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입니다
- 빠의 탄생을 두고 썰이 분분하다. 오빠와 아빠에서 빠순이가 파생되었다는 설과 구라파 유흥주점 형식인 바(bar)에서 일하는 여성 바텐더에서 빠순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는 설이 있다.
좌표는 다르지만 여성을 비하할 목적으로 타겟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빠순이는 세상물정도 모르면서 기생오라비 같은 연애인(이나 운동선수)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는, 호의를 주면 몸도 주는 쉬운 여자를 조롱하는 신조어'였다. 그러니까 김치녀와 된장녀 이전에 빠순이가 있었던 것이다. < 빠-순이 > 가 대한민국 문화 부흥기'였던 90년대 여성을 비하한 단어였다면, < 공-순이 > 는 공업 부흥기에 해당되는 7,80년대식 김치녀'였다. 순이라는 이름은 대중 문화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호출되었다. 나훈아의 < 18세 순이 > 는 살구꽃이 필 때가 되면 돌아온다는 말 한 마디만 남기고 도시로 떠난 순이를 그리워하는 노래라면,
송대관이 < 우리 순이 > 에서 기억하는 순이 모습은 " 갸날픈 몸매에 새까만 눈 /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자요 / 가난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 서울 간 순이 " 다. 그렇다면 그때 그 사람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 18세였던 순이는 성장하여 드라마 << 명랑소녀 성공기 >> 에서는 양순이, << 굳세어라, 금순아 >> 에서는 금순이, << 내 이름은 김삼순 >> 에서는 삼순이, << 장밋빛 인생 >> 에서는 맹순이로 등장한다. " 순이's " 는 보통의 평범한 여성(노처녀, 과부, 주부)으로 등장하지만 하나같이 허술하고 빈틈이 많은 캐릭터 - 들'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똑같은 질문을 던져볼까 ?
양순이, 금순이, 삼순이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 << 굳세어라, 금순아 >> 의 프리퀄 prequel 이 빠순이와 공순이었다면 << 굳세어라, 금순아 >> 의 시퀄 sequel 은 바로 노 빠(순이)'다. 살구꽃이 필 때면 돌아오겠다고 떠난, 갸날픈 몸매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아무것도 모르는 가난한 18세 순이가 결혼하여 금순이란 이름으로 억척스러운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노무현이라는 정치가의 빠순이'가 되어 돌아왔다. 먹고사는 문제가 결국은 정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보통 여성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최초의 정치 덕후 - 질'이다. 평소, 여성의 팬 문화를 비판했던 남성들도 노빠에 편입되면서 그들은 노란 풍선을 들고, 비명을 지르며, 팻말을 들고, 율동에 맞춰 떼창을 한다.
이들 노빠는 고스란히 문빠로 편입된다. 하지만 문빠는 노빠와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노빠에게는 없지만 문빠에게는 있는 것, 그것이 바로 < 한 > 이라는 정서'다. 2009년 5월 23일의 하루를,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다급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와 리모컨을 켰을 때 속보로 전송되는 화면과 암막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을 때 환하게 밀려오던 햇살의 속도를 아직도 기억한다. 낮술에 취해 노제를 다녀왔고, 밤새 속초 동명항 방파제 포자마차에서 술을 마셨다. 아마도 내가 그날 경험한 일상은 다른 이들도 모두 경험했던 동일한 일상이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문빠가 극성스럽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한경오 기자들마저 덤벼라, 문빠들 _ 이라고 뾰족한 말풍선을 띄운 것을 보면 문빠가 극성스러운 것은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나는 이 극성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 사실 그것은 극성이 아니라 불안에서 오는 강박일 뿐이다. 노무현의 죽음 같은 비극은 두 번 다시 재현되어서는 안된다는 그런 간절함 말이다. 21세기 정치 문화는 좋든 싫든 노무현의 죽음이 만든 세계'다. 가끔 노무현 생각이 난다. 그는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순이 생각에 통곡한 적은 여러 번 있었으나 한 남자 때문에 통곡한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5월의 밤바다. 속초 동명항 방파제'에서 나는 12월에 내리는 눈처럼 펑펑 울었다. 그립다, 노무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