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는 7시에 떠났네

                                           출판사를 먹여 살리는 대표 작가인 경우 표절 논란이 발생하면, 출판사는 작가를 뒤로 빼고 자신이 앞으로 나서서 방패 역할을 한다. 작가가 직접 해명을 하면 구질구질한 변명처럼 보이니 대변인을 구한다. 주로 한식구인 경우가 많다. 저잣거리에 깔리는 멍석은 고상한 문학계답게 문예지 따위로 변한다. 그러니까 질펀하게 놀라고 깐 멍석의 다른 이름이 문예지이다. 문예지는 보통 출판사가 운영한다. 쉽게 말해서 출판사가 스폰서인 경우다. 대변인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글쟁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을 실을 수 있는 지면을 얻는 것. 전투사 역할을 자임하면 지면을 얻을 기회는 높아진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더 ! 결국, 표절 논란에 휘말린 작가가 이리저리 해명하느라 흙탕물에 빠지는 꼴은 볼 수 없다.

작가 입장에서도 굳이 자신이 해명을 하지 않아도 제3자가 알아서 하니깐 말이다. 쉽게 말해서 지원군이 든든하다는 말씀. 조경란의 표절 논란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녀는 뒤로 쏙 빠졌고, 3자들이 서로 다퉜다. 그때 조경란은 해외 팔도유람을 다니며 세상물정을 관찰했으니, 논란이 잦아들자 들고 나온 책이 << 백화점 >> 이란 에세이였다. 이 뜬금없는 관심사에 의, 아했던 적이 있다. 책소개글을 보면 표절 논란( 2008) 이후의 동선이 보인다.

 

  

소설가 조경란이 이야기하는 쇼핑의 기쁨, 쇼핑의 고통, 쇼핑의 가치.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백화점을 직접 조명한 문화 에세이다. 백화점이라는 '장소'가 현대인들에게 갖는 의미와 기능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이 책은 현장 취재와 자료조사를 통해 깊이와 넓이가 더해져 오롯이 백화점을 다룬 최초의 논픽션이 되었다. 처음 책의 주제가 제안된 것은 2009년 말이었다. 백화점은 언제부터 그리고 왜 우리에게 이토록 의미심장한 공간이 되었을까? 백화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무엇이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작가는 평소 익숙하게 다니던 서울과 도쿄의 백화점들을 새롭게 취재하고, 다양한 참고문헌과 자료를 조사했다. 책의 집필은 201011월부터 20114월까지 177일 동안 이루어졌다.

  

 

놀다, 온 것이다. 본인 때문에 여러 지면에서 앙칼진 말방구 가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문단을 생각하면 고고하고 도도한 태도였다. 그녀는 지금도 그때 일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이윤식 표절 논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뒤로 빠졌고 제자들이 앞에 나와 이명원과 (앙칼진말방구) 풍선 놀이를 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이 놀이를 관망하다가 유감을 표명하는 것으로 끝냈다. 사실, 신경숙 표절 논란은 이응준 작가가 제기해야 할 게 아니라 문학을 가르치고 문학 평론을 하는 사람들이 해야 될 몫이다. 그들이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니 성질 급한 작가가 300를 찍기로 한 것이다. 문단, 나아가 문학평론이 얼마나 병들었나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언제부터인가 문학평론가는 출판사의 거수기, 혹은 홍보부장이 되었다.

기껏 한다는 게 소설 부록에 해당되는 평론을 쓰는 일이다. 말이 좋아서 평론이지, 출판사의 보도 자료를 길게 쓴 것에 불과하다. 출판사가 소설에 실릴 평론을 청탁하는데 어느 평론가가 신랄하게 평론할까 ? 눈 뜨고 못 봐줄 정도여도 성찬은 이어진다.  " 이 소설은 눈 감고 상상하기에 탁월한, 전무후무한 소설이다, 압권이다 !!!!!!!!!! "  할 말 없으면 전복적 상상이 돋보인다고 말하고, 현대인의 불알을 예리하게 포착했다고 말한다.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평론이 실린 소설책을 꺼내서 한 번 읽어보시라. 전복과 불안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은 평론을 찾는 것보다 이 두 단어가 들어간 평론을 찾는 게 쉬울 판이다. 이처럼 작가 - 출판사 - 문단은 서로서로 칭찬하며 눈 감는다. 말이 좋아 문학상이지 돌려막기다. 오늘은 내가 하고 내일은 네가 하는 방식. 그 나물에 그 밥. 언제부터인가 문학상에 거론되는 소설(가)보다 문단과 거리를 둔 작가를 신뢰하는 경향이 생겼다. 적어도 그들은 아첨을 하지는 않으니깐 말이다. 문학상을 받기 위해서는 출판사나 문단에 밉보이면 죽음이다.

내가 보기엔, 이응준 작가에게는 미안한 소리이지만 그는 평생 문학상을 받을 자격을 상실했다. ? 침묵의 쓰리 콤보 집단에게 밉보였으니까. 한국 소설이 재미없는 이유는 말 그대로 재미가 없기 때문인데 문단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하면 순문학이고, 남이 하면 장르 소설이란다. 어떤 이를 경계 문학이라고도 한다. 차라리 문지방 문학이라고 해라. 지랄 같은 등단 제도 만들어서 끼리끼리 마스터베이션하지 말고 자유롭게 월경해라( 등단 제도는 일본과 한국 밖에 없는 것으로 안다). 신경숙 표절 논란에 대응하는 신경숙의 신경전은 안 봐도 뻔하다. 개인적으로 신경숙 소설에는 관심이 없다. 반짝거렸던 초기 작품과는 다르게 이후에 나온 소설들은 모두 생기를 잃고 기계적으로 써내려간 소설들이었다. 뮤즈가 그녀 곁에서 떠난 것일까 ?  신경숙 소설로 먹고 사는 출판사는 자신이 소속된 문예지를 통해 이응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것이고, 지면 할당에 목마른 사람은 전투사가 되어 싸울 것이다.

내가 보기엔 문학동네가 적극적으로 이응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까 싶다. 혹은 조선일보가 지면을 할당할 것이다. 그녀는 동인문학상(조선일보) 종신 심사위원이라는 크라운을 머리에 쓴 인물이니깐 말이다. 빛나는 ~ 크라운을 쓰신 언니께 ~ 어따대고 지적질이야 ! 라는 논조가 아닐까 ? 뭐, 좋다. 한국 소설에 흥미를 잃은 지는 오래되었으니 관심도 없다만, 문단이 집단적으로 공주병에 걸리는 것은 꼴불견이다. 언론사는 " 표절이 있던 자리 " 를 지적하며 조목조목 따질 것이다. 지금쯤, " 어디선가 나(신경숙)를 찾는 전화벨 " 이 울릴 것이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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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6-17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지방 문학! ㅋㅋㅋㅋㅋ
우리나라 문학계도 알고보면 살벌하네요. 조폭 같아요.
곰발님 글 읽으면 정말 예상도가 그려지네요.
말하자면 이응준은 내부고발자가 된 모양인데
그 사람은 좀 누군가 보호해 줘야하지 않을까요? 힘 없는 독자라도...
설마 생각없이 터트린 건 아니겠죠.ㅠ

진짜 이 문단 제도 없어져야 하는데...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7 14:52   좋아요 0 | URL
즐겨찾기에서 -1이 빠졌네요.

신경숙 열성 지지자`가 내 글 보고 속상하셨던 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혜윰 2015-06-17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은 창비가 먼저 방패막이를ㅠㅠ 창비가 그러면 안되는데ㅠㅠ

공과를 구분짓지 못하는 건 우리 나라 특유의 풍토병인지도....^^;;

그나저나 김윤식 아닌가요??이윤식이라고 쓰셔서☞☜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7 15:59   좋아요 0 | URL
이윤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윤석과 헷갈렸씁니다. 김윤식이죠...

스윗듀 2015-06-18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걸 신경숙해명 터지기 전에 읽었어야되는데 ㅋㅋㅋ 곰발님 계속해서 글 올려주세요 좋아요 지원은 해드릴게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8 06:2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좋아요 지원이라는 말이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ㅎㅎㅎㅎㅎ
 
공포의 변증법 - 경이로움의 징후들
프랑코 모레티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드라큘라와 메르스

                               자주 언급한 부분이지만 : “ 괴물 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편이어서 괴물 영화나 괴기 소설을 좋아한다. " 오따꾸 " 정도는 아니지만 " 3.5따꾸 " 에서 " 4따꾸 " 정도는 된다. 하지만 이 관심은 호기심과는 다르다. 호기심은 말 그대로 대상을 눈요깃감으로 보려는 취향인 반면, 관심은 나와 대상이 맺는 관계를 고려한 관찰이다. 관심(關心)에서 < > 이 관계하다는 뜻이니 말이다. 내가 괴물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는 말은 곧 괴물이 사람, 사물 따위와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발생하게 되는 현상에 관심이 있다는 소리. 일단, 괴물은 << 미지의 것 >> 를 대표한다. 그것은 본래 내부에 있던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거나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혹은 박멸하여 봉인한 것이 재생되거나).

괴물은 미래를 상징하는 기표. 반면 괴물과 싸우는 쪽은 항상 현재. 교통 정리를 하자면 괴물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이나 영화는 사람과 괴물이 서로 멱살 잡고 싸우는 < 싸움 구경 - 서사 > 이지만 사실은 현재와 미래가 서로 다투는 서사'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들은 괴물을 통해 미래가 괴물 같은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 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에서 인용) 을 느낀다. 그래서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이다. 20세기 말, 사람들이 AIDS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원인은 AIDS를 < 바이러스 > 의 한 종류로 보지 않고 < 괴물 > 의 한 종류'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 AIDS가 창궐하는 미래 사회 " 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AIDS 환자'를 괴물로 취급한 것이다. 자기 안의 불안이 아픈 타자를 괴물로 만든다. 

결국 그들은 괴물과 싸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싸우는 꼴이다. << 천국 >> 에는 괴물이 없다. 이유는 하나님이 보우하사 ?! 아니다, 천국에 사는 천사는 불안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괴물이 사는 곳은 << 지옥 >> 이다. 지옥은 불안 집합소. 이렇듯 괴물은 현재의 불알을 먹고 산다. , 오타. 현재의 불안을 먹고 사는 존재. << ​괴물 >>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드라큘라 백작이 아닐까.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드라큘라 백작은 남장을 한 여성이다. 그가 잠이 드는 관은 나팔관 이다. 또한 그가 주로 무는 목( neck)이라는 단어가 자궁 이란 의미도 있으니, 흡혈귀 목을 베어버리는 행위는 자궁 적출이요, 드라큘라 가슴에 말뚝을 박는 행위는 백마를 탄 왕자가 잠이 든 공주를 강간하는 서사다. 미치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 라디오에서는 플라이 더 스카이의 " 가슴 아파도 " 가 흐른다. 그래도 흥얼거리지는 말자. 타인의 고통 앞에서 웃으면 안 되니깐 말이다. 비록 그가 괴물이더라도 죽어가는 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흡혈 행위는 유실된 피(월경)를 보충하려는 것이다. 이 모든 인문학적 상상을 종합하면, 그래요...... 드라큘라는 백작이 아니라 공작부인이랍니다(드라큘라의 실제 모델은 엘리자베스 바토리라는 여성이었다), 라고 우기고 싶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완벽한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싸한 해석만 있을 뿐이다. 드라큘라라는 괴물이 지시하는 것은 명백하다. " 물리면 아,          파요. "  다시 말해서 드라큘라는 불가촉천민이다 드라큘라는 접촉하면 안 되는, 나쁜 피를 가진, 저기 저어기 어두컴컴한 강북에서 온, 창백한 존재.

​그에게 물리는 순간 빠르게 전염되기에 드라큘라는 격리시켜야 할 존재.  드라큘라 영화가 1930년대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1930년대 대공황과 연결된다. 1930년대의 시대적 불안이 드라큘라 영화를 양산한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 속 주인공은 드라큘라와 싸운 것이 아니라 시대적 불안과 싸운 것이다. 드라큘라가 외부에서 유입된 괴물이라는 측면에서 순혈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수주의의 광기와도 연결된다.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외부에서 유입된 유령이 대륙의 피를 온통 전염시켜서 황무지로 만들 것이란 막연한 불안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1930년대 드라큘라 영화의 공포는 당시 현대인이 느꼈던 미래에 대한 공포를 다뤘다. 나는 드라큘라 서사'를 순혈주의에 대한 강박으로 이해한다.

현재, 대한민국을 떠도는 메르스는 드라큘라와 유사한 괴물이다. 한국인은 메르스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채널을 돌리면 메르스, 메르스, 메르스뿐이다. 이 정도면 불안이 아니라 집단 간질 사태. 그렇다면 공포의 원인은 메르스인가 ? 위에서 지적했다시피 괴물은 가까운 미래가 괴물 같은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만든 사생아. 이 사생아의 아비는 현재의 불안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메르스 때문에 집단 간질 사태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불안한 한국 사회가 밑바탕이 되어서 불안이 공포로, 공포가 광기로 확산된 것이다. 사회가 병들었으니 한국 사회 구성원'인 한국인은 모두 기저 질환에 시달리는 환자다. 그렇다 보니 변형 독감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에 한국 사회가 건강한 사회였다면 지금처럼 호들갑을 떨지는 않을 것이다.

정부를 믿고, 각자 조심하면 되니깐 말이다. 말레이시아에서도 메르스가 자국 내에서 발생했지만 완벽한 방역에 성공했으니, 메르스는 그닥 무시무시한 괴물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다르다. 같은 말을 다시 한 번. 한국인은 기저 질환을 가진 환자이니까. 메르스 환자는 현대판 드라큘라. 접촉하는 순간 감염된다. 하지만 그 분노를 드라큘라에게 물린 흡혈귀에게 화살을 돌리지는 말자. 목을 베고 말뚝을 박아야 될 대상은 흡혈귀가 아니라, 흡혈귀 우두머리인 드라큘라. 정부라는 이름의 드라큘라, 무능한 관료의 목을 베고 적폐에 말뚝을 박으면 된다. 우두머리가 죽으면 흡혈귀는 정상으로 복귀한다. 일단은..... 영화를 믿을 수밖에 ! 영화에서는 우두머리 드라큘라가 죽으면 감염된 흡혈귀는 모두 정상으로 복귀하니 말이다.

메르스보다 무서운 병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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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5-06-17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의든 타의든 메르스 환자를 진료를 보고 확진을 받은 `병원, 병원의 부서` 폐쇄가 이어져 막상 다른 질병으로 진료를 봐야 하는 환자들은 거리로 내몰리고,
메르스 환자의 간호 역시 ; 간병인, 가족 모두 간호하기를 거부해서 환자만 덩그러니.

병원에서 `불법적인 진료를 거부`를 하든 안 하든, 폐쇄병원이 점차 늘어가면서 전국의 모든 병원이 폐쇄로 달려가는 느낌이네요. 그리고 국민의 정신적 피로도 급상승 ... ; 마무리가 ...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7 11:50   좋아요 0 | URL
이야.... 이거.... 참..... 영화 같은 일이네요. 병원이 하나둘 메르스에 의해 점령되어 페소ㅔ가 폐새가 되고.... 병원이 하나도 남지 않는 것... 묘하군요.


말레이지아는 메르스 1호 환자 생기자 간단하게 방역해서 그냥 쫑을 냈다고 하는데 이 나라는 당최 뭔 짓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병원 공개를 왜 꺼려했는지 의아합니다. 진짜 삼성 이기 때문에 공개를 꺼랴 한 것일까요 ?

풀꽃놀이 2015-06-1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르스보다 무서운 병균은 행정부 수장으로부터 퍼져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무능 바이러스죠...우리 정부가 일처리하는 것을 보면 정말 두렵기 짝이 없구요..정말 이러다가 큰일을 내지 싶습니다. 남탓 하는 것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그러려니 한다해도 이것..참..
메르스에 묻혀 훨씬 심각한 탄저균 문제는 공론화조차 되지 못하고 있고..
`눈먼자들의 도시`를 읽었을 때 느껴지던 `답답한`공포가 느껴지네요. 무서운건 사람이니까요. 병균이 아니라...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8 06:25   좋아요 0 | URL
바이러스야 격리시키면 되지만 무능과 부패는 답이 없죠. 국개론이 슬슬 정답이 되어가는 세상입니다. 몰락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무능한 정부는 처음 봅니다. 확실히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이에요... 그게 정답입니다.

samadhi(眞我) 2015-06-19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유가 뜬금없이(?) 적절해서 저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9 13:31   좋아요 0 | URL
저도 이 글이 마음에 듭니다. 신경숙 관련 글 때문에 묻혔어요... ㅎㅎㅎ
 

 

 

 

 

 



글 출처 : 2015. 06.16일자 허핑턴 포스트 전문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와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 미시마 유키오, 김후란 옮김, 「우국(憂國)」, 『金閣寺, 憂國, 연회는 끝나고』, 주우(主友) 세계문학20, 주식회사 주우, P.233. (1983년 1월 25일 초판 인쇄, 1983년 1월 30일 초판 발행.)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 신경숙, 「전설」, 『오래전 집을 떠날 때』, 창작과비평사, P.240-241. (1996년 9월 25일 초판 발행, 이후 2005년 8월1일 동일한 출판사로서 이름을 줄여 개명한 '창비'에서 『감자 먹는 사람들』로 소설집 제목만 바꾸어 재출간됨.)


자, 이제 눈을 감고, 내가 말하는 장면을 각자의 머릿속에 그려보자. 대한민국 최고의 유명, 유력 소설가 신경숙은 문단의 까마득한 선배인 김후란 시인이 번역한 일본의 대표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金閣寺, 憂國, 연회는 끝나고』(주우 세계문학 전집 제20권)에서 단편소설 「우국(憂國)」의 한 부분을 가만히 펼쳤다. 이어 신경숙은 자신이 청탁을 받아쓰고 있는 중인 단편소설 「전설」의 원고에 「우국(憂國)」의 그 한 부분을 거의 그대로 옮겨 타이핑한다. 이 원고는 1994년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실린 뒤 1996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소설집 『오래전 집을 떠날 때』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에 대한 표절로 저렇게 적발되고 있는 신경숙의 「전설」의 일부분은, 한 소설가가 '어떤 특정분야의 전문지식'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설명하거나 표현하기 위해 '소설이 아닌 문건자료'의 내용을 '소설적 지문(地文)'이라든가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활용하는 등'의 이른바 '소설화(小說化) 작업'의 결과가 절대 아니다. 저것은 순전히 '다른 소설가'의 저작권이 엄연한 '소설의 육체'를 그대로 '제 소설'에 '오려붙인 다음 슬쩍 어설픈 무늬를 그려 넣어 위장하는', 그야말로 한 일반인으로서도 그러려니와, 하물며 한 순수문학 프로작가로서는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명백한 '작품 절도행위―표절'인 것이다.

특히, 과연 경륜 있는 시인답게 김후란은, 1996년 6월 30일 초판이 발행된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제2권 '죽음의 미학' 편에 실린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에서는 "한 달이 채 될까 말까 할 때, 레이꼬는 사랑의 기쁨을 알았으며, 중위도 이를 알고 기뻐하였다."라고 번역된 부분에서 "사랑의 기쁨을 알았으며"라는 밋밋한 표현을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라는 유려한 표현으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언어조합은 가령, '추억의 속도' 같은 지극히 시적인 표현으로서 누군가가 어디에서 우연히 보고 들은 것을 실수로 적어서는 결코 발화될 수가 없는 차원의,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도용(盜用)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튀어나올 수 없는 문학적 유전공학의 결과물인 것이다.

만약 신경숙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받아 적다보니 시인 김후란 번역의 「우국(憂國)」 속 저 부분을 표절한 「전설」의 그 부분이 저절로 나타나게 된 거라고 주장하려면, 가령, 자신의 집 앞에 커다랗고 둥근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밤 태풍이 몰아쳤고 이튿날 맑게 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그 커다랗고 둥근 바위가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과 똑같은 모양으로 간밤 비바람에 깎여 있더라는 해괴한 어불성설을 명쾌한 사실로 증명해내야만 할 것이다.

원래 신경숙은 표절시비가 매우 잦은 작가다. 재미 유학생 안승준의 유고집 『살아는 있는 것이오』의 서문은 고인의 부친 안창식이 쓴 것인데 이를 신경숙이 자신의 소설 「딸기밭」에 모두 여섯 문단에 걸쳐 완전 동일하거나 거의 동일한 문장으로 무단 사용한 것이나, 신경숙의 장편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와 단편소설 「작별 인사」가 파트릭 모디아노와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들 속 문장과 모티프와 분위기 들을 표절했다는 고발 등등은 필경 신경숙이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을 표절한 것과 비슷하거나 같은 노릇을 여기저기서 상습으로 일삼던 와중에 흩뿌려진 흔적과 증거들이라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우리는, 신경숙이 미사마 유키오를 표절한 저 방식으로 다른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들을 더 많이 표절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상식적이고도 합리적인 의심'을 충분히 품을 수 있다. 예리한 독서가들 여럿이 작정하고 장기간 들러붙어 신경숙의 모든 소설들을 전수조사(全數調査)해보면 위와 같은 사례들은 얼마든지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무라카미 류의 유쾌한 장편소설 『69』에는 이런 명언이 나온다. "똥에는 사상이 없다." 표절도 마찬가지다. 표절은 '똥'이다. 똥에 사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듯 표절에는 사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문단에서는 그런 문학적 야만이 버젓이 벌어졌다. 그래서 신경숙의 '표절'은 그저 '치워버리면 끝이 나는 똥'이 아니라 한국문학의 '치명적인 상처'가 돼버렸던 것이다.

소설가 신경숙은 시인인 나보다 5년 정도 문단에 먼저 나왔다. 우리는 20세기의 끄트머리에서 한국문단 생활을 함께 시작한 셈이다. 그러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국문인들의 표절에 대한 염결함이 유독 신경숙에게만 무감각하거나 다르게 해석될 리 만무하다. 본시 한국문단은 요즘처럼 표절에 관해 널널한 입장을 취하는 그런 개념 없는 동네가 절대 아니었다. 가령, 어느 밤 동료 문인과 단 둘이 술자리를 갖다가 그에게서 어떤 흥미로운 경험담을 들었을 때 다음날 아침 술이 덜 깬 상태에서조차 그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어젯밤 내게 말했던 그 이야기를 내가 내 시나 소설에 써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하는 정도가 내가 데뷔하던 당시 우리 한국문단의 표절에 대한 경계(警戒)의 수준이었으니, 공적인 자리나 매체에서의 표절에 대한 엄격함이란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가령 소설가 이인화처럼 표절과 페스티쉬(혼성모방)의 논쟁들 사이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문인이 있었고,

한 번 표절작가로 찍힌다는 것은 문인으로서의 죽음을 은유하는 것을 넘어서 자연인으로서의 자살까지 고려할 만큼 심각한 부끄러움이었음을 나와 나의 문우들은 자명하게 술회할 수 있다. 그래서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이자 신경숙의 남편(1999년도에 결혼. 신경숙의 표절 시비들은 200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터져 나옴.)이기도 한 문학평론가 남진우는 하일지를 비롯한 여러 문인들을 표절작가라며 그토록 가혹하게(아아, 정말로 가혹하게!) 몰아세우고 괴롭혔던 것 아니겠는가? 참으로 기적적인 것은, 그랬던 그가 자신의 부인인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에 대해서는 이제껏 일언반구가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나처럼 천박하고 보잘것없는 작가도 당연히 알고 있던 한국문단의 저 호흡 같은 '문학헌법 제1조'를 신경숙처럼 고매하고 대단한 작가가 몰랐다고 우기려면 적어도 그때 신경숙의 문단은 화성에 있었고 신경숙은 화성인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신경숙은 「전설」이 실린 소설집 『오래전 집을 떠날 때』의 제목을 『감자 먹는 사람들』로 바꿔서 재출간했다. 절판된 책을 재출간하는 경우도 아닌데 굳이 왜 그랬을까. '오래전 집을 떠날 때'라는 제목이 '감자 먹는 사람들'이란 제목보다 못생겨서? '감자 먹는 사람들'이란 제목은 그 오리지널이 고흐의 그림 제목인데도 왜 굳이? 참으로 요상한 처신이 아닐 수 없다.

신경숙과 같은 극소수의 문인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한국문인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버겁고 초라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작가임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려는 까닭은 비록 비루한 현실을 헤맬지라도 우리의 문학만큼은 기어코 늠름하고 진실하게 지켜내겠다는 자존심과 신념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빈센트 반 고흐가 광기에 젖어 온갖 패악을 부렸다고 한들 누구도 예술가로서의 그를 비난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흐가 누군가의 그림을 표절 했다면 문제는 사뭇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평생 지독한 성욕에 시달렸던 피카소의 마성(魔性)에 가까운 여성편력을, 마약 과용으로 요절한 바스키아를, 장주네의 도둑질과 비역질을, 가족을 내팽개치고 타히티로 가버린 이기주의자 고갱을, 절친한 친구 부부와 동거하며 그 친구의 부인을 사랑했던 마야코프스키를, 랭보와 베를렌느의 무자비한 퇴폐와 일탈을 예술사가 심판했다는 민망한 소리는 이제껏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으나 만약 저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남의 작품을 표절했다면 지금 우리는 그를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의 범죄자로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예술가에게도 도덕은 있으니, 그것은 '예술에 대한 도덕'인 것이다. 문인이 안하무인일 수는 있다. 그러나 문인이 문학에 있어서만큼은 안하무인일 수 없다. 문인이 범죄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인이 문학에 있어서만큼은 범죄자여선 안 되는 것이다. 종이책마저 사라져가는 21세기 디지털 시대, 문학에 싸늘해진 세상보다 막상 더 섭섭하고 화가 나는 것이 문학인들이 문학을 두고 부끄러운 짓들을 서슴지 않을 때인 까닭 역시 그래서이다.

표절은 시대와 시절에 따라 기준이 변하거나 무뎌지는 '말랑말랑한 관례'가 아니다. 만약 표절에 대한 엄중한 잣대를 무시하고 그 벌을 농락해 지식과 지성과 과학과 문화와 예술 등의 사법체계가 무너지면, 인간과 인간이 공부하고 노동하고 창조하는 모든 것들은 '모럴 헤저드'에 빠져들고 만다. 가장 양심이 없다는 대한민국 국회의원들마저도 논문표절을 하면 장관이 안 되고 산악 14좌 등반도 미심쩍은 부분이 발각되면 그 인정이 취소됨과 동시에 산악인으로서의 명예가 박탈된다. 인기 절정의 대중강연자는 논문표절로 인해 모든 방송 프로그램들에서 일거에 퇴출되고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도 도핑 테스트에 걸리면 평생의 업적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변해버리는 세상이다.

그러나 표절을 저질러도 아무 문제가 없는 곳이 있다. 바로 한국문단이다. 단, 조건이 있다. 책이 많이 팔린다거나 그것과 음으로 양으로 연관된 문단권력의 비호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설혹 표절 문제가 제기된다고 하더라도 그저 약간의 소란 아닌 소란을 거쳐 다시 납득할 수 없는 평온으로 되돌아갈 뿐인 것이다. 어느덧 표절에 대한 도덕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한국의 순수문학 안에서 표절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치밀하게 진행돼 몽롱하게 마무리 된다. 개인적인 표절 말고도, 가령, 거대 출판사의 사장과 편집부가 작가에게 이거 써라 저거 써라 제시하고 조종하다가 유리잔이 엎어져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표절사건이 터지기도 하며 이러한 와중에 자신의 작품을 표절당한 한 신인 소설가는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매장당하기까지 하건만 한국문단의 어느 문인도 시원스럽게 나서서 입장을 표명해 도와주지 않는다.

왜냐. 일종의 '내부 고발자'가 돼버려 자신의 문단생활을 망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한국문단의 이러한 '표절의 환락가화(歡樂街化)'가 2000년 가을 즈음부터 줄줄이 터져 나왔던 신경숙의 다양한 표절 시비들을 그야말로 그냥 시비로 넘겨버리면서 이윽고 구성되고 체계화된 것임을 또렷이 증언할 수 있다. 신경숙의 표절에 대한 한국문단의 '뻔뻔한 시치미'와 '작당하는 은폐'는 그 이후 한국문단이 여러 표절사건들에 대한 단호한 처벌을 내리지 않는 악행을 고질화, 체질화시킴으로서 한국문학의 참담한 타락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한국문인들은 신경숙의 표절 사실을 알건 모르건 간에 어쨌든 '침묵의 공범'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문학은 표절을 용인하는 집단이 돼 버린 것이고 한국문인들을 그러한 자괴의 콤플렉스에 갇혀버리게 된 것이다. 이는 자결할 기운도 남겨두지 않는 낙담이다. 우리 한국문인들과 한국문학의 독자들은 이제 이 폭압 같은 좌절로부터 기필코 해방돼야 한다. 신경숙의 표절로 인해 한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나는 수치심을 느꼈다. 다른 많은 문인들도 수치심을 느꼈다. 어떤 경로로든 이 사실을 알게 된,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도 수치심을 느꼈다. TV 예능프로그램에 나와서까지 문학의 순수함과 숭고함과 엄격함에 대해 감동적으로 설파하곤 하는 신경숙의 모습은 우리에게 극심한 충격과 자책,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환멸을 안겨준다.

신경숙은 단순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다. 신경숙은 한국문학의 당대사 안에서 처세의 달인인 평론가들로부터 상전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으며 동인문학상의 종신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등등'의 요인들로 인해 한국문단 최고의 권력이기도 하다. 그러한 신경숙이기에 신경숙이 저지른 표절이 이른바 순수문학에 대해서는 순진할 수밖에 없는 대중, 특히 한 사람의 작가만큼이나 그 개개인이 소중하기 그지없는 한국문학의 애독자들과 날이 갈수록 하루하루가 풍전등화인 한국문학의 본령에 입힌 상처는 그 어떤 뼈아픈 후회보다 더 참담한 것이다.

뿐인가. 신경숙의 소설들은 다양한 언어들로 번역돼 각 외국 현지에서 상업적으로도 일정한 가시적인 성과를 올린 바 있다. 그런데 만약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이 뉴욕에 알려진다면? 파리에 알려진다면? 영국에 알려진다면? 일본의 문인들이, 일본의 대중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는 감춘다고 감춰질 문제도 아니며, 감추면 감출수록 악취가 만발하게 될 한국문학의 치욕이 우리가 도모할 일은 더욱 아닐 것이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대표 소설가가 일본 극우 작가의 번역본이나 표절하고 앉아있는 한국문학의 도덕적 수준을 우리 스스로 바로잡는 것 말고는 한국문학의 이 국제적 망신을 치유할 방법이 달리 뭐가 있겠는가.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는 것은, 누가 누구의 흠결을 잡아내 공격하는 성격의 일이 정녕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지난 십 년 가까이의, 그리고 앞으로의 문단생활을 스스로 포기하면서까지 이 글을 쓸 이유란 애초에 없었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나와 나의 문우들이 문학을 처음 시작했을 적에 신앙했던 문학의 그 치열하고 고결한 빛을 되찾는 일일 뿐이다. 신경숙의 개인사가 아니라 한국문학사 전체를 병들게 하는,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한국문학 작가들과 그들의 독자들에게까지 채워질 저 열등감의 족쇄를 바수어버리는 일일 뿐이다.


한국문단과 한국문학은 이 글을 통해 표절에 대한 패배감과 우울증을 치유 받아야 하고 그것이야말로 이 글의 사회적, 문화적 공익성이 될 것임은,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작가란 표절을 하지 않는 존재라고, 또한 비록 작가가 아닐지라도 누구든 남의 작품을 표절하는 것은 도둑질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아니고서야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칼로 무자르듯 구분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악한 사람이기도 하고 선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악한 일과 선한 일은 있다. 나는 나의 이 글이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와 문화에 악영향을 끼칠 어떤 악한 일을 바로잡는 선한 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보통의 경우 나는 용감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가 죽으면서 나는, 내가 용기 없는 문인이었다고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진정한 문학은 세상을 능욕하는 더러운 시스템을 무시하고 무너뜨린다. 또한, 인간의 영혼을 기만하고 예술의 가치를 짓밟는 야만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결의는 유별난 한 문인만의 것일 수도 없는 것이다. 세상은 법률로만 유지되는 게 아니다. 세상은 인간의 모순과 슬픔을 예술의 순수를 통해 사랑하고 위로하면서 제 핵심을 사수한다. 예술가의 예술에 대한 윤리가 예술가의 본분임은 바로 그 소치인 것이다.

고로, 신경숙이라는 한국문학의 우상(偶像)이 저지른 표절에 관해 한 작은 문인이 정식으로 써서 그 사실과 의미를 일깨우는 일은 한국문인들의 긍지를 회복하는 길이자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피눈물과 땀방울로 한국문학을 일궈낸 선배작가들과 독자들에게 사죄하려는 오늘의 한국문인들 모두의 모습이다.

글이란 비록 그 글을 쓴 자가 죽은 다음일지라도 오히려 새 생명을 부여받아 역사와 문화 속에서 자신의 무거운 책무를 감당한다. 어떤 대단한 권력이 협박하고 공격하고 회유하고 은폐하고 조작한다고 한들 단 한 사람만이라도 순정한 마음으로 혼신을 다해 기록한다면 그 기록은 그 기록을 포함하는 모든 것들의 진실을 필요할 적마다 매번 소환해 영원히 증명해낸다는 뜻이다. 이것이 곧 온갖 어둠을 이용해 당대에 설치는 거짓보다 훨씬 강한 참된 글의 빛이며 문학의 위대함이다. 나는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문우들과 함께, 지금 이 순간 오로지 그것만을 믿고 싶은 것이다.

글 | 이응준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에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온다」외 9편의 시로 등단했고, 1994년 계간 『상상』 가을호에 단편소설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 2013년 1월부터 2015년 1월까지 「중앙선데이」에 21편의 칼럼을 연재하면서 정치․사회․문화 비평을 시작했다. 시집 『나무들이 그 숲을 거부했다』, 『낙타와의 장거리 경주』, 『애인』, 소설집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무정한 짐승의 연애』, 『약혼』, 연작소설집 『밤의 첼로』, 장편소설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국가의 사생활』, 『내 연애의 모든 것』, 소설선집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논픽션 시리즈 '이응준의 문장전선' 제1권 『미리 쓰는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어두운 회고』 등이 있다. 2008년 각본과 감독을 맡은 영화 「Lemon Tree」(40분)가 뉴욕아시안아메리칸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문, 파리국제단편영화제 국제경쟁부문에 초청받았다. 2013년 장편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이 SBS 16부작 드라마로 제작 방영되었다. 문화무정부주의 조직 '문장전선'을 창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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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재봉, 「왜 신경숙씨 '딸기밭'에 남의 글이 그대로 담겼나」, 한겨레신문, 1999년 9월21일자 참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92100289124008&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9-09-21&officeId=00028&pageNo=24&printNo=3614&publishType=00010
이 일이 드러나 문제가 커지자 신경숙은 고(故) 안승준의 유족에게 사과하고 양해를 구해 소설집 『딸기밭』의 그 다음 인쇄본부터는 "유의 어머니 편지는 故 안승준 씨의 유고집 서문의 일부를 변형한 것임."이라는 문구를 단편소설 「딸기밭」의 말미에 달았다. 신경숙, 「출처 안밝힌 인용은 죄송, 표절혐의 이해할 수 없다」, 한겨레신문, 1999년 9월28일자 참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92800289124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9-09-28&officeId=00028&pageNo=24&printNo=3618&publishType=00010

2) 이는 주로 문학평론가 박철화가 주장한 것들인데, 계간 작가세계 1999년 가을호에 실린 「야성성의 글쓰기, 대화와 성숙으로」와 이후 한겨레신문에 발표한 그의 기고문들을 참조할 수 있다. 특히 박철화는 신경숙의 단편소설 「작별인사」가 마루야마 겐지의 장편소설 『물의 가족』의 여러 요소들을 그저 멋 부리기 위해 가져다가 표절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박철화, 「비슷한 문장과 모티프 모든 것이 우연인가」, 한겨레신문, 1999년 10월 5일자 참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10050028912400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9-10-05&officeId=00028&pageNo=24&printNo=3624&publishType=00010

3) 최재봉, 「국내 포스트모더니즘 거센 내부 비판」, 한겨레신문, 1993년 3월 13일자 참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31300289109010&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3-03-13&officeId=00028&pageNo=9&printNo=1500&publishType=00010

4) 소설가 하일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남진우의 공격이 문학평론이 아닌 인신공격적 언어폭력이라고 일갈했다. 또 문학평론가 권성우는 강준만과의 공저 『문학권력』 (개마고원, 2001) 속 자신의 글 「심미적 비평의 파탄―남진우의 반론에 답한다」에서 남진우가 하일지의 장편소설 『경마장 가는 길』이 로브그리예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비판하면서도 아무런 증거를 내세운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남진우의 하일지 비판(특히 로브그리예에 대한 표절 시비가)이 그야말로 인신공격적 언어폭력에 불과하다고 소설가 하일지와 똑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고미석, 「문학평 인민재판식 안된다」, 동아일보, 1991년 9월 30일자 참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93000209213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91-09-30&officeId=00020&pageNo=13&printNo=21606&publishType=00020
윤성노, 「권성우·강준만 공저 '문학권력서' 재비판」, 경향신문 2001년 12월 17일자 참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0112171931211

5) 「문화단신」 문학, 연합뉴스 2005년 8월 9일자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01&aid=0001070362 

 

 

 

 

 

 

 

 


 

 

 

 

 

 


예상 가능한 신경숙의 신경전



1. 신경숙은 침묵한다.

2. 신경숙과 관련이 있는 문예지'나 언론( 동아일보 ) 은 신경숙을 대신할 타자의 입'을 물색하여 신경숙의 입장을 대변한다

3. 오고가는 앙칼진 말방구들. 반론에 재반론에 재재반론.

4. 신경숙은 침묵한다.

5. 괘씸죄에 걸린 반대파는 문단 주류와 거대 출판 권력으로부터 외면받는다.

6. 신경숙은 침묵한다.

7. 대중으로부터 잊혀질 만할 때 신경숙은 새 작품을 들고 " 짠 ! " 하며 나타난다.

8. 대중은 와와, 한다.



뭐, 이런 신경전을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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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6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16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06-16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한국문학이 독자들에게 외면 받고 있는데, 신경숙 작가 표절 논란은 파장이 꽤 오래 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메르스 소식 때문에 이 글이 조용히 묻힐 것 같은 생각도 들어요. 책 좀 읽고, 한국문학에 정말 관심 있는 독자들만 이 부끄러운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7 05:47   좋아요 0 | URL
조경란 < 혀 > 논란은 송사리 노는 연못에 숭어가 끼어들면 되겠나-정신`으로 아예 조경란이 무시를 하더군요. 일체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매체에서도 반론 재반론이 이루어졌으나 조경란이 아무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매우 부적절했죠. 잠시 한국을 떠나 있다가 나온 작품이 엉뚱하게도 소설이 아닌
<< 백화점 >> 인가 하는 책이었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느낀 백화점 이야기....

아마, 이 사태도 그리 되지 않을까요 ? 개야 짖어라, 나는 고고하게 물 위에 떠 있을란다...

표맥(漂麥) 2015-06-17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네요... 어째 신 작가의 표절에 관한 글이 두 편이나 알라딘 서재에 올라와 있어 읽게 되었는데...
참 부끄러운 일 인듯 한데... 신작가의 의견이 궁금해 지는군요... 저 정도면 다른 눈 밝은 이들이 금방 알아볼 것이라는 걸 알았을 듯 한데요. 그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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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댓글 써고나서 찾아보니 오늘 몇몇 곳에서 기사화 되었군요... 수치스럽다는 생각이 언듯 들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7 05:49   좋아요 0 | URL
한국만큼 표절에 둔감한 나라가 있을까 싶습니다.
언제부터 표절이 이렇게 자연스러운 나라가 되었는지
정치가서부터 문학인까지.... 참......

비연 2015-06-17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을 어제 접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글은 유명해서 금방 알아챌 사람들이 있었을텐데 너무나 당당하게(?) 베껴서 자기 책에 넣었다는 데에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네요. 신경숙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런 일이 그대로 묻히면 절대 안될텐데. 그냥 무심히 넘어갈까봐 걱정될 뿐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7 09:17   좋아요 0 | URL
패턴은 동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경숙은 침묵할 것이고,
대신 신경숙을 밀어주는 거대 출판사가 침묵을 대신할, 지지할 문학평론가 입을 빌려 대변하겠죠.
안 봐도 뻔한 사실. 이런 걸 두고 조경란 전술이라고 하죠....

samadhi(眞我) 2015-06-19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절시비뉴스를 보고 그저 당연히 표절했겠거니 하고 말았는데 이응준 작가의 글을 읽으니 그 정도가 심각했네요. 신경숙이 표절한 부분을 읽으니 문대성의 논문표절과 똑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탈자까지 ˝그대로˝ 붙여쓰기하는 바람에 더 들통날 수밖에 없었던 글처럼, 원서도 아닌 번역문을 갖다붙인 놀라운 무신경(숙)함.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9 13:30   좋아요 0 | URL
저도 뭐 그냥 내용이나 주제 표절인 줄 알았는데 이건 완전 100% 문장 표절인데다 다른 것도 특히 생의한가운데도 거의 100% 표절이죠... 상습범인 겁니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아예 읽은 적도 없다 ?! 꽤 건방진 반응이죠....
 
[블루레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감독, 샤를리즈 테론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 대한 시시콜콜한 잡담 : 미워도 다시 한 번

 

                                                                                    

                                                                                          막대한 할리우드 자본이 들어간 영화는 일단 제작 단계에서부터 최고의 스텝이 붙는다. 시나리오를 담당하는 글쟁이도 마찬가지다. 시나리오 작가를 " 스토리 입말 " 에만 정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들은 영화뿐만 아니라 당대에 대한 유행에 민감하고 텍스트를 풍부하게 만드는 문학과 상징 해석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직업군이며, 또한 갖추고 있어야 일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영화만 가지고 승부를 하는 시대는 지났다. 여러 방면의 수용자에게 지적 만족을 주기 위해서는 다양한 요소를 첨부해야 한다. 기획 상품이란 그런 것이다. 영화 <<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 는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꾸민 티가 역력한 영화다.

이 영화는 프로이트 이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하고,     페미니즘 이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영화. 감독은 두 가지 길을 열어놓았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두고 페미니즘 영화이냐, 아니냐며 싸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텍스트 수용자는 평소 자신의 입장에 유리한 쪽으로 선택하면 된다. 모르는 쪽보다 아는 쪽에 대해 말하는 게 유리하니 말이다. 이 영화를 << 거대한 남근 >> 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 원초적 자궁 >> 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일단 전투 트럭은 기니까 ! 프로이트 식 귀납법에 의하면 ㉠ 원숭이 똥구멍은 빨갛다 - ㉡ 사과도 빨갛다 - ㉢ 사과는 맛있다 - ㉣ 바나나도 맛있다 - ㉤ 바나나는 길다 - ㉥ 길면.......        남근 男根 이네요. 헤헤헤.  결론은 기승전- 근()인 셈이다

프로이트 범성론'이란  :  < ㉠ - 목록 > 에 아무리 쌈박한 오브제를 놓아도 < ㉥ - 목록 > 에 가서는 페니스가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러분이 봐도 기가 찰 노릇이니, 시대의 거성 들뢰즈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 앙띠 오이디푸스 >>에서 이렇게 말했다 " 꿈에 막대기가 나오면 무조건 페니스라고 말해. 안 그러면 따귀를 맞을 테니깐 ! ” 프로이트 식 해석에 의하면 8기통 엔진 두 개짜리 전투 트럭은 남근이다. 더군다나 긴 몸통 끝에 달린 둥근 유류 탱크는 불알이다. 하나 더 달렸다면 완벽한 남근이 될 터인데, 프로덕션 디자이너 입장에서 보면 너무 노골적은 디자인이라 망설였을 것이다. 지나치게 또렷한 상징'만큼 촌스러운 은유는 없으니까.

퓨리오사를 비롯한 일행은 거대한 남근을 탈취하여 약속의 땅으로 향한다는 이야기. 강유정 평론가는 우유를 싣고 달린다는 점을 들어 " 전투 트럭을 부푼 배(임신한) 와 거대 자궁에 대한 은유 " 라는 해석이 가능하다면, 같은 이유로 전투 트럭이 거대하고 딱딱한 페니스라는 점을 들어 우유가 아니라 정액이라고 우겨도 될 것 같다. 부푼 배라는 해석이나 우유가 아니라 정액이라는 해석이나 도 긴 개 긴'이지 않은가.  해석에 정답은 없다. 그저 그럴싸한 해석만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전투 트럭은 싱싱한 정자가 가득 담긴 페니스-기계. 프로이트가 말하는 << 남근 >> 은 곧 << 권력 >> 을 뜻하니, 거대 남근을 장악한 쪽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셈이다. 그들은 거대 남근 기계를 이끌고 가스타운'에 무혈입성한다.

거대 남근은 곧 반지의 제왕이요, 왕관인 셈이다. 그런데 꿀과 젖이 흐르는 거스타운을 << 자궁 >> 으로 해석해서 그럴싸한 해석이 나온다. 프로이트 이론은 아버지가 중심이 된 오이디푸스 세계이다. 모든 것은 남근이 있는가, 없는가, 남근을 욕망하는가, 욕망하지 않는가에 달렸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여자는 페니스가 없는 존재. 그렇기에 프로이트는 여자를 당최 해석이 불가능한 < nothing > 으로 정의한 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 에라이, 몰것다. ! " 내가 이 영화에서 주목한 점은 등장인물들이 구호처럼 외친 '우리는 물건이 아니다 We are not things.'라는 대사였다. 영화 속 여성들은 프로이트가 여성을 정의하면서 내린 < nothing > < not thing > 으로 분류한 것이다.

이 태도는 여성은 < nothing > 이 아니라 < not  thing > 이라는 선언이다. 그것은 오이디푸스 아버지 세계를 향한 빅엿 이었다. 이성복 시인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어 ! ” 오이디푸스적 남근과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 바로 << 코라 >> . 코라는 원초적 어머니의 세계로 거대한 자궁을 뜻한다. 이 영화에서 자궁은 거스타운이라는 동굴이다. 이 동굴에서 (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이 영화 속 거스타운은 동굴이다 ) 워보이들이 양육된다. 그들 외형이 머리털이 자라지 않고 창백하다는 점에서 탯줄에 매달린 태아'이다. 이곳은 자궁이다.  가스타운을 원초적 자궁'이라고 본다면 퓨리오사가 탈출을 시도하면서 겪게 되는 관문,  모래 폭풍은 질 구멍과 자궁목 사이에 위치한 여성의 생식 통로이다.

음문을 통과해야지만 약속의 땅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약속의 땅은 이미 황무지가 된 지 오래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돌아왔던 코라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곳이 바로 약속의 땅인 셈이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 귀태 >> 라는 말은 이 영화 설정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작명의 달인, 프로이트는 이 욕망을 자궁 환상 이라고 명명했다. 월한 프로이트 할아버지 !   이렇듯 이 영화는 남근적 상징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원초적 자궁으로 설명할 수도 있는 재미있는 영화. 또한 모래 폭풍 통과 장면을 관문(음문)을 통과해야지만 어른의 세계(약속의 땅)에 진입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퓨리오사의 성장 영화'로 읽을 수도 있다.

​교조주의자 정성일은 영화를 가지고 인문학적 소양을 뽐내지 말라며 사이비 영화평론가를 비판했는데, 그에게 되묻고 싶다. 당신이야말로 영화를 가지고 인문학적 소양을 뽐내는 대표적 평론가라고 말이다. 한국 영화를 말하면서 맥락과는 별 상관없이 프루동, 바쿠닌, 조르주 소렐을 호명하는 태도야말로 영화를 가지고 인문학적 소양을 뽐내는 대표적 평론가의 태도가 아닐까 ? 영화를 영화라는 장르 안에서만 소비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독선이다. 정성일의 저 태도가 옳다면 고다르 감독도 비판받아야 한다. 그는 영화를 만들면서 온갖 문학적 재료'를 끌어왔으니깐 말이다. 롤랑 바르트를 인용하자면 저자는 죽었다. 텍스트는 온전히 수용자의 몫이다. 수용자가 북을 치든 장구를 치든 상관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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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메르스의 메이트인가

                                           수전 손택의 탁월한 저서 << 타인의 고통 >> 에이즈 에 대한 대중 폭력을 비판한다. 미국 대중 기독교 우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기독교 우파는 에이즈'를 윤리적 타락의 결과로 선전했고, 주요 표적은 동성애자였다. 동성애자는 어느 순간 불가촉천민으로 낙인 찍혔고, 고립되었으며, 찍히면 죽을 수도 있는 과녁이 되었다. 그들은 < 敵 : 원수 적  > 이자   < 的 : 과녁 적  > 이었다. 이 광기 바이러스는 고스란히 태평양을 건너셔, 현해탄을 건너셔, 동해바다를 넘어셔, 사이다 병속에 숨어셔, 인천 앞바다를 거쳐셔, 대한민국에 상륙했다. 뿜빠라 뿜빠 뿜빠빠. 당시, 나는 동성애자이면서 에이즈 보균 판정을 받은 사람과 알음알음 알고 지냈는데 그 사람은 세찬 바람이 전하는 풍문과는 달리 일상생활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연락이 끊겨서 소식을 알 수는 없으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졸라 건강한 모습으로 정상인처럼 활동한 것을 보면 에이즈는 호들갑을 떨만큼 무서운 제2의 페스트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D.O.A : 도착 즉시 사망을 뜻하는 의학 용어 는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질병에는 치사율 이 발생한다. 그 흔한 감기에도 죽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기록에 의하면 웃다가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웃느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나 ?! 이 치사율이 소수점 이하로 떨어져서 인식을 못할 뿐이다. 사실 < 사스 > < 메르스 > 도 매년 유행하는 계절성 독감( 코로나 바이러스 )이다. 메르스로 인한 사망자가 16명으로 늘어났다는 사실 앞에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우우, 하지 마시라. 내 말은 경계를 하고 조심을 하면 될 일이지 사회 전체가 공황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소리.

 

국가는 공포를 은폐하려는 속성이 있고, 언론은 공포를 확산하려는 속성이 있다. 특히 한국 언론'은 1을 100으로 과장해서 치환하려는 버릇이 있다. 왜냐하면 << 공포 조성 >> 만큼 채널을 고정시키는 데 유리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독이 있는 뱀이나 지네를 보게 되면 순간 눈을 떼지 못한 채 예의주시하는 이유는 시선을 딴 데로 분산시킬 경우 갑작스러운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종편 뉴스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공포를 조성하고 판매한다. 언론은 하이에나의 습속을 가진 족속이다. 2009년, 유행성 독감인 신종 플루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260명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매년 계절 독감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평균 2,369명이다.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때려잡자, 메르스 환자 !!!! ” . 메르스 환자는 감기 한번 걸렸다고 불가촉천민이 되어 공공의 적이 되었다. 하지만 표적이 틀렸다. 메르스 환자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우리가 활시위 팽팽하게 당겨서 겨냥해야 될 과녁은 메르스 환자가 아니라 국가와 삼성이다. 국가는 무능했고 삼성은 거만했다.

 

국내 1위가 아닌, 세계 1위를 목표로 삼겠다던 삼성이 메리스의 메이트(mate)였다는 사실은 영화 << 식스 센스 >> 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었다는 서사에 버금가는 반전이었다. 세스코 본사에 바퀴와 쥐가 가장 많이 번식하는 경우라고나 할까 ?  이런 것을 두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 모양이다. 삼성은 기자 회견을 통해서 뚫린 입으로 삼성(의 방역 시스템)이 뚫린 것이 아니라 국가가 뚫린 것이라며 반격을 가했지만, 이 말은 반은 정답이고 반은 오답이었다. 삼성도 뚫리고 국가도 뚫린 것 !  이 사실 앞에서 너도 울고, 나도 울고, 국민 모두 울었다. 삼성 입장에서는 메리스라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작전 본부를 포격한 꼴이니 911 사태 때 비행기가 미 국방부 옥타곤을 포격한 것이나 같은 아,        수라장'이었을 것이다. 모두 중동발 패트리어트 미사일이었다.  

 

세계 1위를 꿈꾸는 엘리트 집단으로서는 자존심에 칼집이 난 상태다. 성은 오징어가 되어서 벌집 모양으로 끓는 물에 감겨 오그라들었다.      이 정도면 명예에 먹물을 뒤집어쓴 꼴이다. 메르스 사태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공포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치사율이 아니라 거대 기업이 국가 권력과 맞짱을 뜨는 태도와 일개 기업 눈치나 보는 국가'다.  ( 삼성의 ) 메르스를 향한 신경질적인 태도는 삼성이라는 권력이 이미 국가 권력을 얕잡아본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는 말만큼 슬픈 말도 없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삼성 때문에 먹고사는 노동자가 몇 명인 줄 아느냐고 묻기 전에 먼저 대한민국 때문에 살아가는 노동자가 몇 명이나 되는 줄 아느냐고 물어야 한다. 삼성이 망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설령, 삼성이 망한다고 해서 국가가 망하면 대한민국은 차라리 망하는 게 낫다. 국가가 한 개의 기업에 의해 흥망이 좌지우지될 처지라면 말이다. 일당 독재 사회'만큼 무서운 것은 일개 기업이 국가를 자지우지하는 것이다. 메르스 사태는 삼성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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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5-06-15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성이 망한다고 해서 국가가 망하면 대한민국은 차라리 망하는 게 낫다. ; 그럴 리가 없으니, 크게 실감되지 않는군요.

포털 기사에 대형 병원에서 메르스 의심 환자의 진료를 거부한다는 데 ; 메르스 확산 방지에 효과가 있을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5 16:41   좋아요 0 | URL
오, 그런가요 ? 전 의료계 세계는 잘모르겠어서 조심스럽긴 한데 이건 직무유기 아닌가요 ? 승차를 거부해도 제재를 받는데 사람 목숨을 가지고 거부를 하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에는 격리 병동이 없나요 ?
궁금한 게 격리 병동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립간 2015-06-15 19:52   좋아요 0 | URL
대부분의 병원에 격리 병동은 없습니다. 메르스와 관련해서는 국가에서 지정한 몇 개의 병원에서 격리 병동을 운용하고 있죠.

진료 거부는 직무유기로 생각하는 의사가 메르스 의심 환자를 진료했다면, 그 순간 이후 환자의 확진이 날 때까지 추가 진료를 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진료를 하지 않는 것이 옳을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5 20:00   좋아요 0 | URL
아, 격리 병동은 원래 없는 것이로군요.

결국은 국립병원에 한해서 격리병동을 운영한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이윤 추구 때문이겠죠 ? 이런 전염병 창궐을 막기 위해 사립 병원이 투자할 리는 없으니 말이죠. 어디서 흘려 들은 이야기인데 한국은 국립병원 수가 굉장히 적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씁니다. 기형적이라고 하더군요.


이 글 읽고 문득 든 생각이 가장 좋은 건 가정 방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원이 많이 딸리겠죠 ?
도의상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왜 거 있잖습니까... 무슨무슨 선서하는 거... 그 정신에 위배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마립간 2015-06-15 21:06   좋아요 0 | URL
제가 생각했던 질문은
메르스와 메르스와 구분 안 되는 감기, 그리고 확진까지의 기간을 고려할 때, 우리 나라 상화에서 몇명 의 일반 내과, 호흡기 내과, 감염 내과 의사가 필요할까요? ; 라고 하려 했는데, 곰곰발 님이 주제를 돌렸네요.

민간 병원의 이윤 추구 맞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제네바 선언)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의사 집단이 인간 사회에 예외적으로 도덕적 인간 집단으로, 선언의 정신에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생계를 건다고 생각지는 않으시겠죠.

이것이 이윤 추구의 시스템 탓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의사 개인의 도덕성으로 돌려야 할까요? (좌파라고 분류되는 사람들도 유독 의료에 관해서만은 시스템보다는 개인의 도덕성을 중요시하더라고요.)

마립간 2015-06-16 07:46   좋아요 0 | URL
시스템보다 개인의 도덕서에 의지하려는 것에 `여성주의`도 있겠군요. 문제의 해결보다 남성(주의)의 도덕성을 비난하는 것으로 감정의 소비에 더 치중했다고 저는 판단하지만.

여성주의 타령은 그만하고 이번 메르스와 관련하여
<링크>와 <과학콘서트>의 `케빈 베이컨 게임: 여섯 다리만 건너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이다`, 그리고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1부 구글 신은 뭐든지 알고 있다 복잡계 네트워크와 데이터 과학`
인문학으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읽지 않으셨다면 한번 읽어보시죠.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6 08:17   좋아요 0 | URL
참고로 저는 의료계 구조를 거의 모르는 관계로 질문에 대한 제 생각은 유보하도록 하겠습니다.




링크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책입니다. 매우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복잡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일단 케빈베이커 게임을 보면 한마디로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라는 거 아닙니까.


+

여성주의는 개인보다는 구조적 문제에 집중된다고 생각됩니다. 남자들이 문제야, 라는 소리는
그냥 뒤따마 담화일 뿐,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것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지적과 시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립간 2015-06-16 10:22   좋아요 0 | URL
곰곰발 님의 `여성주의`에 대한 인식, 저에게 세뇌 당하신 것 아닙니까.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6 10:5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그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