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의 연애담


 


 

                                                                                                    어느 날, 릴케는 두이노 성 주변을 산책하다가 환청을 듣는다. "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 이 환청에 영감을 받은 젊은 시인은 10편으로 구성된 << 두이노의 비가 >> 를 완성한다.

20페이지가 채 안되는 분량인데 이 시를 완성하는데 걸린 세월이 10년이었다.  37세 때 쓰기 시작한 " 비가 1 " 은 47세 때 " 비가 10 " 으로 끝났다. 이 장고의 세월 동안 시인은 얼마나 많은 퇴고에, 퇴고에, 퇴고에, 퇴고를 거듭했을까. 말머리를 오랜 장고 끝에 완성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 두이노의 비가 >> 로 시작한 이유는 최영미 시인이 < 괴물 > 1) 이라는 풍자시에서 언급한 시인 EN과 비교 평가하기 위해서다. 이 시를 읽고 나서도 EN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굳이 이 글을 읽을 필요도 없다. 과연 대한민국에서 시집 100권을 낼 정도의 역량을 가진 시인'이 누가 있을까.

아니, 전세계를 통틀어 보아도 살아생전에 시집 백 권을 출간하며 이 시대의 어른으로 숭앙 받는 시인은 그가 전무후무할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그가 낸 책은 시집 외 잡다한 목록까지 포함하면 150권이 넘는다.  물론 다작을 한 작가라고 해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조르주 심농은 400편의 추리소설을 내놓았고,  스티븐 킹은 500편의 작품을 내놓았다(무엇보다도 스티븐 킹이 놀라운 점은  원고지 분량만 놓고 보자면 원고지로 쌓아올린 종이 바벨탑에 도전할 작가는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EN의 다작이 문제인 이유는 시라는 장르가 속필이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데 있다.

EN의 시는 깊이도 없고 넓이도 없고 높이도 없다. 시가 반드시 " 묵은지 " 일 필요는 없으나 적어도 " 겉절이 " 를 내놓고는 슬로푸드'라고 자랑하는 것은 면이 서지 않는 짓이 아닐까 ? EN의 시가 詩답지 않아서 시답지 않은 시시한 시'인데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발표할 계절이 오면 기자들이 그가 사는 수원 집 앞에서 배수진을 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내 정치에 능한 그와 그의 이너서클이 만들어낸 아우라가 아니었을까 ? 신경숙 신화가 문단 내 사내 정치가 만들어낸 허수이듯이 EN 신화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 사내 정치 > 이중적이며 중첩적 의미로 사용했는데 사내는 사내(男兒)이면서 사내(社內)이다. 

신경숙이 사내 정치에서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철저하게 명예 남성 역할을 자행하며 남성 욕망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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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괴물, 최영미




괴물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 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 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벨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벨상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ㅡ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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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8-02-0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한창 난리가 났던 박진성 시인은 저도 뭣 모르고 막 욕했는데 무고한 것으로 드러났지요.
은태할배는 범신할배는 으~웩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7 14:24   좋아요 0 | URL
몸사릴 할베들 많죠. 방석집 좋아하시는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ㅎㅎ

samadhi(眞我) 2018-02-09 13:39   좋아요 0 | URL
참 은태 할배는 고은 시인 본명인 거 아시죠? 고은태.

수다맨 2018-02-07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굉장히 화가 났는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최영미 시인이 (이런 폭로시를 쓴 의지와 열정은 지극히 존중할 만하지만) 아주 예전부터 소영웅주의와 자기 연민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하고 말이죠. 저는 예전부터 소외와 오해만 받는 용감한 (그래서 아주아주 불쌍하기 그지없는) 나 VS 악랄하고 몰가치하고 파렴치한 전체 집단의 구도를 그의 시에서 여러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최영미의 작품 세계는 80년대 참여문학의 나이브한 연장이자, 공지영의 시인 버전 같다는 인상이 들더군요.
저는 최영미 시인의 이번 폭로와 고발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이에 연루된 해당인은 그만한 책임과 대가를 당연히 짊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녀가 ‘나는 문단의 왕따‘이다, ‘나는 죽은 목숨이다‘라는 식으로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약간은 오버이자 난센스 같다는 인상도 듭니다. 저는 만일 최영미의 시 세계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가부장적이고 여혐적인 문단 체제‘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시작 역량이 (그녀가 진단한 것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데서도 찾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시인이 이러한 것들(체제의 더러움과 추악함과 자신의 문학적 공력)을 모두 돌아볼 줄 아는 균형적인 안목도 마땅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저는 EN 시인을 문학적으로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인격적으로 싫어할 이유까지 생겼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7 15:56   좋아요 1 | URL
제가 두 곳에 같은 글을 올리는데 네이버에 단 저의 댓글 내용은 이렇습니다.
최영미의 미투를 지지하지만, 솔까말 최영미는 시를 못 쓰는 시인이다. 그것도 사실이다..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전 남성 권력의 폭압과 함께 그녀 스스로의 시인으로서의
역량 미달도 지금의 쇠락의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2018-02-07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