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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로부터 온 편지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6년 3월
평점 :
나는 이 작가를 완전히 오해했다. 그가 번역한 카뮈의 <이방인>에 나는 별 네 개 반을 줬었거늘. 작가(출판사 사장이라는데 어느 출판사 사장인지 내 관심 밖이고, 아무리 쓰레기같은 책이라도 어찌되었건 책을 썼으니 작가라고 부르자)의 번역에 전적으로 공감하긴 어려웠지만, 번역에 대한 작가의 철두철미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착각이었다. 이 책은 카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번역 문제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쩌다보니 카뮈 <이방인>이 됐을 뿐이다.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만 봐”다.
조금 더 풀어 쓰자면, “김화영은 틀렸고 내가 맞았다.”다.
애초에 작가의 구상은 순수했을 것이라 믿는다. 블로그에 주 단위로 번역을 올렸던 게 작가의 패착이었다고 생각한다. 블로그에 주마다 글을 올리게 되면서 비난의 댓글로 궁지에 몰리자, 잘못된 번역을 바로 잡으려 했던 애초의 순수한 의도는 변질되고 만 게 아닐까. 작가는 여러 부분에서 오역을 바로 잡았다. 그러나 블로그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는 한, 두 개 오역을 바로잡는 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그 어디에도 출구는 없었다.” 이제 김화영 번역은 하나부터 열까지, 반드시, 기필코 잘못 되어야만 한다. 그러다보니 작가는 어감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는 번역도 편집증 환자마냥 시시콜콜 딴지를 건다.
‘딴지 번역’이 강물처럼 흘러 넘쳐 일일이 언급하자니 손만 아프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이정서는 tout de suite를 ‘곧’으로 번역한 김화영이 엉터리 번역을 했다며 호되게 비판하면서
‘즉시’가 맞다고 우긴다.
‘즉시’랑 ‘곧’이 “비슷해보여도 완전히 다른가?”
뭣이 다른디? 뭣이 다르냐고!!
작가는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서는’ 이라는 김화영 번역에 대해 때려 죽일 듯 비난하면서 ‘개를 산책시키는’ 번역이 맞다고 아득바득 우긴다. 이게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냐고!?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라고 호언장담하면서 내미는 증거들이 저 모양이다.
개소리!!
네년이 날 골려 먹으려 했겠다. 나를 골려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주지 (김화영)
니가 날 우습게 봤어. 니가 날 우습게 봤어. 내 생각이 간절하도록 만들어 주지 (이*언)
네가 나를 속여? 나를 배신해? 앞으로 날 속이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주지 (김*령)
네가 날 골탕 먹였어. 네가 날 골탕 먹였다고. 골탕 먹이는 게 뭔지 내가 제대로 가르쳐주지. (최*철)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위의 번역은 다 틀렸다.
그가 내세우는 ‘옳은’ 번역은 이렇다.
‘너는 나를 농락했어. 나를 농락했다구. 나를 농락했다는 걸 깨닫게 해주지’
(너야말로 나를 농락했어! 나를 농락했다구!!)
어떤가? 다른 번역가들의 번역은 틀리고 이정서 역만 맞나?
내가 해석하면 이렇다.
‘니가 나를 갖고 놀아?날 갖고 놀았단 말이지.
날 갖고 놀다가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주지’
내가 이정서를 비난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렇다. 두 사람의 번역이 있을 경우, 누군가의 번역이 옳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무엇일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이방인>의 경우, 여러 불어 전문 번역가들이 판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화영 번역은 죄다 틀렸고 자신의 번역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정서의 근거는 무엇인가?
영어 번역이다. 이정서에게 신은 누구인가?
<Stranger>다. <Stranger>만이 옳고 <L’etranger>는 참고서요, <이방인>은 죄다 틀렸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정서, 대식씨는 번역하지 않았다.
영어 번역본을 베낀 것일 뿐.
그럼에도 자신이 번역한 <이방인>만이 옳다? 왜 이러는 걸까? 작가가 불어에 완전히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불어를 조금이라도 공부했더라면 무식할래야 저렇게 무식할 수는 없다. 불어를 공부한 사람들이 보기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해석이 흘러넘친다. 심지어 그는 <이방인> 번역을 위해 불어 번역가를 고용해 놓고도 자신과 다른 번역을 내놓았다는 이유로 전문 번역가를 해고한다. 이건 뭐, ‘출판계의 최순실’? 출판사 사장의 정신 나간 지시에 예스만 외친 ‘언어감각이 특출한’ 팀장은 ‘출판계의 안종범?’ 거의 제정신이 아니다. 대식씨는 번역을 할 게 아니라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야 한다.
이정서는 김화영을 번역계를 농단한 사악하면서도 악랄한 독재자로, 자신은 부당한 권력과 권위에 맞서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혁명가처럼 프레임화한다. 그러나, 실상 그는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편집증 환자에, 영어를 신으로 모시는 사이비 사도에 불과할 뿐이다.
이정서는 카뮈가 실제로 자신에게 편지나 메일을 보낸다는 소설적 기법을 차용한다. 이보다 더 천박하고 유아틱한 상상력을 상상해내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오글거려 죽는 줄 알았다.
‘뫼르소의 살인’이 정당방위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언급하자니 한숨만 나온다. 최근에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사건>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뫼르소가 아닌, 뫼르소에게 살해당한 어느 이름도 없는 아랍인의 관점으로 씌여졌다. 나는 왜 뫼르소에게 살해당한 아랍인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우리의 선입견을 망치로 내려치는 신선한 관점이 아닌가? 거기에 비하자면 뫼르소의 살인은 정당방위라는 작가의 주장은 코흘리개들의 징징거림, 똥파리의 웽웽거림처럼 시끄럽기만 하다.
카뮈 <이방인>의 주제가 “뫼르소의 살인은 정당방위”인가?
카뮈가 작가에게 뭐라고 편지를 보내셨길래?
어떻게 알았을까잉~~
“엄마가 돌아가셨다”가 맞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내가 돌아가시겠다.
작가는 자신만이 옳다고 개거품을 물고 주장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책상에 앉아 아베세데부터 공부하는 게 어떨까.
내 생각으론 이정서의 <이방인>은 완벽한 노이즈 마케팅이었다.
출판사 사장의 비열하고도 야비한 상술에 죄다 놀아난 셈이다.
(너야말로 나를 농락했어! 나를 농락했다구!!)
작가는 돈 좀 벌었으면 이제 생각이라는 걸 하기 바란다.
Pour la première fois depuis bien longtemps! 말이다.
위 불어 문장은 ‘당신 번역, 즉 오랜만에 다시’가 아니라 ‘나의 해석, 즉 ’처음으로 오랫동안‘으로 읽어주길 바란다.
(어둠속에서 스크린을 노려보고 있을 편집증 사장님께. )
<검색해보니 작가는 새움출판사 사장인 이대식 씨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