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누구 없소  :



갑동이, 거기 없는 남자






















                                                                                                   아토피라는 피부병 때문에 알려진 아토피아(atopia)는 그리스어로 " 이상한... " , " 기묘한... " , " 원인을 알 수 없는... " 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a - > 가 부정과 결여를 뜻하는 접두사이고 < topia > 가 장소를 뜻하는 단어이기에 비장소성 혹은 탈장소'라고 번역되지만 매끄러운 조합은 아닌 것 같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아토포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토피아가 아토포스의 명사형이니 같은 뜻이라고 하면 그들이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이상하고, 기묘하며, 수수께끼 같은 남자였던 모양이다. 비장소성'이라는 딱딱한 번역투를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 지금 여기 없는 " 이다. < 지금 여기 없다 > 는 것은 < 현장 부재 증명 > 과 같은 뜻이다. 우리가 범죄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사용하는 알리바이의 뜻이 현장 부재 증명이라는 의미'다. 라틴어 alius(다른) 과 ibi(거기)가 결합한 구조로 아토포스와 알리바이는 서로 연관이 깊다. 형사가 용의자에게 요구하는 알리바이는 곧 타소 증명인 것이다.

현장 부재 증명은 타소 존재 증명이니까. 드라마 << 갑동이 >> 에서는 오래 전 화성 연쇄 살인범을 신이자 영웅으로 생각하는 백만장자 사이코패스(이준 분)가 주인공인데 그가 신이자 영웅으로 생각하는 화성 연쇄 살인범은 아토포스'다. 지금 여기 없다는 것은 비가시성을 전제로 한다. 여기 없으니 그를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백만장자 사이코패스에게 화성 연쇄 살인범의 원형은 이상하며, 기묘하고, 알 수 없는 존재이면서 신비한 존재'다. 신은 스스로 보이지 않는 존재이자 우리가 볼 수 없는 존재다.

신이란 항상 여기(가시성)가 아닌 저기(비가시성)의 세계에 존재하기에 알리바이가 없는 자'다. 그렇기에 신은 이상하며, 기묘하고, 알 수 없으며, 신비한 존재'다. 드라마에서 백만장자 사이코패스가 갑동이를 신이자 영웅이라고 고백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게도 갑동이는 신이었다. 드라마가 훌륭하다는 말은 아니다. 드라마는 13회를 기점으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몰락한다. 추리 소설은 나는 여기(사건 현장)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용의자와 너는 여기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탐정(or 형사)이 겨루는 장르다.

살인범은 여기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거짓(말)을 꾸미고 탐정은 사건 당시 여기에서 벗어난 거기에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사람이다. < 여기와 거기 > 의 충돌이 추리소설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인 셈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하는 대상이야말로 아토포스라고 말했는데 곰곰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사랑은 장소애'에 다름 아니다. 사랑을 추억한다는 것은 그와 함께 했던 장소를 추억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이별 후에 홀로 다시 찾은 그 카페에서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 사랑하는 그가 지금은 여기 없음 " 이다. 백만장자 사이코패스가 숭배하는 대상과 롤랑 바르트가 사랑하는 대상은 모두 아토포스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나는 종종 술에 취하면 혜어진 여자와 자주 갔던 혜화동에 있는 << 도어즈 >> 라는 술집을 찾는다. 예고 없이 자주 문을 닫는 곳이어서 늦은 밤, 그곳을 찾는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인 셈이다. 몇 번은 성공했고, 몇 번은 실패했다. 병맥주와 강냉이를 파는 소박한 술집이다. 갈 때마다, 나는 느낀다. 사랑하는 그녀가 지금 여기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여기에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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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8-0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동이를 안 봐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욤^^;;

그나저나 아토피가 저런 의미였다니, 재밌네요..ㅎㅎ

항상 시간과 장소는 쌍으로 다니죠. 그래서 이런 걸 파괴하는 조어가 새롭고 먼가 있는 거 같습니다. ㅎ `지금 거기에 있는 나` 라는 타이틀의 작품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가 아니라 `거기`에 있답니다. 타이틀에 혹해 보았는데, 평타 이상은 하더군요. 타이틀 하나는 정말 잘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아, 덥네요. 디질거 같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8 15:03   좋아요 0 | URL
낮에 더운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밤에 잠이나 잘 정도의 더위였으면 좋겠으나
더럽게 덥군요. 요즘 거의 잠을 못자고 있습니다..

유명한 멜로 영화나 로코 영화 보면 장소가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습니까.
로마의 휴일도 그렇고 티파니에서의 아침을도 그렇고..

나와같다면 2016-08-08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u toppos
아무곳에도 없는 당신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8 16:11   좋아요 0 | URL
참.. 신기하죠. 이상적인 존재는 다 없다는 것.
유토피아도 결국은 아토피아죠...

stella.K 2016-08-08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발님, 지금 라디오 <세상의 모든 음악>에서
양준모의 `내 영혼 바람되어`가 끝났는데 왠지
곰발님 오늘 글과 묘한 배치가 되는 것 같아서요...
기회되시면 함 들어보세요. 좀 슬퍼요.
예전에 세월호 참사 때 이 노래 많이 나왔었는데...ㅠㅋ .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9 10:08   좋아요 0 | URL
들었씁니다. 가사가 정말 오묘하군요.

이 가사가 911 때 추모 글이었다고 하네요. 찾아보니...
거기에 한국인이 곡을 붙였고...

그런 사연이 있는 노래군요...

임모르텔 2017-10-2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토피를 한때 앓았는데 ,, 피가 탁해지면 그렇더군요. 폐가 나빠져서 ,,,
제가 다 완치 시켰죠.. 6개월간 사혈침으로 피를 빼서! ^^

곰곰생각하는발 2017-10-25 12:44   좋아요 0 | URL
올빼미 님은 동양의 고수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

임모르텔 2017-10-25 19:57   좋아요 0 | URL
ㅋ..;; 호기심이 많아서 , 탈많은 제 심신을 가지고 많이 실험해봐서 어쩌다가 노하우가 생겼어요.
아토피는 사실 ‘폐병‘이거든요. 피부병이 아니구요. 그리고 참 ,, 닉네임이 인디언이름같아서 좋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0-26 10:55   좋아요 0 | URL
오 마자요. 제 닉네임은 인디언식 작명 흉내 냈습니다..

그나저나 아토피가 폐와 관련이 있군요. 몰랐습니다...
 

 

 

 

 

 

 

 

 

 

 

 

 

 

 

 

 

 

 




                       

 

건 강 한  고 립  :

 

 

 

 

생 강

 




 


 



                                                                                                    날이 너무 더워서 시원한 카페에 가서 책을 읽으려고 주변을 정리하다가 설핏 이웃 글을 읽게 되었다. 읽을 생각은 없었다. 노트북 전원을 끄기 전에 잠시 훑어보고는 카페 가서 읽어야 겠다는 마음이었다. 꽤 긴 글이었기에 한두 줄 읽다가 내릴 계획이었으나 그만 앉은 자리에서 땀 뻘뻘 흘리며 읽어 내려갔다. 교양을 뽐내려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설득하기 위한 글도 아닌, 담담한 고백이었는데 울림이 컸다. 생강처럼 아렸다. 내가 이런 글을 써본 지가........  아니, 없는 것 같다. 문득, 내가 < 생강 > 이란 단어를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늘이나 생강이나 마찬가지이나 생강은 보다 특별하다.

독(毒)이 있는 것을 사랑했다. 내가 짝사랑했던 대상은 모두 독을 품은 것이었다. 독거미나 독사를 볼 때마다 그 아름다움에 현혹되었다. 사람들은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가 사랑이라고 말했지만 내 눈에는 상처를 주는 대상이야말로 사랑하는 존재였다. 생강에는 그런 맛이 있다. 그것은 독의 맛이다. 씹으면 통증과 마비를 일으킨다. 어느 것은 꿀과 즙으로 대상을 유혹하지만 생강은 그 어느 누구도 유혹하지 않는다. 아픈 것투성이'다. 김신용, 이연주 그리고 최승자의 시가 그렇다.



Y를 위하여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한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들어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 몸,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 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최승자의 위악(僞惡)을 볼 때마다 자신의 온몸을 통증으로 감싼 생강이 생각난다. 생강은 전체가 고름이 흐르는 종양'이다. 그가 << y를 위하여 >> 라는 시에서 " 오 개새끼 / 못 잊어 ! " 라고 말할 때 아름다운 꽃과 향기로운 즙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는 다른, 가시와 독으로 얽힌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최승자는 살기 위해서 스스로 독을 생성한다. 너가 나를 버릴 때 오는 통증을 견디기 위해 시인은 내가 나를 버린다( 너는 날 버렸지, / 이젠 헤어지자고 / 너는 날 버렸지, /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 나는 날 버렸지 ). 썩지 않기 위해 먼저 부패하는 녹슨 철근처럼 통증을 잊기 위해 통증으로 대응한다. 이 자학은 학대라기보다는 생존에 가깝다.

문장이란 참......          신기하다.  한갓, 글자를 배열하고 조합한 것에 불과할 뿐인데 이 순열(殉烈)에서 온갖 번뇌와 희노애락을 느끼게 되다니. 어떤 조합은 탐미적 문장을 생산하고 어떤 조합은 통증의 문장을 만들어 낸다. 장 그르니에가 전자에 속한다면 다자이 오사무는 후자에 속할 것이다. 김현은 << 행복한 책읽기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것을 그르니에의 에세를 읽다가 다시 읽게 되었다. 그의 글을 왜 좋아하는 척하는 것일까 ?  깊이도 고통도 없는 글들을 ( 행복한 책읽기, 1988. 2.20 ) "  생강 같은 글이 좋다. 생강은 다짐한다. 내 몸 전체가 거대한 종양덩어리로 퍼져나간다 해도 들짐승에게는 결코 먹히지는 않겠다는 고집.  최승자 시인을 비유의 방식으로 호명하자면 그녀(의 시)는 < 생강 > 이다.

 

비단 독하다는 의미에서 고른 어휘는 아니다. 생강은 한센병 환자의 그것처럼,  종양은 자가 증식한다. 생강은 나비나 벌에 의지하지 않으며 달콤한 즙을 즐기는 들짐승의 도움도 거절한다.  독자적인 생이다. 부정을 통해서 긍정에 다다른다는 점에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생이다. 생강은 건강한 고립을 선택한다. 최승자의 시적 화자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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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07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강의 매운 맛을 좋아합니다. 제가 몸이 냉한 체질이라서 겨울에 생강차를 많이 마셔요. 그런데 생강 사탕은 별로... 맛이 없어요...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7 15:11   좋아요 0 | URL
생강 좋아하신다니 생강 같은 문장도 좋아하시겠습니다ㅡ그려.. ㅎㅎ
여긴 무지 더운데 덥다 하면 대구인데 그쪽은 더 덥겠습니다 ?

cyrus 2016-08-07 15:18   좋아요 0 | URL
‘대프리카’라는 별명답게 날씨가 미쳤습니다. 마치 열대지방 날씨 같아요. 엄청 덥다가, 갑자기 폭우가 쏟아 붓고, 다시 그치고, 또 더워지고... 구름이 좀 많다 싶으면 우산 챙겨서 외출해야 됩니다.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7 15:27   좋아요 0 | URL
서울은 거리에 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설날 연휴 같은 느낌..

2016-08-07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7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6-08-07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오늘 저녁 해지기 전에 대프리카 어느 뒷산에서 최승자 시인의 시집 하나 가지고 가서 읽고 내려 올께요. 생강같은 땀이 알싸하게 흘러 내릴듯 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7 17:27   좋아요 0 | URL
알싸하게 흘러내리면 피부가 따가울 텐데요..ㅎㅎ

stella.K 2016-08-07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을 통해서도 글쓴 사람의 성향이나 느낌도 전달이 되잖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8 10:21   좋아요 0 | URL
오늘도 덥군요.. 이놈의 날씨는 사막 날씨보다 더 나쁜 듯.
문장을 보면 확실히 글 쓴 사람의 성격이 보이다가도
또 어느 때는 글 스타일이 그 사람 성격과는 전혀 다른 경우도 있더군요..

samadhi(眞我) 2016-08-07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게 사랑이니까요. 바른생활 하는 사람들이 연애대상으로는 영 별로인 것과 닿을 듯해요.
얼마 전 ˝재미없는˝ 성격인 조카녀석이 도서관에서 마주치는 여자애가 자기에게 자꾸 눈빛을 보내는 것 같다고 하여 ˝절대˝착각^^이라고 해주었습니다. 게다가 미인이라고 하니 더욱 의심이 가더군요. 직접 물어보고 확실하게 아니라는 답을 들었답니다. 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8 10:22   좋아요 0 | URL
원래 남성들이 착각을 자주 합니다. 여자는 거울을 보면 자학을 하고
남자는 거울을 보면 자기애에 빠지고..
가부장 문화가 만든 남자 제일주의가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들죠..

기억의집 2016-08-08 19:33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진아님 댓글 읽으니.. 울 남편이 맨날 자기 좋아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 술 먹고 와선 술주정처럼 하는 말 생각나네요. 그러면서 저 보고 살 빼라고...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9 10:09   좋아요 0 | URL
남자들 레퍼토리는 늘 똑같아요. 왕년에 여자들에게 인기 없었던 인간 나와보라고 해보세요.
나 빼고 다 나올 거입니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











귄의 정체








                                                              

                                                                                                   그리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 아토포스 " 라고 불렀다. < a > 가 부정과 결여를 지시하는 접두사이고 < topos > 가 장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토포스는 빗금 친 < 장소 > 이다.

내가 아토포스를 < 빗금 친 장소 > 라고 말하는 데에는 < 비장소성 >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가 끌어들인 개념인 " 비장소성(non-place) "과 겹치기 때문이다. 거기라는 대명사가 특정한 곳을 지시하는 지시 대명사라고 했을 때 " 아토포스로서의 소크라테스 " 를 알기 쉽게 번역하자면 " 거기에 없는 남자 " 라는 의미'이다.  장소가 고정된 로컬리티'라는 고정점(fixed point)을 감안하면 소크라테스는 출생지를 알 수 없는1 남자'이다. 또한,  알리바이'가 alius ( 다른 ) + ibi ( 거기에 ) 를 합친 것으로 " 다른 + 장소에 " 라는 뜻이기에 그는 " 지금 여기에 없는 " 존재로 현장 부재 증명에 실패한 존재'다. 그는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기에 특정 장소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다. 그가 집이 아닌 거리(광장)의 철학자인 이유이다. 원더우먼도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아토포스이다.

 

그녀는 출생지가 없다. 그래서 옛날 드라마인 << 원더우먼 >> 주제가는 이렇게 묻는다. " 하늘에서 내려왔나, 원더우먼 ? " 이라거나 " 땅에서 솟아났나, 원더우먼 ? " 크레타 사람은 크레타 섬'이라는 로컬리티의 성격을 닮고,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 지역의 성격을 닮기 마련이어서 사람들은 출생지로 그 사람의 성향을 지레짐작할 수 있는 단서로 활용하곤 했는데 소크라테스와 원더우먼에게는 그러한 향토성이 없다. 아토포스는 시각적 장소(place)가 아니라 비시각적 공간인 間 : 사이 간'과 空 : 빌 공 그리고 無 : 없을 무의 세계이다.

 

서양화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고 동양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여백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아토포스는 동양적 시각이다. 아토포스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딱히 설명할 수 없다. 기표는 있으나 기의는 불가능한 세계가 바로 아토포스'다. 롤랑 바르트가 << 사랑의 단상 >> 에서 아토포스를 "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매혹시키는 " 존재라고 말한 이유는 보이지 않기에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대상이기에 그렇다. 하느님이야말로 완벽한 아토포스이다. 그는 비가시적 영역이며 촉각이 배제된 대상이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몸을 만진다는 것은 불경하다. 그는 보이지 않음으로써 절대미를 구현한 존재'이다.

남도 방언 중에 < 귄 > 이라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표준 국어 사전에는 없는 단어이다. 흔히 " 잘생긴 얼굴인데 쟤는 귄이 없어 ! " 라고 쓰인다.  < 귄 > 이라는 기표의 기의를 < 귀염성 > 이라고 정의를 내리곤 하지만 귄을 표준의 세계로 확정하는 순간 더욱 불분명해지는 단어다. 귄은 귀염, 매력, 귀태, 예쁨 따위와도 일정한 거리를 둔다. 귄은 선명한 기의가 생기는 순간 기의가 불투명해지게 된다.  딱 한 가지로 정의내리는 순간 무너진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 귄 있는 얼굴 " 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추남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을 보면 " 생긴 건 저래도 귄 있는 얼굴 " 인 셈이다. 이렇듯 < 귄 > 는 무조건 아름다움을 찬양하지 않으며 무턱대고 추를 업신여기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새로운 미학의 민주주의적 상상인 셈이다. 귄은 한 가지로 고정된 기의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니 기표인 < 귄 > 은 존재하지만 기의는 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를 닮았다. 아토포스의 다른 이름은 귄'이다








​                                                      

1) 아토피아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태어난 사람이지만 탈-아테네적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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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8-04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귄˝ 이 거 배웠네요..설명이 찰지게 와닿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4 12:33   좋아요 1 | URL
저도 귄이라는 정체에 대해 오지게 한수 배웠습니다..

stella.K 2016-08-04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더운 여름에도 어떻게 그렇게 글을 잘 쓰시죠?ㅋ

전 전에 곰발님 걸어 놓으신 사진 봤잖아요.
솔직히 잘 생기신 것 같진 않지만 뭔가 의미있게는 생기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랐는데 오늘 비로소 한 자로 설명이 가능해졌습니다.
귄! 생긴 건 그렇게 생기셨어도...ㅋㅋ 3=33=3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4 13:22   좋아요 0 | URL
귄은 극찬입니다.. 감사.
인간은 못생기더라고 의미 있게 생겨야 합니디ㅏ..


제 글은 거의 100% 저녁에 써 둔 글입니다.
저장해두었다가 아침에 옮기는 형식..

지금행복하자 2016-08-04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귄있는 사람이 되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5 13:09   좋아요 0 | URL
귄은 타고나야 합니다.. 저는 다음 생을 기대해야 겠습니다..

samadhi(眞我) 2016-08-04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긘 있는 얼굴의 대표적인 예가 유해진 같은 얼굴이랄 수 있지요. 우리는(남도 사람들) 주로 긘을 ˝호감 있는˝ ˝자꾸만 눈이 가는˝ 그래서 ˝또 보고 싶은˝ 그런 느낌을 말합니다. 제겐 너무 익숙한 말을 새롭게 학습(?)하시는 분들이 반갑네요. 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5 13:11   좋아요 0 | URL
자꾸 보니 정 들더군요. 처음 봤을 때는 좀 심하게 못생겼다 생각했는데

귄.. 이란는 단어가 무척 생경스럽게 독특합니디ㅏ.. 매력적인 단어인 것 같습니다..

 

 

 

 

               

술만 먹고 가지요 :

29,900원의 정치경제학





                                                                                                     유니클로 철학의 핵심은 19,900원이다. 최저가 상품인 19,900원이라는 미끼 상품은 소비자를 매장으로 끌어모으고 장렬히 전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씨알 굵은 장작을 피우기 위해 잔가지가 불쏘시개로 쓰이는 이치와 같다. 원래 미끼 상품은 남는 게 없는 장사에 속하지만 소비자를 유혹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장사꾼 입장에서 보면 19,900원짜리 경제학은 극장에서 파는 영화표나 구멍가게에서 파는 담배와 비슷하다.  19,900원(짜리 유니클로),  영화표,  담배 따위는 매장에 진열된 다른 상품을 사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담당한 상품이다.  담배를 사면서 습관적으로 음료수나 껌을 사듯이 말이다. " 19,900원 " 이라는 표현이 소비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음, 이다.  " 우주 최강 최저가 " 라는 자신감과 함께 이래도 흥정할 테냐 _ 라는 볼멘소리로도 읽힌다. 푼돈 경제학이라는 점에서 19,900원과 29,900원은 같은 의미이며,  29,900원과 39,900원, 49,900원, 99,900원도 맥락은 동일한 상품이다.

- 990원으로 끝나거나 - 9900원, - 99,900원'으로 끝나는 모든 상품은 장사꾼이 소비자의 주머니 걱정을 하며 밑지지만 팔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절대 - 99,000원으로 떨어지는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명품을 새롭게 정의 내리자면 가격의 끝자리가 - 9,900원 따위로 마무리되지 않는 상품을 의미한다. 명품은 - 0,000,000원의 세계이다. 잔돈으로 끝나는 가격은 명품의 품격이 아니다. 루이비통 가방 가격이 아무리 비싸더라도 19,999,900원이라면그 가방은 명품이 아니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 999는 서민적인 숫자 조합이며 배열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 은하철도 999 >> 에서 9열차가 999호인 이유는 999호 열차가 서민 욕망을 드러내는 장치라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푼돈을 경멸하는 집단인 경총이 최저 시급을 놓고 100원 단위로 깎네 마네 하는 모습을 보면 아이러니한 풍경이다.

유니클로 철학의 핵심이 19,900원이라면, 김영란법의 핵심은 29,900원이다. 공무원, 교직원, 언론인이 이 법망을 피하기 위해서는 29,900원짜리 상품을 소비해야 한다.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지적이다. 삼겹살 2인분에 맥주 몇 병만 시켜도 30,000원은 거뜬히 나온다며 김영란법은 책상머리에서 짜낸 엉터리'라고 연일 쏘아붙이고 있다. 당장 민주당 우상호 의원이 접대비를 30,000원에서 50,000원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상황이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김영란 씨를 잘 모르는 모양이다. 김영란법의 핵심은 30,000원으로 삽결살에 소주를 마실 수 있느냐가 아니다.

▶  얻어먹는 것이 일상이 된 기자가 보기에 김영란법은 해괴하다. 특히 조선일보 기자들이 보기에는 더욱 그렇다. 제목이 << 한우의 한숨 굴비의 비명 >> 인데 행간을 들여다보면 한숨과 비명은 모두 기자들이 내뱉은 장탄식이다. 대한민국이 접대 때문에 경제가 돌아가는 국가'라면 그런 나라는 차라리 망하는 게 낫다. 물론 김영란법으로 인해 울상을 짓는 이도 있겠지만,  그들 때문에 김영란법을 다시 원점에서 검토해야 한다면 그것은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꼴과 같다. 김영란법과 관련된 기사를 볼 때마다 언론의 발광과 호들갑을 목격하게 된다. 기자들의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으니 애궂은 교사나 농어민 그리고 상인을 들먹이며 대대적으로 김영란 씨에게 십자포화를 때리는 모양새다. 적당히 해라.


29,900원의 정치경제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접대라는 관행을 뿌리뽑자는 것이다. 접대가 업무의 연장이라면 " 낮에 커피숍에서 만나면 되는 것이지,  밤에 술 마시며 서로 도원결의하며 밤문화를 양산하느냐 ? " 는 것이 김영란 씨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인 것이다. 00,000,000의 계급을 선망한 나머지 99,999,900의 세계를 개돼지라고 해서 물의를 일으켰던 나향욱 사태'도 물밑으로 접근해서 바라보면 접대라는 관행이 만들어낸 참사'다. 이날 교육부에서 경향신문 기자 두 명을 접대하기 위해 사용된 접대비는 39만 원이다. 저녁 밥값만 1인당 8만 원짜리 요리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경향신문 기자 - 들은 정의감에 불타서 구의역 하청 노동자의 1000원짜리 컵라면을 이야기하며

정의 사회 구현을 외쳤지만 8만 원짜리 식사를 대접받는 것에 대한 문제 의식에는 둔감한 모양이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가 남이 하면 불륜인 셈이다. 기자는 접대(받기)의 왕이다. 접대를 받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이제는 대접(간장 종지 사건) 가지고도 딴지를 걸며 기사를 송출하는 사태도 발생하게 된다. 얻어먹는 주제에 비용이 많네 적네 라고 떠드는 것 자체가 볼썽사납다.  비용이 술 마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면 술 대신 차를 마시면 될 것이고,  3만 원짜리 술상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각자 추렴해서 더 좋은 식당에 가면 그만이다. 얼마나 간단한가. 공짜 술은 작작 마셔라. 주당인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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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8-03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사주는 걸 받아 먹고 살았던 권력이 연일 심술 부리더군요. 아무래도 지돈 내고 먹으려니 배아리 틀렸나? 싶었습니다. 권력의 구분은 그동안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자리냐..주는 자리냐로 나눴던가 봅니다.....ㄷㄷㄷㄷ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3 09:27   좋아요 1 | URL
아니 각자 돈 내고 마시면, 청탁이 오고가는 자리의 주범인 술자리도 줄어들 테고.. 건강해지고 얼마나 좋습니까. 미친놈들 공짜술 마시면서 이 돈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냐. 이런 소리나 하고 앉았으니.. 참..... 총체적 난국입니다.. 농어민 걱정하는 놈들이 그래 한미에프티에이 적극 지지하고 그르냐...

기억의집 2016-08-03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옳은 말씀. 우상호란 사람 이상하대요. 접대 못 받아 환장한 놈 같아요. 민주당에 쓰레기같은 것들이 이런 놈들 아닐까 싶습니다. 접대의 관행을 끊자는 건데 뭘 그리 오만원이네 십만원이네 이 지랄 거리는 건지.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3 09:54   좋아요 0 | URL
접대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영란법에서 정한 30000원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10000원으로 해야 함. 까놓고 업무로 만나더라도 각자 자기 돈 내고 먹자는 게 김영란법의 핵심이며. 자기돈 내면 접대 자리 참석하는 회수 줄어들고 그러면 술자리에서 성희롱했네마네 이런 것도 사라질 것이고. 술자리에서 오고가는 청탁 이런 것도 줄어들 것 아닙니까. 얼마나 좋은 법입니까.

우상호 저 인간 5.18 전날 광주 내려가서 룸살롱에서 술마셔서 문제가 되었던 인간 아닙니까... 싹수가 노른 거죠..

시이소오 2016-08-0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우의 한숨, ㅋ 이 거지가튼 기레기들 때문에 한숨작렬이네용.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3 09:56   좋아요 0 | URL
기자의 한숨이라고 쓰기는 거시기 하니까 한우의 한숨이라고..
아니 시발놈들.. 한우를 이렇게 공짜 좋아하는 파렴치범으로 모나요.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오늘 김영란법과 관련된 교사들의 한숨. 어쩌구 하는 기사 보며 어이가없더군요..
교사의 한숨, 한우의 한숨... 이런 제목은 전부 기자의 한숨으로 바꿔야 합니다.

시이소오 2016-08-03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란법 물고 늘어지는 것들 죄다 거지새끼죠 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3 10:05   좋아요 0 | URL
거지근성이죠. 평소 자기 돈 내고 먹은 사람이라면 혼란, 당혹,패닉 따위는 없을 겁니다.
얼마나 공짜로 쳐먹었으면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울까.... 궁금합니다..

지금행복하자 2016-08-03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우랑 굴비는 뭔 죄로..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3 10:25   좋아요 0 | URL
만만하잖습니까. 말을 못하니...

stella.K 2016-08-03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란법이 제대로만 시행된다면 국가신용도도 올라갈 걸로 기대됩니다.
원래 뭔가 새로운 걸 시작하면 반대하는 사람 꼭 있잖아요.
김영란이란 사람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지더군요.
이것이 추진되기까지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하구요.

김영란도 김영란이지만 전 필리핀 대통령도 궁금하더군요.
도대체 무슨 카리스마로 자수하는 사람이 속출하는 걸까?
이 카리스마 계속 갈 건가? 그런데 국민을 공포로 몰아가는 것도 있죠?
원래 사랑과 정의가 같이 가면 좋을 텐데 그러기는 쉽지 않고...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4 09:59   좋아요 0 | URL
독일에서는 수고한다고 관공서 직원에게 요구르트 하나만 줘도 뇌물죄로 걸린다고 합니다.
이 정도의 엄격함을 가지고 있어야죠.
이런 판국에 미친 새끼들이 3만 원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냐고 그런 소리나 하고 있으니...
확실히 한국 사회는 김영란법을 두고 언론의 호들갑을 보면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언론은 미개합니다..
 
행복한 책읽기 - 김현 일기 1986~1989, 개정판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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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살 아   있다 :

 

 

 

종생기(終生記)

 

 

이 글은 반드시 이 음악과 함께 들을 것

 

 

 

 

                                                                                        김현의 << 행복한 책읽기 >> 를 다시 읽었다. 다시 읽긴 했으나 오래 전에 읽은 책이어서 처음 읽은 것처럼 새롭다. 책을 읽는 내내 롤랑 바르트의 << 애도 일기 >> 가 떠올랐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하는 마망(엄마)이 죽자 비탄에 빠져 어머니를 추억하며 메모를 남기기 시작한다. 그 텍스트가 << 애도 일기 >> 하지만 롤랑 바르트의 애도는 실패로 끝난다.  정확히 말하자면 << 우울한 일기 >> 라는 제목이 정당할 것이다. 애도란 죽은 자를 내 품에서 떠나보내는 제의'다.  죽음을 슬퍼하고 죽은 자를 추모함으로써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도리를 지키려는 마음이 애도 행위'이다. 반면,  우울은 애도 행위'가 실패하게 될 때 발생하게 되는데,  사랑하는 이가 내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게 된다. 우울한 마음 속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있다. 롤랑 바르트는 죽은 어머니를 애도하기 위해 일기를 썼지만  결국 그는 떠난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서 죽는다. 자살인 셈이다. 이 죽음은 주저흔과 흉터를 남기지 않은,  결벽에 가까운 깨끗한 자결이다. << 애도 일기 >> 가 롤랑 바르트와 어머니의 이별을 다뤘다면 << 행복한 책읽기 >> 는 김현과 문학의 결별을 다루는데,  전자가 애착 대상과의 분리'에 실패한 일기라면  후자는 죽음을 앞둔 남자가 일생을 바쳐 사랑했던 문학과 결별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을 담았다. " 행복한 ㅡ " 이라는 표현에는 산 자(문학)보다 먼저 떠나야 하는 죽은 자(독자)의 미안함이 담겨 있어서 이 책은 예의바른 유서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는 198966일 일기에서 기형도의 누이와 몇몇 지인들과 술을 마신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쓴다. “ 그러나 어떻든 젊은 시인은 죽었고 우리는 살아 남아 그를 이야기한다. 죽음만이 어떤 사람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해도 괜찮게 만들어준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 ” 당대의 문학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김현에게도 생존한 작가의 작품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칭찬은 하되 상찬은 아낀다. 기껏해야 “ ...... 읽을 만하다 거나 “ ....... 흥미롭다 정도가 그가 작품을 대하는 표현 수위이다. 요즘 평론가처럼  경박하게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 거나 천박하게 과연 이 작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 ”

따위의 수위를 넘는 표현을 볼 때마다 담백하면서도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김현의 비평이 그립다. 어쩌면 사람들이 신형철을 두고 " 제2의 김현 "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망자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싶다. 김현은 1989년 4월 9일 일기에서 장석주를 비판하는데, 그가 오래 살아서 신형철의 비평 - 들'을 읽었다면 김현이 장석주에게 했듯이 신형철에게도 똑같은 충고를 했을 것이다.    

 

 

시평은 문체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감탄보다는 미문에 더 의존하고 있다. 잘못하면 기술자가 되겠다. 조심해야 될 단계이다. 더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더 고통해야 하는데,   그의 고통은 자꾸만 제스처로 느껴진다.

 

 

내 눈에는 신형철이 즐겨 사용하는 " 몰락 - 이미지 " 가 자꾸만 고통을 과장하거나 고통을 가장한,  통각을 느낄 수 없는 제스처로만 느껴진다. 김현의 말을 빌리자면 신형철은 " 기술자 " 다.  19891212일 마지막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12.12

새벽에 형광등 밑에서 거울을 본다 수척하다 나는 놀란다

얼른 침대로 되돌아와 다시 눕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더 커진다

두 배, 세 배, 방이 얼굴로 가득하다

나갈 길이 없다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다

결사적으로 소리지른다 겨우 깨난다

아, 살아 있다.

 

 

 

마지막 일기에서 김현은 완성된 문장에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완성된 문장에 마침표를 찍지 않은 경우는 이 책을 통틀어 처음이다. 마침표가 사라진 문장,  그러니까 끝을 유예하려는 마음은 종생(終生)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  아니면 生에 대한 의지 때문일까 ?  하지만 이 욕망도 이내 꺾인다.  주저하는 결행은 " 아, 살아 있다. " 는 문장에서 실행하게 된다.  그는 마지막 일기에서 " 살아 있다. " 고 적고는 있으나 자신이 곧 죽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보인다왜냐하면 하늘을 날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것은 날개가 없는 것들의 욕망이듯이 살고 싶다는 욕망은 오롯이 죽어 가는 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날개를 가진 것은 날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지 않으며 살아 가는 자는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살아 있다. ” 라는 표현은 죽어 가는 김현의 머뭇거리는 자기 암시이자 그가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체념이다. 그러나 어떻든 젊은 김현은 죽었고 우리는 살아 남아 그를 이야기한다. 죽음만이 어떤 사람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해도 괜찮게 만들어준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 영생 永生을 위해 종생 終生을 기록으로 남긴 그는,  아...... 살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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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8-02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을 읽으니 저도 김현 책을 다시 읽고 싶네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니. 헐~~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2 12:23   좋아요 0 | URL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요즘 저는 읽은 책을 다시 읽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새 책을 읽을 때 오는 희열보다 재독의 희열이 더 높고.. 그런 것 같습니다..

samadhi(眞我) 2016-08-02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에 김현 책을 메모해두고 곧 읽어야지 했는데 마침 김현에 대한 얘길 듣네요. 곰발님이랑 뭔가가 있나봐요. ㅋㄷ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2 12:48   좋아요 0 | URL
사실 옛날에는 안 읽은 책의 이야기가 전부여서(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의무적으로 읽었을 뿐인데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네요. 매의 눈, 정확한 분석. 문장의 호흡.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관찰자로서의 시선..... 다 좋습니다.

stella.K 2016-08-02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듣는 음악인데 왜 음악과 함께 읽으라고 하는 건지...?
제가 음악에 대해선 그다지 아는 바가 없어서요.
뭔가 연관성이 있는가 본데...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2 14:34   좋아요 0 | URL
어젯밥 이 음악을 들으며 이 리뷰를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뭐,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 ㅎㅎ

음악이 좋습니다..

yureka01 2016-08-02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이 삼장 박동..즉 살아 있다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죽음은 심장이 멈춘 상태니까요...잘 읽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2 14:35   좋아요 0 | URL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이 리뷰는 이 음악을 들으며 작성했습니다.
아무래도 음악의 리듬과 이 글의 리듬이 비슷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음악의 종류에 따라 글의 맛이 달라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