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더 좁게는 이번주 신간들 가운데 가장 '비싼' 책은 할 포스터 등 쟁쟁한 미술사가, 이론가들이 쓴 <1900년 이후의 미술사>(세미콜론, 2007)이다. 704쪽 분량이고 정가로는 95,000원. 방대한 미술사책이어서 도판이 안 들어갈 수 없고 그만큼 가격도 '업'된 경우이겠지만 이 정도면 바로 원서로 구입해야 하나 좀 망설여지긴 한다(도서관에서 몇 번 볼 때마다 주문을 해야 하나 망설이긴 했지만). 보급판(2005)으로 나온 원서의 경우 두 권을 합한 가격이 67달러이므로 배송료를 더해도 국역본보다 저렴하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의 책값은 이젠 '번역료'에다 '저작권료'가 더해져서 영미권의 원서보다 비싸다.

아무려나 그 두께와 가격만큼 올해 나온 가장 비중있는 미술책으로 보인다. 세미콜론이란 출판사는 낯선데, 알고보니 <씬시티>나 <300> 같은 프랭크 밀러의 만화책을 출간한 곳이다. 아직 언론리뷰들은 뜨지 않아서 출판사의 소개 정도만 읽어본다.

1900년 이후부터 최근인 2003년까지 연도별로 서술된 현대미술사 저술의 결정판. 이보다 더 명성 있는 저자들, 상세한 내용, 명쾌한 분석, 풍부한 도판을 만날 수 있는 책은 당분간 만나기 힘들 듯하다. 각 저자들은 현대미술사의 핵심인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반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이후 미술사의 쟁점들을 점검하고 주요 미술가, 작품, 저작, 전시 등에 대해 서술하여 복잡한 현대미술의 갈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준다. 오늘날 미술사 연구에서 각광받고 있는 정신분석학, 예술사회학, 구조주의와 형식주의, 후기구조주의의 방법론에 대해 개설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각 저자들의 난상토론이 담긴 두 편의 라운드테이블, 현대미술과 철학 관련 용어 해설, 자세한 찾아보기 등을 수록하여 현대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생은 물론, 심도 있는 논의를 원하는 연구자 및 미술가들에게 귀중한 자원이 될 것이다.

"공부하는 학생은 물론, 심도 있는 논의를 원하는 연구자 및 미술가들"이 아닌 경우에는 그냥 장서용으로 꽂아둠 직하다. 그런 게 '교양'이므로...

07. 10. 27.

P.S. 20세기 미술사에 관한 참고서가 더 있나 찾아보니 <옥스퍼드 20세기 미술사전>(시공사, 2001)이 눈에 띈다. <1900년 이후의 미술사>와 같이 보면 좋겠다 싶은데, 품절이다. 대략 이런 책이라 한다.

20세기는 미술사에 있어 그 어느 시기보다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미술 활동이 전개되었던 시기. 미술사 전반을 포괄하면서 현대 미술의 뚜렷한 특징이 되어 온 사조와 사상, 그리고 개성적인 미술가들을 상세하고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는 미술사전이다. 1,800여 명에 달하는 전 세계 미술가의 생애와 활동, 작품 경향과 20세기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상세하고 깊이 있게 다루며, 세잔, 고갱 등 20세기 미술의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19세기 말의 주요 미술가도 보완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등 19세기 말의 미술 경향부터 신표현주의, 비디오 아트, 페미니즘 미술 등 최근의 모든 주요 사조와 운동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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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0-27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서용으로 '그냥' 꽂아두기엔 너무 비쌉니다. 할 포스터가 쓴 부분만 읽고 올까요? 서점은 책을 사는곳이지 읽는곳은 아님에도...?

수유 2007-10-27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고 말하면서 책을 검색하니 아니살 수가 없네요. 그러니 꼭 읽어야 할테지요. 간만에 인터넷으로 주문 들갑니다.

로쟈 2007-10-27 22:51   좋아요 0 | URL
빠르시네요.^^

2007-10-29 0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29 08:39   좋아요 0 | URL
역시나 교재로 널리 쓰이는군요...
 

학술저널 담비에서 고대대학원신문 창간 20주년 기념인터뷰를 옮겨온다. 고대 명예교수인 김우창 교수와의 인터뷰이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6763). 주된 화제는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 최근에 출간된 <백낙청 회화록>(창비, 2007) 중의 일부를 읽으면서 생각해본 화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어로 학문을 한다는 것', 한국의 인문학도들이라면 내내 끌어안고 씨름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김우창 교수의 대답은 좀 '낙관적'이다...

고대대학원신문(143호) "학문은 선입견 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2007년 10월로 ‘고려대학교 대학원 신문’은 창간 2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1987년 10월 20일 고려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 산하 편집부에서 창간을 하게 된 본지는 민주화 항쟁 이후 급박하게 전개돼 온 한국사회의 변동에 대학원생들이 스스로의 학문적인 연구와 분석을 통해 능동적으로 참여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결집해 만들어진 자치활동의 산물이다.

본지는 창간 20주년을 맞아 기획한 ‘창간 20주년 기념 특별인터뷰’에서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이라는 주제로 ‘한국인문학의 거장’이자 본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인 김우창 교수를 만났다. 교수신문의 지적처럼(2002년 10월호) 김우창 교수는 우리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가운데 한명이다. 그의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민음사 刊)이 출간된 1978년 이후, 김우창이라는 텍스트는 수많은 지식인들의 내면에 사유의 자양분으로 쌓여왔다. ‘심미적 이성’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은 개성적이기보다는 보편적이며, 그 보편적 결론으로 다가가는 과정이 개성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기자는 먼저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이라는 커다란 주제 중에서 '한국'이라는 공간적 특수성에 주목했다. 현재 한국에서 '학문의 장'은 어떠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을까? 평상시 원우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나 그간 대학원 생활을 하며 느낀 점들을 생각해보았다. 대략 3가지 정도가 떠올랐다. 첫째, 협애한 이데올로기 지형, 둘째, 시장가치 물신화, 셋째, 학문의 미국화가 그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협애한 이데올로기 지형과 시장가치의 물신화, 미국적 시각 및 사고방식의 내면화 문제와 직접 대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문은 선입견 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것
기자는 먼저 김우창 교수에게 한국에서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의 협애한 이데올로기 지형에 관한 견해를 물었다. 김 교수는 대학원생정도 되는 사람들은 흔히 들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수사에 의해서 사고가 좁아지면 안 된다며 더 이상 냉전반공주의는 지배적인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또한 기자의 질문이 학문의 범위를 좁힌 것이라 지적했다.

"반공이든, 친공이든 이것에 영향을 받는 것은 사회, 인문과학입니다. 자연과학과 의학은 그렇지가 않지요. 자연과학이나, 공학, 의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사회, 인문과학도 마찬가지지만 바로 경제논리에 학문이 지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문은 기본적으로 선입견 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나 맹목적으로 시장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열린 형태의 학문 수행에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논의는 자연스럽게 시장가치 추구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이 한국사회 특히나 학문의 장에도 스며들고 있는 현실을 새삼 떠올려 보았다. 한국의 많은 학자들이 수입을 올릴 수 있거나, 단기적인 연구성과를 올릴 수 있는 연구프로젝트에 집착하여 대학원생들을 동원하고 있다. 대학원이 점점 국가나 기업의 '프로젝트 하청공장'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구자는 당연히 자신의, 현실의 삶, 생활 속에서 문제의식을 제기, 발전시키고 그에 대한 엄밀한 고찰을 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돈이나 상징자본의 획득을 위해 대부분 현실과 괴리되어, 자신의 문제의식과는 상관이 없는 방향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에 자의든, 타의든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한국에서 '죽은 학문', '화석화된 문제의식'등이 득세하는 것도 이런 경향들과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안 된다.

학문에 특정관점만을 강조하면 안 된다.
김우창 교수는 신자유주의는 경제를 운영, 지배하는 하나의 조류일 뿐이고 이보다 포괄적인 개념이 바로 경제논리, 시장논리인데 이것이 모든 영역을 지배하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 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김 교수는 경제적 관점은 매우 중요하고 그것 나름의 커다란 의미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다.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되는 것이다. 지나치게 실용적인 경제관점에서 진리탐구를 재단하면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시장가치를 말하기에 앞서 목적에 대한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학문은 총괄적인 것이기 때문에 특정 관점만을 강조하면 안 된다고 김 교수는 여러 차례 역설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의 모든 문제를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했다.

"신자유주의는 분명 우리사회, 사고를 좌우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학문세계까지 그것의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공산주의, 전체주의와는 달리 민주주의, 자유주의는 강제력에 의해서 집행되는 체제가 아니죠. 신자유주의 자체에 직접적인 강제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현실의 문제를 모두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좋건 나쁘건 분명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합니다. 마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받아들이면 그에 순응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김우창 교수는 수사적으로, 표피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무책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자신의 책임들, 우리가 실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 관해서 생각해 봐야한다는 것이다.

연구기금을 위해 하는 연구
'시장가치의 확장'문제와 관련지어서 김 교수는 학문의 이니셔티브는 연구기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에서 나와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구자는 자신이 중요시하는 연구를 해야 합니다. 국가는 주제를 정해놓고 그에 맞추어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연구를 하는 이들을 찾아서 지원을 해주어야 하는 거에요.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모든 것이 전도되어 있습니다. 학술진흥원 같은 곳도 이미 프로젝트 주제를 정해놓고 입찰을 받는 식으로 일을 진행합니다. 그러다보니 연구에 연구기금이 따라야 하는데 연구기금에 연구가 따르고 있습니다. 잘못된 거죠."

그는 옛날 시골훈장의 사례를 들며 요즘의 세태를 비판했다. 훈장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사명으로 했고, 경제적 수입이라는 것은 그 과정에서 얻는 부수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훈장이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아이들을 가르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국가, 경제 제일주의에서 벗어나자.
위의 맥락에서 김 교수는 한국에서 모든 행동을 정당화라는 논리가 두 가지 있다며 그것이 ‘민족주의’와 ‘경제성장’이라고 지적했다. 여전히 '부국강병'의 논리가 여러 곳에서 지배적인 가치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본교가 영국 타임지 선정 세계 150대 대학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국가나 민족의 명예차원에서 사안을 볼 뿐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우석사건'은 이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사례이다. 국가의 명예나 기대되는 경제적 가치에만 주목한 채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진리탐구라는 이슈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학문은 인간과 진리에 대한 끝없는 탐구를 통해 이러한 국가, 경제제일주의를 뛰어넘어 이를 초월할 수 있는 여지를 갖아야 한다.

"민족주의와 경제성장의 논리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심각한 사고의 왜곡을 가져옵니다. 학문의 엄정성이 손상되는 것은 물론이고요. 세상에 크게 해악을 끼칠 일도 민족과 국가, 경제성장의 논리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어요. 학문을 하는 이들은 이러한 논리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기자는 한국에서의 '학문의 미국화'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었다. 미국학문에 종속되어 미국박사만이 숭상되며, 한국의 현실을 한국의 눈으로 설명하는 '자생적 이론의 부재'문제를 그간 여러 차례 느꼈기 때문이다. 김우창 교수는 기자의 질문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이라며 중요한 것은 구체적이고 엄격한 사고에 입각한 객관적인 태도라고 강조했다. 문제를 다른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학문 그 자체에 국가적인 편견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박사냐 한국박사냐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전체적인 균형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김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다름 아닌 논문의 질에 대한 엄정한 평가이다. 학문성과에 대한 선입견 없는 구체적인 판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거대이론이 사라진 이유
논의의 범위를 '한국'이라는 공간적 특수성에 대한 강조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것으로 넓혔다. 근래에 들어 학자 중에 '대가'라는 칭호를 들을 만한 이들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또한 더 이상의 '거대이론'역시 출현하지 않고 있다. 개별 학문 분과를 넘나들 수 있는 사고력과 철학적 깊이를 갖춘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학문 분과를 넘나드는 것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이 현실이다. 즉 학문의 분과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력내지 지형으로 고착화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에 따라 과거와 같은 거대 이론도 출현하지 않는다. 인문학을 전공한 김우창 교수에게 '거대이론', '대가'의 부재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김 교수는 두 가지를 이야기 했다. 공산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발전에 따른 소비사회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먼저 공산주의의 몰락을 언급했다.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몰락이후 사회를 고쳐야 한다는 말은 많지만 역사 그 자체를 설명하는 이론은 소멸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맑스를 비롯한 많은 혁명가들이 공유했던 '역사는 발전한다'는 개념자체에 대한 회의가 커져버렸다. 또 한편에서는 자본주의는 여전히 발전의 여지가 많아 보이고, 생태적인 문제와 연관지어서 지금 '서구의 선진사회가 과연 살만한 사회인가?'인가 하는 자각이 커졌다. 그렇기 때문에 거대 이론이나 새로운 역사적인 프로젝트는 이제 다시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2차 대전이후 서구에서 자본주의발전에 따른 소비주의 사회가 등장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소비의 유혹이 커지면서 생각은 흔들리고 사물을 크게 보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즉 창조적인 관점에서 자기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 문제가 새로 발생하면서 사는 보람도 많이 떨어지는 것이고요. 어찌 보면 푸코나 알튀세르 같은 당대의 이론가들도 역사와 더불어 움직이지 않은, 소비주의에 맞춰 들어간, 소비주의에 충실한 사회이론가들이라 볼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작은 실천이다.
김 교수는 거대 이론은 사라졌지만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정말 필요한 가르침들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삶을 충실히, 정직하게, 성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복과 보람을 약속해주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이 중요한 것이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이들도 매우 소비적이고, 또한 큰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작은 실천, 일상생활 속에서의 실천입니다. 비 온다고 비 탓만 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에요. 개인적인, 사회적인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대 담론에만 주목하면 안 되죠. 이론과 자신의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소비주의, 판타지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작지만 근원적인 인간의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근원적인 인간의 가치라는 큰 이론은 여전히 남아있는 셈이죠." 

기자는 다른 이도 아닌 평상시 다른 이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검소한 생활로 유명한 김우창 교수의 지적이기에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주변의 이른바 '강단좌파'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실제 삶과 유리된 학문내지 사상이라는 것이 어떠한 위험성을 갖는지에 대해서도. 누구나 머리만 좀 좋고, 약간의 노력만 한다면, 좌파이론가들의 이름과 저작, 이론들을 줄줄 꿸 수 있고, 이는 실제로 그들에게 남들과 구별되는 일종의 상징자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자신의 실존적 삶 내지 현실역사와 유리된 앎이라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아니 오히려 모르니만 못한 것이다. 잘 모르는 이들은 적어도 어딘가에 가서 혹세무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
김우창 교수는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열려있어야 하고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며 무엇보다도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학문은 무엇보다도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라 역설했다. 연구자는 항상 자기가 추구하는 분야에서 참된 것을 추구해야 한다. 시장가치나 민족주의와 같은 것이 현대를 지배하는 중심적인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에 자신의 학문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학문의 기본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헌신과 도덕적 성실성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사회에서는 경제주의나 출세주의가 지나치게 만연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굶어죽으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에요. 열심히 공부를 하다보면 이런 것은 다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아까 훈장이야기를 했었죠?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목적이 전도되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연애하다보니까 종족이 번성되는 것이지 종족 번성을 위해서 연애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무릇 대학원생들은
김우창 교수는 인터뷰 내내 학문의 기본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열린 사고를 갖되, 엄격하고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랫동안 연구 활동을 해오고, 학생들을 지도해왔던 스승의 입장으로서 후학들인 대학원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3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공부를 하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 무언가에 '빠져서'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 둘째, 대학원생들은 장래의 불안감을 극복해야 한다. 김 교수는 두 가지의 방안을 이야기했다. 하나는 학문에 몰두하면서, 끊임없이 정진하면서 불안감을 극복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국가정책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학문발전을 위해 일정부분 지원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연구자들이 직업을 잡는데도 신경을 써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학생-교수 비율의 문제를 생각해보죠. 교수의 숫자를 늘려서 교수들이 연구나 강의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건 제가 예전부터 계속 교육부에 건의를 했던 것인데요, 교육부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인 간섭은 안하더라도 대학교원의 수급상황에 대한 통계는 발표를 해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료가 있어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대학원생의 수급을 적절히 조정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대학이 학생들을 일단 많이 뽑으려 합니다. 경제논리를 따르는 거죠. 교육부에서 이런 통계를 발표해서 교원-학생 수급에 따라 학생 수를 조정하는데 일조를 해야 합니다. 우리 정부는 이런 일을 안 하고 있어요."

셋째, 공부를 하는 이들은 학문을 하는 것에 대한 소명감이 있어야 한다. 김 교수에 따르면  대학원생들은 공부를 단순한 직업(job)이 아닌 하나의 부름(calling)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기자에게 졸업가운의 의미를 아는지를 물어왔다. 어리둥절해 하는 기자에게 김우창 교수는 졸업가운은 과거 신부들의 수도승 복장과 유사한데 이는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는 '수신'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그럴 정도의 소명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사실은 '소명으로서의 학문'으로 번역되어야 할)을 인용하면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소명의식이 있어야 하고 너무 세속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앞서나가는 것을 참고 견디어야 하고, 어느 정도의 가난도 감내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빈곤을 참아내야 하고 연구비는 정말 필요한 곳에만 사용해야 한다.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봐야
마지막으로 본교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지도하고 대학원장을 역임한, 고려대학교의 스승이라는 입장에서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물었다. 김 교수는 비록 전보다 유혹은 많아졌지만 열심히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없는 것은 아니라며, 학생들의 학문에 대한 정열이나 공부하는 마음은 과거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앞서 자신의 말들을 정리하며 다음과 같은 당부를 덧붙였다.

"학문을 하는 이들은 냉정하게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베버가 언급했듯이 공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소명의식을 가진 이들이 해야 합니다. 연구자들의 취직문제는 정부가 앞서 이야기한 일들을 하며 해결노력을 해야 하고요.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저는 외국유학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에 눈을 돌려 직업시장을 넓힐 필요도 있습니다. 비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유목민처럼 살 각오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학교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학교는 건물이나 외양에만 치중된 시설투자는 그만하고 공부를 하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설투자가 아닌 공부투자가 절실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한 시간 여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며 기자는 김우창 교수와의 대화들을 음미해 보았다. '인문학의 거장'이라는 그에 대한 찬사답게 그의 말과 주장들은 매우 부드럽고 유연한 것 같으면서 강한 메시지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당연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의 말은 잘 음미해 보면 많은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어찌 보면 누구나, 심지어 술자리에서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같은 아는 것과 행동의 일치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도 기자는 매체나 주변을 통해 들은, 그가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는 검소한 삶을 떠올리며 숙연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진정성에서 나오는 '말의 힘'을 느낀 것이다.

김우창 교수와 한 시간 여 동안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을 주제로 인터뷰를 한 후 기자는 마치 책에서나 읽었던 완숙기의 '막스 베버'를 만난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기자의 짧고 얕은 공부로는 막스 베버나 김우창 교수 사상의 정수나 인식론, 삶의 철학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학문은 무엇보다도 선입견 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라는 김 교수의 주장, 일체의 결정론이나 단정적 태도, 이데올로기를 배격하고 사물의 다차원성을 강조하는 것, 공부를 하는 이들은 반드시 소명의식을 가지고 엄격하면서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는 그의 주문은 기자의 짧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막스 베버의 풍모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07.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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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0-27 09:34   좋아요 0 | URL
"첫째, 공부를 하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 무언가에 '빠져서'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 둘째, 대학원생들은 장래의 불안감을 극복해야 한다. ... 셋째, 공부를 하는 이들은 학문을 하는 것에 대한 소명감이 있어야 한다."

학문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닌 저로서는, 학문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참 존경스러워집니다. '장래에 대한 불안감'은 수능점수 상위 몇개 학교를 제외하고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고, 이로 인해 첫번째 또한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고 - 자꾸만 딴 곳을 바라보게 되니깐요 - 세번째는 그래야하는 당위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군요. -_-

로쟈 2007-10-27 10:39   좋아요 0 | URL
모든 당위가 그렇듯이 실천은 쉽지 않지요.--;
 

며칠을 정신없이 보낸 탓에 서재에 들어와보는 것조차 낯선 느낌은 갖게 된다. 어제 밤을 새고 오늘은 아이의 학예회 발표가 있어서 시청 강당에 가 꾸벅꾸벅 졸다가 저녁 나절에 한숨 자고 일어난 것이 이 시간이다. 정신을 좀 가다듬으려고 모처럼 여유를 부려서 '무시무시한 책들을 읽자!'(http://blog.aladin.co.kr/mramor/1641777)에서 꼽아둔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문학동네, 2007)을 펼쳐들었다. 서문 정도 읽어볼 참이었는데, 웬걸, 시작부터가 만만치가 않다. 이 책 자체가 1960년에 초판이 나온 것이어서 서문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이미 '시간여행'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르트르의 상상력론이 주된 검토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일단 그렇다. 국내에 사르트르 전공자들이 적지 않지만 아직 그의 <상상계>(1940)와 <상상력>(1950)이 번역돼 있지 않다. 뒤랑을 읽어나가는 데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건 미리 짐작해볼 수 있다. 도움이 될 만한 서평이 없나 찾으니 지난주 기사 하나 정도가 눈에 띈다. 그래도 가장 긴 분량을 할애한 서평기사라서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7. 10. 13)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자유로운 상상력도 일정한 틀과 유형에 의거해 작동하고 있음을 분석한 고전이다. 저자인 질베르 뒤랑(86)은 영미권의 노스럽 프라이와 함께 신화비평이론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1960년 출간된 이 책이 이제 번역이 된 것은 방대하고 난해한 내용 때문이기도 하지만 뒤랑이 국내 소개된 프랑스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와 전혀 다른 전통에 속한 학자라는 낯섦 때문이기도 하다. 뒤랑을 이해하려면 스승인 가스통 바슐라르부터 시작해야 한다.



‘상상력의 해방가’로 알려진 바슐라르는 서구 이성 중심의 전통에서 ‘거짓과 오류의 원천’이자 이성의 어두운 그림자로 비판받아 온 상상력을, 이성과 동등한 위치로 올린 철학자였다. 바슐라르가 이를 과학과 시학으로 양립시켰다면 뒤랑은 상상력의 토대 위에 이성이 작동한다며 “이성은 상상력의 특수한 형태”라고 설파했다. 뒤랑은 상상력이 물 불 공기 흙의 원형이미지의 변형으로 이뤄진다는 스승의 4원소론이 지닌 서구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며 모든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는 상상계의 구조와 체계를 확립했다.



이 책의 서문은 웬만한 학자도 읽어낼 수 없을 만큼 난삽하다. 20세기 상상력연구의 전기를 마련한 사르트르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이론 수립을 위해 국내 독자들에겐 낯선 온갖 ‘주의’를 종횡무진하기 때문이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선 바슐라르 외에도 정신분석학자 구스타프 융, 러시아의 신경과학자 V M 베흐테레프를 징검다리로 삼아야 한다.

뒤랑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상상력의 인류학을 위해 베흐테레프가 정립한 반사학의 지배 반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지배반사란 인간의 조건반사적 행동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몸짓을 말한다. 그것은 신체의 평형을 유지하려는 자세 지배소와 섭취 지배소, 교접 지배소다. 그는 이 3대 지배몸짓에 융의 원형이론을 적용해 상상계의 3대 구조를 수립한다. 그것이 바로 자세 지배소와 연관된 분열형태구조(영웅적 구조), 섭취지배소와 연관된 신비구조, 교접지배소와 연관된 종합구조(드라마적 구조)다.

분열형태구조는 선악, 빛과 어둠 같은 분열과 대립구도가 중시되며 신비구조는 동화와 내면화를 지항한다. 종합구조는 상이한 요소의 결합을 강조하며 무한한 반복의 힘을 표현한다. 뒤랑은 이런 구조들을 낮과 밤의 양대 체제로 재범주화한다. 분열형태구조는 이미지의 낮 체제에 속하고 신비구조와 종합구조는 이미지의 밤 체제에 속한다. 본문은 바로 이 2체제 3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흥미로운 점은 레비스트로스 인류학의 영향 아래 있던 푸코, 들뢰즈, 데리다가 ‘차이’를 강조하는 반플라톤의 지적 전통에 있다면 뒤랑의 인류학은 ‘공통성’을 지향하는 플라톤적 전통에 있다는 발견이다. 인간 내면의 원형으로서 이데아를 강조한 플라톤적 전통은 문학평론가에서 문화인류학자로 변신한 르네 지라르의 모방의 문화인류학에서도 확인된다. 프랑스 지성계의 또 다른 다원성을 보여 준다.(권재현 기자)

07. 10. 26.

P.S. 기사에서 눈길을 끄는 건 러시아의 신경과학자 베흐테레프에 대한 언급. 각주와 참고문헌에 등장하지만 찾아보기에는 빠져 있어서(국역본과 영역본의 색인 모두에서 '베흐테레프'는 등장하지 않는다) 얼마나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본문에서는 58-64쪽 정도에 걸쳐서 나온다), 여하튼 찾아보면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베흐테레프(1857-1927)이고 러시아에서는 <미래의 정신의학>이란 책이 지난 1997년까지도 출간된 바 있다. 부제는 '병리반사학 입문'이라고 돼 있다(병리반사학?).

В. М. Бехтерев Будущее психиатрии. Введение в патологическую рефлексологию

58쪽의 역주에 따르면 베흐테레프는 "소련의 신경학자로서, 신경심리학에 관심을 갖고 조건 반사의 방법을 이용하여 '반사학'이라는 용어를 창안하였으며, 자극에 대한 반응을 연구함으로써 객관적 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가 창도한 반사학은 운동신경계의 조건 반사인 운동 연합 반사를 기초로 고등한 정신활동을 설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라고 설명돼 있다. 뒤랑이 참고하고 있는 책은, 특이하게도 국역본의 참고문헌에는 빠져 있는데, 역시 58쪽의 저자주를 <새로운 반사학과 생리신경계>(전2권, 1925-1926), <인간의 반사작용의 일반원리>(영역본, 1933), <객관심리학> 등이다. 개인적으론 로만 야콥슨과 베흐테레프 사이의 관계 등이 궁금한데(자세히 찾아보진 않았지만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이 검색되는 글들이 있다) 아마도 '실어증'에 관한 연구 등에서 야콥슨이 베흐테레프를 참조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은 든다.

 

 

 

 

정좌하고 읽어야 하는 서문에서 일단 후퇴하여 역자 후기('옮기고 나서')로 넘어가보았다. '뒷계단'을 통해서 들어가보려는 심사다.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뒤랑이 그르노블대학에서 '상상력 연구센터'를 이끌고 있다면 국내에서는 그의 제자들이 '서울 상상계 연구센터' 및 '한국상상학회'를 주도하고 있는데, 그 좌장격은 보들레르 연구자인 유평근 교수였다(말을 붙이자면 '그르노블 마피아'쯤 된다). 역자인 진형준 교수는 또 그 제자여서 '뒤랑-유평근-진형준'식의 계보가 만들어지는 것. 두 사람의 공동저작이 <이미지>(살림, 2001)이고, 유평근 교수는 뒤랑의 <신화비평과 신화분석>(살림, 1998)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이런 책들이 모두 살림출판사에서 나온 건 한때 <상상>이란 잡지를 내고 상상력 총서를 발간한 전력과 관련된다(기억에 진형준 교수는 그 총서의 기획자였다). <상상력이란 무엇인가>(살림, 1997) 같은 책 말이다. 그 정도의 예비지식을 갖고서 후기를 읽어봤다.

"유평근 선생님이 권유로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을 읽기 시작한 것이 벌써 30년 가까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질베르 뒤랑의 지도하에 보들레르를 연구하고 귀국하신 유 선생님이 뒤랑의 역작을 내게 권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당신도 이 책을 여섯 번 정도 읽고서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 따라서 공부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며 당장 활용하기도 어려우리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유 선생님이 하신 이야기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저자의 기본정신, 혹은 이 책을 지배하고 있는 근본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라는 것이었다. 이 책을 통하여 지식을 습득하거나 논리적인 추론훈련을 할 것이 아니라 저자의 마음을 읽으려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697-8쪽)

역자와 마찬가지로 한국인 수제자가 여섯 번이나 읽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책인지라 위안과 낙담을 동시에 갖게 된다("단번에 이해 못하는 게 당연하군!" "난 열번을 읽어도 이해 못학 거야!"). 하지만 요는 아무리 둔재라 하더라도 '책과의 씨름'을 멈추지 않는 것. "뒤랑을 공부하면서 나는 다원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배웠고 주관성의 의미를 배웠으며 상상력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그리고 서구의 인식론의 흐름을 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어느 정도 획득했으며, 무엇보다 종합적인 정신을 배웠다. 그리고 유 선생님이 이 책 읽기를 권하면서 하신 말씀들의 참뜻을 이해했다."

이쯤 읽으니 떠오르는 책들이 있다. 지금은 뜸한 듯하지만 문학평론가로 활발히 활동하던 저자가 낸 평론집들이다. <깊이의 시학>(문학과지성사, 1986), <또 하나의 세상>(청하, 1988) 등이 그 책들로 내가 대학 1-2학년때 읽었던 것이나 어느새 20년 전 얘기이다(작년에 읽은 책들보다도 기억에는 생생하건만). 관형사 '그'가 거의 매 문장마다 나오는 특이한 문체와 함께 뒤랑의 상상력이론을 자세하게 소개하던 글들이 기억난다. 저자는 이후에 <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살림, 1997)을 더 냈지만 나는 읽어보지 않았다.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이 나온 것은 1960년이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거의 50년 전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던 뒤랑의 혜안이 놀라울 뿐이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해서 강연을 한 프랑스의 철학자 뷔넨베르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바슐라르를 갈릴레이에 비교할 수 있다면 뒤랑은 코페르니쿠스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갈릴레이도 코페르니쿠스와 마찬가지로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지동설을 하나의 큰 체계로 설립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이다. 바슐라르가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이룩한 것, 상상력의 놀라운 기능을 발견한 것은 사실이지만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여 거대한 인식의 체계를 이루는 데 성공한 사람은 바로 뒤랑이라는 것을 뷔넨베르제는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랑의 <상상력의 인류학적 구조들>은 그만큼 새로운 인류학적 틀이면서 거대한 종합적 틀이고 거대한 만큼 섬세한 틀이다."(699쪽)

그 거대한 틀이란 것은 본문의 결론 뒤에 붙은 '상상계의 동위적 분류도'를 통해서 일견할 수 있다. 어쩌면 이 두툼한 책 전체가 이 '분류도'에 대한 해설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든다. 역자의 인용대로 바슐라르-뒤랑을 갈릴레이-코페르니쿠스에 비유한 것은 명쾌해 보인다. 후기의 이어지는 내용은 이제 그 '구조들'의 내용과 의미에 대한 조감이지만, 나는 이쯤에서 걸음을 멈춘다. 장정일의 말대로 공부란 건 내가 반 정도 하고 나머지는 당신이 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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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2008-01-04 02:29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최근에 나오는 러시아발 기사들이 다들 좀 '사납다'(그래서 '뉴스'가 되는 거겠지만).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러시아의 공세적 외교도 뉴스거리지만 내부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건 한 '사이코패스', 쉬운말로 한 '살인마'에 관한 이야기인 듯하다. 48건의 살인으로 기소됐다는 이 사내는 실제로는 60명을 넘게 죽였다고도 한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는 자백을 들어보면 '살인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는 게 당연해 보인다. 관련기사를 모아둔다.  

 

 

 

 

 

 

 

 

 

한겨레(07. 10. 26) '러시아판 살인의 추억’ 범인에 ‘유죄’

48명을 살해한 것으로 밝혀진 희대의 러시아 연쇄 살인범에 유죄 평결이 내려졌다. 이번 재판 과정에선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도 상세하게 드러났다. 모스크바 법원의 배심원단은 25일 92년부터 2006년까지 48건의 살인과 3건의 살인 미수 혐의로 체포된 알렉산더 피추시킨(33·사진)에게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렸다. 러시아는 96년부터 사형 판결·집행을 유예하고 있어, 피추시킨에겐 종신형 선고가 내려질 전망이라고 〈모스크바타임스〉는 전했다.

재판 과정에선 모스크바 경찰당국이 피추시킨의 광란 행각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2년 2월 피추시킨은 남자 친구와 결별 위기로 지하철 근처에서 방황하던 마리아 비리체바(24)를 만났다. 피추시킨은 고급 밀수 카메라 상자들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면 절반을 떼주겠다며 비리체바를 콘크리트 하수관 근처로 끌고 갔다. 목적지에 이르자 그는 “목욕이나 하라”며 비리체바를 8m 아래의 하수관으로 밀어넣었다. 하수에 쓸려 내려가다 맨홀 근처에서 행인의 도움으로 운좋게 살아난 비리체바는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관은 비리체바 자신의 잘못으로 하수관에 떨어졌다는 내용의 진술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다.

피추시킨의 첫 살인 과정도 밝혀졌다. 피추시킨은 18살 때 급우인 오데이추크를 으슥한 숲으로 유인해 목졸라 죽인 뒤 하수구에 버렸다. 그는 법정에서 “첫번째 살인은 첫사랑과 같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등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체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마지막 피해자이자 피추시킨이 일했던 수퍼마켓의 동료 여직원인 마리나 모스칼레바(36)의 메모였다. 모스칼레바는 아들에게 남긴 메모에서 “피추시킨과 산책을 나간다”며 피추시킨의 휴대전화 번호를 남겨놓았다. 또 피해자의 코트에서 날짜와 시간이 찍힌 지하철표가 발견됐으며, 피추시킨과 걸어가는 장면이 감시카메라에 포착됐다. 피추시킨은 모스칼레바의 주검이 발견된 2006년 6월14일로부터 이틀 만에 붙잡혔다.(이용인 기자) 


 

 

 

 

 

 

 

 

 

 

 

 조선일보(07. 08. 15) 러시아판 살인의 추억?…60여명 죽인 '체스판 킬러'

‘가상의 체스판 64칸을 가득 채우려고 사람을 죽였다.’ ‘가장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이 되고 싶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나에겐 살인 없는 삶은, 당신들에겐 먹을 것 없는 삶과 같다’

러시아 연쇄살인범 알렉산더 피추시킨(Alexander Pichushkin, 사진)이 지난 13일(현지시각) 마침내 모스크바 법정에 들어섰다. 1992년부터 2006년까지 49명을 죽이고, 3명을 더 살해하려 한 혐의다. 그러나 이날 러시아 당국이 “당초 예상보다 10명 더 많은 62명이 살해됐을지 모른다”고 밝혀 파문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현재까지 러시아 경찰은 희생자 시신 14구만 발견했을 뿐, 구체적인 추가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혼란 상태다.

그는 모스크바 비체프스키 공원(Bitsevsky Park)서 평범한 슈퍼마켓 종업원으로 일했던 33세 평범한 직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살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면 노숙자나 노인들을 꾀어 망치로 뒤통수를 내리쳤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남성이었지만, 여성이나 어린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1992년 18살 때 학교 급우를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2000년에 들어서면서 집중적으로 사람이 죽이기 시작했다. 사건을 맡은 검사는 해외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는 ‘안드레이 치카틸로’를 넘어서길 꿈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안드레이 치카틸로(Andrei Chikatilo)는 ‘괴물의 심장’이라 불린 전설의 러시아 연쇄살인범이다. 지난 90년대 초반 52명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 인육까지 먹어 구소련의 ‘한니발 렉터’라는 별칭도 있다.

피추시킨은 당초 언론에게 “지금까지 63명을 죽였다”고 자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가상으로 그려 놓은 가로·세로 8칸짜리 체스판에 꼼꼼히 기록했다. 64칸을 모두 채우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마지막 피해자는 지난해 6월 동료점원 마리나 모스칼요바(Marina Moskalyova,36)였다. 그는 희생자 주검 발견 이틀 만인 지난해 6월 16일에 마침내 경찰에 체포당했다. 한편, 그는 법정 최고형이 확실시되지만 사형 판결을 받을지는 미지수다. 러시아는 사형이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1996년 이래 판결·집행이 사실상 정지된 상태다.

07. 10. 26.


 

 

 

P.S. 피추시킨 같은 연쇄살인범의 심리가 궁금하다면 로버트 헤어의 <진단명 사이코패스>(바다출판사, 2005)나 로버트 레슬러의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바다출판사, 2004) 등의 책들을 참조해볼 수 있겠다. 특이한 소재의 역사소설이자 추리소설인 노희준의 <킬러리스트>(랜덤하우스코리아, 2006)에 대한 해설을 쓰느라고 작년 이맘땐가 뒤적거렸던 책들이다. 다시 '살인의 계절'이 돌아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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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7-10-2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상.. 정말 싸납네요...

로쟈 2007-10-27 00:50   좋아요 0 | URL
이런 경우는 다른 유전인자가 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읽기 리스트.


2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1- 영혼의 심연을 파헤친 잔인한 천재
콘스탄틴 모출스키 지음, 김현택 옮김 / 책세상 / 2000년 11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07년 10월 24일에 저장
절판
도스토예프스키 2- 영혼의 심연을 파헤친 잔인한 천재
콘스탄틴 모출스키 지음, 김현택 옮김 / 책세상 / 2000년 11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2007년 10월 24일에 저장
절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9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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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월)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7년 10월 24일에 저장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9월
10,500원 → 9,450원(10%할인) / 마일리지 520원(5% 적립)
양탄자배송
4월 22일 (월)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7년 10월 24일에 저장



2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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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7-10-24 18:41   좋아요 0 | URL
올 겨울엔 까라마조프를 꼭 완독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

로쟈 2007-10-24 23:26   좋아요 0 | URL
꼭 성공하시길.^^

2007-10-25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5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살라흐앗딘 2007-10-25 08:27   좋아요 0 | URL
아,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위에 있는 열린책들의 <도스또예프스키 읽기 사전>은 어떤 책인가요? ^^;

로쟈 2007-10-25 12:15   좋아요 0 | URL
말 그대로 사전입니다. 작품해제와 인물 소개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소경 2007-10-26 19:02   좋아요 0 | URL
모촐스키의 <도스토예프스키> 얼른 관심 갖았던게 다행이군요..

로쟈 2007-10-26 20:53   좋아요 0 | URL
네, 품절 모드로 들어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