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의 연애담


 


 

                                                                                                    어느 날, 릴케는 두이노 성 주변을 산책하다가 환청을 듣는다. "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 이 환청에 영감을 받은 젊은 시인은 10편으로 구성된 << 두이노의 비가 >> 를 완성한다.

20페이지가 채 안되는 분량인데 이 시를 완성하는데 걸린 세월이 10년이었다.  37세 때 쓰기 시작한 " 비가 1 " 은 47세 때 " 비가 10 " 으로 끝났다. 이 장고의 세월 동안 시인은 얼마나 많은 퇴고에, 퇴고에, 퇴고에, 퇴고를 거듭했을까. 말머리를 오랜 장고 끝에 완성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 두이노의 비가 >> 로 시작한 이유는 최영미 시인이 < 괴물 > 1) 이라는 풍자시에서 언급한 시인 EN과 비교 평가하기 위해서다. 이 시를 읽고 나서도 EN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굳이 이 글을 읽을 필요도 없다. 과연 대한민국에서 시집 100권을 낼 정도의 역량을 가진 시인'이 누가 있을까.

아니, 전세계를 통틀어 보아도 살아생전에 시집 백 권을 출간하며 이 시대의 어른으로 숭앙 받는 시인은 그가 전무후무할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그가 낸 책은 시집 외 잡다한 목록까지 포함하면 150권이 넘는다.  물론 다작을 한 작가라고 해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조르주 심농은 400편의 추리소설을 내놓았고,  스티븐 킹은 500편의 작품을 내놓았다(무엇보다도 스티븐 킹이 놀라운 점은  원고지 분량만 놓고 보자면 원고지로 쌓아올린 종이 바벨탑에 도전할 작가는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EN의 다작이 문제인 이유는 시라는 장르가 속필이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데 있다.

EN의 시는 깊이도 없고 넓이도 없고 높이도 없다. 시가 반드시 " 묵은지 " 일 필요는 없으나 적어도 " 겉절이 " 를 내놓고는 슬로푸드'라고 자랑하는 것은 면이 서지 않는 짓이 아닐까 ? EN의 시가 詩답지 않아서 시답지 않은 시시한 시'인데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발표할 계절이 오면 기자들이 그가 사는 수원 집 앞에서 배수진을 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내 정치에 능한 그와 그의 이너서클이 만들어낸 아우라가 아니었을까 ? 신경숙 신화가 문단 내 사내 정치가 만들어낸 허수이듯이 EN 신화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 사내 정치 > 이중적이며 중첩적 의미로 사용했는데 사내는 사내(男兒)이면서 사내(社內)이다. 

신경숙이 사내 정치에서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철저하게 명예 남성 역할을 자행하며 남성 욕망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                                    

 

1) 괴물, 최영미




괴물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 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 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벨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벨상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ㅡ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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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8-02-0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한창 난리가 났던 박진성 시인은 저도 뭣 모르고 막 욕했는데 무고한 것으로 드러났지요.
은태할배는 범신할배는 으~웩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7 14:24   좋아요 0 | URL
몸사릴 할베들 많죠. 방석집 좋아하시는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ㅎㅎ

samadhi(眞我) 2018-02-09 13:39   좋아요 0 | URL
참 은태 할배는 고은 시인 본명인 거 아시죠? 고은태.

수다맨 2018-02-07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굉장히 화가 났는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최영미 시인이 (이런 폭로시를 쓴 의지와 열정은 지극히 존중할 만하지만) 아주 예전부터 소영웅주의와 자기 연민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하고 말이죠. 저는 예전부터 소외와 오해만 받는 용감한 (그래서 아주아주 불쌍하기 그지없는) 나 VS 악랄하고 몰가치하고 파렴치한 전체 집단의 구도를 그의 시에서 여러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최영미의 작품 세계는 80년대 참여문학의 나이브한 연장이자, 공지영의 시인 버전 같다는 인상이 들더군요.
저는 최영미 시인의 이번 폭로와 고발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이에 연루된 해당인은 그만한 책임과 대가를 당연히 짊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녀가 ‘나는 문단의 왕따‘이다, ‘나는 죽은 목숨이다‘라는 식으로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약간은 오버이자 난센스 같다는 인상도 듭니다. 저는 만일 최영미의 시 세계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가부장적이고 여혐적인 문단 체제‘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시작 역량이 (그녀가 진단한 것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데서도 찾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시인이 이러한 것들(체제의 더러움과 추악함과 자신의 문학적 공력)을 모두 돌아볼 줄 아는 균형적인 안목도 마땅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저는 EN 시인을 문학적으로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인격적으로 싫어할 이유까지 생겼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7 15:56   좋아요 1 | URL
제가 두 곳에 같은 글을 올리는데 네이버에 단 저의 댓글 내용은 이렇습니다.
최영미의 미투를 지지하지만, 솔까말 최영미는 시를 못 쓰는 시인이다. 그것도 사실이다..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전 남성 권력의 폭압과 함께 그녀 스스로의 시인으로서의
역량 미달도 지금의 쇠락의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2018-02-07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선  :



 

 

 

 

 


 

이재용을 향한 편애와 편견



 


                                                                                                         책은 사서 읽지만, 읽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은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자주 들춰 보는 책은 한정되어 있다. 그것도 대부분은 필요에 의한 발췌독이다(니체 전집, 프로이트 전집, 아케이드 프로젝트, 사랑의 단상, 두이노의 비가 따위).

 

가성비와 효용성만 놓고 보자면  :  한 번 읽고 나면 다시 읽지 않을 책은 사는 것보다는 도서관에서 빌리는 것이 합리적 소비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읽지 않은 책은 책장에서 비울 생각이다(라고 쓰고 있지만,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  그 자리를 각종 사전과 도감으로 채우고 싶다. 도감 중에서도 가장 가지고 싶은 도감은 보리 출판사에서 기획한 <<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도감 >> 시리즈'다. 도감은 세부 목록(동물보감, 식물보감, 동물흔적보감, 양서파충류도감, 갯벌도감, 민물고기도감, 나비도감, 나무도감, 곤충도감, 풀도감, 새도감, 버섯도감, 바닷물고기도감)을 설정한 후 

그림이나 사진을 모아서 실물 대신 보면서 읽을 수 있도록 엮은 책'인데 읽는 재미와 함께 보는 재미가 가미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무엇보다도 도감은 사진보다는 그림(세밀화)으로 구성된 책이 월등히 훌륭하다. 사진이 실물을 그대로 재현하는, 초정밀 광학적 세계의 끝판왕이기는 하나 독자가 그림을 이해하는 가독성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 손으로 그려진 세밀화는 사진보다 가독성이 뛰어나다. 그렇기에 동식물 도감은 세밀화로 구성된 책으로 읽어야 한다. 그 차이는 분명하다. 사진은 광학 기계의 시선으로 바라본 상이고 그림은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본 상이다.

그러니까 세밀화는 독자가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인간이 한 편의 그림 같은 사람(혹은 풍경)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사진을 찍을 때, 클로즈업과 부분 초점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사진 렌즈에 의해 포착된 상은 편견이 배제된 상이다. 반면에 사진 렌즈가 아닌 사람의 홍채에 의해서 재현된 상은 편견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사람은 전체를 본다기보다는 관심이 가는 영역을 중심으로 이미지 전체를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항상 색안경을 쓰고 사물과 현상을 들여다보는 종이다. < 편견 > 이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선인 셈이다.

하여,   나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편애(편견)라고 생각한다.  편애하는 사람에게도 품격은 있따. " 편애 " 가 강자에게만 쏠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자에게만 쏠리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俗이고 후자는 聖이다. 예수는 후자에 속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자에 대한 편애와 강자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예수가 안철수처럼 극중주의와 화신 백화점이었다면, 나는 그에게 침을 뱉고 따귀를 때렸을 것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대부분 편견과 편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엄청난 죄를 짓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재용 재판은 판사의 그릇된 편견과 편애 때문이 아니라 거악에 대한 " 편견 없음 " 과 정의에 대한 " 편애 없음 " 이 낳은 결과이다.

어렵게 말했으나 저잣거리 입말로 쉽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 저 판사 새끼, 시발 진짜 좆같은 새끼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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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6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6 10:20   좋아요 2 | URL
퇴임 후 법무팀에서 모셔가겠죠. 연봉 20억 때려서 5년 근무하는 방식이겠죠. 그러면 100억.. 합법적 뇌물이잖아요. 법무팀에서ㅓ 하는 일은 없을 테고... 뭐, 판사 입장에서는 욕 졸라 한번 처먹고 퇴임 후 목돈 마련해서 자식새끼 좋은 데 유학 보내자.. 이런 마인드이겠죠. 삼성 불매 운동해야 합니다..

마립간 2018-02-06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의로운 사람은 대부분 편견과 편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

이 문장을 보니, ≪도덕경≫의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문구가 떠오릅니다. 자연의 정의와 사람의 정의가 다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6 11:25   좋아요 0 | URL
흠... 마립간 님 한자 해석 좀 -_- ;

마립간 2018-02-06 12:08   좋아요 1 | URL
^^, 곰곰발 님의 글을, 제 독후감에 인용하였습니다.

앞부분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 천지,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즉 편애가 없다는 뜻입니다. ≪도덕경≫의 의견입니다.

cyrus 2018-02-06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판사 이름이 정형식. 예전에 삼성 라이온스에서 뛴 정형식이라는 타자가 있었죠. 타격 센스가 박해민 급이었어요. 그런데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내서 임의 탈퇴 처리되었죠. 다행히 정형식이 나간 이후로 박해민이 등장할 수 있어요. 아무튼 정형식이라는 이름, 절대로 잊지 못할 겁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6 11:41   좋아요 1 | URL
저 인간은 성을 바꿔야 합니다. 정씨가 아니라 화씨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희대의 변명일 겁니다.

수다맨 2018-02-06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고종석 작가가 우스갯소리로 이 나라에서 이명박근혜가 왕(또는 상왕)이라면 이건희/재용은 황제라고 한 적이 있었지요. 어제 재판 결과가 고종석의 말에 정확히 들어맞았던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7 09:51   좋아요 0 | URL
삼성이 황제라는 사실을 고종석이 아니어도 다 아는 사실이죠. 법위의 존재예요. 박근혜도 깜빵 가는 세상에 이제는 이재용은 안 가는 세상이 되었군요.

기억못함 2018-02-0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자는 자연의 섭리를 편애했어요.
천지불인은요. 큰것을 위하지 않아요.
그래서 작은 것들이 큰 놈에게 강제당하지 않게 되어요.
그러면 천지불인이 작은 놈을 위한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작은 놈이란 거는 천지불인과는 상관없는거여요.
걍 천지불인은 큰 것을 위하지 않는다는 놈이다 라고 생각하는 게 좋아요.
이러는 것이 천지간이 잘 돌아가는 것이라고 노자가 얘기하는 거라고 봐요.
그래서 위하지 않음을 위한다고 하는 건데요.
이걸 아무거나 다 에브리띵 다 위하지 않는 거라고 퉁치는 얘기로 읽으면 노자를 한참 잘 못 읽는거라고 봐요.
여기 곰곰발님 말씀처럼 사람은 편애 편견덩어리여요.
무엇을 위하여야만 사는 놈이라는 거죠.
그런데 위하면 작은 놈도 그게 큰 놈이 금새 되어버려요.
그래서 위하지 않음은 큰놈이 생기지 않게 해요.
그래서 작은 놈을 위하게 된다는 식으로 넘어가면 안되구요
위하지 않음을 위한다는 말은 오직 큰 놈을 잡기 위해 있는 말입니다요.
위하지 않음을 위하는 편견 편애는 그것이 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큰 놈이 절대 안되요.
다른 위함은 모두 큰 놈이 되요.
오직 위하지 않음을 위하는 편애 편견만이 큰 놈을 만들지 않아요.
그게 노자의 천지불인이라고 한다면 여러분 믿을 수 있씁니까.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7 09:50   좋아요 0 | URL
허어. 그렇군요. 노자에 대해 잘 모르다보니
노자의 천지불인을 제대로 이해를 못하겠군요. 혹시 추천해주시고 싶은 책이 있으신지요.
읽고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억못함 2018-02-07 10:0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도덕경 해설서 독해서 추천드릴만한게 없습니다.
곰곰발님이 독자적으로 해석해보시는 건 어떤가요?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고까짓 것, 울지 마 울긴 왜 울어  : 




 




                     1987  :  내풍인촌1)



 


주머니에서 딱성냥 한 개비를 꺼내 벽에 그었다. 교실 안이 조용해서인지 불붙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ㅡ  이문열, 변경 



 


                                                                                                                    저주받은 걸작 영화 <<  넘버 3  >> 에서 불사파 두목 조필(송강호 분)은 감정의 발화점이 매우 낮은 캐릭터이다. 발화점이 낮다 보니 언어의 온도가 낮아도 쉽게 열불을 낸다.  그는 발화점이 낮은 딱성냥 같다.  아무 데나 긁어도 불이 쉽게 붙는 성냥 말이다.  그 유명한 장면.  스승이 현정화 선수는 라면만 먹고도 장거리 달리기 경기에서 1등 했다고 설교를 하자,  제자가 스승의 잘못을 지적하며 " 임춘애입니다, 행님 ! " 이라고 정정한다. 조필은 침묵한다. 잠시, 숨 고를 시간이 지나고.......  5,   4,   3,   2,   1,                           퐈이야 !!!

스승은 화,      화화화화화를 참지 못하고 점화한다. " 감정의 발화점이 낮다는 것 " 은  마음 속 불(火)을 쉽게 제어하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이다(주로 만화 같은 캐릭터들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조필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발화점이 낮은 딱성냥 캐릭터들이다.  조필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송능한 감독은 남근 중심인 한국 사회를 " 좆삐리 문화 " 로 희화화한 후 신랄하게 조롱1)하기 위해서 발화점이 낮은 캐릭터 난장을 묘사한다.  그가 감정의 발화점이 낮은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한국 사회가 미성숙한 얼라에 속한다는 데 있다.

이런 캐릭터들은 평면적이어서 깊이가 없다. 그리고 " 주먹 " 을 " 눈물 " 이라는 오브제로 전환하면 신파와 통속이 된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깡패 캐릭터나 속울음보다 장소 불문하고 대낮에도 대성통곡을 하는 캐릭터는 서로 다를 것이 없다. 감정 표출을 극한까지 몰고 가서 관객에게 말초적 반응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둘 다 포르노'다. 이런 방식에 능한 감독이 윤제균과 강우석이다. << 국제시장 >> 이 보여준 남조선 쌍팔련도 최루성 포대기 신파는 책상을 탁, 치니 툭, 하고 우는 울보 캐릭터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에 성공한 영화다. 이 영화가 노리는 것은 관객의 눈물샘이 전부이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눈물만큼 가성비 좋은 특수효과는 없다.  눈물보다 전염성이 강한 감성 코드가 또 있을까 ?  그렇기에 재능 없는 감독이 자주 사용하는 것이 탁, 치면 툭, 하고 우는 발화점 낮은 캐릭터를 활용하는 것이다. 대성통곡을 싸잡아서 싸구려라고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지점은 대성통곡이라는 클라이맥스를 위해서는 기/승/전 과정에서 잦은 소성통곡은 자제해야 된다는 점이다.  그래야 마지막에서의 대성통곡이 빛이 난다. 좋은 예가 영화 << 길, 1954 >> 과 << 파이란, 2001 >> 이다.  저 짐승 같은 탁성'은......            진짜다.  이것이 신파의 품격인 것이다.

영화 << 대부, 1977 >> 에서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대부 돈 클레오네는 남조선 깡패 얼라-들 : 조필과 그 똘마니들과는 달리 쉽게 흥분하지 않고 쉽게 말하지 않고 쉽게 주먹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감정의 발화점이 높은 인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 모든 것은 결국에 처절한 가족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사실을. 또한 모든 폭력의 배후에는 그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영화 << 1987 >> 에 불만을 가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감독은 박종철 가족을 지나치게 신파로만 접근한다. 어머니는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아버지는 겨울 바다에 유골을 뿌리다가 오열하고, 삼촌도 경찰 봉고차 안에서 흐느껴운다.

자식을 잃은 부모와 가족의 마음이야 굳이 이 자리를 빌려 표현할 필요는 없지만 그 상실을 감독은 너무 자극적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장면이 배우 조우진이 연기한 박종철 삼촌의 오열 연기이다.  박종철 어머니도 울고, 박종철 아버지도 울고, 박종철 누이도 울었는데 굳이 박종철 삼촌이 오열하는 장면도 필요했을까 ?   이것은 오열하는 서정의 강조가 아니라 무의미한 반복이 아닐까 ?  기자들을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차분하다기보다는 마약을 과다 투여한 중독자처럼 흥분해서 이리저리 방방 뛴다.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누가 살짝 옆구리를 긁기만 해도 쉽게 발화하는 딱성냥 같다.

영화는 조폭(같은 경찰) 느와르 장르로 시작해서 스파이 장르로 바뀌다가 나중에는 멜로드라마 장르'로 끝을 맺는데, 이 혼종을 예술적 통섭의 좋은 예라고 말하기에는 이질적인 측면이 있다. 오히려 산만하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멜로 판타지는 어설프다(어설프기보다는 엉뚱하다).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을 폭로하다가 느닷없이 멜랑꼴리한 러브 판타지로 전환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이 영화를 보고 뜨겁게 운, 당신의 신파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관객이 흘린 선의와 슬픔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관객의 열광적 지지에도 동의한다. 그리고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도 의심하지 않는다.

나 또한 그 시대, 뜨거운 함성을 지지한다. 하지만 평론가의 열광적 지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장점만큼 단점도 분명하니까 ■






 

​                                          

 

1)    耐風燐寸(내풍인촌) : 딱성냥, 딱성냥은 일반 성냥보다 발화점이 낮은 燐을 사용한다.

2)    " 조필이 " 를 장음으로 길게 빼면 " 조삐리(좆+삐리) " 가 된다.  여기서 < 삐리 > 는 남사당패에서, 각 재주의 선임자 밑에서 재주를 배우는 초보자를 뜻한다.  종합하면   :  조필과 우락부락한 깍두기 형님-들'로 대표되는 " 불굴의 페니스 " 는 알고 보면 발기해도 3센티미터인 고추의 세계이다.   이 영화는 명백하게 미성숙한 남근의 세계(얼라의 고추)에 대한 송능한의 B급 조롱이다.  불사파를 뜻하는 표식 " olo " 은 누가 봐도 발기된 남근(고추)을 형상화한 타이포그라피이다. 영화 << 넘버 3 >> 는 김기영 감독의 << 하녀 >> 시리즈와 더불어 희대의 컬트이며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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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8-02-02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정의 발화점‘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입니다. 영화(또는 소설)의 내용이 풍자나 희화, 컬트에 가깝다면 감정의 발화점이 낮은 인물들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하신대로 ˝넘버 3˝나, ˝핑크 플라밍고˝의 ‘디바인‘ 같은 인물이라면 감정 발화점을 높게 설정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반면에 재치 넘치는 유희보다 진지하고 묵직한 리얼리즘적인 기법으로 작품을 만든다면 감정의 발화점이 높은 인물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저는 ˝1987˝을 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예로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나오는 이스트우드나 힐러리 스웽크 같은 인물들이 울보 떼쟁이였다면 이 영화는 그야말로 조야하고 흔한 휴머니즘 영화로 그 격이 떨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2 11:52   좋아요 0 | URL
영화 < 길소뜸 > 을 보면 남자가 반드시 울어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에서 남자는 울어야 하죠. 그때 카메라는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멀어져서 뒷모습으로 빠집니다. 뒷모습만 보이니 관객은 이 남자가 우는지 아닌지 정확히 모르죠. 저는 이것이 영화의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포르노에서 다리를 쫙 벌린 포르노 배우와 만개와 입안 가득 음식을 씹는 입술을 클로즈업하는 것과 우는 배우의 얼굴을 클로주업하는 것은 다 비슷합니다.


syo 2018-02-02 1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파이란>이 기억납니다.
저는 영화를 보고 많이 우는 편이고, 우는 것에 대해 그다지 거부감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영화가 다 끝나고 조용히 돌이켜 보니 그때 내가 같이 울었던 게 1도 부끄럽지 않은 영화는 <파이란>이 처음이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2 12:05   좋아요 0 | URL
훌륭한 발라드 가수는 자신은 울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데 관객을 울게 만드는 것이고, 형편없는 발라드 가수는 자신은 울면서 부르는데 정작 관객들을 시큰둥하게 만드는 것이고, 가수도 울고 관객도 울면 평작이라는.....
영화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더군요..


파이란은 정말 묵직한 한방이 있죠. 최민식의 최고 걸작은 확실히 파이란입니다. 최민식도 그런다고 하죠. 어디가서 자신의 최고 골작은 파이란이라고..

고양이라디오 2018-02-04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평론입니다. 갑자기 <대부>의 묵직함이 그립네요. 근데 전 <1987> 굉장히 재밌게 봤습니다ㅎㅎㅎ 곰발님 글을 읽으니 영화의 단점들이 보이지만요. 제게 영화에게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강동원의 등장이었습니다. 강동원이 영화에 나온다는 것을 알고 봤는데도 강동원 등장에 몰입이 ‘와장창‘ 깨지더군요.

곰발님 말씀도 옳지만 부모나 삼촌이 우는 장면이 저는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가족의 입장과 감정에 몰입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ㅎ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5 08:14   좋아요 1 | URL
확실히 강동원 장면(연희와의 로맨스)는 갑툭튀입니다.
저도 몰입이 확 깨지더라고요. 갑자기 명랑 멜로 드라마가 된 듯한....



 



​                                                                       

그 시대, 가장 구시대적인 불질을 그리워하며   :













캠핑과 부시크래프트의 차이












                                                                                                       어릴 때는 한자 休( : 쉴 휴)를 볼 때마다 木 대신에 水가 붙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곤 했다. 제대로 쉴려면 산보다는 물가에서 발이라도 담그고 놀아야 하는 것 아닐까 ?

하지만 나이가 들다 보면 물보다는 나무(혹은 숲) 혹은 산의 물성이 인간이 가지고 놀기에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물에서 하는 놀이라고 해봐야 기껏 물질과 낚시질이 전부이지만 인간은 산에서 놀면 신선(神仙)이 될 수 있다(물에서 기똥차게 노는 달인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대 명예는 기껏해야 물개이거나 물귀신이다.  나는 묻고 싶다. 물개가 높냐, 신선이 높냐. 물귀신이 좋냐, 산신령이 좋냐. 응?) 나무를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그중에서도 최고봉은 역시 " 불질 " 이다. < 부시 크래프트 bush craft> 는 한자 " 休 " 가 사람과 나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까닭을 설명하기에 적당한 스포츠다. 번역하자면 캠핑의 서바이벌 익스트림 스포츠 버전 ?!

 

 

쉽게 설명하자면 <<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 >> 이 부시 크래프트'이다. 그는 한국의 베어그릴스'이다. 부시크래프트는 옛사람들을 따라하는 원시적인 소꿉놀이인 셈이다. 덤불'을 뜻하는 " 부시(bush) " 와 기술'을 뜻하는 " 크래프트(craft) " 의 합성어로, 최소한의 장비만 가지고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연물을 최대한 활용해 아웃도어를 즐기는 레포츠를 말한다. 부시크래프트는 캠핑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전문화된 캠핑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의식주에 필요한 것을 직접 구하고 해결한다는 점에서 캠핑이 (아이스)크림이라면 부시 크래프트는 브루스 윌리스의 하드'다. 

이 놀이 과정에서 화룡점점은 뭐니뭐니해도 " 불질 " 이다. 도끼질로 땔감을 구하고 불을 지펴 쿠킹을 완성하면 당신은 레트로 서바이벌 익스트림 레포츠의 킹 ! 불을 다루는 방식이야말로 부시크래프터가 캠핑족과는 전혀 다른 종족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게 한다. 캠핑촌의 캠핑족들이 성냥이나 라이터로 불을 지핀다면 부시크래프터는 나무 막대기나 부싯돌(파이어 스틱)로 불을 만든다. 불은 어렵게 얻을수록 빛이 나는 법. 연기로 시작한 불씨가 보푸라기를 태우다가 나중에는 장작을 태우는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부시크래프터가 개고생하며 불질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기 - 승 - 전 - 퐈이야 !!!    

영화 << 1987 >> 은 " 부시크래프트 "  보다는 " 캠프파이어 " 에 가깝다. 어렵게 불씨로 시작해서 끝은 통나무를 불태우는, 그런 장르'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당혹스럽다. 그러니까...... 넌, 나에게 모욕감 모닥불을 줬어 !  보는 내내 당혹스러웠다.  내가 이 영화에서 기대했던 것은 가장 구시대적인 불질이었다.  짐승의 털을 모으거나 지푸라기를 구겨서 보푸라기를 만들고,  발화점에 도달하여 연기를 피우고,  보푸라기 위에 잔가지를 덮고 바람을 불어 불씨를 살리고,  그렇게 해서 옥이야 금이야 불이야 !   결국에는 굵은 통나무를 태우는 불꽃으로 작렬하는 불놀이 진행 코드를 기대했으나 영화는 시작부터 통나무를 태우는 불꽃으로 시작한다. 

등장인물들의 발화점이 너무 낮다 보니 감정은 과잉처럼 보인다. 낮은 발화점에서 너무 쉽게 대성통곡하고, 너무 쉽게 화를 내고, 너무 쉽게 주먹부터 나간다. 한국 신파의 잘못된 전형이 바로 낮은 발화점인데 이 영화는 그것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마치 온몸에 시너를 붓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꼴이다. 무엇보다도 나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평단의 반응이었다. 이 영화는 대중영화로써 장점이 많은 영화이기는 하나 영화적 완성도 면에서도 단점이 많은 영화'이다.  사실, 김윤석의 연기가 워낙 뛰어나서 가려졌을 뿐 그가 연기한 박처장이라는 캐릭터는 정치 악당의 전형적인 클리셰 덩어리'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인물 설정'인 셈이다. 그리고 연희(김태리)와 한열(스포일러에 해당될 수 있으므로 작자 미상)이 썸 타는 청춘 멜로 판타지도 이 영화의 톤앤매너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가 그럭저럭 좋은 오락영화라는 데에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는 있지만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을 한국 영화라는 평론가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반복해서 강조하자면 나는 관람객의 평가는 수긍하지만 평론가의 평가는 수긍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올해 가장 과대 평가된 영화로 남을 것이다. 뭐......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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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8-02-01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안 봤는데요. 이런 영화는 만든 것에 의의를 두지 않나 전 늘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작은 연못 같은 영화라든가.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2 09:06   좋아요 0 | URL
작은 연못이란 영화도 있었나요... 나중에 함 찾아봐야겠습니다아..
 


 






간결한 소음



 





                                                                                                         말이 주는 위로가 지겨웠기에 말로 표현된 위로를 믿지 않는 편이다. 말은 오염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말보다는 글의 세계에 빠지게 되었다.

말이 생물이라면 글은 사물(死物)에 가까웠다글이라는 문자가 주는 건조한 물성이 좋았다. 언제부터인가 글에 감성이 묻어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감성이 배제된 배열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신경숙 소설을 읽는 것보다는 전자 제품 사용 설명서나 제품 영양 성분 따위를 읽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은 김훈과 감성적 혹은 감상적 맥락을 같이 한다. 습기를 주의하시고 건조하고 서늘한 장소에 보관하십시오 ! 이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인가.



오래 전, 낚시 방송을 즐겨 봤다. 불면에 시달려 본 사람은 모두 다 동의하겠지만, 소음이 없는 완벽한 정적만큼 숙면에(도움을 주기는커녕) 방해가 되는 요소도 없다. 불을 끄고 텔레비전 볼륨을 낮추면 최상의 조도와 최소한의 소음이 제공되어서 수면에 도움이 된다. 시청이라기보다는 청취에 가까웠다. 내가 낚시 방송에 중독된 이유는 모든 방송 채널을 통틀어서 말의 비율이 가장 적다는 데 있었다. 방송에서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 정도 말의 소음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요즘은 그나마도 간간이 오고가는 말조차도 없는 영상을 보게 된다. 다음은 유투버 ishitani의 가구 공정 과정을 담은 영상-들이다.




나무보다 매력적인 물성이 또 있을까 ?   목수는 말없이 나무의 치수를 재고 재단하고 잇는다. 분명 저것들은 가구의 어느 편린들일텐데 우리는 처음에 그 쓰임의 행태를 잘 모른다.  하지만 공정이 진행되다 보면 저 편린은 서랍의 틀대가 되고 저 편린은 버팀목이라는 사실을 목격하게 된다. 편린과 편린을 잇고, 다시 편린과 편린이 만나서 하나의 완성된 가구가 되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정수리에 대못을 박지 않아도 단단하게 화합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음은 듣기 좋다. 그것은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맺게 되는 최소한의 소음이다. 인간의 관계도, 그리고 관계와 관계 사이에 맺게 되는 말도 딱 이 정도의 소음이었으면 싶다. 

따스한 말의 효용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떠들며 말 한 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고 강조할 때마다 절망하게 된다. 선생님, 천냥 빚은 일을 해서 갚을 생각을 해야지 말을 꾸며서 갚을 궁리부터 하시면 안 됩니다. ㅅㅂ !  간결한 말이 그립다. 질이 질(質)을 만들어 내는, 그러니까 < - 질 > 이라는 접사가 사물의 속성, 가치, 유용성, 등급 따위의 총체인  < 질質 > 을 만들어 내는 톱질, 대패질, 망치질이 내는 간결한 소음, 그런 간결한 말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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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8-01-3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모임 다녀온 오늘, 말의 무게를 새삼 느낍니다. 내가 뱉은 말이 허망해서 후회를 곱씹네요. 쓰잘데기 없는 말들을 쏟아낸 자신이 부끄럽고 짜증나고. 가만히 듣기나 할 것을. 저는 여전히 애정결핍인가봐요.
김훈, 『공터에서』로 얘기 나눠 안 그래도 김훈 얘기를 했는데 마침 곰발님이 사용설명서 얘기를 했네요. 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1 10:11   좋아요 0 | URL
김훈이 사전이나 소방 실무서 따위의 책을 즐겨 읽는다고 하죠 ? ㅋㅋ
처음에는 뭐 이런 작가가 다있나 했는데 이제는 이해가 가능합니다아..

표맥(漂麥) 2018-02-01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분 동안 유심히 목공 일을 지켜본 1인...^^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2 09:06   좋아요 1 | URL
말 한 마디 없는 영상인데 참.. 사람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