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 업 쇼트 -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
제니퍼 M. 실바 지음, 문현아.박준규 옮김 / 리시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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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서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엇이 되었을까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김애란 - <서른> 중)

'서른'을 다룬 텍스트들이 꽤 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최승자의 <삼십세>,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번에 검색해서 알게 된> 블로콜리너마저의 <서른> 등등... 왜 서른인가 굳이 따져보면 '앞자리'가 십 년 만에 바뀌면서 나이에 대한 체감이 강하게 들고, 이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성인''어른'의 티가 나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미성숙하고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감각에서 불안이 몰려오는 게 아닌가 싶다. 예전에 '서른'은 결혼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여서 그랬을 것 같고, 지금은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이에게 조급함을 들게 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이로 하여금 이직 같은 선택을 고민하는 시기여서 그럴 것 같다. 시대가 바뀌긴 했지만 서른에 갑자기 시간이 내 앞에 찾아와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불심검문을 하는 특성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서른의 상징성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유무형의 압력에 기인한다. 번듯한 사회인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사람 구실' 해내야 한다는 것. 십대부터 이십대의 어느 시점까지 이어져온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과 발달의 상승곡선이 멈춰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과도기와 정체기의 '인생 슬럼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 들 때, 남들은 탄탄하게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거나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아 '부모'가 되었는데 자신은 아무 것도 이뤄놓은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서른이 온다. 그리고 서른 하나를 향해 거침없이 흘러간다.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김애란 - <서른>

김애란의 <서른>은 몇 년 전 폐간된 <문예중앙>이란 문예지의 2011년 겨울호에 수록된 소설이다. 설마 김애란 작가가 생물학적으로 서른살에 이 작품을 썼을까 싶어(왜냐하면 소설의 윤리적 깊이가 굉장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로필 검색을 해봤더니... 거의 맞았다. 1980년생이시니까 2011년에 썼다고 하면 한국나이로 32살에 쓴 것이긴 하지만 서른 즈음에 이 소설에 대한 착상을 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거마 대학생 다단계 사건에 대한 자료조사에 시간을 쏟으셨을 테고, 아마 초고를 다 쓰기까지 그리고 퇴고를 마치기까지 다른 소설들의 평균적인 집필 시간보다 좀 더 걸렸을 것 같다. 불행히도 현재 <문예중앙> 2011년 겨울호도, <서른>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 <비행운>도 갖고 있지 않다 보니 소설에 대한 얘기를 길게 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서른>이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그속으로 밀쳐버린 누군가를 향한 감당할 수 없는 미안함(죄책감보다 왠지 미안함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을 용서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적어두고 싶다. 용서받을 수 없는 미안함 앞에서 스스로를 죄인에 위치시키고 벌을 내리는 일은 어쩌면 쉬운 길일지도 모른다. 용서-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형이상학적 죄의 문제를 제쳐두고 현전하는 타인의 고통 앞에 최선을 다해 응답하고자 하는 일이 어렵고 고되지만 참된 길에 가까워보인다. 편지의 수신자인 '언니'가 답을 줄 수 없겠지만 언니의 존재로 하여금 '나'가 악무한적 고뇌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한 책임의 윤리를 어떻게든 지고자 하는 애씀이 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서른>의 발신인은 사회적 차원에서 '커밍 업 쇼트', 즉 '인간 구실'을 아직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수준 미달 상태로 인식될지 모르겠으나 그가 끝끝내 지켜내려 하는 책임감은 어른의 가장 본질적인 덕목이지 않은가. <서른>은 어른들은 이 지경이 되기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책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어물쩡 넘어가려 했던 공백에 물음을 던지고 또 던진다.

<서른>의 주인공(서른의 주인공이 '서른'인지 수신인인 언니가 '서른'인지 모르겠으나)은 지금 마흔이 돼서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독립적으로 싱글생활을 하고 있다면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안 되지만 결혼을 하고 출산을 했다면 조금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세상에 내보낸 아이에게 마스크를 쓰게 만든 어른들이 만든 사회의 질서를 비판하고 반성하고 있을 것 같다. 돌봄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에 분노를 느끼고, 돌봄과 육아가 과부하가 걸리게끔 편중된 상황에서 자신이 엄마로서 역할을 온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할 것 같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아동학대 사건들을 접하며 자기 자식 하나 책임지기 어렵긴 하지만 부모이자 어른으로서 그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함을 느끼고 아이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적으로 각성했을 지도 모르겠다. 또, 기성 세대에 진입하고 있는 혹은 이미 기성 세대의 일부가 된 자신이 '꼰대'인지 아닌지 고민하고 청년 세대를 향해 염려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에서 규정한 성인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만의 기준을 통해 스스로를 성인으로 정체화하는 데 성공했을까? 곁에 친구들이 있을까? 누구에게도 꺼내기 힘든 고백을 담은 편지의 수신인이 되어줄 언니가 남아 있을까?

2 세대론의 궤적에 대한 하나의 거친 소묘

'MZ 세대'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여기저기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작은 어폐를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세대 명칭은 신문이나 방송 같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소개 확산된다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유행(트렌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OO 세대'라는 발명품 내지 신상품을 이해하려면 호명의 주체가 누구인지, 호명의 욕망 및 효과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세대 명칭은 정치적 목적, 마케팅적 목적에 따라 창안된다. 세대라는 사회학적 개념이 정립되자 인구 집단을 새로운 범주로 분석하기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세대 개념이 생명력을 얻어 '사회적 실재'가 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히트 친 세대 명칭은 '86 세대'일 텐데 정확한 연원과 시점을 따져봐야겠지만 2000년 총선과 2002년 대선에서 부상한 정치세력을 명명하고자 사용된 '(3)86'세대는 1987년 이후, 그러니까 87체제의 성립 이후부터 진보 정치의 헤게모니를 독점하다시피 군림했기에 '486''586'으로 변주하며 아직까지도 살아남았다. <386 세대 유감>, <불평등의 세대> 등 한국사회의 모순을 심화시키고 있는 기득권 세력으로 '586'세대를 지목하고 비판하는 담론들이 586 스타 정치인들의 몰락과 정권의 실정失政의 맥락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에 비해 'MZ 세대'론은 정치적 성격이 훨씬 옅다. MZ 세대는 '86'세대의 권위주의, 집단주의적 성향과 달리 반권위주의와 개인주의적 성향을 띠며, 페미니즘 기후위기 등 그동안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되며 후순위로 밀렸던 의제들을 중시하는 정치적 입장을 띤다고 설명된다. 그렇긴 하지만 아직 현실정치에서 단일한 세대 집단으로서 뚜렷하고 일관된 정치적 경향성을 보여준 적이 없어 'MZ세대' 개념이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보기 섣부른 감이 있다. (투표권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청소년층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Z세대를 살짝 제쳐두고) 20-30대로 구성된 밀레니얼 세대를 보면 이준석이란 정치인을 제1야당의 당대표로 만드는 데 공헌한 '이대남'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이 가시화된 바 있긴 하다. 하지만 능력주의와 안티페미니즘을 주된 이데올로기를 삼는 이 집단의 정치적 성격, 정치적 영향력의 규모와 밀도를 따지려면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MZ세대 자체는

인터넷 커뮤니티와 대중문화, 마케팅/시장의 영역에서 활발하고 다채롭게 호명되고 소비되고 있는 추세라 보인다. 그런데 'MZ 세대'론 이전에 흥행에 성공을 거둔 세대 명칭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88만원 세대'이다.

'88만원 세대'는 비록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던지라는 구호를 반복하고 있긴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노동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청년 세대를 정치적 주체화하고자 하는 성격이 강했다고 생각한다. '알바'의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호하고 쟁취하고자 하는 '알바노조'나 '청년 유니온', '민달팽이 유니온'(주거권) 등 사회단체는 '88만원 세대'의 세대 프레임과 세계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반대급부에서 청년들의 탈정치화 ㅡ 원자화/파편화된 개인들의 각자도생 및 생존주의, 먹고사니즘을 비판하고 정치적 조직화를 통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항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골자로 하는 담론을 2010년대 초반까지 자주 접할 수 있었다(20대 개새끼론을 포함해). 당시 한국의 사회학계에서 청년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거듭나고 구성되는지 '자아의 테크놀로지' '마음의 사회학' 같은 방법론을 바탕으로 규명하는 작업들이 활발히 제출되었다. 그야말로 산업화된 자기계발 시장-강연, 도서 등으로 이뤄진-의 장치들이 어떻게 자기계발의 주체, 자기착취적 자아경영인을 구성해내는지, 청년들이 애용하는 콘텐츠인 웹툰이나 예능 같은 텍스트에 표상된 이데올로기 - 생존주의, 각자도생, 서바이벌 –를 해독해냈다. 이런 시도들은 '짱돌' 좀 던져봤던 (포스트) 586의 세대기억 및 세계관으로 오늘날 청년의 현실을 진단하고 (훈계하고) 비판하는 관점에 한 발짝 떨어져 있긴 했지만 ‘타자에 의한 재현’이 갖는 문제점을 여전히 피해가지 못했던 것 같다.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동적으로 체현한 속물-괴물 형상과 기성 좌파 정치의 문법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깨어 있는’ 청년 형상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드러내는 데 한계가 명확했던 것이다.

'청년'이란 범주가 단일한 대상이 아니라 젠더, 지역, 계층/계급에 따라 첨예하게 분할된 복수의 존재라는 사실은 계급적 불평등을 꼬집었던 '수저계급론'을 지나 페미니즘 논쟁을 거치며 가시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청년 세대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성과 ‘감정의 구조’를 읽어내려면 ‘젠더’(언론에서 젠더 ‘갈등’이라 투박하고 거칠게 명명되고 있는... 안티페미니즘, 신자유주의적 남성성, 여성혐오 등)와 ‘공정’ 담론을 받치고 있는 능력주의, '코인 열풍' 등의 현상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사회학자 전상진은 '세대 게임'이란 저서에서 '세대 프레임'이 현실을 호도하고, 잘못된 논쟁을 유도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구조의 피해자이자 약자인 청년과 노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문제화'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대 간 전쟁의 제로섬 게임 형태(국민연금 논란을 비롯해 청년의 등꼴을 빼먹는 기성 세대의 이미지, 실질적으로 돌봄과 복지의 충분한 보호 아래 있지 못한 노인 세대의 곤경 및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노인 혐오)로 논쟁의 틀이 짜여짐에 따라 '세대 게임'의 판을 설계한 이들에게만 이익이 돌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대 게임'의 설계자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세대 프레임'이란 렌즈가 어떻게 시각을 굴절시키고 착시를 낳는지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기성 세대, 특히 정치적, 도덕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고 있었던 (5)86세대의 위선과 기만적 행태가 폭로되고 ‘부동산’을 중심으로 세대적 분노와 좌절이 분출되고 있는 흐름에서 '세대' 문제는 앞으로도 한국사회의 모순과 문제점들이 응축된 전장으로 소환될 거라 예측된다. 특히 코로나는 사회 전반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세대뿐 아니라 계급/계층과 젠더의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전반적으로 청년고용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여성청년들의 고용은 더 나쁜 상황이란 통계가 있고(서비스업 같은 젠더화된 직종이 코로나에 좀 더 심대하고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코로나 경제'에서 가계부채는 위험한 수준으로 급상승하고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악화되었다고 한다. 반대편에서 상위 20% 계층의 자산은 증가했다는 소식이 있고, 언택트 플랫폼 기업들은 크게 성장했다. 부동산을 비롯해 주식과 코인 같은 금융자산의 가치는 높아졌으나 노동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은 '취업'부터 '결혼', '내 집 마련'에 이르는 성인기의 절차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헤쳐 나가고 있는가. '성인기의 절차'로 규정되었던 재사회화의 과정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더 이상 평범한 것이 아닌 게 돼버린 세상에서 일상과 자아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영위하고 있는가. ‘진보’와 ‘성장’의 감각을 어디서 찾고, 정치적으로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제니퍼 M.실바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에서 이렇게 묻는다. 혼란스러운 생애 경로에 의를 부여하기 위해 청년들은 자신이 누구고 무엇을 원하게 될지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창출하게 될까? 이들은 새로운 형태의 감정 표현을 받아들이고 성공의 새로운 지표를 구축하게 될까? 그리고 마침내 자아다움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정의가 우리 모두의 미래를 형성하는 식으로 정치적 반향을 일으키게 될까?(13-14)

​3 '신자유주의 키드', 밀레니얼 노동계급 청년들의 성장 보고서 : <커밍 업 쇼트>

2010년대 중반에 출간된 <커밍 업 쇼트>는 어떤 식으로 미국 노동계급 청년의 현실을 탐구했는지 살펴보자. 먼저, 청년들이 성인으로 잘 성장할 수 있게끔 도와줘야 하는 제도의 실패를 겨냥하며 '특정 기준이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수준 미달의 대상은 성인이 되지 못한 청년들이 아닌 제도(16)임을 밝히며 책의 방향성을 명확히 밝힌다. 역자들은 각주에서 이렇게 덧붙인다. 이 책 전체에 걸쳐 지은이는 성인이 되는 과정이란 결코 개인 또는 가족이 개별적으로만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와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그 이유는 결국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공정하게 분배할 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정치의 몫이고,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교육과 취업, 결혼은 사회와 제도의 적절한 뒷받침이 제공되어야 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커밍 업 쇼트>는 계급과 계층, 하비투스 같은 기존 사회학의 개념과 범주로 불평등의 구조를 설명하지 않는다. 성인이 되고자 고군분투했으나 가족과 제도, 국가로부터 '배신'을 겪은 청년들이 개별적으로 '치료 서사'를 구축해 자신의 진보와 성장의 감각을 측정하는 '치료의 에토스'에 집중한다. "감정적 견고함과 심리적 변형에 따른 치료적 기준에 따라 자신의 진보를 측정(10)"하는 '치료적 자아'의 형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기성 세대의 관점에서 나약해보이기도 하고 한심해보이기도 하는 청년들의 모습, 정치적 차원에서 청년의 미덕으로 지목되는 진보적 스탠스를 취하지 않고 퇴행적이고 보수적인 행태를 꾸짖고 훈계하지 않는다. 대신 100명의 미국 청년 노동자들을 만나 목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로부터 이들 청년 남녀에게 성인기는 노동, 가족, 관계, 친밀함, 젠더, 신뢰, 존엄이라는 선을 따라 새롭게 상상되고(10) 있음을 확인한다. 재편된 가치의 지형에서 청년들이 제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걸어가는 길을 염려와 응원의 마음으로 지켜보며 동행하는 것 같은 제니퍼 M.실바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치료적 자아다움은 어떻게 시민적 정치적 행동과 연결될 수 있을까?(11) 질문하며, 그리고 우리는 자기 단절이나 방어적인 고립에 맞설 제도들을 건설할 수 있을까?(13) 고민하며.

[커밍 업 쇼트]가 미국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민속기록지ethnography이기에 한국 사회의 특성을 부기할 필요가 있다. 압축고도성장을 경험했을 뿐더러 상향의식이 강한, 자식에 대한 투자(희생)와 기대가 큰 부모 세대의 의식구조, 그리고 나이에 따른 규범의 압박이 심한 사회라는 점을 말이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미국과 한국의 청년들의 상황과 사정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어려움이 있었다. 한국의 사정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커밍 업 쇼트>의 내용을 따라가보도록 하자. <커밍 업 쇼트>의 소개된 사례들에서 공통적으로 청년들을 괴롭히는 적은 빚(대학등록금과 카드 사용, 그리고 의료비 지출에 따른), 정서적 고통(불안정한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의 산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도의 배신'에 따른)이었다.

제도들 – 교육과 가족 또는 군대-은 청년들이 안정된 미래를 꾸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많은 청년은 이 제도들이 오히려 가장 고통스런 배신의 원천임을 배우며 성인기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모범이 될 만한 생애 경로, 세상에 대한 신뢰감, 또는 자신이 비틀거릴 때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을 전혀 갖지 못한 채로 존엄과 자아 존중을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커밍 업 쇼트>, 8p

저자가 관찰한 ‘무드 경제’에서 새롭게 형성된 노동계급 성인의 치료 자아의 핵심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노동에 대한 낮은 기대치, 헌신하는 연애 관계에 대한 경계심, 사회 제도에 대한 폭넓은 불신, 타인들과의 깊은 단절, 감정과 정신 건강에 최우선으로 집중하는 태도(35). 무드 경제는 존엄, 건강, 진보의 특수한 감각을 창출하는데, 사람들의 성장 과정을 형성하는 경쟁과 자립, 자기 비난의 문화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감각이다. 감정을 ‘붙들지’ 못하는 사람은 무시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39) 이 경제에서 사람들은 노동이나 결혼, 계급 연대 같은 전통적인 통화가 아니라 감정들을 자아 변형 서사로 조직하는 능력을 통해 정당성과 자기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50). 불확실한 사회에서 ‘리스크의 사유화’(privatization)는 감정과 심리 발달에 집착하는 내향적인 자아를 정립한다. 이 자아는 유연한 경제와 포스트전통 사회 세계가 초래한 유동성과 불확실성으로 둘러싸인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핵심적인 문화 자원이 되었다(51).

이렇게 치료 자아가 신자유주의 사회의 문화적 변동-무드 경제가 낳은 지배적인 유형이지만 이 자아 서사를 구성하고, 자아다움을 추구하는 접근성이 계급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돼 있음을 지적한다. 치료적 자아 서사를 성공적으로 창출하려면 계급에 기반한 ‘연장 세트’tool kit가 필요한데 노동 계급은 언어 능력과 감정 표현, 물질 자원 등으로 구성된 이 연장들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바 일루즈는 이렇게 설명한다. “노동 계급의 삶에는 치료적인 감정·언어 기술과 하비투스가 없다.”(52) 결과적으로 치료 자원들이 배제된 노동계급의 에토스로 인해 노동자들이 웰빙에 이르는 역량을 갖추지 어렵다고 한다면, 이 감정들도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53).

(<커밍 업 쇼트>의 이론적/방법론이 무엇인지, 어떤 면에서 유효한 분석과 통찰을 제공하는 데 성공 혹은 실패했는지 따져보기)

4 '나이 든 청년'으로 성장을 상상하기. 한국에서 '청년 이행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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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 필링스 -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앳(at) 시리즈 1
캐시 박 홍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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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한마디 쏘아주는 것, 그것이 주저되는 것은 아니다. 그거야 못 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런 내면적 갈등과 심지어는 언어적, 신체적 충돌에 노출될 가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게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주류 다수 백인 남성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다. 바로 이 인구 집단에 속하는 남편은 지금이야 나만큼이나 이 문제에 예민하지만 결혼 초기에는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바를 구체적으로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했다. 그렇게 설명하면서 느끼던 내 심정, 그것이 바로 '소수적 감정'이었다. (274)

한국계 미국인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를 번역한 노시내는 '번역가의 글'에서 자신이 직접 체감한 '소수적 감정'을 고백한다. 가장 가까운 사이의 상대방에게도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감정, 혹은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해줘도 인식하는 데 실패할 수 있는 감정, 그래서 자신과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과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중 대다수에게 차라리 설명하기를 포기했을 법한 감정, '가서 한마디 쏘아주는 것'을 택한다고 해서 카타르시스가 찾아오지 않는 감정,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거나 부정하는 가능성에 항시적으로 노출돼 있으면서 발산도 수렴도 없는 폐쇄회로에서 영혼을 부식시키는 감정, 그런 '소수적 감정'이 놓인 자리가 제각각 다르니 한국계/아시아계 미국인 작가와 자신의 체험이 동일하지 않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자신이 찾아낸 하나의 공감 방식을 보여줬다. <마이너 필링스>를 읽게 될 독자들이 자신만의 공감 혹은 번역 방식을 찾아내 '소수적 감정'들(마이너 필링'스')이 좀 더 너른 보편성의 자장을 가질 수 있길 희망하지 않으셨을까 싶었다. 그러려면 개별적이고 특수한 캐시 박 홍의 내밀한 기록을 꼼꼼이 읽어내는 게 우선이겠다.

저자는 한국 독자들에게 남기는 말에서 '미국의 인종차별사'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차이나는클라스>에서 정희옥 교수가 미국의 아시아 혐오의 역사를 설명한 내용과 거의 포개졌다. 1800년대 서부개척 시대에 철도를 놓는 데 인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을 수용했다. 당시 중국인 이민자들은 아편전쟁의 패배에 따른 청나라 정부의 폭정(과도한 세금)에 못이겨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떠난 것이었다. '쿨리'로 불렸던 중국인 노동자들은 위험한 노동에 투입돼 목숨을 많이 잃었으나 이들에 대한 미국사회의 처우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을 건국했던 이들은 미국을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로 이뤄진 '순수한' 백인의 국가로 건설하고픈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백인우월주의, 어쩌면 백인근본주의라 불릴 수도 있을 인종주의의 토양에서 팽창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전세계에서 노동력들을 미국 땅으로 불러모았고, <차이나는클라스> 강연에 소개된 일화처럼 일본계 미국인을 '흑인'으로 분류/판단하기도 했던 역사적 사례가 보여주듯 백인성/흑인성은 골상학과 같은 당대의 과학의 힘을 빌어 자의적이고 모순적으로 규정되었다. 이민금지법이 시행되었던 시대를 지나 이민국적법이 제정되었고,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이 발흥하며 소수인종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런 역사적 투쟁을 통해 법적 권리를 쟁취해나갔으나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이 말한 '사회적 성원권'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흑인과 대비 속에서 '모범 소수자'로 간주되었다. 흑인들처럼 범죄를 저지르거나 빈곤하지 않은, 근면하고 '우등한' 소수자(13). 영리하고 성공적인 집단으로 간주된 것은 맞지만, 그와 동시에 로봇 같고, 무감정하고, 쉽게 교체될 수 있는 존재(14).

저자는 이렇게 미국에서 보이지 않는 인종인 아시아인의 몸 안에 살면서 느끼는 자신의 상반된 감정을 가능하면 투명하게 풀어넣고자 한다고 했다고, 그러면서 "남들에게 좀 더 이해받고 눈에 덜 안 보이는 존재가 되고자" 이 책을 썼다고 집필목적을 밝힌다. 이 책에서 독자들이 자신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끝맺음하는 '한국 독자들에게' 보낸 저자의 편지를 읽고 나서 자문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일부를 발견했는지, 그리고 마티 편집부 레터에 영업당한 것이긴 하지만 이 책과의 만남을 성사시킨 나의 기대와 욕망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평소 아시아 혐오 및 혐오범죄 소식을 접하며 미국에 유학을 가서 취업에 성공한 친구가 염려된 적은 있지만 사실 먼 곳의 이야기,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라는 감각이 있었다. 한마디로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한국사회 내부의 인종주의와 혐오의 양태들을 거의 매일매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인터넷을 매개로 전시된 정보의 형태로 수용했기에 (일일이 반응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 아래) 의식의 초점을 의식적으로 비틀어 노이즈와 같은 상태로 전환시키거나 혐오의 흐름과 경향을 보여주는 신호이자 증상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그래왔지만 대중 사이에서 집단적으로 발현된 감정을 거시사회학적으로 관찰하고, 개개인의 내밀한 감정이 신체를 어떻게 변용시키고 자기기록, 수행적 글쓰기가 감정의 역량을 어떤 식으로 발현시킬 수 있는지 관심을 두고 있던 나였기에 예약주문한 <마이너 필링스>가 도착하자마자 매일매일 읽어냈다.

캐시 박 홍은 아시아계 미국인 시인으로서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타 인종, 젠더, 역사를 가로지르며 미국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신체'로 위치지어진 자신의 몸의 레이어를 종적으로, 횡적으로 탐구한다. 분노, 우울, 짜증, 불쾌함이라 적었을 때 개개인의 감정의 지층과 결, 맥락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는 명사의 둔탁함과 우둔함에 맞서 양가적이고 복합적인 감정에 대한 두터운 서술thick description(클리퍼드 기어츠)을 통해 '이 감정은 사소하지 않다'는 증명과 선언을 완수해낸다. 그동안 내 무지와 몰이해로 인해 타인의 감정을 대상화된 인식틀에 대입해 납작하고 평평하게 단순화시켜 버렸던 기억들이 떠오르곤 했다. 소수적 감정을 번역하기 위한 윤리적 태도와 인식론적 방법이 결여돼 있었던 순간에 내 몸을 은근슬쩍 보편의 지위에 올려놓았던 안일하고 게을러서 폭력적이었던 마음 같은 것들. 노시내 번역가의 일화처럼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을 일일이 설명해주길 부탁하기도 조금 두렵고 부담스러워서 넘겨짚고 오해를 일삼았던 마음 같은 것들. 그렇게 신중한 침묵 속에 틀어앉아 양가적이고 복잡한 소수적 감정의 속내를 살피기를 회피했던 날들이 머릿속에서 지나고 나니 저자가 말했던 '자신의 일부'의 질문이 돌아왔다. 저자와 직접적으로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지만 자신이 놓여 있던 소수적 위치를 확인하고, 소수적 감정들 간의 보편적 공감의 선을 새롭게 긋고자 했던 노시내 번역가의 번역과정을 살피며 일말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내면적 갈등과 심지어는 언어적, 신체적 충돌에 노출될 가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게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런 스트레스 속에서 남들에게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나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소수적 감정이 여전히 제 거처를 얻지 못한 채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잡대' 출신. 헤테로 시스젠더 비장애인 수도권 거주 남성으로서 기득권(내지 특권)을 누려왔던 내게 혐오 대상이 되고, 혐오 대상으로 사는 삶이 어떤 건지 조금이나마 알게 해준 대상은 학벌주의였다. 학벌주의를 소재로 썼던 지난 글에서 지적했듯 학벌주의는 다른 이데올로기와 혐오 담론에 비해 영향력과 심각성이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 기업에서 '블라인드 채용' 시스템을 도입해 학벌에 따른 차별을 줄이고자 하는 명시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능력주의'의 이상대로 학벌과 같은 출신 배경(학벌 또한 능력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하지만)보다 업무 능력을 중시하는 기조가 예전에 비해 많아졌다고 들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봤을 때 학벌에 따른 차별보다 학력에 따른 차별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불안정하고 취약한 비정규직 노동자/플랫폼 노동자/긱 이코노미, 정말 목숨이 걸린 위험한 노동환경에 놓인 블루칼라 노동자 이슈가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나 역시 이런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고, 사태의 심각성이나 중요성에 비해 조명을 충분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얼마 전 네이버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직장 내 괴롭힘'의 요인 중 하나로 학벌주의의 사내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학벌주의는 아시아계 미국인 캐시 박 홍에게 은근하고 교묘하게 자행된 인종차별처럼 고도로 섬세하게 발전했음을, 발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분야와 직종에 따라 풍토가 제각각 다를 것이다. 개발자 사회의 경우, 코딩만 잘하면 실력으로 인정하고 대우해준다는 말이 있지만 ... 최상위권 대학 그룹 내부에서 교묘한 구별짓기와 알력 다툼도 존재하겠으나 지방대 혐오 및 차별은 어떤 식으로 진화했을지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요즘엔 특히 사적 영역에서 낯선 이에게 출신 대학을 묻는 행위가 무례하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확립된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질문, 혹은 호구조사를 적지 않게 받아봤다. 한 번은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기사에서 처음 만난 상대에게 출신 대학을 묻는 문화/관습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어 친구에게 공유한 적이 있다. 상대방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얻는 데 가장 효과적인 질문일 수 있기 때문에 꼭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게 친구의 답변이었다. 나는 학벌주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지방대를 비롯해 대학 서열에 따른 혐오가 놀이처럼 행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기사의 취지와 메세지를 보충설명하는 대신 대화주제를 바꾸는 편을 택했다. 명문대에 다니고 있는 친구에게 그런 설명을 하는 내가 구차해질 것 같아서, '적당한' 거리두기를 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서술과 발화는 주관적이고 특수한 감정과 이익을 대변하지 않기 어려워 내가 '비합리적'으로 굴게 될까 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마 그 친구가 내 의견에 공감해주지 않으면 상처받게 될 거란 염려와 걱정도 있었을 것 같다. 몸이 없는 것처럼 굴 수 있는 글 - 담론의 영역에서 논리로 무장해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공격이나 반박, 비판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지만) 몸에서 도저히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현장에서 나는 침묵을 택했고, 후에 침묵보다 편한 기만을 택했다. 처음에 출신 대학을 밝히지 않고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밝히고 다녔는데(출신 대학을 밝히고 싶지 않음을 눈치채는 이도 있었지만 대학에 다니지 않고 독학하는 거냐고 확인하려는 이가 있어) 나중에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차피 한 번 만나고 지나칠 사이에서 진실한 필요가 없다고 자기정당화를 했으며, 관계가 지속되는 경우 '신뢰할 만한' 타인에게 선택적으로 사후고백을 했다.

왜 그랬을까. 혹시라도 출신대학을 들었을 때 상대방의 표정에서 미묘한 감정의 기미를 포착하게 될 까봐 걱정했던 것일까. 적어도 인터넷 커뮤니티를 채우고 있는 혐오의 논리와 언어를 구사할 이들이 아니라고 예상되었으나 온전히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평소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치적 윤리적으로 섬세한 스탠스를 취하던 친구가 '지잡대' 욕하는 걸 보고 (평소 잠을 깊게 못 자는 친구였는데 지방의 고향에서 지내는 동안 지방대학 축제가 끝나고 새벽에 소란스럽게 했던 모양이었다. 욕할 만한 상황인 건 자명했으나 평소 말을 아끼고 언어에 예민하며 표현을 조심스럽게 하는 친구였던 만큼 ...) 학벌주의는 입시라는 트라우마를 저마다 겪어낸 한국인들의 몸에 각인돼 무의식을 이루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만의 수준에 도달하자 자기분열과 자기혐오가 심해졌다. 차라리 맘 편하게 당당하게 사실을 밝히고, 대놓고 무례하게 혐오의 언어를 구사하는 이를 맞딱드린다면 '가서 한마디 쏘아주는 것'을 했더라면 훨씬 나았을 거란 후회가 몰려왔다. 여기에 이르고 나니 결국 내가 스스로를 긍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입시를 외면하고 회피하는 선택을 했던 실수와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형성된 자기혐오가 학벌주의를 음화된 방식으로 내면화하게 만들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 노시내 번역가가 설명한 '스트레스'로부터 상당 부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물론 취업 과정을 비롯해 언제 어디서 출신 대학의 속살을 내보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은 변함 없지만 대학원의 간판이 갑각류의 외피처럼 단단하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제도나 이데올로기에 억압받고 차별받은 소수자적 이들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과잉 자기동일화하게 되는 메커니즘, 나는 비판적으로 자기성찰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감정은 저 자신의 논리에 따라 이상한 길로 빠져들고 있었다. <마이너 필링스>를 읽으며 깨달은 바가 있다면 '소수적 감정'을 기록하는 작업이 주관적 내면적 표현에 그치면 나르시시즘을 강화하는 식으로 귀결될 위험이 크다는 것이었다. infernal circulation 지긋지긋한, 지옥과 같은 악무한에서 벗어나려면 사회적으로 '인종화된 몸'(프란츠 파농)으로부터 탈정체화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구조적 폭력, 상징폭력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역사를 공부하고, 이를 변혁하고자 운동했던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타자들의 개별적 고통들을 듣는 데 귀 기울이고, 소수적 감정들의 보편성을 디딤돌 삼아 기존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나 자신과 내 정체성 사이의 내전을 종식시키는 게 출발될 것 같았다. 그 출발로 내 '소수적 감정'을 기록해둔다. 캐시 박 홍이 <블레이드 러너 2049>, 웨스 앤더슨의 영화(특히 <문라이즈 킹덤>), J.D.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원래 별로 안 좋아했던 책이라 통쾌함을 느끼며 읽었다) 등 백인 남성성 및 판타지의 서사를 (굳이 명명하자면 '탈식민주의적 독법'으로) 비판적으로 독해해냈듯 예술 텍스트와 사회에 비판적으로 개입해 목소리를 내고 싶다. 더 많은 소수적 감정들이 옹호되어도 괜찮다는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는, 완고해보이는 기존 질서에 불편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소수적 말하기를 실천할 수 있길.

캐시 박 홍은 <마이너 필링스>에서 '소수적 감정'을 소수자 및 소수집단의 자기정체성을 강화하고 확립하는 데 기여하게끔 서술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겪은 감정을 내밀하게 서술하되 가족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들의 이민사를 살피고, 흑인과도 다른 갈색인(황인을 대체하는 용어인 듯하다)의 소수자성을 재현하는데 몰두하고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우월주의가 자행해온 인종차별의 역사에서 소수적 인종들이 어떤 식으로 연대하고 반목했는지 복잡다단한 역사를 성찰한다. 그 과정에서 언론에서 대량으로 생산한 이미지-로드니 킹의 구타 장면과 LA 시가지에 작은 화염이 점처럼 박힌 모습을 방송국 헬리콥터가 멀찍이서 촬영한 장면-가 1992년 LA 폭동 사태의 지배적 기억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실 김-깁슨 감독의 <4.29> 다큐멘터리와 당시 흑인들의 소수적 감정을 다룬 시인 완다 콜먼과 소설가 폴 비티의 책들을 소환해 "착한" 한국 상인 대 "못된" 흑인 동네라는 간명한 공식(94)에 들어맞지 않는 역사의 실상을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자고 권한다. 맬컴 액스와 함께 흑인민권운동에 동참했던 아시아계 미국인 운동가의 초상을 복원해내기도 하고, 중국계 트랜스젠더 작가 우 창이 다큐멘터리 <와일드니스>로 성공을 거뒀지만 자신과 우정을 나눴던 라틴계 트랜스젠더들에게 느끼는 죄책감을 비판적으로 포착해내기도 한다.

'아시아계' 혹은 제3세계 작가에게 부과되었던 소수인종의 인종적 자기재현의 요청과 불화하며 모더니즘에 기울었던 자신의 미학 체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아시아 여성'의 정체성을 이미지와 문자언어를 통해 실험적으로 탐구했던 차학경의 죽음, 그동안 이상하리만치 말해지지 않았던 그녀 인생의 진실을 침묵과 망각으로부터 건져낸다. 전기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품을 읽어내는 독법은 전문가 사회에서 사장된 것에 가까울 정도로 낡고 세련되지 못하다고 치부되지만 차학경이 그 누구보다 자신이 누구(who)인지 천착하는 과정에서 어떻게(how) 쓸 지를 고민했던 작가였기에 나는 작가의 선택을 지지할 수 있었다. 에밀리 정민 윤의 작품 제목대로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을 2차세계대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가해졌던 야만적 폭력에서부터 한국군이 베트남의 하미 마을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 트럼프 정권 당시 아시아 인종을 향한 혐오 범죄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으로 펼쳐서 보여준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피해자성'이나 '당사자성'의 굴레에 갇히지 않고 소수자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대상은 누가 누구의 적인지 규정하는 권력(257), 나 자신을 나의 적으로 삼는 권력에 맞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사수해야 한다는 메시지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사실

<감사의 말>에 언급된 학자들 중 사라 아메드와 로렌 벌랜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딕테' 시리즈에 포함된 일원이기도 하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The Promise of happiness과 <고집스런 주체>Willful subjects, 로렌 벌랜트는 <작인한 낙관>Cruel Optimism. 딕테 시리즈에 대한 설명문에서 일부를 여기 옮긴다. "한국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인종적 억압과 젠더 억압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말하고 쓰기'의 가능성을 탐색한 차학경의 <딕테>에 대한 이어 말하기이기도 하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침묵하며 지배 언어를 그대로 받아 적었던 수동적 받아쓰기dictee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우리 안의 다른 목소리, 거대 서사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에 빙의해 듣고 말하고 쓰는, 능동적 받아쓰기를 통해 침묵을 비우고자 한다." 캐시 박 홍은 시인답게 언어, 구체적으로 영어에 대해 예민한 감각과 첨예한 의식을 보여준다. 그녀는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며 달변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여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녀가 '원어민'의 언어를 능숙하게 매끄럽게 모방하길 욕망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녀는 소수자로서 영어를 '소수 언어'(들뢰즈-과타리)적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영어 내부의 이질성, 차이를 현시하고 여기서 문학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발굴해내고자 한다. 딕테 시리즈의 서술처럼 수동적 받아쓰기가 아닌 능동적 받아쓰기,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관조'theoria의 공간을 확보하고 보편적인 언어를 구사하거나 침묵을 통해 말해지지 않는 걸 전달하는 모더니즘의 문법을 넘어 그녀는 침묵을 비워낸다. 테레사 학경 차의 문장으로, 에밀리 정민 윤의 문장으로, 그녀 자신의 문장으로. 아껴 읽고 싶었으나 더 빨리 읽어버린 이 책을 곁에 두고두고 오래오래 곱씹고 싶다.

+ 여성 예술가들의 우정을 그려내보고 싶다는 야심으로 자신의 대학시절의 기억을 담은 장chapter은 '어떤 배움'의 제목을 달고 있다. 에린과 헬렌 그리고 자신 사이 '애증'이란 간단한 말 안에 포섭되지 않는 우정을, 그녀들의 재능과 불안정함, 열정과 좌절을 성장소설 읽듯, 시트콤 보듯 재밌게 또 슬프게 공감하며 읽었다. 타인의 서사, 특히 고통을 착취하듯 빌려다 쓰는 글쓰기의 몰윤리성과 관련한 쟁점들이 제기되는 모습들을 지켜본 입장에서 서로의 삶이 얽혀 있는 '친구 사이' 여성 예술가들끼리 우정의 사수와 파탄의 경계선에서 서사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대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 캐시 박 홍의 시, 그리고 그녀가 영화 <미나리>에 남긴 코멘트나 글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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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를 만들다 열린책들을 만들다 열린책들 아카이브 1
홍지웅.열린책들 편집부 엮음 / 미메시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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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리뷰는 아닙니다] 


책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한다. 출판계에 몸 담고 있는 지인을 곁에 두고 있는 건 아니어서 출판물에 활자화된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의 <읽는 직업>, 기획회의 편집위원회에서 엮은 <한국의 출판기획자>, 장은수 편집자의 <출판의 미래>, 은유 작가님의 <출판하는 마음>을 재밌게 읽었다. 유유 출판사에서 내고 있는 '~~책 만드는 법'도 서재의 출판/독서 섹션에 구비해뒀다(어느 작가님께서 이런 명언을 남기신 적이 있다. 서재에 꽂아두고 책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시작이 반'이라 했을 때 책을 사서 책장에 꽂아두는 것으로 독서의 절반을 달성한 거라고 우겨본다).

한 권의 책이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작가, 편집자(교정/교열, 편집/ 재교-삼교-오케이교 ...), 교정교열 전문편집자(일드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의 코노 에츠코가 맡은 역할이 바로 교열편집자이다. 극중에서 교열만 하지 않지만 ㅎㅎ ), 북디자이너, 인쇄소 직원 등 '생산 라인'의 직종만 해도 다양하다. 마케터, 오프라인 대형서점, 동네서점(독립서점), 인터넷서점, 신문사의 출판담당기자, 도서관, 출판잡지, 도서출판 팟캐스트, 유튜브(북튜버) 등 책을 다루고 책과 관련된 분야로 시야를 넓히면 출판산업과 출판문화를 지탱하고 구성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산업의 파이를 놓고 봤을 때 출판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은 편이고, 학습지와 수험서를 내는 대기업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출판사들은 중소 기업 규모의 영세적이라 알려져 있다. 그래서 어디선가(<한국의 출판기획자>로 기억한다) 장은수 편집인이 대기업 출판사가 나오면 자금력과 인프라를 바탕으로 과감하고 선도적인 기획출판을 이끌 수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이런 출판 풍토에서 출판이 불황이다, 이 판은 망해가고 있는 판이다 같이 자조적이고 체념적인 인식과 정서가 출판계 내부에서 꽤 만연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출판업계의 노동조건은 열악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영세한 출판사의 물적 토대에 더해 출판업 본디의 노동집약적 성격이 합쳐진 결과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장은수 편집인의 페이스북에서 '3년차 편집자'가 출판계에서 희소하고 귀한 존재라고 말씀하신 걸 본 적이 있다. 출판업계의 열악한 처우로 인해 인재들이 떠나고 다른 업계에 뺏기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회사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 자세히 모르지만 연차별로 발달심리학에서 말하는 발달/성장 단계 같은 게 존재한다고 들었다(파주에디터스쿨에서 <천년의상상>의 선완규 편집장의 강의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3년차에는 ~~ 역량을 키우는 시기(~~을 경험하고 발달시켜야 하는 시기), 5년차에는 ~~, 7년차에는 ~~. 아무래도 출판업계 자체가 이직이 잦고, 다른 직종에 비해 오래 몸 담을 수 없는 구조여서 (은퇴?가 이른) 출판인으로 오래 버티고 산다는 것 자체가 난이도가 높은 도전인가 보다. 그래서 그런지 편집자의 전문성을 제대로 인정해주고, 대우가 달라져야 출판업계의 내실을 안으로부터 다질 수 있을 거라는 지적이 있는 것 같다. 소명의식에 호소하고, 장인정신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산업'인 출판을 지탱하고 발전시키기 역부족일 것이기에 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전히 계속 새로운 책들이 나오고 있고, 그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알라딘에서 관심 가는 작가와 출판사, 시리즈물에 '신간 알림' 서비스를 설정해두었는데 오늘만 해도 8권의 신간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떴다. 8권 뿐이랴. 아마 오늘 하루만 해도 100권 이상 신간이 출간되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열린책들 출판사는 오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으로 유명한 요나스 요나손의 <달콤한 복수 주식회사>라는 번역소설을 출간했다. 번역을 맡으신 임호경 번역가의 이름을 2009년 1, 2월 즈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 시리즈에서 처음 봤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겨울방학에 책을 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고, <타나토노트>, <뇌> 등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을 바탕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을 고른 것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1시간 이상 집중해서 정독하는 시간이 쌓여서 그런지 책을 읽어낼 수 있는 힘이 길러졌고, 고등학교 진학 이후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며 '야자'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세계문학전집으로 민음사 책들을 많이 읽었지만 열린책들 책들도 많이 읽었다. 아니 사실 많이 읽진 못했고 많이 샀다 ! 최초로 출판사와 '라포'를 형성한 대상이 <열린책들>이었기 때문이었다.

1 베르나르 베르베르 2 세련된 디자인 3 세계문학과 장르문학을 아우르는 지향성이 세련되게 느껴짐 4 홍지웅 사장님. <열린책들>의 입덕 포인트를 꼽아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한 작가와 지속적인 파트너십을 가져가 '대표작가'로 출판사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점이 유효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대표작 <개미>에 홍지웅 사장님이 인물로 등장하는 부분도 라포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디자인의 경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도 굉장히 세련된 느낌을 주었지만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이 한 손으로 편하게 쥘 수 있다는 점, 크기가 작아서 책장에 세워두면 블록이나 성냥갑 같은 귀여운(?) 느낌을 준다는 점이 마음에 끌렸다. 사철 방식으로 제작해 책을 오래 동안 튼튼하게 보관할 수 있다는 문구가 신뢰감을 줬다. 추리소설, 범죄소설, 스릴러 소설, SF소설 같은 '장르문학'을 세계문학전집에 포함시킨 점이나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의 전신 격인 Mr.know 세계문학전집에서 '젊은 고전'들을 소개한 점(민음사의 모던 클래식 시리즈처럼)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2010년대 초반에 도서전 같은 행사에서 젊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최애 출판사를 꼽는 설문에서 문학동네와 열린책들이 가장 높은 득표를 기록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열린책들>에 대한 호감은 어느 이벤트에 당첨돼서 무려 움베르토 에코 컬렉션 전집+ 움베르토 에코 소설들 + 미의 역사/추의 역사 를 받게 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파주출판단지를 처음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인 출판사 사옥/건물 역시 <열린책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열린책들의 형제 출판사 <미메시스>의 뮤지엄. <미메시스> 출판사는 내가 가장 최초로 접한 그래픽노블인 <아스테리오스 폴립>를 포함해 훌륭한 그래픽노블들을 지금까지 꾸준히 출간하고 있고, 건축과 예술 관련한 책들을 많이 내고 있다. 그런데 사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을 읽은지 꽤 되었다. 표면적으로 그때그때 당장 읽어야 하거나 읽고 싶은 책이 <열린책들>에서 낸 책이 아니었던 순간들이 누적된 결과이기도 하고, 한국문학/서양철학/사회학/문화이론 분야에 독서가 집중돼다 보니 접점이 잘 안 생긴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책들> 출판사의 홍지웅 대표를 '책 만드는 사람들' 시리즈(라고 부르기엔 거창하지만... 소박하게 덕질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려 한다)의 첫 손으로 꼽은 이유는 월북출판사의 홍영환 대표님이 쓰신 <출판인 홍지웅의 생애사 연구-번역문학을 중심으로>를 재밌게 읽어서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1743.html#csidx1409f73bcf3f8c09b47e2fc2818ddb2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출신으로 학내 신문 편집장을 역임했던 홍지웅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사랑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열린책들> 출판사를 설립하고 초기에 주력한 대상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들이었다. 1988년 '해금' 조치란 사회문화적 변화 속에서 아나똘리 리바꼬프의 <아르바트의 아이들> 시리즈와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끼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같은 책들을 출간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 판매고를 올리지 못해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고, 사장으로서 회사와 직원들을 책임져야 했기에 대출을 받아 출간한 책들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터져줘야 생활을 영위하고, 그 다음 책을 기약할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동구권의 해체에 따른 냉전의 종식, 1991년 5월투쟁의 패배라는 대내외적 사회변화 속에서 그는 다른 유럽문학을 출간하며 돌파구를 모색했다. 해외에 출판사와 에이전시에 접촉하고, 계약을 성사시키는 국제 네트워크와 입지전적 면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유럽문학의 성적이 괜찮아서 위기를 넘기고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어 파스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같은 밀리언셀러들이 터져주면서 상승곡선을 그리게 된다(어느 인터뷰에서 홍지웅 대표는 <열린책들> 사옥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지어줬다면서 고마움을 표한 적이 있다). 좀머 씨 이야기의 경우, 당해에 '올해의 상품'에 꼽히기도 할 정도로 센세이션한 반응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념/이념적 진정성과 같은 '무거움'으로부터의 도피, 민족 국가 사회 같은 거대한 집단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개인의 심리, '혁명/변혁의 시대'에서 소비자본주의로 급격한 사회변동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했다는 '좀머 씨 신드롬'에 대한 분석이 있으나 추후에 1990년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화론적 독해의 대상으로 새롭게 논의될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상업적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한 뒤에 도스토예프스끼 전집, 프로이트 전집, 움베르토 에코 전집,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같은 전집들을 출간한다. 전작주의와 개정판 출간이라는 <열린책들>의 특징이 전집 출판에서 잘 나타난다. 프로이트 전집의 경우 판본이 세 가지 존재한다. 1997년 초판본, 2004년 개정판, 2020년 개정판. 최근에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를 출간했으며, 5년 전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 작가 12인 세트를 출간해 북디자인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학부 시절에 정외과 교수님 연구실을 찾아가곤 했었는데 그때 이 세트를 소장하고 계신 걸 확인하고 말씀드렸더니 디자인이 너무 좋아서 사셨다고 설명해주셨다. 그런데 구매자/독자 리뷰를 확인해보니 반양장본으로 10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제작하다 보니 상태가 고르지 못해 비판의 목소리가 꽤 존재하는 눈치다. 이 세트 디자인을 맡으신 석윤이 북디자이너의 채널예스 연재글을 너무 재밌게 읽었다. 그런데 후임(?)이 유지원 선생님이셔서 나 미쳐...).

링크를 가져온 기사의 인터뷰에서 홍영완 대표가 지적하듯 <열린책들>의 대표저자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이건 사실 다른 출판사들도 갖고 있는 문제이긴 하다), 한국문학 출간의 부재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고, 일부 개선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번역출간을 주력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미메시스의 <테이크아웃> 시리즈는 괜찮은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한국 출판시장에서 건재함을 자랑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더해 요나스 요나손 같은 작가가 벌어다주는 돈으로 인문 사회 과학 분야의 양서들을 꾸준히 내려고 노력하는 편인 것 같다. 특히 출판 편집자들이 교과서처럼 애용한다는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을 꾸준히 출간하고, 출판계 후학(?) 양성에도 힘 쓰시는 걸 보면 출판인-편집자 라는 직업에 진심이신 것 같다(보통 대표 자리에 오르면 현업에서 물러나 경영을 맡는 경우가 많은데 현장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여전히 현역 편집자로서 필드에서 활동하신다고 한다). '아카이브'를 중시하고 성실히 기록을 남겨 후대에 전수하는 부분도 출판인으로서 멋진 부분이라 생각한다.

여태껏 좋은 얘기들을 많이 써놨는데 사실 노동현장, 직장으로서 '열린책들'이 얼마나 괜찮은 환경일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것까지 꼭 포괄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열린책들> 정도 되는 출판사가 어느 정도 환경일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홍지웅 사장님이 일선에서 물러나 은퇴하고 나면 <열린책들> 출판사가 어떻게 될지도 ...

좀 더 알찬 내용의 본격적인 출판인 탐구 성격의 글이 되려면 홍지웅 사장님이 직접 쓰신 책들을 읽었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기록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이를 너무 묵혀두기보다 부족하지만 일단 저질러보자는 생각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작년보다 올해 더 많은 종수의 책을 출간했다는 데서 보람을 찾는 어느 출판사 대표의 말에서 출판인이란 무엇으로 사는 존재인지, 누군가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 기쁨에서부터 문화를 창달하는 이로서 지닌 소명 의식(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한 치열한 고뇌,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야심)까지 다양한 레이어의 꿈과 욕망들이 궁금해졌다. 평생 책을 만들며 '할아버지 편집자'로 살고/죽고 싶다는 소망,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것을 세상에 내놓고자 하는 소망, 독자와 책의 연결(성좌 그리기constellation)을 꿈꾸며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 개인적으로 <열린책들>에서 낸 책 중 딱 한 권만 꼽으라면 <그리스인 조르바>를 꼽고 싶다(가장 재밌게 읽은 책은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 !!). 세 번 읽은 책. 아마 한 번 더 읽게 된다면 문학과지성사 판으로 읽게 될 것 같지만.

+ 고2 때였나. 수준별 분반을 운영했었나, 모종의 이유로 반을 이동해서 수업을 들어야 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다른 반에서 열린책들 판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양장본 말고 엄청나게 뚱뚱한 페이버백 버전)을 읽고 있었는데 (사실 가계도 - 이름 정리를 제대로 안 하고 읽어서 내용을 따라가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지만) 다른 반 아이가 다가와서 책 두께를 확인하고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약간 나를 신기해하고, (좀 과장하면) 경이로워 했던 순간. 그런 허세/자부심의 순간들이 독서의 고단함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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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 - 정규 3집 늑대가 나타났다
이랑 노래 / YG 플러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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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3일 이랑의 정규3집 앨범 <늑대가 나타났다>가 발매되었다. 8번 트랙의 곡 제목은 <박강아름>. 2년 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봤던 <박강아름 결혼하다>의 주인공이었다(GV가 재밌었던 걸로 기억...). 8월 19일에 정식으로 개봉한 다큐멘터리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영화인 박강아름이 남편 '성만씨'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해 아이를 낳고,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모습을 기록한 영화이다. 다음은 지니매거진에 게재된 영화 소개글이다.

영화감독 아름은 첫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중에 진보정당 활동가이자 요리사인 성만을 만나 결혼한다. 아름은 결혼 후, 본인이 오랫동안 준비한 프랑스 유학행에 성만도 데리고 떠난다. 프랑스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가사 노동 밖에 없는 불어 까막눈 성만은 주부우울증에 빠지고, 아름은 공동 생활의 경제와 행정 업무를 책임진 상태에서 임신을 한다. 아름은 우울한 성만을 위해 정해진 날에만 집에서 요리하고 손님을 받는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둘은 '외길식당'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하지만 출산 후 아름이 본격적으로 학업과 영화작업에 집중하면서 성만의 독박육아는 더 심해지고 둘은 더 격하게 싸운다. 결국 성만은 파업을 선언한다. 아름의 결혼도 영화도 이대로 잘 갈 수 있을까?

영화제에서 어떤 영화를 볼지 고르는 일은 쉽지 않다. 음악 페스티벌이나 수업시간표처럼 타임테이블을 펼쳐놓고 최상의 조합을 찾기 위한 고뇌가 요구된다. 인기 있는 영화들은 이미 모두 매진 행렬을 이루고 있어 차선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자리가 널널하게 남아 있는 비주류 중 비주류 영화를 보게 되는데 이런 영화일수록 사전정보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해서 영화제 측에서 제공하는 시놉시스에만 의존해 영화를 골라야 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처음 들어보는 감독, 배우, 심지어 국적의 영화를 '예고편' 없이 본편으로 바로 뛰어들어 관람하는 상황이 영화제의 재미를 담당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 실패할 때도 있지만 성공했을 때 짜릿함이 꽤 크달까. 정말 좋은 작품이지만 정식개봉으로 이어지지 않/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영화를 봤다는 사실 혹은 남들보다 미리 봤다는 사실이 약간의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영화제가 아니라면 절대 볼 일이 없었을 1980년대 필리핀 여성영화라든지 사회학자 엄기호를 통해 말로만 들어본 적 있던 '하자센터'에서 은퇴를 앞둔 무용수 남정호가 학생들과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구르는 돌처럼> 같은 영화는 신촌 메가박스(상암월드컵경기장 메가박스)까지 간 수고를 보상해주는 영화들이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놀이공원에서 파는 티켓처럼 싼 가격에 많은 영화들을 관람할 수 있는 이용권을 사전판매해준 덕분에 코시국 이전까지 3년 정도 개근할 수 있었다.

기성의 젠더적 역할 분담이 역전된 부부의 결혼생활을 감독이 직접 관찰하고 기록한다는 점에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원래 비혼주의를 지향했던 이가 상대방과 결혼이라 불리는 사회적 결합을 맺어 살아가는 좌충우돌의 과정을 진솔하게 보여준다는 영화의 성격에 혹해 관람을 결정했던 기억이 난다. 소위 '안정적인 직장'에 속해 있지 않더라도,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경제적인 불안정성으로부터 기인하는 막연한 불안뿐 아니라 결혼생활에서 실제적으로 맞딱드리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겪어나가고 풀어가는지 멀리서나마 지켜보며 결혼하면 뭐가 좋은지, 뭐가 힘든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귀할 것 같았다. 가보지 않은 곳을 먼저 걸어간 이에게 조언을 구하듯 주변에서 직접 만날 수 없지만 책이나 영화를 통해 '선배'로 삼고 싶은 이들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박강아름은 전작 <박강아름의 가면무도회>를 찍고 평단의 주목을 받긴 했으나 생활적 측면에서 개선된 부분이 미비했던 것 같다(독립영화로 평단의 주목을 받으면 상업영화계의 '콜업'을 받게 되는데 여성영화의 약진 이전에는 대부분 남성감독들에게 기회가 돌아갔다고 한다. '영화제 영화' 성향이 강한 작품을 찍는 감독이라면 영화제 수상실적을 바탕으로 대학에 자리를 잡거나 기관이나 재단의 지원을 받거나 선택의 여지가 더 좁아지는 것 같다. 영화계뿐 아니라 예술 장 일반에서 비슷한 구조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치며 프랑스로 유학을 준비한다. "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지겹도록 다닌 그 학교라는/이름의 공간에 서른 살/마흔 살이 되어도 계속/계속 다니려는 걸까"(<박강아름은 어떤 사람일까>/<박강아름>). 학생이란 신분은 가난한 상태에서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장학금도 있고, 뭣보다 독일 같은 나라는 학생들에게 지원과 복지를 다양하게 지원한다고 들었다), 학교에서 얻은 배움은 작품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외국대학의 학위를 받으면 아무래도 귀국하고 나서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는 점도 주효하리라.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맥락을 고려해보면 한국에서 자신의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못 받는다고 했을 때, 지금 당장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미래를 도모하기 위한 '적공'(원불교에 깊은 영향을 받은 백낙청의 글에서 알게 된 원불교 개념)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녀들은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는 것 같다. <박강아름 결혼하다>에서 프랑스의 영화학교에 다니는 박강아름이 수업에서 받은 과제는 영화를 찍어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상영하는 것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독박 육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성만 씨'가 폭발해 촬영(과제수행을 위한) 중단을 선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파업 선언 이후 홀로 카페에 나와 3유로 짜리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이어지고 얼마 안 가 세 가족이 비오는 바닷가에서 파도를 바라보는 장면이 결말 부분의 하이라이트를 구성하고 있다.

GV 현장이었는지 다른 매체에서 어느 여성 영화평론가가 이런 뉘앙스의 말을 한 적이 있다(손희정 평론가였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불확실하다). 박강아름 감독을 대상으로 한 발언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하는 여성감독들의 에세이 영화, 다큐가 나르시시즘적이고 타자나 사회로 시선을 확장하지 못하는 한계에 대한 비판(주로 남성 영화평론가들에 의해 제기된)을 자신 역시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기존의 비평적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게으르게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고민했고, 젊은 여성 영화감독들이 보여주는 세계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비평이 기여하고 싶다고. 박강아름은 솔직하게 말한다. '저는 저를 알고 싶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그래서 "저를 타인에게 보여주는 연습을 한다기 보다, 저를 담는 작업이 재밌고 그렇게 담긴 저를 통해 제가 몰랐던 저의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궁극적으로 너무 재밌고 멈추고 싶지 않아서 계속 하고 싶은 것 같아요"(지니 매거진의 인터뷰에서 인용)라고. 이랑이 올바르게 지적했듯 박강아름은 박강아름을 너무 사랑해서 카메라로 기록한다기보다 박강아름은 박강아름에 대해 알고 싶어 궁금해서 찍는 것 같아 보인다. 이 부분에서 나르시즘적 자기기록이 범람하는 SNS의 시대에 '셀프 다큐멘터리' 형식을 통해 카메라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지점을 확보하는 것 같다. 이를 이랑은 이렇게 표현해낸 바 있다.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기록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멈추지 않는 '박강아름'의 모습을 통해 나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 공통의 질문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노랫말은 '박강아름은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지만,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릴 것 같았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편집해 전시하는 보여주기와 외부세계를 향한 지평이 닫힌 상태에서 독백을 통한 드러내기 사이에서 자신을 궁금해하고 탐구하는 박강아름의 시선은 친구가 묻는 안부나 질문처럼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 알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한다. 건강한 자기애를 갖기 어려워지고 있는 세상에서 자신을 매개로 세계를 성실하고도 창의적으로 묻고 기록하는 그녀의 작업을 동료이자 친구 이랑이 응원하는 이유도 나와 같은 남의 모습에서, 남과 비슷한 나의 모습에서 공감하고 위로와 용기를 얻기 때문이 아닐까.

(지니 매거진의 인터뷰를 참조해 재구성함)

박강아름의 전작 <박강아름의 가면무도회>를 아직 보지 못했는데 이랑의 1집의 곡들이 영화 삽입곡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박강아름은 <박강아름 결혼하다>에서 "이랑의 목소리가 영화의 서사 일부를 담당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이랑에게 영화 음악을 제작해달라고 의뢰했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때부터 박강아름 감독님을 사랑했던 이랑은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내가 아는 한에서 '가족이 아닌 친척 만들기'라는 해러웨이의 테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이가 바로 이랑이다. 암에 걸린 친구의 치료비를 보태고자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 프로젝트를 기획했으며 소중한 친구를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보내는 경험을 하고 보험설계사 자격증을 따서 '금융예술인'으로 거듭난 이랑('미가동'에서 벗어나셨을까요 이제). 에세이를 쓰고, 만화를 그리고, 노래를 쓰고, 공연을 하며, 앞으로 찍을 영화를 구상하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살아가는 이랑. 전화를 받고, 이메일 답장을 하고, 정산을 하고, 많은 일을 혼자서 해내는 프리랜서. 작업실을 함께 쓰고 있는 김승일 작가에게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나의 자랑'인 이랑.

생각해보면 이랑의 1집 <욘욘슨>은 많은 데뷔작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집중했다고 생각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오해하는 이들/남자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들려줬고, 세상의 리듬에 동화되지 못해 예의 없고 불친절한 이들에게 쿡쿡 찔리고 가까운 주변 사람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그건 너의 리듬'(그건 나의 리듬이란 메시지도 내포되어 있는)이라고 위로하듯 응원하듯 노래했다. 럭키아파트의 복도에서 불어왔던 여름바람의 냄새와 질감을 더듬으며 추억을 꺼내보고, '뭔가 반복되는 기분/뭔가 반복되는 이별'의 루프 한복판에서 '이상한 일'(<이상한 일>)이 되어버리고 마는 연애를 떠나보내는 과정 모두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의 노래가 아니었나 싶다. 문득 한밤중에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싶은 욕망이 들지만 가난한 자신이 내일 김밥천국에서 김밥 한 줄을 먹게 되리란 사실을 확인하고 '먹고 싶은 걸 먹고 싶다'고 욕망을 노래하고(<먹고 싶다>), 졸업하고 나면 뭐할지 고민하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영화를 봤던 (<졸업영화제>) 대학생은 이제 영화에 의지해 겨우 잠에 들었던 자신이 겪은 불면의 밤에서 '잠 못 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모두들 어떻게 잠이 들까 아마 나처럼 울고 있을까' 묻고 있다. 2집 <신의 놀이>에서 '내 안에 있는 그 노랠 찾아서/(...)내가 되고 싶은 가족을 찾아서'라고 노래했던 이랑은 준이치, 친구들, 힘이 없는 사람들과 새로운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환란의 세대'인 자신과 친구들에게 '동시에 다 죽어버리자/(...) 먼저 선수 쳐버리자'고 용기 있게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고 있다.

https://switch.changbi.com/serial/chapter_info/43/292?bread_date=%EB%AA%A9%EC%9A%94%EC%97%B0%EC%9E%AC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고를 확장하는 방법은 바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랍니다. <언니단 작가>의 네 번째 편지 <포기하면 끝이야. 동생아, 살아서 다시 보자>에서 그동안 짐작해왔던 바를 그녀가 직접 고백해주어서 읽는 순간 쾌감이 일었다. 어떤 예술가들은 정말 친구를 잘 사귀는 사람인 것 같다고, 종(species)/인종/국적/젠더/언어 등 장벽이 될 수도 있는 경계를 '우정'으로 뛰어넘어 자신의 경계를 계속 확장하고 성장하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름이 '이랑'이어서 그럴까. ~~이랑 친구가 된 이랑. 김승일은 '나의 자랑 이랑'에서 너는 기억의 천재니까 라고 적었지만 내가 아는 이랑은 우정의 천재이다. 박강아름과 이랑. 앞으로도 그녀들의 콜라보를 또 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이랑 - <박강아름>

자 이제 내가 너의 하루를 얘기해볼게

너는 매일 아침 누군가를 재촉하며 일어나지

빨리빨리 늦는단 말이야 늦으면 어떡할 거야

재촉하는 너의 입에는 항상 뭔가가 들어있어

그걸 오물오물 씹으면서 내게 첫 말을 걸지

아 짜증나

너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뱉으며 학교에 갈 준비를 해

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지겹도록 다닌 그 학교라는

이름의 공간에 서른 살 마흔 살이 되어도 계속

계속 다니려는 걸까

너는 언제나 어딘가로 뛰어가고 있어

그 모든 게 너에게는 버거운 일이면서도

너의 삶도 너의 학교도 너의 결혼도 너의 아이도 너의 영화도

그런데도 너는 뛰어가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오늘도 너와 함께 박강아름에 대해 생각해

이젠 네가 내 얘기를 대신 해볼래

내 하루를 상상해볼래 어때 해볼 수 있겠니

우리의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박강아름이었으니까

박강아름은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강아름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박강아름은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강아름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박강아름은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강아름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박강아름은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강아름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박강아름은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강아름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박강아름은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강아름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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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틴더 유 트리플 7
정대건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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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10년 전, '힐링' 열풍이 있었다. '힐링' 열풍에서 떠오른 주체가 '멘토'였다. 자기계발서 저자, 스피치 전문가부터 종교 엘리트(스님), 철학자, 트렌드분석가, 심리학자에 이르기까지 직업군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이들이 멘토로 호명되어 책부터 강연, 방송(때로 이들이 결합된) 등 전방위적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소위 '청년 멘토'로 유명세를 탔던 이들의 책이나 강연을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당시에 미디어 노출이 상당히 심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얻은 정보들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녔던 것 같다.

-꼭 '~~을 하라'거나 절대로 '~~을 하지 마라'고 명확한 내용을 단호한 어조로 설파하는 카리스마적 면모(확신에 찬 모습에서 대중의 신망을 얻어냈던 것 같다)

- '멘티'의 '잘못'을 호되게 다그치고 비판(사실상 '정서적 학대'에 가까운 상담 아닌 상담이지만 멘티의 입장에서 개인적 차원의 습관이나 행동, 노력의 정도를 고침으로써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권위적인 전문가인 멘토에게 보증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멘토링의 '효능감'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예상해본다)

- 힐링의 축자적 의미에 부합하는 위안의 제공과 희망의 제시(지치고 답답한 심정, 상처받은 속내를 드러낼 만한 사회적 창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비슷한 문제를 공유하고 있는(그렇다고 가정된) 이들이 집합적으로 모인 장소에서 고통을 고백함으로써 멘토를 필두로 한 타자들에게 사회적으로 승인받는 것 자체에서 힐링 효과가 산출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대중적 집단적 고해성사의 구조에서 정말 진정한 고백이 가능한 것인지, 뭣보다 여기에 응답해주는 멘토의 솔루션에 문제의 소지가 상당히 많았다고 생각된다)

힐링이란 키워드는 사라졌지만 제니퍼 M.실바의 <커밍 업 쇼트>의 용어를 빌리면 '무드 경제'에서 '치료적 서사'를 제공하는 상품과 장치들은 오히려 다변화되고 증가한 것처럼 보인다. 자기계발self-development과 자조self-esteem의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돈 공부'를 표방하는 재테크의 부상과 '자존감 회복'을 표방하는 일종의 셀프 힐링으로 양분화된 경향을 보인다. 힐링은 형식적 차원에서 '사사화' '개인화'된 것처럼 보인다. 내 나름대로 출판 트렌드를 분석해본 결과, 상처받은 자존감을 어떻게 회복하고 치유할 것인지(<미움받을 용기>)가 주류 트렌드의 흐름으로 자리잡은지 오래고, 자존감의 하위장르로 가장 눈에 띠는 건 다름 아닌 '인간관계'다.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판단한다는 게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지만 제목만 놓고 봤을 때 이 책들의 메시지는 '너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타인과 단절하라' '너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인간관계는 아마 가족부터 친구, 연인, 직장 동료(상사)에 이르기까지 한 개인이 맺는 인간관계의 전반을 포괄한다.

악의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타인의 평가와 해석에 의거해 스스로의 가치를 정하지 말고, 자신을 인격적으로 존중하지 않는 이와 관계를 정리하라 같은 조언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유용한 내용이지만 이런 조언들이 범람하는 현상이 무엇을 암시하고 의미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과거보다 전반적으로 인생살이가 팍팍해지고 고단해져서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증가한 것일까? 평균적으로 사회 구성원 전반의 '인성 수준'이 하락한 것일까?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타인-사회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무한경쟁과 생존의 장에서 타인을 물화된 대상이자 수단으로 대하게 만드는 힘이 증가한 것일까?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경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평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호의 자원이 점점 희소해졌을 뿐더러 끊임없이 성과를 내는 데 몰두한 성과주체(<피로사회>)는 자기착취적 자아경영인의 모습을 띤다. 이는 '번아웃 증후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소진된 인간')의 초상은 이런 식으로 분석이 가능했다. 여기에 인간관계가 무엇보다 자아에 치명적인 위험이 된 데에는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이는 데에는) 어떤 맥락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과잉연결된 '관심 경제'의 사회에서 타인의 부정적 평가와 비난 및 관계의 단절을 심각하고 민감한 충격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타인의 사회적 인정과 정서적 지지에 대한 기대의 욕구는 커졌는데 이런 욕구가 충족되기 어려워져서 기대의 좌절이 주는 충격이 훨씬 심대해진 것일까. 확실히 미디어는 연애 관계(우정도 일정 부분 포함되지만)에 현실의 어려움과 고단함을 잊게 만들고, 경감시켜주는 '낭만적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조성한다. 타인과의 진실된 관계가 가져다주는 정서적 도움이 실제로 크다 할지라도 미디어에서 조성된 물화된 '행복의 약속'은 상상적인 것,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그리고 자존감 얘기를 하긴 해야할 것 같다. 자존감을 얘기하다 보면 사회구조적으로 '친밀성의 관계'가 취약해지고 불안해지는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채(신뢰와 돌봄 과 같은 사회적 자원이 희소해지는 부분) 개인의 심리적 차원으로 환원주의적인 논의가 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서로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 자아의 성숙, 정신적 정서적으로 독립된 자아의 성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다. 혼자 생활해보는 독립적 생활에 대한 에세이가 꾸준히 써지고 읽히는 이유 중에는 자신의 기질과 성향, 취향과 욕망(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 자기에 대한 앎을 바탕으로 자주성과 주체성을 키우고, 과도한 의존성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성숙한 개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자존감이 향상되길 욕망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에 대한 의존지향성이 큰 관계를 맺게 되면 관계의 불화와 단절에서 오는 충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계의 단절이 가져올 고통이 두려워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상대에게 대항하지 못하고(이 과정에서 자존감은 점점 더 낮아지고), 관계의 불화와 단절의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고 자책한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소통과 교류를 통해 서로에게 이로울 때(즐거울 수 있는) 인간관계가 건강하고 원만하게 유지되는 것일 텐데 정작 자기 자신의 입장은 뒷전으로 미뤄둔 것이다. 반대로 자기 자신의 입장을 이기적으로 견지했을 때, 상대방을 도구적으로 대하는 '소유적 관계'가 되었을 때 그에게 사물화의 고통, 사물화의 폭력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과잉연결된 사회에서 복잡한 인간관계의 그물망 속에 내던져져 있는 개인이 스스로를 지키면서 주체적으로 관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존감이란 자원이 중요하게 기능하는 것이다. 찬성-동의와 거절-거부의 여부를 결정하고, 자신과 타인의 안전거리를 조정함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낮은 자존감이 문제가 아니라 낮은 자존감을 문제화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좀 더 문제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

'네 멘탈의 대장장이가 되어 멘탈을 단단하게 관리하고 단련하라' 오늘날 자아에게 부과되는 도덕 명령이다. '사회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고에 기초해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자아를 도덕적으로 옳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신의 앞가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의존하는 건 죄악시된다. 경제적 차원뿐 아니라 정서적 차원에서 그렇다. 사회적 연대의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지 않을 때,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 때 개인은 오롯이 고통을 떠안게 되며, 구조가 아닌 주체에게 전적으로 책임 소재를 부가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에서 개인에게 환원된 실패와 리스크의 책임은 심리적 파산 상태를 낳는다. 이는 곧 우울증이나 무기력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불안정한 사회에서 유동하는 리스크를 최대한 예상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졌다. 이런 맥락에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격언이 있을 만큼 불가해하고 불투명한 인간의 마음을 상대해야 하는 인간관계에 대해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접근방식의 출현은 지극히 개연성 있는 귀결로 보인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세상에서 타인(의 고통)을 책임지기 버겁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진지하지 않은 관계, 상대방의 인격 전체를 대면하지 않고 서로의 기대와 목적에 맞게 분절화되고 파편화된 기능을 교환하는 관계들을 맺는다. 이를 테면 새벽에 'ㅋㅋㅋㅋㅋ'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 떡볶이 메이트 같은 식으로. 이렇게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친구를 사귀고 연애 상대를 찾고자 한다. 심심함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재미를 찾고자, 언어 교환을 하고자, 성적 파트너를 찾기 위해,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해, 직접적인 일대일 소통의 무거움에서 벗어나 보다 가볍고 유연한 온라인 자아로 소통하기 위해, 연결감을 느끼기 위해, 오프라인과 다른 온라인 네트워크만의 고유한 문법이 가진 장점을 활용하기 위해 등등. 각자 '각방'에서 접속한다. '틴더'의 공항에. 전세계에 퍼져 있는 타인들을 여행할 수 있는 초근대성의 비장소로.

2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30대 틴더 유저의 '동친(동네친구와 나이가 같은 동갑 친구, 중의적 의미 중 전자에 해당함)' 실제후기. 라고 불러도 손색 없을 만한 핍진성이 알알이 꽉 차 있어 '쿡쿡'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이를 테면 프로필에 생태계 교란종 바텐더 잭의 프로필에 적혀 있는 '자취하고 잘 취하는'(자취하고 잘 안 취하는 식의 변주도 존재) 문장은 틴더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관용문구이고, '희궁'('경희궁의 아침' 오피스텔에 거주하고 있는 인물의 별칭)의 프로필에 적혀 있는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랐어요.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분과 만나고 싶어요’(친척 격의 문구로 '심리적으로 안정된 분'이 있다) 문구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성적 파트너를 구인하는 유저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자기소개의 관용어구를 꼽아본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Language exchange, 동네친구 찾아요(얼마 전에 상경해서, 이사와서 친구가 없어서), 동갑인 친구 찾아요, (여성 유저만 뜨게 설정해놔서 남성 유저들의 사정은 모르겠으나 남성 분들이 동성친구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 같긴 하다) 여성 분들 환영합니다, 영어 사용자 우대(영어에 좀 더 능숙한 경우일 수도 있고, 외국어를 사용할 때 다른 분위기/뇌의 부위가 활성화(?)돼서 외국어 대화를 선호하는 것 같다), '문자보다 전화가 편해요', 자신이 방문/여행한 국가들의 열거. 범주적으로 분류해보면 추천 및 취향 공유 목적(맛집 추천해주세요 ~ 카페 추천해주세요 ~ 음악 추천해주세요 ~ 책 추천해주세요 ~ 음악, 영화 얘기 나눠요), 선호하는 외모 기준에 대한 설명(180cm 이상, 무쌍 선호, 공룡상 선호, 타투 선호 등등), 'FWB' 구인이 아님을 적극적으로 피력 - 'FWB' 구인하는 이들에 대한 극혐 표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구한다는 내용, 진지하게 연애 상대를 찾는다는 내용 등이 있다.

이렇듯 한없이 가벼운 관계부터 무겁고 진지한 관계에 대한 지향까지, 물리적 근접성에 근거한 관계성의 추구부터 외모부터 섹슈얼리티에 이르기까지 취향에 따른 '매칭'- 최적의 조합을 찾는 곳. 사람으로부터 받은 크고 작은 상처를 품고 있는, 심심함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혹은 일상에서 낯선 만남이 가져다주는 설렘과 즐거움을 찾는(술 마실 때, 술 마시고 나서 알콜 바이브, 술 텐션으로 마음의 빗장을 풀어헤치고 작은 일탈과 모험을 감행하는) 독거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곳. 사람을 (순수하게, 순진하게) 믿지 않는, 믿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어떤 이는 감당하기 힘들겠다 싶으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된 상태로 대체가능한 관계를 맺고, 어떤 이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하려는 듯("문제 있는 둘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힐링 로맨스 영화" 같이) 여전히 희망을 품고 누군가를 찾아헤맨다. 소설의 주인공인 솔과 호의 이야기이다.

‘I TINDER U’

(...) 내게 ‘아이 틴더 유’가 ‘얼마든지 네게서 사라질 수 있다’라면, 호에게는 ‘아이 틴더 유’가 ‘어쩌면 나와 잘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라는 낭만적인 말일 거였다.

<아이 틴더 유>, 정대건

소설을 읽는 내내 '호'에게서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속한 곳도 없고, 이제는 정말 친구도 없어서 팟캐스트만 듣는"(11) 생활에 완전히 해당하지 않지만 거의 유사했다. "연애할 땐 애인이 제일 친한 친구가 되는데, 끝나면 그게 사라져버리니까"(17) 그랬다. 사실 애인이 친구로 지내자고 했지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스스로 망쳐버렸다. 그러고 나서 어찌저찌 연락을 이어가고 있는 건 (아직은) 소속되어 있는 곳이 같다는 점이 결정적이고, 나도 그 친구도 '외로운 사람'이어서 그런 것 같다.

며칠 전, 소중한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는 상대방으로부터 긴 문자가 왔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이어나가기 버겁다는 호소이자 이 관계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조정하면 좋을지 고민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서로의 본심과 성찰을 공유하고 조금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도덕적 명령을 따를 수 있는 채비가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상대방은 나를 '나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서운함과 서러움이 폭발하지 않았고, 내가 일방적으로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관계에서 상대방이 하차하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와 다른 인간관계의 문법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내게 얼마만큼의 애정을 품고 있는지 계산하기보다 친구의 관계성의 형식을 이해하는 데 주력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생각보다 잘 모르고 있었다. 좋아하는 과자와 음식에서부터 기후 위기와 청년 이행기에 대한 이야기까지 취향과 가치관이 잘 통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대화는 많이 나눈 편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이야기, 뭣보다 우리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경험은 일천했다. 나는 아직 상대방을 잘 모르고 있다는 인식은 묘한 평온함을 선사했다. 몰랐던 부분에 대해 물어보고, 배우고, 고칠 수 있는 부분을 고치면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어쩔 수 없이 관습을 모방하든 참조하든 관습에 매여 있기도 하고, '자기다움'의 고유성과 구체성을 명확하게 표출하기보다 관성에 의존해 움직이는 부분이 있었던 관계를 섬세하게 다듬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그렇게 굳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그대로 괜찮은 사이, 동등한 주체로서 모두가 자유로울 수 있는 관계에 다가설 수 있는 순간이었으니까.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필요'의 계기를 품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순전히 '네가 보고 싶어서''네 안부가 궁금해서' 같은 가장 순수한 층위의 친밀성에 기반한 필요리든 정말 욕구의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도구적인 필요이든 '나'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타인이 '나'를 필요로 해주길 욕망하고, 욕망하지 않기를 욕망한다. 욕구/필요need, 요구demand, 욕망desire - 정말 예전에 문학평론가 선생님께서 정신분석학의 기본 개념인 '욕망'을 설명하기 위해 욕구와 욕망이 어떻게 다른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나는 그때 고등학생 때 배운 내용을 떠올려 욕구는 육체적인 본능적인 바람이고, 욕망은 정신적인 바람 이라는 식으로 대답했다가 이게 욕망에 대한 가장 잘못된 인식 중 하나라는 설명을 들었던 것 같다(육체와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서양철학-근대철학의 전통에 대한 비판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 터다). 그럴 필요 없는데 그때 조금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 같다. 아마 질문을 정해진 정답을 호출하는 행위로 인식하는, 질문에는 올바른 정답을 내놓아야 하지 '어림 없는' 오답들은 침묵 속에 놔둬야 한다는 분위기를 오랫 동안 체화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 같다(심지어 오답을 말하면 분위기가 싸해지거나 꼽 주는 분위기도 있었으니 말이다). 언제까지라도 '내 편'이 되어주는 '낭만적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욕망하고, 실제로 그런 인생의 짝을 만난다면 좋겠지만 그런 '행복의 약속'이 만인에게 활짝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랐어요.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분과 만나고 싶어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배제되어버리는 기분이 드는 그 말(33)과 비슷하니 말이다. 그런 관계가 든든하게 곁에 있어주지 않더라도 어떤 말 한 마디 해주는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많이 우울해하더니 그래도 글을 완성했네.”

“네 덕분이야.”

“뭐가?”

“나 추위 많이 탔는데 그럴 대마다 여의도의 햇살을 떠올렸어.”

호가 빙긋이 웃었다.

“나는 정말 네가 아니면 유령이었어. 그 시기를 함께 보낸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호가 ‘그 시기’라고 표현하는 걸 들으니 정말로 한 시기가 지나간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끈질기니까 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그랬잖아.”

내가 근거도 없이 쉽게 한 그런 말조차도 그때의 호에게는 필요한 말이었다고 했다.(40)

<아이 틴더 유>, 정대건

몸의 건강이 급작스럽게 급격히 무너진 상황에서 온기를 지닌 누군가가 곁을 지켜주는 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간절한 목표가 달성되지 않아 홀로 마음을 일으켜세우기 역부족일 때, 자존감이 바닥나고 뭔가를 할 의욕이 생겨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괜찮다'는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조금의 여유도 없이 언제나 조급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어느 시기'를 겪어내고 견뎌내는 데 팟캐스트로는 도저히 역부족일 때가 있다. 이름 붙이기 애매모호한 복잡하고 불안정한 관계일지라도, 끊임없이 내 욕망과 상대방의 욕망 사이에서 관계의 거리와 온도를 수정하고 수리해야 하는 원만하지 못한 관계일지라도, 순간순간의 필요가 맞아 함께 있는 순간들('매직 아워' 같은 짧고 소중한 시간들)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상대방이 대체할 수 없는 '스페어'가 되어있는 때가 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안전거리'를 침범해온다면 도망치지 않기 어렵겠지만 '2km' 그리고 '17km' 떨어진 곳에서 상대방의 평안한 밤과 안녕, 행복을 기원해주는 <아이 틴더 유>가 보여주는 온기에 위로를 받았다.

언론사 취업을 준비 중인 N,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K, 박경리 소설읽기를 시작한 S, 홍대 인디 씬을 연구하는 문화연구자 J, 연극을 공부하기 위해 편입을 준비 중인 T - 틴더로 알게 된 친구들에게 <아이 틴더 유>를 열심히 영업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가다 한 번쯤 매직 아워 같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길 가볍게 희망해본다.

+ 빵 터졌던 부분

나는 평일에는 한 번, 주말에는 자유롭게 틴더 5부제를 하면서도 줄기차게 관계를 피해 다녔고, 호는 외로움을 못 이겨 가금 틴더를 돌리며 끈질기게 관계를 찾아다녔다. 나는 틴더에서 로맨스(백마 탄 왕자)를 찾아다니는 호를 ‘틴더렐라’라고 불렀다. (19)

-익명으로? 미쳤어? 나 같으면 틴더 프로필 sinchoonmunye로 바꿨다 (38-39) -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당선한 호의 소식을 들은 솔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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