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감독, 샤를리즈 테론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 대한 시시콜콜한 잡담 : 미워도 다시 한 번

 

                                                                                    

                                                                                          막대한 할리우드 자본이 들어간 영화는 일단 제작 단계에서부터 최고의 스텝이 붙는다. 시나리오를 담당하는 글쟁이도 마찬가지다. 시나리오 작가를 " 스토리 입말 " 에만 정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들은 영화뿐만 아니라 당대에 대한 유행에 민감하고 텍스트를 풍부하게 만드는 문학과 상징 해석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직업군이며, 또한 갖추고 있어야 일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영화만 가지고 승부를 하는 시대는 지났다. 여러 방면의 수용자에게 지적 만족을 주기 위해서는 다양한 요소를 첨부해야 한다. 기획 상품이란 그런 것이다. 영화 <<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 는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꾸민 티가 역력한 영화다.

이 영화는 프로이트 이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하고,     페미니즘 이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영화. 감독은 두 가지 길을 열어놓았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두고 페미니즘 영화이냐, 아니냐며 싸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텍스트 수용자는 평소 자신의 입장에 유리한 쪽으로 선택하면 된다. 모르는 쪽보다 아는 쪽에 대해 말하는 게 유리하니 말이다. 이 영화를 << 거대한 남근 >> 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 원초적 자궁 >> 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일단 전투 트럭은 기니까 ! 프로이트 식 귀납법에 의하면 ㉠ 원숭이 똥구멍은 빨갛다 - ㉡ 사과도 빨갛다 - ㉢ 사과는 맛있다 - ㉣ 바나나도 맛있다 - ㉤ 바나나는 길다 - ㉥ 길면.......        남근 男根 이네요. 헤헤헤.  결론은 기승전- 근()인 셈이다

프로이트 범성론'이란  :  < ㉠ - 목록 > 에 아무리 쌈박한 오브제를 놓아도 < ㉥ - 목록 > 에 가서는 페니스가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러분이 봐도 기가 찰 노릇이니, 시대의 거성 들뢰즈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 앙띠 오이디푸스 >>에서 이렇게 말했다 " 꿈에 막대기가 나오면 무조건 페니스라고 말해. 안 그러면 따귀를 맞을 테니깐 ! ” 프로이트 식 해석에 의하면 8기통 엔진 두 개짜리 전투 트럭은 남근이다. 더군다나 긴 몸통 끝에 달린 둥근 유류 탱크는 불알이다. 하나 더 달렸다면 완벽한 남근이 될 터인데, 프로덕션 디자이너 입장에서 보면 너무 노골적은 디자인이라 망설였을 것이다. 지나치게 또렷한 상징'만큼 촌스러운 은유는 없으니까.

퓨리오사를 비롯한 일행은 거대한 남근을 탈취하여 약속의 땅으로 향한다는 이야기. 강유정 평론가는 우유를 싣고 달린다는 점을 들어 " 전투 트럭을 부푼 배(임신한) 와 거대 자궁에 대한 은유 " 라는 해석이 가능하다면, 같은 이유로 전투 트럭이 거대하고 딱딱한 페니스라는 점을 들어 우유가 아니라 정액이라고 우겨도 될 것 같다. 부푼 배라는 해석이나 우유가 아니라 정액이라는 해석이나 도 긴 개 긴'이지 않은가.  해석에 정답은 없다. 그저 그럴싸한 해석만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전투 트럭은 싱싱한 정자가 가득 담긴 페니스-기계. 프로이트가 말하는 << 남근 >> 은 곧 << 권력 >> 을 뜻하니, 거대 남근을 장악한 쪽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셈이다. 그들은 거대 남근 기계를 이끌고 가스타운'에 무혈입성한다.

거대 남근은 곧 반지의 제왕이요, 왕관인 셈이다. 그런데 꿀과 젖이 흐르는 거스타운을 << 자궁 >> 으로 해석해서 그럴싸한 해석이 나온다. 프로이트 이론은 아버지가 중심이 된 오이디푸스 세계이다. 모든 것은 남근이 있는가, 없는가, 남근을 욕망하는가, 욕망하지 않는가에 달렸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여자는 페니스가 없는 존재. 그렇기에 프로이트는 여자를 당최 해석이 불가능한 < nothing > 으로 정의한 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 에라이, 몰것다. ! " 내가 이 영화에서 주목한 점은 등장인물들이 구호처럼 외친 '우리는 물건이 아니다 We are not things.'라는 대사였다. 영화 속 여성들은 프로이트가 여성을 정의하면서 내린 < nothing > < not thing > 으로 분류한 것이다.

이 태도는 여성은 < nothing > 이 아니라 < not  thing > 이라는 선언이다. 그것은 오이디푸스 아버지 세계를 향한 빅엿 이었다. 이성복 시인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어 ! ” 오이디푸스적 남근과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 바로 << 코라 >> . 코라는 원초적 어머니의 세계로 거대한 자궁을 뜻한다. 이 영화에서 자궁은 거스타운이라는 동굴이다. 이 동굴에서 (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이 영화 속 거스타운은 동굴이다 ) 워보이들이 양육된다. 그들 외형이 머리털이 자라지 않고 창백하다는 점에서 탯줄에 매달린 태아'이다. 이곳은 자궁이다.  가스타운을 원초적 자궁'이라고 본다면 퓨리오사가 탈출을 시도하면서 겪게 되는 관문,  모래 폭풍은 질 구멍과 자궁목 사이에 위치한 여성의 생식 통로이다.

음문을 통과해야지만 약속의 땅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약속의 땅은 이미 황무지가 된 지 오래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돌아왔던 코라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곳이 바로 약속의 땅인 셈이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 귀태 >> 라는 말은 이 영화 설정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작명의 달인, 프로이트는 이 욕망을 자궁 환상 이라고 명명했다. 월한 프로이트 할아버지 !   이렇듯 이 영화는 남근적 상징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원초적 자궁으로 설명할 수도 있는 재미있는 영화. 또한 모래 폭풍 통과 장면을 관문(음문)을 통과해야지만 어른의 세계(약속의 땅)에 진입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퓨리오사의 성장 영화'로 읽을 수도 있다.

​교조주의자 정성일은 영화를 가지고 인문학적 소양을 뽐내지 말라며 사이비 영화평론가를 비판했는데, 그에게 되묻고 싶다. 당신이야말로 영화를 가지고 인문학적 소양을 뽐내는 대표적 평론가라고 말이다. 한국 영화를 말하면서 맥락과는 별 상관없이 프루동, 바쿠닌, 조르주 소렐을 호명하는 태도야말로 영화를 가지고 인문학적 소양을 뽐내는 대표적 평론가의 태도가 아닐까 ? 영화를 영화라는 장르 안에서만 소비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독선이다. 정성일의 저 태도가 옳다면 고다르 감독도 비판받아야 한다. 그는 영화를 만들면서 온갖 문학적 재료'를 끌어왔으니깐 말이다. 롤랑 바르트를 인용하자면 저자는 죽었다. 텍스트는 온전히 수용자의 몫이다. 수용자가 북을 치든 장구를 치든 상관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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