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서점에서 얼핏 들춰본 책에 <대단한 책>(마음산책, 2007)이 있다. 저자가 일본 여성이라는 것과 의외로 러시아 작가들의 이름이 자주 눈에 띈다는 게 특이했는데, 오늘 몇 개의 서펑을 읽어보니 그럴 만하다. 저자가 일본에서도 아주 유명한 러시아어 통역사였던 것이다. 20년동안 하루에 7권씩 읽었다는 그녀의 다독/속독도 놀랍지만 나로선 러시아책들에 대한 독후감들을 구경해보기 위해서 책을 사들지 모르겠다(아님 도서관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거나). '대단한 책'이라기보다는 '대단한 독서광'에 관한 리뷰를 일단은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11. 17) '대단한 독서광' 그녀의 삼매경

<완전히 제압당해 재기불능으로 만들 것 같은 대단한 책>이 원제인 이 책의 저자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ㆍ1950~2006)는 20년 동안 하루 평균 7권의 책을 읽어치운 일본의 다독가이다.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잡지 <주간문춘>(週刊文春)에 연재한 ‘독서일기’와 10년간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서평을 담은 책이다. 그녀가 읽은 책 가운데 390권에 대한 서평이 실려있다.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한평생 책을 끼고 산 다독가의 삶이 흥미롭다. 요네하라 마리는 일본의 유명한 러시아어-일본어 동시통역사였다. 도쿄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따라 체코 프라하에 체류하면서 러시아어를 익혔다. 모든 수업이 러시아어로 진행되는 구소련 대사관 부속 학교에서 러시아어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책을 읽는 버릇이 생겼다. 일본어를 잊어버리기 시작하자 일본 문학작품을 읽었다. 일본에 돌아온 후에도 러시아어 작품을 읽으면서 러시아어 실력을 향상시켜나갔다.

어릴 때 붙은 책 읽는 습관은 한평생 따라다녔고 책 읽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먹는 속도, 걷는 속도, 책을 읽는 속도가 다른 사람보다 빨랐는데 먹기와 걷기의 경우는 다른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라고 어머니로부터 잔소리를 들었지만 책 읽기는 아무리 빨리 해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입시에서 해방되었을 때부터 책을 읽는 속도가 매우 빨라져 몇 백쪽의 책을 20분만에 읽어치울 정도로 속독가가 됐다.

그녀가 읽어치운 책은 러시아와 일본 문학, 국제정치, 논픽션, 어학ㆍ사전류, 개ㆍ고양이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특히 국제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 일본의 역사교과서 파동, 2002년 한일 월드컵, 이라크전쟁 등에 대한 촌평을 읽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9ㆍ11테러 직후 그녀는 “고이즈미 총리의 눈매가 완전히 변했다. 일본은 미국의 속국이니 속국의 지혜인 면종복배를 관철시켜야 하나, 고이즈미 총리는 진심으로 복종한다.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적었다.

책에는 또 눈이 빡빡할 때 눈물이 나게 하는 책을 펼쳐 드는 등 군데군데서 독서광의 삶이 드러난다. 나이 들어 난소암에 걸렸을 때 암 관련 서적을 독파하면서 자신의 치료 경험에 비추어 책을 검증하는 서평을 쓰기도 했다. 그녀가 서평을 쓴 책들 가운데 국내에 번역 소개되지 않은 책들이 많지만 짤막한 소개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책은 인간의 감정을 흔들어 놓는 존재이지만, 내가 최고로 생각하는 감정은 언제나 바로 웃음이다. 웃음을 주는 저자가 가장 좋다”고 했다.(남경욱 기자)

07. 11. 18.

P.S.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의 책으론 <프라하의 소녀시대>(마음산책, 2006)를 필두로 하여 댓 권의 책이 번역/소개돼 있다. 올해만 네 권이 나온 것이니 나름대로 '붐'이라 할 만하다. 아는 사람만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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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18 17:13   좋아요 0 | URL
부럽네요- 그렇게 빨리 읽으면, 정말 따라잡을 수 없잖아요-
저는 대학시절 제일 친한 친구가 책을 엄청 많이 읽어서, 그 친구를 따라잡겠다고 좀 더 많이 읽기 시작했었는데, 이미 저랑 속도 자체가 너무 달라서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로쟈 2007-11-18 17:22   좋아요 0 | URL
한때 속독법이 유행하긴 했었는데, 모든 책을 속독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가령 시집 같은 걸 속독한다는 게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요. 물론 필요한 책을 빨리 읽을 수 있는 건 부러운 능력이지요...

라주미힌 2007-11-18 17:38   좋아요 0 | URL
'프라하의 소녀시대'의 그녀군요...
이 책도 흥미롭게 읽었는데, 다독가로써의 그녀도 흥미롭군요.

로쟈 2007-11-18 17:45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제쳐두었었는데, 이번에 관심을 갖게 되네요...

소경 2007-11-18 21:22   좋아요 0 | URL
그래도 기사에 나올 사진인데 머리가 헝클어진 채 찍었던 건 예외네요. 그렇게 책을 빨리 읽으면 쥐어 짜는 일도 없을 텐데.....이론 책을 시집처럼 박터지게 읽는 저로써는 샘나네요.

로쟈 2007-11-19 12:28   좋아요 0 | URL
이론서나 시집이나 원래 그렇게 읽는 거 아닌가요.^^;

바람돌이 2007-11-19 00:20   좋아요 0 | URL
프라하의 소녀시대에서 참 건강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저런 능력까지... ㅎㅎ 마녀의 한다스도 볼려고 꽂아두고 앞부분 조금 읽었는데 꽤 재밌을 것 같아요.

로쟈 2007-11-19 12:28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미녀의 한다스'인 줄 알았습니다...
 

대학신문에서 '21세기의 사유들' 연재를 옮겨왔었는데, 알라딘에서 다른 분들도 옮겨놓는 터라 지난 두어 주를 생략했다. 이번주까지 하면 안토니오 네그리(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861) 비토리오 회슬레(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921) 장-뤽 낭시(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990) 등이 더 다루어졌다(기억에는 랑시에르 정도가 남아있다). 이 연재 대신에 옮겨놓는 것은 이번 가을에 출간된 두 권의 책,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과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도서출판b, 2007)에 대한 리뷰이다. '해체와 마르크스주의의 때맞지 않은 조우'라는 관점에서 이 책들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대학신문(07. 11. 19) 해체와 마르크스주의의 때맞지 않은 조우

세인들의 오해와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자크 데리다의 관계는 꽤 막역하다. 가령 루이 알튀세르는 데리다의 ‘악어(cai­ man)’였고, 데리다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악어’였다(‘악어’란 이들의 모교인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수자격시험 준비생들을 지도하는 과외교사의 별칭이었다). 그러나 세인들의 오해가 틀린 것도 아닌 것이, 마르크스‘주의’와 데리다의 관계는 겉보기에 그리 밀접하지 않았다.

물론 데리다가 1979년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렀고, 1982년에는 마이클 라이언이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라는 책을 발표해 데리다의 사유가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를 자신의 저서 전면에 처음 드러낸 것은 1993년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발표하면서였다.



프랑스의 역사적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데리다의 사상이 조우할 수 있는 계기는 1972~1978년과 1983~1984년에 마련됐다. 1972년 공산당은 사회당과 공동강령을 발표했고(그 결과 1978년 총선에서 공산당은 프랑스 야당의 제1좌파 자리를 사회당에게 내줘야 했다), 1976년에는 제22차 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을 포기했으며, 1983년부터는 공산당 지지자들이 대거 사회당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요컨대 이 기간 동안 공산당은 전후 이래로 프랑스 지성계에서 확고하게 누렸던 ‘어떤’ 권위를 잃었고, 그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을 옭아맸던 교조주의가 무너졌던 것이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데리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서로에게 ‘말조심’하게 만들었던 ‘봉쇄장치’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알튀세르가 데리다를 우호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두 편의 수고(手稿),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1982)과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1986)을 집필한 것도 이 무렵이다.

데리다의 이력에서 보면 더욱 더 직접적인 계기는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인 1990년에 찾아왔다. 이 해는 1985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발표했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이 동구권에서부터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으며 서서히 종말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는 점에서 진정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이었다. 이 가을의 끝자락이 겨울을 예고할 즈음인 1990년 초, 데리다는 전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혁명의 고향인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그 뒤(『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외에도) 『다른 곶』(1991), 『법의 힘』(1994), 『우정의 정치학』(1994) 등 정치적 저서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리고 2007년, 이제 우리 앞에서도 데리다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조우가 ‘때맞지 않게’ 되풀이되고 있다.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가 각각 15년과 11년의 세월을 건너 우리 앞에 나란히 도착한 것이다(사실 『대중들의 공포』의 모태는 1994년 영어로 먼저 발표된 『대중들, 계급들, 관념들』이니 이 책 역시 약 15년의 세월을 건너왔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예전에 발표됐던 책들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이 조우가 ‘때맞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등장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준거의 토대, 즉 현실사회주의가 와해된 상황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때맞지 않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오히려 자본 주도의 신자유주의가 그때보다 훨씬 강고해진 바로 지금 이곳에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더욱 더 때맞지 않은 것이리라. 게다가 발리바르라니, 누가 지금도 알튀세리앙들을 읽는단 말인가? 이 ‘때맞지 않음’은 단순한 ‘시대착오’가 아닐까?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데리다와 발리바르(이제부터 이 고유명사는 ‘동시대 마르크스주의’의 환유이다)의 조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발리바르 이전에 알튀세르가 주목했던 데리다의 개념들은 ‘여백(marges)’과 ‘산포(disse′mination)’였다. 알튀세르는 이 개념들을 통해 일체의 목적론을 부정한 새로운 유물론, 즉 마주침의 우발성과 혁명의 필연성을 사유하는 유물론을 구축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에서 라이언이 시도하고자 했던 바도 (비록 좀더 포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데리다와 마르크스는 무엇보다도 일체의 ‘형이상학’(여기에는 실증주의, 자연주의, 객관주의 등을 비롯해 당/국가로 상징되는 중앙집권주의/중심주의, 자본주의의 신용체계 등이 모두 포함된다)에 대한 비판자라는 점에서 비교 가능하다는 것이 라이언의 전제였다.

발리바르도 형이상학의 해체라는 데리다의 테마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알튀세르나 라이언과 비슷하지만, 오히려 데리다의 방법론 자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이들과 다르다. 데리다와 발리바르가 공유하는 이 방법론, 흔히 우리가 ‘해체(deconstruction)’라고 부르는 이 방법론을 내 식으로 풀자면 ‘아포리아(aporia)의 드러냄’이다.

데리다는 ‘정치적 전환’을 감행하기 전에도 늘 아포리아에 주목해왔다. 데리다가 형이상학을 해체할 때 즐겨 쓴 방식이 바로 이것, 즉 일체의 형이상학적 담론에 내재된 논리적 궁지(또는 결정불가능성/계산불가능성)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발리바르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개념들, 요컨대 이데올로기, 계급, 당/국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가 이해해왔던 방식대로의 정치 개념 그 자체가 다다를 수밖에 없는 아포리아를 드러냄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내부에서부터 ‘해체’한다.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대중들의 공포』에는 데리다와 발리바르의 이런 유사점이 책 제목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난다. ‘유령’이 아닌 유령‘들’, ‘대중’이 아닌 대중‘들’로 표기된 제목에서부터. 복수(複數)로 표기된 이 두 단어는 그 자체의 양면성/양가성을 드러낸다(이런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데리다의 개념은 오히려 ‘파르마콘’[pharmakon]이다). 가령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무력화하려는 자들에 맞서 그 유령의 유산을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우리는 유령을 지켜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를 괴롭혔던/괴롭히고 있는 유령을 넘어서야 함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우리는 유령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극복해야 한다”). 발리바르 역시 『대중들의 공포』에서 지배계급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혁명 세력으로서의’ 대중들에 주목함과 동시에(“우리는 대중들의 급진성을 믿어야 한다”) 지배계급의 권력에 공포를 느껴 수동적이 되는 ‘반동 세력으로서의’ 대중들에게도 눈길을 돌린다(“우리는 대중들의 수동성을 주시해야 한다”).

어쨌거나 데리다나 발리바르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들의 연구 대상이 불러오는 아포리아를 해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포리아를 끌어안음으로써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여는 데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때맞지 않게’ 도착한 이 두 책의 조우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데리다는 당대의 정치지형 내에서 ‘타자’로 존재하고 있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끌어안음으로써 종교적인 것과 정치의 관계라는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갔고, 발리바르는 대중들의 야누스적 얼굴을 끌어안음으로써 반폭력/시민인륜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탐구하고 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때맞지 않음’을 단순한 ‘시대착오’의 일회적 에피소드로 끝낼지, ‘새로운 가능성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으로 만들지는 이제 이 두 책을 읽을 우리의 몫이다.(이재원_전문번역가)

07. 11. 18.

Жак Деррида в МосквеThe Althusserian Legacy

P.S. 두 가지 사항, 혹은 두 가지 책에 대해 덧붙이고 싶다. 먼저,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 끝자락이 겨울을 예고할 즈음인 "1990년 초, 데리다는 전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혁명의 고향인 모스크바를 방문했고"란 대목과 연관된 책은 <모스크바의 데리다>(러시아어, 1993)이다(이 책은 어쩌면 내년에 국역본이 나올 수 있다). 이 데리다 텍스트의 영역본은 'Back from Moscow, in the USSR'이란 제목으로 마크 포스터의 책 <정치학, 이론, 그리고 현대문화>(1993)에 수록돼 있다. 데리다의 텍스트는 앙드레 지드의 <소련기행>,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그리고 비틀즈의 노래 'Back in the USSR'(http://www.youtube.com/watch?v=4-2LQGigK-0)을 밑텍스트로 한 글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한 권은 데리다와 마르크스주의, 보다 구체적으론 데리다와 (자신이 '악어'였던) 알튀세르와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가 수록된 카플란과 스프린커 편집의 <알튀세르의 유산>(1992/1993). 데리다의 이 텍스트는 언젠가 잡지 <이론>에 윤소영 교수의 번역으로 절반만 소개되었다(내가 읽은 건 그 절반이다. 마저 번역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또한 완역으로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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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놓친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의 '번역비평'에 관한 제언인데, 덕분에 생각이 나서 지난달말에 열렸던 영미문학연구회(영미연)의 학술대회 자료집까지 홈피(http://www.sesk.net/board_focus/content.asp?num=174)에 가서 챙기게 됐다(학술대회에 가보려고는 했지만 여력이 되질 않았다). 한기호 소장은 학회의 발표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발표문('한국출판의 현황과 번역의 과제') 가운데 일부를 칼럼기사(한기호의 출판전망대)와 함께 옮겨놓는다. 많은 부분들에서 동의하며 공감할 수 있는 제안들이다. 

한겨레(07. 11. 03) '잡초’ 골라낼 번역비평 필요하다

지난해 10월,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의 실제 번역자가 따로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 다음 이 땅에서는 번역의 윤리를 질책하는 커다란 광풍이 불었다. 일주일이 넘게 수많은 매체에서 이에 대한 견해와 논평을 요구하는 바람에 전화로 ‘마시멜로’ 소리만 들어도 입에 단내가 날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리번역의 관행은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고 번역회사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하긴 요즘 번역회사에 번역을 맡기면 번역료가 싸고, 속도도 빠르며, 문장이 깔끔하다는 세 가지 장점이 있단다. 하지만 오해 마시길. 문장이 깔끔하다는 것은 오역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번역회사가 문장 교열자를 따로 두어 원뜻과 관계없이 그럴싸하게 다듬어주고 있다나.

지난달 27일에 서울대 규장각에서는 영미문학연구회(이하 영미연) 주최의 <번역과 영미문학의 미래>란 주제의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영미연 회원들로 구성된 번역평가사업단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해방 이후 지금까지 발간된 고전작품 71종의 번역물을 총점검한 성과인 <영미 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 1, 2권의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이날 토론에서는 번역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 한 발표자가 인용한, 번역은 “터키 카펫의 뒷면”이라거나 “셰프의 요리를 운반하던 웨이터가 지독하게 진부한 대중적 취향으로 말미암아 위에다 케첩을 뿌려서 내놓는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말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번역은 “배신자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영미연의 작업에 대해서도 화초(잘된 번역)를 키울 것이냐 잡초(잘못된 번역)를 골라낼 것이냐는 논쟁이 벌어졌다. 극단적으로 잡초를 고를 시간에 화초를 키우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겠느냐는 지적마저 있었다. 하지만 영미연의 작업은 이 땅의 번역문화를 혁신하는 데 초석이 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인문학이 “과거의 텍스트를 상대하는 학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인문학 서적만큼은 최대한 원전의 뜻을 제대로 담은 번역서를 읽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발터 베냐민이 ‘번역자의 사명’이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원작이 의도한 것을 자세한 사항까지 애정을 갖고, 자신의 언어 속에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두 개의 깨진 조각이 하나의 항아리의 파편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다’의 본질은 누군가 ‘아니다’를 말했을 때 쉽게 드러난다. 영미연의 작업처럼 누가 잡초라고 말하며 호루라기를 불어줄 때에야 화초의 본질이 확실해지는 법이다. 물론 잡초로 지적받은 사람이 고의로 오역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누군가 꾸준히 ‘아니다’라고 말해주었을 때 ‘이다’의 본질을 쉽게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영미연의 작업이 결코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누군가가 계속해야 할 작업이다. 물론 그 일이 상시적으로 지속되려면 번역비평의 저널이 꼭 있어야 할 것이다. 이날 토론에서 나는 내내 마음먹고 있던, 내년 2월에 계간 형태의 저널을 꼭 창간하겠다는 다짐을 그만 털어놓고 말았다.(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한국출판의 현황과 번역의 과제

인문학의 위기와 번역

발표자가 서두에서 『마시멜로이야기』 사건이 터졌을 때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 것은 그런 자기계발서에서는 번역의 질이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심정적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책은 읽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또 외국의 자기계발서는 국내 현실에 맞춰 적당히 가감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요즘 회자되는 ‘인문학의 위기’와 대리번역을 연결시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삶의 길을 터놓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좁다란 길일망정 누군가 터놓기만 하면 바로 효과가 나타나진 않지만 단지 몇 사람이 지나간 흔적 때문에라도 나중에 터널도 되고 고속도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누가 길을 내고 누가 다닐 것인가? 안타깝게도 우리의 인문학은 서유럽에서 장구한 세월 동안 길을 내기 위해 거친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가져와 활용한 면이 크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를 두고 서양의 경험적인 것을 매우 선험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비판했다. 조동일 교수는 온통‘지식의 수입상’만 넘친다고 일갈했다. 이제 우리도 스스로 길을 내겠다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인문학은 간단히 말해서 ‘과거의 텍스트를 상대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텍스트를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 원전부터 충실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한계가 많다. 그래서 외국 원전을 많이 읽어야 한다. ‘언어가 되지 않는’ 대중이나 기초연구자는 번역서라도 제대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런 사람 중에 길을 내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런데 신뢰할만한 원전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철학, 정치학 등에서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플라톤의 경우 일본에서는 기무라 다카타로木村鷹太郎가 1903-1911년에 걸쳐 완역작업을 했고 후잔보冨山房라는 출판사를 통해 전집이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주요 저작들만 중복 출판하다가 올해 4월에서야 전집 간행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네 권 출간된 상태다. 팔릴 것 같은 책은 수십 종, 경우에 따라서는 1백 종이 넘게 변종이 생산되지만 꼭 번역되어야 할 책이 번역되지 않은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번역의 질은 또 어떤가? “번역은 배신자의 행위”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번역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특히 인문서의 경우 더 그렇다. 나카야마 겐(中山元)의 『사고용어사전』(2000) ‘번역’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이 번역의 의미를 묻고 있다.

“저 쪽으로(trans) 이끈다(ducere)라는 동사에서 생겨난 말인 번역. 여기에 있는 것을 저쪽 물가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행위이다. 그렇지만 이 행위는 항상 배리背理에 시달린다.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완전히 같은 가치를 가진 언어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번역은 가능한 것이며 마땅히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언어로 말한 것을 별개의 언어로라도 거의 같은 의미와 가치를 가진 말로 바꾸지 못했다면, 철학의 보편성 자체를 보증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독일어가 없었다면 철학은 불가능했다고 생각한 듯한데, 일본어로도 하이데거의 사고는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그것이 시와의 커다란 차이이다.

시에서는 단어 하나가 그 작품 자체이고, 다른 언어로 번역을 한다는 것은 그 작품을 이해할 가능성을 상당히 앗아가 버린다. 시인은 언어를 한 번 쓸 수 있는 생물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은 개념을 사용해 사고하는 작업이다. 개념이라는 것을 번역할 수 있는 한, 철학 텍스트는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번역은 배신행위이며 늘 어떤 의심에 시달린다. 원작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다. 번역은 필터를 거친 전달에 지나지 않으며, 그 텍스트를 확실히 이해하려면 원문을 읽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번역된 텍스트는 항상 뒤떨어진 것일까? 번역으로 무엇인가가 새롭게 태어날 수는 없을 것인가?”

나카야마는 이어서 “번역이라는 작업도 원작의 의미에 가장 유사하게 따라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작이 의도한 것을 자세한 사항까지 애정을 갖고, 자신의 언어 속에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두 개의 깨진 조각이 하나의 항아리의 파편으로 인정받게 된다(발터 벤야민의 『번역자의 사명』). 번역을 할 때 원작자의 표현에 구애받지 않고 원작자가 작품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생각하고 자신의 말로 바꿀 필요가 있다. 때로 번역자는 원작자가 사용하지 않은 표현도 덧붙인다. 그 쪽이 원작자의 의도를 잘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 번역자의 자의적 생각이 존재함은 피해갈 수 없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번역자가 애정을 갖고 자기 나름대로의 자의적 생각을 덧붙인다면, 원작자의 표현과 번역자의 표현은 ‘커다란 언어의 두 가지 파편’처럼 된다”고 했다.  

그리고 나카야마는 “외국어로 표현된 텍스트를 읽는 최선의 방법은 원문 읽기는 아닐 것이다. 자신이 번역해보는 것이다. 번역해봄으로써, 원문의 텍스트에서 보고 지나쳤던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번역이라는 행위 속에서 어떤 보편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의 차이를 넘어선 무엇으로, 그리고 역으로 언어의 차이로 인해 처음으로 부각되는 것”이라며 인문학 연구자가 스스로 번역해보는 행위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는 무엇인가?

사실 번역의 문제는 지금껏 수없이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된 적이 없다. 지난 몇 년간 학술진흥재단 등의 번역지원으로 적지 않은 책이 출간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 경우도 출간비용에 비해 지원액이 매우 미미해 제대로 된 책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적지 않다. 국가의 지원을 제외하고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를 몇 가지 정리해본다.

첫째, 텍스트 선정이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정보공학의 창안자인 마쓰오카 세이고松岡正剛에 따르면 정보편집의 중요한 용법 중에 ‘계통수系統數’가 있다. 계통수란 계보系譜이고 계열系列이며, 계도系圖다. 우리 눈앞에 있는 정보나 물건이 과거에 어떤 흐름을 갖고 있었는지 그림으로 그려서 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지식의 툴’이 계통수라는 편집용법이다.

모든 인문학 분야의 책도 계통수로 그려볼 수 있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에서 그 분야의 메인스트림이라 할 수 있는 큰 가지에 해당하는 책부터 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떤가? 원 텍스트는 찾아볼 수 없는데도 그 텍스트에 대한 비판서는 출간된다. 이런 경우 원전은 보지 못하면서 비판만 접하는 이상한 경우가 된다.

따라서 출판계 전체적으로 시급히 번역되어야 할 책을 선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 전문출판사가 더욱 늘어나야 한다. 전문출판사는 학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꼭 필요한 책을 출간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1천 부의 수요도 잘 이뤄지지 않는 마당에 책을 펴내려는 출판사가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문학 원전의 경우에도 꼭 필요한 텍스트는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영미문학연구회 같은 단체에서 시급히 번역되어야 할 문학원전의 목록을 예시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일 것이다.

둘째, 전문번역가를 키워야 한다 
지난 5월 17일, 교육부는 ‘인문학 진흥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교육 분야에서는 인문학 토대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 논문형 작품만 학위논문으로 인정해온 관행을 바꿔 동서양 고전을 번역하더라도 박사논문으로 인정하는 제도를 확대하고, 해마다 번역 전문가 1000명을 선발해 1인당 500만원씩 지원하는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1년에 50억씩 10년 동안 500억 원을 투입하겠다는 발상이다.

이 안이 실행되는가의 여부는 차치하고 원전번역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은 우리 사회의 번역이나 번역자에 대한 인식이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제로 실행된다고 해서 번역의 질이 올라갈 것인가? 게다가 1000명씩이나 선발한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 인적자원이 있는가?

한 번역가는 번역가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글을 읽고 소화하는 능력을 들었다. 영어번역의 경우 영한사전에 있는 단어에 구속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비우고 영영사전 등을 활용해 그 단어에 맞는 한국어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국어를 잘 쓰는 능력이 필요하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우수한 소설가는 번역을 잘 할까? 소설가는 단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글을 쓰기 때문에 번역을 꼭 잘 한다고 볼 수 없다.

번역은 언어능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문적 사유를 할 줄 알면서 폭넓은 상식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대학생들의 독서습관이나 인문서가 팔리는 상황을 갖고 미뤄 짐작해볼 때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을 해마다 1천 명씩 선발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설사 선발이 되었다 해도 번역문만 있으면 뭣하나? 그것이 실제 상품(책)으로 출간되어 독자와 만날 수 없다면 아까운 세금만 낭비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출판사와 연계해 책을 펴낸다는 계약서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500만원은 크게 부족한 돈이다. 돈만 던져놓고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정책을 내놓고 인문학을 살리겠다니, 이런 정책이 나오는 것은 결국 학술번역의 가치를 폄하하고 홀대하는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전문번역가란 어떻게 키워질까? 2001년에 김선남(원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발표한 「국내 번역 출판물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연구」(<한국출판학연구> 제43호)에서 “전문 번역가의 부족, 낮은 번역료, 오역 및 중복 출판, 출판사의 과도한 저작권 확보 경쟁 등과 같은 출판사 내‧외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번역출판이 활성화되기 위한 방안으로 전문번역인 양성 프로그램 개발, 번역활동 지원 단체의 확충, 번역 출판물 기획의 다양성 확보 등을 제시했는데 한국출판은 여기에서 한발작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앞에서 내놓은 방안은 대학(교육기관)과 출판현장과 번역가가 삼위일체가 되는 시스템에서 해결할 수 있다. 

지금 좋은 번역이 나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실력 있는 번역자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실력 있는 번역자가 나오지 않는 것은 번역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상도 높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번역료는 10년 전에 비해 200자 원고지 한 장당 1천 원 정도 오른 것에 불과하다. 영어번역의 경우에도 대부분 장당 2,500-4,000원 수준인데 8,000-10,000원 정도가 되어도 그리 높지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2,500원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1만5천원 정가의 책인 경우 1천부가 다 팔린다 해도 매출액은 1천만 원 내외다. 이 금액 모두 번역료로 지급되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여기에 제작비, 인건비, 일반관리비 등을 부담해야 하므로 출간 즉시 적자가 발생하는 일이 다반사니 대다수 출판인은 이런 출판을 기피한다.

또 베스트셀러가 되더라도 번역자는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릴 수 있다. 출판사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지만 번역자에게는 처음 받은 번역료밖에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한 번역자가 한 소설시리즈의 번역 인세로 수억 원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그 전에 몇 년간 매절 번역료의 절반도 되지 않는 금액으로 일을 하는 희생을 감수한 후에야 그런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셋째, 전문편집자를 키워야 한다 
번역전문회사는 대부분 번역지망생과 출판사를 연결해주고 커미션을 챙기는 중간업자에 불과하다. 이 회사들은 보통 번역료의 30% 가까이를 챙긴다. 심한 경우에는 200자 원고지 1장당 1천원의 번역료로 적당히 눙치기도 한다. 출판사가 지급번역을 요청할 경우에는 원고를 여러 사람에게 쪼개서 번역을 맡기고 그것을 모아 한두 사람이 죽 읽어가면서 획일성만 기하게 되는데 이런 원고의 수준은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정도다. 일부 전문번역회사들은 출판사와 번역자가 만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해 번역자가 편집자와 만나 번역의 질을 상승시키는 길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리고 번역자가 교열을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한다. 하지만 속도를 요하는 분야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출판사들까지 이런 전문번역회사를 애용하는 현실이다.

요즘에는 싼 번역료에 속도가 빠르고 깔끔하게 번역하는 번역전문회사들도 있다. 전문 ‘교열자’를 두어 거친 번역문도 깔끔한 문장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물론 원문을 대조하며 일일이 교열하는 것이 아니어서 전혀 엉뚱한 문장으로 만들어버릴 확률도 높다. 편집자 또한 그런 문장은 기계적으로 책을 펴내는 경우가 많다. 

꼼꼼하게 공들인 번역으로 소문난 유명 역자들은 편집자가 거의 손을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텍스트를 만들어 내지만, 그 밖의 경우 대부분 편집자가 ‘공역자’에 준하는 역할을 하거나 심지어 거의 ‘재번역’을 해야 하는 수준의 번역문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수많은 편집자는 번역 텍스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거의 ‘공역자’ 수준의 역할을 떠맡는다. 명목상의 역자는 결과적으로 고작해야 초벌 번역의 수고를 해주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게 되고 편집자가 사실상의 번역자 노릇을 하는 때도 많다. 국내 저작물에 빗대자면 거의 ‘새도 라이터’에 해당될 정도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만약 번역자가 이런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몇 권만 성실하게 번역해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설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편집자가 그리 많지 않다. 사실상 대다수의 편집자는 원문대조도 하지 않고 오탈자나 잡아내는 수준의 교열에 머무른다. 그래서 전문편집자의 필요성이 절실하지만 그런 편집자들이라도 ‘교수’의 직함을 달고 있는 학자 번역자의 경우 십중팔구 재번역해야 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교수들과 일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최근에는 ‘기획출판’이 강조되면서 기획 같은 ‘고상한’ 일은 내부에서 하고 ‘교정․교열 같은 하찮은 일은 아웃소싱으로 처리하는 일이 늘어나 전반적으로 텍스트의 질이 저하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능력 있는 편집자를 키우자는 것이 공염불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차피 그것은 우리가 꼭 걸아가야 하는 길임에는 분명하다.

넷째, 번역비평이 있어야 한다 
규칙의 본질은 비규칙적일 때 드러나기 마련이다. 누군가 ‘아니다’라고 호루라기를 불면 ‘이다’라는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간헐적으로 번역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개인 또는 단체가 있지만 이것이 이뤄지는 상시적인 저널이 있어야 한다.

영미문학연구회의 회원들로 구성된 번역평가사업단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해방 이후 지금까지 발간된 고전작품 71종의 번역물을 총 점검한 것은 사업단이 스스로 밝혔듯이 “좋은 번역을 가려내는 길잡이이자 번역문화를 혁신하는 데 초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1-2회성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저널을 통해 항구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만 번역의 질이 올라갈 것이다.

다섯째, 도서관 등 공적 수요부터 키워야 한다 
출판시장이 갈수록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상황에서 상업성은 부족하지만 꼭 필요한 번역출판이 이뤄지려면 공공적인 지원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국가나 기업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이 근원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번역서뿐만 아니라 출판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도서관의 기본적 존립목적인 정보 접근 평등성을 위해 도서관 스스로 양서를 다양하게 구비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공공도서관은 너무 ‘빈약’하다.

따라서 소기의 성과를 빨리 이루려면 각급 학교도서관의 활성화가 시대적 소명이다. 학교도서관을 활성화하고 이를 지역 주민도 이용하는 기초생활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한 다음 공신력 있는 기구가 선정한 우수도서를 학교도서관이 의무적으로 구비할 수 있는 정책적․사회적 시스템을 갖추어 양서의 경우 5천-1만 부 정도가 소비될 수 있다면, 출판사들은 구태여 시류에 영합하는 책을 만들지 않고도 안정된 경영을 해나갈 수 있다. 이것은 출판뿐 아니라 기초학문과 교육이 사는 길이고 결국 국가가 경쟁력을 갖는 일이다. 우수한 번역서를 여기에서 제외시킬 이유가 없기에 번역출판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정책당국자들은 예산타령을 일삼지만 예산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일 뿐이다. 

07.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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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조 2007-11-17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번역의 경우 영한사전에 있는 단어에 구속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비우고 영영사전 등을 활용해 그 단어에 맞는 한국어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네요. 대개의 철학책들은 이 능력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듯한데, 니체의 텍스트는 유독 이 능력이 요구되는 듯해서요.

로쟈 2007-11-17 23:33   좋아요 0 | URL
니체가 보다 '문학적'이어서 그런가 봅니다.^^ 반조님의 번역은 내년쯤 나오는 건가요?..

반조 2007-11-18 19:37   좋아요 0 | URL
아니요. 저는 몇년 뒤 본격적인 번역준비작업에 착수한 뒤, 한 10년 뒤부터 출간해볼까 계획중입니다. 지금은 틈나는대로 니체 책을 읽고 있답니다^^ 아직도 니체에 대해 모르는 면이 너무 많기도 하고요. 그리고 번역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적은 번역료, 성급한 번역, 니체에 대한 이해 부족"인 듯하여 그런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워진 다음에 번역하려고요. 그러니까 니체에 너무 충성하는 꼴인데, 저로서는 딱히 다른 멋진 일도 없는 듯해서^^... 이거 말만 앞서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7-11-18 20:54   좋아요 0 | URL
10년을 더 기다려야 되는군요! 좀 아쉽네요.^^;
 

이번 대선판의 '뇌관'이라는 BBK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김경준씨가 오늘 입국했다. 뉴스특보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오늘의 최대 화제인 듯하다. 뉴스에 따르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16일 BBK 주자조작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경준씨의 귀국과 관련 "귀국을 안 하려던 사람이 대선을 목전에 두고 갑자기 오는 것은 좋지 않다"며 "이것이야 말로 여의도식 정치"라고 말했다." 한다. '청와대식 정치'가 아닌 '여의도식 정치'가 표적이 된 것이 좀 특이해 보인다. 뉴스 기사를 더 읽어내려다가다 마저 읽은 대목은 이렇다(사진 왼쪽은 김경준씨의 누나라는 변호사 에리카 김). 

"이 후보의 경제정책이 '상위 20%를 위한 정글자본주의'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정글자본주의는 있지도 않은 말이고, 정치적 용어"라며 "정 그렇다면 내가 타잔이 될 용의가 있다. 그 사람들(비판하는 사람들)은 타잔 될 능력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경쟁력 있는 강한 사람에 대해서는 정부가 지나친 간섭도 지원도 할 필요도 없다"며 "정부의 역할은 약자를 위한 것이다. 장애인 노약자, 이런 측면은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뉴시스)

'정글자본주의와 타잔'이란 수사학에 이끌려 떠올리게 된 시가 있다. 대학 1학년 때 쓴 <타잔>이란 시다(그해 겨울에도 대선이 있었군.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당의 선거참관인이란 걸 했었다). 종강파티에서 시낭송 퍼포먼스까지 했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그때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로 읽게 된다.  

타잔

그는 타잔
도시의 질탕한 밀림을
맨발로 뛰어다니는 타잔
악어 비슷한 거라면
모조리 죽이려 드는
매끈한 악어의 배를 가르며
넘치는 쾌감을 느끼는 사나이
악어백이며 악어가죽이며
도저히 참지 못하지
아아아악……어!
미친 듯이 달려가는 타잔
요즘은 미꾸라지까지 잡으러 다니며
먹어도 악어탕 추어탕만 먹는 사나이
그러다 가끔은 이상한 식인종에
쫓기기도 하지만 자랑스런
밀림의 사나이 그는
타아잔
당신은 치타!

07. 11. 16.

 

 

 

 

P.S. 이명박 후보의 책들도 생각보다 훨씬 많이 출간돼 있다. 판매량순으로, 신화는 없다, 온몸으로 부딪쳐라,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이명박의 흔들리지 않는 약속,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이명박 혁명까지이다. 거꾸로 읽어도 좋겠다. '이명박 혁명'부터 '신화는 없다'까지. 신화는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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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1-16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타잔 하면 윤도현밴드 1집 수록곡이 생각나네염.

로쟈 2007-11-17 11:00   좋아요 0 | URL
타잔 세대가 아니신가요?..

yoonta 2007-11-16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악……어!" <-------이부분에서 뒤집어졌습니다..ㅎㅎㅎㅎㅎㅎㅎ

로쟈 2007-11-17 10:59   좋아요 0 | URL
ㅎㅎ

소경 2007-11-18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부분에 대칭되는 퍼포먼스 생각에 자지러졌어요. ㅋㅋ

로쟈 2007-11-19 12:29   좋아요 0 | URL
'현장'에서도 그런 반응이 있긴 했습니다...

유엔미블루 2007-11-20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북리뷰계의 동방신기라지요?

로쟈 2007-11-20 19:42   좋아요 0 | URL
제가 동방신기를 잘 잘 몰라서.^^; '신화'와 'H.O.T'도 있나요?..
 

새로 번역돼 나온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 2007)을 읽고 있는 탓에 눈길을 주게 되는 책은 스티브 풀러의 <지식인>(사이언스북스, 2007)이다. <쿤/포퍼 논쟁>(생각의나무, 2007)로 연초에 소개되었던 저자인지라, 게다가 출판사도 교양과학서를 전문으로 내는 곳인지라 과학자-지식인에 관한 책인 것으로 짐작했지만 리뷰들을 읽어보니 그렇지는 않다. 말 그대로 '지식인'을 다루고 있고, 부제도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살아남기'이다. 국역본의 표지 또한 그럴 듯하데 분량도 만만한 만큼(그에 비하면 책값은 만만치 않다) 한번 읽어볼 작정이다. 관련 리뷰를 먼저 읽어둔다.

경향신문(07. 11. 16) 침묵은 禁, 저항하고 비판하라

무릇 지식인은 소크라테스보다 소피스트들을 본받는 게 낫다고 설파한다면 수긍하겠는가? 석가모니, 공자, 예수와 더불어 4대 성인의 반열에 올라 있는 소크라테스보다 ‘궤변론자들’을 따르라니 말이나 될 법한가. 하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석학 스티브 풀러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오늘날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는 ‘지식인의 원형’이라고 우긴다. 소피스트들은 ‘경박한 박식가’ ‘거만한 허풍선이’라는 낙인과는 달리 대중이 험난한 현실을 헤쳐 나가는 데 요긴한 지식과 방법론을 양심과 능력에 따라 전수했다는 게 그 이유다.

풀러는 소크라테스를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소피스트들을 소크라테스와 비슷하게 대접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가 이처럼 이채로운 논리를 펴는 것은 지식인의 기본 자질이 모든 독단론을 거부하는 소피스트들의 자세에 있다는 점을 전파하기 위해서다.

graphic: bookcover

풀러가 쓴 ‘지식인(원제 The Intellectual)’은 소피스트의 복권에서도 보듯이 색다른 지식인론임에 틀림없다. 지식인의 특성과 소양, 책임에 관해 창발적인 마음의 양식으로 상을 차렸다. 그 흔한 기존 지식인론에 대한 사상사적 검토나 비판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최근의 지식인론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이 없음은 물론이다. 저자가 조금 특이한 사상가이긴 하지만 선행연구 참조를 금과옥조로 삼는 학자에 속한다는 걸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영국 워윅대학 교수인 풀러는 ‘사회인식론’의 개척자다.

지식인론을 쓰면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모델로 삼은 것부터 놀랍다. 그것도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을 위한 것이며,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에 관한 책이라고 들머리에서 아낌없는 헌사를 바친다. 마키아벨리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공공연하게 말한 사람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대단히 성공한 지식인’이라고 칭송한다. 그렇지만 마키아벨리에 관한 언급은 그걸로 끝이다. 책을 마무리하는 순간까지 마키아벨리는 본 무대로 나오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지식인이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인지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 게 의아하다.

명색이 지식인론이라면 지식인의 책무에 대한 규범적 처방전쯤은 내려줄 법하나 그런 것조차 없다. 다만 진정한 지식인이 되는 법을 다섯 가지로 간추린다. 첫째, 판단 능력을 잃지 않고 다양한 관점으로 보는 법을 배워라. 둘째, 무슨 생각이든,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라. 셋째, 어떤 관점에 대해서든 그것이 완전히 그릇된 것이라거나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마라. 넷째,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강화하기보다 그것을 균형있게 보충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라. 다섯째, 공공 사안과 관련된 논쟁에서는 진리를 위해 끈기 있게 싸워야 하지만 일단 자신의 주장이 오류로 판명나면 정중하게 인정하라.



지은이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더 이상 존재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예단하는 ‘보편적 지식인’의 부활을 꿈꾼다. 반전(反戰)에서부터 사생활 윤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논급하던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지식인은 현대사회의 공론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풀러는 그같은 패배주의를 통박한다. 일부 지식인들은 대가들의 사상을 ‘정신의 원스톱 쇼핑몰’로 이용하면서 지적 생존을 연명하고 있고, 일부는 변화된 시대에 적응해 ‘지식 관리자’로 진화하고 있다고 혐오의 화살을 날린다. 그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외치는 계몽주의의 빛바랜 깃발 같은 것도 은근히 보고 싶어한다.

저자는 ‘지적 자율성’이라는 덕목을 무척이나 아낀다. 지식인이 생각하는 지식은 기본적으로 야생으로, 제멋대로 자라도록 되어 있어서다. 지식인은 ‘오직 진리’가 아닌 ‘총체적인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언제나 논적들과 백병전을 벌일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독려한다. ‘지식인의 무기고에 비판보다 나은 것은 없다’며 ‘침묵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지적 책임을 방기하는 일’이라고 일갈하기도 한다. 더불어 지식인은 저항의식을 통해 진열대에 놓인 아무 상품이나 사들이기를 거부하는 소비자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다그친다.



지은이는 지식인과 학자를 애써 구별하면서 흥미롭게 비유한다. “대학은 포도원인 셈이고, 학자들은 와인 생산자, 지식인들은 와인 감식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와인 생산자의 존재 이유가 팔리는 와인을 생산하는 데 있다면 감식가의 존재 이유는 어떤 음식에는 어떤 와인을 마시는 게 좋을지를 알려주는 데 있습니다.” 책의 멋진 마무리 말도 지식인과 학자의 차이점을 파고든다. “학자들은 과거를 다른 미래로 바꾸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식인들은 영원히 희망을 놓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결코 도전적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는 지식인의 상반된 역할도 제시한다. 하나는 특정한 관념의 배양을 금지하는 검열관 역할이며, 다른 하나는 자극적인 관념 형식을 거부할 수 있게 하는 악마의 대변인 역할이다. 지식인이 풀어야 할 가장 힘든 과제는 계급과 성, 인종의 구분을 초월해 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대 간의 장벽을 뛰어넘는 일이라고 갈파하기도 한다.

이 책은 번역자도 실토했듯이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문장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구성 역시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준다. 200쪽이 약간 넘을 정도로 얇은 편인데 내용물을 많이 담으려다 보니 압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은 2005년 영국의 자유주의적 좌파 성향의 잡지 ‘뉴 스테이츠먼’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할 만큼 값진 평가를 받는다.(김학순 선임기자)

07. 11. 16.

Science Vs Religion?: Intelligent Design and the Problem of Evolution

P.S. 풀러 교수의 전작인 <쿤/포퍼 논쟁>에 관해서는 '토머스 쿤은 미국의 하이데거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1043190)란 페이퍼를 참조. 올해만 3권의 책을 낸 저자의 최신작은 <과학 vs. 종교?: 지적 설계와 진화의 문제>(2007)이다. 국내에서도 '팔릴 만한' 주제인지라 어쩌면 조만간 소개될지도 모르겠다. <지식인>에 대한 반응이 좋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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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7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17 22:49   좋아요 0 | URL
뜻밖에도 적절한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