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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ㅣ 한국 현대사 산책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평점 :
1월 3일, 조선공산당은 민족통일 자주독립촉성 서울 시민대회를 개최한다. 반탁 집회로 알려져 있었지만, 지도부에서 갑자기 찬탁지지를 결의한다.
1월 15일, ‘미국의 소리’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박헌영이 <뉴욕타임스> 특파원 리차드 존스턴에게 “소련일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장래에 조선이 소연방의 하나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발언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한민당 등 51개 우익단체들은 ‘박헌영 타토’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박헌영 목에 30만 엔의 현상금까지 내건다.
1월 17일, <서울 신문>은 로버트 콘월의 증언을 보도했다. 콘월은 박헌영이 “조선인이 조선인을 위해 다스리는 조선”을 원한다고 말했을 뿐 다른 말은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군정의 내부보고서도 박헌영은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했으며, 박헌영 발언은 “완전히 왜곡되어 보도”되었다고 기록했다.
박헌영 발언은 ‘미군정의 여론공작’이었다.
1월 25일, 소련은 타스통신을 통해 오랫동안 조선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고, 조선의 신속한 독립을 주장한 것은 소련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는 남한 신문들이 타스 통신 보도를 못하도록 검열했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전쟁은 우익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한홍구는 이렇게 말한다.
“즉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이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기 보다는 민족해방운동에 좀더 충실했던 세력이었으며 자주독립의 옹호자였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신탁통치 논쟁을 계기로 친일파를 포함한 우익은 민족 대 반민족의 구도로 전개되어 온 식민지 시기 이래의 정치지형을 좌익 대 우익의 대립으로 바꿔놓는데 성공했다.”
친일파들에게 신탁통치 문제는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가 아니었을까. 일제 35년간의 수탈을 겪어 온 대다수 국민들이 탁치에 찬성할 리가 없다. 친일파들은 ‘반탁은 애국, 찬탁은 매국’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국민을 위해 반탁을 주장한 것일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반탁은 애국’을 주장한 친일파들과 우익들이 한반도를 두 동강 낸 단정 세력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이 찬탁 세력 아닌가.
1945년은 쌀 풍년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쌀값이 무섭게 폭등했다. 미군정은 45년 10월 5일부터 자유시장정책을 실시하여 투기를 불러 일으켰다. 친일파 대지주들, 친일파 경찰들이 쌀을 매점매석한 것.
1월 25일 미군정은 미곡수집령을 발표한다. 식량을 공출하겠다는 것. 배급량은 총독부 시절보다 반이 줄어든 1일 1홉이었다. 당시는 ‘쌀 구하기’ 전쟁이었다. 쌀을 살 수 없는 남편이 아내와 이들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까지 벌어졌다고. 미군정은 멍청한걸까, 사악한걸까.
2월 14일, 미군정에 의해,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출범한다. 이른바 ‘민주의원’. 의장은 이승만, 부의장은 김구와 김규식이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이즈음 “임정은 이미 해체되어” 있었다.
민주의원에서 좌익은 배제되었다. 좌익은 바로 다음날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한다. 이른바 민전. 민전은 친일파, 민족 반역자, 파시스트, 민족분열자 등을 배제한 민주주의 민족통일체임을 선언,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 민주주의 공화제 실시, 파시즘 근절, 남녀평등, 토지, 농업 문제의 시민적 해결, 여덟 시간 노동제, 최저 임금제 실시,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임정을 떠난 김원봉, 김성숙, 장건상, 성주식 등이 민전에 참여한다. 민전의 공동의장엔 여운형, 허헌, 박헌영, 백남운, 김원봉 등이 추대된다.
민주의원과 민전의 갈등은 첨예화되어 3.1절 기념식 행사마저 따로 따로 치뤘다.
한편 북한에서는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할 것을 요구하며 조만식에게 대통령 자리까지 제시하지만 조만식은 끝끝내 지지를 거부한다.
2월 8일 소련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킨다. 위원장에는 김일성이 선출된다.
3월 1일, 평양역 앞에서 3. 1운동 2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염동진이 이끄는 전문 테러 단체 '백의사'가 김구와 신익희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을 암살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김일성 폭탄 테러 미수 사건이 임정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한 김일성은 김구와 더불어 이승만을 격렬히 비난한다.
3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령을 발표한다. 김일성은 지주들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전체 농촌 인구 70%인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재분배한다.
3월 20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내용을 실현하기 위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된다. 미소공동위원회는 공동성명 5호를 발표한다. 지금까지 반탁투쟁을 해왔어도 삼상회의 결의에 지지를 표명하면, 과거의 반탁행위를 불문에 붙이고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협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김구는 완강히 거부한다. 이승만은 찬성한다. 여러 가지 문제로 미소공위는 5월 8일 무기휴회로 들어간다.
5월 4일 미군정은 군정법령 제 72호를 공포, 이른바 ‘인천 공작’을 자행한다. 미군정 방첩대(CIC)는 <인천신문>을 급습해, 사장 이하 60여명의 언론인들을 연행한다. 좌익에 대한 미군정의 공세였던 것.
5월 15일,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 터진다. ‘정판사’는 일제 시대에 근택인쇄소라는 이름으로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곳이었는데, 해방이 되자 조선공산당이 재빨리 접수해 당 본부 간판을 걸고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발행했다.
5월 4일 위조지폐단이 뚝섬에서 검거되었다. 용의자 중에 김창선이라는 인물 때문에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었다. 김창선은 조선공산당 당원이었으며, 조선정판사에서 기술자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조선공산당 본부를 수색, 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무기 정간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좌익 진영은 공개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조선정판사 사건’은 이후 경찰과 중정, 안기부, 국정원의 숱한 조작사건, 특히나 간첩조작사건의 원형이었던 셈이다. 역사를 보면 친일파 세력, 독재협력 세력들은 똑같은 짓거리를 수없이 반복한다. ‘조선정판사 사건’을 본받아 이들이 벌인 간첩 조작 사건만 수 백건이다.
5월 29일 미군정은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건’을 공포한다. 발행의 허가제로 일제 강점기로 회귀한 것. 미군정은 좌익 계열의 정기간행물 신청은 불허했다.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라고?? 퍽이나. 최근 박근혜 정부는 ‘신문법 시행령’이라는 해괴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5인 미만의 인터넷 신문은 강제로 퇴출된다는 것.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까. 5인이면 언론이고 4인이면 사이비 언론이다? 이승만의 사사오입 패러디인가??
언론의 어뷰징(온라인과 모바일에서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해 같은 기사를 제목이나 내용만 조금 바꿔 반복으로 전송하는 행위)과 선정성 기사, 그리고 협박성 기사를 이용해 광고를 따내는 등 언론 환경 파괴 행위를 막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그러나, 저런 짓거리는 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특기 아닌가? 5인 이하 언론이 무슨 힘이 있어 협박을 한다고?? 언론인들은 5인 이상 상시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매출 1억 이상의 매출을 올려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가난한 언론은 다 죽이겠다는 심보? 정부 입맛에 맞는 기사만 써라? 언론을 길들이겠다는 개수작인데. 아, 놔 또 헌법 공부해야 하는 거얌??
대한민국 헌법 제21조
1.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2.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박근혜 정부의 ‘신문법 시행령’은 상위법인 헌법을 위반하는 짓거리다. 위헌이다. 집시법으로 집회, 결사의 자유마저 침해하더니, 이제 아예 언론 출판의 자유까지 막으려고 지랄발광이다. 새누리당과 박근혜에게 민주주의는 과분하다. 북한으로 보내야 하지 않을까. 빨갱이 새뀌들.
최근 새누리당은 주로 이승만 정권 때를 학습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봐도 이건 ‘사사오입’ 패러디다. 민주주의 정권에서 정당을 해산시키는 게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해냈다. 2014년 통진당을 해산시켰다. 그런데 55년 전에 이승만이 먼저 했다. 심지어 진보당 대표인 조봉암은 빨갱이로 몰려 사형당했다. 2011년에 와서야 대법원 전원 합의판결로 조봉암에 대한 무죄가 선고되었다.
새누리당의 머릿 속은 이렇다. 더 이상 전두환, 박정희처럼 독재적인 방식으로 통치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국민들을 착취하고 수탈할 것인가? 아, 이승만이 있었지. 이승만은 국회가 있었음에도 어떻게 지 멋대로 할 수 있었을까? 실로 대단한 독재자구나! 이승만을 국부로 추켜세우고, 우리도 이승만 독재체제를 답습하자!
전두환은 12.12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하나회 장성들과 골방에 모여 <삼국지>를 읽었다고 하는데, 새누리당 지도부들 역시 골방에 모여, 이승만 체제에 대해 스터디를 하는 거겠지. ‘뉴라이트’도 만들고. 빨갱이 새퀴들. ‘민족반역자 처단법 특별 제정’해 새누리당, 친일파, 독재협력세력, 단정세력 전부 다 극형에 처해야 한다.
5월 25일, 좌우합작이 시도한 첫 회합이 열렸다. 우익 쪽에선 김규식, 원세훈, 좌익 쪽에는 여훈형과 황진남, 미국 측에선 버치와 선교사이자 배제학교 교장인 아펜젤러가 참여했다.
6월 3일, 이승만은 전라북도 정읍 유세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이승만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지만, 강준만은 대중의 이승만 지지는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왜 이승만의 단정론을 대중들이 받아들였을까? 선뜻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 당시 여론조사에 따르면 통일을 원하는 국민은 90%가 넘었다. 단독정부라면 통일은 물 건너 가는 건데, 대중들이 이승만을 추종했다?? 이승만의 행태를 보아, 유세장에 우익 청년 단체가 가세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대중이 이승만을 지지했다기 보다는 지지하는 척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이쯤에서 우익 청년단체를 정리해 보자.
우익 청년단체는 46년 봄 대한민주청년동맹(대한민청)으로 통합되었다. 감찰부장은 김두한이었다. 김두한은 <백의사> 조직원이기도 했다. <백의사>는 염동진이 만든 테러조직이다. 영화 <암살>의 이정재가 맡은 염석진은 아마도 염동진을 모델로 했을 것이다. 염동진, 본명 염웅택은 독립운동가였다가 나중에 일제의 밀정 노릇을 했다.
김두한의 ‘활약’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에 걸리면 살아도 청년단에 걸리면 죽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니. 한홍구는 “권력과 주먹패가 본격적으로 야합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지만, 단초는 이미 일제 강점기에 열려 있었다.”고 말했다.
임권택의 영화 <장군의 아들> 때문에 나는 김두한에 대해 오해했다. 김두한은 한갓 양아치였던 것.
영화인들, 제발 양아치들 미화하는 영화 좀 그만 만들어라.
7월 31일 전국학생총연맹(전국학련)이 결성된다. 이승만, 조소앙, 김성수, 정인보 등이 참석하여 축사와 격려사를 남발한다. 전국학련은 이철승이 주도했다.
11월 30일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선우기성의 서북청년회(서청)가 결성된다. “서청! 하면 울던 아기도 울음을 그친다“는 유행어가 나돌았을 정도라고. 혹시나 했더니 좃선일보 주필 선우휘가 선우기성의 일가 아우뻘 되는 관계였다고.
10월 9일 미군정에 의한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이 결성된다. 족청의 단장은 조선광복군 사령관을 지냈던 이범석이 맡았다.
이승만과 김구를 지지했던 우익 청년단체 조직원 수가 총 322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남성 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은 61원이었던데 반해, 청년 테러단원은 하루 300원~500원을 받고 동원되었다. 우익 정치가들은 밥을 미끼로 제 욕심대로 폭력을 행사한 셈.
미군정은 ‘무허가 학교 폐쇄령’을 공포, 민족적이고 진보적 성향의 학교, 학원, 강습회를 폐쇄시켰다. 심지어 문맹퇴치운동까지 금지시켰다. 서울 17개 학교 학생들이 궐기하여 투쟁을 전개하였다. 미군정 발표만으로 4만 명 이상이 참가하였다.
8월 22일 미군정은 국립서울종합대학안(국대안)을 확정 공포하였다. 국대안이란 경성대학과 서울 및 근교 9개 전문학교를 통합한 종합대학교 설립을 뜻한다. 국대안에 대한 반대로 학생 8천 40명 중 총 4천 956명이 제적, 교수와 강사는 429명 중 380명이 교단을 떠났다. 국대안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교육출세론’ 확산이었다고 강준만은 말한다.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갔고, 고급 일자리는 이제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학력과 학벌은 친일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하기도 했다. 학력이 출세의 결정적 도구였다. 오욱환은 이렇게 말했다.
“독립운동가의 자녀들은 일제 식미지 시대에 갖가지 위협과 경제적 어려움의 여파를 극복하지 못하며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지만, 친일 인사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십분 활용하여 자녀들에게 학교 교육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었으며 사회 진출의 발판을 제공하였다. 친일, 부일 인사들은 자녀들에게 높은 학력을 성취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경제적 특권을 후손들에게 대물림하였다. 이러한 재생산 과정의 영향은 해방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미국은 국립대학이 아예 없던 상황에서 왜 하필 한국에서 종합대학교를 설립하려 했던 것일까?
한편 북한은 8월 28일 북조선로당당, 약칭 북로당을 출범시킨다. 위원장엔 김두봉, 부위원장엔 김일성이 선출되었다.
7월 22일 남한에선 민주의원(우)과 민전(좌)을 주축으로 한 좌우합작 회담이 진행되었다.
8월 16일, 인민당 중앙위원회는 여운형이 불참한 가운데 48대 31로 합당 결의를 통과시켰다.
9월 4일 3당의 좌파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남조선로동당, 약칭 남로당을 창당하기로 합의한다.
8월 16일 미군정은 전평(조선노동자전국평의회) 서울 본부 습격, 박헌영, 이강국, 이주하 등의 체포령을 내리고 <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을 폐간시킨다.
9월 13일 서울 용산의 철도노조원 3천 명이 기본급 인상등을 토대로 한 요구안을 미군정에게 제시했다. 이때 명언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인도인들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도 먹을 수 있으니 행복하지 않은가”
- 운수부장 코넬슨.
“시장에는 고기도 있고 다른 잡곡도 있지 않은가. 쌀이 없으면 다른 것이라도 사야지 삶이 없다고 굶는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 농산부장 헐츠.
‘ 쌀이 없으면 고기를 먹어라?’, 아, 위대한 미국인들. 물론 원조는 마리 앙트와네트다.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으라 하세요.” (루소에 따르면 ‘케이크’가 아니라 ‘브리오슈’라고) 우리 박근혜 각하도 빠지지 않는다. “유신이 정말 나쁘다고 생각했다면 그때 얘기를 했어야지,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이런, ㅁ ㅊ ㄴ을 봤나. 그때 얘기했거든. ‘유신 정말 나쁘다’고 말했다가 고문당하고 사법 살인으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걸까. 아우, 뒷골 땡겨. 이런 ㅁ ㅊ ㄴ이 내 나라 대통령이라니!
미군정은 이승만의 정신 상태를 의심해 정신과 의사 미팅을 주선했다는데, 누가 좀 우리 각하에게 유능한 정신과 의사를 소개시켜 줘라. 우리 박근혜 각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단지 제 정신이 아닐 뿐이다.
9월 25일 출판노조 1천 300여명과 대구우편국 종업원 400여명이 파업에 참여한다.
“극소수의 대자본가와 대지주, 모리배, 정상배를 제외하고는 120만 시민에게 돈이 떨어진 지 이미 오래다. 더구나 하루 종일 땀 흘리고 일해도 아내와 자식들은 죽도 못 먹고 굶고 있다. ”
- 경성지방 출판노동조합 총파업투쟁위원회. <시민에게 고함>
9월 26일 전평은 ‘남조선 총파업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본격적 투쟁에 돌입했다.
9월 27일, 서울 중앙우편국 600명, 중앙전화국 1천 명이 파업에 들어갔고, 교통, 체신, 식료,전기, 토건, 조선, 금속, 해운 등 전평 산하 각 산별 노조원이 파업에 합류했다.
미군정은 공산주의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고 비난했다. 9월 26일부터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된다. 9월 30일 미군정은 경찰, 우익 청년 단체를 동원, 전평의 남조선 총파업투쟁위원회를 습격한다.
이 전쟁에서 가장 맹활약을 떨친 건 김두한과 대한민청 단원들이었다. 수도청장 장택상으로부터 김두한은 총 300여정 과 수류탄 세 상자를 넘겨받았다. 김두한은 자신이 전평 간부 8명을 죽였다고 떠벌였다. 장택상이 그랬다지. “김두한 동지! 당신이 나라를 구했소.”
전평에 맞서 미군정과 우익은 3월 10일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을 결성한다. 이른바 대한노총. 이름과 달리 대한노총은 노동자 조직이 아니라, ‘우익 정치집단으로서 일종의 테러리스트 조직’이었다.
10월 1일 대구 항쟁이 터진다. 9월 말 쌀값은 1천 500원으로 불과 1년 전만 해도 140원이었던 것이 무려 10배 이상 올랐다. 당시, 전매청 연초공장에서 담배를 말아 불이는 데 쓰는 풀이 나오면 직공들이 그 풀을 다 먹어치울 정도로 심각한 기아 상태였다고 한다. 역시 미군정은 명언을 잊지 않는 센스.
“조선에는 빵, 고기, 과일 등이 많은데 왜 쌀만 요구하느냐”
10월 1일, 대구 시청 앞에 약 1 천 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모여 쌀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경찰 발포로 시위대 가운데 한 명이 사망했다.
10월 2일, 시위대 숫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시위대는 대구 경찰서를 점령해 무기를 탈취 대부분의 파출소를 점령한다.
“대구 항쟁은 직접적으로는 식량 문제와 더불어 친일 경찰에 대한 불만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친일파 중에서도 친일 경찰이 가장 심한 증오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해방 직후 거의 다 자취를 감추었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의 부름을 받아 전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리면서 횡포를 일삼는 것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후 6시, 미군정은 대구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대구 봉기는 진압되었으나, 11월 상순까지 전국 90개 군 이상에서 항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대구에서는 진압 후에도 김두한의 대한민청을 비롯한 우익 청년단원들이 ‘사설 유치장’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 가두면서 폭력을 행사했다.
12월까지 전국적으로 확대된 10월 항쟁에는 약 300만명이 참여, 경찰 200명 이상이 피살 되었고, 죽은 민간인 수만 천 여명이 넘었다. 체포된 사람은 3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김삼웅은 대구 항쟁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처벌되기는커녕 당당하게 재등장하는 친일파, 토지개혁의 지연, 미소공위 결렬로 통일정부 수립 기대에 대한 좌절, 미군정의 공장 접수, 만연하는 실업난과 물가고, 귀환동포에 대한 무대책 등이 민중들에게 극심한 좌절감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이런 상황에서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일제의 공출이나 다름없는 미군정의 하곡, 추곡에 대한 강제매입과 극심한 식량난이었다. ”
10월 항쟁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타격을 입혔으며 궁극적인 피해자는 농민이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봉기의 결과가 가져온 한국 빈농들의 가장 큰 손실은 그들의 이익을 지켜 주었던 지방 조직들의 붕괴였다.”
미군정에 의해 결성된 좌우합작위원회는 10월 7일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한다. 대지주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한민당의 토지정책은 ‘유상매수, 유상분배’였고, 무상분배를 내세운 좌우합작 제 3항에 대해 한민당은 거세게 반발했다. 김병로, 김약수와 같은 원로급 당원들 270명이 탈당한다.
10월 23일 ‘조미공동위원회’가 구성되었다. 27회에 걸친 회의동안 주된 논의는 ‘경찰 문제’였다. 친일 경찰 조병옥은 이렇게 말했다.
“경무부장인 내가 친일 경찰관들을 많이 등용하였기 때문에 민심이 이탈, 폭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친일은 두 가지로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직업적인 친일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연명책으로 관리가 된 경우입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출신 수사국장 최능진의 생각은 달랐다. 최능진은 국립 경찰을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축출된 부패한 경찰관들을 포함해서, 일본의 훈련을 받은 경찰과 반역자들의 피난처”라고 불렀다.
조병옥은 최능진에게 사표를 요구했고, 최능진은 사직했다.
미군정은 10월 하순 45명의 민선 대의원을 뽑는 선거를 실시한다. 좌파 세력은 참여를 거부했고 한민당원 12명, 이승만 독립촉성국민회원 17명, 김구의 한국독립당원 4명, 무소속 13명, 기타 4명이 당선된다. 무소속은 거의 한민당 계열이었다.
공정한 선거일 리가 없었다. 김규식이 비민주적 선거 절차에 대해 미군정에게 공식적인 서한을 보냈고, 이에 우익인 한민당은 김규식을 강력하게 비난한다.
미군정의 입법의원에 반대한 여운형은 11월 12일 사회노동당(사로당)을 결성한다. 그러나, 북로당이 남로당에 대한 절대 지지를 표명하자, 사로당 간부들이 탈당하고 창당 3개월 만에 사로당은 해체된다.
11월 5일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를 거두자 이승만은 도미 의지를 불태운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다 공화당원이라고. 이승만은 미국 여행의 여비로 1억원 헌상 운동을 벌인다. (이 당시 1억이면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얼말까?) 이 기부금을 내지 않은 가정에는 쌀 배급을 정지하였다니. 국민들은 쌀이 없어 풀을 먹고 있었건만. 자기 여행 가는데 왜 국민들이 돈을 내야 하는 걸까?? 이런 흡혈귀 같은 버러지를 국부라고!
47년, 이승만은 자신의 정적들을 하나하나 암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