은 그 한국인을 슬래키 보이(slacky boy)’라고 일컫고 깡그리 도둑으로 몰아붙인다.”

 

5771일 극동 유엔사령부 서울 이전 이후 주한 미군 범죄가 급증한다. 오연호는 1957소년소녀 사냥의 해로 불렀다.

 

76일 인천에서 미군의 송유관에 올라앉아 있던 세 살 먹은 아기 김용호가 미군 총격을 받고 사망한다. 미군은 오발이었다며 이등병 도널드 파세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725일 인천에서 송유관 근처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던 소년들을 향해 미군이 총격을 가해 1명이 사망한다.

 

915일 전북 옥구권에서 풀을 베던 소녀들에게 미군이 총격을 가해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는다. 소녀들이 철조망을 뚫고 들어와 풀을 베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03, 경북 김천에서 금지 명령을 어기고 학생들이 걸어갔단 이유로 미군이 발포, 중학생 송원준 군이 사망한다. 동아일보 1013자는 이렇게 보도한다.



지난 1년 중으로는 122명이 그리고 지난 한 달 중으로는 3명의 한국인이 미군의 총에 맞아 즉사함으로써 한국측은 미군에 대한 재판권까지 요구하게 되었다.”

 

6012일에는 두 여자가 전부터 알던 미군을 만나기 위해 철조망 구멍을 통해 영내로 들어왔다는 이유로 미군은 두 여자의 머리를 삭박하고 희롱한다. 미군은 이에 대해 논평할 것이 없다고 답변한다. 이승만의 측근들이 미군 범죄에 대해 보고하자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준 친구야. 우리가 위급할 때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미군뿐이야. 미국 군인의 비행이 신문에 나면 대미감정이 좋지 못해지니 되도록 신문에 보도되지 않고 처리하도록 해야 해.”

 


(미2사단에 근무하는 미군 병사 케네스 리 마클 이병이 윤금이 씨의 머리를 콜라병으로 난타하고 피 흘리며 죽어가는 윤금이 씨의 자궁에 콜라병을 박고 항문에 우산대를 꽂은 현장 사진)    


50년 대 중반 천 여개의 건설업체들이 난무해 과다경쟁을 벌일 정도로 건설업은 호황을 구가하였다.

건설업계에는 정부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자유당 5인조가 있었다. 대동공업, 조흥토건, 극동건설, 현대건설, 삼부토건.

 

자유당의 정치자금원 중 비중이 가장 큰 것이 바로 건설업이었다. 대형 정부 발주 공사를 수주할 경우 공사 가격의 30%는 미리 공제되어 자유당 정치자금으로 납부되는 게 원칙으로 통용되었다.

 

564월 당시 결석 아동은 70만 명이었다. 575월 경기도 안성군 백성국민학교에서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아이들이 교정에 있는 등나무를 칡뿌리로 잘못 알고 벗겨 먹다 27명이 중독된 사건이 발생한다. 죽산국민학교에선 학생 922명 중 210명이 하루에 한끼를, 135명이 하루 두끼를 굶고 있었는데, 이 학교 교장은 결식아동용으로 배급된 분유를 자기 집 돼지 사료로 먹였다.

 

농촌에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젊은 처녀들은 대거 도시로 이주하여 식모가 되었다. 이재오는 농촌에서 먹을 것이 없어 도시로 나오고, 공장에서 먹을 것이 없어 거리로 나오고, 사회 전반에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농촌에서는 보릿고개를 못 넘어 소나무 껍질, 칡뿌리, 산나물, 향토흙으로 배를 채워야 했고 견디다 못한 열아홉 순이는 실패 감던 손을 놓고 미군의 품안에 안겨 맥주를 마시는 에레나가 되어야 했다고 말했다. 고은은 <에레나>에서 이렇게 적었다.

 

1956년 여름

저녁 야학당에서 돌아오는 길

지프차 미군 두 놈에게 강간당했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하늘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고향은 감싸주는 곳이 아니라

손가락질하는 곳이었습니다

울며 집 떠나

팔자대로 경기도 송탄 미군부대 밖 양공주가 되어버렸습니다

순자가 에레나가 되었습니다

 

- 고은, <만인보 16>

 

111일 중견 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이 결성된다. 관훈클럽은 풀브라이트 동창생들이 조직한 단체였다. 애초에 태생이 친미적이었다. 당시 언론인들의 부정부패는 말세였다. 리영희는 이렇게 말했다.

 

전국의 자가용 승용차가 5801대밖에 없었던 그 시기에, 모여 앉으면 자가용으로 즐긴 주말 드라이브의 화제로 꽃을 피우는 취재기자들도 적지 않았다. ......권력과 돈과 언론기관은 한통속이 되어 뼈밖에 안 남은 민중에게서 고혈을 짜내고 있었다. 민중은 원성은 천지간에 가득 차 있었다. 타락한 신문인, 기자들의 부패는 내가 방금 풀려나온 군대의 장교들의 부패를 뺨칠 정도였다. 장교들의 부패는 뻔뻔스럽고 신문인들의 부패는 지능적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

 

562월에는 만화 전문 어린이 월간잡지인 <만화 세계>가 창간된다. 이후 <만화 소년>, <만화 학생>, <칠천국>, <만화왕>, <샛별>, <만화왕국>등의 어린이 만화잡지가 쏟아져 나온다.

 

57<문학예술>지 신인문학상 당선작인 동시에 그 해 제2 회 동인 문학상 수상작으로 뽑힌 화제의 작품은 선우휘의 <불꽃>이었다. 반공이념 강화에 기여한 선우휘는 이후 <조선일보>를 통해 군사독재정권을 비호하는 개새끼로 맹활약한다.

 

이 해의 히트곡은 김진경 작사, 이재현 작곡, 윤일로 노래의 <기타부기>였다.

 

519, <한국일보>의 주관아래 미스코리아 대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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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7-28 08: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현재 우리는 평화를 선택할 수도 없고, 전쟁을 선택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자신의 무기를 자신이 사용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넘겨주고 안심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그 타인이 사용할 무기를 거금들여 사오고 있고 때문에 많은 국민들의 복지 비용이 부족한 현실이 답답해집니다... 시이소오님 안타깝지만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7-28 08:45   좋아요 3 | URL
싸드가 배치된다면 한반도에서 전쟁 확률은 그 이전보다 급속도로 치솟겠죠.

IS 까지 설치고 있으니, 세계 정세는 도무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질 않네요.

한국인들은 언제쯤 미국이 `대악마`라는 사실을 깨달을런지요?
미국 대중문화의 무분별한 소비가 계속되는 한,
미국이 악마임을 깨닫지 못하겠지요.

저 역시도 겨울 호랑이님의 격려에 매번 감사드립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28 08: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만일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대통령이 된다면, 시이소오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악의 축`이 누구인지 모든 사람이 알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다만, 아주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겠지요..ㅜㅜ

시이소오 2016-07-28 08:54   좋아요 3 | URL
힐러리든 트럼프든 도긴개긴아닐카요?

그리고 안타깝게도,혹은어이없게도 이미 트럼프로 대세가 기울었네요. 정말 황당하네요. 전세계 정신병자들이 죄다 정권을 잡고 있으니 ㅠ ㅠ

겨울호랑이 2016-07-28 0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습니다. 예전에 Trump의 「Apprentice 」시리즈의 유행어 ˝You`re fired!˝가 이제는 해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이소오 2016-07-28 09:03   좋아요 2 | URL
말씀을 들으니 그러네요. 섬찟합니다. ㅠㅠ

2016-07-28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28 09:25   좋아요 1 | URL
언제쯤 고쳐질까요?
답답할 노릇입니다 ㅠ

얌생아 2017-10-14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얌생이는 계획 운운이 아니라 김치새끼들이 미군만을 대상으로 물건을 훔친 걸 말합니다. ‘얌생이 친다‘는 미군 부대 옆에서 염소를 치는 영감이 창고 밖에는 풀이 적고 창고 안에는 풀이 많아서, 보초의 허락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 염소에게 풀을 먹이는 척 하면서 물건을 훔치는 한국남자들이 전형적으로 즐겼던 수법이죠. 처음에는 웃으면서 봐주던 미군도 너무 자주하니까 짜증나서 한국남자만 보이면 그냥 난사할 정도가 돼 지금은 타깃이 미군에서 여성으로 옮겨갔지만 말입니다.그리고 강간은 한국남자가 훨씬 더 많이 저지르는데도 덤탱이 쓰는 건 언제나 서양남성입니다. 그 때 중국남자들이 부산 점령당해서 김치새끼들 전부 죽이도록 내버려뒀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나마 미국남자는 주 살해 대상이 창녀지만 한국남자는 빈집이라고 하면 무조건 들어가서 아무 잘못도 없는 무고한 여자를 강간하니 한국여자들은 한국남자한테 절대로 혼자 산다는 말을 안 할 정도입니다. 저런 사진을 자랑스럽게 올려놓고 이용하는데서 김치새끼 인성 수준을 알 수 있죠. 미국인은 피해자의 인권을 고려해서 저런 처참한 나체 사진을 올리거나 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