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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반양장)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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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뉴스’, 혹은 악플과 실체의 상관관계

카뮈 <이방인>이 이제 입소문을 통해, 우리 사회에 새롭게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계속해서 올라오는 제대로 된 리뷰들과 교보문고를 중심으로 전 서점에서 골고루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알라딘 한 서점만 두고 보았을 때는, 역자노트를 뺀 페이퍼 백 <이방인>을 낸 6월 이후 꾸준히 판매가 늘어, 지난 주 고전소설 주간 2위에까지 올라왔었다. 그런데, 기존 가장 많이 읽히던 <이방인>의 판매를 넘어서고, 내가 다시 카뮈의 <페스트> 연재를 시작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때문인지(^^;), 갑자기 이런 악플이 또 하나 올라왔다.

*
이런 괴상한 번역 읽고 기성 권력에 대항하는 지적 레지스탕스가 된 양 행세하지 맙시다. 유사번역
가지볶음 ㅣ 2018-09-21 l 공감(0) ㅣ 댓글(0)

리뷰는 길게 쓸 필요도 없다. 이런 이들의 목적은 별점 하나를 주면서 기존 것을 까 내리는 것으로 족한 터이니. 실제로 9점대이던 별점은 7점대로 내려앉았고, 책 내용을 보러 들어온 독자 눈에는 가장 맨 위에 올라와 있는 저 글만 보일 수밖에 없다. 내가 독자라도 저런 악플이 달린 책을 굳이 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책판매는 급감했고, 오늘보니 순위가 15위다)

저런 이들의 공통점은 저 주소가 급조된 유령의 것이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런 악플 하나 하나가 별게 아닌 듯해도 실제로는 통한다는 사실일 테다. 우리 어르신들의 인식을 갉아먹는 북한에 대한 저 수많은 가짜뉴스들처럼 말이다. 그러니 저들은 멈추지 않는 것이다.

좀더 근원적인 부분을 들여다보면, 저런 일을 별 죄의식 없이 벌일 수 있는 이의 인성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결코 책을 읽지 않는다. 가짜 뉴스든 악플이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공감하는 책은 읽지 않는다. 그냥 주워들은 것을 짜깁기해서 제 나름으로 정리해 사고하는 것이다. 저렇듯 제법 그럴싸한 수사를 사용해.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많은 독서가 꼭 좋은 것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유 없는 베스트셀러나 엉터리 책들은 오히려 개인의 인성을 망쳐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조건 많은 책을 읽으면 좋다는 말을 듣고 자랐고, 하고 있지만, 나는 경험적으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외곬의 독서는 오히려 책을 읽는 이들에게 바른 인식을 키우기보다는 아집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방송이나 언론을 통해 책을 추천하고 권하는 이는 정말 중요하고 신중해야 한다.
한 권의 책이 그야말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평생 책을 사보지 않다가, 유명인이 정말 좋은 책, 재미있는 책이라고 해서 큰맘먹고 사서 읽었는데, 정말 좋은지도, 재미있는지도 모르겠다면, 그 사람이 다시 책을 사볼 생각이 들기 까지는 다시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좋은 책으로 인성이 함양된 이에게는 결코 ‘가짜뉴스’나 유령이 쓴 ‘악플’ 따위가 통할 리 없다.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는 가짜 뉴스나 악플이 횡행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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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정석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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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에게

‘번역의 정석’이 #알라딘 서점에서 판매를 떠나, 조롱을 받고 있다는 소식에 들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주 익숙한 아이디 하나가 눈에 띈다. ‘#현종’.

초기에 <이방인>이 출간되었을 때, 출판사 블로그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악플을 달아대던 몇몇이 있었다. 그 수준에 미루어볼 때 적어도 정통으로 불문학을 공부한 사람들 같았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출판사 관계자인지, 대학 교수인지 그건 알길이 없다. 이분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때, 이분은 내용 속에 등장하는 ‘아랍인’과 ‘무어인’ 개념을 동일시 하면서(아랍인 사내와 무어여자가 친남매라는 주장), 카뮈가 그렇게 달리 쓴 것은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제법 그럴 듯한(?) 주장을 줄기차게 해댔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그 증거라며 카뮈의 창작노트 내용까지 증거로 제시했다가 그조차 오역에 오인한 것으로 밝혀져 망신을 당하고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제 3년이 지나 갑자기 나타나, 이방인 밑에는 못 달겠던지 <번역의 정석>밑에 나를 비난하는 아주 긴 장문의 글을 달아두었다. 거의 박사 논문 수준이다. 물론 그때 당시의 자기 주장은 싹 빼고, 역시 당시에 온갖 잡다한 자료들을 끌어다 잘난 척하던 “indifference”라는 자(그들 세계에선 거의 레전드인 듯, 모두 그의 블로그 글을 인용한다. 어디 교수쯤으로 추측된다)의 글을 가져다 다시 그럴듯하게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일단 3년 전 <이방인> 사태 당시 오고 간 그 숱한 논쟁들을 여기에 다시 옮길 수는 없다. 너무나 길고 많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지금 이자가 펼치고 있는 저 주장들은 이미 그때 다 깨어졌던 것들이다. 별수없이 당시 글 하나를 링크 할 수밖에 없다(다시 김모 교수님, 존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됨을 진심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분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그 일로 교수님을 호출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http://saeumbook.tistory.com/451?category=471278)

이분이 주장하는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한 가지만 확인해 두고 가기로 한다. (자신의 글을 카피해갈 수 없게 해두어 불가피하게 내 의견만 달아둔다).

뫼르소의 ‘정당방위론’은 이분 말대로 결코 나 혼자의 ‘괴이한’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외국에선 기본적인 사항인 것이다.

그럼에도 논쟁 당시, ‘현종’을 비롯한 저이들은 역으로 뫼르소의 행위는 ‘정당방위가 될 수 없다’는 증거라며 ‘프랑스 형법학자가 정당방위가 아니라는 논지의 글을 쓴 게 있다’고 원문의 일부를 인용하며 설명했다.

그에 대해 한 블로거가 저들의 말을 확인해보고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당시 그분의 말을 그대로 카피해둔다.)

-
“일단 프랑스 형법학자가 아니라 미국 로스쿨 교수입니다.

본인의 주장을 위해 논문의 일반적 정의까지 바꾸진 맙시다. 논문은 어떤 문제에 대해 학술적 의견을 개진하는 글이지 “대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어떤 사실에 대해 다른 의견을 주장하고 그 증거와 논리를 펼치는 거"” 아닙니다. 물론 그런 논문들도 있습니다만 그게 논문의 일반적 정의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논문들은 서론이든 어디든 자기 글이 기존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는 점을 명시해줍니다(그게 바로 연구 성과니까요). 제가 링크를 건 저 논문에는 기존의 정당방위 주장을 비판한다는 등의 말이 전혀 없습니다(너무나 당연한 걸 비판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

....

2. indifference 님. 왜 거짓말을 하십니까? 시카고대학 로스쿨 교수의 페이퍼까지 봤으면

전 세계적으로 뫼르소의 살인이 정당방위로 이해되고 폭넓게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아셨을 텐데

왜 그게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구글 들어가서 ‘Meursault, self-defense’ 쳐보세요. 너무 많아 셀 수가 없네요.

심지어 님이 제시하신 조너선 머서마저도 기본적으로 ‘자기 방어(self defense)’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의 논문을 제대로 읽기나 하셨습니까? 그는 분명 전지적 관점에 선 독자와 달리 판사와 배심원들은 뫼르소가 살인 이전에 처한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내렸지만, 독자들은 그게 정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영리하게도 그는 문학작품의 특수성과 일반적인 법리까지도 구분하고 있죠. (우리가 다루는 게 ‘문학작품’임은 잊지 않으셨죠?)
이 정도면 정당방위가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견해”라는 님의 빈정거리심이 얼마나 엉터리이셨는지 아시겠죠?

....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이분 역시 그때 이후, 저 현종이나, indifference처럼 사라져 버려 무엇을 하는, 어떤 분인지 알 수는 없다. 이분 역시 어느 대학의 교수쯤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저들처럼 대놓고 나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 이분 역시 내부 고발의 성격이 짙은 글들이었으니...

현종님께 정중히 부탁드린다. 이제 그 정도 하셨으면 되지 않았을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순수한 독자 리뷰들을 보시라. 이제 새로운 <이방인>을 읽고 진정으로 카뮈와 뫼르스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독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당신들 말에 속은 독자 가운데 누구는 나보고 <이방인> 번역을 잘한 게 아니라, 내가 임의로 창작을 해서 쉽게 읽히게 만들었다는 주장까지 펼친다. 그럼 내가 카뮈보다 소설을 더 잘 썼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인데, 너무 기가 막힌 주장 아닌가? 당신들은 <이방인>이 난해한 소설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런 비상식적인 주장조차 부끄러운지 모르고 펼치고 있는 셈이다.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당신들은 불어에 대한 기득권이라도 가진 양, 학자연하면서 말도 안 되는 자료들을 끌어와(여기서도 장정일씨의 발언까지 인용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도 이전에 몇 번이나 밝힌 바 있다. 자꾸 나를 한소리 또하고, 또하게 만드는, 지루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마시라) 순수한 독자들을 바보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당신들이 얻는 게 무언가? 당신이 김 모 교수 본인도 아닐 터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

3년 전 내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더 이상 답하지 않겠다며,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기억하시려는지 모르겠다. 그때 나는, ’모든 걸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제 어느 정도 그 시기에 이르렀다고 믿었었는데, 결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아직 그 시간이 조금은 더 필요할지 모르겠다. 내가 서둘 일은 없는 것이다.
그때까지 더욱 건강하시라.

PS.
지금 당신이 다시 끄집어낸, 그 케케묵은 논쟁거리 말고도 <이방인>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시간이 있으시면 들러보시라.
https://www.facebook.com/camus2014y/posts/2116202828666750
#이방인 #알라딘서점 리뷰 #현종 #번역의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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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새움 세계문학전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장현주 옮김 / 새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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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있어서의 주.

 

번역을 하다 보면 피치 못하게 주를 달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의 주는 정말 중요한 것이다. 그 주를 어떻게 달아주었는지만 봐도 역자의 능력이나 정성이 가늠된다.

<인간실격>의 주 몇 개를 보고 나는 짐짓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헤헤노노모헤지(へへののもへじ)”에 대해서다.

영광이네요. 많이 드세요.”

이 사람 빨리 안 가나, 편지라니,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군. 헤헤노노모헤지(へへののもへじ)*라도 그리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_<인간실격> 새움출판사, 장현주 역, 본문 p.63

 

역자는 직역의 원칙에 따라 원문을 살리면서 각주로,

<히라가나의 ヘヘ(눈썹)’ ‘のの()’ ‘()’ ‘()’ ‘(얼굴 윤곽)’의 일곱 글자로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놀이.>라고 설명을 붙였다. 다소 서툴지만 귀여운 그림과 함께.

헤헤노노모헤지(へへののもへじ)는 히라가나를 배울 때 외우기 쉽게 글자로 얼굴을 그리는 놀이라고 하니, 일본어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대개 알 듯한데, 다른 역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궁금해서 살펴보았다.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 분하고 있다니 영광이네요. 우유 많이 드세요.”

이 사람 좀 빨리 안 가주나. 편지라니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게. 틀림없이 가갸거겨 따위를 긁적거리고 있을 게 뻔합니다.

_M,<인간실격> 2004년 초판 출간, 20062, pp. 56-57

, 영광이네요. 많이 드세요.”

이 여자, 어서 좀 내려가줬으면. 편지 쓴다는 핑계를 대다니, 그 속이 훤히 보인다. 분명 가나다라만 줄줄이 쓰고 있을걸.

_S, <인간실격> 20186, p.61

 

과연 이 두 역자 분은 헤헤노노모헤지를 정말 몰랐을까?

당연히 알았지만 의역을 한 것이어도 문제고, 몰랐다면 더 문제인 것이다. 독자들만 바보로 만들고 있는 셈이니까.

번역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각주 하나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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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정석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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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번역서를 출간하면 여지없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악성 댓글들…….

0개 주는 법은 없나? 매번 자기 번역이 짱이라는데 초벌 번역보다 못한 수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구글 번역체로 가득한 책. 정말 번역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만든다.”

.

.

서점에 책도 나가기 전부터 바지런하게 번역서 밑에 글을 다는 저분들의 마음은 도대체 무엇일까?

따라가다 보면, 짐작되는 바는 있다.

구글에 이정서검색해 보세요. 이 출판사가 소위 이방인 번역 논쟁 때도 노이즈 마케팅으로 비판을 많이 받으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어떤 목적을 지니고 본질은 팽개쳐 둔 채 선동하고 왜곡시키는 자들로 인해 겪는 피해는,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사실 모른다. 어떤 대응도 사실 무의미하다. 오히려 말이 말을 부를 뿐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읽는 이들은 거의 없다. 어떤 사실이 개인에게 전달될 때쯤에는 이미 많은 부분이 생략되고 왜곡되고 굴절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 마음먹고 한 사람을 죽이고자 마음먹는다면 법적인 방법이 아니고서야 그걸 막아 낼 길은 없다. 선거철이면 흔히 등장하는 댓글을 통한 여론 조작과 같은 맥락이다. 내가 정치인 이재명을 보면 안타까운 것도 그런 이유...

독자나 순진한 시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섣불리 누군가의 선동에 현혹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온다. 헛정보를 읽는 데 시간을 낭비한 것은 둘째치고 사회에 대해 깊은 불신감을 키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필요악이 되어 버린 SNS 시대, 독자들이, 주권자들이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

아주 오래 전 쓴 글로 <번역의 정석> 책에 실려 있기까지 한 글인데, 여전히 조금도 변함없이, 내용 형식까지 똑같이 올라오는 글들. 경쟁상품에 별 하나 주고 악담하기. 이제 이런 자들은 버젓이 책을 읽었다고까지 하고 나선다.

우리 사회와 출판이 살려면 이런 자들부터 솎아내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인지 훨씬 교묘해졌다.

 

*

실제 관련기사 하나

 

번역의 정석

분명하게 쓰는 사람에게는 독자가 따른다. 난해하게 쓰는 사람에게는 주석자가 따르고.”

 

알베르 카뮈는 이런 신념으로 작품마다 문장을 명료하게 썼다. 그러나 그의 명저들은 한국에서 오역투성이로 번역돼 출간됐다. 가령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이유가 단지 햇볕 때문이라는 것도 오역에 기인한다. 문맥을 살펴보면 뫼르소의 살인은 정당방위였다. 한 신진 번역가는 이 같은 주장으로 2014년 문단에 논란을 일으켰다.

 

신간 번역의 정석은 당시 논란의 당사자인 저자가 한국 번역문화의 문제점을 질타하고 바른길을 모색하자는 취지로 쓴 책이다. 저자는 작가가 쓴 문장은 하나라며 번역은 그 하나의 의미를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번역에도 수학처럼 답이 있다는 얘기다.

번역가는 작가가 고뇌하면서 쓴 문장은 가능한 한 그대로 옮겨야 한다. 그러자면 작가가 쓴 부사, 형용사, 쉼표, 마침표, 접속사 등도 함께 옮겨야 한다. 직역이 번역의 정석이다. 의역은 직역이 잘 안 될 때 역자들이 쓰는 쉬운 타협 수단이라는 것이다. 문장이 윤문될 때 소설의 맛은 죽는다. 의역마저 오역일 때 독자는 틀린 내용을 읽고 잘못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불멸의 고전 노인과 바다》 《어린 왕자》 《위대한 개츠비등의 오역을 바로잡아보면서 적확한 번역의 길을 제시한다. 외국어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면서 국내 번역계도 성찰을 통해 한 단계 도약할 전기로 삼을 수 있는 책이다.(이정서 지음, 새움, 352, 15000) 2018.8.9.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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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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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금까지의 <이방인>오역 논쟁을 지켜보자니, 카뮈 <이방인>에 대해 독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뫼르소가 총을 쏜 이유가 단지 태양 때문인가? 부조리 소설이고,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현재의 번역본도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원래 카뮈의 <이방인>이 어떤 내용인지 설명해보겠습니다.

기존 번역본들, 김화영 교수 번역본이 아니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장면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1. ‘이년 저년이라는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생양아치 같은(포주인) 레몽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정부인 여자를 피가 나게 때리고 쫓아낸 뒤, 그에 앙심을 품은 그녀의 오빠가 레몽을 해치기 위해 바닷가까지 따라와서는 싸움이 벌어진다. 뫼르소는 질이 안좋은 레몽이라는 사내의 요청에 따라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레몽과 비슷한 수준의 친구인 마송의 해변가 오두막에 놀러와 있다가 우연히 그 사건에 연루되고, 해변에서 다시 우연히 그 여자인 오빠라는 사내와 단둘이 마주치게 되었을 때,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총을 쏘았다. 뫼르소는 이후에도 쓰러진 상대를 향해 연속해서 네 발을 더 쏘아 그 자리에서 사내를 확실히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법정에서 재판장이, ‘왜 그랬냐고 묻자, 무덤덤하게 태양 때문에그랬다고 대답한다.

(민음사판 김화영본을 비롯한 기존 번역서들)

 

그런데 새롭게 번역된 실제 카뮈의 이방인은 저런 내용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이렇습니다.

 

2. 외모는 험상궂지만, 남자의 의리를 앞세우는 창고관리인인 레몽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정부라고 믿고 생활비를 대주고 있던 여자가 있었는데, 실제는 그 여자의 뒤를 봐주는 '기둥서방'이 있었다. 레몽은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하여 이전에는 결코 손을 댄 적이 없었지만여자를 때려서 쫓아낸다. 그에 앙심을 품은 기둥서방이 레몽에게 복수하기 위해 해변까지 따라오고, 친구인 레몽을 따라 여자 친구와 함께 마송의 해변가 오두막에 놀러와 있던 뫼르소는, 이들의 싸움에 연루된다. 급기야 사람들을 피해 혼자 샘을 찾아왔던 뫼르소는 그곳에서 그 아랍사내와 마주치게 되고, ‘시뻘건햇볕을 피하기 위해 샘 쪽으로 한걸음 더 다가오는 뫼르소를 보고 자신에게 다가온다고 오해한 아랍사내는 먼저 칼을 빼들었고, 다시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눈을 찔러오는 그 칼날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약간의 텀을 두고엄마의 장례를 치르며 느꼈던 머리 위 오후 2시의 폭발하는 태양에 어지럼증을 느끼며 몽롱한 상태에서 네 발을 더 쏘아 사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법정에서 재판장이 왜 그랬냐고 물었을 때, 뫼르소는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검사가 막 사형을 구형한 뒤였던 것이다), ‘자기도 터무니없는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새움출판사 이정서본)

 

기존 이방인을 읽은 독자님들은 아마 1번 내용에 대해 수긍할 것이고,

새움 이정서본을 읽은 분들은 1번 내용을 보면서 좀 어이없으실 겁니다.

또한 둘 다를 보신 분은 이야기가 섞이면서 어디가 크게 다른지 잘 모르실 겁니다. 다만 이전에 몰랐던 것 같은 내용은 이해하게 되었을 겁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하면, 바로 소설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소설은 개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있음직한 비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려면 모든 사건이 인과관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소설이 보통 산문과 다른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잘 읽히는 것이고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잘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이야기가 잘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뭔가 맥이 끊긴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우선 저기, 1번 요약본을 보십시오. 자세히 보면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게 우연으로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선 1번이 소설이 되려면, 레몽이 자신의 정부를 때리게 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다시피 저기엔 아예 그런 설명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레몽이라는 사내가 생양아치라 이유도 없이 여자를 구타했다가 되야 하는데, 소설 속에서는 엄연히 처음으로 손을 댔다네가 나를 농락했어. 네가 나를 농락했다구라고 레몽이 소리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김화영 교수번역본을 포함해 기존 번역에서는 이 농락의 이유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저기 등장한 남자가 그냥 여자의 오빠라면, 카뮈가 내용 속에 친절하게 복권전당포등을 언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카뮈는 둘이 친남매가 아니라는 사실을 뫼르소만 알고 있다는 암시를 위해 소설적 장치를 해둡니다. “(레몽)가 여자의 이름을 말했을 때 나는 그 여자가 무어 여자임을 알았다.”(본문 93)는 뫼르소의 독백은 그래서 소설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카뮈는 아랍인무어인이라는 태생적 차이를 가지고 분명하게 둘의 관계를 밝히고 있는 것인데, 기존 번역서들은 모두 한결 같이 이 점도 간과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뫼르소는 왜 굳이 해변까지 마리와 함께 와서 그 사건에 연루된 것일까요?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레몽이라는 사내가 1번에서처럼 저렇듯 생양아치에, 포주에, 여자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자라면, 과연 저 이성적인 뫼르소가 자신의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그 친구의 오두막까지 따라와서 유쾌한 해수욕을 즐기고, 나아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과 여름을 함께 보낼 계획을 짤 수 있었을까요? 마리 역시도?

마송과 레몽 그리고 나는 비용을 분담하여 8월을 함께 해변에서 지낼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Masson, Raymond et moi, nous avons envisagé de passer ensemble le mois d’août à la plage, à frais communs.)” (본문 77)

 

이렇듯, 뫼르소에게 생테스 레몽은, 김화영 교수나 다른 번역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런 양아치가 아닙니다. 그는 그냥 점잖고 지적인 셀레스트와는 조금 다르게 뫼르소가 뒤늦게 사귄 색다른 친구였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위와 같은 정황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다시 그래야만 최소한의 소설적 개연성이 확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뫼르소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러한 독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레몽이 그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나은 셀레스트와 똑같이 나의 친구라는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Qu’importait que Raymond fût mon copain autant que Céleste qui valait mieux que lui?)”(본문 164)

 

뒷부분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레몽을 따라 해변가에 놀러왔다 연루된 싸움, 이제 레몽과 아랍인과의 갈등은 해소되고, 참을 수 없는 답답함으로 혼자 산책을 나왔던 뫼르소는 다시 샘으로 돌아갔다가 친구인 레몽을 농락했던여자의 기둥서방인 아랍인 사내와 단둘이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뫼르소는 단지 뜨거운 태양을 벗어나고 싶어서 사내가 누워있는 샘 가까이로 한 걸음을 더 옮긴 것인데, 아랍남자는 오해하고 먼저 칼을 빼들었고, 그 칼날에 반사된 강렬한 햇빛이 뫼르소의 눈을 후벼 팠기에, 위협을 느낀 뫼르소는 가지고 있던 총의 방아쇠를 무의식적으로 당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번역서들은 이러한 여러 정황들을 모두 외면한 채, 주인공 뫼르소가 우연히 악한인 레몽을 따라 해수욕을 갔다가 싸움에 휘말리게 되고, 다시 우연히 사내와 단둘이 만나게 되자 태양 때문에총을 쏘고, 급기야 네 발의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적 전개를 완전히 무시한 번역인 것입니다.

 

, 보시다시피, 앞의 두 예문(1,2)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달라지지 않는 게 있습니다. 바로 뫼르소가 사람을 죽인 이유, 그것이 태양 때문이었다는 표면적 이유 말입니다. 여기에 이 문제의 핵심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보다시피 저렇게 두고 봐도, 프랑스인이나 우리나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문학적 레토릭을 다르게 받아들일 이유가 하등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이게 말이 될까요? 그 어떤 개연성도 없이, 이런 우연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두고 세계인이 열광하고 노벨문학상 위원회에서 현대소설의 전범이라는 극찬을 쏟아냈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건 카뮈에 대한 모욕이고, 노벨문학상에 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되자, 거기에 부조리라는 말로 포장을 한 게, 기존의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소설이 부조리 소설인 이유는 주인공이 그렇게 횡설수설하며 이유도 없이 그냥 태양 때문에사람을 죽이고 항소도 않고 죽음을 받아들여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뫼르소의 살해 행위는 충분히 정상참작이 될 수 있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평등과 정의를 위해 세웠다고 믿었던 법정에서 오히려 사형을 선고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인들은 충격에 빠졌던 것입니다. 바로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부조리한가 깨닫게 된 것이고, 그래서 이 소설을 부조리 소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카피가 생겨난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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