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역시. 인생은 리듬이 전부다. 한 번 템포를 잃었더니 도무지 독서 리듬이 회복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한 달에 50권 이상을 읽었던 걸까.
9권을 읽었다. 표 만들기도 민망하고 남사스럽다.
그럼에도 이달의 책은 뽑아야겠다.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중 1부인 <나의 눈부신 친구>도 좋았지만 오에 겐자부로의 <익사>는 참 신기한 소설이다. ‘뭐야, 이거 사소설이네.’ 재미도 없고 등장인물 행동에 그다지 관심도 가지 않는다. 그런데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사로잡힌 기분이랄까?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하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작가가 현역 부장 판사라서 내내 관심을 갖던 차 도서관 신간 코너에 눈에 띄길래 잽싸게 빌려왔다.
도진기 정도면 현재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장르 소설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21세기 한국 장르 소설의 현주소?
참담하다.
현역 부장 판사로서 사회에 이다지 무관심할 수 있을까.
대다수 악마들로 이루어진 한국 사법부 내에서 악의 축에 서지 않은걸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여기저기 굶어죽는 사람들로 넘쳐나는데 부장판사는 한가히 앉아 치정 살인을 소재로 삼다니.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오히려 뿌옇게 흐릿해진 등장인물들. 헐거운 내러티브.
이런 장르 소설을 읽자니 시간도 아깝고 화만 도져. 도진기, 아웃.
니체와 걷다
니체의 말보다 이탈리아 사진들을 보며 흥분했다. 니체가 여행한 지역은 주로 이탈리아에 몰려있다.
왠지 수긍이 간다. 수긍이.
때맞춰 친구는 이탈리아 가족 여행 사진을 단톡방에 올려 염장을 지르고,
나는 이 책에 실린 사진을 보며 탈출하고픈 마음을 달래야 했다.
희랍어 시간
역시나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집어든 한강의 소설.
왜 눈에 띄어서. 차라리 읽지 말 것을.
한국 소설에 대해 여러가지 불만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단 한가지만 언급하면 처량맞고 청승맞은 캐릭터와 문체다.
왜 그런 것일까? 일종의 '한"문화가 문학에서 이런 식으로 표출되는 걸까? 이런 기질은 성을 불문하는데 주로 여성 작가들에서 빈번하다. 한강 역시 예외가 아니다.
'청승 소설' 너무 싫다. 상처 때문에 쪼그라드는 캐릭터는 이제 그만.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공감과 연대가 필요한 시대 아닌가
'나 상처받았어, 그래서 어쩔래'하고 당당하게 맞서는 주인공 캐릭터를 보고 싶다.
카뮈로부터 온 편지
아, 나는 이정서에 대해 완전히 오해했다.
나는 그가 번역한 <이방인>에 별 네 개 반이나 줬었는데,
별 다시 회수한다. 별 하나도 아깝다.
자세한 얘기는 리뷰로.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스티븐 핑커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나는 핑커를 바보라고 생각한다. '핑커 바보, 핑커 바보~~'
이 책의 작가인 팀 르윈스 역시 그러한듯. 과학한다면서 어떻게 정치적으로 보수적이 될 수 있을까.
한국에선 최재천이나 김대식이 그런 경우일까. 아니, 그들은 아예 정치적 의식이란 것 자체가 없을 지도.
역쉬 자세한 얘기는 리뷰로.
뜨거운 피
일본이나 미국 하드보일드의 아류작이다. (떠오르는 미국과 일본 작가들이 한무더기다)
한국판 하드보일드. 그럼에도 이야기를 직조하는 솜씨는 인정해야 할 듯.
주인공이 왜 살아남았는지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밑바닥
인종차별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맘에 든다.
그러나, 과연 이 소설이 에드가 상을 받을만한지는 의문이다.
나의 눈부신 친구
작년 가을에 처음으로 읽었던가. 초반부만 읽고 반납했지만 계속 읽기로 마음먹는 책.
결국 다 읽었다. 인물 계보도를 그릴려고 했다가 귀찮아서 그냥 읽었다.
다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인물들만 신경써서 속독했다.
인물 계보도를 그려왔던 게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한 순간에 수 십명의 등장 인물들이 정리가 되다니!
친구를 지키기 위해 근육질 남자의 목에 서슴없이 면도칼을 들이미는 여성 캐릭터
이런 캐릭터를 한국 소설에선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책 블로그를 시작한지 2년 10개월만에 1,000권을 돌파했다.
2,000권의 벽은 언제쯤 허물 수 있을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