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주문 목록
토요일에 책을 주문( 확인해 보니 일요일에 주문장을 작성했다 ) 했는데 감감무소식'이었다. 혹시나 하고 구멍가게로 갔다. 구멍가게'가 동네 주민 택배 보관소가 된 지는 이미 오래였다. 택배 때문에 귀찮을 만도 하지만 주인은 항상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내게 온 택배는 없었다. 빈손으로 나오기 민망해서 맥주 2병과 딱딱하게 언 얼음과자 비비빅 열 개를 샀다. 집에 오자마자 < 봉다리만보면잘띠네 씨 > 는 내 손에 쥐어진 검은 비닐 봉투를 보고는 흥분해서 마당을 뛰어다녔다. 포장지를 뜯어 봉다리 씨 입에 비비빅을 물리자 개는 털을 곤두세우고는 이내 달아났다. " 개노무 색휘, 비비빅 앞에서는 애비 에미도 읎냐 ! " 이번에 내가 주문한 책은 대부분 이웃들이 적극 추천한 책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A 씨는 이승우의 << 식물들의 사생활 >> 을 추천했다.
한때 한국소설을 졸라 읽다가 짜증나서 읽지 않게 되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마른 장작에 불을 피울 생각이었다. 장르 소설 위주로 읽는 것도 이젠 지쳤다. 사실 나는 문창과 교수를 하면서 여러 문학상에 얼굴을 들이미는 소설가나 시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거칠게 말하자면 학을 뗐다.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궤적을 그리며 똑같은 이력서를 작성했다. 소설이나 시를 발표해서 등단을 하고, 여기저기 문학상을 기웃거리다가 하나 걸리면 상을 타고 곧이어 문창과 교수로 직행했다. 문학상 수상 작가와 문창과 교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은밀한 관계처럼 보였다. 마치 그들이 노린 최종 목표가 문창과 교수직을 얻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문학상은 교수 라이센스를 위한 스펙이었나 ?
그러다 보니 그들은 독자보다는 심사위원(비평가)에게 잘보이기 위한 글을 썼다. 쉽게 쓰기보다는 어렵게 썼다. 왜냐하면 심사위원은 쉬운 서사'보다는 난해한 서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가 정말 쓰기 힘든 영화평은 고다르나 타르코프스키 영화가 아니라 심형래의 << 디워 >> 같은 영화다. 이런 작품은 쇼트 바이 쇼트 분석보다는 40자평 하나 남기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외면하는 게 최상이다. 문학 비평도 마찬가지'다. 결국 한국 소설을 읽는 독자는 감소했고, 작가가 소설만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가능성도 점점 희박해졌다. 그러다 보니 안정적인 직장을 얻어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작가를 탓할 일은 아니지만 문단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러한 현상은 위기'다.
만약에 위기가 아닌 때가 어디 있었는가, 라고 되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만.... 어떤 이는 시를 쓰는 시인이면서 동시에 문학평론가이면서, 문창과 교수이면서, 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을 겸하기도 했다. 1타 4피'였다. 북 치고 노래하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방귀 뀌고 성내고, 혼자서도 잘한다. 문학판에도 승자 독식이 작용하는 것이다.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혼자서 다 해먹는 짓 따위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문학상은 이제 서로 끼리끼리 돌려막는 신용카드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악취 속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작가는 있게 마련이다. 편혜영과 천운영에 대한 평가는 과장된 면이 있고, 하성란과 김애란은 단편은 뛰어나지만 장편만 쓰면 죽을 쓴다. 이제 믿을 사람은 이승우 밖에 없는가 ? 그 기대를 가지고 읽어보련다.
<< 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 >> 는 B가 적극 추천한 작품이다. " 근래 읽어본 소설집 중 최고다 " 라는 평가를 내린 후 " 인간에 대한 그 어떤 환상도 없이 담백하게 써내려갔다 " 고 평가했다. 그는 나와 독서 취향이 꽤나 비슷해서 이 작품에 기대가 크다. ( 실례가 될려나 ?! 스티븐 킹 소설 목록을 제대로 구비한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 ) 내가 한국 소설에 질려버린 이유는 엄마는 만병통치약이고 아빠는 항상 무능하거나 폭력적인 인물로만 그려지는 가족 치유 판타지 때문이었다. 이제는 가족이라는 집단적 트라우마 속에 개인을 함몰시키는 철 지난 " 눈물의 떼창 " 은 쓰레기통에 버릴 때가 되었다. 가족주의가 촌스럽게 발전하면 국가주의가 된다. 이명박 정권이 신경숙의 << 엄마를 부탁해 >> 열풍 시기에 깃발을 달고 출범해서 << 7번 방의 선물 >> 열풍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현상이다. 부도덕한 집단일수록 가족과 국가를 호명한다.
윤희상 시인의 시집 << 이미, 서로 알고 있는 것처럼 >> 은 추천을 받은 작품이 아니라 내가 고른 시집이다. << 소를 웃긴 꽃 >> 이후에 나온 새 시집이니 7년 만이다. 알음알음 알게 된 시인인데 전작에서 보여준 " 간결한 미학 " 이 돋보이는 시를 선보였던 작가였다.
변두리 다방에 가서 앉는다. 종업원 아가씨는
두 잔의 커피를 가지고 와서 옆에 앉는다. 그 무렵부터
여자는 옷을 벗기 시작한다. 내게는 쉽게 벗는 것
처럼 보인다. 벗은 몸에는 여러 개의 못들이 박혀
있다. 들여다보면 못의 머리에는 남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반쯤 덜 박힌 못이
있다. 때로는 속옷이 걸려서 찢어진다고
그런다.
윤희상 ㅣ 못 이야기, 시집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그의 시는 A4 용지에 한글 9폰트 크기로 깨알 같이 써내려간 후 지우기 작업을 통해 한 줄'만 남긴 결과처럼 보인다. 시인은 변두리 다방 종업원 아가씨'의 사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몸에 박힌 못'을 보여준다. 윤희상 시는 간결한 선과 의외의 일성'이 돋보인다. 기대되는 시집이다.

나머지 작품은 5만 원 구매 범위에 맞추기 위해서 이리저리 짜맞추기를 해서 반값 할인하는 책으로 꾸몄다. 그런데 다 헛것이 되었다. 알고 보니 나는 주문장은 작성했지만 막상 최종 구매 버튼을 누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사실도 모르고 오지 않을 택배'만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다시 주문장을 제출했다. 5만 원 범위를 맞추기 위해서 몇몇은 빼고 스티븐 킹 소설 << 닥터 슬립 >> 을 추가했다. 이 과정에서 C가 추천한 신동호 시집 <<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 는 빠졌다. << 닥터 슬립 >> 이 샤이닝 이후' 를 다룬 속편이라고 하니 기대된다. 킹은 킹이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킹의 후기작(최근작)은 공포를 버리고 성장통을 다루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노인이 된 킹은 이제 너그러워졌다. << 조이랜드 >> 에서 킹은 트라우마 대신 추억에 집중한다. << 닥터 슬립 >> 도 이 과정 속에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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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제 자야겠다. 요즘은( 일주일 정도 됐다 ! ) 밤 8시에 자서 새벽 4시에 일어나는데, 내게는 이 리듬이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