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술에 대한 잡담

1 하길종 감독이 연출한 << 바보들의 행진, 1975 >> 에서 주인공 병태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잔술(낱잔으로 파는 술)로 마신다. 소주 한 병 값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한 잔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잔술을 파는 곳을 본 적이 없는 나는 70년대 서비스'에 압도당했다. 그런데 잔술을 받는 소주잔의 용량이 특별했다. 얼핏 보면 맥주 잔인데 자세히 보면 맥주 잔보다는 크기가 1/2 작은 것 같고 일반 소주잔보다는 2배 큰 것 같다. 크아, 절묘하다. 영화 << 바보들의 행진 >> 은 시나리오의 정석을 놓고 보자면 형편없는 시나리오'다. 술 마시고, 미팅 하고, 술 마시고, 당구 치고, 술 마시고, 연애하는 내용이 전부여서 플롯에서 심각한 오류가 보인다. 하지만 " 서사 없음 " 과 " 담론 없음 " 이 그 당시 70년대 검열의 제국과 맞물리면서 빛을 발한다. 무력하다는 것, 국가의 폭력과 억압 앞에서 완벽하게 무력하다는 것.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술에 취하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 영화의 시작은 지나치게 얄개스러워서 명량 학원물처럼 보이지만 감독은 과도한 조종의 표정들에서 느닷없이 출몰하는 젊은이의 울증을 포착한다. 60년대 최고의 한국 영화가 << 하녀 >> 라면 70년대 최고의 한국 영화는 << 바보들의 행진 >> 이다.
2 영화 << 술고래 barfly, 1987 >> 는 제목 그대로 술꾼에 대한 이야기다. 이 변두리 술집은 빈속에 잔술을 한입 털면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인생이 모이는 곳이다. 미키 루크가 온갖 진상과 주사를 부리는 주정뱅이로 등장하는데 그는 이 술집에서 또 다른 주정뱅이 여자를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잔술 주고받다가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치어스 ! 치어스 !! 치어스 !!!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였으나 이상하게도 인상에 남는 영화였다. 이 영화의 각본을 찰스 부코스키가 썼다는 사실은 먼 훗날에서야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찰스 부코스키라는 작가를 안 지 몇 년 안되기 때문이다. 찰스 부코스키는 술과 섹스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는데 나는 이 빈곤한 서사'가 마음에 들었다. 소설 << 여자들 >> 의 마지막 문장은 " 자지가 서질 않는다. " 였는데, 나는 이 마지막 문장 앞에서 숨이 턱턱 막혔다.
3 술독에 빠진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빠트리면 섭섭할 영화가 바로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1995 >> 이다. 좋아하는 술을 실컷 마시다가 죽겠다는 결심을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그때는 질질 짜면서 본 영화였으나 지금 다시 본다면 꽤나 실망할 수도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신파가 과도했던 영화로 기억된다. 나는 이상하게도 좋은 영화를 보게 되면 뒤풀이로 술을 마시는 버릇이 있었고 그것이 내가 영화에 빠져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어떤 영화를 보고 나서 뒤풀이 술집에서 만취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영화가 좋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할 말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 대학로에서 기타노 다케시의 << 키즈 리턴 >> 을 보고 나서 혼자서 대학로 공원 벤치에 앉아서 소주를 마시다가 정신줄 놓은 기억도 나고 << 밀리언 달러 베이비 >> 를 보고 나서 애인과 늦은 새벽까지 술을 마셨던 기억도 난다. 술맛은 훌륭한 안주가 아니라 훌륭한 이야깃거리가 좌우한다.
4. 고흐가 즐겨 마셨다는 압생트1) 한 잔 털고 싶다. 독하고 값싼 술이어서 가난뱅이 술꾼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압생트 하면 생각나는 영화는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이 연출한 << 토탈 이클립스 >> 이다. 연인이었던 랭보를 잃은 베를렌느는 술집에서 혼자 압생트 두 잔을 주문한다. 마신다. 환각 탓이었을까 ? 그 앞에 랭보가 나타나 그와 함께 잔을 나눈다. 이 영화에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치명적 매력을 엿볼 수 있다.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찾아 올까. 먼 나라의 어느 술집에서, 이렇게 외칠 수 있을까. " 압생트 투 ! "
1) 압생트(absinthe)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많이 마셨던 술로서 쑥의 줄기와 잎을 잘게 썬 다음 고농도의 알코올을 부어 방치한 후 추출하고, 방향 성분이 녹아 있는 이 추출액을 다시 증류하여 제조한다. 압생트는 알코올 도수(45-74%)가 강하고 당분을 포함하지 않는 암록담황색 술로서 아니스의 방향과 약간 쓴맛이 나서 식전주(apéritife)로 많이 이용하였다. 유럽에서는 쑥의 쓴맛으로 인한 약효로서 식욕부진과 위액 분비 촉진제로 많이 사용되어 왔다. 압생트는 향쑥의 라틴명 압신티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서 강력한 환각작용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예술의 도시인 프랑스 파리에서 화가, 소설가,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 사이에서 창조력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압생트를 상습적으로 마실 경우 건강에 좋지 못하다는 것이 점차 밝혀져 20세기 초반부터는 압생트 음주를 법으로 금하게 하였다. 압생트에는 튜존(thujone)이라는 테르펜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 성분은 압생트에 독특한 향취를 주는 성분이지만 뇌세포를 파괴하고 환각 상태를 유발한다. 압생트를 상습적으로 마심으로써 생기는 중독을 압시틴 중독증(absin-thism)이라 하며, 멍청한 상태, 정신력 저하, 신경과민, 안신경염 또는 환각 경험 등의 증상으로 나타난다고 보고되어 있다. 프랑스의 시인 알프레드 뮈세와 화가인 로트렉과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사람들이 모두 압생트의 중독으로 인한 간질발작으로 목숨을 잃거나 자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서 압생트의 생산이 중단되었으나 지난 1981년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가 합법화 결정을 내리면서 상당수 유럽 국가들에서 압생트의 생산이 다시 개재된 상태이며, 현재 200개 브랜드의 압생트가 생산되고 있다. 이들 유럽 국가들이 압생트의 생산을 개재한 이유는 압생트가 정신에 미친 영향이 많이 과장되었고 그 위험이 다른 술보다 그다지 높지 않으며, 유해물질의 농도는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는 주류 업계의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압생트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