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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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이승만의 빨갱이 사냥개김창룡이 암살당한다. 김해진은 김창룡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과 연관이 있다고만 하면 부모 형제, 백년지기 할 것 없이 즉각 체포, 구속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의 이와 같은 생활은 붉은 고추만 보아도 즉각 처넣고 싶고, 여성들의 붉은 치마만 보아도 온 신경을 곤두세워 공산당과 연관시켜 볼 정도로 되게 하였다. 붉은 빛에 대한 노이로제 기미라고나 할까.”

 

암살범은 특무대 대령 허태영의 부하인 송용고와 신초식인 것으로 밝혀졌다. 허태영은 왜 김창룡을 암살해야만 했을까.

 

김창룡은 일제 강점기 북만주에서 악질 일본 헌병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애국독립투사를 투옥했으며, 중지 방면의 연합국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할 때는 포로를 학대한 친일 전범이다. ....그는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숙청을 뒤풀이하여 공산당원 1에 대해서 양민 10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 대표적 사건으로는 관 사건, 조선방직 사건, 조병창 화재 사건, 김종평 장군 사건, 김도영 대령 사건, 삼각산 사건 등 20여 건을 꼽을 수 있다. 한편 뒤켠에선 살인, 약탈, 협박, 공갈, 항명, 군수품 부정처분, 밀수 등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20억 원의 재산을 끌어모았다.”

 

허태영은 법정에서 나의 행동은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거사와 같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신초식은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가 백주에 명동거리를 활보하도록 허용하고 있는 이 나라의 법률이 도대체 어떻게 나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항변하였다.

 

이승만은 35일 대통령 후보 불출마를 선언한다. 이에 이승만이 조직한 대한노총은 우마차 800대를 이끌고 이승만 대선 출마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우의마의시위. 시위에는 학생들, 다방마담, 창녀들까지 강제로 동원되었다. 이승만은 시치미를 떼고 자신의 출마를 원하면 글로 써서 보내달라고 호소한다. 이에 수많은 혈서들이 난립한다. 이승만은 할 수 없이대통령 후보로 나선다. 조선조 왕들이 툭하면 해대는 쇼였거늘, 이승만은 자신을 왕으로 여겼던 게 아닐까.



 

328, 민주당은 전국대회를 열어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선거구호로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내걸었다. 53, 신익희의 한강 백사장 연설에는 30만 인파가 몰렸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신익희를 친일분자로 비난하고 평화통일을 외치는 조봉암을 용공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지방에선 이 동리에서 만약에 야당계 표가 나온다면 이 동네는 몰살을 해버린다. 만약에 우리가 북진할 때는 너희들부터 전부 다 죽이고 가버린다라고 주민들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미 한국전쟁을 전후로 수 백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지방에 사는 서민들에게 그저 공허한 협박으로만 들렸을까.

 

신익희는 55일 새벽 5시경, 장면과 함께 전북 이리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졸도한다. 장면의 경호책임자인 시라소니 일행이 신익희를 호남병원으로 옮겼지만 신익희는 사망한다.

 

5. 15 선거 개표결과 이승만이 총 유효표의 52%5046437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조봉암은 2163808표를 얻는다. 강원도 정선에서는 이승만 표가 25천 표가 나왔는데 조봉암 표는 34표에 그쳤다. 강원도 유권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군인들의 70%가 조봉암에게 투표했지만 투표 결과는 거꾸로 뒤집혀졌다. 엄청난 개표 조작이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8.8 지방선거를 앞두고 치안국장에 김종원을 임명한다. 김종원은 여순, 거창사건에서 익히 악명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조봉암은 유세를 통해 피해대중론평화통일론을 주장하였다. 조봉암은 이념을 내세우지 않고 현실에 대한 분석을 강조했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었음에도 북진통일론을 주장한 이승만은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민주당 역시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을 거부하고 신익희가 죽자 오히려 이승만을 지지한다.

 

이승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 대통령이었다.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의 온갖 패악질에도 이승만을 지지한다. 함석헌은 기독교 신자였음에도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글을 멈추지 않았다. <함석헌 평전>을 쓴 김성수는 이렇게 말했다.

 

월남하여 전쟁을 겪는 동안 함석헌은 이승만 정권의 횡포를 질리도록 목격할 수 있었고, 자유당을 등에 업은 기독교인들의 오만 역시 거듭 체험한 바 있었다. 이를테면 자유당 간부들이 기독교인들을 우선적으로 선별해서 미군 구호품을 분배해 주는 것 따위가 그랬다.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점에는 냉담하고 교회의 일과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에 대해 그가 강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선거 때마다 그래왔듯 개신교는 장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 권사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추대한다.

 

88일로 예정된 제 2대 지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여권이 바빠졌다. 점차 선거일이 다가오자 치안국장 김종원은 새로운 수법의 여당 탄압을 선보였다. 온갖 경범죄 죄를 동원해 야당 후보 등록을 가로막은 것. 당시에는 경범죄로 11~25일간 구류처분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후보자로 등록할 수 없었다.

 

야밤에 집 앞에다가 쓰레기를 버려놓고 새벽같이 찾아와서는 청소 불결이라는 죄목으로 구류처분하지 않나, 밤 사이에 단단히 붙여놓은 문떼를 떼어보리고는 문패가 없으니 구류처분이라고 집어넣지를 않나, 형사들이 술을 사달라고 졸라서 술을 사주었더니 밤 12시가 되도록 나가지를 못하게 해놓고 12시가 지나 집으로 가려고 한즉 틍금위반이라고 집어넣지를 않나....”

 

심지어 괴한들이 몰려와 입후보 서류를 탈취해가는 일도 있었다. 입후보 사퇴 공작까지 가세해 지방 선거에서 사퇴한 후보는 3800여명에 이르렀다.

 

선거 결과 자유당의 압승이었다. 전북 정읍 소성지서에서 근무하던 순경 박재표는 소성면 투표함 2개를 수송 도중 바꿔치기한 경찰관들의 선거 부정을 <동아일보>를 찾아가 폭로하였다. 경찰은 박재표에게 현상금 30만환에 일 계급 특진을 내걸었다. 박재표는 체포되어 10개월 간 옥살이를 하는 등, 숱한 수난과 고초를 당한다. 과연 전북 정읍에서만 개표 부정이 있었을까.

 

928, 민주당 제 2차 전당대회에서 장면이 저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장면을 쏜 김상붕은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쳤다. 사건 후, 김상붕의 형 김상봉이 배후를 <경향신문>에 제보했다. 배후는 자유당 비밀당원 최훈이었다. 4.19 이후 밝혀진 바로는 이기붕, 이익흥, 김종원이 사건의 배후였다. 4. 19 혁명 후 이기붕, 이익흥, 김종원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특사로 석방되었다


 

짜장면은 1905년 인천시 중구 북성동 소재 공화춘에서 최초로 판매되었지만, 56년 이후로 대중화된다.

 

입도선매로 빚을 질 수 밖에 없는 농민들은 할 수 없이 서울로 이농을 하게 된다. 이농한다고 해서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약관 22살의 나이로 혜성과 같이 나타난 문단의 무서운 테러리스트가 있었으니 이어령이었다. 이어령은 <우상의 파괴>에서 김동리를 미몽의 우상’, 모더니즘의 기수를 자처한 조향을 사기사의 우상’, 이무영을 우매의 우상’, 최일수를 영아의 우상으로, 황순원, 조연현, 염상섭, 서정주를 현대의 신라인들로 묶어 신랄한 비평을 가했다.

 

김일성은 모택동의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를 모방한 듯한 좌수우수론을 제시하였다.

 

밥을 먹는데 왼손으로 먹으면 어떻고, 오른손으로 먹으면 어떠한가? 숟가락으로 먹으면 어떻고, 젓가락으로 먹으면 어떤가? 밥이 입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혁명을 하는데 꼭 소련식이어야만 하겠고, 꼭 중국식이어야만 하겠는가?”

 

616, 한국 최초의 tv 방송이 시작되었다. HLKZ TV 방송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17번째, 아시아권에서는 일본, 필리핀, 태국에 이어 네 번째로 TV 방송을 실시한 나라가 되었다. 9월에는 <사형수>는 드라마를 방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수상기는 300여대. 경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황태영 사장은 이듬해에 HLKZ-TV를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에게 양도한다. 장기영은 방송국을 대한방송주식회사(DBC)로 개편하고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지만, DBC5922일 화재로 사라지고 만다. AFKN TV50년 이후 라디오 방송으로 출범, 5795일부터 TV 방송을 시작한다.

 

56년 영화가 최대의 화제작은 15만 명을 동원한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이었다. 영화 <자유부인>이 남긴 유행어는 최고급품으로 주십시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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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6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6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 2016-07-26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영민의 한국현대문학사에서는 이어령의 저 평론을 참여문학의 신호탄으로 봅니다. 실천적 참여가 아닌 창작을 통한 참여를 강조해 순수문학을 옹호한다고 비판받아 나중에 김수영과 논쟁하기도 했지만..

시이소오 2016-07-26 15:00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50년대, 60년대의 이어령은 본받을만 하네요. 특히나 남정현의 <분지> 사건때였나요?
지식인의 표상, 이라 할만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26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일파들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광신적인 탄압은 항일투쟁에 보다 적극적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의 투쟁노선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전에 말씀하신 북한에서의 친일청산 때문에 더욱 광기어린 것 같네요. 1950년대에 이미 현재의 문제 뿌리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시이소오님 좋은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7-26 17:22   좋아요 2 | URL
기득권 세력이에게 반공은 이데올로기보다는 명분일 뿐이었던것 같아요. 거기에 세뇌된 국민들의 반공의식이 더 끔찍해 보이기도하네요.

매번 격려에 격하게 감사 드립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2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어렸을 때 반공 포스터 및 표어 작성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름방학에는「붉은 청년 근위대」등을 읽고 무찌르자 공산당을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거대한 병영사회 안에 있었던 것 같아요.. 좋은 저녁 되세요^^

시이소오 2016-07-26 17:28   좋아요 1 | URL
ㅋ 저희 어릴때 반공 포스터, 표어 정말 많이 그렸죠 ㅋ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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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은 자유당 시절 3. 26일을 어용곡필배들의 잔칫날이라고 말했다. 3. 26일은 이승만의 생일이었다. 5580회 생일 기념식은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시인 김광섭은 이승만 생일을 맞아 헌시를 바치며 이승만을 세기의 태양으로 극찬한다. 공보처장 갈홍기는 이승만을 예수나 석가처럼 아무런 도 없고 어떠한 도 없이 민족의 자유와 독립,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개척하는 지공무사한 삶을 살아왔다고 칭송했다. 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의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 기념노래도 나왔다.

 

4.19때 국민들이 불을 지른 <서울신문>은 이승만을 구국의 태양’, ‘인류의 등대라고 말했다.

 

418일부터 24일까지 인도네시아 반둥에선 아시아 아프리카회의가 개최되었다. 23개 아시아 국가와 6개 아프리카 국가가 참여하였다. 반둥회의는 평화공존, 반식민지주의, 민족자결주의의 이념을 골자로 한다. 제국주의 미국은 반둥회의를 못마땅해 한다. 이승만은 주동자인 인도를 비난하면서 반둥회의를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이라 비난한다.

 

6, 박인수 여대생 간음 사건이 터진다. 명문 E대생을 비롯한 70여 명의 여인과 간음을 했다는 박인수는 공무원 사칭과 혼인빙자간음 혐의로 피소되었다.

 

해병대 헌병 대위였던 박인수는 약혼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모 대령과 결혼해 버린데 충격을 받아, 불명예 제대 이후 여성 편력에 나선다. 재판 과정에서 박인수는 자신과 관계한 여성 중 처녀성을 지닌 여자는 단 한 명 밖에 없었다고 실토하자 언론은 일제히 우리 여성들의 정조 관념에 일대 경악과 통탄을 금할 수 없는 중대한 현실 문제라고 성토한다.


8월부터 중립국 감시위원단 축출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정부가 문제 삼은 건 체코와 폴란드 등 공산국가 대표였다. 이 축출 시위를 적성감위 축출운동으로 줄여 불렀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백인빈의 <조국회상><적성감위 축출운동>을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들은 구성지게 내리는 그 비를 맞으며 궐기대회니 총궐기대회니, 규탄대회니에 매일이다시피 끌려다녀야 했다. ...누가 만들어 나왔는지도 모르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운동장으로 달려가고, ....을지로나 종로를 통하여 시청 앞까지 나팔을 불고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여야 했던 것이다. ....총 궐기대회에 나오지 않으면 배급을 주지 않는다거나, 이름을 적어간다는 소리에 질려서 서울운동장으로 끌려나가야 했던 것이다. ”

 


910일 유엔대표부 상임이사 임병직이 대구를 방문하자 이를 환영하고자 중고등학생들을 뜨거운 햇볕아래 서너시간 동안 가두에 도열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보다 못한 대구 <매일 신문> 주필 최석채는 913일자에 <학도를 정치 도구로 이용하자 말라>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 이 사설이 나가자 자유당 사주를 받은 폭력배 20명이 매일신문사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북도경 사찰과장은 백주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주필 최석채는 검거된다.

 

당시는 밀수가 성행했고 부정부패가 창궐하는 시기였다. 산의 나무를 도벌해 파는 걸 군대 용어로 후생사업이라 했다. 1955년은 군대부정의 대표적인 해로 불리운다. 고급 장교들은 고철 수집, 벌목 등 후생사업 뿐만 아니라 사병들의 몫을 횡령, 착복하기 일쑤였다.

 

근본적으로는 정치자금 조달 부정부패가 횡행했다. 원면 사건이 대표적 예다. 미국으로부터 월동용 군 피복과 군용 이불을 만들기 위해 도입된 미화 약 50만 달러어치의 원면을 군용으로 쓰지 않고 상인들과 결탁, 부정 처분한 후, 국방부는 이 돈을 이기붕에게 헌납했다. 국방부와 육군이 결탁해 벌인일이었다. 이승만과 이기붕은 이 문제를 조사하던 국회 분과위원회에 압력을 가해 사건의 전모를 감추었다.

 

민국당 계열의 보수파는 919민주당을 창당한다. 민주당은 이른바 구파신파로 구성된다. 한민당 민국당 계를 승계한 구파는 신익희, 조병옥, 김준연, 윤보선, 유진산 등으로 지주 집안 배경을 가졌거나 해외 유학파가 중심이었다. 김성수의 보성, 동아 인맥이 강세를 보였다.

 

신파는 장면, 오위영, 조재천, 엄상섭등을 핵심 인물로 한 관료, 법조인 출신이 주류였다.

 

민주당 참여를 거부당한 혁신계 야당 세력은 1222일 조봉암, 서상일, 이동화 등을 주축으로한 진보당 창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한다.

 

9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국산 승용차 시발이 등장한다.

 

1210일 중앙극장에선 한국 최초의 여자 감독 박남옥의 <미망인>이 개봉한다. 55년엔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의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히트한다.

 

전후로 베이비 붐세대가 태어난다. 55~60년 기간 합계 출산율은 6.3명에 달했다.

 

53년 장준하에 의해 창간된 <사상계>55년 이후로 3만 부를 넘어서며 점점 영향력을 더해갔다. 5510월호에 쓰인 <권두언 : 소위 위기위식에 대하여>에선 당시 서구를 풍미하던 절망의 허무주의 사조 수입에 대해 비판했다.

 

근래 구미의 일부 인사들이 위기와 절망이라는 패자의 철학을 고창함으로써 자유세계의 지성을 좀먹어 들어가는 것은 진실로 유감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이 패자의 철학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구나 힘과 포부에 차야 할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 이러한 씨를 뿌린다든지, 젊은이들 자신이......제자리에 주저앉아 퇴영무위의 생활에 젖어버린다면 이보다 한심스런 일은 다시 없는 줄 압니다. 저들은 위기니 절망이니 하여도 그것은 오직 관념상 내지 이념상의 희롱에 불과합니다. ”

 

10월 박인환의 첫 단독 시집 <박인환 선시집>이 출간된다. 56년 이른 봄 서울 명동 경상도집에 문인 몇몇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나애심도 있었다. 일행이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으나 나애심은 노래를 하려 하지 않았따. 그러자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갔다. 그래서 탄생된 것이 <세월이 가면>이라고.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서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박인환은 56320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월에 개봉한 이규환의 <춘향전>2개월 동안 12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기록을 세운다.

 

50년대 신흥종교가 창궐한다. 박태선의 전도관, 문선명의 통일교, 나운몽의 용문산 기도원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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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5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25 15:08   좋아요 1 | URL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의 우매함에 새삼놀라워요. 그렇다고 해서 현재에 나아졌나 싶으면 딱히 그렇지도 않구요. 여전히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6-07-25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삼웅... 평전 잘쓰는 분이시죠. 김삼웅 평전은 믿고 봅니다..

시이소오 2016-07-25 17:33   좋아요 0 | URL
저도 김삼웅 쌤, 평전은 전작할 작정입니다. ^^

cyrus 2016-07-25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삼웅 씨가 쓴 절판된 책 중에 친일파에 대한 각종 기록을 정리한 것도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이런 책이 잊혀지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시이소오 2016-07-25 18:34   좋아요 0 | URL
전작해야 할 분이죠^^

2016-07-26 0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26 10:38   좋아요 1 | URL
김영성님. 격려 감사합니다.
그동안의 무지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ᆢ

영성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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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자유당 내에서 이범석과 족청계를 축출하고 이기붕을 총무무장에 임명한다. 이승만은 대한청년단을 이끌었던 안호상도 빨갱이로 몰아 축출한다.

 

11일부터 <서울 신문>에 정비석의 <자유부인>이 연재된다. 단행본으로 출간된 <자유부인>은무려 14만 부가 팔려 한국 출판사상 최초로 판매량 10만 부를 돌파한 책으로 기록된다. 한편 국가와 사회단체들은 열녀, 효부, 절부를 뽑아 모범과 찬양의 대상으로 표창장을 수여하기 바빴다. 장성군 사는 김씨는 2년 동안 고생하는 남편을 완치하기 위해 허벅다리를 도려내여 복역케 하여 표창장을 받았다고.

 

54년은 자유부인허벅다리 부인이 공존하는 사회였다.



 

4, 김성주 살해 사건이 일어난다. 김성주는 서북청년회 등 반공 청년단체의 제 일선에서 활약한 인물이었다. 유엔군 북진시 유엔군 임명에 의해 잠시 평남지사를 맡으면서 이승만 눈 밖에 난다. 김성주는 국가변란 및 이승만 대통령 암살음모 혐의로 구속된다. 이승만은 김성주에 대한 사형 판결을 기대했으나 군법회의에서 7년을 구형한다. 이승만은 원용덕에게 김성주를 반드시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영문 서한을 보낸다. 416일 원의 부하 김진호는 육군형무소에서 김성주를 끄집어 내 사살한다. 이는 비밀로 붙여지고 56일에 김성주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한편 포병 사령관 장은산 휘하에 있던 장군 이기련은, “김성주는 김구 선생 사건의 내막을 알기 때문에 이 박사가 죽였다고 본다고 진술했다.

 

5.20 3대 총선이 열린다. 5.20 선거는 경찰의 곤봉이 당락을 결정했다고 하여,곤봉선거로 불리었다. 후보 등록 방해 수법이 벌어져 조봉암조차 후보 등록을 하지 못한다.

 

7월 하순, 방미에 오른 이승만은 728일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촉구하는 초강경 연설을 한다.

 

현 대통령에 대한 중임 제한 폐지를 위한 헌법 개정에는 전체 의석의 3분의 2136석이 필요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114석으로 22석이 모자랐다. 자유당은 막대한 정치자금을 동원해 무소속 의원 매수작전에 돌입했다. 그 결과 무소속 당선자 23명을 자유당에 입당시킨다.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 연임을 골자로 한 국회 개헌안을 제출한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초대 대통령 연임에 대한 반대가 78.8%였다.

 

자유당은 뉴델리 밀회 사건을 터뜨려 1120, 개헌안을 상정한다. 1127일 표결에 들어갔다. 개표결과 출석 의원 203명 중 찬성은 헌법 개정에 필요한 136표에 한 표 부족한 135표였다. 2033분의 2135. 333......명이기에 부결된 것이다. 부의장 최순주가 부결을 선포했다.

 

그런데 월요일 29일 열린 국회 제 91차 본회의에서 최순주는 개헌안의 부결을 선포한 것은 계산 착오였으므로 이를 취소하고 사사오입의 수학원리에 따라 가결되었다고 선포한다. 자유당은 135.333.......을 사사오입하면 136이 된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웠다. 이게 그 유명한 사사오입이다.

 

69일 공식적으로 상업주의를 표방한 <한국일보>가 창간된다. <한국일보> 사주는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던 장기영이었다. 이해에 기독교방송도 개국하였다. 정부는 기독교 방송과는 별도로 또 하나의 종교방송을 허가한다. 극동방송이었다.

 

문학계에선 카뮈와 싸르트르의 실존문학이 유행하였다.

 

54년엔 18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최대의 화제작은 한형모의 <운명의 손>이었다

이 영화에서 한국 최초로 키스신이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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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7-24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50년대까지 단지, 허박다리를 도려내서 효부, 효자를 표창하는 관행이 있었군요.. 새정부가 들어섰다고 조선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역사는 하루 아침에 개벽되는 것이 아닌듯합니다. 그 이전에 충분하게 축적된 에너지가 어떤 계기로 표출되어서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봤습니다. 시이소오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7-24 18:33   좋아요 2 | URL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여전히 조선 왕조에 머물러 있었던것 같네요.

저도 매번 겨울호랑이님의 격려에 감사드려용 ^^

2016-07-24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24 20:20   좋아요 2 | URL
그게 가장 핵심적인 원인이죠. 지금이라도 숙청해야하는데 ㅠ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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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을 맞아, 절량농가의 규모가 더 확대된다.

 

절량농가는 이른바 입도선매에 내몰려 고통이 가중되었다. 당시의 입도선매란 농사를 짓기도 전에 미리 돈이나 곡식을 얻어다 쓰고 나중에 수확한 걸 고스란히 넘겨줘야 하는 비극적인 게임이었다. 정부는 입도선매 행위가 농민을 더욱 파멸의 길로 몰아넣는다는 판단에서 이를 강력히 단속하였다. 그러나 단속에도 불구하고 입도선매는 성행하였고, 결국 입도선매를 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 빈민촌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

 

입도선매는 오늘날 신용카드를 떠올리게 한다. 혹은 카드론혹은 카드 돌려막기

 

인플래이션은 52년에 절정에 달해 정부는 대응책으로 215일 오전 6시를 기해 통화개혁을 실시한다. 원 단위 화폐 유통을 중지시키고 환 단위의 새 화폐로 교체한다. 1001로 평가절화되어 구화 100원에 신화 1환의 비율로 교환되었다.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국민들은 현금을 쥐고 있기 보다는 앞다투어 물건을 사들였다. 물건 값은 하루에 4배에서 15배까지 폭등했다.

 

120일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출범하고, 35일 소련에선 스탈린이 사망한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한국에서 핵무기 사용을 검토한다. 한국에 핵무기를 사용할만한 전략적 목표물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젠하워는 핵무기 사용을 포기한다. 그러나, 513일부터 평양의 독산댐을 시작으로, 미국은 북한의 모든 댐을 폭격한다. 댐 파괴는 미국 선교사들의 아이디어였다. 브루스 커밍스는 이렇게 말했다.

 

원자탄은 삼갔지만, 미국은 또 다른 신무기인 네이팜탄을 공중에서 쏟아부어 불바다를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북한의 계곡들을 물바다로 만들기 위해 거대한 댐들을 파괴했다. 이는 한국전쟁의 가장 악랄한 측면으로, 이에 대해 쓰고 읽는 일 자체가 곤혹스럽다. 바로 이 때문에 200만 명 이상이라는 엄청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강준만은 이승만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했고, 트루먼 정부나 아이젠하워 정부는 쳬결하지 않으려 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너무 순진한 해석이 아닐까?

 

당시 국민들은 휴전 반대 시위를 벌였다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국민들에게 휴전 찬성의 자유는 없었다. 휴전에 찬성하는 사람은 빨갱이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학살 당할 수 있는 시기였다.

 

휴전 협정이 서명 절차만을 남겨 놓고 있던 618, 이승만은 반공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해 버린다. 이승만의 방해질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소련은 휴전을 원했다.

 

712일 이승만의 바람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다. 미국은 원하지 않았는데??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에 조병옥이 비난하자 이승만은 조병옥을 대통령 암살 음모 사건과 연계하여 육군형무소에 수감한다. 조병옥도 이승만 못지않게 극우 인사였거늘 이승만은 자신에게 대드는 자면 누구건 간에 빨갱이로 몰아 제거해 갔다.

 

빨갱이 잡는 사상 검사 선우종원도 장면 비서실장을 지낸 것이 죄가 되어 빨갱이로 몰렸다.

 

727일 정전 협졍이 조인된다.

 

브루스 커밍스와 존 할리데이는 한국 전쟁의 총 사망자 수는 300만 이상이 거의 확실하며 400만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총 인구 3천만이었던 나라에서 10분의 1이 사망한 것이다.

 

미군은 매일 500대에서 1500대의 폭격기와 전투기를 출격시켰고, 개전 후 19534월까지 26만발의 대, 중형 폭탄, 2억 여발의 탄환, 40만 발의 로켓탄, 150만 발의 네이팜탄을 사용하였다.

 

미 공군 폭격에 의해 북한은 모든 게 파괴되었다. 남은 것은 바위와 돌뿐. 초가집 한 채도 남지 않았다. 존 할리데이는 한국전쟁을 반공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반한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미 존슨 행정부 시절 법무장관을 지낸 반전, 평화주의자 램지 클라크는 한국 전쟁의 본질이 인종말살정책이었다고 주장한다.

 

유대인에 대한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맥락입니다. 우월한 백인 병사들이 열등한 유색인종 전체를 작전, 전투 대상으로 설정하고, 남과 북, 전방과 후방,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살육했던 거죠. 그들의 목적은 한민족의 독립과 자유가 아니라, 미국이 아시아에서 가질 정치, 경제적 이익을 찾는 것이었으니까요.”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세계 초강대 군사국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전쟁동안 미군은 150만 명에서 350만 명으로 늘어났고 연간 군사 예산은 50150억 달러에서 53년에는 500억 달러로 팽창하였다. 국무장관 애치슨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 전쟁이 나타났으며 그리하여 미국을 살려주었다맥아더 역시 한국이 우리를 구원해주었다.고 말했다. 한국 전쟁을 계기로 전 세계는 경제 부흥의 기회를 맞았다. 가장 큰 수혜자는 일본이었다. 일본 수상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전쟁을 신이 내린 선물로 평가하였다. 일본은행 총재 이찌마다 히사또는 우리 재계는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군은 모든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했다. 수백만 장의 빨치산 토벌 투항 권유 전단까지 일본에서 인쇄했다. 일본이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특수 수입은 24억 달러에 이르렀다. 50년 경제성장률은 10.9%, 51년에는 13%를 기록했다. 51년 외화보유고는 94천만 달러에 이르러 미국이 대일 원조를 종료할 정도였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 국민은 경제제일주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55년 자민당이 결성되고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 일본사회는 우경화된다일본은 전범국가로서 응징을 받아야 했지만, 한국전쟁은 일본에게 축복이었다. 단지 일본은 운이 좋았던 것일까.

 

한국전쟁 때 골로 간다는 말이 생겼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학살할 때는 주로 산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총살 또는 생매장을 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램지 클라크에 따르면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잃어버린 전쟁을 불린다. 그는 당시 3천만 인구 가운데 10%가 넘는 민간인이 몰살당한 전쟁을 국제사회가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이라고 말했다.

 

한홍구는 말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왜 미국의 민간인 학살이 주목받지 못했는지 아십니까? 한국전쟁 때 죄 없는 민간인을 조직적, 의도적으로 살육한 그들이 역사를 쓰고, 교육을 하고, 미디어를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계 양심세력들의 힘으로 잊혀진 전쟁기억해야 할 전쟁으로 되살릴 때입니다.” 

 

민간인 학살만큼이나 끔찍스러운 일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100만 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 학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모르는 척하거나 정말로 모른 채 반세기를 보냈다는 점이다. 같은 하늘 아래 이런 엄청난 일들이 묻혀 있음을 애써 외면한 채, 또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상의 삶을 살아왔다.. 수십만 명의 죽음을 50년간 외면해 온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는 학살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학살 은폐의 방조자가 됨으로써 사람된 도리를 다 하지 못한 것이다.”

 


200274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geonocide.or.kr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 회관에서 ’2002 한국전쟁 전후 피학살자 유족 증언 대회를 열었다.

 

범국민위원회가 펴낸 <2002년 민간인 학살 총서>에서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이자 성공회대 교수인 김동춘은 한국의 국가는 피학살자들을 세 번 죽인 셈이 된다.”고 말했다. 전쟁을 전후해 저질러진 학살이 첫 번째라면, 1960년대 당시 진상균명 요구를 탄압한 것이 두 번째였고, 유가족과 자식들을 모두 빨갱이로 취급해 1980년까지 연좌제로 묶어 탄압한 것이 세 번째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들춰내는 것 자체가 반국가적 행동으로 탄압받아 왔기 때문에, 사실을 알고 있는 당사자는 생존을 위해 침묵했으며, 좌익 혐의를 받지 않으려고 계속 여당만을 지지해왔고, 그들 자식들은 오히려 연좌제등의 불이익을 당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리하여 생존자와 유족들은 자식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봉건시대 천형이 이와 같았을까?”

 

20035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통합특별법 쟁취 투쟁본부는 한국전쟁 때 억울하게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해원굿을 국회 앞에서 열었다. 투쟁 본부에 따르면, 전주, 강화, 거창, 고양, 구미, 나주, 단양, 문경, 사천, 산청, 순천, 여수, 연동, 제주, 진도, 포항, 함평 등에서 집단학살 증언이 이어졌으며 한국전쟁을 앞뒤로 학살당한 민간인 숫자가 10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20043월 국회는 한국전쟁 휴전 이전 학살 진상규명에 관한 통합 특별법안을 부결시켰다.

 

85일부터 포로 송환이 시작되었다. 유엔군 측은 송환을 희망한 공산군 포로 75823명을 돌려보냈고, 공산군 측은 12773명을 돌려보냈다. 전쟁 포로 88명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택했다. 북한군 포로 74, 남한군 포로 2, 중국군 포로 12명이었다.

 

최인훈의 <광장>은 당시의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는 발표될 수 없는 소설이었으나, 4.19 덕분에 가능했가.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맑은 햇빛 아래 뭇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산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 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 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많은 국군 포로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한국전쟁으로 득을 본 사람들은 누굴까. 한반도에선 이승만과 김일성이었다. 이승만은 남한에서 반공주의를 더욱 확고한 국가 이념으로 정립할 수 있었고, 김일성은 김일성 유일 제체를 반석에 올려 놓았다.

 

여전히 강준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 미군은 원치 않았는데, 이승만이 요구한 걸로 기술한다. 세계사를 비춰보았을 때,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런 전쟁통에 극장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나이아가라>,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다방도 늘어났다. 명동이 번성해지자 이후 충무로에 다방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친미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숭미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숭미주의의 선봉엔 이승만이 이었다. 미제 물건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아이들은 강냉이 가루, 우유 가루에 환장했다. 교회에 가면 맛볼 수 있었다. 미국 밀가루를 얻기 위해 교회에 가는 밀가루 신자들이 속출했다. 기독교는 또한 반공의 보증수표였다. 남한 교회들은 북한을 사탄’, ‘마귀’, ‘악마로 표현했다. 북한 교회들은 미군을 악마로 표현했다. 반공은 친미였고 친미는 곧 친기독교를 뜻했다.

 

일본의 비교문화 정신의학자인 노다 마사아키는 일본의 패전 후 일본인에게는 바꿔치기에 의한 물질주의가 범람했다고 말한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통해 기존 신분제는 폐지되었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낳았다. 사람들은 주로 파벌을 짓기 시작한다. 전쟁 직후, 혈연, 지연, 학연으로 구성된 조직들이 급속히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전쟁 후, 사람들은 달라졌다. 석달 동안 피난을 마치고 돌아온 권정생은 이렇게 말했다.

 

서로 믿고 얘기를 나눌 이웃이 없어진 것이다. 형제끼리도 사촌끼리도 사돈간에도 입을 다물고 지냈다. 마을 남자들 중엔 모병으로 국군이 되기도 하고 인민군 의용군으로도 갔다. 토벌대로 가기도 하고 공비가 되기도 했다. 그 어느 쪽도 본인 의사와는 다르게 서로가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살벌한 분위기는 여자들과 아이들한테도 미치게 되었고 가치관의 혼란은 그 당시 우리들의 정신 성장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흰색도 검다고 가르치면 그냥 검은색으로 따라 배워야 했고 고양이가 개로 둔갑하는 세상이었다. ”

 

극단주의 문화는 위험을 무릅쓰는 문화를 창출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피난민은 3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어느 지역을 가든지 경찰과 우익 청년단원들에게 빨갱이 색출심사를 받아야 했다. 월남인에게 반공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다. 한편 월북자 가족들 역시 연좌제를 넘어 국가권력의 일상적 감시와 시달림 마저 받아야 했다.

 

53년의 3대 히트 가요는 <굿세어라 금순아>, <꿈에 본 내 고향>, <이별의 부산 정거장>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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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2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현대사는 알면 알수록 끔찍하군요. 역사 교과서를 악착같이 개정하려고 한 박근혜가 이해갑니다...

시이소오 2016-07-22 15:39   좋아요 0 | URL
알면 알수록 끔찍하다는 말씀이 박히네요^^;

2016-07-22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22 16:10   좋아요 0 | URL
아, 봐야겠네요. 추천해주셔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22 1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월남전에서 악랄했던 네이팜탄이 이미 한국전쟁에서 사용되었군요..오늘의 전쟁은 내일 전쟁의 연습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시이소오님^^

시이소오 2016-07-22 16:20   좋아요 3 | URL
저도 한국전에서 세균전을 벌이고 네이팜탄을 썼다는걸 이 책 읽고 알았네요.
네이팜탄으로 북한 땅은 거의 초토화 됐더군요.

저도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님도 즐거운 주말 되세요 ^^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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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 폭탄을 투하했다는 주장이 소련, 중국, 북한에 의해 제기되었다. 6월 미국의 세균전 감행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국제과학조사단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구성되었다. 조사에 참가했던 영국 학자 죠셉 니담은 미국이 세균전을 수행했다는 것을 97%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심지어 전범으로 판명받은 일본인 세균 전문가를 재고용하기 했다. 200072일에 방영된 MBC TV<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일급비밀! 미국의 세균전>은 미국 세균전에 대한 새로운 증언과 증거들을 제시했다.

 

51년 한국의 내정을 취재하고 간 외국 기자들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쓰레기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격이라고 혹평을 했다.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사건을 보고 내린 결론이었지만 부산 정치 파동에 대한 평가로 또 다시 인구에 회자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511130일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52128일 표결에 들어갔는데 재석의원 163명 부결이 143표였다. 이에 이승만은 국회의원이 잘못하면 국민의 투표로써 소환한다는 협박 성명을 냈다. 521월 말부터 부산에는 백골단, 땃벌떼, 민족자결단 등 각종 우익단체들이 살인 국회를 해산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지방선거에서 자유당은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526일로 예정돼 있는 내각제 개헌안 표결을 앞두고 이상한 일들이 잇따라 일어난. 부산 금정산에 무장공비가 출현, 미군 2, 한국군 3명을 사살하고 도주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헌병사령관 원용덕이 발표한다. 사회분위기는 살벌해지고 얼어붙었다. 나중에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진다.

 

이승만은 525일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526일 국회의원들이 등원하기 위해 탄 출근 버스가 크레인으로 헌병대에 끌려간다. 다음 날 12명은 국제공산당과 결탁했다는 혐의로 투옥된다.



 

이즈음 이승만은 전 세계 언론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욕을 얻어먹고 있었다. 마닐라에서는 이승만을 베테랑 파시스트라 불렀고 미국 <워싱턴 스타>는 이승만을 파시스트라 비난했다.

 

625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진다. 의열단원 출신인 유시대 (당시 62)가 이승만 뒤에서 권총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되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조작의 냄새가 징후한 사건으로, 이후 이승만을 지지하는 관제 시위에 불을 지핀 격이었다.

 

71일부터 국회 임시회의를 개최하기 위한 의원들의 강제 연행이 집행된다. 경찰과 계엄군은 국회의원을 잡아 임시의사당에 연금시킨다. 발췌개헌한 기립 표결에 들어가 출석의원 166명 가운데 163명의 찬성으로 통과된다.

 

미군은 거제도에 대규모 포로 수용소를 설치, 176천 명을 수용했다.


미군은 친공, 반공 포로를 마구 뒤섞인 채로 수용했는데, 이게 비극의 씨앗이었다. 거제 포로 수용소는 비인간적인 처우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미군의 갈등보다는 해방동맹이라는 친공 포로조직과 대한반공청년단이라는 반공 포로조직 사이의 유혈극이 더 빈번하게 발생했다.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의 가장 큰 난제는 포로송환 문제였다. 제네바 협정 118조에 따르면, 전쟁 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지체없이 석방, 송환되어야 한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미군측은 이를 무시하고 자유송환원칙을 고집한다. 미국은 왜 이리 자유송환에 목을 맸던 것일까.

 

미국에게 포로 문제는 단순히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전쟁 포로 얼마를 교환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이념성을 다투는 이념전쟁 자체였고 그것에서의 승리야말로 미국에게는 위신과 명분, 그리고 이데올로기 싸움에서의 승리로 보였던 것이다.”


623일 미군은 500대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해 압록강에 위치한 수풍댐과 10개의 수력발전소를 폭파한다. 7~8압력펌프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미군 폭격은 더욱 강화된다. 8월에는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78개 도시와 마을을 집중 폭격하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한다. 829일 평양 폭격에서만 6천 명이 사망한다.

 

지상전의 경우, 가장 치열한 혈투는 백마고지 전투였다. 106일부터 열흘간 1만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10일 동아 24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85일 치러진 선거에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함태영이 당선된다.

부정선거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무도 함태영이라는 사람에 대해 몰랐다. 이범석이 181만 표를 얻은 반면, 함태영은 294만표를 획득했다.


816일 이승만은 제 2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모윤숙은 낙랑클럽을 연다. 고문은 김활란이 맡았다. 고급 콜걸이었다고 해야할까. 외국인을 상대로 한 접대 행위를 서슴지 않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전쟁 중에는 밀수가 극성을 부렸다. 고철을 팔아 1년 만에 17배로 성장한 회사는 이병철의 삼성물산이었다. 구인회의 럭키 화학도 전쟁 통에 큰 성장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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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9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19 15:56   좋아요 2 | URL
전쟁통에 돈 번것들, 죄다 이승 만한테 사바사바한 덕분이죠. 이런것들이 오늘날 대기업이라고 떵떵거리며 사축 만드는거잖아요.

하여간 이승만이 저지른 패악질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네요.

기억의집 2016-07-19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중인데도 국회에서 표결하기도 하고 그랬군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모르고 이승만 앞장이들이 떠들어대는 대로 믿었을 것 같아요. 모윤숙과 김활란...이미지 세척 제대로 한 신여성들이죠.

시이소오 2016-07-19 19:46   좋아요 1 | URL
서중석 쌤 책 보면 전쟁통 부정선거가 기가 찰 정도네요. 선거장에 군인 총들고 있고 누구 찍었는지 다 보이고, 유권자 수보다 투표자 수가 더 많아서 퍼센트 다시 맞춘다고 난리 .
아, 저런 ㅂㆍ러지를 국부라니 ㅋ

모윤숙은 친일로 시작해 이승만 박정희 때도 빌어먹었으니
, 참 대단하신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