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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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은 장면 내각 출범시 장면에게 육군참모총장으로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몸소 실천했던 이종찬을 강격 권고했지만 장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훗날 박정희는 사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선배인 이종찬 장군이 만일 장면 정권의 국방장관으로 계속 앉아 있었더라면, 우리가 과연 5.16 궐기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장면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장도영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앉힌다. 미군 지원설은 포함, 장도영이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이유에 대해 적어도 7가지 설이 난무한다. 장도영 장인 로비설, 정치자금설, 뇌물설, 어머니설, 박정희 로비설, 지연설 등등.

 

614월 초순, 박정희의 예편은 기정 사실화 되었으며, 예편 일자는 5월 하순경으로 돼 있었다. 박정희는 4.19 1주년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 폭동진압작전을 명분으로 내세워 쿠데타를 감행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대규모 시위를 만들어 내야 했다. 김종필은 박종규에게 ‘4. 19 데모 유발 공작총책을 맡긴다.

 

한편 해병대 김동하 역시 해병대 창설 기념일인 415일 쿠데타를 계획하다 박정희와 손을 잡는다. 드디어 4.19일 박정희는 목을 빼고 기다렸으나 오후 내내 시위 소식은 없었다. 저녁 8시 경 드디어 데모가 일어났다. 그러나 창녀들과 포주들 30명이 서울역 앞에서 매춘 합법화를 외치며 데모를 벌였을 뿐이었다.

 

23일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가 창간된다. <민족일보>는 통일문제에 가장 큰 신경을 썼다. 장면 정권의 악랄하고 교활한 탄압을 맹비난하던 <민족일보>는 쿠데타를 지지한다. 그러나, 불과 몇 일만에 박정희에 의해 폐간될 뿐만 아니라 발행인 조용수는 사형 당한다.

 

장면은 총리 재임기간 동안 10여 차례나 쿠데타 정보를 보고 받았었다. 그럴 때마다 장면은 미군이 있는데 어떻게 쿠데타를 하겠소라는 말로 응대했다. 56일에도 민주당 의원 윤병한, CIA 한국지부장 피어드 실바가 쿠데타가 일어날 거라고, 박정희 이름까지 알려주며 경고했지만 장면은 미국이 있는데 설마라는 주기도문만 암송했다.

 

516일 새벽 330분 제 6군단 포병단은 육본을 점령한다. 장면은 330분 경 혜화동 칼멜 수녀원으로 도망친다. 쿠데타 군은 415분 경 KBS를 접수한다. 혁명공약이 장도영의 이름으로 방송된다.

 

오전 10시 육군 중장 이한림은 고민하고 있었다. 휘하에 5개 군단을 거느린 그는 쿠데타를 저지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이한림은 장면에게 출동 명령을 요청하는 밀서를 전달하나, 장면의 행방을 아무도 몰랐다.

 

11시경, 매그루더와 그린이 윤보선을 방문해, 무력진압에 동의해 달라고 요청하나 윤보선은 거절한다. 그린은 윤보선에게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이라는 경고를 남기고 돌아간다.

 

330, 장면의 운전기사를 추궁했으나 운전기사는 끝까지 모르다고 부인한다.

6시 경, 장면의 경호관 조인호에게 장면의 행방을 추궁하나 역시나 모른다고 부인한다. 이영신에 따르면

 

이 시간까지는 아직도 희망은 있었다. 그러므로 조인호가 장면의 은신처를 노영균에게 밝히기만 했어도 역사의 궤도를 제자리로 수정해 놓을 충분한 시간적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조인호는 모른다고 딱 잡아뗐던 것이다. 곤두박질하려는 역사를 바로잡을 절호의 기회가 조인호의 고지식함으로 해서 또 다시 그 기회가 잃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

 

장면은 도망가고 윤보선은 쿠데타 세력에 계속 협력했다. 미국은 과연 쿠데타를 저지하려 했던 것일까. 이완범은 이렇게 말했다.

 

장면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쿠데타를 진압할 수 없었다는 미국의 사후 변명은 사실과 다른 책임회피였음이 판명된다. 또한 윤보선이 쿠데타를 지지해서 할 수 없었다는 미국의 사후 변명도 자신들의 고차원적 정치 개입을 호도하고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정치지도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책임회피였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장면에 대한 대안을 일찍부터 고려하고 있었고 박정희가 거사하자 이 대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면서 장면에 대한 고려를 끊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일 오후 7시 육군 첩보부대 중령 최영택이 쿠데타 군의 사기를 위해 혁명군 완장을 차게 해주자고 제안한다. 완장을 찬 군인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검문 태도가 건방지다고 신문 기자에게까지 집단 구타를 가한다. 완장시대의 개막이었다.

 

육사 교장 강영훈은 쿠데타에 반대한다. 반면 이상훈과 전두환 등 육사 11기 동기들은 쿠데타를 지지하는 육사생도들의 가두행진을 주도한다.

 

18일 낮 1230분 경, 잠적 55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장면은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다.

 

20일 전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는 군사정권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통해 가장 훌륭한 정부라고 찬양한다. “한국에는 민주정치가 시기상조라는 사족을 달아.



 

5. 16 쿠데타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품었다. 한국군의 0.5% 정도 밖에 안 되는 병력, 게다가 민주당 정권 수뇌부, 총리, 육군 참모총장, 유엔군사령관 까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가장 그럴듯한 이론은 미국의 배후조정설이다. 이미 미국은 미 정보기관 대령인 크레페가 장면 정권을 전복하고 장도영 집권을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었다. 김종필의 중정에 의해 밝혀져 미국 공작원들이 추방당한 일명 크래퍼 사건5.16 이전에 있었다.

 

당시 CIA 국장이었던 앨렌 덜레스는 영국 BBC에 출연 내가 재직 중에 CIA의 대외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이 혁명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주간지는 이렇게 보도했다.

 

“CIA는 약하고 무능한 장면 내각을 무너뜨리고 강력한 반공정부로 교체하기 위하여 군부에게 쿠데타를 감행하도록 교사하였고, 그 후 그런 전략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미 국무성을 배후에서 조종하여.....장면 지지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3세계에서 쿠데타 사주는 미국의 상습적인 수법이었다. 과연 한국이라고 예외였을까.

 

5.16 쿠데타가 벌어지자 북한은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알고서 환호했다. 쿠데타 이후 미국은 박정희의 사상을 캐고 다녔다. 미국 측 눈에 들기 위해 기회주의자 박정희는 보도연맹 관련자, 진보정당 관련자, 좌파 지식인, 사회단체 지도자, 노조 지도자 등 4천 명에 이르는 좌익활동 경력자들을 체포, 수감한다.

 

미국에게 자신이 더 이상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려는 박정희의 강박은 계속된다. 심지어 빨갱이 아닌 사람도 빨갱이로 몰아 때려잡았다. 억울한 죽음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는 빨갱이로 몰려 사형 당했다. 박정희는 심지어 민족일보의 자산은 물론 조용수 가족의 전 재산을 몰수한다. 재산몰수는 박정희의 특기일까 취미일까?

 

박정희는 사무라이 정신이 골수에 박힌 친일파여서 반미기질이 강했지만 쿠데타 성공 이후에는 미국에 점점 더 비굴하게 굴었다. 미국에 비굴하면 비굴할수록 박정희는 자신이 만들어낸 빨갱이들에겐 더욱 더 가혹하게 굴었다. 한 전향자의 좌익 콤플렉스로 인해 무고한 국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숱한 피눈물을 흘려야 했으니

 

 

군사정권은 민심의 호응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 수법을 동원한다. 21일 오후, 군사 정권은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를 비롯하여 200여 명의 깡패들에게 깡패 생활 청산하고 바른 생활 하겠읍니다와 같은 플랭카드를 들고 시내 중심가를 행진하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깡패들뿐만 아니라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인간 개조 운동을 펼친다. 박정희가 꿈꾼 이상적 인간은 군사적 인간이었다. 교원들에게 국민복을 입히고,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머리를 삭발해야 했다. 고급 요정도 부패와 사치의 온상으로 지목돼 탄압당했으나, 고작 1년도 못 가서 요정 앞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연쇄강간범 박정희가 요정을 탄압하다니?



 

빨갱이로 몰려 사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말로를 의식해서였을까? 5. 16 쿠데타 이후 신문들은 알아서 기었다. 쿠데타 세력에 대학교수들은 적극 협조한다. 박정희는 또한 문인들과 자주 어울린다. 김팔봉, 장덕조, 이은상, 모윤숙(안 끼는데가 없다), 최정희, 박종화, 구상 등. 장준하 역시 쿠데타를 지지했다. <사상계>7월호에 가서야 쿠데타를 비판하는 함석헌의 글을 실었다.



 

610, 중앙정보부가 창설된다. ‘한국 위의 한국온갖 조작질과 부정부패의 산실. 쿠데타가 완수되었으니, 남은 일은 토사구팽. 장도영은 반혁명 사건으로 구속된다.

 

517, 쿠데타 다음 날 주요 기업인 17명이 체포되었다. 이병철은 일본으로 도피중이었다 26일 귀국, 다음날 박정희와 회동을 갖는다. 감옥에서 풀려난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717일 경제재건촉진회가 조직, 이후 68년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으로 명칭을 바꾼다.

 

군사정권은 말로는 부정축재 처벌이었지만 실제로는 부정축재 이용으로 돌아섰을뿐만 아니라 부정부패의 수렁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간다.

 

박정희는 미국에 가기 전 동경에 들러 일본 수상 이케다 하야토와 회담을 갖는다. 박정희는 만주군관 시절 교장 나구모 쥬이치를 초청해 달라고 요청해, 공식 만찬 자리에서 나구모 쥬이치에게 큰 절을 올리고 술을 따른다.

 

케네디를 만난 박정희는 미국에게 베트남 파병을 제의한다.

 

61년 봄에 이범선 원작,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이 상영된다. 쿠데타 후 군사정권은 <오발탄>을 상영중지 시킨다. 61년 영화계 가장 큰 화제는 김지미와 최은희의 대결이었다. 영화감독 홍성기와 신상옥의 대결이기도 했다. 홍성기는 아내인 톱스타 김지미를 춘향으로 하여 컬러영화 <춘향전>을 만들었고, 신상옥 역시 아내인 톱스타 최은희를 춘향으로 내세워 <성춘향>만들어 설날 맞대결을 벌였다. 신상옥과 최은희의 <성춘향>의 완승이었다. <성춘향>75일간 36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60년대는 가히 신상옥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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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4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르그 2016-08-0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훌륭한 요약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읽히고 싶은 글입니다
그런 시절입니다

시이소오 2016-08-04 10:11   좋아요 0 | URL
ㅋ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6-08-0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범죄와의 전쟁`은 정통성이 없는 정부의 민심회유 정책 1번 매뉴얼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8-04 12:24   좋아요 1 | URL
겨울 호랑이님, 제가 감사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