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생활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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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독서에 있어서만큼은 편식을 즐기는 터라 김혜진의 책은 언제나 구매리스트 상위에 위치한다. <중앙역>에서만큼의 강렬함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지만, 현실에 천착한 그녀의 집요한 글은 숨 막힐 듯 흡입력이 있다. 이번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책의 제목처럼 줄곧 의 시선은 에게 향해 있다.

 

태비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 귀찮고 번거로운 숙제처럼 여겨졌지만, 막상 너와 있으면 시간이 잘 갔다.” (p.20, <3구역, 1구역>) 처음의 는 항상 반갑고 막역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불문율은 언제나 그렇듯 들어맞는다. “그러니까 그 밤에 내가 실감한 건 너와의 간극이었고 격차였다.” (p.31, <3구역, 1구역>), “이대로 십 년이 가고 또 십 년이 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에 오싹해지면서도 네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p.86, <너라는 생활>), “그러니까 이 순간에는 나를 이곳까지 끌고 온 게 너라는 확신을 지울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벗어나고자 하는 건 이 낯선 동네가 아니고 바로 너라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실은 그것이 오래전부터 내가 바라온 일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p.114, <자정무렵>)

 

깨닫고 또 깨닫지만, 도무지 고칠 수 없는 모양이다. 가족도 아니고 부부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며 친구도 아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 아니, 분명히 존재하지만, 모두가 한 날, 한 시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른 체할 수 있는 존재. 파트너다. 파트너? 직장 동료를 칭할 때 흔히 쓰는 말이 나와 너와의 생활에서는 어쭙잖게 얹힌다. 하지만 김혜진의 소설에서는 굳이 성 소수자를 부각하지 않는다. 성별의 문제와는 무관히 나와 너 앞에 펼쳐진 참혹한 현실을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무수히 많은 나는 무수히 많은 너를 쉬이 끊어내지 못한다.

 

나로선 버틸 수밖에 없었다. 버티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거였다. 언젠간 괜찮아지겠지, 조금은 편해지겠지” (p.184, <아는 언니>)

언젠간 괜찮아지겠지. 조금은 편해지겠지. 분명히 알고 있는 답과 결말을 나도 모른 체한다. 당장 살아야 하고, 살아내야 하니까. “그럼에도 어느 주말 저녁 나는 또다시 너를 만나러 갔다.” (p.168, <우리는>) 또 너를 만나러 간다.

 

그해 겨울에 너는 이직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난 두 번째 좋은 일이었다.” (p.212)

광장은 이듬해 9월에 완공됐다.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난 세 번째 좋은 일이었다.” (p.221, <팔복 광장>)

<팔복 광장>이 완공(완공은 되지도 않았지만)되기까지 만 2년 동안 나와 너에게 일어난 좋은 일이 세 가지뿐이라니. 암울하지만 현실이다. 그저 끊어지지 않을 만큼만 서로를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재개발을 두고 찬반 싸움을 하는 아저씨의 이봐요. 그쪽은 어느 쪽이오?” (p.14, <3구역, 1구역>)라는 무던히 저급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혐오와 배제에서는 손을 잡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내 편이 되어 달라는 그 흔한 부탁조차 하지 못하는 나와 너. 그리고 당신들의 현실에 응원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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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즙 배달원 강정민
김현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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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한 건 아닌데, 여성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고 있다.  한동안 자격증 공부를 하느라(또 공부해야 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는 것은 안 비밀책을 소홀히 했는데몇 주 동안 실컷 읽었다주로 좋아하는 작가의 책만 골라 사 읽었다김현진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그녀의 글은 웃프다웃긴데 슬프다슬픈데 웃기다그래서 마음이 간다.

적어도 그의 책은 출간할 때마다 산다한 권을 더 사 다른 이에게 준다그냥 그러고 싶다.

이 책 녹즙 배달원 강정민」 또한 여지없이 웃프다웃기고 슬프다작가가 실제로 녹즙 배달을 한 것처럼 강정민의 삶과 김현진의 삶이 비슷하다.

 

강정민은 녹즙 배달원이다만화를 그리고 게임 캐릭터를 디자인하는 사람이지만 현실에서는 녹즙 배달원이다.

내가 엄마의 강렬한 희망이었던 간호학과를 버리고 어릴 때부터 꿈꾸던 만화가그러니까 웹툰 작가가 되기 위해 만화과를 택한다고 하자 엄마는 등록금을 단 한 푼도 대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p.23)

등록금을 단 한 푼도 대주지 않은 부모 때문에 홀로 모든 것을 견뎌야 했다열심히 일하며 공부해 회사에 들어갔지만게임 캐릭터를 오로지 성 상품화시키는 것에 혈안이 된 회사에서 그림이 망가진다그림만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몸도 마음도 망가졌다같이 일하던 신대리라는 놈은 일부러 성인용 애니메이션을 가져오기도 하는 성희롱을 한다.

나도 결혼을 하기 전에는 성차별성희롱성추행 이런 것들이 남의 일로만 여겼다여성들이 반복적무차별적으로 겪는 일상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급하게 잡아 올라탄 택시에서 씨발오늘 첫 개시 조졌네.”라는 말을 들어야 하고 등하교 버스 안에서 무시로 뻗쳐 오는 남성들의 시선과 손길을 견뎌야 했다는 것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단지 남자기 때문에 인생을 살며 단 한 번도 겪지 않았던 일이 여자에게는 너무나 많았다우리 부모 세대에서는 그런 일이 흔했다고 하더라가 아니었다지금도 여전한 일이다김현진은 이 소재를 그의 작품 내내 소개한다캐릭터와 사건에 녹여 낸다그래서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각인한다.

 

그래맞다이년아네가 어쩔래?”

남이면 고소라도 할 텐데진짜.”

고소얘 말하는 꼬라지 좀 봐가족끼리 서로 돕고 사는 거지네 오빠가 너 결혼할 때 가만있겠냐?” (p.158)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이거다그래도 부모님인데그래도 가족인데.” (p.159)

 

그래도 가족에게 늘 치인다불쌍할 정도로 치인다뼈 빠지게 벌어온 돈을 훔쳐 하나님이 준 거라고 발뺌하는 그들 때문에 하나님과도 친해질 수” 없다유일한 친구는 술이다.

알코올중독자라고 시인할 정도다한 번씩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실 때마다 술자리에 함께한 남자와 모텔에서 함께 아침을 맞는 끔찍함을 매번 겪는다하지만 그 끔찍함을 또 깜찍하게 이겨내는 것이 술이다.

 

그래서 오늘은 소맥너와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어그냥 냉장고에서 오래 묵은 아무 반찬심지어 신김치 쪼가리만 곁들여도 나를 기꺼이 포근하게 안아주는 너.” (p.9)

기꺼이 포근하게 안아주는 너는 술뿐이기 때문에정민아너를 어쩌면 좋냐.

 

오늘도 익숙한 메일이 왔다강정민님 님께서는 저희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어쩌고저쩌고 귀하의 건승을 빕니다.” (p.255)

지원하는 회사에서는 매번 귀하의 건승을 빈다는 거짓부렁의 메일만 받는다잠시만잠시만 하던 녹즙 배달이 주업이 되어 버렸다자신은 절대로 앉아 일할 수 없는 대기업의 높은 빌딩 안에 있는 콧대 높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조롱을 견뎌내며 술로 버틴다술이 아니면 무엇으로 버티나.

 

“24개월을 술을 한 방울도 드시지 않았다이러면 이건 알코올 완치 판정으로 봅니다.” (p.395)

 

그런 강정민이 알코올 완치 판정을 받았다뜬금없었다나는 실패할 줄 알았다뭐 조금씩 줄여가는 정도면 좋겠다강정민은 건강을 해치지 않는 정도로 술을 마셔주었으면 했다아니이건 또 무슨 고약한 심술인가건강을 해치지 않는 술은 없는데 말이다술을 끊은 강정민의 앞길이 어떨지는 모른다좋은 곳에 취직해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릴 것인지녹즙 배달로 전국 1등을 할 것인지여전히 버는 족족 가족에게 돈을 뺏길 것인지녹즙이고 그림이고 아무것도 개선이 없는 채 또다시 술에 빠져들지.

나는 좋은 쪽으로 기대하고 싶다작가가 아프지 않고 오래도록 글을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늘 있는 것처럼강정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가족과 술에만 매여 강정민 자신을 잊은 채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이 이르렀던 편안함은 판타지다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이지안이 마지막 장면에서 보였던 작은 웃음 정도는 강정민도 보여주기를 바란다녹즙이 든 큰 가방을 메고 있든머리를 쥐어 짜내며 태블릿 PC에 그림을 그리고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가장 고마운 것은 바로 당신이 책을 집어 들어준 독자 여러분게다가 역병이 도는 바람에 다들 먹고살기 어려워 책 한 권 사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린 세상에 굳이 이 책을 사준 당신당신이야말로 나를 늘 살아 있게 해준살아 있어도 된다고 해준계속 살라고 해준바로 그 사람이다당신 덕분에 계속 살고웃고쓸 것이다.” (p.416)

 

언제나 그렇듯재미있고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마울 따름이다책 한 권 사는 것이 아직은 사치가 아닌 형편이라 다행이기도 하다.

고되게 쓰시고햇살처럼 웃으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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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당신 것이니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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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자를 대통령으로 뽑아줄 수 있나. 노인들과 20~30대 남성들, 30대 주부들의 몰표. 부동산, 젠더 갈등. 뭐 하나 맞아떨어지는 게 없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부동산, 부동산, 부동산. 심지어 부동산도 없는 자들이 몰표를 던져 줬다. 프랑스 혁명을 이끈 구체제에서 한국은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극복하지도 못했다. 역사적 맥락을 짚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나는 친일파 청산을 못 한 것에 가장 큰 방점을 둔다. 반민특위의 실패는 정의가 사라지고 기회주의가 판치는 세상을 만들었다. 친일이 반공이 되고 반공이 독재로 가면 바꾸기하면서 아직도 이 나라를 주무르고 있다. 오죽하면 일개 공무원 나부랭이 검사들이 국가 최고 입법기관과 아직은 퇴임 전인 대통령에게 대들고 있다. 좀 더 가진 자, 힘이 센 자에게 붙어살면 대대로 떵떵거리고 산다는 근현대사가 만들어낸 현실이다.

 

코로나 시기 선진국들이 한국을 치켜세우고 사회 전 분야에서 K 열풍이 불면서 진짜 우리만 스스로 모르는 선진국이구나 착각했다.

아니다. 아직 멀었다. 지금의 정치 지형이라면 앞으로의 선거도 암울할 뿐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의 진원지마냥 발만 디딘 적 있어도 입국을 금지하던 나라와 수료라니. 악의 축, 불량국가, 테러 지원국을 봉쇄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이제껏 우리가 기울인 노력들은 다 뭐란 말인가.” (p.237)

 

노인들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이 바로 내 부모의 모습이니까. 그런데, 이해가 혐오로 바뀌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퇴물 정보 요원들은 백악관, ‘사상 최초 평양 정상회담전격 발표.” (p.230)라는 뉴스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 여전히 그들만의 세계, 냉전과 독재 시대에 사는 것이다. 가장 찬란했던 때를 놓치기 싫은 발작이다.

 

설령 역사를 바꿀 뻔했대도 일개 국장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랴. 과거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반역의 시대에.” (p.154)

 

사실, 이 책은 선거 전에 읽었었다. 책 내용 자체는 별로 재미없었다. 여전히 자신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이 설치는 퇴물 요원들의 주접이 다소 허황되고 판타지라 오히려 더디게 읽었다. 그런데 선거 후 가만히 이 책의 내용을 떠올리니,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이라 생각되었다. 묻지마 몰표를 던져 준 저들에게는 당신들의 시대가 아닌 시대는 모조리 반역의 시대일 수 있겠구나. 묻고 싶다. 당신들의 시대가 아니면 모조리 반역의 시대냐고. 존경심? 존경심 따위는 이제 없다.

 

일반 패스는 삐, 하고 정상 처리 알림음이 한 번 울리지만 시니어 패스는 삐삐, 두 번 울린다. 선심 쓰듯 무료 패스를 발급하는 이면에는 반정부 성향이 강한 노년층을 감시하려는 속셈이 깔려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p.51)

 

시니어 패스 같은 디지털 시대의 첨단에 대해서도 반정부 성향이 강한 노년층을 감시하려는 속셈으로 생각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카톡의 온갖 대화창과 방에도 저런 내용으로 유포될 수 있겠구나. 저들의 코인을 먹고 사는 유튜브 장사치들도 하루종일 떠들어 댈 수 있겠구나. 싶었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고 나니 팔다리에 힘이 빠진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과 살고 있나 싶다. 내가 아니면 너는 다르다가 아니라 틀렸다.’라고 당연히 생각하는 자들과 한 하늘을 이고 산다는 것이 별스럽다.

 

책은 별로 재미없었다. 퇴물 요원들의 우상이던 그 분이라는 존재에 대한 접근과 묘사도 와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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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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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두고 온갖 음모론과 다툼, 갈등과 정보가 쏟아지는 현재다. 대선이라는 큰 선거를 앞두고 반복되어 온 일이라 치부하기엔 정도가 과하다. 포털 사이트 첫 창을 보기가 힘들 정도로 온갖 정보가 넘쳐난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전에 새로운 일과 정보가 쏟아진다. 머리가 아프다.

팬더믹 이후 한국은 방역과 예방, 경제력의 회복 등에서 선진국의 위치에 올랐다. 이전까지 늘 부러워하기만 했던 기존의 선진국들이 K모델을 차용하고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수준은 여전히 후진국이다..

 

그들의 상대는 언제나 외세에 기대어 기회주의적으로 사적인 이익만을 탐하는 수구 보수들이었습니다. 도덕적 하자가 너무나도 분명한 수구 보수 세력하고만 경쟁해 왔기 때문에 항상 도덕적으로 우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p.105)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에서 소위 진보로 분류되는 지금의 여당에 대한 비판에 힘을 싣는다. 그리고 언론이나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보수진보의 정치 지형이 아니라, “‘수구보수가 손을 잡고 권력을 분점한 수구-보수 과두지배(oligarchy)’(p.172)”라고 정의한다. 100퍼센트 동의하는 바다. 거대 양당이 권력을 주고받았을 뿐, 소수정당은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해방 이후 친일부역자들을 처단하지 못했고, 이어진 한국전쟁과 군부독재 기간을 통해 한국은 반공 파시즘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저자의 지적대로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을 통해 정계에 진출한 수많은 86세대는 수십 년을 지배한 거대 수구기득권 세력에 대항하는 것이 최선이자 최대였다. 당연할 수밖에 없는 도덕적 우위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정당성이었다. 이것은 이번 정권 내내 이어진 수구기득권 세력의 뻔뻔한 행태를 통해 정확히 드러났다.

저자는 이것을 “‘광장 민주주의일상 민주주의가 괴리된 현상으로 (p.32)” 지적한다. 함께 어깨를 걸고 거대한 시위와 운동을 하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지만, 이후 꼼꼼하고 면밀하게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에는 미흡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대통령을 탄핵하는 엄청난 직접민주주의를 이뤄냈다. 이것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교과서에서 배우던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에 한국 시민사회도 놀랐다. 하지만 이후가 문제였다. 촛불을 들고 대통령을 탄핵했던 사람들이 탄핵한 정치세력을 다시 지지하고, 제대로 처벌받은 정치세력은 전혀 없다. 과거 몇 년을 돌아보며 나도 무척 궁금했다. 도대체 왜 한국 사회는 이렇게 병리 되어 있었을까.

저자는 군사문화의 전면적인 재배와 정치 지형의 기형화를 지적한다. 그리고 교육문제를 지적한다.

 

한국은 사립대학이 기형적으로 많습니다. 한국은 사립대학 비율이 87퍼센트로 세계에서 사립대학의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p.39)

미국조차도 사립대학의 비율이 20퍼센트를 넘지 않습니다.”

 

사학법 개정에 대해 한국 사회의 전 기득권 세력이 들고일어났었다. 이명박 정권 시절에는 뉴라이트라는 이상한 역사교육이 시행되었다. 대학입시 제도는 수시로 바뀌고 일반인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강남을 비롯한 교육열이 높은 곳에서는 대학입시를 컨설팅 해주는 사람들이 따로 있기도 하다. 부모의 등골을 휘게 만들었던 대학 등록금은 이제 청년세대의 짐으로 던져졌다. 졸업하고 취업해서도 대학 등록금을 갚아야 하는 실정이다. 출발선부터가 다른 것이다. 이것은 정권이 바뀌어도 똑같았다. 시민들이 정권을 교체해도 매번 똑같은 어려움과 부담을 지게 되니, 더욱 정치에서 멀어진다. 이것은 앞서 말한 수구-보수 과두지배세력이 가장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연시한 많은 것이 여기서는 잘못된 것, 부조리한 것,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었으니까요.” (p.16)

 

저자는 책에서 독일과 한국을 비교한다. 독일의 총리가 한국의 대통령을 각별히 존중하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젊은이들이 K팝에 열광해도, 저자가 경험한 수십 년 전의 독일 사회와 지금의 한국 사회 사이의 괴리는 현실이다. 이미 수십 년 전에 독일 대학에서는 조교가 베를린 자유대학의 총장이 되고 (p.40),” 일반 기업 이사회의 절반을 노동자가 차지하도록 법으로 정해놓았다. (p.43)”고 한다. 2021년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 이런 사회·국가에서 살아야만 하나?

결국, 정치의 문제다. 가증스럽고 역겹지만, 정치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청년 고독사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공동체는 흩어졌으며 그것으로 인해 청년층의 보수화가 노골화 되는 지금이다. 더 이상 정치를 홀대해서는 안 된다.

만약, 지금의 정권이 아니라 탄핵당한 정치세력에서 코로나 펜더믹을 맞았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두손 두발 다 놓고 있는 일본의 상황보다 더 심각했을지도 모른다.

당장 선거를 통해 수구-보수 과두지배체제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수십 년을 하루아침에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계속해서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설득하고 함께 어깨를 걸어야 한다.

도대체 한국의 국민은 어디까지 해야 하나요.”라는 커뮤니티 댓글이 기억난다. 탄핵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에 완전한 힘을 몰아주었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한 한탄이었다. 해당 댓글에 대한 좋아요와 추천이 엄청났었다.

어쩔 수 없다. 독일이 아닌 한국에서 사는 한, 정치를 바꿀 수 있는 건 우리의 몫이다. 어지럽고 혼란한 한국 사회의 균형을 되찾는 것은.

결국, 정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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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21-11-27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양비론은 경계해야하는 회색논리라 생각하고 있어요, 현실을 직시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하지요. 김누리의 기득권 비판은 새로운 이해가 아니에요. 결국 자기탐닉적인 보수에 도움이 되는, 진보가 지향하는 가치만을 퇴색시키고 말지요. 수구세력에 도움이 되는 논리로 귀착되고 말아요. 양비론의 프레임에 갇히기 시작하면 수구에 끌려다니게 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좋은 리뷰 읽고 갑니다.

lmicah 2021-11-30 19:37   좋아요 0 | URL
지금의 정치 혐오 정서와 20대의 수구화를 낳은 것이 양비론의 폐해라는 데 동의합니다. 언론신뢰도 최하위의 기레기들과 기득권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지요.
저는 이 책을 통해 김누리의 글을 처음 접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정치지형을 보수와 진보가 아닌 ‘수구-보수 과두지배‘로 보는 접근에 동의했습니다. 이 잣대로 보지 않는 이상 지금의 정치 지형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180석이나 되는 의회를 가지고도 뾰족한 개혁을 해내지 못한 여당은 진보가 아니죠. 철저히 기득권일 뿐입니다.
김누리 교수의 다른 책도 읽어 볼 요량입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함께 쓰는 역사 일본군'위안부' 일제침탈사 바로알기 4
박정애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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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을 보고 선뜻 구매하지 못했다. 몇 번을 망설이다 구매했지만 읽기는 더욱더 힘들었다. 얇은 책이지만 어렵고 길게 읽었다.

7~8년 전, 가까운 친구가 대구에 있는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에서 상근 직원으로 일했었다. 도와줄 일이 있다 해서 사무실을 찾아갔다. 사무실 주소를 받아 들고 한참을 헤맸다. 사무실은 사람의 왕래가 잦지 않은 대구 구()시가지 골목 안에 있었다. 낡은 건물 2층에 있는 사무실은 좁았다. 좁은 사무실에는 물품이 가득했는데, 당시 후원을 위해 제작하던 희움팔찌의 구성품이었다. 시민모임의 예상보다 구매와 후원이 많아 나를 제외하고도 일손을 돕는 사람이 몇 있었다. 역사관 건립을 위한 활동이라는 말을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다. 2015년 시민모임 사무실 인근에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 건립되었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인식은 문서자료를 더 많이 발굴하여 그 피해를 입증하고 일본의 가해 책임을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공간을 가로질러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외면 또는 은폐하고 싶던 위안부라는 호칭은 문서자료를 통해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p.45)

 

당시만 해도 위안부보다 정신대 할머니라는 호칭이 일반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위안부로 통용되고 있다. 친구가 시민모임에서 일할 때, 몇 번 모임의 캠페인에 참석했었다. 피켓도 들고 행진도 했다. 친구가 시민모임 일을 그만두고 자연스럽게 관심이 줄어들었다. ‘위안부라는 단어를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수도 없이 보고 들었지만, 이 책을 받아든 순간 제목을 보고 이질감이 들었던 것은 역사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현저히 줄어든 탓이다.

 

여전히 당신들이 겪은 일은 피해가 아니었다며 훈계하고 입막음하려는 역사 부정론자들이 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이들의 이야기는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p.92)

 

얼마 전, TV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지난 보수 정권하에 국정원과 일본 우익의 커넥션을 폭로했다. 나라 전체가 들썩여야 할 대단한 사건이었음에도 너무 조용했다. 받아쓴 언론은 없었고, 피를 토하며 비판해야 할 역사학계도 꿀 먹은 벙어리였다. 친구가 일하는 단체라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참여하게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보도하고 교육하고 홍보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의 극우세력이 망언하면 잠깐 보도되거나 위안부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단신으로 전달될 뿐이다.

 

피해자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은 평화와 인권이라는 가치가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p.4)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의의가 크다. 생존하신 할머니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기록했다. 정확한 역사적 사료와 표현이 중요한 독도 영유권과는 다른 문제다. 전쟁이 끝난 후 위안부문제를 가장 지우고 싶어 한 사람들은 할머니들이셨기 때문에,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숫자 240명은 정확한 수치가 아닐 것이다. 평생을 아픔과 한으로 살아오신 할머니들의 구술을 받는 작업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함께 생활하는 가족과 친지, 이웃들에게도 알려질 터라, 더욱더 그렇다.


본문에 나온 이름은 모두 존칭을 생략하였다. 이 책에 언급된 피해자 및 인권운동가의 삶이 할머니에 갇히기보다는 한 사람의 인생으로 기록되기를 바랐다.” (p.5)

문서에 의존하기보다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들으려는 듣는 자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흩어진 조각들을 이야기로 엮을 수 있었다.” (p.46)

 

피해자 중심으로 위안부문제에 접근하는 자세는 책의 곳곳에 드러난다. 무엇보다 할머니로 통칭하는 위안부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피해자 인생의 기록에 초점을 맞춘 접근은 의미 있는 성과다. 단편적인 기억과 엉켜있는 경험을 조합하고 정리하는 일은, 고난도의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수고로움과 인내를 동반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피해자들은 인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는 것이다. 어제보다 더 나은 일상을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생존해냈다. 살아남아 자신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인간으로서 자신들이 기억되기를 바랐다.” (p.78) 는 저자의 종합적인 의견은 위안부문제를 더욱 공론화해야 할 이유다. 그들의 생존은 자체로 역사가 되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을 견디고 끊어질 듯 힘겹게 삶의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명이 24일 별세했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가운데 생존자는 13명이 남게 됐다.매일신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1명 별세.”, 925일 기사 중 발췌

 

정부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숫자가 240명이다. 수십 명이, 수백 명이 더 생존해 계실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공식적으로 등록된 피해자가 모두 별세하신다면 대내외적으로 위안부피해자는 생존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제는 이런 책을 위해 구술을 받을 수 없다는 얘기다. 자료가 남아 있는 것과 그 자료를 수정할 수 있는 당사자가 생존해 계신 것은 차원이 다르다. 일본의 극우와 가해자들, 한국의 극우와 부역자들이 그토록 원하는 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미 시작된 카운트다운이 가파르다.

 

다음에는 더욱 속 깊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열흘 뒤인 2001210일 하복향이 세상을 떠났다.” (p.33)

이수산은 어느 때고 망설이기는 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202032일 작고했다.” (p.70)

박순희는 20128월 작고했다.” (p.72)

 

시간은 피해자들 편이 아니다. 피해자들이 살아온 영겁 같은 세월과는 반대로 남아 있는 시간은 무람없다. 인터뷰 약속을 하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다음번엔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않은 채 나눈 작별 인사 뒤 얼마 되지 않아 피해자들은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운 일이다. 전하고 퍼뜨려야 할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너무 크다. 일개 개인과 가족, 집단의 잘못이라고 치부하며 역사 부정론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후 김순악은 위안부피해자 생활 대상자로 결정되었다. 그는 더 이상 우울증에 짓눌리지 않았다. 김순악은 대상자 결정통지서를 액자에 넣어 방에 걸어두고 보고 보고 또 봤다고 한다. 그것은 국가가 김순악을 피해자로 인정해준 것이며 삶의 고통이 김순악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p.90)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선생님이 좌절한 제자에게 말한다.

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 완벽을 추구하는 천재 제자가 가진 깊은 상처를 위로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래 맞아. 네 잘못이 아니야.’

김순악도 평생을 짓누르던 고통을 다소 떨쳐냈다. 국가의 인정배려는 죽어 있던 영혼을 되살린 것이다. ‘결정통지서를 액자에 넣어 방에 걸어두었다는 피해자의 구술이 슬프면서도 당차고 멋있다. 그 종이 한 장이 전 생애를 어루만져 위로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숨어 지내며 가해자가 아닌 자신을 괴롭히는 인생을 살지 않게 된 것이다.

연구자들은 연구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시민단체는 활동을 지속하고, 정부는 종합적 지원을 모색하고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잊지 않고 찾아내야 한다. 노력을 기울여 찾아내고 알아내야 한다. 알아야 전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현재의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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