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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1월 22일 이승만을 총재로 모시고 이기붕을 부총재로 모시는 대한반공청년단이 발족한다. 초대 단장은 김용우였으나, 8월 12일부터 신도환이 단장으로 취임하여 대한멸공단, 반공통일청년회, 계몽회 등 기존 9개 청년단체를 해체시키고 ‘대한반공청년단’으로 통합한다. 대한반공청년단은 200만 당원과 그 가족 약 400만 명을 선거운동에 총동원시켰다.
전국 89개 시, 군 단부 조직, 서울시 종로구 단장에는 임화수, 동대문 특별단부는 이정재가 맡았다. 반공예술인단을 조직한 임화수는 여배우 성상납을 통해 경무대 경무관 곽영주와 내통하며 세를 불린다. 임화수가 지휘한 반공예술인단의 활동은 4.19 혁명 후 많은 연예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긴다. 예를 들어 자유당 지지 연설을 했던 배우 김승호의 집은 시위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반공청년단과 반공예술인단 못지않은 이승만의 친위부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대한노총이었다. 이승만은 59년 1년 동안에 90여 개의 노조를 해산시켰다. 58년 조선방직에서 어용 노조에 반대해 새로운 노조를 결성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59년 8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구성되었다.
북한은 57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데 있어 노동력 부족이라는 난관에 직면한다. 이에 일본에 재일교포 북송을 제안한다. 2월 13일 일본 정부가 북송 추진을 결정하자 이승만 정권은 그제서야 관제 시위에 나섰다. 대대적인 반대 시위에도 불구, 아무런 변화가 없자 이승만은 6월 15일 대일 경제단교 및 일본왕래금지 성명을 발표한다. 아놔, 외교가 애들 장난도 아니구. 이승만의 반일 운동에 대해 서중석은 이렇게 말했다.
“1950년대가 특히 더 심하였지만, 민중들이 지니고 있는 강렬한 반일 감정을 이용하여 자산의 권력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그 권력을 강화하려는 동원정책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반공은 이승만의 정치 활동에서 뗄 수 없는 것으로, 이승만은 반공을 통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분단을 공고히 하였다. 이승만이 반공운동과 결합된 반일운동을 집요하게 일으킨 중요한 이유는 북진통일운동과 마찬가지로 반공체제와 자신의 독재 유지 또는 강화를 위해서였는데, 이승만한테 반공운동을 떠난 반일 운동은 그다지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 ”
4월 30일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자초한 <경향신문> 폐간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경향신문>은 20만부를 발행하는 발행부수 2위의 신문이었다. (동아일보 35만부, 한국일보 16만부, 조선일보 10만 부) 자유당이 <경향신문> 폐간을 위해 적용한 법률은 ‘미군정 법령 88호’ 였다. <경향신문>은 ‘효력정치가처분신청’을 냈고 서울고법 특별1부 재판장 홍일원은 <경향신문>에 승소판정을 내렸다.
곧장 자유당 정권은 홍일원에 대한 보복에 들어갔다. 자유당 정권은 승소 판결 이후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 “ 법원의 결정에 따라 발행허가취소처분을 철회하는 대신 동 신문의 발행을 무기정지 처분한다.”는 기상천외한 대응책을 발표한다. 경향신문은 불복, 또 한 차례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내지만 다른 재판부에 의해 기각된다.
2월 27일 대법원은 조봉함에게 사형 판정을 내린다. 재판장, 김세원, 주심 김갑수, 간여 검사 대검의 오제도였다. 김갑수는 7월 30일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다음날 7월 31일 오전 11시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조봉암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이승만은 조문객들의 상가집 출입마저 통제했다. 연시중은 “조봉암을 제거한 이승만의 음모는 매우 비열했다. 구속된 진보당 간부들에게 모진 고문을 자행하면서 살려줄 테니 조봉암이 간첩이었다는 사실만을 진술하라고 강요하면서 사건 조작을 위해 파렴치한 짓을 일삼았다”고 말한다. 진보당 사건 수사관이었던 한승격은 “당시 상부로부터 ‘진보당은 없애고 죽산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사건을 엮지 않으면 네가 죽을 것”이라는 협박도 받았다“고 말했다. 미국과 민주당 역시 조봉암을 외면했다.
죽산 조봉암, 한국 진보 정치의 큰 별이 이승만이 거느리던 사법 살인마들에 의해 결국 목숨을 잃었다. 알라딘 7월 캘린더에는 19일에 이승만 사망이 표기되어 있다. 반면 7월 31일 운명한 죽산 조봉암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한민족 500만 명을 살해한 국제적인 전범, 이승만은 국부가 되어 있고,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조봉암은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이라니! 후손인 우리는 죽산 조봉암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들고 말았다. 너무 늦었으나, 죽산 조봉암 선생님의 명복을 기원한다. (오늘은 죽산 조봉암 선생님의 기일입니다. )
자유당은 제 4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국회의장 이기붕을 지명한다. 반면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가 갈려 조병옥과 장면의 갈등이 심화된다. 친일파 앞잡이들끼리 서로 친일파라 욕했다니. 결국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부통령 후보에 장면이 지명된다. 조병옥은 60년 1월 29일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으로 위장 수술을 받으러 떠났다. 자유당은 5월 예정된 선거를 농번기를 피한다는 핑계로 3월 15일 실시한다고 발효한다. 2월 15일 밤, 조병옥은 병원에서 사망한다. 지난번 대통령 후보 신익희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돌연사였다.
‘시설은 귀속업체의 불하로부터, 원료는 원조 원면으로부터, 그리고 기업자금은 대충자금으로부터’ 확보할 수 있었던 기업들은 권력과 선이 닿아 있으면 하루아침에 재벌이 되는 시대였다. 50년대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의탁하던 시대였다. 일명 ‘만가 융자’의 시대. 이승만은 결재서류에 자기 이름의 끝 글자인 ‘만’을 따오고 ‘오케이’라는 뜻의 ‘가’를 붙여 ‘만가’라는 한문 사인을 하여 통과시키곤 했는데, 그야말로 완전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수입대체 산업화의 최대 수혜자는 삼성 이병철이었다.
“이승만은 이병철한테 제일제당과 제일모직과 같은 이전의 일본 기업들을 두드러지게 유리한 구매가격으로 내어주었다. 삼성은 이런 호의를 기억해두었다가 선거철에 보답하는 것이었다.....주한 미군의 존재 역시 군대식의 수입대체화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다. 이승만 정권과 미 제8군의 젖줄을 차지하는 경쟁에서 역대의 승리자는 나중에 대한항공까지 거느리게 된 한진기업의 사장인 조중훈이었다. 1950년대 내내 그는 주한 미군과 운송계약을 맺었는데, 그 금액은 1960년에 이르러서는 연간 228만 달러에 이르렀다. 그는 또한 미군으로부터 잉여의 버스도 얻어 서울과 인천 사이의 버스노선을 개설할 수 있었다.”
-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57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재벌 중심으로 은행 민영화가 시작되었다. 삼성은 4개 시중은행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어 한국 최초로 완전한 재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삼호그룹이 저축은행(제일은행), 대한제분이 상업은행, 개풍그룹이 서울은행을 소유,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지배하게 된다. 재벌의 금융자본 지배는 기업의 마구잡이 인수라고 하는 문어발 작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원동력은 삼성그룹이 4개 시중은행의 최대 주주가 됨으로써 은행의 자금을 활용하여 다각화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1950년대 말 삼성그룹은 상업, 조흥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의 최대 주주로서 산하에 16개 계열기업군을 거느린 국내 최대의 금융콘체른을 형성한다.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으로 전환하면서 보다 용이하게 다수의 기업들을 수중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
6.25이후 군인들 사이에 가장 널리 불린 애창곡 중 하나는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구전가요였다. 성냥공장 아가씨는 빈곤을 견디지 못해 농촌을 탈출한 젊은 여성을 상징했다.
금성사 구인회에 의해 11월 15일 국산 라디오가 처음으로 출고됐다. 4월 15일 한국 최초의 민간상업 라디오 방송인 부산문화방송(HLKU)이 개국한다. 부산에서는 KBS를 압도하는 인기를 누렸다.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국내 신문에 처음 등장한 해도 1959년이었다. 1957년 한국 최초의 컬러 영화 <선화공주>가 개봉하였고, 58년 이강천의 <생명>은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였다.
1960년 3. 15선거를 앞두고 반공청년단, 반공예술인단, 대한노총 뿐만 아니라 가계에서 ‘만송족’이 동원되었다. ‘만송 찬송’의 지휘자는 <서울신문>이었다. <서울 신문>은 4월 19일 국민들에 의해 불태워진다. 소설가 김동리와 박종화도 만송족이었다. <사상계> 4월호 <권두언>에서 장준하는 문화 예술계와 학계의 ‘추태’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부정과 불의에 항쟁은 못할망정 오히려 야합하여 춤춘 일부 종교가, 작가, 예술가, 교육가, 학자들의 추태다. 선거통에 한몫보자고 교우의 수를 팔아가면서 쪽지를 들고 돌아다니는 목사 장로 따위의 축복을 바라고 그가 높이 든 팔 아래 머리를 숙이고 ‘아~멘’으로 기도하는 신도들에게 신의 저주가 임할 것이다.
지조없는 예술가들이여 너의 연기를 불사르라. 너의 연기는 독부의 미소 섞인 술잔이다. 부정에 반항할 줄 모르는 작가들이여 너의 붓을 꺽으라. 너희들에게 더 바랄 것이 없노라. 양의 가죽을 쓴 이리떼 같은 교육자들이여 토필을 던지고 관헌의 제복으로 갈아입거나 정당인의 탈을 쓰고 나서라. 너희들에게는 일제시의 노예근성이 부리깊이 서리어 있느니라. 지식을 팔아 영달을 꿈꾸는 학자들이여 진리의 곡성은 너희들에게 반역자란 낙인을 찍으리라.”
60년 2월 27일 대구에서는 자유당 유세가 이었다. 이날 자유당은 이발소, 목욕탕, 음식점 등 당국의 허가를 요하는 모든 영업체들에게 휴업 명령을 내렸다. 유세장에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이튿날 역시 대구에서는 장면의 유세가 있었다.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은 교육감과 학교장들에게 지시해 학생들을 등교케 하였다. 경북고는 학기말시험, 대구고는 토끼사냥, 경북사대부고는 임시수업, 대구상고는 졸업생 송별회, 대구여고는 무용발표회 등,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일요일 강제 등교령은 장면 유세장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28일 유세장에는 대구 유권자 29만 가운데 20만 명이 모여들었다.
경북 고등학교 학생들은 “학교를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 시위에 나섰다. 이른바 대구 학생 사건. 이후로 3월 8일 대전, 3월 10일 수원, 충주, 12일 부산, 청주, 13일 서울, 투표 전날인 14일 밤에는 서울, 부산, 포항, 인천, 원주, 문경 등지에서 대대적인 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3월 15일 마산시의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 투표를 비롯한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하고 10시 30분 선거 포기를 선언, 시위를 준비한다.
시위대는 수천명의 군중으로 불어나 밤 9시경에는 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 파출소가 습격당하자 경찰이 발포 7명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을 당했다. 마산 사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이기붕은 이렇게 말했다.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
4월 11일 정오경 마산 앞바다에서 교복차림의 10대 소년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된다. 소년은 3월 15일 밤 실종된 마산상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주열이었다. 마산 시민들은 분노했다.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시위 군중은 15만 명에 이르렀다. 자유당 정권은 이 시위를 공산분자들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다. 이에 <동아일보>는 14일자 사설 <마산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지 말라>를 통해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고 마산시민을 옹호하였다. 강준만은 이렇게 말한다.
“언론의 자유가 살아 있었다는 것, 바로 이 점이 이승만 시대와 훗날에 나타날 독재정권 시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만약 당시의 언론이 이후 탄생한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처럼 엄격한 통제하에 있었다면 4.19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신문에 실린 김주열의 ‘한 장의 사진’이 역사를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