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엔 마데카솔이 아니라 :
옥도정기 따윈 필요 없어
애나 어른이나 넘어지면 일단 주위부터 살핀다. 아주 오래 전에 신촌 로터리 근처'에서 스펙타클하게 자빠진 적이 있다. 친구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았다가 달리는 오토바이가 균형을 잃고 넘어진 것이다. 오토바이는 우리를 짐짝으로 취급했는지 바닥에 내다버렸다. 우우.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이 모습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우를 남발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다. 실수는 친구가 했는데 부끄러움은 나의 몫으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친구는 짙은 썬팅의 핼멧을 썼지만 나는 핼멧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별것 아니라는 듯, 우리는 훌훌 털며 일어났다. 어찌된 일인지 내 신발 한 짝이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하하. 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신발을 줍기 위해 걸었다. 하하하. 뭘봐, 이런 걸 첨 봐 ? - 이런 표정으로 말이다. 우리는 시종일관 쿨한 태도와 표정으로 사고를 수습했지만 속으로는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 하하하. 친구는 그 자리를 뜨기 전까지 핼멧을 벗지 않았다, 쪽팔리니까. 빠라빠라 빠라빰 ! 오토바이는 다시 달렸다. 그 자리를 벗어나자 비로소 나는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쪽은 팔지 않겠다는 마음이 앞서다 보니 아픔 따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면 친구와 나는 바닥에 엎드려서 울며불며 엄살을 피웠을 것이다. 반면에 아이는 어른과는 다르게 행동한다. 뛰놀다가 넘어진 아이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울며불며 엄살을 피우기보다는 씩씩하게 훌훌 털며 일어난다. 자신에게 불어닥친 불행을 호소해봤자 들어줄 이 아무도 없을 테니까. " 울까 - 말까 " 를 결정하는 기준은 통증의 세기가 아니라 자신을 위로해줄 대상의 유무에 달린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가 넘어졌을 때 엄마(혹은 사람들)를 보며 우는 것은 자신의 불행과 아픔에 대해 공감해달라는 의사 표시인 셈이다. 옥도정기 따윈 필요하지 않아요, 내 상처엔 당신의 따스한 말 한마디가 필요하답니다.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넘어진 아이를 보면 달려가 일으켜세우는 것은 어른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책무이다. 마찬가지로 아이가 울고 있으면 그 아이의 불행과 아픔을 공감하고 공유할 필요도 어른의 몫이다. 징징거린다고 무조건 화를 내는 어른은 좋은 어른이 아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에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살짝 비틀자면 (넘어진) 아이 하나를 일으키는 데에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는 좋은 어른이 아니다. 박근혜는 내 새끼가 길 가다가 자빠지면 호들갑을 떨지만, 내 새끼가 아닌 새끼가 넘어지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나쁜 어른새끼'다.
넘어지면 울지 말고 씩씩하게 일어나라고 가르치는 훈육은 좋은 훈육이 아니다. 넘어졌을 때 울지 않는 아이가 많을수록 그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 우는 아이가 많을수록 좋은 나라'다. 신나게 울거라, 너에게 통곡을 허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