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몇 차례 다룬 것이지만, 영국의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저작이 일년 사이에 지난 일년 사이에 3권이나 번역돼 나왔다. <우리시대의 비극론>(경성대출판부, 2006), <성자와 학자>(한울, 2004),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2007)이 그 세 권의 책이다(<성스러운 테러>에 대해서는 두어 차례 페이퍼를 쓴 바 있다). 마침 연세대 대학원신문의 기획서평으로 '테리 이글턴 새롭게 읽기'가 다루어졌기에 자료삼아 옮겨놓는다(출처는 담비이다 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7135). 개인적으론 지난 겨울에 읽지 못하고 미뤄놓은 <우리시대의 비극론>을 이번 겨울에 읽을 계획이다(사실 원서를 찾지 못해서 미뤄놓았었다). 관심있으신 분들도 서평을 빌미 삼아서 독서계획을 꾸려보는 게 좋겠다.

연세대 대학원신문(제156호) '세련된’ 변증법이 아닌, 현실에 밀착된 변증법을 향하여

아일랜드 출신인 테리 이글턴의 첫 저서는 『망명자들과 이민자들: 근대 문학 연구』(1970)이다. 이 책은 제대로 된 20세기 영국문학은 영국 본토 출신 보다는 아일랜드 출신(제임스 조이스, 예이츠), 폴란드 출신(콘래드) 등 제3세계 출신이거나 영국 내의 제3세계라고 할 수 있는 빈한한 탄광출신 (D. H. 로런스)이거나, 미국에서 영국으로 귀화하거나(T. S. 엘리어트) 영국에서 미국으로 귀화 (W. H. 오든) 했던 작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문화주의가 횡행할 때에도 이글턴은 어디까지나 ‘우선적으로 계급과 민족을 거쳐서만’ 문학과 예술을 논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것이 이글턴적 맑스주의의 특이성을 구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노동계급 출신과 아일랜드 출신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

70년대 중반은 이글턴이 한참 알튀세를 받아들여서 매우 ‘영국적인’ F. R. 리비스의 이른바 휴머니즘적 문학이론 및 비평을 비판하고 나서던 때였다. 『비평과 이데올로기』(1976), 『맑스주의 문학이론』(1976) 등이 이 시기의 저서이다. 그 후 『발터 벤야민, 혹은 혁명적 비평을 위하여』(1981)와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 이론 등을 소개하는 『문학이론입문』(1983)을 쓰면서는 이전의 이른바 ‘과학주의적’ 비평에서 탈피하여 정치적 비평, 수사학적 비평을 주창하고 나섰다. 물론 이전의 작업에서 이미 ‘문학’과 ‘작가’의 아우라는 ‘생산’이라는 이름하에 탈신비화된 것이지만, 더 나아가 문학교육 및 연구제도 자체의 정치성을 전면화하면서 특히 ‘영문학’, ‘정전’ 등이 푸코적인 ‘권력’ 관계에 의하여 ‘구성’된 것임을 드러내었고, 그 파급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치적’ 비평을 표방하는데 있어서 문제는 푸코 이래로 모든 것이 ‘이미’ 정치적임이 밝혀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정치적’ 비평은 ‘더’ 정치적이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질적으로 다른 ‘정치’를 말하는 것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모든 것이 정치적임을 계속적으로 주장해야 하는 것인지 라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글턴이 이론적으로 명쾌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른바 헤겔주의적 혹은 아도르노적인 ‘정치성’(프레드릭 제임슨을 포함하여)은 ‘변증법’이라는 밤에 모든 대립을 해소해버린다고 비판하는 점에서,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저 계급적이고 민족적인 거친 현실, 그것을 직시하는 바로 그것이 정치라고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저 세련된 변증법이 밥 먹여주냐’라는 것이다. 이는 브레히트의 거친 진실, 혹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세속적’ 비평과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가장 생존과 직결되는 이 너무나 ‘자명한’ 것들이 ‘이론’과 ‘언어’라는 이름으로 증발되기 일쑤라는 점 또한 이 후기 자본주의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 언어의 힘을 믿어야 한다

『성자와 학자』(1987)라는 소설은 풍자와 위트라는 수사학을 동원하여 아일랜드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하는 한편, 그 참상이 참상임을 전달하는 데 있어 언어가 갖는 한계의 문제를 다루고, 1916년 부활절 봉기의 현실과 그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이 과연 헛된 죽음인지 아닌지를 논구하고 있다. 미하일 바흐친의 형인 니콜라이 바흐친은 먹고 마시는 데 탐닉하는 그야말로 바흐친적(카니발적) 인물인가 하면, 동성애적 욕망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내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혹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여기에 아일랜드 시민군 총사령관 제임스 코널리가 총살당하기 직전에 이들과 잠시 합류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코널리의 행위도 하나의 ‘언어 게임’이라고 주장한다. “그건 아마도 육체의 언어, 다시 말해서 죽음, 순교, 부활의 언어라고 부를 수 있겠죠. 다른 모든 언어를 번역해낼 수 있는 한 개의 순수한 언어요.” 이글턴의 결말에 의하면 코널리는 총살당함으로써 결국 하나의 언어로만 남지만, 그것은 “새 공화국의 탄생을 알리는 첫 울음소리”가 되고, 비트겐슈타인은 그 앞에서 통렬한 패배감에 사로잡힌다.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면 나는 끝장이다. 만약에 저 작자가 성공한다면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글턴은 실재 앞에서 언어는 무력하지만, 그 무력하다는 사실 또한 언어를 통해서 말해진다는 역설에 주목한다. 결국 언어의 힘을 믿어야 한다. 그의 노력의 상당 부분은 부르주아 혹은 우파가 전유물로 사용하는 언어를 해체하고 탈환하는 작업에 쏟아진다. 이는 단순히 미학적, 혹은 문학적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학 및 문학을 적극적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지점은, 문학 및 문학제도를 탈신비화시키고 정전논쟁과 ‘문학에서 문화로’라는 슬로건을 촉발시킨 장본인이 어째서 과거의 미학이나 문학에 ‘집착’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셰익스피어나 콘래드를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구현되어 있다고 비판한 다음 내치기보다는 역사와 정치의 장으로 끌어내어 수사학적 설득의 자료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가 넘나드는 영역은 광범위하다. 철학, 미학, 역사, 소설, 시, 희곡 등 그가 ‘정치적’ 수사를 위하여 동원하는 언어와 텍스트의 집적체는 방대하고, 특유의 신랄함과 위트로 무거운 주제들을 적절하게 요리하여 전달하는 재능은 놀라운 바가 있다.



비극을 낳는 실재로서의 자본주의

『우리 시대의 비극론(원제:달콤한 폭력?비극의 사상)』(2003)은 비극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비극론에 대하여 반기를 든다. 비극의 핵심이 죽음, 순교, 속죄양, 정화, 부활 등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신화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고통당하고 죽음을 당하며 내쳐지는 사람들이 있는 한 비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하나같이 그 안에 역설을 포함한다. 죽음과 순교는 각자의 몫으로 일어나지만, 공동체의 생존과 재생에 관여하고, 그것은 다시 말해 그러한 죽음을 필요로 할 만큼 공동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공포는 개개의 폭력적 죽음 자체에 대한 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죽음이 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전지구적 체계 즉 실재 자체가 공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이글턴은 비극이란 치명적인 하마르티아를 가진 영웅적 인물이 운명적으로 몰락하되 실재에 대한 비전을 얻는 것이라는 식의 비극론에 내재한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비극을 지금 이 시대에 전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핵심을 지구적 자본주의의 작동에 없어서는 안 될 희생양들, 박탈당한 다수의 계급현실에 두는 것이다. 이쯤에서 이글턴의 수사적 전략을 읽어 본다면, 비극이라는 고급화되어 있는 장르의 핵심을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부여함으로써 그 숭고함을 이 계급에게 돌리는 한편, 이 비극을 낳는 ‘실재’로서의 자본주의 현실을 환기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헤겔적인, 더 변증법적인

『성스러운 테러』(2005)는 이 비극론의 연장선상에서 종교와 윤리의 문제를 좀더 적극적으로 다룬다. 사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지적하고 있듯이 윤리의 문제가 전면에 대두한다는 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해결이 가로막혀 있다는 징후일 수 있다. 이를테면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부르주아가 완전히 패권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기대가 전무하던 시대에 박애주의에 기초한 종교분파들이 극성을 부리던 것을 상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윤리의 언어를 먼저 장악하는 쪽은 지배계층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유와 정의와 평등은 부르주아의 전유물이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이글턴은, 이 말들을 그냥 저들이 가져가 마음대로 쓰게 내버려둘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마치 니체가 선악의 계보를 따라가서 그 계급적 성격을 밝혀내듯이 계보학적으로 추적하고 해체하여, 탈환해야 것은 탈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테러라는 말은 지배계급이 그 타자에 대하여 사용하는 언어이다. 그런데 계보학적으로 따져 올라가보면 (이글턴은 아감벤의 작업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것은 희생양이 가진 ‘성스러움’의 이면이다. 이 양면성이 서로 분리가 되면 희생을 위한 희생이 되어버리거나, 폭력을 위한 폭력이 되어버려 단지 죽음충동의 먹이가 되고 만다. 아니면 희생과 폭력이 도구화되어 버려 그 성스러운 성격을 잃고, 목적과 수단이라는 이원론의 끝나지 않는 지리한 갈등 속에서 ‘테러리즘’이 된다.

이글턴은 데리다처럼 죽음 자체에 뭔가 불가해한 신비적인 측면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이 갖는 성스러움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삶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개인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접근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알랭 바디우와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른바 인간성 내지 ‘인권’을 본질화하게 되면 또다시 근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고 이것은 다시 다른 것을 수단화하는 테러리즘으로 갈 수 있음도 경계한다. 어쩌면 이글턴의 작업은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헤겔적인 것과 변증법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젝을 경유한 (지젝은 다시 라캉을 경유한다) 것이기는 하지만 헤겔이 이전보다는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보다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이경덕 연세대 영문과 강사)

07. 11. 13.

After TheoryFigures Of Dissent

P.S. 적어도 이글턴의 책 두 권 정도가 앞으로 국내에 더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내년에는 나올까?). <이론 이후>와 <반대자의 초상>이 그 두 권의 책이다. 하니 올해 나온 책들은 미뤄두지 말고 미리미리 다 읽어두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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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1-13 21:08   좋아요 0 | URL
<우리 시대의 비극론> 정도는 저도 읽어보려 합니다..

로쟈 2007-11-14 08:28   좋아요 0 | URL
확인들어갑니다.^^
 

엊저녁 약속이 있어서 광화문쪽에 나갔다가 오랜만에 교보에 들렀다. 일차적인 목표는 얼마전 번역돼 나온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경상대학교출판부, 2007)를 구입하는 것이었는데(기다려봤지만 알라딘에는 입고가 되지 않는다) 짐작대로 서가에 꽂혀 있었다. 아렌트의 <정치의 약속>(푸른숲, 2007)과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동문선, 2007) 등의 신간들도 눈에 띄었다(이 책들에 대해서는 따로 다룰 것이다). 역시나 책구경도 온라인보다는 오프라인의 실물 구경이 훨씬 '리얼'하고 '인간적'이란 생각을 다시 했다(무엇보다도 만질 수 있다는 것!).


이런 책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닿을 때 풀어놓기로 하고 잠깐 리뷰를 검색하게 만든 책은 정혜윤의 <침대와 책>(웅진지식하우스, 2007). 라디오를 듣지 않는지라(운전을 하지 않는 탓이 크겠다) CBS PD라는 저자의 직함이 내게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독서광이라는 것과 YES24의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는 것 정도가 '내가 들은 모든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란 부제는 물론 '침대'라는 타이틀에서 연상할 수 있는 '어떤 것'(어떤?)일 테지만, 잠시 훑어본 책과는 무관해 보인다. '관능적인'이란 말이 '쾌락주의적'이란 말의 동의어로 쓰인다면 수긍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쾌락인가? "나는 마지막 졸음이 쏟아지는 순간 손을 뻗어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책을 읽는 버릇이 있다."(7쪽)란 구절이 말해주는 쾌락이다. 즉, '잡히는 대로' 혹은 '닥치는 대로' 읽기. 그리고 '독서기'도 마찬가지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로 쓰기. 그게 침대에서 누워/엎드려/뒹굴며 책읽기의 노하우이다.

저자가 서두에 싣고 있는 그림은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방>(1931)이다. 이렇게 적어놓았다: "<호텔방> 그림 속엔 홀로 있는 여자가 나온다. 그 여자는 여행중인 듯 침대 옆에는 여행가방이 놓여 있다. 그런데 그녀는 여행가방을 풀지도 않은 채 붉은 속옷만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걸터앉은 그녀가 하는 일은 두툼한 책 한권을 읽는 것이었다. 책읽기에 꽤 몰두한 그녀의 방은 어두웠고 가구는 무미건조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고개 숙인 목선만큼은 어두운 방안에서도 오롯이 아름다웠다. 나는 그 그림에 몹시 끌렸다. 여행지의 낯선 호텔에서 샤워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은 현실 속의 나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피곤과 불안과 염려와 설렘과 기대와 내일의 일을 책으로 대치해버리는 것은 나의 가장 오래된 버릇이니까."(6쪽) 그래서 '침대와 책'이다(당신의 기대와는 좀 다른 것 아닌가?). '관능'은 책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이고. 

저자가 싣고 있지 않지만 호퍼의 <호텔방>과 짝을 이루는 그림은 아마도 <객차>(1938)일 듯싶다. 여기서는 객차에서 여행중인 한 여인이 정장에 모자를 쓴 채로 책을 읽고 있다. 굳이 책을 읽는 포즈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로선 침대보다는 객차를 고르겠다(개인적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여행중이라는 것, 혼자라는 것, 그리고 얼마간 익명적이라는 것(우리는 두 여인의 정확한 인상을 알지 못한다) 등이 두 그림의 공통점이다. 책이 두 인물을 더 외로워 보이게 만드는지, 아니면 그래도 덜 외로워 보이게 하는지는 판별하기 어렵다. 여하튼, 삶이라는 여정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면 우리는 저마다 책 한권씩 손에 들고 각자의 외로움을 견디거나잠시 잊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 시간이다...

07.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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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둑 2007-11-13 09:15   좋아요 0 | URL
객차 그림도 만만치 않은 아우라가....누구 그림인가요? 이것도 역시 호퍼?

로쟈 2007-11-13 17:14   좋아요 0 | URL
물론 호퍼입니다...

2007-11-13 1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3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11-13 20:24   좋아요 0 | URL
제 책읽기 방식과 흡사해요. 침대에서 앉았다 누웠다 엎드렸다 하면서..
관능은 책의 안에 있다,,,
시사인에 소개된 님의 서재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사진이 아주 자연스럽게 잘 나왔어요.^^ 괜히 반가웠습니다.

로쟈 2007-11-13 20:49   좋아요 0 | URL
저도 아침에 읽었습니다.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수유 2007-11-13 21:09   좋아요 0 | URL
책을 읽기 위해서는 풍경에서 멀어져야 하는군요.^^

로쟈 2007-11-13 21:13   좋아요 0 | URL
사실 모든 외부와 '차단'해야 하는 것이니 독서만큼 이기적인 행위도 드물지요.^^;

Mephistopheles 2007-11-14 03:10   좋아요 0 | URL
그림 속의 여인처럼 자세 잡고 침대에서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3분이 채 되기도 전에 바로 드러눕는 자세로 돌변해버리는군요..

로쟈 2007-11-14 08:27   좋아요 0 | URL
지속가능한 포즈는 아니죠.
 

오늘은 도스토예프스키의 탄생 186주년이 되는 날이다. 저녁 무렵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오는데, 아이가 오늘이 '빼빼로데이'라고 얘기해주는 바람에 떠올리게 됐다. 작년 11월 11일에 올린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997543)에도 적었듯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일이 신력으로 11월 11일이다(그래서 잊어먹기가 좀 어렵다). 185주년만큼의 의미를 갖는 건 아니어서 러시아신문에도 '오늘의 소사(小史)' 같은 란에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가 뭐해서 잠시 시간을 내 르네 웰렉이 편집한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열린책들, 1987)를 꺼내들고 영국작가 D. H. 로렌스가 쓴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종교재판장> 서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한 장인 <대종교재판장>은 흔히 <대심문관>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대심문관>에 대한 러시아의 이해는 이종진 편역, <도스토예프스키 대심문관>(한국외대출판부, 2004)를 참조할 수 있다. 이하에서 '종교재판장'은 '대심문관'으로 바꿔서 인용한다).

사실 로렌스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호의적인 작가가 아니다. 동료 비평가의 도스토예프스키 숭배에 반발하면서 그는 (웰렉이 인용하는 바에 따르면)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증오와 어둠 속을 미끄러져 다니다가 빛을 쪼이기 위해 사랑, 온갖 사랑을 부르짖는 쥐같은 놈이다."(28쪽)라고 말했다. 가끔 인용해먹는 구절인데 원문은 이렇다: "I don't like Dostoevsky. He is like the rat, slithering along in hate, in the shadows, and in order to belong to the light, professing love, all love."

그럼에도 로렌스는 <대심문관>의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는 최소한 양가적인 태도를 보인다. '"단지 하찮은 것(just rubbish)'처럼 생각된다고 폄하하면서도 그는 다시 읽은 <대심문관>에서 뭔가 의미있는 대목을 발견한다: "나는 아직도 냉소적이며 악마적인 하찮은 과시를 본다. 그러나 그 밑에서 나는 최종적이며 답변할 수 없는 그리스도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치명적이며 파괴적인, 인류의 오랫동안의 경험으로 증명된 답변할 수 없는 요약이다."(150쪽) 그러니까 이 작품에 대한 로렌스의 매혹은 전적으로 대심문관-이반의 그리스도 비판에 대한 공감에 근거한다.

"만일 누가 대심문관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반 자신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이반은 반란하는 인간의 사고하는 정신으로, 즉 모든 사물을 쓰라린 종말 안에서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그는 물론 사고하는 러시아의 혁명가와 동일한 유형이다. 이반은 물론 정열적인, 영감을 띤 자아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색하는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다."

로렌스의 명명을 빌면, 카라마조프의 삼형제는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세 자아이고, 세 분신이다. 이반=사색적 자아(thoughtful self), 드미트리=정열적 자아(passional self), 알료샤=영감을 띤 자아(inspirational self). 물론 로렌스가 단연 맘에 들어하는 인물은 이반 카라마조프이다(반면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알료샤를 편드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아예 이렇게 말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을 반쯤은 증오한다. 요컨대, 이반은 세 형제 중에서 가장 중추적인 인물이다. 격렬한 드미트리와 영감을 받은 알료샤는 결국 이반의 분파(offset)일 뿐이다."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옮기면, "하지만 결국 이반이야말로 삼형제 가운데 가장 위대하며 핵심적이다. 열정적인 드미트리나 신앙 깊은 알료샤도 궁극적으로는 이반의 곁가지에 불과하다."(Yet, after all, Ivan is the greatest of the three brothers, pivotal. The passionate Dmitri and the inspired Alyosha are, at last, only offsets to Ivan."

그에 따른 총평: "우리는 대심문관이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예수에 대한 최종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다. 그 견해란 노골적으로 '예수여, 당신은 무력하다'라는 것이다. 인류는 당신의 잘못을 지적해야만 한다. 그리고 알료샤가 이반에게 한 것처럼 예수는 마침내 대심문관에게 묵인의 입맞춤을 한다. 영감을 받은 두 사람은 자신들의 영감의 불충분함으로 인정하고, 사려깊은 사람은 완전한 조정의 책임을 수락해야만 한다."

여기서 '영감을 받은 두 사람(two inspired ones)'은 물론 각각 대심문관과 이반에게 키스하는 그리스도(예수)와 알료샤를 가리킨다. 그리고 '사려깊은 사람(the thoughtful one)'은 대심문관이고. 로렌스가 보기에 그리스도의 키스는 자신의 무력함을 자인한다는 의미이고 그 뒤치다꺼리(완전한 조정)는 모두 대심문관의 몫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대심문관이 그리스도를 비판하기 위해 내세우는 인간의 세 가지 약점은 기적과 신비, 그리고 권위에 대한 요구이다. 그리스도의 불찰은 이 요구들을 간과하면서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것. 인류의 본성에 대한 대심문관의 요약은 아래와 같다.

"이 기적, 신비, 권위의 세 가지 요구가 인간이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막는다. 그것들이 인간의 '약점'이다. 다만 소수의 선택된 사람만이 빵, 기적, 신비, 권위의 절대적 요구를 끊어버릴 수 있다. 그들은 강력한 사람들이고 기독교도들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모든 요구의 실혐만큼이나 신과 같아야 한다. 나머지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은 아기들, 혹은 어린애들이나 바보들이며, 그들은 '너무나 무력하고 너무나 악할 뿐만 아니라 한푼의 값어치도 없는 반역자들'이기 때문에 심지어는 그들에게 주어진 지상의 빵조차도 공평히 분배할 능력이 없다." (151쪽) 

한마디로 대다수 인간들은 그리스도의 기대와는 달리 어중이떠중이들이라는 것이다(루쉰식으로 말하면 대다수가 '아Q'들인 셈).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인지? "예수의 무력함은 기독교가 인간들, 거대한 집단으로서의 인간에게는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에 있다. 기독교는 소수의 '성자들'이나 영웅들만이 깨달을 수 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인간이란 자신이 지탱할 수도 없을 정도의 짐을 지고 있는 말과 같다."

사실 여기서의 '기독교'는 '사회주의'로 대체해도 무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http://blog.aladin.co.kr/mramor/1010978 참조).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요구하는 사회주의 또한 인간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 근거하며(역사에 대한 터무니없는 낙관은 거기에서 나온다)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인간들이란 소수의 '영웅들'(=성자들), 곧 혁명가들밖에 없다. 어중이떠중이들은 체게바라의 티셔츠를 입는 것으로 체게바라-되기를 대신한다(http://blog.aladin.co.kr/mramor/828441http://blog.aladin.co.kr/mramor/924030 참조).

이에 따른 자연스런 귀결: "그렇다면 기독교란 이상일 뿐이고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 본성이 해낼 수 있는 만큼 이상을 요구하므로 실현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살아남을 수 있고 실용적인 책략을 얻기 위하여, 대심문관 자신과 같은 약간의 선택된 사람들은 다른 위대한 영, 악마에 의지하여, 그 위에 교회와 국가를 건설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이상으로서의 기독교'와 대비되는 대심문관의 교회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으로서의 공산주의'에 대비되는 현실사회주의(스탈린주의)가 아니었던가.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예수는 인간이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 즉 자유롭고 무제한의 인간을 사랑했다. 대심문관은 모든 제한을 가진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한다." 물론 여기서 인간에 대한 대심문관의 사랑이 '경멸'과 구별되지 않는 사랑이라는 건 염두에 두어야겠다.  

그리하여, 다시 로렌스로 돌아오면, "인간 본성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진단은 간단하면서도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그렇다는 것에 대해서 수긍하고 동의해야만 한다. 심지어 빵을 분배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인간은 너무나 악하고, 심술궂고 또 다른 그 무엇 때문에 스스로 빵조차 분배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해야 한다. 빵을 분배받기 위해서는 그는 차르나 레닌과 같은 절대적 권위에 빵을 넘겨주어야만 한다..."

"대다수의 인간이 삶이란 위대한 실재이며, 진정한 삶은 밝은 생명(*살아있는 삶), '하늘의 양식'으로 우리를 채우며, 지상의 양식은 단지 이것을 보좌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니다. 인간은 이 단순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고, 한번도 이해한 적이 없다..(...) 단지 소수의 능력있는 영웅들, 혹은 '선택된 자들'만이 이것의 뚜렷한 차이를 알고 있다. 대중은 그것을 볼 수 없으며, 결코 보지 않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마도 그리스도가 보지 못한 이 무서운 진실을 깨달은 최초의 인간이었다."(153쪽) 

이런 정도가 로렌스가 평가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진단이고 통찰이다. 여기에 이어지는 것은 '지상의 양식'에 대한 로렌스 자신의 견해인데, 그걸 마저 적는 건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할 듯싶다. 대신에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로렌스의 태도를 집약해주는 한 문단만 더 옮겨적는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서 언제나 그렇듯이 놀라운 통찰력을 불온한 사악함과 융합되어 있다. 어느 것도 순수한 것은 없다. 그의 예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은 예수에 대한 괴퍅하고 독기어린 증오와 혼합되어 있고, 악마에 대한 그의 도덕적인 적개심은 악마에 대한 비밀스런 숭배와 혼합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언제나 괴퍅하고, 항상 불순하며, 늘 악을 생각하는 놀라운 예언자이다."(152쪽)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Dostoevsky is always perverse, always impure, always an evil thinker and a marvellous seer."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그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아래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

07.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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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1-1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르네 웰렉이 편집한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열린책들, 1987)에 확 반가운 마음이.. 내 책장에도 꽂혀있네요..

확실히 여아들이 민감해요.. 우리 조카는 빼빼로데이에 아무런 멘트, 관심 표명 없던데 말이죠..닌텐도에 빠져서..

로쟈 2007-11-12 00:15   좋아요 0 | URL
아이는 이미 금요일에 선물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에는 유익한 논문들이 많이 실려 있는데, 절판되어서 유감입니다...

소경 2007-11-12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정보를 취하는 즉시 구입해야할 여력이 필수군요. 이리 후회거리가를 많이 껴앉고 나자빠지지 않을려면요.


로쟈 2007-11-12 08:57   좋아요 1 | URL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해서라면 바흐친의 책마저 품절된 상태이니 옛날이 훨씬 사정이 좋았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영어권만 하더라도 꾸준히 좋은 연구서들이 나오고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뭉실이 2007-11-12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심문관에 공감이 가는 이유는 저 자신이 완전하지 못한,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절대 소수의 영웅이 될수 없음을, 불혹의 나이에도
절대 불혹일수 없는.

위의 빨간(?) 사진은 체게바라의 사진을 연상시키네요.^^

로쟈 2007-11-12 09:50   좋아요 0 | URL
체게바라와 그리스도를 합성한 것이니까요.^^

소경 2007-11-12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업으로 인류-고고학분야에 종사코 싶은데 오히려 로쟈님 덕에 인문학쪽으로 너무 자주 우회 하네요 ^^ 답글에 열정이 홀라당 다른 쪽으로 흘러 가니.
D.H 로렌스의 마지막 언급은 충격적이네요...

로쟈 2007-11-12 16:17   좋아요 0 | URL
인류학-고고학이 인문학 '바깥'은 아닌 거 같은데요.^^
 

영문학의 대표적인 여성작가 5인에 대한 비평서 에드워드 멘델슨의 <인생의 일곱계단>이 번역돼 나왔다. 다섯 작가의 작품 일곱 편을 인생의 여정에 따라 읽어보는 것이 취지. "창조된 자의 근원적 공포를 그린 <프랑켄슈타인>(메리 셸리), 어린 시절의 일체감을 잃어버린 남녀의 비극을 그린 <폭풍의 언덕>(에밀리 브론테), 한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을 그린 <제인 에어>(샬럿 브론테),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와 버지니아 울프의 세 작품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막간>"을 따라가는 여정이 인생의 일곱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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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일곱 계단
에드워드 멘델슨 지음, 김정미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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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탄생 : 창조된 자의 근원적 공포 -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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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 일체감을 잃어버린 남녀의 비극 -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워더링 하이츠- 인문학연구소고전총서서양문학 8
에밀리 브론테 지음, 유명숙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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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철도 다가오는 김에 '배추꽃밭'이란 시를 옮겨놓는다. 역시나 오래전 시이다. 그래도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 이후에 쓰인 것이다. 왜냐면 '배추 포기를 떠나며'란 구절은 그 제목을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옮겨놓은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론 '말장난'에 기대고 있다(이건 기본적인 트레이닝이기도 하다). 실상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자족적인 시를 쓰는 게 젊은 날 나의 시작(詩作) 목표였다. 그건 불가불 언어유희적 성격을 띠게 된다. '나리 나리 개나리'하는 식이다. 영국의 계관시인이었던 테드 휴즈가 <시작법>에서 시쓰기를 사냥이나 낚시에 비유했던 듯하다. 내 생각도 그러했다...

 

배추꽃밭

꽃밭, 배추꽃밭, 배추에도 꽃이 피나
꽃밭, 흰나비들 날아다니고 배추
속잎 언저리에 미우나 고우나 배추벌레
삶은 벌레들의 벌레다운 의지
푸르게 푸르게 숨쉬는 의지
꽃밭, 배추꽃밭, 배추에도 꽃은 피지
속잎 언저리에 포개고 포개어진 배추벌레
푸르게 푸르게 갉아먹으며
배추 포기마다 단란한 벌레의 삶
기필코 나 이젠 벌레가 아니야, 아니야
꽃밭, 배추꽃밭, 백기를 들고 날아오른다
고름이 터지듯 환하게 화끈하게
한번은 그런 날이 오는 것이지
삶을 포기하듯 배추 포기를 떠나며
벌레 같은 삶을 떠나며
꽃밭, 배추꽃밭, 퍼렇게 멍든 사랑
속마음 언저리에 미우나 고우나 당신
맹세코 이젠 떠나며 자꾸 자꾸 떠나며
꽃밭, 배추꽃밭, 굵은 소금 뿌린다

꽃밭, 배추꽃밭, 배추에도 꽃이 피나
사무친 마음에도 배추 겉절이에도- 

07.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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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1-11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某씨의 '자족적인'시들이 자꾸 오르네요..^^ 저 한자 맞았나 몰겠네요.

로쟈 2007-11-12 00:16   좋아요 0 | URL
네, 자꾸자꾸 오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뭉실이 2007-11-12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장이라고 하시니 갑자기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

로쟈 2007-11-12 09:50   좋아요 0 | URL
어깨가 빠진다고들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