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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쓰뜨랄한 범위에 근접하게 되는 쓰빽따끌의 향연 :  




 




한국이 지겹다1)




 

                                                                                                                                                                                                      중앙일보기자  전수진의 칼럼 < 한국은 지겹다 > 는 제목과는 달리 재밌다(칼럼 전문은 아래 미주를 확인). 인사 발령이 난 모양이다.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기자실에서 상주하며 파견 근무를 했던 기자는 임무를 마치고 짐을 싸서 본사 가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일 욕심이 많아서 짐 가방이 모두 다섯 개'라는 은근한 자기 PR도 곁들인 그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다. 가녀린 여자가 혼자서 낑낑대며 짐 가방 다섯 개를 옮기는데 도와주는 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시바.

이 상황에서 기자는 한국 시민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며 " 한국 밖에선 안 그랬다. " 고 회상한다. 이 문장은 일종의 " 플래시백 " 이다.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한국 밖에선 안 그랬다. 지난 2012년 런던 여름올림픽에선 “제가 도와 드려도 되겠습니까”라는 현지 신사가, 지난 2015년 뉴욕 JFK 공항에선 “지금 도움이 필요하죠?” 라는 현지 여성이, 지난달 교토에선 “혹시 지금 곤란하신 상황이라면 도움을 드려도 괜찮으시겠어요?” 라는 현지 (심지어) 할머니가 있었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선의가 살아 있었다. 대영박물관보다, 뉴욕현대미술관(MoMA)보다, 교토의 흐드러진 벚꽃보다 이런 보통 사람들의 선의가 격하게 부러웠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난 기자는 성급한 일반화(hasty generalization)에 빠지게 된다. " 국민의 수준 " 을 운운하며 " 대한민국 5000만 국민 모두가 다 이 사회를 이렇게 후지게 만들었다 " 고 저주를 내린다. 그깟, 가방 하나 들어주지 않았다고 말이다. 이 정도면 아쓰뜨랄한 범위에 근접하게 되는 쓰빽따끌한 hasty generalization 이다. 그는 가방 하나 때문에 화가 났던 것일까 ? 그는 칼럼을 다음과 같이 매조지한다.  " 지난해 10월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한국인으로 사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이젠 달라야 한다. 잃어버린 매력을 되찾아야 한다. 누가 뭐래도 떠날 수 없는, 우리나라니까. 매력 없는 한국은 너무 지겹다. "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이다. " 2016년 10월부터 이 기사를 입력한 2017년 4월 7일 " 까지의 기간은 한국 현대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격동에 해당되는데,  기자는 이 기간을 매력 없는 한국이라고 단정한 후 너무 지겹다고 토로한다. 의아하다. 이 기간 동안의 정보 생산량과 뉴스를 소비하는 흡입력이 블랙홀에 가까웠던 적이 있었던가 ?  더군다나 뉴스를 생산하는 기자였다면 지겹다거나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리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자 비로소 기자가 야마 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기사는 짐 가방 다섯 개를 든 여자를 외면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이지만 사실 이 기사의 진짜 야마'는 촛불에 대한 경멸과 비하에 있다.

대놓고 촛불을 비하할 수 없으니 짐 가방 타령이나 하는 것이다. 골때리는 화풀이 기사'다. 이 칼럼을 작성한 전수진 기자가 도마 위로 오른 것은 중앙일보 칼럼 < 문빠들의 거침없는 질주2) > 에 전수진 기자가 댓글을 달면서 시작되었다.  

 

영어신문 시절 노사모 기사 썼다가 " 왜 우리를 (이화)창사랑 따위와 같이 썼느냐, 고소하겠다 " 고, 굉장히 못생기신 남자분이 전화했던 기억이 나네요. ㅎ



 

< 한국이 지겹다 >  라는 칼럼에서 " 피부색을 갖고 다른 이를 재단하다니, 후지고 천박하다 " 는 삼박한 문장을 뽑아냈던 기자는 어느 독자를 향해 " 굉장히 못생기신 남자분 " 이라는, 후지고 처처처처 천박한 인권 감수성을 드러낸다. 이쯤 되면 개그콘서트풍으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 이 분, 왜 이러는 걸까요 ? " 자기 가방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 국민의 수준...... "  운운하는 모습에서 기자라는 신분이 가지고 있는 " 독고다이 엘리트의 스웨그 " 를 엿볼 수 있다. 조중동은 물론이고 한경오마저 문빠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는 이유는 지식 / 언론 사회의 절대적 권위를 누렸던 자의 위기감 때문이다.

 

기자들은 문빠들이 좀비처럼 막무가내로 언론을 비난한다고 고백하지만, 사실 그들이 불편해하는 지점은 막무가내로 따지는 행위가 아니라 팩트를 가지고 조지는 행위에 대한 불편함이다. 내 글만 해도 그렇다. 나는 지금 전수진 기자를 막무가내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 피부색을 갖고 다른 이를 재단 - " 하는 " 후지고 천박한 " 인권 감수성을 비판하던 이가 어떻게 " 굉장히 못생기신 남자분이 전화했던 기억 " 을 떠올리며 낄낄거리냐고 팩트로 조지는 것이다. 피부색 갖고 다른 이를 재단하는 것과 외모 가지고 다른 이를 재단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요 ?              

솔직히 말해서 기자들은 앞뒤 안 가리고 막무가내로 욕하는 독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이 쓴 기사를 독자들이 팩트 체크하는 상황이다.



 

 

 

 

■  덧대기 

 


1. 가방을 들어주지 않는 사회를 비판하기에 앞서 자존심 때문에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기자의 태도도 그닥 좋은 태도는 아니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외면했다면 기자의 서운함을 이해할 구석이라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무작정 남 탓부터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 글의 야마를 다섯 글자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너나잘하셈.

 

2. 중앙일보 칼럼 < 문빠의 거침없는 질주 > 에서 최민우 기자는 문빠를 " 문빠’에겐 더는 ‘조중동’이냐 ‘한경오’냐가 중요하지 않다. 보수든 진보든 여전히 한 수 가르치려 드는 듯한 ‘꼰대’가 꼴보기 싫을 뿐이다. 막무가내로 칼춤만 췄다면 ‘문빠’가 현재의 영향력을 가졌을까. 엘리트주의에 찌든 ‘기레기’와 금배지’ 등을 상대로 정밀 타격을 가하는 모습에서 대중은 통쾌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 라고 지적한다. 나는 이 칼럼의 논조에 동의한다. 기자가 문빠를 향해 눈치를 살펴야 할 권력이 되었다고 지적한 것은 " 막무가내 " 가 아니라 " 정밀타격 " 이 가능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나노 기술에 가까운 문빠의 핀포인트(PIN - POINT) 제구력은 문빠라는 시민 권력이 그동안 언론 권력만이 누렸던 정보접근성, 정보장악력, 팩트파인딩 및 체크 능력에 근접했기에 가능했다. 문빠가 조중동은 물론이고 한경오까지 비판하는 태도와 조중동은 물론이고 한경오가 문빠를 공격하는 태도는 언론 권력과 시민 권력이 헤게모니를 놓고 다툼을 하기 때문이다. 정보에 대한 접근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사회일수록 언론자유지수(낮을수록 좋다)가 좋은 사회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조중동은 국가가 언론을 장악하려고 시도한다면서 발악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의 언론자유지수가 가잫 좋았던 때는 노무현 정부로 언론자유지수 31위였다. 지금은 61위이다.

 

 

3. 이언주 의원이 제기한 문자폭탄이라는 프레임도 웃기긴 마찬가지'다. 국회의원은 선거철만 되면 유권자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여론조사 1회 비용으로 억 단위 이상의 비용을 쓴다. 문자폭탄 사용자는 여론 조사 기관이 해야 될 비용과 시간을 투자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언주는 그들에게 비용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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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럼 < 한국이 지겹다 > 전문 :   욕심이 과하긴 했다. 인사 발령이 난 뒤 지난 3일 아침, 정든 기자실을 떠나는 내 손에 들린 가방은 캐리어를 포함해 모두 다섯 개.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6층 기자실에서 검색대를 두 번 통과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모두 미련한 내 탓이지만 낑낑대면서 조금, 아니 많이 야속했다. 지나가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점이. 내가 JTBC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에 가깝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래도, 헉헉대는 동료 시민에게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이가 ‘0’이라는 건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한국 밖에선 안 그랬다. 지난 2012년 런던 여름올림픽에선 “제가 도와 드려도 되겠습니까”라는 현지 신사가, 지난 2015년 뉴욕 JFK 공항에선 “지금 도움이 필요하죠?”라는 현지 여성이, 지난달 교토에선 “혹시 지금 곤란하신 상황이라면 도움을 드려도 괜찮으시겠어요?”라는 현지 (심지어) 할머니가 있었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선의가 살아 있었다. 대영박물관보다, 뉴욕현대미술관(MoMA)보다, 교토의 흐드러진 벚꽃보다 이런 보통 사람들의 선의가 격하게 부러웠다.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랬을 거라고? 백번 양보해 그렇다고 치자. 한국은 (영어를 구사하는 백인이 아닌) 외국인에게도 팍팍하다. 지난 3일, 낑낑대며 새로 옮긴 곳에 짐을 푼 뒤 모바일 뉴스앱을 켜자 “한국에선 남 돕지 말라”는 외국인 부부의 사연이 떠 있었다. 이들 부부는 대형마트 주차장에서 뛰어노는 아이에게 차량이 돌진하는 것을 발견하자 소리를 지르며 피하게 했다. 문제는 그 다음. 아이의 조부모가 “왜 내 손자에게 고함을 지르느냐”며 인종차별적 욕설을 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중재는커녕 “한국에서는 자연스러운 발언”이라고 했단다.

이 뉴스를 접한 외국인 친구들은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영국인 친구는 “난 백인이라 다행”이라고 했다. 피부색 갖고 다른 이를 재단하다니, 후지고 천박하다. 국민소득 3만 달러를 향해 간다면서 국민의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인지. 타인은 무조건 경계하고 의심해야 하는 사회, 팍팍하고 남에게 사납게 굴어야 손해 안 본다고 생각하는 사회,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 정치 탓도 있지만 대한민국 5000만 국민 모두가 다 이 사회를 이렇게 후지게 만들었다. 남 탓 말고 내 탓을 하자. 지난해 10월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한국인으로 사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이젠 달라야 한다. 잃어버린 매력을 되찾아야 한다. 누가 뭐래도 떠날 수 없는, 우리나라니까. 매력 없는 한국은 너무 지겹다. 


분수대 칼럼 < 한국이 지겹다 > 전수진 기자  


2) http://news.joins.com/article/21609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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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풍   과      거   목   :



 

 


 


인간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자면 " 인간은 정치적 동물( ion politikon) " 로 인간과 정치는 셈셈이다. 그가 저잣거리 입말에 능숙한 달변가였다면 정치와 인간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젖은 땔감 같은 관계'라는 구수한 표현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 정치적 - " 이라는 표현과   " 인간적 - "   이라는 표현은 서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관계다. " 정치적 인간 " 이라는 표현은 출세를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하이에나를 지시하는 것이어서 난로 속 땔감처럼 훈훈한 " 인간적이다 " 라는 표현과는 서로 사맛디 아니하다. 그런데 " 정치적인데 인간적이어서 감동적1) " 인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노무현이다. 그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존폴리티콘'이다. 상대 진영에서 노무현 장인의 비전향 빨치산 이력을 거론하며 색깔론을 꺼내들었을 때 노무현이 이제와서 사랑하는 제 아내를 버리라는

말씀입니까 _ 라고 되묻는 장면은 정치학을 윤리학으로 되받아치는,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프레임 전환'이었다. 노무현은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총 대신 꽃을 들었다. 가족 서사에 뿌리를 둔 스토리텔러에 익숙한 유권자에게 가난했을 때 쌀겨에 술지게미 먹던 아내를 버릴 수는 없다고 말하는 모습은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우리는 한 정치가의 인간적 고뇌를 통해서 " 존폴리티콘한 로맨티스트 " 를 발견하게 된다. 다큐 영화 << 노무현입니다 >> 는 2% 지지율로 시작해서 66% 로 끝나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관객은 이 유쾌한 승리'가 해피엔딩이 아니라 결국에는 해피 엔드로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서글프다. 영화가 끝나면 인간이어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정치인이지만 인간적이었던 한 인물의 아름다운 몰락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게 된다. 노무현, 그는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꽃을 들었던 로맨티스트였고, 자신을 배신한 적을 위해 그의 밥그릇을 걱정했던 휴머니스트였으며, 정치를 조건 없는 환대의 장으로 이끌려고 했던 정치철학자'였다. 노무현 입니다, 저 잘 모르시지요 ?                             그의 둥근 뒷모습을 보다가 울컥했다. 그는 태풍이자 거목이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 태풍 " 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재앙에 가깝지만 생태학적

관점에서 보면 태풍이 일으킨 교란은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든다. 경험 많은 어부는 태풍이 불어야 풍어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태풍이 바다 속을 뒤집어주면 바닥에 깔렸던 영양분이 위로 올라와 물고기 먹이가 풍부해져서 수면 아래로 몰려든다고 한다. 어부 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어획량도 늘어나는 것이다. 숲도 마찬가지다. 태풍으로 인하여 거목이 쓰러지면 쓰러진 자리 위로 텅 빈 하늘 아래 햇살이 쏟아지니 다양한 식물종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여 어린 나무에게 솟아오를 기회를 주는 것이다. 또한 숲에 사는 생명체 중 30%가 죽은 나무에 의존한다고 한다.

문재인 정권은 " 박근혜의 결핍 " 으로 채워진 정부가 아니라 " 노무현의 부재 " 가 만들어 놓은 정부'라 할 수 있다. 햇살 쏟아지는, 오늘의 찬란한 봄은 노무현의 부재 때문이다. 그가 비운 자리에 햇살 내리어 꽃이 피고,  나무가 자란다 ■




​                                  


1) 정치적인데 인간적인, 그래서 감동적인 ( 한겨레,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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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7-05-27 2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곰발님..이런 멋진 글을..
싸랑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8 04:27   좋아요 1 | URL
클래비스 님의 성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아.

3시 2017-05-27 23: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
꽁짜로 읽는다는 게 ...
많이 죄송합니다. 싸랑하는 페루애님!!!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8 04:26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3시 님의 따스한 댓글 하나면 보상은 충분합니다..

clavis 2017-05-28 10:53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을때 받았던 상처들이 치유됩니다..글쓰기의 힘이여...!!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8 17:21   좋아요 1 | URL
생유. 클래비스 님 가시는 길에 영광있으라..

2017-05-30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30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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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엔 마데카솔이 아니라  :



 

 

 


 




옥도정기 따윈 필요 없어











                                                                                                         애나 어른이나 넘어지면 일단 주위부터 살핀다. 아주 오래 전에 신촌 로터리 근처'에서 스펙타클하게 자빠진 적이 있다. 친구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았다가 달리는 오토바이가 균형을 잃고 넘어진 것이다. 오토바이는 우리를 짐짝으로 취급했는지 바닥에 내다버렸다. 우우.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이 모습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우를 남발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다. 실수는 친구가 했는데 부끄러움은 나의 몫으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친구는 짙은 썬팅의 핼멧을 썼지만 나는 핼멧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별것 아니라는 듯, 우리는 훌훌 털며 일어났다. 어찌된 일인지 내 신발 한 짝이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하하. 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신발을 줍기 위해 걸었다. 하하하. 뭘봐, 이런 걸 첨 봐 ? - 이런 표정으로 말이다. 우리는 시종일관 쿨한 태도와 표정으로 사고를 수습했지만 속으로는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 하하하. 친구는 그 자리를 뜨기 전까지 핼멧을 벗지 않았다, 쪽팔리니까.  빠라빠라 빠라빰 !  오토바이는 다시 달렸다. 그 자리를 벗어나자 비로소 나는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쪽은 팔지 않겠다는 마음이 앞서다 보니 아픔 따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면 친구와 나는 바닥에 엎드려서 울며불며 엄살을 피웠을 것이다. 반면에 아이는 어른과는 다르게 행동한다. 뛰놀다가 넘어진 아이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울며불며 엄살을 피우기보다는 씩씩하게 훌훌 털며 일어난다. 자신에게 불어닥친 불행을 호소해봤자 들어줄 이 아무도 없을 테니까. " 울까 - 말까 " 를 결정하는 기준은 통증의 세기가 아니라 자신을 위로해줄 대상의 유무에 달린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가 넘어졌을 때 엄마(혹은 사람들)를 보며 우는 것은 자신의 불행과 아픔에 대해 공감해달라는 의사 표시인 셈이다. 옥도정기 따윈 필요하지 않아요, 내 상처엔 당신의 따스한 말 한마디가 필요하답니다.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넘어진 아이를 보면 달려가 일으켜세우는 것은 어른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책무이다. 마찬가지로 아이가 울고 있으면 그 아이의 불행과 아픔을 공감하고 공유할 필요도 어른의 몫이다. 징징거린다고 무조건 화를 내는 어른은 좋은 어른이 아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에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살짝 비틀자면 (넘어진) 아이 하나를 일으키는 데에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는 좋은 어른이 아니다. 박근혜는 내 새끼가 길 가다가 자빠지면 호들갑을 떨지만,  내 새끼가 아닌 새끼가 넘어지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나쁜 어른새끼'다.

넘어지면 울지 말고 씩씩하게 일어나라고 가르치는 훈육은 좋은 훈육이 아니다. 넘어졌을 때 울지 않는 아이가 많을수록 그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 우는 아이가 많을수록 좋은 나라'다. 신나게 울거라, 너에게 통곡을 허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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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5-26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발님의 글을 읽을때마다, 역시 좋은 글을 쓰려면 일단 인생사가 쎈티멘탈쓰뻭타클해야 되는구만- 하면서 이번 생은 글렀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6 11:0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쇼 님은 쓰빽따끌하게 넘어지시면 안됩니다. 옥체를 보전하셔야 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5-26 1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자연스럽게 아이가 울고, 차별받는 사람들이 불만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하고, 장애인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6 11:00   좋아요 2 | URL
제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야마를 아주 그냥 제대로 요약하셨습니다.. 이명박근혜는 시민의 목소리를 단순히 우는소리‘라고 생각했다는 점이 이 정권이 망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귀신이 울면 사연이 있고 시민들이 우는소리를 하면 그 또한 사연이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마립간 2017-05-26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에 우리나라는 (한국 문화의 특징인) 관계성, 가족 확장성, 심정주의에 의존해서 ;

넘어진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들처럼 어른들이 일으켜 주었죠.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6 11:2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옛날에는 확실히 아이를 마을이 키운 점이 있죠.. 그런데, 뭐 요즘도 아이가 넘어지면 어른들이 다 일으켜주곤 하죠.. ㅎㅎㅎ..

전 가끔 아이가 넘어졌을 때 부모랍시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어나, 울지 말고 ! 이런 말 하는 사람을 본 적 있는데 진짜 보기 안 좋더군요.. 아이가 원한 것은 따스한 위로였을 텐데 말입니다..

마립간 2017-05-26 12:24   좋아요 0 | URL
관계성, 가족 확장성, 심정주의 ‘의 앞면이 공동체의 공동 육아라면 뒷면은 불알후드 겠죠. 구체적으로는 아이가 원한 것, 따스한 위로에 대한 반대 급부로 연장자에 대한 예의와 존경을 바라는 사회이기도 하고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6 15:47   좋아요 1 | URL
양면의 장점만 고루 활용되면 좋은 사회가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17-05-26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어졌을 때의 아픔보다 타인의 시선에 대한
쪽팔림 때문에 아픈 시늉도 못하더라는 경험
에 대한 솔직한 서술이 멋지십니다.

어려서 자주 듣던 옥도정기가 과연 무슨 말
일까 찾아 보니 요오드팅크라고 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6 15:46   좋아요 0 | URL
저도 옛날부터 할머니가 옥도정기 옥도정기 하셔서 뭔가 했더니
요오드팅크를 일본식 발음이 옥도정기라고 하네요.. ㅎㅎ

cyrus 2017-05-26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아이가 부모한테 아파도 참고 울지 말라고 배웠다면(이런 부모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아이는 크게 다쳤을 때 통증을 참았을 겁니다. 다친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을 거고요. 부모는 자식에게 다친 사실을 알리지 않았느냐고 크게 혼냈을 겁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6 21:19   좋아요 0 | URL
이래저래 혼날 운명이로군요 ? ㅎㅎ

2017-05-30 14: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30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무현입니다


 

 

 

 

 

                                                                                            - 빠의 탄생을 두고 썰이 분분하다. 오빠와 아빠에서 빠순이가 파생되었다는 설과 구라파 유흥주점 형식인 바(bar)에서 일하는 여성 바텐더에서 빠순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는 설이 있다.

좌표는 다르지만 여성을 비하할 목적으로 타겟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빠순이는 세상물정도 모르면서 기생오라비 같은 연애인(이나 운동선수)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는, 호의를 주면 몸도 주는 쉬운 여자를 조롱하는 신조어'였다.  그러니까 김치녀와 된장녀 이전에 빠순이가 있었던 것이다. < 빠-순이 > 가 대한민국 문화 부흥기'였던 90년대 여성을 비하한 단어였다면, < 공-순이 > 는 공업 부흥기에 해당되는 7,80년대식 김치녀'였다. 순이라는 이름은 대중 문화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호출되었다. 나훈아의 < 18세 순이 > 는 살구꽃이 필 때가 되 돌아온다는 말 한 마디만 남기고 도시로 떠난 순이를 그리워하는 노래라면,

송대관이 < 우리 순이 > 에서 기억하는 순이 모습은 " 갸날픈 몸매에 새까만 눈 /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자요 / 가난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 서울 간 순이 "  다.  그렇다면 그때 그 사람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 18세였던 순이는 성장하여 드라마 << 명랑소녀 성공기 >> 에서는 양순이, << 굳세어라, 금순아 >> 에서는 금순이, << 내 이름은 김삼순 >> 에서는 삼순이, << 장밋빛 인생 >> 에서는 맹순이로 등장한다. " 순이's " 는 보통의 평범한 여성(노처녀, 과부, 주부)으로 등장하지만 하나같이 허술하고 빈틈이 많은 캐릭터 - 들'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똑같은 질문을 던져볼까 ?

양순이, 금순이, 삼순이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  << 굳세어라, 금순아 >> 의 프리퀄 prequel 이 빠순이와 공순이었다면 << 굳세어라, 금순아 >> 의 시퀄 sequel 바로 노 빠(순이)'다.  살구꽃이 필 때면 돌아오겠다고 떠난, 갸날픈 몸매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아무것도 모르는 가난한 18세 순이가 결혼하여 금순이란 이름으로 억척스러운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노무현이라는 정치가의 빠순이'가 되어 돌아왔다. 먹고사는 문제가 결국은 정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보통 여성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최초의 정치 덕후 - 질'이다. 평소, 여성의 팬 문화를 비판했던 남성들도 노빠에 편입되면서 그들은 노란 풍선을 들고, 비명을 지르며, 팻말을 들고, 율동에 맞춰 떼창을 한다. 

이들 노빠는 고스란히 문빠로 편입된다. 하지만 문빠는 노빠와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노빠에게는 없지만 문빠에게는 있는 것,  그것이 바로 < 한 > 이라는 정서'다.  2009년 5월 23일의 하루를,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다급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와 리모컨을 켰을 때 속보로 전송되는 화면과 암막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을 때 환하게 밀려오던 햇살의 속도를 아직도 기억한다. 낮술에 취해 노제를 다녀왔고, 밤새 속초 동명항 방파제 포자마차에서 술을 마셨다. 아마도 내가 그날 경험한 일상은 다른 이들도 모두 경험했던 동일한 일상이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문빠가 극성스럽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한경오 기자들마저 덤벼라, 문빠들 _ 이라고 뾰족한 말풍선을 띄운 것을 보면 문빠가 극성스러운 것은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나는 이 극성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 사실 그것은 극성이 아니라 불안에서 오는 강박일 뿐이다. 노무현의 죽음 같은 비극은 두 번 다시 재현되어서는 안된다는 그런 간절함 말이다. 21세기 정치 문화는 좋든 싫든 노무현의 죽음이 만든 세계'다. 가끔 노무현 생각이 난다. 그는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순이 생각에 통곡한 적은 여러 번 있었으나 한 남자 때문에 통곡한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5월의 밤바다. 속초 동명항 방파제'에서 나는 12월에 내리는 눈처럼 펑펑 울었다. 그립다,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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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5 17: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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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6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침    묵     의             봄   :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이명박이 대중을 향해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_ 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그를 향했던 의혹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프로이트를 빌리자면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이니까. 대운하 사업이라는 전부후무한 사기에 동참한 부역자 중에서 눈에 띄는 사람은 차윤정이었다.

 처음에는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으나 생태과학자'란 프로필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차 씨가 그 차 씨'라는 사실에 경악하고 말았다. 차윤정,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환경부 본부장. 저서 신갈나무 투쟁기 !!!  아, 그 차가 그 차였단 말이냐 ?  << 신갈나무 투쟁기 >> 는 과학이 (인)문학적 감수성을 가진 글빨과 결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얻은 텍스트로 읽는 내내 밑줄을 긋느라 정신이 없었던 책이었다.  문장마다 구구절절 자연애를 담았던 자연 전도사'가 어느 날 자연 파괴에 앞장서는 전투사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는 4대강 사업을 홍보하는 영업부장이 되어 출세를 위해 자연을 팔았다.  

모래무지의 귀환  이라는 글을 읽었을 때의 당혹감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4대강 사업으로 깨끗한 물에서만 사는 모래무지가 돌아온다고, 올봄에 태어날 강의 생명들은 새로운 강에서 어떤 설렘을 가질 수 있을까.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도 설레는 봄이다 _ 라고 매조지하는 기고문을 보면서 구구절절했던 문장이 하루아침에 구질구질한 문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씁쓸했다. 그가 6년 전에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는 " 새로운 강에서 태어날 생명 " 은 모래무지가 아니라 녹조와 악취 그리고 이끼벌레가 전부였다. 강바닥을 " 헬 " 로 만들어 놓고는 천연덕스럽게 새 생명을 노래하다니 " 헐 ".



문재인 정부가 4대강 감사를 다시 진행한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인물이 바로 차윤정이었다. 공무원 1급 당선증을 얻기 위해 물고기를 떼죽음으로 내몰았던 여자. 그는 물이 고이면 썩는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을까 ?  그에게 조너선 밸컴의 << 물고기는 알고 있다 >> 라는 책을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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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4 14: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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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4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7-05-24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투~ 저도 젤 먼저 떠오르더라구요!! 저 당시때 배신감 장난 아니였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4 15:01   좋아요 0 | URL
이 책 읽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죠... 개인적으로 식스센스를 뛰어넘는 반전이었습니다..

2017-05-24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5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7-05-24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 전도사의 환경파괴 검투사로의 트랜스피겨레이션,
케리건의 칼날여왕 변신에 버금가네요.

모래무지의 귀환이란 기사 링크를 따라가 보니 뉴데일리!!!

<물고기는 알고 있다> 마침 도서관에 비치 중이네요.
빌려다 보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5 11:43   좋아요 0 | URL
전 그 캐리어 보고서 깜놀했는데... 그렇게 잘 굴러가는 캐리어도 있나요 ?
아무래도 손을 좀 본 듯.. ㅎㅎ.


물고기는 알고 있다.. 이 책 재미있습니다. 많은 새로운 정보도 많아서 신선하기도 합니다..

글샘 2017-05-24 1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그래서 사대강, 천안함, 이런 어용 학자들 아작을 내놔야 합니다.

곡학아세라고... 교수자리를 팔아서 권력에 아부하는 세상은,

개돼지를 짓밟는 세상이겠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5 11:45   좋아요 0 | URL
다들 나름 학자의 지위에서 밥 먹고 사는데 걱정은 없었던 양반들인데
욕심이 지나치게 과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와같다면 2017-05-24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리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죠..?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5 11:46   좋아요 1 | URL
쪽을 팔면 입이 호화로워지는 법이죠..

cyrus 2017-05-24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윤정씨보다 이유미씨가 더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 분이 쓴 책 《우리 나무 백가지》는 정말 유명하죠. 이유미씨가 최초의 여성 국립수목장입니다. 이 분은 한결같이 꽃과 나무를 연구하고, 보존 관리에 힘써왔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5 11:46   좋아요 0 | URL
우리나무 백 가지는 저도 읽었습니다. 이유미 님이 이 분야에서는 독보적이었군요..

표맥(漂麥) 2017-05-24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도저의 임무는 자연을 인위적인 것으로 만드는 거였다지요... 음...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5 11:47   좋아요 1 | URL
강을 직선으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병신같은 발상이죠. 강의 기본은 구불구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