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적 비평’을 혐오하는 성향 탓인지, 나는 작품이 아닌 작가의 사생활에 대해선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색스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었을 뿐, 올리버 색스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 색스의 자서전인 <온 더 무브>를 읽고 어찌나 놀랐던지. 색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사’라는 선입관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색스는 전형적인 의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어머니, 두 형이 모두 의사다. 색스의 한 형은 의사가 되기엔 두뇌가 너무 뛰어났던 탓일까. 조현증(정신분열) 환자다. 색스는 게이였다. 의사라고 해서 게이가 아닐 것이라 왜 미리 속단한 것일까. 색스는 몸무게가 100kg 이상일 정도의 거구다. 또한 그는 아마추어 역도 선수였다. (색스는 1961년도 캘리포니아 주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스쿠버 다이빙, 오토바이를 즐겼다. (그는 1933년 생이다.)

책을 읽으며, 내 인생에 가장 후회스러운 점은 아직까지 약물 경험이 전혀 없다는 거다. 색스는 온갖 약물을 체험했다. 중독에 걸린 시기도 있었지만 극복했다. LSD, 알탄, 암페타민, 클로랄하이드레이트 기타등등. 알탄 스무 알을 먹고 아무런 반응도 없어 실망하던 차, 친구의 방문을 받고 한참을 떠들고 난 이후 색스는 깨닫는다. 이 모든 게 환각임을. (그의 책 <환각>은 약물을 먹은 이후, 신기한 체험담이 주된 내용이라 하니, 읽어봐야겠다.)

자서전은 주로 그의 저서들- <편두통>, <깨어남>,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등등 –에 얽힌 일화들이 주를 이룬다. 특히나 <깨어남>에 관해선 배우들의 일화가 흥미롭다. 색스는 영화 제작 준비 단계에 로빈 윌리엄스와 함께 브롱크스 주립 병원을 방문한다. 색스에 따르면, 돌아오는 차 안에서 로빈 윌리엄스는 만났던 모든 환자들의 목소리와 말투, 대화 전체를 완전히 통째로 암기해 재연했다고 한다. ‘모방’이라기보다는 ‘빙의’였다고.
색스는 로빈 윌리엄스를 보고 <레인맨> 당시의 더스틴 호프만을 연상한다. 색스는 호프만과 함께 자신의 자폐증 환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런 뒤, 감독과 잡담을 나누는 사이 색스는 자신의 환자의 목소리가 들려 돌아봤다고 한다. 호프먼은 혼자 말하고 있었다. 색스의 환자와 똑같은 목소리와 몸짓으로.
한국 배우들에겐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태도다. 대개의 한국 배우들은 자신의 배역의 직업 체험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연기가 좋을 리가 없다. 한국엔 스타는 있지만 ‘배우’라고 할 만한 연기자는 없다.
색스가 영향을 받은 많은 작가들 중 네 사람만 언급하자. 우선은 스티븐 제이 굴드. 색스는 90년 한 해 동안 가장 감명 깊에 읽은 책으로 굴드의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를 꼽았다. 그리고 크릭. 색스에 따르면, 크릭은 ‘불사의 존재’다. 크릭은 제자인 크리스토퍼 코흐와 함께 말년엔 ‘의식’의 문제를 주로 탐구했다. “살아서 이 이론을 들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하고 색스가 느낀 건 에덜먼의 이론이다.
“연주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 연주자는 각자 자기 방식으로 음악을 해석하면서 동시에 부단히 다른 연주자들에 맞추어 조절하고 서로에 의해 조절된다. 궁극의 또는 ‘우두머리의’ 해석은 없다. 음악은 집단적으로 만들어지며, 매회 공연이 다 유일하다. 이것이 에덜먼이 그리는 뇌의 그림이다. 오케스트라이자 앙상블로서의 뇌, 다만 지휘자 없이, 스스로 음악을 만들어가는 오케스트라.”
색스는 의사라기 보단 작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써온 일기장만 1,000권이다. 환자를 진료하며 기록한 공책도 1,000권이다. 에덜먼이 생각했던 뇌처럼, 우리의 삶 역시 그러한 것이 아닐까. 모든 이들이 각자 자기 방식으로 음악을 연주한다. 색스는 색스의 방식으로 삶을 연주했다.
“글쓰기는 잘 될 때는 만족감과 희열을 가져다준다. 그 어떤 것에서도 얻지 못할 기쁨이다.
글쓰기는 주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나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이상하게도 색스의 책 –아직 읽지 않은-이 집에 꽤나 있다. <편두통>, <깨어남>, <뮤지코필리아>. 색스, 스티브, 크릭, 코흐, 에덜먼의 책을 읽고 싶다. 에덜먼의 말처럼, “모든 지각 행위가 창조의 행위”라면 독서 역시 창조의 행위가 아닐까. 혹은 독서 역시 ‘스스로 음악을 만들어가는 오케스트라’ 같은 건 아닐는지.
누군가의 자서전을 읽는 다는 건, 위험한 행위다. 왜냐하면 더 이상 작가와의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색스는 세상을 떠났지만, 색스의 책이 있어 다행이다.
색스 할배, 고마워유.
아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