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에 새로 나온 책 몇 권에 대한 '낚시질'을 하다가 첫 페이퍼부터 날려먹었다(임시저장도 되기 전에). 바쁜 일들도 많은지라 그냥 '후퇴'하기로 한다. 대신에 미친 척하고 사들고 온 아리스토렐레스의 <형이상학> 두 권에 대한 '신고식'은 해둔다. 왜 두 권이냐면, 최근에 나온 완역본 <형이상학>(이제이북스, 2007) 외에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왔던 발췌본 <형이상학>(문예출판사, 2004)을 한꺼번에 사들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로스(Ross)의 영역본을 찾으니 눈에 띄지 않는다(박스에 들어가 있나?). 모스크바에서 사들고 왔던 러시아어본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러시아어 아리스토텔레스로 나는 <형이상학>과 <윤리학>, <시학>을 갖고 있다. 아래 이미지가 러시아어 주석본 <형이상학>이다.

Аристотель Метафизика. Переводы. Комментарии. Толкования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책들의 경우 모두 온라인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영역(http://ebooks.adelaide.edu.au/a/aristotle/metaphysics/)과 러시아어역(http://www.lib.ru/POEEAST/ARISTOTEL/metaphiz.txt)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즐겨찾기에 추가해놓으니 대략 책을 읽을 만한 준비는 다 된 듯싶다. 그러고 드는 생각. 영어나 러시아어 독자라면 누구라도 쉽게, 그리고 공짜로 읽을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우리는 왜 거금을 주고 구입해야지만 읽을 수 있는가? 적어도 이런 고전 류는 국가가 번역판권을 인수해서(인문한국사업 같은 데 들어가는 비용의 일부를 이런 데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서비스'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완역본 <형이상학>의 역자는 아직 학위를 마치지 않은 소장 고전연구자로 이미 <범주론-명제론>(이제이북스, 2005)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고, 현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번역중이라고 한다. 작품의 의의나 번역의 품을 고려할 때 거의 '올해의 번역상'의 유력한 후보가 아닌가 싶다. 그런 생각으로 펼쳐든 '해설'에서 기본 용어들의 다소 파격적인 번역어들과 만난다. 'pathos(파토스)'를 '겪이'라고 옮기는 식인데, 고전연구자들끼리 '합의'가 된 번역어인지 모르겠지만 생소하다는 인상은 지우기 어렵다. '형상과 질료'를 '꼴과 밑감'으로 옮기는 것도 그렇다.

반복적으로, 그리고 오래 사용하다 보면 새 번역어들이 입에 익을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유보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그건 '있음론' 대신에 '존재론'이란 말을 우리가 계속 사용하는 한 '존재'를 '있음'이라고 옮기는 것이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있음'이나 '있는 것'이 '존재'나 '존재하는 것'보다 더 일상적이며 이해가 쉬운 용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우리의 일상에서 '있는 것'이란 말을 쓸 일이 있는가?).

고전의 일상어 번역에 대해서는 김남두 교수(역자는 그 제자로서 이 번역본을 스승에게 헌정하고 있다)의 견해가 잠시 소개된 적이 있는데(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243750.html), 그는 "일상어가 학술어 대접을 받지 못하다 보니 일본어 조어가 일상어를 대신해 학술어가 되었"고 지적하고 이러한 상황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상어와 학술어의 간극을 메워나가야 한다고 했으나 표기 원칙을 일률적으로 정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는다" 했다. 당분간 우리는 '형상과 질료'를 '꼴과 밑감'과 같이 쓰는 학문 '이중어' 시대를 살아가야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읽은 <형이상학>의 첫문장이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이다. 두 번역본에서 첫문단만을 대조해보겠다. 거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이 한결같이 덕을 보고 있"다는 로스의 영역도 같이 옮겨놓는다(물론 그 덕은 주로 주해와 관련된 것이겠지만).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 이 점은 인간이 감각을 즐긴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정말 쓸모를 떠나,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기는데, 다른 어떤 감각들보다도 특히 '두 눈을 통한 감각'(시각)을 즐긴다. 무엇을 실천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어떤 것도 하려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말하건대 다른 모든 감각보다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감각들 중 시각을 통해 우리는 가장 많이 '느끼어 알며'(지각하며) (시각을 통해 사물들의) 여러 가지 차이성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이제이북스판, 29쪽)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여러 감각에서 얻는 즐거움이 그 증거인데, 사람들은 필요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감각을 즐기고 다른 감관보다 특히 눈을 통한 감각을 즐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동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무 행동 의도가 없을 때에도 - 사람들 말대로 - 만사를 제쳐두고 보기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감각 가운데 그것은 우리가 지식을 얻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고 수많은 차이들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문예출판사판, 50쪽)

ALL men by nature desire to know. An indication of this is the delight we take in our senses; for even apart from their usefulness they are loved for themselves; and above all others the sense of sight. For not only with a view to action, but even when we are not going to do anything, we prefer seeing (one might say) to everything else. The reason is that this, most of all the senses, makes us know and brings to light many differences between things.

다소 특이한 점은 "원문에 좀더 충실한 쪽으로 방향을 잡"은 완역본에서 보이는 일상어와 개념어 번역의 혼용이다.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나 "무엇을 실천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같은 구절은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나 "우리는 행동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같은 구절보다 문어적이다. 대신에 "우리는 정말 쓸모를 떠나", "시각을 통해 우리는 가장 많이 '느끼어 알며'"라는 식으로 풀어주는 것은 "[시각은] 우리가 지식을 얻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고"보다 구어적인 쪽인 듯하지만 역시나 좀 낯설다. 이러한 의도적인 선택 때문에 보다 수월하게 읽히는 쪽은 발췌역쪽이다. 물론 발췌역본에서도 마지막 문장은 부자연스럽게 번역되었지만('그것은' 같은 대명사 때문에).

이 <형이상학>에 대한 두 종류의 우리말 번역을 맛보기로 읽어보면서 드는 생각은 두 번역서 모두 학술적 가치를 지닌 업적으로서 의의를 갖지만 ('일상어 번역'이란 말이 표방하는) 보다 대중적인 번역으로서는 난점이 있어 보인다는 것. 연구자나 고급독자가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아무런 각주 없이도 술술 읽어나갈 수 있을 때 '살아있는 번역'으로서 의의를 가질 테지만(가령 조안 스파르의 <플라톤 향연>(문학동네, 2006) 같은) 이번에 나온 완역본도 그렇고 국역본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는 '전공자'나 '연구자'들이다(온라인의 영역본 <형이상학>에는 아무런 각주도 붙어 있지 않으며 영어 또한 평이하다). 그 점은 책머리에 실린 '해제'의 마지막 문단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옛 그리스어를 아는 독자들은 물론 본 역서와 더불어 원문을 읽어야 할 것이다. 원문을 대체할 만큼 좋은 번역은 없기 때문이다. 번역문은 옛 그리스어로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언어적인 특성과 더불어 그대로 전달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옛 그리스어 독해 능력이 없는 독자들도 그리스어-한글 찾아보기에 나와 있는 각 낱말의 어원 설명과 함께 해당 영어 번역어를 잘 활용하면 원어가 갖는 의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25쪽)

역자가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엣 그리스어를 아는 독자들"에겐 사실 이 번역서가 절실하게 필요한 건 아니다. "원문을 대체할 만큼의 좋은 번역"은 없을 뿐더러 그리스어 독해력을 갖고 있는 경우엔 대개 영역이나 독역본을 읽을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터여서 그걸 참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어느 경우이건 국역본보다 더 이해가 용이하다). 문제는 그렇게 읽은 '앎'을 일반 독자나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할 경우이다(전공자들이야 이심전심으로, 혹은 그리스어 원문으로 소통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딜레마다. 아무리 전달하고 싶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언어적인 특성과 더불어 그대로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전공자/번역자가 원문을 읽고 갖게 된 '앎'은 어떤 앎인가? '번역 이전의 앎'이다. 그리스어 원문 자체에서 얻는 어떤 '상'이기에(그것은 '동어반복'이거나 '이미지'이다). 그것은 한 가지 앎이지만 궁극의 앎은 아니다(전달 불가능한 앎, 곧 가르칠 수 없는 앎이니까). 번역의 불가능성이란 번역 자체의 기본적인 조건이므로 이 또한 새삼스러운 것이 못된다(가령 김소월의 아무시나 다른 언어로 옮긴다고 생각해보라).

'그리스어 독해 능력'이 없기에 어원 설명과 영어 번역어를 세심하게 고려해가며 읽어야 원어의 의미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조언은 번역 자체의 의의를 침식한다. 원문으로 읽을 때 보다 나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지만 번역본만으로도 <형이상학>의 내용과 가치를 식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정도가 역자의 변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충실한 번역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과 독자들에게 더 충실한 번역이 한번 더 출간되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인간이 본래 앎을 욕구한다면 말이다...

07. 11. 16.

P.S. <형이상학>의 인용문 번역들을 참고하여 나대로 약간 윤색해본다. 말하자면 나대로의 '앎'이다: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앎을 원한다. 우리가 감각에서 얻는 즐거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무슨 필요에서가 아니라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긴다. 무엇보다도 시각의 경우가 그렇다. 무얼 하려고 해서뿐만 아니라 딱히 무얼 하려고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보는 걸 좋아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여느 감각들보다 시각을 통해서 우리가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사물들간의 차이 또한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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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1-16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thos를 겪이라고 번역했다고요? 헐... 겪이라는 말은 일상어가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ㅡㅡ;;

로쟈 2007-11-16 14:47   좋아요 0 | URL
그리스의 '일상어'였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춘 탓이지 않나 싶어요...
 

올해 제4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로 소설가 편혜영씨가 선정되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수상소식이라 덩달아 반갑다. 작가와 사소한 안면이라도 터둔 것이 반가움의 크기를 조금 더 키워주는지도 모르겠다(딱 한번 만나본 인연이지만, 자랑하자면 나는 작가가 보내준 사인본을 갖고 있다). 몇 차례 관련 페이퍼를 올려두었기에 따로 군말은 적지 않고 관련 인터뷰기사와 선정이유서를 옮겨둔다.

한국일보(07. 11. 16) 제4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편혜영'

#엽기적 소설을 썼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야. 계산적이고 치밀하고 정확해. 자기 몸 하나가 있고 그 반(半)만 갖고 소설을 쓰는 것 같아. 그 반으로 자기를 넘어서려는 거야.(김윤식 본심위원)

12일 오후 서울 인사동 한 음식점에 모인 한국일보문학상 본심위원(김윤식 임철우 황종연)들은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에서 소설가 김애란씨가 편혜영씨에 대해 쓴 글을 화제에 올렸다. 글엔 이런 전언이 있었다. 편씨가 스무살 때 모친상을 치른 직후 밥을 지으려 쌀통을 열었는데 기다랗고 하얀 애벌레가 꿈틀대고 있었단다. 겨우 쌀을 씻어 아버지께 상을 차려 드렸지만 자기는 며칠간 집 밥을 먹지 못했다고.

황종연 위원이 말을 이었다. “첫 소설집 <아오이가든> 때 편혜영 소설은 잔혹동화 같은 느낌이었다. <사육장 쪽으로>에선 사무원의 세계가 등장한다. 실제 작가 자신이 애써 진입한 세계이자 공인된 세계다. 그런 세계를 금 가게 하고, 연신 독자를 허방짚게 만든다. 사무원인 동시에 소시민인 자로서의 양가감정이 독하다. 이 사람, 작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잔혹의 미학이 영롱한 편혜영의 ‘하드고어 원더 랜드’(평론가 이광호)가 구별짓기의 제스처가 아닌, 진정성 있는 한국문학의 신천지임을 확인한 이상 본심위원들에게 수상작 결정을 늦출 이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조심스럽고 나지막히, 알아보았다는 듯이, 그러나 들킨 것은 아니니 안심하라는 듯이, 자기도 함부로는 질색이라는 듯이,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더랬다.(소설가 이신조)

13일 오후 수상자 인터뷰를 위해 편씨를 만났다. 그가 6년째 근무 중인 서울 광화문의 직장 맞은편 커피숍에서였다. 단정한 검은색 정장 차림에 ‘파버카스텔’ 브랜드의 샤프펜슬을 가늘고 긴 손가락에 쥐고 마주앉은 편씨와의 대화는 편안하면서도 낭비가 없었다. 그는 듣고 이해하는 일에 능숙했고, 간결하고 요령있게 답할 줄 알았다. 그의 소설에서 감지한, 오감을 집요하게 자극하는 예민함과 밀도 있는 건조체 문장을 고집하는 단단함에 비춰 자연인 편혜영을 예단한 일은 (앞의) 반은 틀리고, (뒤의) 반은 얼추 맞았다. 스스로는 “약간의 무대 공포가 있고, 좌중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게 편하다”고 말했다.

편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어떤 형태로든 계속 노동을 해왔다”고 말했다. 2년간 회사원으로 일하다가 ‘소설이든 뭐든 쓰고 싶다’는 욕구를 좇아 뒤늦게 서울예대, 한양대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도 꾸준히 부업을 했다. 석사학위를 받은 해 현재의 직장에 입사, 이젠 팀원 여럿을 거느린 팀장이다. 4남매의 막내임에도 ‘막내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부모님이 일하시느라 늘 바빴다. 어리광을 피우는 걸 잘 못한다. 부탁했다간 거절 당할 것 같다는 심리가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턴 출가한 언니들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편씨는 문학을 일상으로 여기는 듯 보였다. 쓰는 일을 밥 먹고, 출퇴근하고, 청소하고, 잠자는 것과 공평하게 대하는 느낌이랄까. 그는 “주로 집에서 쓰지만 도서관, 카페 등 장소 안 가리고 어디서나 잘 쓴다”고 했고, “계간지 청탁을 받아 3개월에 단편 1편씩 쓰는 일은 직장 생활을 하지만 아주 벅차진 않다”고도 했다. 여기엔 문학에 자신의 전부를 투입해야 한다는 강박적 자세가 묻어나지 않았다. 대신 생활에 단련된 자의 여유와 기품이 있었고, 그래서 신뢰감이 들었다. 어떤 난관에도 일상은 계속되듯, 편혜영 소설도 앞으로 오랫동안 성실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호흡하리란 믿음.

#한국일보문학상 하면 젊은 작가가 내지르는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맞장구쳐주는 상이란 느낌이 들어요. 바로 그 상을 젊은 시절에 받게 되다니, 너무 기뻐요.(편혜영)

등단 7년 만에 받는 첫 상이다. 수상작에 실린 개별 단편들은 작년부터 유수의 문학상에 유력 후보로 자주 거론돼 왔다. 한국일보문학상엔 2005년부터 이미 이름을 올려왔다. 그해엔 단편 ‘시체들’, 작년엔 단편 ‘사육장 쪽으로’가 본심 후보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편씨는 소위 ‘2000년대 작가’로 분류되고, 스스로도 그 점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동세대 작가들의 문학적 경향을 ‘개성’이라고 말했다. “선배 작가들에겐 전쟁, 이념, 부정해야 할 아버지와 같은 명확한 시대적 명령이 있었다. 요즘 젊은 작가에겐 그런 게 없다. 오직 세계를 보는 개성적인 눈으로 존재 증명을 해야 한다. 창작자로선 흥미로운 환경이다.”

편씨는 현재 장편을 구상하고 있다. 내년에 낼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등단 이후 줄곧 단편을 써왔던 그에겐 만만찮은 도전이다. 그는 “장편은 단편과 호흡이 다르다. 날마다 쓰지 않으면 쓸 수 없을 것 같다”며 긴장의 일단을 내비쳤다. 그 말을 들으면서 미안하게도, 전혀 걱정스럽지 않았다. 이러구러 생활에 충실하다보면 내년이 가기 전 서점 한복판에 놓인 편혜영의 멋진 첫 장편을 보게 되리란 생각만 들었다. 일상의 기시감은 강렬하고 그녀는 재능있고 성실하다.(이훈성기자)

■ 왜 편혜영인가(선정이유)

올해 한국일보문학상에는 예년과 달리 장편이나 단편 작품이 아니라 한 권의 장편소설을 포함한 여섯 권의 소설이 후보작으로 뽑혔다. 장편과 단편을 대등하게 간주하는 것은 무리이니 단편의 경우에는 한 편이 아니라 단편집을 후보작으로 내는 것이 좋겠다는 예심위원들의 합의에 따른 결과라는 해명이 있었다.

이렇게 단편집을 심사 대상으로 삼게 되면 저자의 전반적인 창작 기량의 수월성 또는 '문학 세계'가 특정 작품의 우수성 못지않게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된다. 따라서 본심의 부담은 상당히 커진 셈이지만 예심위원들의 안목 덕분에 우리는 후보작으로서 손색없는 소설들을 대상으로 검토를 시작할 수 있었다.

김훈의 <남한산성>, 윤성희의 <감기>,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정이현의 <오늘의 거짓말>, 천명관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 이상 여섯 권의 후보작은 각자 개성이 뚜렷하고 그 나름의 특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우열을 가늠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만 우리는 한국일보문학상이 경력, 연고, 평판 등 이런저런 이유에서 응분의 평가를 받지 못한 작가들에게 주의를 기울여왔으며 그것은 앞으로도 계승할 가치가 있는 전통이라는 점에 유념하기로 했다. 또한 단편집의 경우 수록된 작품들의 수준이 전체적으로 균일하고 '문학적인 것'을 둘러싼 의식의 고투가 치열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에 주목하기로 했다.

본심은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에 대해 각자 소견을 밝히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각자 의견을 내놓고 나니 어느 소설로 하자는 말은 굳이 꺼낼 필요도 없었다. 편혜영 씨의 단편집 <사육장 쪽으로>가 논란 없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편혜영 씨의 단편들은 경제적으로 제어된 서술, 정교한 디테일을 통한 암시, 통일된 인상의 창출 등과 같은 단편소설의 고전적 규범을 정확하게 습득한 바탕 위에 씌어진 것이다.

작년 한국일보문학상의 유력한 후보작이었던 표제작은 물론 그 밖의 단편 모두 현대의 삶에 대한 은유를 이루는 여러 가지 상황을 박진감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 상황의 핵심은 겉으로는 정연한 듯한 인간 세계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어느 순간 인간 현실을 현실이 아니게 만드는 불확실성의 출현에 있다.

편혜영 씨는 한 작품에서 잡초와 들쥐가 침입하지 못하는 단단한 집을 원하던 부부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습지에 빠져죽게 만들었듯이 일상생활의 조건을 이루는 현실의 범주들이 어떤 원초적인 미혹에 먹혀버리는 광경을 기괴한 방식으로 포착한다. 그리고 모든 의미와 상징의 질서를 헛것으로 만드는 집합적 무의식의 심층을 냉혹하게 파고든다. 인간의 내부, 그 암흑의 핵심을 향해 이토록 깊이 시추를 내린 작가는 우리 문단에 흔치 않다. 한국일보문학상이 편혜영 씨의 외로운 탐구에 격려가 되길 바란다.(본심위원 김윤식 임철우 황종연)

07. 11. 15.

P.S. 작년 겨울인가 문단의 한 송년회 자리에서 편혜영, 김애란 두 작가와 잠시 합석을 한 적이 있다(김애란씨는 이미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터이므로 안 그래도 절친한 두 작가는 이제 한국일보문학상 '가족'이 되었다). 마침 하반기에 두 작가가 쓴 작품들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터라 나대로의 상찬을 늘어놓았던 듯하다. 올해 두 사람은 나란히 작품집을 냈고 또 내게도 나란한 책을 보내주었다. 덕분에 <사육장쪽으로>(문학동네, 2007)와 <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 2007)를 나는 두 권씩 갖고 있다(딸아이에게 가보로 물려주어야겠다). 따로 인사를 전하지 않았었는데, 이 자리를 빌어 두 작가의 후의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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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15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혜영의 작품은 이효석 문학상 수상집에서 읽어본 '분실물'이 전부인데, 참 촘촘하면서도 깊숙히 파고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인상적인 작품이었답니다. 사육장쪽으로,에도 관심이 가네요- 근데 편혜영작가, 예쁜데요? ㅎㅎ

로쟈 2007-11-16 08:58   좋아요 0 | URL
실물이 더 낫습니다.^^

송연 2007-11-19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 분실물을 읽고는, 다시한번 책에서 그녀의 이름을 확인케 되더군요.
문체는 단순하지만, 그러한 필치가 내용을 이끌어가는데 더 이점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한 작가마다 여러 글쓰기의 방식들이 있겠지만 편혜영씨는 상황에 따른 내면의 정확하고 세심한 묘사를 통해 독자를 흡입할줄 아는 스킬을 지닌 작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뜻 카프카의 느낌도 들었었구요.
그런데 로쟈님, 궁금한것이 한가지가 있어요,
많은 이들이 김애란을 칭송하더군요, 하지만 그의 대표작 두권을 읽고난 후에 들은 저의 생각은, 작가로서의 상상력이 뛰어나다기보다는, 그녀의 사적 경험들을 글 속에 많이 투입시켰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네요, 물론 그러지 말란 법도 없고 개인적 경험이 작품을 쓰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녀같은 경우는 너무 티가 나는 것 같았네요... <침이 고인다>는 특히 더욱요.
그리고 <달려라 아비> 같은 경우는 신문 사설들을 꼼꼼히 읽은 작가지망생이 자신의 문장력을 어법에 맞게 잘 구성하려고 분투한 듯한 느낌을 주었구요, 제가 '나이'에 대한 선입견같은것은 없지만,(게다가 그정도의 나이면 먹을만큼 먹은 나이이구요) 그녀의 작품들을 읽으면 왠지 설익은 단감을 먹고 있는듯한 착각이 듭니다. 저만 잘못 생각하고 있는걸까요?;;

로쟈 2007-11-19 12:27   좋아요 0 | URL
'잘못 생각'하실 리는 없지요. 저마다의 취향과 판단의 기준이 있는 것이니까요. 김애란 작가의 경우 많은 독자들에게 어필한다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가난'에 대한 그녀의 감각입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 시 한편을 올려놓는다. 이 또한 십수년 전쯤에 쓴 것 같다. '車에 실려가는 車'는 김영승 시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극한

1  
극한이란 어떤 양이 일정한 법칙 밑에서 점차 값이 변하여 달하려고 하는 일정한 양을 말한다. 

2
삶의 극한. 으아, 삶의 맨끝! 끝자리가 틀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정말 이런 편견들은 끝장내야 한다. 

3
'극’은 車에 실려가는 車를 닮았다. 말하자면 車의 끝장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 車를 끌어내려 보자. 그그그그 ‘그’(덜컹!) 

4
이제 그걸 맨앞에 갖다 놓으면 ‘그-ㄱ’이 되겠지. 아무래도 이건 발음이 곤란하다. 이때는 대개 ‘ㅇ’을 붙여 읽는 것이 요령이다. 트림하는 기분으로 ‘그-윽’(좋군!) 

5
고물차 한 대 때문에 더 나빠질 교통체증도 이미 아니므로 우리는 ‘극’한 상황을 ‘그윽’한 상황으로 바꾸겠다. 

6
그윽한이란 어떤 양(♂)이 일정한 법칙 밑에서 점차 값이 변하여 일정한 음(♀)에 달하려고 할 때의 은근한 느낌을 말한다.(이 부분은 자유로운 상상에 맡긴다.)

07. 11. 14.

P.S. 흠, 주말엔 <색, 계>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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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7-11-15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물리학적인 시라 잘 이해는 안 가지만.. 그윽한 트림은 참 좋군요.
저렇게 감질나게 코 끝이 맞닿은 자세에서는 아무래도 덜 그윽하겠지만요.

사족이지만, 오늘의 로쟈님은 어제의 로쟈님과 달라 보입니다.^^

로쟈 2007-11-15 00:34   좋아요 0 | URL
그래서 애써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닉네임을 바꿔야 하나 싶기도 하고...

마늘빵 2007-11-15 09:12   좋아요 0 | URL
글 보면 금방 티 납니다. ㅋㅋ 그냥 쭉 가세요. :)

로쟈 2007-11-15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수사대까지 동원한다시니까 쭉 가는 수밖에 없겠네요. 대신 분가할 궁리는 하고 있습니다.^^;
 

발레리의 <말라르메를 만나다>가 나온 김에 말라르메의 시집과 관련자료들을 들추게 됐다. 보들레르와 말라르메의 시인관에 대한 짤막한 에세이도 시간이 나면 써보고 싶다. 몇 권 안되는 관련서들의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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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현대시사- 보들레르에서 초현실주의까지
마르셀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2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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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스테판 말라르메 지음, 황현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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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신의 오후
말라르메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5년 1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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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르메를 만나다
폴 발레리 지음, 김진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1월
6,000원 → 5,400원(10%할인) / 마일리지 3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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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5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15 12:37   좋아요 0 | URL
<신체의 미학>은 저도 갖고 있지 않은데, 기억엔 발레리의 책이 아니라 그의 글이 한두 편 들어가 있는 정도의 책입니다...
 

이번주 시사IN 북섹션에 알라딘 특집기사('독후감 쓰는 사람들')가 실렸고(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8) 지난주 월요일에 가졌던 인터뷰 기사도 함께 게재되었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4). 기사는 어제 아침에 읽었지만 온라인에는 주말께나 올라올 걸로 예상했는데, 웬걸, 이미 올라와 있고 시비돌이님이 옮겨놓으시기까지 했다. 쑥쓰러운 일이지만 부랴부랴 나도 옮겨놓고 몇 가지 '해명성' 발언을 덧붙인다. 기억에 인터뷰 요청은 그 전 주말쯤에 받았고 월요일에 바로 시간약속을 잡았었다. 기사는 두 시간 남짓 이루어진 인터뷰에 근거한 것인데 약간 와전된 내용도 포함돼 있다. 그건 구어로 이루어진 인터뷰의 '번역'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겠다. 게다가 실제 지면에 실린 것과 온라인 기사는 약간 차이가 있다(여기서는 지면기사에 준하도록 하겠다). 사진은 가급적 찍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죽어도 못찍겠다고 고집을 부리진 않은 까닭에 멋쩍은 흔적을 남기게 됐다...

 

시사인(07. 11. 12) "각종 1위 기록 영광 아니다"

‘알라딘 좀 그만해.’ 초등학교 1학년인 딸 아이가 자신의 등에 그런 메모를 써서 붙여놨더란다. 하루 평균 한두 시간 서재를 관리하는데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도 한다.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인 이현우씨는 필명 ‘로쟈’로 더 유명하다. ‘알라디너’라면 모두 그를 안다고 했지만 그의 명성은 이미 알라딘 공간을 훌쩍 넘어섰다. 최근 시사 잡지에 인터넷 서평꾼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출판사에서도 책을 내자고 찾아와 공을 들이고 있다.  

알라딘 서재가 아닌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대학교에 마련된 그의 공간에는, 책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수납이 난감한 수준으로 책이 많아서이다(*모두 민폐이다). 집에는 약 8000권의 장서가 있고, 대학 공동 연구실 서가에 책을 꽂아놓았는데 그마저도 더 이상 여유 공간이 없다.(*8,000권의 장서라고 했지만 어림짐작일 뿐이고 정확한 건 아니다. 그 중 3000권 가량은 박스보관도서이니 장서로서는 유명무실하다.) 

얼핏 보기에도 전공과 무관한 책이 태반이다(*얼핏 보아서 그런 것이고 연구실에 있는 책들의 상당수는 사실 전공 관련서이다). 며칠 전에는 정가 13만원짜리 <백낙청 회화록>이 도착했는데 누가 보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더란다(*이 책을 받은 날 인터뷰를 해서 잠시 화제에 올린 것이다. 며칠 뒤에 알고보니 지인이 선물로 보낸 것이다. 물론 그 인연의 시작은 이 서재였으니 알라딘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처럼 얼굴을 모르는 기부자가 꽤 된다(*'아주 드물게'라고 강조했건만, 기자는 '꽤 된다'고 옮겼다).

알라딘에는 자신의 적립금으로 고마운 이에게 책을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이 있는데 가끔 로쟈의 글을 보고 좋았다는 이들이 책을 보내오는 것이다(*'땡스투' 시스템과 독지가들의 '기부'사례가 혼합/혼동돼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땡스투'로 '블로그 수익'을 얻기도 하는데 수익이라고 하기엔 곤란한 수준이라는 것과 일부 독지가나 출판사가 책을 보내주는 경우도 아주 가끔 있다, 는 정도가 내가 한 말이다). 그의 평판을 듣고 책을 보내는 출판사도 생겼다. 어느 출판사는 ‘책을 보낼 테니 포털 등에 책 리뷰를 노출해달라’고 했다. 물론 거절했다. “뭐, 책이 좋으면 쓰고 아니면 마는 것이지 보내기도 전에 뭘 써달라고 하다니, 참 영업 마인드 없더라고요”라며 그는 웃었다.(*사실 나는 서평단모집에 신청해서 받은 몇 권의 서평도서들에 대해서 한편의 리뷰도 쓰지 않았다. 처음 두어 권은 실망해서였는데, 나중엔 그냥 '떼먹고' 이후엔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 이건 '오프더레코드'다.) 

그러니 책값의 대부분은 자기 수입에서 충당한다. 인기 없는 학과의 시간 강사인 그는 요즘도 한 달 평균 50만원, 많을 때는 100만원어치쯤 책을 구매한다(*오해를 살 수도 있는데, 나는 '인기 없는 학과'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 인문학 동네의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다 보니 그런 인상을 주었을 수는 있지만). 아내는 ‘책과 결혼하지 그랬느냐’고 볼멘소리를 하기 일쑤이고, 참다 못해 인터넷 서비스를 끊어버리기도 했다(*몇 차례 쫓겨날 뻔도 했는데, 이러한 가정분란의 상당한 책임은 알라딘에 있다).

그는 어떤 책을 읽을까? 본인 표현에 따르면 ‘어린이 처세 만화 실용서를 제외한’ 책들이다. 인문학 지형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책이 그의 그물망에 걸리는 셈이다(*이런 그물이야 누구나 칠 수 있다. 당신도 매일 30분 이상씩 도서검색을 해보면 된다). 책 소개뿐 아니라 저자에 대한 단상, 문체에 대한 단상, 그리고 인문학 논쟁까지 망라하는 그의 서재는, 말 그대로 ‘인문학 살롱’으로 불릴 만하다(*얼핏 보면 그렇다). 

하루 방문자는 500여 명(*최근 추세로는 600명 안팎이다). ‘로쟈의 저공비행’을 즐겨 찾는 서재로 등록해놓은 이는 줄잡아 1500명쯤 된다(*반올림해서 그렇다. 오늘 날짜로 치면 1385명이다). 그는 “어떨 때는 꽤 오래 각종 순위 집계에서 1위를 하곤 하는데, 결코 영광이 아니다. 나 혼자 이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라고 말했다. 자조는 아니다. 다만 ‘부담을 나누어 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각종 순위집계에서 1위'라는 건 와전된 것이고, 내가 말한 건 '페이퍼의 달인' 같은 데서 1위를 하면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좌절감 혹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다. 즐찾수에 있어서는 1,2위를 다툴지 모른다고 덧붙이긴 했다. 알라딘이 낳은 '최고 스타' 가운데 한명이라지 않은가).  

얼굴 모르는 이들이 책 보내오기도

그의 글은 부드럽지만(*아내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른바 주례사 리뷰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는 철학 서적이나 미학 책을 재미나게 읽는 편이다. 특히 남들이 어렵다는 슬라예보(*슬라보예) 지젝은, 왜 그의 글이 어렵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좋아한다(*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한 건 아니고 다만 안타깝게는 생각한다). 그에 얽힌 일화도 있다. 지젝이 유행이 되다시피하자 번역자가(*'번역서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터무니없는 오역이 눈에 띄더란다. 몇 번 오류를 지적하는 글을 올리고 나자, 어느 순간부터 지젝에 관련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아시다시피 내가 즐겨쓰는 서재 이미지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슬라예보(*슬라보예) 지젝은 그가 특히 사랑하는 미학자(*철학자)이다(*지젝은 아직도 대중적인 철학자는 아닌 듯하다. 사랑하는?). 그는 “하나의 유령이 우리의 인문학 동네를 떠돌고 있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면서 ‘동시대의 정치적 무관심에서부터 이웃집 닭한테 잡아먹힐 걱정을 하는 남자에 관한 조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절대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그 유령의 이름이다. 그 유령은 이미 지난 2003년 가을에 우리 곁을 다녀가기도 했는바 어느새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다”로 시작되는 리뷰를 쓰기도 했다.

인문학 책을 많이 섭렵하는 그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번역의 질이다(*나는 알라디너로서 유명세를 타게 된 게 주로 최근에 나온 책들 소개와 번역비평 때문일 거라고 했다). “막말로 소설은 빨간 꽃을 파란 꽃으로 번역하면 조금 이상할 뿐 전체 얼개를 흐트러뜨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문서는 개념이나 용어를 부정확하게 번역해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먹을 수 없게 된다.”(*'빨간꽃/파란꽃'도 '번역'된 것이다. 취지야 같지만 내가 보통 쓰는 비유는 '파란눈/까만눈'이다.) 인문학 번역의 경우 인세 계약을 하면 권당 200만원이 고작인데, 번역에 들여야 하는 품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라는 것. 번역에 대한 처우가 워낙 열악하다 보니 질 낮은 번역이 판치고, 그러다보니 독자의 저변을 넓히지 못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재가 널리 알려지면서 공유의 기쁨만큼이나 제약도 늘었다. 학계의 선배나 과거 지도 교수가 그의 서재를 알고 들어오기도 하는데(*'지도교수'는 아니고 예전에 강의를 들은 '교수님들'을 가리킨다), 막상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전공 분야의 책에 대해 까칠한 얘기를 쓰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유명세라면 유명세이다.(노순동기자) 

07. 11. 14.

P.S. 인터뷰와 함께 실린 박스인용도 지면기사와 온라인기사는 차이가 있다. 지면에서는 더 간결하게 처리됐는데, 분량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는 지면기사에 준해서 옮겨놓는다(요약은 마음에 든다). 대표적인 글을 자천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추천수가 많았던 글들을 떠올려봤는데, 오역에 대한 비판이나 최근에 나온 책들 소개 이외에 가장 많은 추천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래의 글이었다. 본문에서 '재작년 6월'은 2004년 6월을 가리킨다. 문득 그 계절의 모스크바가 생각나는군...

김훈, 김규항, 고종석의 문체에 대하여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로쟈의 글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이란 제목으로 재작년 6월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정의한 대로 문체가 ‘양파 껍질’ 같은 것이라면, 내가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김훈·김규항·고종석이라는 세 종류의 양파이다. 문체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을 적고자 한다.

먼저, 자신만의 독특한 ‘얼굴’ 혹은 ‘손가락’을 가진 작가로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이 김훈이다. 그는 소설가이기 전에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스트이기 전에 언론사 기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 표정을 그렇게 바꿔가고 있지만, 나에게 소설가로서의 김훈은 좀 낯설다. 문학판의 각광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질적으로 ‘소설가의 손가락’이 아니라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중략).

단적으로 말해서, ‘장편소설’이라고 표지에 박혀 있더라도, 그런 걸 세 권이나 냈더라도 그는 아직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최근 <남한산성>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평했다). 그가 쓴 건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이 쓴 역사 ‘에세이’이고, 혹은 그에 대한 ‘판타지’이거나 ‘모노드라마’들이다. 그건 박상륭의 ‘잡설’들이 ‘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떻게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요컨대 그의 문체는 소설이란 장르, 품위 없고 잡스러운 장르가 요구하는 바 일상적 디테일, 저자거리의 언어를 담기에는 너무 고상하며 품위가 넘쳐난다. 그래서 어색하다. 마치 장미희가 떡 장수를 연기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가 아무리 “소설이요!”라고 외쳐도 내겐 “똑 사세요!”로 들린다(중략).

비유컨대, 김훈의 문체가 아름답고 유장한 ‘패장(敗將)의 문체’라면, 김규항의 문체는 ‘자객의 문체’이다. 백전백패를 ‘자랑하는’ ‘패장의 문체’와는 달리, ‘자객의 문체’는 ‘무엇을’에 ‘어떻게’가 복무하는 문체이다. 마치 자토이치의 검술처럼, 그는 짧게 끊어서 군더더기 없이 급소들만을 공격한다(중략).

나에게 ‘덜 나쁜 사회’의 의의를 가르쳐준 이는 기자이자 에세이스트이며 소설가인 고종석이다. 그 또한 ‘문체’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문체는 화려하지도 간결하지도 않으며 그저 담백하다. 그리고 상식적이다. 전라도 사람으로서 ‘서얼의식’은 갖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특별한 트라우마나 결벽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논리적이지만, 모나지 않고 둥글다. 따라서 그런 그의 문체가 소설이란 장르와 잘 어울리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김훈이 소설을 못 쓰고, 김규항이 소설을 안 쓰는 데 반해 고종석은 소설을 잘 쓴다. 이 세 ‘글쟁이’를 내 식대로 분류하자면, 김훈은 ‘예술가’이고, 자칭 ‘출판인’이어서 ‘출판운동’을 하는 김규항은 ‘운동가’이며, 고종석은 ‘지식인’이다.

(원 글은 이 분량의 열 배가 넘는다. 그의 문체를 희생할 수 없어 군데군데 덜어내는 방식으로 정리했다. 반드시 원문 전체를 보기를 권한다. 원제:문체, 혹은 양파에 대한 생각. 출전: 로쟈의 저공비행 http://blog.aladin.co.kr/mramor/84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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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from 2007-11-14 20:39 
    시사 IN을 읽다가 들렀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분들이 참 부러웠는데 고수를 만난 느낌입니다. 좋은 책 많이 읽고 좋은 글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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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15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사인을 읽으며..알라디너 모두,우리식구들처럼 살갑게 느껴지던데요.^^ 로쟈님은 알라딘의 삼촌?,어떤가요.ㅎ 알라딘에서 오래 뵐 수 있기를..기대합니다.로쟈님,파이팅!

로쟈 2007-11-15 12:38   좋아요 0 | URL
어디 가려고 해도 알라딘이 데려다줘야 말이죠.^^;

이네파벨 2007-11-15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왓 오랜만에 서재에 들어왔더니 이렇게 실한 정보를!!! 인터뷰 추카드리고요~ 사진도 멋지고요~ 앞으로도 계속 멋진 서재 가꿔나가시기를........부탁드려요^^

로쟈 2007-11-15 12:38   좋아요 0 | URL
이네파벨님도 좋은 책 많이 내시길.^^

몽당연필 2007-11-15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본색...인가요??
알라딘 외 다른 인터넷서점에서도 로쟈님 글 보니까 무지 반갑던데...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셨군요.
멋집니다!!
그나저나 로쟈님은 따님을 두셨네요. 전 초등1학년 머슴애인데...요즘들어 말을 안들어서 미워죽겠어요. ㅠㅠ

로쟈 2007-11-15 22:10   좋아요 0 | URL
제가 다른 인터넷서점에서도 '활동'하나요?? 제 딸은 저를 미워한답니다.^^;

20donald 2007-11-1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시사 IN을 읽다가 들어왔습니다..저랑 비슷한 분이 있네요..^^
좋은 글 계속 많이 남겨주세요.. 즐겨찾기로 해놓고 자주 들르겠습니다..

로쟈 2007-11-15 22:09   좋아요 0 | URL
책을 좋아하시나보군요.^^ 종종 들르시고 유익한 조언도 남겨주시길...

ryu8737 2007-11-16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일주일동안 여행을 갔다왔더니 이런 일이~ 로쟈님이 궁금해서 소문(스토커는 아닙니다. 단순히 궁금해서 ^^)을 사서 보았던 기억이 있었는데... 사진까지 올라왔네요.
비평고원에서 로쟈님을 글을 보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7-11-16 19:46   좋아요 0 | URL
제가 <소문>을 몇 권 팔긴 했네요.^^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aisms 2008-01-29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블로그에 올라있는 사진만 보고 제가 알고 있는 로쟈가 외국인이었나 하고 잠시 놀랐더랬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한번은 뵙게 되겠지요. 그러려면 미리미리 지젝의 책 한 권이라도 읽어 둬야 겠지요. 고도를 더 높여 서평 문화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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