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북리뷰들을 잠깐 훑어보다가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책에 대한 리뷰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국제정치학자 케네스 월츠의 <인간 국가 전쟁>(아카넷, 2007)이 최근에 나온 책이고, 저자의 명망과 책의 의의에 대해서 전재성 교수가 짚어주고 있다. 월츠의 책으론 <국제정치이론>(사회평론, 2000)이 소개된 바 있다.

경향신문(07. 11. 10) 국제정치 현상의 본질
2차 세계대전 이후 활동한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한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케네스 월츠가 거론될 것이다. 그만큼 월츠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중의 한 명이다. 국제정치학의 가장 중요한 이론 패러다임인 현실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고, 유럽에 비해 저발전되어 있던 20세기 미국의 국제정치학 이론의 초석을 놓는 데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은 현재와 같은 세계적 주도국의 위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국제정치에 대한 관심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 시기 미국의 국제정치학은 한스 모겐소와 같이 유럽에서 건너온 정치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츠는 미국의 시각에서 미국적 이론관을 가지고 미국의 외교정책에 도움이 되는 국제정치학을 시작한 국제정치학자이다. 냉전의 현실적 상황과 미국의 과학적 이론관의 배경에서 국제정치학 이론, 특히 신현실주의 이론을 만들어낸 중요한 학자이다.

월츠의 ‘인간, 국가, 전쟁: 전쟁의 원인에 대한 이론적 고찰’은 출판된 지 50년이 되어 가지만, 여전히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는 20세기의 고전이다. 수학과 경제학으로 학문을 시작한 월츠는 국제정치를 과학적으로 이론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시도하였다. 월츠 이전의 국제정치학 이론들이 역사와 철학을 중시하였다면, 월츠는 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이론에 입각하여 국제정치이론을 만들고자 시도하였다.
1959년에 출간된 이 책은 컬럼비아대에서 작성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전하여 출간한 책이다. 월츠는 이후의 인터뷰 등을 통하여 ‘인간, 국가, 전쟁’을 미시경제학의 실증이론, 과학철학, 그리고 인류학 및 철학 등을 광범위하게 종합하여 저술한 책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만큼 국제정치 현상을 다른 학문 분과와 구별하여 과학적으로 이론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전쟁의 원인에 대한 고찰이지만, 월츠는 이 책에서 전쟁을 비롯한 다양한 국제정치 현상들의 원인을 밝히고자 노력하고 있다. 월츠는 인간, 국가, 국제정치 구조의 세 가지 분석 수준에서 국제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시각을 논하면서, 각각 ‘이미지’라는 비유를 붙이고 있다. 국제정치를 보는 첫 번째 이미지는 전쟁을 비롯한 국제정치 현상을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보는 방법이다. 두 번째 이미지는 국가의 성격, 즉, 민주주의, 독재 등 정권의 모습에 비추어 보는 방법이다. 세 번째 이미지는 국제정치의 독특한 구조에 비추어 국제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견해이다. 월츠는 전쟁과 같은 국제정치 현상의 원인이 무엇보다 세 번째 이미지, 즉, 국제정치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나 국내정치와 달리 국제정치는 주권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권국가는 국제기구, 세계정부와 같이 상위의 권위체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권한과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정부상태’적 조직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월츠는 이 책에서 기존의 다른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자신의 현실주의 이론을 만들어가고 있다. 월츠는 첫 번째 이미지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철학자인 스피노자, 두 번째 이미지를 강조한 칸트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국제정치구조의 세 번째 이미지를 제시한 루소의 시각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월츠는 루소의 ‘사슴사냥’ 이야기를 하나의 사례로 들어, 국제정치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다. 사냥에 나선 사냥꾼들은 협동하여 사슴을 잡으려 하지만,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는 토끼 한 마리가 나오면 다른 사냥꾼들과의 약속을 깨고 대오를 이탈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냥의 대오와 같은 관계의 짜임새, 상호작용의 구조가 개체들의 행동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냉전이 전개되면서 월츠의 이론은 미국의 외교정책은 물론, 다른 국가들의 정책관, 그리고 많은 학자들의 상상력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제정치구조가 냉전과 같이 양극체제로 되어 있는가, 혹은 다극, 패권체제로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구조적 원인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때문이다.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 주도의 패권체제로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이러한 월츠의 통찰력이 미국과 다른 국가들의 외교정책에 어떠한 지혜를 줄지가 궁금하다. 더구나 냉전의 영향력이 아직도 남아있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국제정치를 생각할 때 국제정치구조의 영향력은 여전히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월츠의 번역서는 매우 시의적절하고,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전재성|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07. 11. 09.

P.S. 책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기 위해서라도 참조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같은 지면에 실린 리뷰로, 석유 지정학과 20세기 전쟁을 다룬 윌리엄 엥달의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길, 2007)에 관한 기사도 눈길을 끈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저자에 따르면 단연 석유 때문이다.

경향신문(07. 11. 10) 석유와 무관한 전쟁은 없다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자꾸자꾸 예뻐지면 나는 어떡해. 거울 속의 나를 보면 정말 행복해. 미녀는~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꽃미남 배우 이준기가 출연한 한 음료 CF송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재기발랄한 누리꾼이 댓글을 달았다. “미국에서도 유사품 출시 예정. ‘부시는 석유를 좋아해’” 또 다른 네티즌의 패러디 버전이 이어진다. “미국은 석유를 좋아해. 자꾸자꾸 빼앗으면 우린 어떡해. 석유로 번 돈을 보면 정말 행복해. 미국은~ 미국은 석유를 좋아해.”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구실삼아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속셈은 막상 석유에 있다는 것을 비아냥거리는 풍자다. 최근의 전쟁들이 이처럼 한결같이 석유 지배권을 둘러싼 다툼이라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도 아니다. “세계를 지배하고 싶은가. 그러면 석유를 지배하라. 모든 석유를, 어디에서든.” 벨기에 저술가 미셸 콜론이 미국의 행태를 보며 씁쓸하게 던진 한 마디다. 사실 이 말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에너지를 지배하라, 그러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오래 전에 갈파한 것과 수사만 다를 뿐이다.

윌리엄 엥달이 쓴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원제 A century of war, Anglo-American oil politics and the new world order)은 바로 그 석유의 눈으로 본 한 세기의 역사다. 그것도 패권국가 영국과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을 겨냥한 것이다. ‘겨냥했다’는 표현은 미국의 언론인이자 비주류 경제학자인 글쓴이의 극히 비판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음모론이 전편(全篇)을 지배하는 게 아니냐고 또 다른 음모론적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를 만큼 신랄하다. 문장이 신랄한 게 아니라 고갱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양한 비밀문서와 자료를 바탕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빼앗아간다.
저자는 먼저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었던 것은 바로 석유의 중요성을 맨먼저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1882년 9월 영국에는 장차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비결은 석유에 있다는 전략적 함의를 꿰뚫고 있던 피셔 제독이 있었다. 당시 함장이던 그는 부피가 큰 석탄 화력추진형 군함에서 새로운 석유 연료형 군함으로 바꿔야 한다고 정부 관리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해 나갔다.
석유를 때는 디젤 모터로 동력을 얻는 전함은 연기를 전혀 내지 않아 적에게 들킬 염려가 없는 데 반해 석탄을 때는 배는 내뿜는 연기가 10㎞ 밖에서도 선명하다. 석탄 배의 모터는 4~9시간이 지나야 완전 가동되지만 석유 모터는 30분이면 충분하다. 전함 한 척에 기름을 공급하려면 12명의 인원이 12시간 작업하면 끝이지만 석탄 배는 500명의 인원이 5일 동안 작업해야만 한다. 다른 장점도 수없이 많지만 이 정도만 해도 더 비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괴짜 몽상가 취급을 당하던 피셔 제독의 의견이 먹혀들지 않았으면 영국의 미래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20세기 초 영국이 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었던 데는 석유가 있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종전협정 직후 연합군의 전승 만찬장에서 프랑스 상원의원이자 전시 석유총위원장인 앙리 베랑제가 “석유가 승리의 피였다”고 만찬사를 요약한 것만 봐도 알만하지 않은가. 독일이 철과 석탄에 대한 자국의 우위를 과신해 석유에 대한 연합군의 우위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석유를 가장 먼저 안 것은 막상 독일이었지만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석유가 세계사에서 또 하나의 중대한 고비가 된 것은 ‘일곱 자매(Seven Sisters)’로 불리는 영·미 카르텔의 탄생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경제질서를 형성한 브레턴우즈 체제가 미국과 영국의 세계 석유지배권과 맞닿아 있으며, 유럽부흥계획인 마셜 플랜도 미국의 5대 석유회사와 영국의 2대 회사가 결정적인 배후세력이었다고 저자는 논증한다. ‘일곱 자매’라는 별명을 처음 만들어 붙이고 이들 골리앗 카르텔과 맞서 싸우던 다윗이었던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 엔리코 마테이가 어느날 갑자기 비행기 사고로 숨지는 슬픈 비화에서는 비장감이 배어나온다.
냉전기간 동안 석유가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규정하고 소련이 붕괴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은이는 정곡을 찌른다. 이라크 전쟁을 비롯해 냉전 종식 이후 벌인 미국의 군사행동을 규율한 석유는 구 유고슬라비아연방이 해체되는 과정과도 직결돼 있다고 분석한다. 흔히 인종청소의 반인륜 범죄를 처단하기 위해 밀로셰비치 정권을 붕괴시킨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막은 미국의 석유 전략이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현대전쟁 가운데 석유와 무관한 전쟁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코소보 전쟁은 물론 아프리카 내전, 영국의 아르헨티나 공격 등도 하나같이 석유 때문이었음이 드러난다.
이 책에서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흥미로운 사실도 적지 않게 밝혀진다. 오일쇼크를 일으킨 주체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아니라 그들을 뒤에서 조종한 영국과 미국의 세력이었다든가,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각종 환경단체들이 석유업계의 후원을 받았다는 점 등이다. ‘검은 황금’ ‘현대 문명의 으뜸 재화’로 불리는 석유의 배럴당 100달러 돌파가 시간문제라는 기사가 연일 지면을 장식하는 지금 이 책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를 주고도 남을 듯하다.(김학순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