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을 꿰뚫는 세계사 독해 - 복잡한 현대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역사
사토 마사루 지음, 신정원 옮김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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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사에도 무지하다. (도대체 아는 게 없다) 덜컥 집어든 책이었는데, 세계사 책이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채사장이 세계사 책을 썼다면 이렇지 않았을까? 간결하고 명쾌할뿐더러 단번에 핵심을 푹 찌른다.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 현대를 인식하기 위해서다. 사토 마사루는 세계사를 아날로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날로지란 유비또는 유추로 해석된다.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의 흐름을 아날로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앞으로 전개될 국제정세 역시 내다 볼 수 있다. 사토 마사루가 제시하는 아날로지적 사고 훈련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전쟁을 저지하기 위해서다. 사토 마사루가 파악한 아날로지적 관점으로 보자면 곧 세계 전쟁이 터질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유발 하라리 등 전 세계 석학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합창이다. 세계 전쟁이 임박해 있다고.

 

나치에 의해 유대인 600만 명이 학살되길 원했던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6.25 전쟁 전후에 이승만, 미군정에 의한 백 만명의 민간인 학살을 원했던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학살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런 유아적인 발상을 갖고 살아도 용납되지 않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은 일어납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또 앞으로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할 작정입니까? 어차피 힘 있는 자들의 세상인데 미련하게 사서 고생하느니 속 편하게 안주하는 얼뜨기가 되겠습니까?”

 

- 사사키 아타루,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 P138.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듯 일어나서 안 될 일은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을 거부하는 태도가 과연 옳은 일일까? 임박한 전쟁의 위협을, 단지 SF소설로 치부하는 이들. 사사키 아타루의 표현을 빌리자면 얼간이.

 

그렇다면 세계전쟁이 임박해 있다는 사토 마사루의 근거는 도대체 뭘까? 사토 마사루는 네 가지 이유를 꼽는다. 신제국주의의 발흥, 자본주의의 위기, 되살아나는 내셔널리즘, 종교 분쟁.

 

사토 마사루는 현재를 신제국주의의 시기로 파악한다. 사토 마사루에 따르면, 2008년 이후 본격적인 신제국주의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이후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었다. 반면에 이를 틈타 러시아와 중국이 부상한다. 2008년은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 해일뿐 만 아니라 러시아-조지아 전쟁이 발발한 해이기도 하다. 이 해를 기점으로 피너클 제도(센카쿠 열도), 스프래틀리 제도, 파라셀 제도를 둘러싼 중국의 영유권 주장, 우크라이나 내전,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 등의 사건이 벌어졌다.

 

(스프래틀리 제도의 경우, 중국, 타이완, 말레이시아, 배트남, 브루나이 필리핀이, 파라셀 제도의 경우 중국, 타이완, 배트남이 각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0162월 미국은 중국이 남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하지 말 것을 경고한 바 있다.)

 

사토 마사루에 따르면, 패권국가의 약화가 제국주의를 불러온다. 작금의 국제 정세는 영국이 약해지자 독일과 미국이 대두, 구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자본주의의 위기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공황을 불러온다. 실제로 1873년 대불황이 구미를 덮쳤다. 불황은 1896년까지 이어졌다. 대불황을 계기로 구미 열강에 제국주의가 급속히 형성되어갔다. 공황을 피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당연히 전쟁이었다. 현재 역시 전 세계적인 공황 상태다. 완곡히 표현하면 저성장. 두 번째 해결책은 보호주의였다. 사토 마사루에 따르면, 현재 모든 강대국이 입으로만 자유무역이지 실제로는 보호주의를 도모하고 있다고 본다.

 

내셔널리즘의 부활


2014년 우크라이나 내전이 발발했다. 우크라이나 서부와 동부, 남부는 역사가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 폴란드에 인접한 우크라이나 서부는 18세기만 해도 폴란드에 속했다. 종교도 우니아트교(동방귀일교회)를 믿는다. 반면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는 러시아에 인접해 있어, 종교 역시 러시아정교를 믿는다. 서부는 독립을 주장하고 EU에 편입되길 원하고, 반면 동부와 남부는 러시아에 통합되기를 바란다.

 

거의 북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경우와 판박이다.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찬반 주민투표가 있었다. 투표 결과 스코틀랜드는 계속 잉글랜드와 통합을 유지하게 된다. 스코틀랜드 문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다.

 

종교 분쟁

 

 

이슬람 수니파 무장집단인 IS가 문제다. 이슬람 과격파는 대부분 수니파인 한발리파에 속한다고 한다. 이 한발리파 가운데 와하브파가 있다. 이 와하브파와 결합된 국가가 사우디아라비아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마그레브 알카에다, 체첸의 테러 단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등 이슬람 과격파는 모두 와하브파 계통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지배하는 수니파 원리주의 과격파인 하마스의 사상 역시 IS와 탈레반과 같다.

 

EU는 단순히 유럽경제 연합체라고만 알고 있었건만. EU에는 코퍼스 크리스티아눔이라는 개념이 있다. 번역하자면 기독교 공동체. 그래서 러시아나 터키의 가입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자 그럼 이 책을 기반으로 최근에 벌어진 국제 정세를 정리해 볼까? 세계 전쟁의 기미는 완화되었는가

불행하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1. 브렉시티

 

영국이 EU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 브렉시티 건은 신제국주의의 부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민자 문제에 따른 극우주의, 자본주의의 위기 등등.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내셔널리즘의 부활이다. 영국을 신호탄으로 여러 나라들이 독일 중심의 EU를 탈퇴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영국만 해도 골치 아프다. 당장 북아일랜드가 독립을 원하고 있고, 스코틀랜드 역시 독립에 대한 찬반 재투표를 요구하고 있다. 영국이 완전히 쪼개지기 일보 직전이다. 왜 이것이 문제일까?

 

영국의 경제학자 J.A 홉슨은 그의 저서 <제국주의론>에서 일정한 조건 하에서라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홉슨은 제국주의국가 사이의 세력 균형을 지향한다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앵글로색슨연합, 범게르만연합, 범슬라브연합, 범라틴연합과 같이 제국주의 국가 연합이 형성된다면 각각의 세력의 균형에 의해 전쟁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 EU는 경제적으로 보자면 독일 제국주의였다. 이 연합이 깨졌다. 종교적으로 보자면 기독교 연합이 깨진 것이다. 반면에 이슬람 연합은 공고하다. IS 탈레반 하마스 등등.

 

2. 남중국해 위기

 

스프래틀리 제도, 파라셀 제도, 이른바 남중국해에서 중국은 영유권을 주장해왔다. 올해 712일 네덜란드 헤이그 상설재판소는 필리핀의 손을 들어줬다. 중국은 닭 쫓던 개 된 것? 전혀 그렇지 않다. 중국은 판결에 승복하길 거부했다. 남중국해 상공으론 전투기를 띄우고 해상에는 핵잠수함을 띄웠다. 심지어 주권을 침해했다며 필리핀 어선의 조업을 막았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싸움이 점입가경이다.

 

3. 일본, 전쟁국가로

 

710일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했다. 일본은 알려진 대로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다. 평화헌법 9조 때문인데, 아베는 이 평화헌법 9를 뜯어 고치려 발악을 해왔다. 불행히도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했기에, 이제 곧 개헌에 들어갈 것이고, 개헌이 된다면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미국 입장에서야 러시아와 중국이 하도 설치니, 사냥개 일본의 목줄을 풀어 놓을 수밖에. 일본은 곧장 중국과 러시아를 향해 달려들까? 그보다 약한 북한이 있는데??

 

4. 한국의 사드 배치

 

여러 군사전문가와 지식인들이 누누이 얘기해왔지만 사드 배치는 북한과 눈곱만큼도 관련이 없다. 국민을 바보로 아나. 북한 때문에 사드를 놓아야 한다는 사람을 뭐라 부른다? 얼간이라고 부른다. 설령 북한이 한국을 향해 미사일을 쏘더라도 사드로는 막을 수가 없다고. 이 멍청한 것들아!! 사드는 100%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조치다. 아무리 미국의 속국이라지만 외교를 이따위로 하나? 사드배치는 한국의 국익에 눈곱만큼도 도움이 안 된다. 도움은커녕 전쟁의 위험성만 높이는 짓거리다. 이승만은 허구헌날 북진통일론을 부르짖었다. 북한군 쳐들어오자 어떻게 했더라? 지 혼자 도망가고, 다리 폭파해 수 만명을 폭살시켰다.


 

한국인들이야말로 최근의 국제 정세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제 전쟁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사드 배치가 실현된다면 한반도에서 강대국의 대리전이 벌어질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1950년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는 폐허가 될 지도 모른다.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 핵폭탄 40개를 심어논 걸로 알려져 있고, 트루먼, 아이젠하워, 맥아더는 한반도에서 핵폭탄을 터트릴 것을 고려했었다. 만일 이번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면 굳이 핵폭탄을 쓰지 않아도 핵은 누출될 것이다. 1950년 대에 없었던 핵발전소가 수도 없이 깔려있기 때문에.

 

나는 새누리당이 내년 대선을 포기한 것 같아 섬찟하다. 도대체 뭘 믿고? 사드 배치 시기가 묘하다. 만일 새누리당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면?? 625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이승만은 전쟁 후에 정적들을 해치우고 오히려 체제를 더욱 더 공고히했다. 그래서인가?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이승만을 국부로 떠드는 건?? .

 

남북 간의 화해는 동아시아 평화에 굉장히 중요한 요인이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을 폐쇄하면서 오히려 남북 간의 위기를 조장하기 바쁘다.


한국의 사드 배치는 무조건 막아야 한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막아야한다.


세계 전쟁이 여전히 딴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면.....

이 책을 읽으시라.

 

그래서 저는 다음에 일어날 세계 전쟁을 막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일어날 전쟁은 자본과 국가가 생존을 위해 일으키는 것이니까 그것을 막는 것은 곧 자본과 국가의 연명을 저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평화 운동과 혁명 운동은 별개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칸트가 말하는 영구평화와 마찬가지로 국가 간의 적대성이 없어진 상태, 즉 국가가 지양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세계동시혁명입니다.


미국이 물러서지 않으면 동아시아의 재구축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뒤집어 보면 미국은 그 점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중국과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반미 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는 미국을 아시아에서 내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동아시아에서 미국 이외에 전쟁의 위기를 초래하는 요소는 없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상태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남북의 대립을 해소하는 것은 동아시아 전체로 보았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 가라타니 고진, <가능성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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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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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톱질전쟁으로 불렸다. 톱질하듯 왔다갔다하면서 점령과 후퇴를 반복했다는 뜻이다. 전선이 왔다갔다 하면서 죽어나는 건 민간인들이었다.

 

11일 중국군 6개 군단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남하하기 시작한다. 유엔군의 견벽청야작전이 시작된다. 유엔군은 후퇴하면서 서울의 웬만한 곳은 모두 다 불을 질렀다.

 

14일 공산군이 서울에 입성했다. 당시 서울에는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노인들 뿐이었다. 치안 공백을 틈타 또 다시 학살이 벌어졌다. 1월 강화도에서 최소 200여명의 민간인이 우익 청년단체에 의해 학살당한다. 부산에서의 피난민의 삶도 아비규환이었다.

 

맥아더는 원자탄 26개를 폭파할 계획을 워싱턴 합참에 요청하지만 트루먼은 거부한다. 워커의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유엔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선다. 리지웨이의 몰살작전이 시작된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중국군 병사들이 죽어나간다.


 

이승만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해, 국민방위군 50만 명을 모집한다.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할 것인가? 답은 걸어서였다. 징집당한 국민방위군은 군복도 없었고, 제대로 된 식사조차 제공받지 못했다. 행군이 계속되면서 동사, 아사, 병사, 낙오자들이 속출했다. 국민방위군의 모습을 본 리영희는 이렇게 증언한다.

 

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6.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이승만 정권과 우익 단체들은 국민 방위군 예산 55억을 빼돌렸다.

 

430국민방위군 설치법 및 비상시 향토방위령의 폐지에 관한 법률안이 상정되어 통과되었다. ‘해골의 행렬을 시켜놓고 이제 귀환하라는 것이었다.

 

7월 김윤근, 윤익헌, 강석한, 박창원, 박기환 등 5명이 사형을 당했다. 국민방위군 예산이 국회 내 이승만 지지세력 및 정부 고위층, 군부 내 간부 등에 정치자금으로 유출되거나 뇌물로 상납되었다는 주장들이 제기되었지만 사건 당사자들이 너무 빨리 사형당하는 바람에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한국 병사는 어머니를 부르는 대신 하고 죽었다고 한다. 가진자들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고 빽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전쟁터로 나가 총알받이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함평에서 524명을 학살한 11사단의 학살극은 2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또 다시 발생했다. 11사단 9연대 3대대는 거창에서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다. 3대대장 소령 한동석은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 1천여 명을 신원국민학교로 소집했다. 성인 남자들은 이미 피신을 한 뒤라, 대개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들 뿐이었다. 11사단은 주민들을 박산 골짜기로 끌고 가 기관총으로 집단 학살 후, 휘발유를 뿌려 불태우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켰다.

 

거창 사건은 <뉴욕 타임스> 보도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이승만은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해임시키지만 이후 주일 한국대표로 임명한다. 군법회의는 연대장 오익경에게 무기징역, 대대장 한동석에게 징역 10, 김종원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한다. 그러나 다음해 이들은 사면받고 복권된다.

 

2004년 한나라당이 발의한 거창 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괘했으나 정부의 거부권 행사로 보상의 길이 막힌다. 정부의 거부 이유는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다른 한국 전쟁 민간인 피해자와의 형평성 문제와 보수 단체의 반발 때문이었다.

 

314일 국군과 미군이 공동묘지로 변한 서울을 재탈환한다. 이승만과 맥아더는 연일 북진을 주장하였다. 트루먼은 411일 맥아더를 해임시킨다.

 

이승만과 한국의 많은 반공주의자들은 맥아더가 핵폭탄을 투하하지 않은 걸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홍구에 따르면, 맥아더의 만주 폭격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즉각 제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일이었다.

 

소련과 미국, 중국, 북한의 이해에 따라 710일 정전 협상이 시작된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던 시기에 미군은 북한을 폭격하기 바빴고, 북한군 잔류 세력을 빨치산 투쟁으로 바빴다. 미군의 쥐잡기 작전이 시작된다. ‘쥐잡기 작전이후에도 빨치산 토벌은 계속된다.

 

53918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된다. 이현상은 빨치산 투쟁을 하긴 했지만 남북 그 어느쪽에도 속하지 못한 중간파적인 성격이 농후했다.

 

마지막 여자 빨치산으로 알려진 지리산의 전설정순덕이 입산 12년 만인 6311월에 체포된다.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한다. 자유당 창당의 대업은 이범석이 맡았다. 1217일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이 탄생한다. 그러나 1223일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또 다른 자유당이 탄생한다.

 

전쟁 중에도 학교는 열렸다. 대학 강의도 임시대학에서 계속 되었다. 대학생의 경우 징집을 피할 수 있었다. 과연 이 당시 대학생이라면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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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7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17 12:45   좋아요 2 | URL
심지어 가진자들 자식들은 전쟁전ㅇㅔ 이미 유학을 떠난걸로 보아 한국전쟁은 애초에 기획된걸로 보입니다.

이래저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만 죽어난거죠

yureka01 2016-07-17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기의 시대죠..미치광이의 시대. 관심법으로 죽이던 시대..

시이소오 2016-07-17 12:56   좋아요 2 | URL
미친 나라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네요.
국익을 위해 사드를 놓는다? 정신병자죠.이게 인간일까요. 새누리당과 박그네는 전쟁 일으키려고 작정한듯 보입니다.

겨울호랑이 2016-07-17 12: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창사건 특별조치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 정부는 시기적으로 노무현 정부인 것 같네요.. 다른 민간인 피해자와의 형평성을 고려했다면 이를 받아들이면서 포괄적인 논의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이소오 2016-07-17 12:59   좋아요 3 | URL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 중 최초로 43위령제에도 참석하고 국가 차원의 사과말씀도 하셨는데 왜 그런것일까요? 팩트체크를 해봐야겠네요^^

겨울호랑이 2016-07-17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공부를 해봐야 겠네요^^ 시이소오님 덕분에 개인적인 과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ㅋ 학교 때 과제는 부담이었는데, 졸업 후 과제는 흥미롭네요^^

시이소오 2016-07-17 13:08   좋아요 2 | URL
거창도희생자 위문공원이조성된걸로 보아 국가가 책임을 인정하긴 했는데요. ^^;

겨울호랑이 2016-07-17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당시 한겨레 신문에는 이 법 통과 시 유사사례에 대한 예상 총액이 당시 돈으로 25조라고 하네요. 예산 문제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아요^^

시이소오 2016-07-17 13:16   좋아요 2 | URL
허걱 25조라니, 이승만 국부라는 놈들한테 돈 받아내면 되겠네요.

겨울호랑이 2016-07-17 1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문학적인 배상액도 무시못하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고한 국민의 피해에 대한 엄격한 배상기준의 확립이 선결되어야 할 것 같아요. 차후 이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으려면요..

시이소오 2016-07-17 13:38   좋아요 2 | URL
이승만이 학살한 국민만 백만명, 거기다 625때 억울하게 돌아가신분들까지 합하면 족히 이백만명이 넘겠네요. 액수가 많다고 배상못한다는건 말이 안되죠. 박정희가 국가배상법을 막아놨어요. 이후 군대에서 죽으면 개값된다고 했죠.
이거 빨리 뜯어고쳐야한다고 봅니다.

겨울호랑이 2016-07-17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시이소오님 말씀처럼 국가배상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배상액이 무서워라도 허튼 짓을 못하겠지요. 한 걸음 더 나가 제조업 등 기업 위주의 정책과 법률에 대한 검토도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국민과 소비자를 위한 포괄적인 장책 입안이 새시대로 가는 출발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시이소오 2016-07-17 13:53   좋아요 2 | URL
자칭 보수라는 것들이 정권을 잡은 이후 나라가 실로 개판돼버렸네요.

겨울호랑이님 말씀처럼 하나하나 고쳐 새시대를 만들어야겠습니다^^

기억의집 2016-07-17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대단하시네요. 저는 이 책 읽으면 분노로 미쳐버릴 것 같은데...정리를 너무 잘하세요. 한 눈에 들어오네요. 이 페이퍼 읽으니 지난 번에 제가 본 영화는 이 시대의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드문드문 나는 게 평지에 죽은 사람들이 엄청 났었거든요. 한편으로 제 기억이 맞는지 의문스러운 게 독재 시대때 그런 영화를 심의 상영 허가 했을까 싶기도 하고. 이 글 읽으면서 지식인들이 얼마나 교활한지...제가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읽고 있는데 정말 말장난 하나 싶을 정도입니다. 박유하나 일본 정부나.... 있는 자식들은 군대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네요.

시이소오 2016-07-17 14:02   좋아요 0 | URL
ㅋ ㅋ 기억의 집님도 열정적이시네요. 이승만 찢어죽이고, 이승만을 국부라 하는것들, 어찌나 찢어죽이고 싶던지요.

모르긴 몰라도 그 영화는 아마 민간인 학살을 인민군으로 묘사하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있었으니까요. 김일성이나 이승민이나 찢어죽일것들이 우상화로 지가 왕인줄알고 살았다는게 역사의 비극이네요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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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이전, 이승만 정권은 약 1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제주 4. 3 사건과 여순사건 외에도 수많은 학살극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491224경북 문경 산북명 석봉리 석달마을, 육군 제 2사단 25연대 3대대 7중대, 2,3 소대 병사들이 주민들 86명을 학살한다. 86명 중 여자가 41, 65세 이상 노인이 10, 12살 까지의 아이가 26명이었다. 돌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5명이나 있었다.

 

미군과 이승만은 왜 이렇게 힘없고 연약한 국민들을 학살해야만 했을까.


 

625이전, 이승만과 정부의 허풍과 거짓말로 인해 공갈 때리다는 새로운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5/30 총선은 민국당과 이승만의 참패였다.

 

6.25 직전 남한은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무방비 상태를 넘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남침 유도설을 낳았다.

 

북학의 남침 위협 정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6. 25 직전인 610일 부로 일선 사단장들의 대규모 인사 이동을 단행했다. 북한 남침 위협을 심각하게 판단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624, 육본 정보국이 북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또한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625일 새벽 440, 북한은 남침을 개시한다.

 

이승만은 627일 아무도 몰래 새벽 2시에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서울을 빠져 나간다. 9시에 대전방송국에서 서울중앙방송국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이승만 담화를 전화로 받아 방송하라는 것이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 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

 

이 방송은 밤 10시부터 11시까지 서너 차례 녹음으로 방송되었다.



 

이승만과 수뇌부는 28일 새벽 230분경 한강다리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500명에서 4천 명의 사람들이 다리 위에서 폭사했다. 왜 이승만은 조기에 한강 다리를 폭파해 인명을 살상한 것은 물론이고 병력과 물자 수송에도 막대한 피해를 끼친 걸까.



 

628일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다.

 

이승만은 수원에서 대전, 대전에서 대구, 대구에서 다시 대전으로, 대전에서 이리, 이리에서 목포, 목포에서 부산으로 도망친다. 북진통일론은 부르짖던 이승만은 왜 이리 도망다니기에 급급했을까.

 

이승만은 714일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맡긴다. 북한군은 720일 대전, 전주 23일 광주, 26~27일 여수를 점령 하는 등 파죽지세로 남한을 장악해 나간다.

 

716일 미군은 대형 폭격기 b 29 50대 이상을 동원해 1시간 가까이 서울 용산 일대를 폭격한다. 미군 폭격에 의해 사망한 서울 시민은 4250, 부상자는 2413명이었다. 8월 중순을 넘기며 서울의 식량난은 절정에 달한다.

 

  

6.25가 터지자 제일 먼저 벌어진 뿌리뽑고 씨 말리기는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벌어진다. 507~8월 수원 이남 전역에서 자행된 학살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적어도 최소 20만 명이상이 학살 되었다.

 

626일부터 전주형무소 수감자 13400여 명을 포함 전주 지역에서 남한 경찰, 헌병, 방첩대에 의해4500명이 학살 당한다.

 

속칭 나주부대함정 학살사건도 있었다. 나주 부대란 나주경찰서 경찰관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100여 명 규모의 임시부대였다. 이들은 강진, 해남, 완도, 진도 등지로 후퇴하면서 이상한 짓거리를 저지른다. “우리는 인민군이다라고 알린 후, 인민군으로 위장,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사살한다.

 

726, 미군의 명령에 따라 500여 명의 피난민이 인근 마을 노근리에 당도한다.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철로위를 걷던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철로 밑 굴다리로 숨었으나, 미군의 총질은 계속되었다. 726일부터 34일간 미군의 인간 사냥으로 300여 명이 죽어간 노근리 사건이다.


 

노근리 사건은 999월 미국 AP 통신이 보도해 세계적 이슈가 되고 나서야 한국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미군은 왜 피난민을 향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걸까? 미 제25사단 일지에는 사단장 킨 장군이 전투 지역에 있는 민간인들을 적대시하고 사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적혀 있었다. 노근리 사건 이후에도 피난민에 대한 무차별 사격은 계속 일어났다.

 

도대체 미국은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 강준만은 미국의 인종 차별 주의를 원인으로 꼽는다. 단지 그것 때문에? 한 미군 병사는 노근리 사건이 터진 지 49년 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아직도 바람 부는 시절이 되면 어린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승만 정부는 629일 이후 학도의용군을 모집한다. 15~17살 사이의 소년병도 있었다. 3천 명이 참전하여 2400명이 전사했다. 북한은 남한 지역에서 소년들을 끌고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전선에 투입했다. 남한 지역 출신 의용군과 국군의 소년 지원병이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

 

914일 밤 10,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다.


928일 서울이 수복된다. 피난을 갔던 도강파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했고, 정부 말을 믿고 서울에 남은 잔류파는 빨갱이, 불순분자, 부역자라는 의심을 받는다.

 

국회는 이승만에게 사과문을 발표하라고 의결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거절한다.


내가 국민 앞에 왜 사과를 해. 사과할 테면 당신들이나 해요.” 사과는 고사하고 이승만은 잔류파를 빨갱이로 몰아 부역자 재판으로 학살한다. 사학자 김성칠은 정부의 적반하장에 대해 이렇게 토로한다.

 

그리고 어리석고도 멍청한 많은 시민은 정부의 말만 믿고 직장을 혹은 가정을 사수하다 갑자기 적군을 맞이하여 90일 이상 굶주리고 천대받고 밤낮없이 생명의 위협에 떨다가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눈물과 감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입성을 맞이하니 뜻밖에 많은 남하한 애국자들의 호령이 추상 같아서 정부를 따라 남하한 우리들만이 애국자이고 함몰 지구에 그대로 남아있는 너희들은 모두가 불순분자이다하여 곤박이 자심하니 고금 천하에 이런 억울한 노릇이 또 있을 것인가.”

 

북한 인민군 역시도 전쟁 중 학살을 자행한다. 서울 미아리 고개는 9.28 수복 때 북으로 쫓겨가던 인민군이 수많은 사람들을 북으로 끌고 가면서 뒤처진 사람들을 지금의 성신여대 뒷산에서 학살해 한 많은 미아리 고개가 되었다. 학살은 악순환의 게임이었다. 경기도 고양 금정굴 민간인 학살 사건도 그러한 예이다. 좌익 세력이 우익 단체 단원 50여 명을 처형했다. 9.28 수복 후 국군과 치안대의 보복이 이루어졌다. 이때의 희생자가 1천여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승만은 930일 국군에게 38선 돌파 명령을 내린다. 유엔군은 묵인한다. 중국 외상 주은래는 중국 인민은 이웃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침략을 받을 경우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102일 맥아더는 워커에게 38선 돌파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는 북한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지만 김일성은 거절한다.

 

1015일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만주 폭격을 요구하지만 트루먼은 3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염려해 반대한다.

 

1019일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한다. 국군과 우익 청년단체들의 약탈이 시작된다.

 

남한에서 시작된 학살극은 북한에서 또 다시 재현된다. 북한 정부는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1800명에 달하는 우파를 학살한다. 북한은 미국과 국군에 의해 17만 명의 북한 주민이 학살당했다고 발표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학살은 신천 학살 사건이다. 미군은 1017일부터 127일 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에 머물면서 군 인구의 4분의 135천 여명을 학살한다. ‘신천 학살 사건은 피카소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을 통해 유명해졌다.






 

황석영의 <손님>에 의하면, 신천학살사건은 좌우대립에 의한 학살이었다. 20024월 방영된 MBC<이제는 말할 수 있다 망각의 전쟁편>을 제작한 PD 조문묵에 따르면, 신천학살 사건은 주로 반공청년단에 의해 저질러졌다.

 

1950년 가을, 미군 폭격기 B 29 80대 이상이 연사흘 신의주를 폭격했다. 신의주 20만 인구의 3분의 2의 사람이 타 죽고, 도시의 80%가 잿더미가 되었다. 전쟁초기 미 극동군 공군사령관을 지낸 에멋 오도넬은 511월 중순 미 상원 청문회에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한국에는 더 이상의 폭격 목표가 없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전 한반도는 단지 끔찍한 잿더미일 뿐이다.”

 

중국은 108일 참전을 결정한다. 이로써 전쟁은 미중전쟁으로 전환하게 된다.

 

중국군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자 소련이 11월에 참전하다. 중국군의 인해전술은 오해였다. 중국군은 신출귀몰 식의 유격 전술을 썼다. 중국군의 반격으로 유엔군은 121일부터 후퇴한다. 중국군은 126일 평양을 회복한다.

 

1130일 트루먼은 기자회견에서 원자탄 사용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도쿄 맥아더 사령부 정보처 특수계획과정이었던 필립 코르소의 증언에 따르면, 한반도에는 이때 이미 40개의 원자탄이 배치돼 있었다. 원자탄 사용 발언에 놀란 영국 수상 애틀리가 미국으로 건너가 트루먼과 회담을 가졌다.

 

전쟁 중 끔찍한 민간인 학살은 도처에서 행해졌다. 1117일 공비 토벌 작전을 하던 국군은 전북 남원 강석리 마을을 습격, 마을 주민 90명을 학살한다. 12월 초순에는 전남 함평 지역에서 국군에 의한 대량 학살이 자행된다. 11사단 20 연대 사병 두 명이 빨치산 습격으로 전사하자, 5중대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보복을 했다.

 

군인들은 126일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마을에서 20여 명을 사살, 동촌마을에서 30 여명 사살한다. 127일에는 월야면 월악리 내동, 송계, 동산 등 7개 마을을 덮친다. 군인들은 아이들을 시켜 집집마다 불을 지르게 하고 주민 700여명을 동산 마을의 남산뫼에 집결시킨다.


 

11사단 5중대 군인들은 월야면 외치리 외치마을, 나산면 이문리 사정마을,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 쌍구룡 , 나사면 우치리 소재마을 등,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524명을 학살하고 가옥 1454동을 불태운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국민을 학살한 걸까. 권복기는 또 다른 원인을 말한다.

 

“11사단 최덕신 준장이 내놓은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작전 개념이 그것이다. 견벽청야는 중국 한나라 때 변경 지역 방어를 위해 사용된 전술 개념으로 성밖을 말끔하게 치워버리고 성을 굳게 지키면서 적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초토화작전과 비슷하다. 이 작전은 함평 사건이 난 뒤 60여일 뒤 거창에서도 쓰였다. 거창에도 최덕신의 11사단 병력이 투입됐다.

 

당시 9연대는 예하 대대에, 작전지역 내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 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 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할 경우 소각하라는 세 가지 지침을 내렸다.

 

여기에다 군 지휘부에서 각 부대에 내린 것으로 보이는, ‘하루에 공비 50명 이상 사살, 무기 50점 이상 노획이라는 목표가 군인들에게 민간인 학살이라는 손쉬운 전과를 택하도록 했을 가능성도 큰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군인들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괭이와 삽을 수거해 노획품으로 보고하기도 했다고.


견벽청야는 실제로 11사단 작전명령 5호였다. 나산면장 이오섭의 개입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살해당했을 것이다. 나산면장 이오섭은 함평경찰서 나산지서장 나병오를 설득해 같이 5중대장 대위 권준옥을 찾아가 항의했다. 이오섭은 권준옥과 그의 부하들에게 몰매를 맞았다. 그러나 이 장면을 본 20연대장은 불갑산 주변의 다른 마을들을 초토화시킬 계획을 포기한다.

 

129일 맥아더에 의해 흥남 철수 명령이 내려진다. 흥남 부두는 아비 규환이었다. 밟혀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추위에 못이겨 얼어죽은 시체가 매일 밤 수없이 버려졌다. 사람들이 흥남 부두로 몰려든 것에는 미군의 원폭 투하 소문이 큰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 배가 출항하자 미군은 적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기 위해 항구에 대규모 함포 사격과 공중 폭격을 가했다. 이 포격으로 죽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1950419,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나란히 1,2,3등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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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7-16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도 강진에서 인민군에게 죽음을 당하셨는데, 인민군에 의한 죽음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겠네요..

시이소오 2016-07-16 14:59   좋아요 3 | URL
에효. 그런 비극이 있었군요. 명복을빕니다.

전쟁통에 너무 많은 국민들이 희생했네요.

두번 다시 그런 비극이 없어야 할텐데요ㆍ

겨울호랑이 2016-07-16 15: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습니다. 시이소오님 덕분에 아픈 과거를 빠르게 리뷰합니다.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이런 아픔을 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7-16 15:08   좋아요 3 | URL
우리 아이들에게 두번다시 한국전쟁 같은 비극을 물려주지 말아야겠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

루쉰P 2016-07-16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시생 끝내고 시험 합격함 돈 모아서 이거 현대사 전집으로 살거에요 정말 사고 싶은 책!!!

시이소오 2016-07-16 21:04   좋아요 0 | URL
저도 사고 싶어요 ㅎ ㅎ
합격 기원합니다 ^^

2016-07-16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17 11:40   좋아요 1 | URL
독재자들, 왜 국립묘지에 묻는걸까요. 부관참시도 관대한 대접이거늘.

법을 고쳐야 겠습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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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부터 반민특위의 검거 작업이 시작된다. 화신 재벌 박흥식, 250명의 독립투사를 밀고한 <대한일보> 사장 이종형, 최린, 친일 변호사 이승우, 남작 이풍한, <매일신보> 사장 이성근, 친일 경찰 노덕술, 이광수, 최남선 등이 검거되었다.

 

노덕술을 총애한 이승만은 노덕술의 석방을 요구하나, 반민특위는 거절한다.



 

124일 테러리스트 백민태가 서울지검을 찾아가 암살 음모 사건을 고발한다. 반민 특위 간부 15명을 38선까지 유인해 살해한 뒤 월북하려 해 사살한 것으로 위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 친일파들의 암살 음모는 미수로 그쳤으나, 이후 친일파들의 공작은 계속 된다.

 

내각 구성에서 이승만에게 배신당한 한민당은 신익희와 지청전 세력을 흡수 2, 10일 민주국민당 (민국당)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승만은 곧이어 학도호국단을 창설한다. 대한민국 국적이 있는 18세 이상 모든 남녀는 모두 국민회에 가입해야 했고, 성년 여성은 대한부녀회, 청년은 대한청년단, 학생은 학도호국단에 가입해야만 했다. 이승만은 국민회비를 내지 않으면 식량배급 통장이나 물자의 배급을 중지한다고 위협했고, 청년단비를 내지 않으면 38선에 보낸다고 위협했다. 학도호군단은 안호상이 맡았다.

 

1월 중순, ‘수원청년단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이른바 대한 관찰부가 저지른 것이었다. 현대의 국정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한관찰부100여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대통령 암살 혐의로 체포, 고문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과 군에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대한관찰부는 487월부터 493월까지 9개월 동안 21천여 만원의 예산을 썼다. 이 당시 상공부 예산이 2억 원이었다고.

 

520, 반민특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던 소장파 의원,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이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이른바 국회 프락치사건.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으로 악선전한다.

 

66,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무장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 반민특위 요원 35명을 체포한다. 이승만은 그 전에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의 집을 직접 찾아갔다. 김상덕은 이승만의 청을 거절한다. , 반민특위 습격은 이승만의 보복이었던 셈.

 

국회 프락치 사건은 재탕, 확대된다. 앞으로도 누누이 보게 되지만 이승만은 좌, 우를 구분하지 않고 토사구팽을 이어간다. 이문원은 한독당원이자 대동청년단원, 노일환, 친일파로 호남 지주 출신의 한민당원, 박윤원은 광복청년단 지방가부, 강욱중, 민족청년단원, 김병회는 독립촉성국민회원, 김약수는 한민당 간부였다.

 

이승만 정권과 친일세력은 공소시효를 49831로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 통과시킨다. 77일 반민특위 전원이 사임한다. 반민특위는 출발 당시 반민자 7천여 명을 파악해 놓고 있었지만 기소는 221건에 불과했고, 재판이 종결된 것도 38건에 지나지 않았다.

 

강준만의 말처럼 반민특위는 너무 늦게 시작되었다. 해방 후 3년 여동안 친일파는 막강한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친일파들은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 반민특위 제 1조사부장 이병홍은 이렇게 증언했다.

 

친일 거두의 집에서 흔히 일본 황제의 사진이 벽상에 조심스럽게 걸려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자는 태연하게 우리들 앞에서 이완용의 위대한 민족애를 강조하고 동상 건립의 필요를 역설까지 하였다. ”

 

65일 이승만은 국민보도연맹을 만든다. 보도연맹을 직접 입안안 인물은 친일파 검사 오제도였다. 보도연맹 가입을 거부하면 폭력과 테러는 물론 형사처벌을 받아야 했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체 특히나 대한청년단은 지역마다 할당된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온갖 패악질을 저지른다. 가입비 300, 회비 200원을 거두기도 했고, 서울에서는 5만원을 받는 곳까지 있었다.

 

6.25 전쟁 때 학살된 보도연맹의 수는 최소 20만 명이 될 것이라 한다.



 

626, 김구가 경교장 2층 거실에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 당한다. 김구의 국민장엔 100만 명이 넘는 문상객이 조의를 표했고 장례일에 서울에서만 40~50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김구 암살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한독당 간부 7명에게 살인교사죄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 이상하지 않은가. 박근혜가 암살당했는데, 새누리당 의원 7명에게 살인교사죄를 적용한 것과 마찬가지. 김구 암살은 이승만 정권 정보장교였던 김창룡이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두희는 6.25가 발발하자 육군 소위로 복직한다. 51년엔 대위로 진급한다. 소령으로 예편했으며, 예편뒤에는 군납업자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안두희가 복직된 후에 이승만은 이 사람의 인사이동은 내 허락이 없이는 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2001년 발굴돼 공개된 미국 정보장교 소령 조지 실리의 보고서는 미국 배후설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49년 대한민국은 인권유린의 천국이라고 불린다.

 

수사 기관이 십 여개 난립하면서 서로 건수 만들기 경쟁을 벌였다. 어느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면 다른 경찰서에서도 데려갔다. 이른바 뺑뺑이 취조라 불린다. 감옥은 죄수들로 흘러 넘쳤다. 모든 형무소는 정원보다 몇 배 많은 인원을 수용했다.

 

형무소 바깥도 편안한 건 아니었다. 서민들이 내야 하는 세금 종류만 무려 40여 종이나 됐다.

 

현금을 받아가는 것이 대한부인회비, 대한청년단비, 대한청년단 작어비, 민보단비, 지서수리비, 지서방야비, 비상경비, 본도비상사태대책위원회 기본보도 비상대책비, 국방협회비, 발란비, 소방협회비, 사회교육협회비, 가축할가축보전비, 축구공제 특별가축비, 농화비, 후생협회비, 수구비, 순가 혹 사망에 경하는 비용, 그 다음에는 국세에 정한 국세의 비용이 가옥세, 차량세, 면새 기타 10여 점, 또 그 다음에 현물로 받아 가는 것이 원공출수량은 내야 됩니다.”

 

그 공출 수량을 뺏긴 뒤에는 군용곡량이라고 하고 보리하고 나락을 받아갑니다. 소학교에 대한 선생을 또 무어한다고 보리하고 나락을 받아갑니다. 소학교.....그리고 중학교도 역시 보리와 나락을 양차로 받아 갑니다. 또 도정료 무어라 해서 보리와 나락을 받아 갑니다. 또 구장료 무어라고 해서 보리와 나락을 받아 갑니다. 또 선생을 구제한다고 보리와 나락을 받아 갑니다. 도 산림계에서 환료경제한다고 매 가호에서 700원씩 그 화구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받아갑니다. 종종보면 심지어 대통령 사진 비용까지도 받아 갑니다. ....무병잡비용이 스물한 가지, 국세애 대한 비용이 열 한가지, 40여 종의 부담입니다.”

 

이외에도 서민들은 기부금을 내야했다. 권력기관이나 그 근처 단체들은 수건과 비누등을 강매하고 안 사면 공산당이라 위협했다. 극장표를 무더기로 맡기거나 식량을 내게 하기도 했다. 기부금을 안 내면 협박, 구타, 감금, 침입수사 등이 이러졌고, 군까지 가세했다.

 

서민들은 기부해야 했고 공출당했으며 고문당했고, 또한 이승만을 숭배해야만 했다. 학교마다 이승만 초상화가 내걸리고, 이승만 생일에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해야 했다.

 

이 당시 유행한 말이 사바사바. 물가는 엄청나게 치솟아 올랐다. 물가 폭등은 모리배들에겐 일확천금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바사바는 갈수록 더 성행했다.

 

통역 정치의 다른 한쪽엔 기독교 정치특히 개신교 정치가 있었다. 개신교 신자는 10만 명 인구 대비 비율 0. 52%에 지나지 않았지만 46년 미군정 최고위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가운데 35명이 개신교 신자였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모두 개신교 신자였다.

 

한국기독교청년 연합회(기청)은 서북 청년회와 연합한다. 영락교회 청년회는 서북청년단 발족을 주도하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에 개신교는 귀축미영(귀신과 짐승인 미국과 영국)을 박멸하자를 목이 터져라 외친, 가장 강력한 반미 세력이었다고 하는데, 해방 후엔 어쩌다가 친미로 돌아선 것일까.

 

오기영은 개신교가 일제 치하에서 하느님과 돈과 일본이라고 하는 삼위를 섬겼다고 비판한다.

 

신사 참배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예수교에서 얼마나 많은 대일협력자를 내었는가. 얼마나 많은 미영타도의 용감한 투사를 내었는가. 그뿐이 아니다. 진실로 그뿐이 아니다. 서로 일본에 친하기 위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기 위하여 서로 싸우고 모해하며 서로 더 황민화의 공적을 나타내기에 노력하지 아니 하였는가.”

 

일제 강점기엔 반미를 부르짖던 친일파 개신교가 해방 후엔 친미파로 변신한 것은 하느님의 하심을 역사하신 걸까.

 

49년 봄부터 38선 근처에선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이뤄졌다. 이승만은 연일 북진통일론을 외쳐댔다. 1230일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우리는 새해에 통일을 이룩해야 하며 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북한에선 48년 가을 이후 모택동 군대에서 싸운 수천명의 조선인 병력이 북한으로 돌아왔다. 504월에만 약 12천명의 조선인 병사들이 돌아왔다. 북한은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 남한엔 탱크 한 대도 없었다

 

이승만의 도발에 의해, 한국전쟁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이 전쟁에서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를 포함한 인명 손실은 3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나 되었으며, 1천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은 난민이 되었다. 이 전쟁은 ”20세기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민간인 희생 비율이 높은 더러운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그 잔인성에 있어서 20세기의 국제전이나 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다른 어떤 학살을 능가하였으며,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전쟁 백화점이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무참하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살아 있는 인권 박물관이자 교과서였다.“ 전쟁 중 이승만은 너무도 무능했고 부패했고 잔인한 모습을 원없이 보여주었다. 과연 이승만 정권은 국가였을까? ”

 

지옥을 살아가고 있던 한국의 국민들과 북한의 국민들,

그들 앞엔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한 더 끔찍한 지옥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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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15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은 역사 연표를 잘 만드실 것 같습니다. 만약에 역사 연표 같은 알라딘 굿즈가 나온다면, 그거 사지 마세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7-15 12:07   좋아요 0 | URL
ㅎ 저야 강준만 쌤 책을 정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

yureka01 2016-07-15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승만에 대해 알아가면 갈수록 화딱지나는 인물은 드물듯..

시이소오 2016-07-15 13:47   좋아요 2 | URL
동감입니다. 이게 과연 인간일까 싶어요.

이승만을 국부라는 것들도 인간같지가 않아요. 무슨 흡혈귀가 아니고서야 ~~

겨울호랑이 2016-07-15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짜여진 각본처럼 모든 것이 맞물려 전쟁으로 몰아가는 거 같네요. 이런 삶속에서 전쟁이라는 탈출구 선택은 자연스러운 흐름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7-15 15:13   좋아요 2 | URL
이 당시의 상황이 현재랑 비슷한것 같아요. 누군가 사드 배치로 지옥문이 열렸다고 표현했는데 동감입니다. 사드 배치이후 두번째 한국전쟁이 발발할 조건들은 완벽히 갖춰지게됩니다. 한국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요?

회의적이네요. 한국전쟁으로 손해본 정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승만, 김일성도 체제를 더 공고히 할수 있었던건 전쟁 덕분이었거든요.

아무죄없는 국민들만 수백만명이 학살당했죠.

사드배치는 미친짓이에요.

한국에서 또다시대리전 하겠다는건데, 사드배치에 찬성하는 국민이 있다니 통탄할 일입니다.

겨울호랑이 2016-07-15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 아울러 지금 동유럽에서 NATO와 러시아 갈등, 남중국해에서 미국(필리핀)과 중국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등 세계적으로 불안하네요. 더구나, 우리나라는 중국, 러시아 vs 미국, 일본 구조라 2배로 걱정이네요. 더구나 우리 나라 마음대로 전쟁을 하거나 멈출수도 없으니 참담합니다.....

시이소오 2016-07-15 15:25   좋아요 2 | URL
지금 세계 정세가 정말 심상치가 않아요.

삼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문제는 어디냐는건데, 한반도도
분명 강력한 후보지들 중 하나라고 봅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15 1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최근 들어 정부에서 국민들 정치의식과 역사의식을 많이 함양해 주어서 참 고마워하면서 내년 대선을 기다리고 있는데, 기회를 안 주는 거 같네요...

시이소오 2016-07-15 15:33   좋아요 2 | URL
섬찟한건 새누리당이 내년 대선은 포기한것처럼 보인다는거죠. 대선을 포기하면서도 낄낄대는 이유가 뭘까요?

단지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으면 좋겠어요



2016-07-15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15 15:59   좋아요 2 | URL
단지 그것뿐이라면 다행입니다만, 거기서 그칠것 같지가않아요.

중국, 러시아가 미쳐날뛰니 미국은 일본이란 사냥개 목줄을 풀었습니다. 일본이 북한의 목을 물어 뜯으면 중국이 달려올거고 미국도 뛰어들겠죠.
또 다시 미중 전쟁이 한반도에서 이뤄지겠죠.

애초에 강대국은 한반도 통일을 원하는게 아니니, 38선 유지한채로 또다시 휴전, 한반도 사는 사람들만 개죽음 당하겠죠. 에효

겨울호랑이 2016-07-15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맞습니다. 시이소오님 말씀이 충분히 근거가 있고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 다만, 그렇게 안 되길 바라야겠지요. 다만,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현재를 바라보고 판단을 바로하는 것 같아요.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야 할거 같네요^^

시이소오 2016-07-15 16:09   좋아요 2 | URL
중요한 말씀 이네요. 전쟁을 막기위해 우리들 각자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무엇을 할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겠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15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시이소오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항상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시이소오 2016-07-15 16:13   좋아요 2 | URL
저도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님도 즐거운 불금되시길 ^^

2016-07-16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17 11:37   좋아요 1 | URL
정신병자라는 말에동의합니다. 오죽하면 미군도 일국의 대통령을 정신과 의사와 상담시키려 했을까요. 지금 박그네도 제가 보기엔 정신병자. 치료가 시급합니다. 엄마. 아빠. 다 총 맞아 죽은 이후로 미쳤어요.
저런 ㅁㅊㄴ을 대통령 시켜 놨으니 나라도 미쳐가죠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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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민간인 학살의 원년. 48년 이후로 백 만명의 국민을 잔인하게 학살한 희대의 살인마를 국부라고.

419 혁명을 통해 국민이 쫓아낸 독재자가 이승만이다. 이승만을 국부라 칭한다는 건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되는 419를 부정한다는 말이다. 또한 이승만의 백만  명 학살을 지지한다는 말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므로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 이게 빨갱이 아닌가.) 이승만을 국부라 부르는 것들, 법으로 엄정히 다스려야한다. 국회의원들은 왜 멍하니 있는 걸까.

 

 

17, 인도인 의장 메논을 위시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했다.

 

27, 남로당은 강경 투쟁의 일환으로, 2.7 파업을 일으킨다.

 

210,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에 반대한다는 내용이 담긴,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312, 유엔위원단은 찬성 4개국, 반대 2개국, 기권 2개국으로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찬성한다. 한민족의 분단을 반대한다는 연설을 했던 의장 메논은 이승만이 계획한 모윤숙의 미인계에 마음을 돌린다. 모윤숙은 대표적인 친일파 작가기도 했건만, 한민족 역사와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패륜을 저질렀다.

정경모는 한국의 진짜 건국의 아버지는 인도인 메논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같은 날, ‘7거두 공동성명이 발표된다. 7거두는 김구,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김창숙 등을 일컫는다. 남한만의 단독정부는 동족상잔의 참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

 

214, 공창제도가 폐지된다. 공창은 폐지되었으나, 매춘부 2천 여명은 대부분 사창으로 전업한다. 육체적 매음과 정신적 매음 중 무엇이 더 더러운까. 채만식은 <낙조>에서 춘자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지.

 

난 양갈보야 난 xx놈한테 정조를 팔아먹었어. xx놈의 자식이 애 뱄어. 그러니까 난 더런 년야.......그렇지만서두 난, 누구들처럼, 정신적 매음을 한 일 없어. 민족을 팔아먹구 민족의 자손까지 팔아먹는 민족적 정신 매음은 아니했어. 더럽기루 들면 누가 정말 더럴꾸? 이 얌체빠진 서방님네들아!”

 

제주 4. 3 항쟁

 

43,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12개 지서를 공격한다. ‘제주 4. 3항쟁의 시작이었다. 당시 제주도민은 30만 명으로 알려져있다. 이중 10%3만 명이 빨갱이라는 죄명으로 살해당했다. (8만명이 살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473. 1 사건 이후 제주도민과 친일 경찰들이 자주 충돌했었다고 한다. 3월 우도와 중문리 사건, 6월 종달리 사건, 8월 북촌리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483, 청년 3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민심이 동요하였다.

 

422일부터 경비대와 무장대의 평화협상이 체결된다. 그러나 협상 사흘만에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세칭 오라리 사건이 벌어진다. 53일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한다. 협상 결과만 믿고 산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에게 경찰이 총격을 가한다. 당시 경비대 연대장 김익렬은 이렇게 말했다.

 

경찰은 폭동진압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오히려 폭동을 조장, 확대하려고 하였다. 경찰은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를 방화하고는 폭도의 소행으로 선전하고 다녔고, 이렇게 되자 폭도들도 산에서 내려와 각 지서를 습격하여 중지되었던 전투가 다시 개시되었다.”

 

김익렬이 경찰의 행동을 의심할만한 증거물과 사진첩을 제시하자, 경무부장 조병옥은 김익렬을 빨갱이로 몬다. 김익렬은 해임되고 서울에 가서 경비대사령관 준장 송호성에게 보고한다. 김익렬의 보고를 들은 송호성은 제주도 사람은 이제 다 죽었구나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51511사단이 제주도로 들어온다. 기존의 9연대는 11연대에 합편된다. ‘무차별 체포작전을 펼친 박진경은 미군의 인정을 받아 대령으로 진급하지만 하사 손선호에게 살해당한다. 손선호는 박진경 살해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하였다. (중략) 사격 연습을 한다고 부락의 소 기타 가축을 난살하였으며 폭도의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고 말았다. 또 매일 한 사람이 한 사람의 폭도를 체포해야 한다는 등 부하에 대한 애정도 전연 없었다.

 

본격적인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4811월 중순부터 493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발생하게 된다. 미군정은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을 위시로 한 우익 청년단체의 토벌을 레드 헌트로 명명했다.

 

419, 김구는 남북 협상을 위해 북행길에 오른다. 이후 홍명희, 조소앙, 조완구, 엄항성, 김규식 등이 북으로 출발한다.

 

430일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 회동이 열린다.

 

510,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실시된다. 김구, 김규식은 거부한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대승리라고 선전했지만 실상과는 거리가 너무도 먼 이야기 였다. 한 외신기자는 이렇게 보도했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자루, 야구배트, 곤봉 등을 휴대하고 있었고 모든 조선 경찰은 미국 카빈 총으로 무장하였다. 선거일은 휴일이나 분위기는 계엄하의 도시와 같았다. ”

 

친일경찰 문제로 조병옥을 비판했다가 사직한 최능진은 5. 10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 갑구에 출마해 이승만과 대결을 벌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측의 방해공작으로 등록 무효 선고를 받아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되었다.

 

중도파와 좌파들의 선거 보이코트는 과연 옳았을까? 대다수의 사학자들은 선거 보이코트가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합법화 길을 열어 주었다고 평가한다.

 

712, 제헌국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여 717일에 공포했다. 720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8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내외에 선포하는 기념식이 거행된다. 이승만의 기념사는 주로 맥아더에 대한 찬양의 말 뿐이었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찬사는 없었다. 1212일 유엔총회에서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했다.

 

99일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이 선포되었으며,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각료가 구성된다. 김일성의 국토 완정론에 따르면, 평양은 임시 수도이고, 남한 공산화를 통해 서울을 수도로 삼아야 국토의 완정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대한민국 역시 무력을 통해 북한을 흡수하겠다는 흡수통일론을 제시한 바, 남북간의 갈등과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친일파들의 무수한 방해질에도 불구하고, 922일 드디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된다. 반민법에 근거, 국회 내에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이른바 반민특위가 구성된다.

 

130만 명의 단원을 둘 만큼 급팽창한 이범석의 족청을 견제하기 위해 이승만은 대한청년단을 발족시킨다. 단장은 신성모, 감찰국장은 김두한이 맡았다. 경남 거창에선 대동 청년단이 조직된다.

 

여수항쟁 

 

1015일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제 14연대는 육군 사령부로부터 19일 오후 6시를 기해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14연대 사병들은 월북, 선상 반란, 여수 봉기롤 고민하다, 여수에서의 봉기를 결정한다. 이들은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를 구호를 외치면서, 제주에서의 진압군을 포기하고 반란군을 택한다. 불과 네 시간 만에 여수를 장악한 반란군은 순천,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22일 곡성까지 점령한다.

 

미군정과 군경의 잔인한 보복극이 시작된다. 진압작전은 1026일부터 시작된다. 전 육군 병력의 3분의 15개 연대, 7척의 해군 함정, 전 공군력에 해당하는 10대의 비행기까지 총 동원된다. 진압군이 막상 여수에 진입하고 보니 시내는 텅 비어 있었다. 반란군은 이미 산 속으로 도주했던 것. 엄청난 병력과 장비를 동원했건만 군경은 웃음거리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셈이다. 반란군을 찾을 수 없게 된 진압군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보복을 자행한다.

 

진압군은 여수 서국민학교에 4만 명을 집결 시켜놓고 보복 대상자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마구잡이식 보복이었다. 예컨대, 당시 가담자들이 신발공장에서 찌까다비(일할 때 신는 신발)을 신었다는 소문을 듣고 진압군은 그 신발을 신은 청년은 무조건 사살했다. 학생복을 입었다고, 머리가 짧다고, 국방색 러닝 셔츠를 입었다는 죄로 살해되었다.

 

반란군의 잔인성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은 5연대 지휘관 대위 김종원의 행태였다. 5연대는 상륙 작전을 하면서 마구잡이로 쏘아댄 박격포탄에 의해 12연대 수색대가 맞아 중대장과 하사관 한 명이 전사한다. 김종원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돌산섬을 비롯해 여기저기를 뒤져보지만 반란군은 이미 종적을 감춘 후였다. 이에 김종원은 군내리에서 3, 남면 안도에서 20명을 죽이고, 중앙국민학교에서는 붙잡혀온 청년들에게 칼 시험을 해본다는 이유로 일본도로 7명의 청년을 베어 죽였다. 김종원은 이후 6.25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문교부는 문인들을 현지에 파견 시찰을 시킨 다음 정부에 유리한 글을 쓰게 했다

박종화, 이헌구, 정비석, 최영수, 김 송.

 

여순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2600명이 넘었다. 미국은 여순사건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숙군이 시작된다. 군의 약 5%에 달하는 4749명이 숙청당했고, 이중 2천명이 총살당했다. 숙군 작업 와중에 소령 박정희도 체포된다. 여순사건이 터지나 박정희는 토벌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차출되었었다.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였다.

 

만주군에서 광복군으로, 좌익에서 우익으로 변신한 박정희는 군부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모두 털어놓아 결국 목숨을 건진다.

 

929일 내란행위특별조치 법안이 다시 등장하여 국회 본회의에 제출된다. 이 법은 곧 국가보안법으로 이름이 바뀐다. 야당 국회의원 조헌영은 이렇게 말했다.

 

속담에 고양이가 쥐를 못 잡고 씨암탉을 잡는다는 격으로 이 법률을 발표하고 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일본 놈 시대와 같이 잡아다 물 먹이고 이 놈 자식이 그랬지 하면 예예 그랬습니다. 이래서 거기 다 걸려 들어갈 수 있습니다. ”

 

국가보안법은 한민당과 이승만 지지세력 연합에 의해 1120일 국회를 통과해 121일 공포된다. 국가보안법은 곧 괴력을 발휘한다. 494월까지 국가보안법으로만 체포된 숫자는 89700명이었다. 49년 한 해에만11만 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7개 일간지와 1개 통신사가 폐간 및 폐쇄당했다. 많은 기자들이 체포되었고 발행인 및 편집자들이 제거되었다. 방송은 아예 정부 산하로 들어가게 된다.

 

제주에서의 인간 사냥

 

4811월 중순부터 493월까지 제주도 160여개 마을 가운데 130여개 마을의 수만 주민들이 학살당한다.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군정 치하보다 학살은 더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017일 제 9연대장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한다. “ 10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 기간 중 전 도의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악명높은 초토화 작전이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하겠다는 것.

 

1018일 제주 해안이 봉쇄된다. 1019일 제주에 파병될 예정이었던 14연대 1개 대대는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1117일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된다. 이승만이 앞장서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으로 옷을 갈아입고 초토화 작전에 투입된다.

 

이승만은 1210일 서북청년회 총회에 참석, “제주도 4. 3 사태와 여수, 순천 반란 사태로 전국이 초비상사태로 돌입했다. 이 국난을 수습하기 위하여 사상이 투철한 서북청년회를 전국 각지에 배치하겠다.”고 말했다.

 

서청 단원들은 473.1 사건 직후부터 제주로 들어왔다. 김종민에 따르면, 서청단원은 주로 엿장수를 하다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했다. 4.3이 발발하자 서청은 경찰 또는 군인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과거에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사지 않았던 사람들은 총살되었다.

 

12월 말 토벌대가 9연대 (연대장 송요찬)에서 2연대 (연대장 함병선)로 교체되면서 서청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집단 광기가 펼쳐졌다. 13살 소년을 고문해서 죽게 만든 사건이 915일 자 중앙 언론에 보도 된 이후, <경향신문> 제주지사장 현인화, <서울신문> 제주지사장 이상희, <제주신보> 편집국장이 총살당했다.

 

집단 광기의 조짐은 사태 초기부터 있었다. 김종민에 따르면, 처음엔 말 태우기뺨 때리기가 유행했다. 토벌대는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했다. 또한 가족들을 총살 당할 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대살도 행해졌다. 가족 중 청년이 사라진 집안 사람들은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당했다. 1213일 대정면 상모리와 하모리 주민 48명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이 마을에서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총살극을 구경시켰다 하여 이 사건을 관광총살이라고도 부른다.

 

49117일 북촌리 학살 사건에선 장교들이 군인들에게 사살 연습을 시켰다.



 

미군과 이승만은 왜 이토록 잔인한 방식으로 인간 사냥을 해야만 했을까?

 

20031015일 제주 4.3 사건 위원회(위원장 총리 고건)가 확정한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는 유혈 사태를 초래한 초토화작전 및 집단 인명피해(집단학살)의 최종 책임은 당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이승만에게 있다고 지적했으며, 1031일 대통령 노무현은 사건 발생 55년 만에 당시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200643, 58돌을 맞은 제주 4. 3 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해 추도사를 통해 제주도민에게 사과했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최근 제주도민을 잔인하게 학살한 서북청년단을 다시 조직하려고 안달이다.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연쇄살인마 단체를 허용할 것인가? 서북청년단은 단순한 우익 단체가 아니다. , 우익의 문제가 아니다. 인권의 잣대로 바라봐야 한다. 서북청년단은 한국 역사상 가장 악랄한 살인마들 중 하나다


독일은 네오 나치 집단인 하얀 늑대단을 불법단체로 규정, 10개 주에서 소탕 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한국 역시 서북청년단같은 학살 집단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48720, 런던에서 개최된 제14회 국제 올림픽에 한국은 최초로 참가한다. 58개국 가운데 32위를 차지한다. 축구에서는 스웨덴에게 120으로 패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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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4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14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6-07-14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슴아픈 한국 현대사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7-14 13:08   좋아요 3 | URL
가슴을 부여잡고 통곡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모르고 잘도 살아왔어요.

그러니, 이승만 같은 쓰레기를 국부라 하는 것들이 설쳐대는 거겠죠.

같이 읽어주셔 저도 감사드려요.
쓰는게 너무 고통스러웠거든요 ^^

singri 2016-07-14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뜩하네요 진짜 ! 이승만이 국부라고ㅡ 아후 우리나라 ㄱㅅㄲ들 너무 많습니다

시이소오 2016-07-14 13:11   좋아요 1 | URL
그들은 자기들을 ㄱ ㅅ 끼 로 생각지 않잖아요.
국민들을 개돼지로 보니까, 국민들 몇 백만명이 죽어도
잔인하게 살해한 이승만을 국부라고 떠드는 거겠죠

이승만을 국부라 떠드는 것들, 국민들이 기록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아는지.
언젠가 댓가를 치를거라 봅니다.

singri 2016-07-14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지금 6.25 전쟁 읽는 중인데 이승만 거짓말로 싸우고 밑으로 도망다니기 바쁨 . 부관참시 ㅡㅡ

시이소오 2016-07-14 13:18   좋아요 0 | URL
정말어이없죠. 북진통일 부르짖다 전쟁터지니까 혼자 도망다니기 바쁨. 부관참시도 관대하죠^^;

겨울호랑이 2016-07-14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업무상 제주도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가는 길에 제주 43평화기념관에 가볼 계획입니다. 보도연맹사건 등을 비롯해서 알지 못했던 분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이나마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이소오 2016-07-14 13:22   좋아요 2 | URL
저도 그런생각이 드네요. 숱한 분들의 희생덕택에
그나마 제가 살아갈수 있다구요. 저는 최근에야 43기념관 있는 걸 알았네요. 저도 제주도에 가면 꼭 방문해야겠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4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악이죠... 이승만.....

시이소오 2016-07-14 13:29   좋아요 0 | URL
이승만에 비하면 전두환도 피래미로 보여요. 사악하고 비열하고 뻔뻔하고 오만하고. 이게 정녕 사람인가 싶어요

samadhi(眞我) 2016-07-14 13:30   좋아요 0 | URL
명박이 롤모델이죠 승만영감탱이. 명박이는 승만이형처럼 되고 싶어서 온갖 더러운 짓, 도둑질은 다 했지요.

시이소오 2016-07-14 13:33   좋아요 0 | URL
명박이 명줄도 기네요. ~~

기억의집 2016-07-14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정상적인 나라에 사는 게 아니라나깐요. 화가 나요...

시이소오 2016-07-14 17:08   좋아요 0 | URL
여전히 야만의 시대를 살고있죠 ^^;

기억의집 2016-07-14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릴 때 어떤 영화인지 모르지만 저 사진처럼 많은 사람들이 학살 당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주인공이 죽은 척 하나그러는데.. 설마 이승만이 백만 학살한 사건을 다룬 건 아니겠죠.. 혹 영화로 만들어지진 않았죠?

시이소오 2016-07-14 19:22   좋아요 0 | URL
정확히 모르겠지만
영화도 아직 소설만큼 너무부족하네요 . ^^;

2016-07-15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15 10:09   좋아요 0 | URL
흐흐. 죄송해요 ^^;

빈수레 2016-07-20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이승만 묘지가 왜 있는거죠? ㅜ.ㅜ

시이소오 2016-07-20 13:15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국립묘지에 파헤쳐야할 묘가 한 두개가 아니네요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