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등장하신 꽃양배추님의 '격려'에 힘입어 20대 시절의 시를 한편 더 옮겨놓는다(이런 식이면 겨울내내 우려먹겠다). 제목은 <밥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1991)란 영화에서 따온 것인데, 찾아보니 빌 머레이 주연의 코미디 영화였다. 이젠 영화의 줄거리조차 기억에 없지만. 찾아보니, 극도의 결벽증과 폐소공포증만 아니라 괴상한 증상을 두루 가지고 있는 복합적 환자 밥 윌리(빌 머레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라고 한다. 아무려나 그 영화와 이 시의 공통점은 그냥 '밥(bob)'이란 소리에만 있을 뿐이다... 

붕어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항 속 금붕어에게 붕어밥 대신에 글자들을 넣어준다
어항 속 금붕어의 큼지막한 눈알에 글자들이 어린다
어항 속 금붕어의 붕어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항 속 금붕어는 눈알이 발개지도록 글자들에 열중한다
어항 속 금붕어는 배알이 뒤틀리며 글자들을 토해낸다
어항 속 금붕어는 빌어먹을 시를 쓴다
어항 속 금붕어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붕어밥을 넣어준다    
어항 속 금붕어는 큼지막한 눈알만 자꾸 끔벅거린다 

07.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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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7-11-1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싱싱한 금붕어 색깔을 보니.. 이 페이퍼를 읽고 선홍색 질투 포스를 뿜어내실 J님이 떠올라요. (J님, 그냥 웃자고요.^^)
다른 때 로쟈님은 비활성기체 아르곤 경Sir 같으신데요.
시를 읽으면 갑자기 실체가 느껴지면서 같이 떡볶이라도 한 접시 먹고 싶어져요.
겨울 내내, 라는 그 다짐! 잊으시면 안 돼요.^^

로쟈 2007-11-11 00:12   좋아요 0 | URL
이거 참 뒤로 빼지도 못하게 생겼네요.^^ 어쨌든 '격려'에는 감사. 꾸벅.

이리스 2007-11-11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시를 쓰시다니!! 저는 시인을 존경한단 말입니다아아아아~~~~

로쟈 2007-11-11 00:33   좋아요 0 | URL
등단시인도 아니고 '시인'이란 명함도 없으니까 존경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한겨레에서 이번주 '장정일의 책 속 이슈'를 옮겨놓는다. 같은 지면에서 지난 3주간 '우리시대 지식논쟁'으로 가라타니 고진이 제기한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가 다루어졌고 조영일(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44352.html), 최원식(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46074.html), 권성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47675.html)의 찬-반-종합의 의견이 제출되었다. 연재의 연장선상에 있는 건 아니지만 장정일의 '토'는 그와 함께 읽어봄 직하다. 덧붙이자면 나의 생각은 장정일의 견해에 가장 가깝다.  

한겨레(07. 11. 10) 무시할 수 없는 ‘문학 종언’ 경고

일본계 미국인인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기세 좋게 선언한 ‘역사의 종언’이 농담이 되고부터, 한국인들은 어떠한 일본제(製) ‘종언’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면 과장이 될까? 일본 출신으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활동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최근작 <근대문학의 종언>을 둘러싼 우리나라 문학계의 냉소를 보면, 그런 점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문학의 종언은 일본의 상황이지, 한국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의 주장은 간명하다. 근대 이전의 세계는 다수의 제국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 제국의 범위는 몇 개의 언어 권역과 일치한다. 동아시아라면 한자, 유럽이라면 라틴어, 이슬람이라면 아라비아어라는 식이다. ‘문자언어’의 성격이 강했던 이 세계어들은 제국의 주변부에 사는 보통 사람들이 읽고 쓰기가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제국은 수많은 지역 국가로 분절되기 시작했고, 근대 국가란 다름 아닌 ‘언문일치’의 국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문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근대 국가 만들기에 기여한다.

지은이에 의하면 근대문학이란 어느 장르도 아닌, 소설을 가리킨다. 소설은 신학이나 철학과 같은 이성 능력이 아닌 감성과 상상력을 통해 새로 생긴 시민계급에게 지적·도덕적 발견을 실어 나른다. 제국과 세계어라는 구심력에서 벗어나서만 비로소 쓰여지는 ‘언문일치’의 소설은 ‘공감’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하나로 묶고,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기반이 된다. 예컨대 일제 시대의 젊은이로 하여금 계몽과 해방의 주먹을 부르쥐게 했던 것은 이광수의 <무정>이고, 심훈의 <상록수>였다.

근대소설은 그 발생에서부터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 밖에서 종교가 추구하지 못하는 진실을 추구했고, 또 정치는 아니지만 정치의 영역 밖에서 정치가 억압하는 진실을 드러내 왔다. 대개 문학은 무력하고 무위이고 반정치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성공한 혁명이 곧바로 제도가 되어버리는 어느 정치혁명보다 더 혁명적이다. 그래서 장 폴 사르트르는 정치혁명이 보수화될 때 문학은 “영구혁명”을 계속한다고 했던 것이지만, 어느날 문학이 사회적 임무나 도덕적 과제를 벗어버린다면 그것도 ‘근대문학’일 수 있을까?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성취된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에서 문학은 대중문화에 투항하거나, 과민한 자의식만을 표현한다. 거기서 작가와 평론가들은 대학과 출판계에 안주하거나 투신하여 스스로 제도가 됨으로써, 사회적 ‘공감’ 능력을 잃게 된다.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의 종언’이 한국에서도 감지된다면서 “1990년대에 만났던 한국의 문예비평가 모두가 문학에서 손을 떼었다”고 썼지만, 최원식의 말대로 “내가 알기론 김종철을 제외하고 문학을 떠난 비평가는 없다.”(<한겨레> 10월 27일치 19면). 하지만 그걸 책잡아 ‘종언’이 주는 문제의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오만이다. 근 15년 동안 한국 문학이나 문학평론가들은 <녹색평론>을 능가하는 어떤 사회적 의제도 만들지 못했다. 유일하게 문학계를 떠난 그만이 그럴 수 있었다는 사실은, 결국 무엇을 반증하는 것일까?(장정일 소설가)

07. 11. 10.

P.S. 본문의 분량은 7.6매이다. 나는 짧은 원고들을 쓸 때 그보다 2-3매를 더 쓰면서도 매번 분량에 대해 투덜거리곤 했다. 문제는 분량이 아니라는 걸, 이 글에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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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11-10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지만 '종언'과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글이군요. 그런데 장정일 자신도 소위 "문학계"를 떠나지는 못한 것 아닐까요? 결국 자신도 "영구혁명가"는 아니라는 건데...

로쟈 2007-11-10 11:44   좋아요 0 | URL
문학은 끝났으니까 문학계를 떠나야 한다는 식의 반응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게 아닐까요?(정년을 맞이한 사람에게 당신은 할일을 다했으니 이젠 죽으시오, 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핵심은 오늘날에도 <무정>이나 <상록수>가 가능한가란 문제제기입니다. 요는 그게 여전히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거나(주장하는 게 아니라) 아니면 그만한 일을 문학바깥에서 해내는 것이죠(이 또한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문학바깥에 있다고 우월한 포지션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문학은 다른 용도도 갖고 있숩니다(가령 시로서의 문학)...

나디스 2007-11-10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 씨는 갈수록 정련된 인문학적 사유와 글쓰기를 보여주네요. ^^ 저도 요즘 대학원신문 리뷰가 7매라 매번 투덜거리는데(10매만 되어도 이주의 리뷰에 뽑힐 거라는!-_-;;), 각잡고 반성하렵니다...

로쟈 2007-11-10 20:48   좋아요 0 | URL
그게 7매짜리로군요.^^ 사실 짧게 쓰는 것도 공력이지요. (김훈의 표현을 빌면) 스트레이트문장으로...

자꾸때리다 2007-11-10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의 책을 펴본적도 없지만 제가 짐작하기로는 예전의 문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목적 (도덕적,사회적 etc....)이었는데 대문자 진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주로 철학에서 표상주의의 종언...) 이런 목적 추구가 불가능해졌고 따라서 유희적인 것이 문학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 뭐 이런 거 아닌가요?

로쟈 2007-11-10 20:50   좋아요 0 | URL
대문자 철학의 죽음과는 좀 무관한 거 같습니다. 보다 직접적인 건 고진도 예를 들고 있지만 (정치운동으로서) 학생운동의 종언과는 맥을 같이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꾸때리다 2007-11-10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문예 대회에 60만원 상금이 탐이 나서 시 좀 써보려고 하는데 좀 개그적인 마인드로 마구잡이로 대중음악 노래 가사 표절한 다음에 후기에다가 문학의 종언이니 저자의 종언이니 하며 헛소리를 좀 적고 싶군요. 이러면 바로 탈락이겠죠? ㅋㅋㅋ

로쟈 2007-11-10 20:51   좋아요 0 | URL
'헛소리'인 줄 다들 알아볼 텐데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11-11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나요.
장정일에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기 이름 뒤에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면,
이 글에서 전하고 싶은 바를 소설을 통해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더욱 크네요.

로쟈 2007-11-11 00:29   좋아요 0 | URL
지난번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서도 피력한 것이지만 장정일은 희곡쪽에 더 관심이 있고 그쪽으로 작품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2007-11-11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1 0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측근비리'는 한국 정계와 재계의 유구한 내력이다. 문제는 언제나 측근들만 족치는 데서 일이 마무리된다는 것인데, 최근 불거지고 있는 삼성 비자금 파문이나 BBK 스캔들의 경우엔 어떻게 마무리될지 두고볼 일이다. 언젠가 김영삼 정부때 한 시사적인 '측근비리' 사건에 힌트를 얻어서 썼던 시 한편을 옮겨놓는다(옮기면서 약간 수정했다). 이제나저제나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흰빨래들만 모아 푹푹 삶는다

흰빨래들만 모아 푹푹 삶는다 그래야 뒤탈이 없다
어지간한 측근들일수록 저렇듯 삶고 방망이로 두들겨야
뒷말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빨래의 알리바이다, 속옷들의 알리바이다 
우리는 이 점을 놓치면 안된다
흰빨래들을 믿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글부글
구워삶아진 빨래들의 정직성을 믿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말,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 한다
왜 하필 속옷들을 그렇게 삶아대는가
왜 속마음은 그만큼 삶고 두들겨 패지 못하는가
왜 만만한 측근들만이 십자가에 못박히는가
왜 그게 정말 속이 다 시원한 일인가
(고작 빨래를 삶았을 뿐인데!)
이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나는
빨래를 삶을 적마다 바로 이 문제에 골몰해 왔다
물론 빨래를 삶을 적에는, 불의 온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빨래 삶는 일의 정치성이요 이데올로기다
모든 사건의 배면이다 그걸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빨래를 태우면 안된다 구멍을 내도 안된다 
이건 현실이니까 이건 곧 현실이자 사랑이니까
결코 빨래를 태워서는 안되는 것이다 빨래만이
측근이라고 믿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얼마나 끓었는지 얼른 확인해야지

빨래나 빨리 갖다 널라고?

 97.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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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실이 2007-11-1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말려서 다시 쓰고 더러워지면 다시 삶고...
아니~ 혹시 이건 X세탁(?) ㅋㅋ

로쟈 2007-11-12 09:51   좋아요 0 | URL
독창적인 해석이십니다.^^

영남자파 2011-09-28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날로그의 심미성!
안티락스!!
다시와서 시들을 전부 읽어볼 것입니다만, 몇 편의 감상기를 남기자믄,
로쟈님이 언어를 부리는 뛰어난 재주로 인하여 감상자는 각 행마다에서 과한 전류감을 쮜릿쮜릿 느끼므로 머리가 너무 좋으면 돈다고 하듯이, 삘빨이 적정선을 넘어버려 휴머로 전환된다고 느껴집니돠.(이 시는 매우 탁월한 시로 여러 논문들이 탄생할 수도..)ㅋㅋㅋㅋㅋ
누가 삶고 누가 너느냐, 그저 관찰의 시점이냐하는 양성평등적, 여성학적 관점에서라든가,
구워삶아진에서 쪄삶아진을 얻은 어느 댓글러의 시를 낳을 것이고....



 

지난주 출간된 책으로 보관함에 들어있는 책들 중 하나는 이환 교수의 <몽테뉴와 파스칼>(민음사, 2007)이다. 발레리의 <말라르메를 만나다>(문학과지성사, 2007)처럼 대번에 주문하지 못한 이유는 물론 책값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요즘 1만원은 책값이 아니다!). 250쪽이 안되는 책이지만 정가로는 18,000원이나 하니 말이다. 대학 교재용 책들에는 턱없는 가격이 매겨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젠 웬만한 교양서들도 분량과 무관하게 2만원 안팎에서 책값이 결정된다. 도서정가제가 강화되면 거품이 걷힐 수 있을까? 두고 볼 일이다. 여하튼 가격만 관심사에서 제쳐놓는다면 책은 교양서로서 충분한 값어치를 할 거라고 믿는다. 저자가 이미 파스칼과 몽테뉴에 대한 연구서들을 내놓은 이 분야의 권위자이기 때문이다. 책의 부제는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인데, 물론 몽테뉴와 파스칼을 각각 이르는 말이겠다. 관련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7. 11. 10) 몽테뉴와 파스칼, 시대가 만든 영원한 라이벌

‘모랄리스트’란 프랑스의 고유한 지적 계보에 속하는 일군의 작가를 가리킨다. 수필이나 잠언 같은 비체계적 글쓰기 형식 안에 인간성에 대한 냉정하고도 신랄한 철학적 성찰을 담아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철학과 문학 중간쯤에서 독특한 사유를 펼친 사람들인 셈인데, 이 모랄리스트 계보의 맨 앞자리에 선 두 사람이 미셸 드 몽테뉴(1533~1592)와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이다. 1세기 가까운 시차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은 같은 모랄리스트이면서도 여러 지점에서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지적 라이벌이다.

몽테뉴는 <에세>라는 저작을 남겼고, 파스칼은 <팡세>라는 작품을 썼다.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유명한 질문으로 자신의 회의주의적 사색을 요약했고,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명제로 사상사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새겼다. 특히 삶에 관한 두 사람의 관점은 정반대라 할 정도로 달랐다. 몽테뉴가 무신론적 인본주의자였다면 파스칼은 신앙에서 출구를 찾은 기독교인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앉는다면 그 대결이 자못 격렬할 것이다. 불문학자 이환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몽테뉴와 파스칼>은 사색의 두 대가를 링 위에 올려 놓고 대결시킨 책이다.

지은이는 불문학 중에서도 파스칼 전공이다. “젊은 시절 파스칼에 이끌린 뒤로 줄곧 파스칼을 붙들고 살았다.” 그렇게 오래 매혹당하는 동안 <파스칼 연구>와 <파스칼의 생애와 사상>을 썼다. 그리고 파스칼에게서 자극받아 뒤늦게 몽테뉴에 도전해 몇 년 전 <몽테뉴의 ‘에세’>를 펴냈다. 이 정도면 두 사람을 한 링에 세울 만큼 준비가 된 셈이다.

세대가 다르니 만큼 두 사람이 실제로 대결할 기회는 없었지만, 가상의 대결을 펼친 적은 있다. 파스칼이 몽테뉴를 맞상대로 삼아 퍼부은 공격의 내용이 <팡세>를 비롯한 유작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파스칼이 마냥 몽테뉴를 거부했던 것만은 아니다. 파스칼은 몽테뉴의 <에세>를 평생의 애독서로 가까이 했고, 기독교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었다고 한다. 파스칼에게 몽테뉴는 애증이 교차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의 대결 지점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이냐’로 모인다. 몽테뉴가 살던 시대는 종교개혁의 후폭풍으로 신교와 구교 사이에 참혹한 내전이 벌어지던 때였다. 사람들은 서로 자신들의 신을 믿으라고 강요하며 유럽을 피로 물들였다. 몽테뉴가 본 것은 인간의 광기였다. 그 광기를 낳은 것은 ‘우리가 믿는 신만이 진짜 신’이라는 맹목적 신앙이었다. 몽테뉴는 이 독단적 맹신이야말로 삶을 파괴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가 내린 처방이 ‘회의’였다. 회의의 정신을 몽테뉴는 이렇게 묘사했다. “뒤흔들고, 의심하고, 따져묻고, 어떤 것도 단정하지 않고, 어떤 것도 다짐하지 않는 것.”

몽테뉴는 이렇게 발본적으로 의심하는 과정을 통해 모든 맹목적 믿음에서 해방될 수 있고 정신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자유로워진 정신이 볼 때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신 없는 세계의 유한한 삶’뿐이다. 몽테뉴는 절대니 영원이니 하는 불가능한 것을 포기하고 삶의 유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이 유한한 삶에 자족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평안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파스칼 시대에 몽테뉴의 가르침은 꽤 널리 퍼진 일반 교양이 되었다. 그러나 파스칼은 몽테뉴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종교전쟁이 끝나고 유럽이 안정기로 접어든 이 시기에 파스칼은 ‘불안’을 보았다. 그에게 인간이란 ‘위대함’과 ‘비참함’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존재였다. 인간은 갈대와 같은 존재여서 무한한 우주에 비하면 한없이 비참하다. 그러나 그렇게 미약한 존재가 전 우주를 사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없이 위대하다. 파스칼의 강조점은 ‘비참’ 쪽에 찍혀 있었다. ‘무’와 ‘무한’ 사이에 걸려 있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불안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고 파스칼은 생각했다.

파스칼이 보기에 몽테뉴는 이 근본적인 문제를 덮어버리고 그 위에서 적당히 삶을 즐기려고 한다. 몽테뉴처럼 의심만 하고 끝내서는 안된다. 의심의 끝을 뚫고 ‘초월’로 나아가야 한다. 기독교의 신에게 귀의함으로써 불안과 불행을 극복하고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파스칼의 생각이었다. <팡세>는 이렇게 기독교 변호론을 펼치는 책이다.

지은이는 두 사람의 대결이 “인간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영원한 대결의 한 표본”이라고 말한다. 몽테뉴는 삶이라는 것이 수많은 결함을 지녔음을 알면서도 낙관과 긍정으로 그 삶을 감싸려고 하고, 파스칼은 삶의 결함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절대자를 불러들인다. 절대자만이 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극복할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두 사람의 견해를 중립적으로 보여주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최종적으로는 파스칼 쪽으로 향한다.(고명섭 기자)

07. 11. 09.

Мишель Монтень Опыты. О человеческих поступкахБлез Паскаль Мысли

P.S. 이미지는 러시아어 문고본의 <엣세>와 <팡세>(나는 흔히 '경험'이라고 번역되는 러시아어 'opyt'가 불어 'essai'의 번역어라는 걸 얼마전에야 깨달았다). 리뷰를 읽으며 다시 확인하는 것이지만, 저자의 '최종적인' 입장과는 다르게 나는 (분류하자면) 몽테뉴주의자이다. 한편, 프랑스 계몽주의의 두 라이벌 볼테르와 루소라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당신은 누구의 편을 들겠는가?). 이 또한 누가 책을 써주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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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북리뷰들을 잠깐 훑어보다가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책에 대한 리뷰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국제정치학자 케네스 월츠의 <인간 국가 전쟁>(아카넷, 2007)이 최근에 나온 책이고, 저자의 명망과 책의 의의에 대해서 전재성 교수가 짚어주고 있다. 월츠의 책으론 <국제정치이론>(사회평론, 2000)이 소개된 바 있다.

경향신문(07. 11. 10) 국제정치 현상의 본질

2차 세계대전 이후 활동한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한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케네스 월츠가 거론될 것이다. 그만큼 월츠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중의 한 명이다. 국제정치학의 가장 중요한 이론 패러다임인 현실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고, 유럽에 비해 저발전되어 있던 20세기 미국의 국제정치학 이론의 초석을 놓는 데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은 현재와 같은 세계적 주도국의 위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국제정치에 대한 관심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 시기 미국의 국제정치학은 한스 모겐소와 같이 유럽에서 건너온 정치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츠는 미국의 시각에서 미국적 이론관을 가지고 미국의 외교정책에 도움이 되는 국제정치학을 시작한 국제정치학자이다. 냉전의 현실적 상황과 미국의 과학적 이론관의 배경에서 국제정치학 이론, 특히 신현실주의 이론을 만들어낸 중요한 학자이다.

book jacket

월츠의 ‘인간, 국가, 전쟁: 전쟁의 원인에 대한 이론적 고찰’은 출판된 지 50년이 되어 가지만, 여전히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는 20세기의 고전이다. 수학과 경제학으로 학문을 시작한 월츠는 국제정치를 과학적으로 이론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시도하였다. 월츠 이전의 국제정치학 이론들이 역사와 철학을 중시하였다면, 월츠는 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이론에 입각하여 국제정치이론을 만들고자 시도하였다.

1959년에 출간된 이 책은 컬럼비아대에서 작성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전하여 출간한 책이다. 월츠는 이후의 인터뷰 등을 통하여 ‘인간, 국가, 전쟁’을 미시경제학의 실증이론, 과학철학, 그리고 인류학 및 철학 등을 광범위하게 종합하여 저술한 책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만큼 국제정치 현상을 다른 학문 분과와 구별하여 과학적으로 이론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전쟁의 원인에 대한 고찰이지만, 월츠는 이 책에서 전쟁을 비롯한 다양한 국제정치 현상들의 원인을 밝히고자 노력하고 있다. 월츠는 인간, 국가, 국제정치 구조의 세 가지 분석 수준에서 국제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시각을 논하면서, 각각 ‘이미지’라는 비유를 붙이고 있다. 국제정치를 보는 첫 번째 이미지는 전쟁을 비롯한 국제정치 현상을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보는 방법이다. 두 번째 이미지는 국가의 성격, 즉, 민주주의, 독재 등 정권의 모습에 비추어 보는 방법이다. 세 번째 이미지는 국제정치의 독특한 구조에 비추어 국제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견해이다. 월츠는 전쟁과 같은 국제정치 현상의 원인이 무엇보다 세 번째 이미지, 즉, 국제정치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나 국내정치와 달리 국제정치는 주권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권국가는 국제기구, 세계정부와 같이 상위의 권위체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권한과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정부상태’적 조직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월츠는 이 책에서 기존의 다른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자신의 현실주의 이론을 만들어가고 있다. 월츠는 첫 번째 이미지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철학자인 스피노자, 두 번째 이미지를 강조한 칸트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국제정치구조의 세 번째 이미지를 제시한 루소의 시각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월츠는 루소의 ‘사슴사냥’ 이야기를 하나의 사례로 들어, 국제정치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다. 사냥에 나선 사냥꾼들은 협동하여 사슴을 잡으려 하지만,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는 토끼 한 마리가 나오면 다른 사냥꾼들과의 약속을 깨고 대오를 이탈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냥의 대오와 같은 관계의 짜임새, 상호작용의 구조가 개체들의 행동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냉전이 전개되면서 월츠의 이론은 미국의 외교정책은 물론, 다른 국가들의 정책관, 그리고 많은 학자들의 상상력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제정치구조가 냉전과 같이 양극체제로 되어 있는가, 혹은 다극, 패권체제로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구조적 원인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때문이다.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 주도의 패권체제로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이러한 월츠의 통찰력이 미국과 다른 국가들의 외교정책에 어떠한 지혜를 줄지가 궁금하다. 더구나 냉전의 영향력이 아직도 남아있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국제정치를 생각할 때 국제정치구조의 영향력은 여전히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월츠의 번역서는 매우 시의적절하고,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전재성|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07. 11. 09.

P.S. 책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기 위해서라도 참조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같은 지면에 실린 리뷰로, 석유 지정학과 20세기 전쟁을 다룬 윌리엄 엥달의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길, 2007)에 관한 기사도 눈길을 끈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저자에 따르면 단연 석유 때문이다.

경향신문(07. 11. 10) 석유와 무관한 전쟁은 없다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자꾸자꾸 예뻐지면 나는 어떡해. 거울 속의 나를 보면 정말 행복해. 미녀는~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꽃미남 배우 이준기가 출연한 한 음료 CF송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재기발랄한 누리꾼이 댓글을 달았다. “미국에서도 유사품 출시 예정. ‘부시는 석유를 좋아해’” 또 다른 네티즌의 패러디 버전이 이어진다. “미국은 석유를 좋아해. 자꾸자꾸 빼앗으면 우린 어떡해. 석유로 번 돈을 보면 정말 행복해. 미국은~ 미국은 석유를 좋아해.”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구실삼아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속셈은 막상 석유에 있다는 것을 비아냥거리는 풍자다. 최근의 전쟁들이 이처럼 한결같이 석유 지배권을 둘러싼 다툼이라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도 아니다. “세계를 지배하고 싶은가. 그러면 석유를 지배하라. 모든 석유를, 어디에서든.” 벨기에 저술가 미셸 콜론이 미국의 행태를 보며 씁쓸하게 던진 한 마디다. 사실 이 말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에너지를 지배하라, 그러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오래 전에 갈파한 것과 수사만 다를 뿐이다.



윌리엄 엥달이 쓴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원제 A century of war, Anglo-American oil politics and the new world order)은 바로 그 석유의 눈으로 본 한 세기의 역사다. 그것도 패권국가 영국과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을 겨냥한 것이다. ‘겨냥했다’는 표현은 미국의 언론인이자 비주류 경제학자인 글쓴이의 극히 비판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음모론이 전편(全篇)을 지배하는 게 아니냐고 또 다른 음모론적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를 만큼 신랄하다. 문장이 신랄한 게 아니라 고갱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양한 비밀문서와 자료를 바탕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빼앗아간다.

저자는 먼저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었던 것은 바로 석유의 중요성을 맨먼저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1882년 9월 영국에는 장차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비결은 석유에 있다는 전략적 함의를 꿰뚫고 있던 피셔 제독이 있었다. 당시 함장이던 그는 부피가 큰 석탄 화력추진형 군함에서 새로운 석유 연료형 군함으로 바꿔야 한다고 정부 관리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해 나갔다.

석유를 때는 디젤 모터로 동력을 얻는 전함은 연기를 전혀 내지 않아 적에게 들킬 염려가 없는 데 반해 석탄을 때는 배는 내뿜는 연기가 10㎞ 밖에서도 선명하다. 석탄 배의 모터는 4~9시간이 지나야 완전 가동되지만 석유 모터는 30분이면 충분하다. 전함 한 척에 기름을 공급하려면 12명의 인원이 12시간 작업하면 끝이지만 석탄 배는 500명의 인원이 5일 동안 작업해야만 한다. 다른 장점도 수없이 많지만 이 정도만 해도 더 비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괴짜 몽상가 취급을 당하던 피셔 제독의 의견이 먹혀들지 않았으면 영국의 미래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20세기 초 영국이 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었던 데는 석유가 있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종전협정 직후 연합군의 전승 만찬장에서 프랑스 상원의원이자 전시 석유총위원장인 앙리 베랑제가 “석유가 승리의 피였다”고 만찬사를 요약한 것만 봐도 알만하지 않은가. 독일이 철과 석탄에 대한 자국의 우위를 과신해 석유에 대한 연합군의 우위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석유를 가장 먼저 안 것은 막상 독일이었지만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석유가 세계사에서 또 하나의 중대한 고비가 된 것은 ‘일곱 자매(Seven Sisters)’로 불리는 영·미 카르텔의 탄생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경제질서를 형성한 브레턴우즈 체제가 미국과 영국의 세계 석유지배권과 맞닿아 있으며, 유럽부흥계획인 마셜 플랜도 미국의 5대 석유회사와 영국의 2대 회사가 결정적인 배후세력이었다고 저자는 논증한다. ‘일곱 자매’라는 별명을 처음 만들어 붙이고 이들 골리앗 카르텔과 맞서 싸우던 다윗이었던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 엔리코 마테이가 어느날 갑자기 비행기 사고로 숨지는 슬픈 비화에서는 비장감이 배어나온다.

냉전기간 동안 석유가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규정하고 소련이 붕괴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은이는 정곡을 찌른다. 이라크 전쟁을 비롯해 냉전 종식 이후 벌인 미국의 군사행동을 규율한 석유는 구 유고슬라비아연방이 해체되는 과정과도 직결돼 있다고 분석한다. 흔히 인종청소의 반인륜 범죄를 처단하기 위해 밀로셰비치 정권을 붕괴시킨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막은 미국의 석유 전략이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현대전쟁 가운데 석유와 무관한 전쟁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코소보 전쟁은 물론 아프리카 내전, 영국의 아르헨티나 공격 등도 하나같이 석유 때문이었음이 드러난다.

이 책에서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흥미로운 사실도 적지 않게 밝혀진다. 오일쇼크를 일으킨 주체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아니라 그들을 뒤에서 조종한 영국과 미국의 세력이었다든가,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각종 환경단체들이 석유업계의 후원을 받았다는 점 등이다. ‘검은 황금’ ‘현대 문명의 으뜸 재화’로 불리는 석유의 배럴당 100달러 돌파가 시간문제라는 기사가 연일 지면을 장식하는 지금 이 책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를 주고도 남을 듯하다.(김학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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