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출간된 책으로 보관함에 들어있는 책들 중 하나는 이환 교수의 <몽테뉴와 파스칼>(민음사, 2007)이다. 발레리의 <말라르메를 만나다>(문학과지성사, 2007)처럼 대번에 주문하지 못한 이유는 물론 책값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요즘 1만원은 책값이 아니다!). 250쪽이 안되는 책이지만 정가로는 18,000원이나 하니 말이다. 대학 교재용 책들에는 턱없는 가격이 매겨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젠 웬만한 교양서들도 분량과 무관하게 2만원 안팎에서 책값이 결정된다. 도서정가제가 강화되면 거품이 걷힐 수 있을까? 두고 볼 일이다. 여하튼 가격만 관심사에서 제쳐놓는다면 책은 교양서로서 충분한 값어치를 할 거라고 믿는다. 저자가 이미 파스칼과 몽테뉴에 대한 연구서들을 내놓은 이 분야의 권위자이기 때문이다. 책의 부제는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인데, 물론 몽테뉴와 파스칼을 각각 이르는 말이겠다. 관련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7. 11. 10) 몽테뉴와 파스칼, 시대가 만든 영원한 라이벌

‘모랄리스트’란 프랑스의 고유한 지적 계보에 속하는 일군의 작가를 가리킨다. 수필이나 잠언 같은 비체계적 글쓰기 형식 안에 인간성에 대한 냉정하고도 신랄한 철학적 성찰을 담아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철학과 문학 중간쯤에서 독특한 사유를 펼친 사람들인 셈인데, 이 모랄리스트 계보의 맨 앞자리에 선 두 사람이 미셸 드 몽테뉴(1533~1592)와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이다. 1세기 가까운 시차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은 같은 모랄리스트이면서도 여러 지점에서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지적 라이벌이다.

몽테뉴는 <에세>라는 저작을 남겼고, 파스칼은 <팡세>라는 작품을 썼다.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유명한 질문으로 자신의 회의주의적 사색을 요약했고,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명제로 사상사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새겼다. 특히 삶에 관한 두 사람의 관점은 정반대라 할 정도로 달랐다. 몽테뉴가 무신론적 인본주의자였다면 파스칼은 신앙에서 출구를 찾은 기독교인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앉는다면 그 대결이 자못 격렬할 것이다. 불문학자 이환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몽테뉴와 파스칼>은 사색의 두 대가를 링 위에 올려 놓고 대결시킨 책이다.

지은이는 불문학 중에서도 파스칼 전공이다. “젊은 시절 파스칼에 이끌린 뒤로 줄곧 파스칼을 붙들고 살았다.” 그렇게 오래 매혹당하는 동안 <파스칼 연구>와 <파스칼의 생애와 사상>을 썼다. 그리고 파스칼에게서 자극받아 뒤늦게 몽테뉴에 도전해 몇 년 전 <몽테뉴의 ‘에세’>를 펴냈다. 이 정도면 두 사람을 한 링에 세울 만큼 준비가 된 셈이다.

세대가 다르니 만큼 두 사람이 실제로 대결할 기회는 없었지만, 가상의 대결을 펼친 적은 있다. 파스칼이 몽테뉴를 맞상대로 삼아 퍼부은 공격의 내용이 <팡세>를 비롯한 유작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파스칼이 마냥 몽테뉴를 거부했던 것만은 아니다. 파스칼은 몽테뉴의 <에세>를 평생의 애독서로 가까이 했고, 기독교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었다고 한다. 파스칼에게 몽테뉴는 애증이 교차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의 대결 지점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이냐’로 모인다. 몽테뉴가 살던 시대는 종교개혁의 후폭풍으로 신교와 구교 사이에 참혹한 내전이 벌어지던 때였다. 사람들은 서로 자신들의 신을 믿으라고 강요하며 유럽을 피로 물들였다. 몽테뉴가 본 것은 인간의 광기였다. 그 광기를 낳은 것은 ‘우리가 믿는 신만이 진짜 신’이라는 맹목적 신앙이었다. 몽테뉴는 이 독단적 맹신이야말로 삶을 파괴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가 내린 처방이 ‘회의’였다. 회의의 정신을 몽테뉴는 이렇게 묘사했다. “뒤흔들고, 의심하고, 따져묻고, 어떤 것도 단정하지 않고, 어떤 것도 다짐하지 않는 것.”

몽테뉴는 이렇게 발본적으로 의심하는 과정을 통해 모든 맹목적 믿음에서 해방될 수 있고 정신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자유로워진 정신이 볼 때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신 없는 세계의 유한한 삶’뿐이다. 몽테뉴는 절대니 영원이니 하는 불가능한 것을 포기하고 삶의 유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이 유한한 삶에 자족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평안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파스칼 시대에 몽테뉴의 가르침은 꽤 널리 퍼진 일반 교양이 되었다. 그러나 파스칼은 몽테뉴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종교전쟁이 끝나고 유럽이 안정기로 접어든 이 시기에 파스칼은 ‘불안’을 보았다. 그에게 인간이란 ‘위대함’과 ‘비참함’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존재였다. 인간은 갈대와 같은 존재여서 무한한 우주에 비하면 한없이 비참하다. 그러나 그렇게 미약한 존재가 전 우주를 사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없이 위대하다. 파스칼의 강조점은 ‘비참’ 쪽에 찍혀 있었다. ‘무’와 ‘무한’ 사이에 걸려 있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불안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고 파스칼은 생각했다.

파스칼이 보기에 몽테뉴는 이 근본적인 문제를 덮어버리고 그 위에서 적당히 삶을 즐기려고 한다. 몽테뉴처럼 의심만 하고 끝내서는 안된다. 의심의 끝을 뚫고 ‘초월’로 나아가야 한다. 기독교의 신에게 귀의함으로써 불안과 불행을 극복하고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파스칼의 생각이었다. <팡세>는 이렇게 기독교 변호론을 펼치는 책이다.

지은이는 두 사람의 대결이 “인간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영원한 대결의 한 표본”이라고 말한다. 몽테뉴는 삶이라는 것이 수많은 결함을 지녔음을 알면서도 낙관과 긍정으로 그 삶을 감싸려고 하고, 파스칼은 삶의 결함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절대자를 불러들인다. 절대자만이 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극복할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두 사람의 견해를 중립적으로 보여주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최종적으로는 파스칼 쪽으로 향한다.(고명섭 기자)

07. 11. 09.

Мишель Монтень Опыты. О человеческих поступкахБлез Паскаль Мысли

P.S. 이미지는 러시아어 문고본의 <엣세>와 <팡세>(나는 흔히 '경험'이라고 번역되는 러시아어 'opyt'가 불어 'essai'의 번역어라는 걸 얼마전에야 깨달았다). 리뷰를 읽으며 다시 확인하는 것이지만, 저자의 '최종적인' 입장과는 다르게 나는 (분류하자면) 몽테뉴주의자이다. 한편, 프랑스 계몽주의의 두 라이벌 볼테르와 루소라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당신은 누구의 편을 들겠는가?). 이 또한 누가 책을 써주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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