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빠르게 바뀌는 현실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과거와 환상 속에서 자신만의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블랑시는 설사 그것이 회피와 도피가 버무려진 욕망이라 할지라도 그 욕망 안에서만 숨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스탠리와 스텔라 역시 건강한 욕망이 아닌 폭력적인 육체적 욕망을 추구한다. 단지 현실에 있다는 이유로 미래로 갈 수 있다니… 씁쓸하다.
곱씹고 되뇌일만한 구절들이 너무 많다. 어찌보면 시대를 잘못 타고난, 어찌보면 ‘득난’이나 기득권인 그를 보며 생각한다. 그가 진골이었다면, 그가 문무왕 시절에 활약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까.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은 힘이 넘쳤고, 이방인으로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들은 슬픈 시름이 가득했다. 불교의 가르침을 말할 때는 그 깨달음이 엄청나 놀라웠고, 삼국유사에서 보던 기이한 이야기들은 반가웠다.
할리퀸 소설부터 로설을 지나 로판이라… 로설을 종이책으로 읽던 때 좋아했던 책이 ‘연록흔’이랑 ‘공녀’, ‘빛과 그림자’,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 ‘영원보다 긴 사랑’ 등등 이었는데. 어느 순간 여주와 남주의 성격과 위치가 조금씩 바뀌긴 했다. ‘루시아’, ‘김비서’, ‘재혼황후’를 넘어 로판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제법 흥미진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