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리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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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불행한가를 두고 어머니와 썰전을 펼친 적이 있다. 어려운 선택은 아닐 것이다. 십중팔구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한 표를 던질 테니까. 나 또한 十中八九派(십중팔구파)에 소속된 사람이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는 주장을 펼쳤으나 十中一二派에 소속된 어머니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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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째쓰까, 으째 앞 못 보는 사람이 더 불쌍하다고 함부로 씨부리냐잉. 니맹키로 한 치 앞만 보면 그런 말 헐 수 있제. 근데 그게 아니여.  이눔아, 말 못하는 거시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거시여.  할 말 못하고 사는 거시 을매나 서러운 거신 줄 아냐.  세상 살다 보면 볼 거 못 볼 거 다 보고 살아야 허는디,   눈 멀면 안 볼 거 안 보니 을매나 편하냐. 그냐, 안 그냐.  니맹키로 이명박이 꼴도 보기 싫어하는 놈은 차라리 앞 보는 것이 낫당께(참고로 어머니는 충청도 분으로 서울 말씨를 사용하지만 글맛을 위해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한다. 전라도 사투리야말로 입말의 장관이요 국무총리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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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동안 거리에서 교회 전도 생활을 하셨던 어머니는 사람 마음을 휘어잡는 교묘한 마력을 가지고 있어서 " 니맹키로 명박이 싫어하는 놈은 차라리 앞 못보는 게 맴이 편한겨 ~ " 라고 지적하자 나는 설득당했다. 그래, 이명박이나 박근혜 상판대기 보느니 차라리 안 보는 게 낫지. 그 길로 십중팔구파를 떠나 십중일이파로 소속을 옮겼다. 그때부터 말 많은 사람보다 말수 적은 사람을, 말소리 큰 사람보다는 말소리 작은 사람을, 포효하는 사자보다는 밟으면 꿈틀거리는 지렁이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렇다, 집에서 지렁이를 키우게 된 계기도 그들의 소리 없는 삶에 대한 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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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징그러워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를 쳤으나 기른 정이 있다 보니 내 새끼 같더라. 소리 없는 것이 이렇게 순하구나. 그래서 나는 해물탕집에서 펄펄 끓는 육수에 산 낙지를 넣는 장면을 보면 참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살이 익어가는 고통 앞에서 침이 고이는 식객을 보면 화가 난다. 이건 아니쟈냐, 이건 아니쟈냐, 이건 아니잖아. 수산 시장에서 활어를 잡아 그 자리에서 바로 살아 있는 물고기를 바로 해체하는 모습도 볼 수가 없다. 살은 잘려 나가고 내장도 떨어져 나가는데 꼬리를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 말 없는 저 짐승을 보고 있으면 우럭도 아니면서 울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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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물고기는 고통을 느끼지 못해서 소리를 지르지 못하는 짐승으로 알고 있지만 물고기들이 고통을 느낀다는 실험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그러니까 당신 팔이 잘라나갈 때 느끼는 고통과 물고기의 몸통이 잘려나갈 때 느끼는 고통은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자세한 내용은 조너선 벨컴의 << 물고기는 알고 있다 >> 를 읽어보시라. 엄지 척! 이 책, 매우 탁월한 자연 과학서이다). 만약에 소리 없는 것들이 소리를 얻어 소리를 지를 수 있다면 지금처럼 펄펄 끓는 해물탕 육수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낙지를 보며 침이 고일 수 있을까 ? 

​

문어가 나오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이란 이상한 장르여서 인간과 문어 사이에 대화가 가능했다. 나는 문어에게 말했다. " 이것아, 다음 생에는 인간보다 더 씨뻘건 피를 가진 짐승으로 태어나라잉. 그래서 해물탕 냄비 속에서 죽을 때에는 검은 먹물 대신 시뻘건 피를 토하고 죽어라잉. 그래야 인간은 비로소 너의 고통을 이해하고 죄책감을 느낄 것이여. 타인의 고통 앞에서 침이 고이는 식욕을 부끄러워할 거시여 "  문어는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끌고 나에게 다가와 포옹을 했다. 히마리 없어서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문어를 보자 히마리 없는 하빠리 주정뱅이의 소프트바디가 생각났다.

 

끈적끈적하고 촉촉한 다리의 촉감이 내 살갗에 와 닿자, 아 !  나는 우럭도 아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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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7-12-26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없지만, 바뀐 프로필 사진도 좋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7 09:07   좋아요 0 | URL
프필에 관심을 가지신 분은 라로 님이 최초이십니다.. ^^

라로 2017-12-28 12:28   좋아요 0 | URL
진짜요?? 안 믿겨요~~~.ㅎㅎㅎ
저는 언제 기획 있으면 얘기해야지 했는데 제 칭찬이,,,좀 허접하죠???ㅎㅎㅎㅎ
하지만 언제나 곰발 님 프로필 개성있고 독창적이라 좋아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8 12:46   좋아요 0 | URL
동생이 쇼핑몰 하다가 장가 갔는데 장비를 두고 갔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심심할 때마다 사진을 찍곤 하는데 어디 써먹을 데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프로필을 자주 바꿉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열하일기 1~3권 세트 - 전3권 - 개정신판 ㅣ 열하일기 (개정신판)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훌 륭 한   울 음 터 로 다   :

 


 



 

 

 

 


하하하, 성탄 전야



 




                                                                                            성탄 전야, 근심이 가득한 하루였다. 거제도에서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 사과상자 두 개를 병렬로 놓은 듯한 택배 상자를 보자 그 크기만큼 근심이 쌓였다. 설마...... 상어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 ?  대방어였다. 대두 자랑이라면 어디 가서도 꿇리지 않는 나이지만 대방어의 대가리 역시 무시무시한 크기여서 눈앞이 캄캄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호호호.  할렐루야, 아멘, 주님의 은총이 !  거제도 권사님은 은혜로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크기가 작은 생선이라면 걱정은 나중에 하고 일단 냉장고 안에 넣어두면 되지만 대방어는 크기 때문에 냉장고에 넣을 수가 없어서 먼저 손질부터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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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뒤지고 칼을 쓰는 몇몇에게 알음알음 물어보며 대방어 해체 작업을 했다. 사시미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무딘 식칼로 생선을 손질한다는 게 이만저만 이제 그만. 아, 그만하고 싶다고 ! 무엇보다도 칼을 다루는 칼잡이가 내게 방어사상충을 골라내야 한다고 말했을 때에는 충격이었다. 기생충인데 고래회충과는 달리 살속을 파고들어서 눈에 띄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 눈 부릅뜨고 골라내쇼. 기생충이 단백질 덩어리여서 먹어도 상관은 없소만........     나는 촛불 대신 칼을 들고 생선을 해체하며 기생충을 골라내는 일로 성탄 전야를 보냈다. 블러드 크리스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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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전야, 영화를 무려 5편이나 봤다. 첫 번째로 본 영화는 영화에서 여자가 가장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장르는 바로 소복 입은 귀신이 나오는 영화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 << 월하의 공동묘지, 1967 >> . 소복 입은 귀신이 어찌나 호탕하게 웃으시던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두 번째로 본 영화는 << 여곡성, 1986 >> 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소복 입은 여자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에 걸린 사람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원한이 사무쳐서 저승에 가지도 못하고 이승에서 피맺힌 복수를 하는 사람이 왜 이토록 크게 웃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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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영화는 << 돼지꿈, 1961 >> 이었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본 장면은 소주잔이었는데 그때에는 소주잔이 지금 유통되고 있는 소주잔보다 크기가 2배나 컸다. 소주잔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서 크기가 작은 맥주잔 같았다. 네 번째 영화는 << 엽문 4 >> 와 마지막 영화는 << 범죄도시 >> 였다. 뭐, 그럭저럭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흥미로운 영화는 아니었다.  나는 옛날 한국 영화가 재미있다. 그 시대 풍속과 세태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사회학 책을 읽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옛날 영화가 미시사회학를 다룬 서적 같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귀신은 숨 넘어 갈 사람처럼 웃어 젖히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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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이 발생한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를 여행할 때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요동 벌판을 보고 호곡장(好哭場)이라고 말한다. 울기 좋은 장소, 울음터'라는 뜻이다. 연암은 << 열하일기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발췌문이 조금 길지만 연암 박지원의 사상을 꿰뚫는 명문이니 꼭 읽어보시길. 열하일기의 화룡점정이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서 말하였다. “좋은 울음터로다. 울만 하구나.”  정진사가 말했다. “이런 하늘과 땅 사이의 큰 안계(眼界)를 만나서 갑자기 다시금 울기를 생각함은 어찌 된 것이오?" 내가 말했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오. 천고에 영웅은 울기를 잘하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 하나, 몇 줄 소리 없는 눈물이 옷소매로 굴러떨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네.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은 울음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네. 사람들은 단지 칠정 가운데서 오직 슬퍼야 울음이 나오는 줄 알뿐 칠정이 모두 울게 할 수 있는 줄은 모르거든. 기쁨이 지극하면 울 수가 있고, 분노가 사무쳐도 울 수가 있네. 즐거움이 넘쳐도 울 수가 있고, 사랑함이 지극해도 울 수가 있지. 미워함이 극에 달해도 울 수가 있고, 욕심이 가득해도 울 수가 있다네. 가슴속에 답답한 것을 풀어버림은 소리보다 더 빠른 것이 없거니와, 울음은 천지에 있어서 우레와 천둥에 견줄만하다 하겠소. 지극한 정이 펴는 바인지라 펴면 능히 이치에 맞게 되니, 웃음과 더불어 무엇이 다르리오?  사람의 정이란 것이 일찍이 이러한 지극한 경지는 겪어보지 못하고서, 교묘히 칠정을 늘어놓고는 슬픔에다 울음을 안배하였다네. 그래서 죽어 초상을 치를 때나 비로소 억지로 목청을 쥐어짜 ‘아이고’ 등의 말을 부르짖곤 하지. 그러나 진정으로 칠정이 느끼는 바 지극하고 참된 소리는 참고 눌러 하늘과 땅 사이에 쌓이고 막혀서 감히 펼치지 못하게 되네. 저 가생(賈生)이란 자는 그 울 곳을 얻지 못해 참고 참다 견디지 못해 갑자기 선실(宣室)을 향하여 큰 소리로 길게 외치니, 어찌 사람들이 놀라 괴이히 여기지 않을 수 있었겠소.” 정진사가 말했다. “이제 이 울음터가 넓기가 저와 같으니, 나 또한 마땅히 그대를 좇아 한 번 크게 울려 하나, 우는 까닭을 칠정이 느끼는 바에서 구한다면 어디에 속할지 모르겠구려.” 내가 말했다. “갓난아기에게 물어보시게. 갓난아기가 갓 태어나 느끼는 바가 무슨 정인가를 말이오. 처음에는 해와 달을 보고, 그 다음엔 부모를 보며, 친척들이 앞에 가득하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오. 이같이 기쁘고 즐거운 일은 늙도록 다시는 없을 터이니 슬퍼하거나 성낼 까닭은 없고 그 정은 마땅히 즐거워 웃어야 할 터인데도 분노와 한스러움이 가슴속에 미어터지는 듯 한다오. 이를 두고 장차 사람이란 거룩하거나 어리석거나 간에 한결같이 죽게 마련이고, 그 중간에는 남을 허물하며 온갖 근심 속에 살아가는지라 갓난아기가 그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스스로를 조상하여 곡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단 말이지. 그러나 이는 갓난아기의 본 마음이 절대로 아닐 것일세. 아이가 태속에 있을 때는 캄캄하고 막힌 데다 에워싸여 답답하다가, 하루아침에  넓은 곳으로 빠져나와 손과 발을 주욱 펼 수 있고 마음이 시원스레 환하게 되니 어찌 참된 소리로 정을 다해서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런 까닭에 마땅히 어린아이를 본받아야만 소리에 거짓으로 짓는 것이 없게 될 것일세.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는 것이 한바탕 울 만한 곳이 될만하고, 황해도 장연(長淵)의 금사산(金沙山)이 한바탕 울 만한 곳이 될만 하오. 이제 요동벌에 임하매, 여기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일천 이백 리 길에 사방에는 모두 한 점의 산도 없어 하늘 가와 땅 끝은 마치 아교풀로 붙이고 실로 꿰매 놓은 것만 같아 해묵은 비와 지금 구름이 다만 창창할 뿐이니 한 바탕 울 만한 곳이 될만 하오.”


 

-『열하일기(熱河日記)』 중 「도강록(渡江錄)」의 7월 8일자 일기.

 



열하일기의 호곡장 부분을 읽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저승에서 돌아온 소복 입은 귀신이 이승에서 왜 그토록 호탕하게 웃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오 _ 라고 묻는, 웃음과 울음이 본질이 같다는 열암의 통찰을 생각하면 귀신이 한 평 남짓한 관속처럼 " 캄캄하고 막힌 데다 에워싸여 답답하다가 하루아침에 넓은 곳으로 빠져나와 손과 발을 주욱 펼 수 있었으니 "  그가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다시 웃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면 귀신의 한바탕 웃음이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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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때로는 마른 웃음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마른 웃음은 또 때로는 젖은 눈물로 환유 되기도 한다. 즐거운 크리스마스에 소복 입은 귀신이 나오는 옛날 영화를 보는 것은 꽤 근사한 일이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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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 2017-12-25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편으로는 웃음이 공포를 극대화하는데 쓰이기도 하는 것 같아요.
여인네가(귀신이더라도) 흐느끼면 무슨 곡절이 있어 저리 슬피 우는지 자못 궁금할 수 있지만 막무가내 웃음이란 공감보다 오싹한 맛이 먼저 오지 않을까요?
특히 남성에게 여성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호탕한 웃음이란 ... 에코까지 넣어서 웃음이 퍼지는데다 점프컷으로 여기서 웃고 저기서 웃고 웃음으로 남자 주인공을 포위하는 공포요. 하하하핳하하하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5 10:59   좋아요 0 | URL
웃음이라는 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도구 없이도 들을 수 있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 영화에서 이 효과음이 공포의 도구로 널리 쓰이는 이유는
우리가 일상에서 이렇게 호탕한 여성의 웃음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굉장히 생경스러운, 힘있는 웃음이잖아요.. 그래서 기괴하게 들리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표맥(漂麥) 2017-12-26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도 생선 손질은 잘 안한답니다. 그 곤난함... 느낌이 팍팍~ 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7 09:08   좋아요 0 | URL
엄청 곤란하죠.. 정말 생선은 돈을 더 주더라도 손질된 생선을 사야 합니다..

에로틱번뇌보이 2017-12-27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하일기의 호곡장 부분은 언제봐도 명문인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7 12:36   좋아요 0 | URL
열하일기의 화룡점정이자 박지원이 왜 천재적 문장가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부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최고예욧..
 

 

 

 

 

 

 

 

 

 

 

 

 

 

 

                                      

 

 


 

 


 



정치와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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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다 보니 새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 소모를 많이 필요로 한다. 장면 하나하나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투지와 함께 문맥을 해독해서 전체 맥락을 빠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시네필로서의 사명감이 발동하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큰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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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봤던 영화를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보는 취미가 생겼다.  재관람은 영화를 보다가 한눈을 팔아도 되고 딴청을 부려도 되니까.  장이모우 감독이 연출한 영화 << 국두, 1990 >> 는 천을 염색하는 염색공장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인데, 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역사 시간에 선생이 우리 민족을 가리켜 백의민족이라고 말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레발을 쳤던 기억이 났다. 옛 조상이 흰옷을 즐겨 입은 이유는 순수, 순결, 평화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나 ?!  지금도 여전히 견고하게 유통되고 있는 역사 국뽕 설레발이다. 그런데 우리 조상은 정말로 흰색이 좋아서 백의'를 즐겨 입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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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국두 >> 에서 묘사하고 있듯이 무명 천에 색을 입히는 염색 과정은 매우 고된 일이기에 색을 입힌 천은 그만큼 품값이 많이 들고 비쌌다.    우리 조상이 백의를 즐겨 입은 이유는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문제가 핵심이었다.  백 번 양보해서 옛 조상이 순결, 순수, 평화 따위를 사랑해서 흰색을 사랑했다면 왜 돈 많은 양반들은 화려한 비단 옷을 입었을까 ?  바로 이 맛에 봤던 영화를 다시 본다. 영화에 집중하지 않고 삼천포로 빠질 수 있는 여유가 생기니 영화를 볼 때마다 다른 생각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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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두 >> 에서 여주인공(공리)은 주로 노란색 옷을 입고 등장한다. 염색한 천을 말리기 위해 걸어둔 횃대에는 주로 노란색 천과 붉은색 천이 걸린다. 이처럼 노랑은 빨강과 함께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색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삼천포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옛날 국사 선생이 백의(민족)를 두고 과도한 의미와 해석을 부여했듯이 언론은 외교 순방 중인 박근혜 패션을 놓고 입에 거품을 물며 용비어천가를 읊었던 기억이 났다. 중국 방문 기간 3일 동안 입은 패션 스타일이 7종이란다. 밝고 화사한 컬러는 국민 행복을 늘 주장하시는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엿볼 수 있다고. 어디 그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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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중국 방문 기간 중에 박근혜 대통령 각하 님께서는 7벌의 투피스와 2벌의 한복을 입으시었다 _ 고 분석 기사를 쏟아냈다. 언론은 외교를 쁘레따뽀르떼로 생각했는지 다음과 같은 북한 억양이 깃든 보그병신체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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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영도쟈 박근혜 대통령 각하 님께서는 v넥이 강조된 비비드한 컬러가 돋보이는 바이올릿 재킷에 더해 엣지 있는 팬시퍼플한 목걸이와 세트인 브로치를 왼쪽 가슴 위에 포인트로 달아 남다른 패션 센스를 보여주시었다. 그리고 꾸뛰르적인 디테일을 선보인 엘레강스한 옐로우 재킷은 황제의 부와 권위를 상징한다고 믿는 중국인에게 프렌들리한 스킨십을 전달하는 동시에 정상으로서의 품격을 지킨 남다른 패션 열정이 돋보이시었으니 가히 세기의 퍼스트레이디프리지던트로 부상할 조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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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언론이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자 180도 달라졌어요 !                  문재인 혼밥론과 홀대론을 부각하더니 어느 언론사는 중국 경호원이 한국 기자에게 폭행을 나눌 때(도리돌림할 때) 김정숙은 스카프를 나눴다는 기사도 작성되었다.  이 정도면 보도 참사'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기자들은 맞은 기자를 옹호하며 " 맞아도 싸다 " 라는 시민 반응에 " 맞아도 되는 기자는 없다 " 고 하소연하지만,  언제부터 < 맞아도 싸다 > 는 표현이 < 맞아야 한다 > 는 표현과 동일한 것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런 식의 비약이 가능하다면 < 오, 죽여주는데 ! > 라는 표현은 < 죽이겠다는 살의 > 를 내포한 것인가 ?

​

흔한 말이어서 나중에 관용구처럼 사용되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있는 기자의 국어 실력은 보그병신체를 남발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어느 정도 가름이 가능하다. 크리스마스에 이런 표현이 부적절하긴 하지만 기자들의 자기 연민, 참 징글벨징글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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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전쟁










옛날에는 프레임을 언론사 데스크나 여의도 정치판 쪽에서 만들었다. 말이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어서 프레임을 < 아 > 로 설정하느냐 아니면 < 어 > 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주장과 입장이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면  :  미국이 이라크 사태에 개입하자 보수주의자는 " 이라크 전쟁 " 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워서 끝까지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진보주의자는 " 이라크 점령 " 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워서 미련 없이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에 이 프레임 맞짱 배틀'에서 전쟁이라는 키워드가 우위를 점하면 사내새끼들이 가오가 있지,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 _ 라는 여론이 형성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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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점령이라는 단어가 우위를 점하면 전쟁터에서 발을 빼는 것은 비겁한 짓이 아니라 정의로운 행동이 된다. 정치의 본질이란 결국 " 말싸움 " 이다. 양아치들이 편을 나눠 서로 칼싸움을 하는 집단이라면 정치인은 편을 나눠 말싸움을 하는 집단이다. 그렇기에 정치인에게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주문은 정치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말싸움에서 이기면 행동은 행정부가 하면 된다. 정치 영역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 실천이 아니라 말의 우위이다. 유감스럽게도 수구 보수 언론과 흘레붙은 한국 보수는 밥만 먹고 하는 짓이 이 짓이라 이 짓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잘하짓. 아따, 징허게 잘한다잉. 씹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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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여의도배 프레임 맞짱 배틀에서 졌다고 해도 이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특정 이슈를 덮는 방법은 그 이슈보다 더 강력한 이슈로 뉴스를 뉴스로 덮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조직에게 불리한 뉴스A가 발생하면 그 뉴스를 덮을 수 있는 보다 더 강력한 뉴스 B로 덮는다. 여기서 B는 본질을 왜곡하기 위해 사용되는 팩트이다. 이것을 모멘텀(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거나 바꾸는 장면)이라고 한다. 이 기술도 수구 보수 언론과 흘레붙은 한국 보수가 특허를 내놓은 상태이다. 그런데 이상한 조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저잣거리에 프레임을 찍어내는 공장(언론사)에서 만든 상품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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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퉁이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 기레기 " 라는 프레임 상품이다. " 기자는 쓰레기다 " 라는 말을 줄여서 만든 상품명이니 수구 주류 언론사에서 만든 상품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 기레기 > 라는 상품은 이명박근혜 9년 동안 길거리에서 만들어졌다. 누군가 기레기라고 외쳤고, 어느새 누구나 기레기라고 소리쳤다. 그 절정은 세월호 보도였고 기레기라는 프레임은 힘이 커졌다. 문재인 중국 외교 방문 중에 발생한 한국 기자 폭행 사건을 두고 문재인 지지자들이 차가운 시선으로 돌아선 데에는 기레기라는 프레임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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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구 보수 주류 언론이 만든 홀대론 프레임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중국 외교 방문 언론 보도가 공정했는가 _ 라는 질문에 대해 불공정했다는 응답이 67.9%(매우불공정 42.4%,대체로 25.5%)이었고 공정했다는 응답은 20.9%(매우공정 6.4%, 대체로 14.5%)에 불과했다. 조중동은 물론이고 종편이 홀대론 프레임을 융단 폭격하듯 쏟아냈는데도 불구하고 시민은 응답하지 않은 것이다. 프레임 생산 공장 프레스 공장장 입장에서 보면 공포를 느낄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여론 조사 내용을 세세히 살펴보면 더더욱 공포를 느낄 것이다. 민주당 지지층은 물론이고 자유한국당 지지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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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 지지층, 바른정당 지지층에서도 공정했다는 응답보다는 불공정하다는 응답에 높았다(자유한국당지지층 불공정 67.3% 공정 23% / 국민의당지지층 불공정 55.5% 공정 32.9% / 바른정당지지층 불공정 51.2% 공정 26%). 놀라운 점은 자유한국당 지지층이자 보수층이자 TK이자 PK이자 60대 이상에서도 문재인 홀대론 프레임 보도가 불공정했다고 응답한 것이다. 프레임 생산 공장 프레스 공장장이 만든 프레임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명징한 증후이다. 그 변화의 힘은 1인 미디어 시대(sns, 트위터, 페이스북, 유투브, 팟캐스트)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중국 경호원에게 맞은 한국 기자를 동정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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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홀대론 프레임에도 등을 돌린 원인은 무엇일까 ? 간단하다. 정부에 대한 신뢰는 높은 편인데 언론에 대해서는 신뢰는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레기 프레임이 강력하게 발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한국 기자가 중국인 경호원에게 폭행당한 사건을 두고 사람들이 맞아도 싸다라는 반응을 보인 데에는 문재인을 향한 열혈 지지자의 묻지마 " 맹신" 때문이 아니라 한국 언론에 대한 묻지마 " 불신 "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민 교수의 문빠 진단은 틀렸다. 핵심은 문빠의 문재인을 향한 맹신이 아니라 시민의 언론 불신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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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4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4 11:21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 시절 기자들이야 말로 기자 하면 떠오르는 모범적 답안인데
지금은 뭐... 거의 뭉가졌다고나 할까요. 기레기 프레임 꽤 오래 갈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자들에게는 생명과 다름없는 노트북을 박근혜가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니깐 놓고 오는 것 보십시오... 그래서 기레기라는 소릴 듣
 


 

                                          


서 민 의   문 빠 는   미 쳤 다   :



 

 

 

덤벼라, 문빠 2

  

 

 

                                                                                                       한때 때묻지 않은 시골 여자를 대표하는 이름이 " 순이 " 였다.  순이는 시골에 거주하면서 남성보다 학력이 낮고 세상물정 모르는, 하지만 마음 착한 시골 처녀를 상징했다. 도시 노동자(男)에게 있어서 순이는...... 코리안 뮤즈'였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의 여인이라기보다는 다루기 쉬운 여자에 대한 불알후드의 잠자리 상상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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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라는 고유명사가 보통명사化를 초월하여 접미사(-순이)로 쓰이기 시작한 때는 시골에 살던 순이가 도시로 진출하는 때와 맞물린다.  < 공순이 > 와 < 빠순이 > 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 신조어'였다.  공순이가 " 공장 + 순이 " 가 합성한 단어로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면,  빠순이는 " BAR + 순이 " 를 합친 단어로 호스테스 직종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열 일 제쳐 두고 할 일 없이 운동선수나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여성을 낮잡아 부르는 용어'로 변질되었다. < - 빠 > 가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노무현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노빠의 탄생이다. 


조중동은 물론이고 한경오마저 노빠라는 경멸의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국 언론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실은 노무현을 지지하면 " 빠BAR순이 " 가 되지만 박근혜를 지지하면 " 사모님 " 이 된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박사모는 있지만 박빠는 없다. 왜 ??!          그루피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측면이 있다.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냐에 따라서 누구는 호스테스나 호스트가 되고 누구는 사모(님)가 되는 것이다. 이거 왜 이래 ! 나, 김치 먹고 귀하게 자란 ●씨 가문 18대손 불광동 휘발유야 !         기계적 중립을 그토록 강조하던 언론은 왜 박빠 대신 박사모를 고집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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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성을 고려한다면 노빠 대신 노사모라고 써야 하는 것 아닐까(돌이켜보면 이명박을 지지한다고 해서 이빠라는 프레임을 사용하는 곳도 없다. 이씨가 오씨였다고 상상하면 닭살이 돋는다) ?  며칠 전, 서민 교수가 << 문빠는 미쳤다 >> 라는 글을 올리자 논란이 이빠만빠 퍼졌다. 친애하는 이웃이자 그에게 책 선물도 잔뜩 받은 나로서는 유감이다. 그는 문빠라는 프레임을 사용해서 문빠와 박빠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하지만 문빠와 박빠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은 박근혜를 숭배해야 되는 대상으로 인식하지만, 문재인을 지지하는 사람은 문재인을 수평적 관계로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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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노예의 복종이고 후자는 친구의 우정에 가깝다. 그렇기에 문빠와 박빠를 동일한 서정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는 중국 경호원에게 맞은 한국인 기자 폭행 사건을 < 고슴도치 내 새끼 - 프레임 > 을 앞세워서 문빠를 비난하지만 그가 한국인이라고 무조건 내리 사랑을 강요하는 것은 포데기 신파요, 눈보라가 휘날리는 흥남부두 구닥다리 서사'다. 나는 가족주의보다는 아나키즘에 가까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 기자가 내 새끼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이 사건에 대하여 열불을 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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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이명박근혜 9년 동안 언론이 보여줬던 냉정한 태도를 생각하면 오히려 천불이 난다. 설령, 한국 기자가 중국인에게 맞았다고 해서 열불이 난다고 해도 천불 앞에서는 꺼진 불에 불과하다. 이번 사태에 대해 많은 이가 냉소적인 이유이다. 서민 교수는 글에서 : " 내가 놀란 것은 조교수 말에 동조하는 문빠들이 무지하게 많았다는 점이다. " 가이드라인은 왜 넘었대요 ? " " 기자가 어떤 행동을 했기에 뚜까 맞았을까 ? " 같은 댓글처럼 " 이라며 문빠를 비난하지만 정작 내가 놀란 것은 그가 정신병의 증세로 인용한 댓글이 내 눈에는 매우 합리적인 의문 제기처럼 보였다는 데 있다. 네 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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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어떤 결과에 대해서 그 이유와 원인을 묻는 것이 과연 정신병적 증후일까 ?    ② 오히려 결과만을 내놓고 이유와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 기사'가 이상한 것이 아닐까 ?    ③ 이명박근혜 정권 시절 청와대 기자간담회 때 정부 쪽에서 주는 시나리오 외에는 그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한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질문 없는 뉴스 생산자와 이것저것 많은 질문을 던지는 뉴스 소비자 중에서 누가 더 병적일까 ? ④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와 질문을 많이 하는 사회 중 어느 쪽이 더 건강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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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교수가 열거한 두 개의 댓글(러)은 지금 기자에게 WHY와 HOW를 묻고 있는 것이다. 기사 작성에 있어서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기본 조건(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을 묻는 것은 뉴스 소비자로서 합리적 의문 제기이다.  이제 뉴스 소비자는 기자들이 글을 쓰면 무조건 믿고 따르던 순둥이들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헤게모니를 장악한 부류가 뉴스 소비자가 아니라 뉴스 생산자'였지만 이제는 이 권력이 시민으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정보 접근성, 팩트 파인딩과 체크 따위는 언론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지만 이제는 뉴스 소비자인 시민 사회에서도 그것을 쉽게 검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중국 : 문재인과 유타오

 베트남 : 오바마와 쌀국수 

 

오바마가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서민 식당에 들어가 쌀국수와 함께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뉴스로 내보내며 대국의 소탈한 쌀국수 외교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한국 언론은 동일한 배경과 목적을 가진 문재인의 유타오 외교에 대해서는 혼밥 프레임으로 광탈하는 이중 잣대는 한국 언론의 운동장이 얼마나 많이 기울어졌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식의 팩트 체크는 나 같은 무지랭이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수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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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리얼미터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문 대통령 중국방문을 다룬 언론보도가 공정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70%에 가까운 응답자가 불공정했다고 답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렇다면 서민 교수는 한국 기자 폭행 사건에 대한 네티즌의 신경질적 반응을 단순히 돼먹지 못한 문빠 탓으로 돌리지 말고 불공정한 언론 환경에 따른 대중의 불신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명박근혜 9년을 지내면서 시민들은 언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팩트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으니 언론에 대해 냉소적인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두고 당신은 왜 맞고 쓰러진 기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기괴한 강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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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3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4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4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7-12-23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곰발님 2017년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이제는 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프레임에 갖혀 있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는 모습속에서 희망을 보게 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3 22:48   좋아요 1 | URL
프레임이라는 게 사실 전적으로 여의도 정치꾼들과 언론이 만드는 무기잖습니까.
그런데 기레기라는 프레임은 그들이 아닌 시민 사회가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권력의 이동 현상이죠. 기레기 프레임이...
기레기라는 것은 사실 기득권 편집실이나 여의도 전략본부실 따위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길거리 집회에서 만들어진 프레임이기에
이게 매우 강고하도고 느껴집니다.시대가 전환되어
이제는 1인 미디어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단발머리 2017-12-24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줍은 문빠입니다. 이 글 바로 전에 올리셨던 글의.... 몇몇 문단 몇몇 구절에 깊이 동감합니다.
저 역시 서민 교수님 좋아하는데, 형국이 계속 이렇게 험난해지고 있어 참 안타깝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3 22:49   좋아요 0 | URL
저도 서민 교수님 팬입니다. 그가 이명박근혜 정권 때 용기 있게 쏟아냈던 지식인은 그가 유일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번은 좀 과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뭐, 저는 여전히 서민 님 지지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