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4.29 재선 지역 가운데 울산 북구에서 진보 진영 후보들간의 단일화가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단일화가 필수적이라는 데 모두가 동감하지만 정작 단일화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는 형국인 듯싶다(서로의 명분을 앞세우다가 필패의 국면으로 가는 것일까?). 어제오늘 일간지의 두 관련 시론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4. 21) '좌파 분열’이란 신화  

볼셰비키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분열돼 나온 다수파를 뜻한다. 사회민주당은 1903년 영국 런던 2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소수파)로 분열됐다. 분열의 직접적 원인은 당원의 자격문제였다. 레닌은 당원은 당 기관에 속하고 언제나 당의 지휘 명령에 복종하며 노동계급의 전위(前衛)인 자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멘셰비키는 당원 자격을 직업혁명가들로 국한시켜야 한다는 볼셰비키에 반대하고 서유럽의 사회민주당들처럼 대중정당이 돼야 한다고 맞섰다. 이 사소해 보이는 이견에는 혁명에 대한 근본적 입장 차이가 담겨 있었다. 볼셰비키는 폭력적 정권 탈취를,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혁명을 당면과제로 삼았다. 1917년 10월 마침내 정권을 잡은 것은 볼셰비키였다.

“좌파는 분열로 망하고 우파는 부패로 망한다”는, 꽤 널리 퍼진 속설이 있다. 이 말이 어디에서 유래한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러시아 혁명사만 봐도 그렇다. 혁명을 성공시킨 볼셰비키는 이념지형상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좌파였다. 멘셰비키는 상대적으로 우파였다. 현대에도 좌파가 반드시 분열하란 법은 없고, 우파가 반드시 부패로 망하란 법도 없다. 유럽을 들여다보면 우파도 분열로 망한 경우가 많고 좌파가 부패 때문에 몰락하기도 한다. 또 부패했으나 망하지 않고 건재한 우파도 있다. 끝없는 부패 추문 속에서도 50년 이상 장기 집권해 온 일본 자민당이 그 사례다. 분열이건 부패건 좌파·진보, 우파·보수 어느 한 편의 전유물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생각컨대 좌파=분열이란 등식엔 검증되지 않은 신화적 요소가 개입돼 있다.

4·29 재선이 치러지는 울산 북구에서 좌파 진영 후보 2명의 단일화가 관심거리다. 민주노동당 김창현 후보와 진보신당 조승수 후보는 “여론조사 결과 우리 중 한 명만 나가면 한나라당 후보를 이긴다”며 단일화를 다짐해왔다. 문제는 21일로 단일화 2차 시한이 다가왔는데도 단일화 협상이 지지부진하다는 점이다. 굳이 양김 단일화에 실패한 1987년 대선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진보정당은 거대 여당의 독주 속에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울산 북구에 좌파 회생의 시금석이란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다. 진보는 소탐대실(小貪大失)로 좌파=분열이란 신화를 입증하려는가.(김철웅 논설위원)    

한겨레(09. 04. 22) 두 진보정당은 시험대에 올랐다

필자는 지난 2월4일치 〈한겨레〉 ‘시론’을 통하여 현재 진행되는 국회의원 보궐선거 및 다가오는 지방자치 선거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간의 선거 연대를 촉구하였다. 이후 양당 사이에 울산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위한 후보 단일화 논의가 계속되어 선거 연대가 가시화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후보 등록 마감 전 단일화는 무산되었고, 현재 민주노동당의 김창현, 진보신당의 조승수 두 후보는 각각 후보 등록을 하고 별도의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일차적 이유는 울산 북구 선거관리위원회가 후보 단일화를 위한 민주노총의 투표를 불법으로 유권해석했기 때문이다. 2002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노동조합이 선거운동 기간 전에 예비후보에 대해 조합원들을 상대로 선전 행위를 하지 않고 투표를 하는 것이 적법하다고 판단한 바 있지만, 이번 울산 북구 선관위는 이러한 중앙선관위의 해석도 무시한 것이었다. 이후 민주노총 울산본부도 내부 이견이 발생하여 후보 단일화를 위한 총투표를 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선거운동 기간 중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쉬워 보이지 않는다. 두 정당 및 후보 사이에 분당으로 인한 구감(舊感), 진보 정치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경쟁, 여론조사의 방식과 절차에 대한 이견 등이 있기 때문이다. 진보정당 소속 인사들은 과거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 사이의 단일화 실패와 그로 인한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맹비난하였지만, 이제 두 진보정당이 시험대에 올라와 있다.

두 정당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 “감 놔라, 배 놔라” 할 자격은 없다. 그렇지만 두 정당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단일화 실패 이후 어떠한 일이 닥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식적인 차원에서 예상이 되기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당장 양 정당과 후보는 단일화 실패를 상대 당과 후보 탓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낼 것이다. 선거 결과가 좋지 않으면 상대에 대한 비난은 더 가중될 것이다. 입으로는 ‘진보 대연합’을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역시 쟤네들은 안돼”라고 되뇌며 서로를 적대시할 것이다. 보수정당보다 경쟁 진보정당을 더 미워하고 경원시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다가올 지방자치 선거에서도 겉으로는 후보 단일화를 거론하겠지만 속으로는 각개약진의 길을 추구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보정당에 대한 대중의 냉소와 실망은 커질 것이다. 이 경우 진보정당의 미래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노동자 정치 1번지’라는 상징성을 갖는 울산 북구의 국회의원 한 석에 대한 양당의 열망은 치열하다. 게다가 단일화가 되면 당선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일방의 자발적 양보나 살신성인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러한 경우 후보 단일화는 양 후보와 정당에 대하여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외부적 세력이 있거나, 또는 양 후보와 정당이 정치력을 발휘하여 서로의 이해(利害)를 합리적으로 분배·조절할 수 있는 경우에 가능하다. 현재 시점에서 첫 번째 경우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도덕적 힘을 가진 세력은 없으므로, 두 번째 경우만이 유일한 선택지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지도부와 두 후보는 즉각 만나야 한다. 그 자리에서 그동안 그리도 외쳐왔던 진보의 대의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누구를 내세워 진보의 원내 교두보를 추가할 것인지, 그리고 양보한 사람에게는 어떠한 혜택을 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국민 모두가 두 정당 지도부와 두 후보의 그릇과 정치력을 지켜보고 있다.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두 진보정당의 정치적 선택은 적어도 향후 10년간 진보 정치의 명운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09. 0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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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장기하와 얼굴들'에 대해서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지난달 언젠가 이름을 듣고서 음악을 찾아 들었는데, 멜로디는 처음 듣는 게 아니었지만 적어도 '가사'는 처음 들었고 흥미로웠다. 내가 제일 처음 떠올린 건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들이었고(그의 영화 속에 나오는 노래들), 그 다음은 김지하였다(얼마전 그의 <오적>이 <자음과 모음>(2009년 봄호)에 재수록되었다). 그래서 '카우리스마키와 장기하' 혹은 '김지하와 장기하'란 페이퍼를 올려둘 수도 있었지만, 그럴 만한 시간이 없던 차에(대신에 어제 한 원고를 쓰면서 그의 가사를 일부 인용했다) 지난주 시사IN에서 장기하를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다. 생각난 김에 관련기사들을 모아놓기로 한다.   

국제신문(09. 04. 04) [박무성의 한 뼘 더 보기] 루저(Loser)들을 위한 변명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이제는 아무렇지 않어/바퀴벌레 한마리쯤 쓱 지나가도/무거운 내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의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축축한 이불을 갠다…" 푸석푸석 새집 지은 머리에 잠이 덜 깬 듯 나른한 목소리, 비루한 인생의 찌질하기 짝이 없는 푸념 같은 노랫말.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 가사 일부다. 500장 팔리면 대만족이라던 음반이 한 달 만에 2만 장 넘게 팔렸다. 20대의 열광은 물론 30, 40대 팬클럽 가입도 빠르게 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다. 지난달 12일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노래상'까지 받았다. 가히 '장기하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싸구려 커피'를 놓고 루저(loser·패자)문화 담론이 한창이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공포와 불안의 징후를 읽는 사람도 있고, 복고와 퇴행도 모자라 '막장'으로 치닫는 요즘 문화 풍토에서 장기하류의 등장은 당연한 현상이라는 지적도 있다. 진단과 정의가 어떠하든 루저 정서가 문화 전반에 스며들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문학 분야에선 '백수소설'이라는 장르까지 탄생했다. 제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인 한재호의 '부코스키가 간다'(창비)가 단행본으로 나왔다. 청년백수 100만 명 시대의 우울한 풍경 속에 지극히 현실적인 세태소설로 간주된다. 소설 속 주인공은 대학 졸업 3년차의 백수. 여느 구직자처럼 인터넷뉴스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취업 사이트를 뒤지고, 간혹 원서를 내고 면접도 보는 일상을 반복하던 주인공이 어느 날 비만 오면 가게 문을 닫고 어디론가 외출하는 '부코스키'라는 남자의 기이한 행적을 미행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주인공은 결코 치열하지 않다. 작가 역시 딱히 클라이맥스라고 할 만한 부분을 구성하지도 않았고 소설의 흐름이 빠르지도 않다. 해설을 쓴 평론가 조연정은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의 성장통소설'이라고 칭한다. '만성적 상실감과 박탈감 속에서 세계와 화해하지 못하고 주변만을 맴돌 수밖에 없는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이전과 같은 모범적인 성장의 서사(narrative)는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진단이다

사실 루저문화의 뿌리는 깊다. 1980년대 최고의 인기만화였던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은 프로야구판에서 낙오한 선수들의 초현실적 부활을 그렸다. 이 만화가 TV 드라마 '2009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리메이크된다는 것도 요즘 문화적 시류와 무관하지 않다. 박중훈 안성기가 열연했던 이준익 감독의 영화 '라디오 스타'나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루저문화의 낭만적인 변주다. 루저문화를 이해하는 분석적 토대는 2007년 발행된 우석훈·박권일의 '88만 원 세대'가 제공했다.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이라는 부제가 말하듯 세대 간 갈등과 착취 문제를 사회·경제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현대의 고전으로 꼽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사회구도로'승자와 패자'의 이분법적 개념을 제시한 사람은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다. 그는 기존의 '보수와 진보'의 개념으로는 세계화 시대를 읽어낼 수 없다고 했다. 본디 이분법은 극단적 단순화와 양자대결구도라는 불가피한 한계를 안고 있지만 '승자와 패자'만큼 세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개념도 없다. 이렇게 볼 때 루저문화는 '20 대 80의 법칙'에서 80%를 차지하는 패자들의 향유물이 되는 셈이다.

루저문화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존재한다. 비주류나 아웃사이더, 낙오자가 존재하는 한. 한국 사회에 루저문화가 있다 없다, 서구의 것과 같다 다르다, 장기하가 서울대 출신이어서 '루저'가 될 수 있다 없다 식의 논란은 중요하지도 않거니와 핵심에서 벗어나 있다. 문화는 삶의 표현양식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건 정체성과 건강성이다. 루저문화는 기성문화가 갖는 엘리트주의와 권위에 도전함으로써 문화적 다양성을 담보한다. 그리고 그 다양성이 변화를 모색하고 추동한다. 머리 속에서 당면한 문제를 거세하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적 토대가 어딘지 냉정하게 인식해야 루저문화에서 연상되는 사회적 일탈이나 허무의 그림자를 지울 수 있다.(문화부장)   

사IN(09. 03. 27) “싸구려 커피 마셔도 별일 없이 산다”

‘500장만 팔리면 많이 팔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음반이 발매한 지 한 달 만에 2만 장 넘게 팔려버렸다.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을 앞두고 벌어진 온라인 투표에서는 인기 절정의 아이돌 태양(그룹 ‘빅뱅’의 멤버)을 제쳤다. 서태지·심수봉과 같은 무대에도 섰다.

‘인디계의 서태지’라 불리는 장기하(27).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 리더인 그가 거둔 “기이한 성공” “기이한 팬덤”(음악 평론가 차우진)에 사회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애초에 출발은 여느 인디밴드와 같았다. ‘알바’ 뛰어 먹고사는 틈틈이 홍대앞 클럽에 서고, 데모 테이프 만들고, 녹음하고. 그러다 소문 좀 나고. 지난해 9월 EBS <스페이스 공감>에 출연한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급기야 ‘장교주’라는 별칭까지 얻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20대 누리꾼들의 엽기 또는 키치 취향이 발굴한 ‘4차원 스타’에 지나지 않았다. 진지한 노래 가사와 따로 노는 ‘촉수춤’ ‘문방구 선글라스’를 낀 채 막춤에 가까운 동작을 선보이면서도 결코 웃는 법이 없는 코러스 걸(미미 시스터즈) 등 무대에서 보인 우습고도 독특한 퍼포먼스가 그의 인기 급상승 비결이었다.

‘장기하 전도사’ 자처하는 중년 남성

그런데 해가 바뀌면서 장기하에 대한 관심은 모든 세대로 확장되는 추세다. ‘장기하 현상’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특히 흥미로운 것이 30~40대의 합류다. 장기하 음반을 낸 붕가붕가레코드 고건혁 대표(29)는 “YES24 등에서 판매된 음반 통계를 보면 20대가 가장 많이 구입했으나 팬클럽 가입률로 따지면 30대가 꾸준히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음악평론가 김작가는 최근 방송국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한눈에 봐도 ‘사회부 기자스러워’ 보이는 보도국 ‘아저씨’들이 방송사 복도에 나타난 장기하를 둘러싸고 “저, 장기하씨 팬이에요”를 연발하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 지난 3월11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열린 장기하와 얼굴들 팬미팅에 참석한 45세 남성은 그날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내 인생에서 (참가한 팬 사인회는) 장사익씨 팬 사인회에 이어 두 번째다. 장사익씨 CD는 100여 장을 사서 지인에게 선물했는데 장기하씨 음반은 200장을 넘기겠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늙은 사람까지 ‘장기하 전도사’로 만드는 내공”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일단 30~40대도 ‘알아먹을 만한’ 복고적 음악풍의 영향이 크다. 1970~1980년대를 풍미한 신중현·산울림·송골매 등의 영향을 받았음을 장기하는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다. 대학원생 강혜원씨(26) 말마따나 386세대가 ‘트렌디한 척’하느라 장기하를 소비할 수도 있다. 요즘 386 ‘먹물’들의 술자리에서 장기하는 <워낭소리>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안줏거리가 됐다. 

그러나 이들이 장기하에 끌린 데는 무엇보다 노랫말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 중론이다. 자유기고가 유선주씨는 “‘싸구려 커피’의 가사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이 기억에 선명하다”라고 말했다. 누추한 자취방에 누워 ‘이제는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몰라’라고 노래하는 비루한 청춘의 독백이 가슴에 와 박혔다는 것이다. 실제로 장기하는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20대 루저(loser·패배자)들의 정서를 정제된 우리말로 표현해낼 줄 아는 뮤지션’이라는 평을 듣는다(지난해 11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장기하는 “노래 가사를 만든 배경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다”라면서도 일각의 ‘과잉 해석’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이는 드문 능력이다. ‘청춘의 종언’이라는 주제로 열린 계간 <문학동네> 2008년 겨울호 좌담에서 김홍중씨(대구대 사회학과 전임강사)는 20대를 ‘언어를 상실한 세대’로 규정했다. 블로그나 사적 담화를 통해 ‘토킹’ 방식으로 말할 줄은 알아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스피킹’은 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20대라는 얘기다. 이 자리에 참석한 <88만원 세대> 저자 우석훈씨는, 유럽 20대와 달리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한국·일본 20대의 특성이라고 말했다.

20대가 이너서클에서만 소통되는 ‘옹알이’와 ‘푸념’으로 일관하는 동안 이들에 대한 몰이해는 더 깊어갔다. 자유기고가 김현진씨 말마따나 모두에게 욕을 얻어먹는 세대가 이들 20대다. 이 와중에 20대는 문화 영역에서도 잊혀갔다. 김홍중 교수는 “과거에는 20대의 감수성이 문화를 이끌어간다는 전위의 느낌이 강했던 반면 요즘은 그런 게 약해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소비층으로 매력도 사라졌다. 소수 마니아만이 열광하던 <메리대구 공방전>(2007) <얼렁뚱땅 흥신소>(2007) 이후, 더 직접적으로는 청춘 배우 송혜교·현빈을 내세운 <그들이 사는 세상>(2008)의 참담한 실패 이후 20대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는 더 이상 전파를 타지 않는다. 20대가 ‘닥본사(닥치고 본방 사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드라마를 만들 유인이 떨어져 그렇다는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화평론가 이영미씨 지적대로, 작심하고 기획하면 인터넷에 빠져 있는 10대라도 얼마든지 다시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꽃보다 남자>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장기하라는 존재는 그래서 더 돋보인다. 연극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를 쓰고 연출한 김재엽씨(36 ·세종대 교수)는 “문화라는 건 결국 솔직함이다.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다른 이들도 공감하는 순간, 그게 세대 의식이 된다”라고 말했다. 물론 문단이나 영화·인디 음악계에 자기 목소리를 내온 20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오른쪽 상자 기사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06 참조). 그렇지만 장기하는 이를 대중적으로, 다른 세대와 소통케 하는 데 그 누구보다 성공했다.

소통 방식뿐 아니라 콘텐츠 또한 주목할 만하다. 김현진씨는 <문학동네> 좌담에서 지금 20대를 관통하는 코드는 딱 하나 ‘겁에 질려 있다’는 점이라고 지목했다. 대한민국의 1%를 뺀 나머지 99% 20대’는 가방 끈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좌파·우파에 상관없이 ‘이러다 영원히 낙오하는 것은 아닐까’ 겁에 질려 있다. 그런가 하면 상위 1%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는 그들대로 ‘나보다 잘난 놈이 있겠지’ 하는 두려움에 떤다.

조한혜정 교수(연세대·사회학)는 “겁에 질려 있으면 문화적 상상력을 꽃 피울 수 없다”라고 말했다. 겁에 질린 문화는 양극단으로 치닫는다. 어머니 자궁으로 퇴행하거나,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거나. <엄마를 부탁해>(신경숙)로 상징되는 최근의 ‘어머니 열풍’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막장 드라마’는 후자 경향을 대표한다. <꽃보다 남자> <아내의 유혹>은 리얼리티를 완벽하게 제거한 채 욕망의 판타지를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장기하는 달랐다. 현실을 얘기하되 겁먹지 않았다. “요즘 젊은이들은 냉난방 잘되는 사무실에서만 일하려 한다”라고 대통령이 질책하든 말든 그는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방바닥에 누워 ‘고여 있는 물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는 무기력한 상태임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싸구려 커피’). 그래도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단다.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겠지만,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 거’겠지만(‘별일 없이 산다’). 관조와 풍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 도발적으로 읽히는 정치적 알레고리도 구사한다. 만화 평론가 김낙호씨가 ‘우리 시대의 송가’로 꼽은 ‘아무것도 없잖어’ 같은 곡이 그렇다. ‘선지자가 나타나서 지팡이를 들어//풀이 가득 덮인 기름진 땅이 나온다길래/죽을똥 살똥 왔는데/여긴 아무것도 없잖어//푸석한 모래밖에는 없잖어 (중략) 이건 뭐 완전히 속았잖어/되돌아갈 수도 없잖어.’

한쪽에서는 장기하의 담담함이 ‘관념적 루저’라는 그의 실체에서 비롯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루저의 정서를 노래하지만 장기하가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로 대변되는 진짜 루저는 아니라는 것이다. <88만원 세대> 공저자인 박권일씨는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생이라는 게 장기하를 어정쩡한 존재로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차라리 2류 대학에 다니는 스테레오 타입 대학생이 ‘싸구려 커피’를 불렀다면 더 강력한 대표성을 획득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블로거 ‘캐즘’은 “루저의 감수성을 소비할 수는 있지만 실제 루저가 되기는 싫다”는 욕망 내지 탈락에 대한 공포를 장기하 현상에서 읽어낸다.

주류 판갈이는 쉽지 않을 듯
장기하가 결코 주류가 될 수는 없으리라는 전망이, 장기하 현상이 갖는 파괴력에 대한 가치판단을 망설이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주류 문화가 장기하를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공중파에 진출한 인디밴드가 생방송 중 화면에 침을 뱉는 따위 ‘사고’를 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야성을 잃고 주류 질서에 동화하면 동화하는 대로 생명력이 끝나는 것이 장기하가 처한 딜레마이다. “주류에 올라서지 못하는 한 ‘판’을 바꿀 힘이 생기지는 않는다. 서태지는 의식적으로 주류를 선택해 판갈이를 한 경우지만, 장기하는 다르다. 정치사회적 격변으로 한국 사회에 큰 동요가 생긴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지지부진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장기하의 힘이 오래가기는 어렵지 않겠나.” 이영미씨는 말한다.

그럼에도 장기하에 쏠린 관심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의 흐름을 읽게 한다. 박권일씨 지적대로 ‘문화 권력을 지닌 386’이 장기하 현상을 증폭시켰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진짜 생활에 찌들어 사는 애들은 소녀시대 ‘Gee’를 듣지 장기하를 듣지는 않는다”라고 대학원생 강혜원씨는 말했다. 그러나 장기하가 노래하는 루저의 감성을 특정 세대·계층만이 누린다고 보기도 어렵다. 30대인 유선주씨는 “장기하 노래를 듣다 보면 ‘딱 내 얘기’라는 생각이 든다. 괴리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한때 루저 정서는 20대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청년 실업이 만성화하면서 20대는 반항·도발·상상력·순수·열정 따위 과거 청춘의 특권을 반납하는 대신 무기력함·희망 없음·만성 불안 따위 루저의 정서를 내면화했다. 문제는 이것이 더 이상 20대만의 정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달의 바다>를 쓴 소설가 정한아씨(27)는 ‘희망이 사라진 현재 루저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라며, ‘20대=루저 내지 백수’라는 등식을 들이대는 것이야말로 폭력이라고 말했다.

전세대·전계층으로 확산된 박탈감

청년실업을 넘어 바야흐로 전방위적인 대량실업·만성 실업의 시대가 열린 판이다. 문학평론가 정준영씨는 격월간지 <플랫폼> 1~2월호에 실린 글에서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고 진단했다. 그나마 10년 전 외환 위기 때는 ‘이 고비만 넘기면 나아질 날이 오겠지’라는 낙관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미국발 금융 위기가 촉발한 충격과 공포는 이 알량한 자위의 행위조차 한순간 헛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정씨의 말마따나, 반토막이 나버린 펀드 잔고는 우리가 믿었던 밧줄이 그저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작가는 장기하를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히어로’라고 부른다. 현실을 직시하되 겁먹지 않고 담담한 그의 노래가, 아무런 희망도 안전망도 없이 ‘완벽히 무장해제된 채’ 위기에 내던져진 우리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문득, 위로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장기하가 20대를 대변하는 ‘세대적 아이콘’인 동시에 위기의 2009년을 되비추는 ‘시대적 아이콘’인 이유가 여기 있다.   

시사IN(09. 03. 30) “엄혹한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 패배자가 아닐까”  

‘장기하 현상’은 문화비평가와 생산자 모두에게 흥미롭다. 음악 평론가 김작가, 자유 기고가 유선주, 20대 소설가 김사과가 좌담을 했다(오른쪽). 20~30대를 아우르는 문화꾼이 모여 장기하가 촉발한 우리 세대의 화두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사회:20대 문제를 사회·경제적으로 다룬 ‘88만원 세대’ 담론이 등장한 지 2년 가까이 되었다. 지금은 ‘장기하와 얼굴들’이 20대 문화를 설명하는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먼저 각 영역에서 20대와 관련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야기해보자.

유선주(선주):지난해부터 20대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사라졌다. 광고가 중요한 TV 현실로 보면 지금 20대, 즉 88만원 세대의 구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20대를 다룬 작품 중에도 핵심을 짚은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김작가(작가):음악에서도 10대 후반~20대가 로열 소비층을 형성하던 흐름이 사라진 건 세계적 추세다. 1980년대 LA 메탈이나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처럼 동세대를 관통하는 음악도 없다. 장르의 진정성을 담은 음악은 영국·미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인디 쪽에 머물고 있다. 예전에는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에 누가 나왔다 하면 다음 날 그 일이 화제로 떠올랐다. 지금은 웹진도 많고 개인적으로 음악을 다운받을 수 있다. 자기가 음악을 선별할 수 있다. 음악과 소비자 사이의 중간 단계가 사라져 그런 대세가 기운 게 아닐까 싶다.

김사과(사과):소설을 쓰는 20대치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 음악이나 영화는 자기가 말하고 싶어서 만드는 게 많은 반면, 글은 백일장 등에서 자기를 평가하는 ‘선생님’에게 맞추는 경향이 짙다. 소설 써오라고 과제를 내면 100개 중 99개가 할머니를 소재로 삶거나 치매를 다루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삶은 평범한 20대처럼 산다. 삶과 문학이 떨어져 있다.

사회:사과씨의 작품을 읽는 주 연령층은 누구인가?

사과
:친구들한테 읽히는 것이 좋은데, 막상 가장 큰 독자층은 문학잡지 편집위원이다.(웃음) 아이러니다. 그분들이 좋다고 하면 속으로 좋긴 하지만, 사실 ‘뭐가 좋을까’ 하는 느낌이다.

선주:‘내 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는 궁금증 때문 아닐까?(웃음)

유머, 노랫말 그리고 음악의 삼위일체

사회:장기하 이야기를 해보자. 장기하 신드롬을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까닭에서일까?

선주:장기하는 신기하다. 음악적으로 1970, 1980년대 음악과 맞닿은 느낌이다. 송골매+김창완 창법이다. 386이 친근함을 느낀다면 자기가 옛날에 들었던 것과 비슷하고, 또 재미있어서다. 1집 앨범 <별일 없이 산다>를 들어보면 출구가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이런 정서가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게 아닐까.

사과
:장기하 현상에 낭만적인 루저 정서가 있는 건 맞다. 그런데 장기하는 백수 생활을 해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비난받는 면도 있다. 경험주의에 매몰된 비난이라는 생각이다. 요즘 신인 가수들 음반을 들어보니 굉장히 좋더라. 몽구스 같은 가수의 노래를 들어보면 루저 정서를 넘어서 아예 현실을 망각하고 우주로 갔다는 생각이 든다. 해탈한 느낌이랄까. 20대 정서가 그런 인디 정서인 것 같다. 장기하가 인기를 끌 수밖에 없다.

작가:실제 인디 뮤지션을 만나보면 가난한 사람의 어두움이나 우울함 같은 게 없다. 삶의 태도가 일반 회사원보다 더 긍정적이고 유쾌하다. 현실적 문제를 머릿속에서 거세해버렸기 때문이다. 기존 대중음악이 사랑 타령만 하면서 현실에서 도피했다면, 인디 음악은 자기 내면으로 도피했다고 할까. 그런데 장기하에게는 ‘서사’의 힘이 있다. 2000년 이후 이야기가 있는 음악이 실종되었는데, 장기하노래에는 상징과 은유를 포함한 기승전결이 있다. 그런 현실적 서사의 구체성 덕에 그의 노래가 힘을 얻는다. 그래서 <별일 없이 산다>도 5만 장까지는 팔릴 것 같다.  

선주:그런데 20대가 장기하 음반을 얼마나 살지 궁금하다. 

작가:장기하를 4 대 4 대 2로 나누면 유머와 가사가 각각 4, 그리고 나머지 2가 음악의 힘이다. 8(유머+가사)만으로 장기하 신드롬이 형성되진 않았을 것이다. 음악이 후졌다면 그저 엽기 가수로 끝나고 말지, 이렇게까지 회자되지 못했을 것이다.

선주:‘싸구려 커피’라는 노래 제목이 너무 무시무시했다. 스타벅스처럼 비싼 커피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싸구려 커피가 있는 줄은 몰랐다. 상상력이 충격적이다. 싸구려 커피를 마실 수밖에 없는, 구매력이 떨어져 희망을 상실한 젊은이가 떠올라서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사회
:장기하는 과연 1990년대 서태지처럼 시대의 아이콘이 될 수 있을까?

작가:스타덤을 받아들이는 데 차이가 있다. 서태지는 스스로 영웅이 되고자 해서 신비주의로 갔다. 장기하는 주체로서 자기를 놓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방송에 출연하지만, 라이브클럽 공연도 계속하고, 자기 토대가 어디인지 늘 생각한다. 시대의 아이콘이 되려면 버려야 할 것이 있는데, 장기하는 자기 식대로 가고 있다. 서태지가 X세대 히어로라면 장기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히어로다.

선주
:장기하는 민감한 문제도 담담하게 칠 줄 아는 세련됨이 있다. 이야기하는 방식이 노골적이지 않다. 이를테면 ‘싸구려 커피’에 대한 답이 ‘별일 없이 산다’가 아닐까? 영리하고 세련돼서 중요한 가수가 될 것 같다. 

20대가 무기력한 까닭

사회:20대를 이해하는 데 장기하가 도움이 될까?

선주:오히려 20대보다 나와 연관되더라. 어느 세대에 갖다대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다. 꼭 가난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루저 정서에 한 번쯤 기대보고 살았던,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노래가 이제야 나왔다.

사과
:어쩌면 지금 평범한 사람들이 루저 정서를 갖고 있어서 그런지 모른다. 모든 사람이 지금 패배하고 있거나 뭔가 뺏기고 있다는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작가:그런데 정작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음악을 듣지 않는다. 그들은 빅뱅이나 소녀시대의 노래를 듣는다. 어차피 자기 인생이 시궁창인데 음악까지도 그런 걸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난 지금 20대가 과거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20대가 무한경쟁에 내몰린다고 하지만 1990년대 대학생이 취업 걱정 없이 살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때도 분명 루저 정서가 존재했고, 누군가 루저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강요됐다. 어쩌면 20대라면 누구나 겪는 성장통일 수도 있다. 왜 지금 20대를 유독 대상화하려는지 모르겠다.

사회:20대가 사회에서 동네북이 되어 있다.

선주:난 1990년대 중반에 20대를 보냈는데, 그것이 너무 좋았다. 우리는 선대에 대한 부채감이 없고, 부모가 돈을 벌어놓았기 때문에 나만 죽지 않고 밥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 있다. 음악이든 영화든, 당시에는 우리 세대가 소비의 중심에 섰는데 지금 20대는 소비자로서 매력이 없다. 다른 세대가 지금 20대를 무기력하다고 보는 건 그런 부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사과:(20대 시절이 좋았다는 말이) 놀랍다. 우리는 2000년대가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한 시대는 1968년 프랑스 파리다. 1990년대에 어린 시절을 풍족하게 산 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아마 지금 20대가 욕먹는 이유 중 하나는 20대의 목소리가 작아서일 것이다. 20대를 욕하는 다른 세대의 목소리가 워낙 크다 보니 20대는 거기에 반박할 의지가 없다. 또 지금 뭔가 사회가 나빠지고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데 그 원인을 찾지 못하다 보니 20대를 희생양으로 삼은 건 아닐까 싶다. 앞으로도 20대 말고 또 다른 희생양을 찾지 않을까. 이를테면 외국인 노동자들 말이다. 

작가:1990년대에 비해 지금 20대는 소비해야할 대상이 너무나 많다. 통신비나 학비가 얼마나 올랐나. 그걸 벌기 위해 알바를 뛰어야 하고,  정보와 문화를 소비할 시간은 없다. 그러다 보니 문화적 사고를 할 수 있는 토대가 사라진다.

사과:난 요즘 불치병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보면 집중이 안 된다. 주인공이 병원 치료 비용 따위를 어떻게 대나 하는 생각 때문에. 간혹 그냥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20대 문화꾼이 나와야


사회:아마도 루저 정서를 즐긴 첫 세대라면 외환 위기 때 20대를 보낸 이들 아닐까. 그때는 국민 공통의 환란을 겪어서인지 지금보다 부담감이 덜했던 것 같다. 개별 생존 게임으로 치닫는 지금은 루저 정서를 즐기는 게 어렵지 않을까?  

사과:IMF 환란 때보다 지금이 심각하다는데, 그때는 금모으기도 열심히 벌였고, 위기가 명확하게 이미지로 나타났다. 지금은 애매하다. 위기인지도 잘 모르겠고…. 이런 모호한 상황이 이 시대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선주
:우리 때는 알바를 해서 돈을 벌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지금은 불가능하다. 글 쓰는 노동자들의 원고료만 해도 10년 전과 비슷하지 않나. 그러니 뭔가 제대로 된 구매 행위를 할 수 없고,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살기 어려워진다.

사회:결국 20대가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아래 다른 세대도 루저 정서를 공유하게 된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망을 부탁한다.

작가:20대가 활발히 활동하는 영역은 음악밖에 없는 것 같다. 분위기가 굉장히 좋다. 아이돌 음악도 좋아졌고 괜찮은 프로덕션도 늘어나고, 인디도 이렇게 분위기가 좋았던 게 10년 만에 처음이다. 불황 속에서 모두 어렵다 보니 오히려  독기가 서려 음악적으로 굉장히 진지하다. 영국 록 그룹 오아시스가 “맨체스터 노동자 자녀 중 고교 중퇴자가 인간답게 살 방법은 록스타가 되는 길밖에 없다”라고 했는데, 곰곰이 되새겨보면 맞는 말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음악 말고는 나아갈 방향이 없기 때문에 상황이 호전되는 면이 있다.   



사과
:(20대 문학은) 팔리지 않는다. 요즘에는 1990년대 식으로 이혼이나 불륜을 다룬 작품은 답답해서 거의 읽지 않는다. 지금 한국에서 20대 작가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 반면 일본의 경우 내 나이 또래 작가들이 자기 문제를 다룬 작품을 써서 몇 백만 부씩 판다. 가장 부러운 건 한국에서라면 아무도 사주지 않을 황당무계한 작품이 팔리는 것이다. 우리도 젊은 작가가 이상하고 독특한 작품을 쓰는 걸 막지 않으면 뭔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친구끼리 모여서 20대 작가의 글을 싣는 잡지를 하나 내는 게 낫겠다 싶기도 하다.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앞으로는 우리도 일본처럼 20대 작가가 계급적 문제를 다루는 시대가 올 것 같다. 에세이든, 르포든.

선주:그런 작가가 나오면 좋겠다. 계급이든 조직이든 힘의 관계나 욕망에 대해 파헤치는 게 중요하다. 요즘 칙릿 소설에는 브랜드 이름이 한 페이지에만도 열 가지 이상씩 나오는데, 실제 독자의 삶과는 다르다. 작품에서 보는 브랜드와 실제 내가 입고 먹고 쓰는 게 다르다. 내가 쓰는 게 우아하지 못하다는 인식도 있다. 이런 간극을 좁히고, 계급 욕망을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 나왔으면 싶다. 이를테면 쇼핑을 무척 하고 싶은데 실제로 하지 못하는 젊은이의 욕망을 다룬 이야기 같은.

09. 04. 05.  

P.S. 장기하와 관련한 가장 유익한 인터뷰는 지난 2월에 방영된 '시사매거진2580'이다(http://www.youtube.com/watch?v=6zXGmFatgaM). 패자(루저)의 정서를 표현했다는 의견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장기하는 이렇게 답한다. "아무래도 승자의 느낌은 아니죠, 노래가. 그런데 그렇다고 패자도 아닌 것 같아요.뭐랄까, 그것보다는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사람의 불안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한 힘 없는 그런..." 요컨대, 그의 노래가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사람의 불안과 허무'를 표현/대변하고 있다는 것. 그는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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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까까의 생각
    from krucef's me2DAY 2009-04-06 12:41 
    "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사람의 불안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한 힘 없는 그런 " 아하.
 
 
마늘빵 2009-04-05 13:05   좋아요 0 | URL
로쟈님 연결해주신 시사매거진에도 미미시스터즈의 정체는 안밝혀지는군요. 크크. ^^

로쟈 2009-04-06 23:45   좋아요 0 | URL
그게 밑천인데요...
 

세계챔피언이 된 김연아 선수의 선전이 국민들을 기쁘게 한 휴일이었지만, 좋은 소식만 있는 건 아니다. "경기 수원역 광장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진행되고 있는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시민단체 회원이 경찰에 연행돼 시민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니까. 매일같이 '이런 나라, 이런 대통령이 어디 있나'라고 개탄해보지만, 알다시피 이미 눈하나 꿈쩍할 이들이 아니다. 이럴 땐 작년 여름의 시간이 다시금 상기되면서 '복잡한 반성'쪽으로 생각이 흘러가기 마련이다. 최근에 나온 '촛불 관련서'에 대한 대학가의 서평을 옮겨놓는다. 혹 참고가 될까 싶어서...  

중앙대 대학원신문(09. 03. 23) 그래도 촛불은 뜨거웠습니다  

2008년 여름은 뜨거웠다. 너도나도 ‘뜨거운’ 촛불을 손에 들고 ‘뜨겁게’ 외쳤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1987년을 회상시키는 뜨거운 향연은 국내외 언론들의 주목을 받으며 약 두 달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촛불은 끝났다. ‘30개월 미만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연령 제한’이라는 석연치 않은 결과를 남기고 끝나버린 2008년의 여름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바라 본 책이 출판되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와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가 그것이다. 두 책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촛불 집회가 소통을 원하는 국민들의 염원을 반영한 시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민주화의 효과가 중단되는 역사적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이 ‘운동’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p.8)

‘시민들은 광우병 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진심 어린 서찰을 원했다. 그러나 빈번히 단단하게 막히 차벽 앞에서 소통을 말하는 정부의 민심과의 불통을 확인해야 했다.’(『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p.92)
 

특히 촛불에 대한 기록을 담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는 기본적으로 촛불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기억의 낭만화를 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머리말과 달리 ‘평화롭게 아스팔트 길 위에서 유모차를 끌고 걷는 광경은 눈물겹도록 감동스러운 것이었다’, ‘데모를 하러 나온 건지, 애들 데리고 마실 나온 건지 모르게 촛불시위는 유쾌, 상쾌, 통쾌와 발랄함이 넘치는 공간이 되었다’ 등 기본적으로 촛불을 ‘우리 편’으로 가정하는 분위기가 가득하다. 오히려 그 해의 촛불이 민주주의의 상징임을 남기기 위한 기록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반면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는 머리말에서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촛불시위가 문제적이다’라는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촛불 시민들은 운동권보다 더 무서운 놈들이 되어갔다’고 표현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와 달리 촛불집회가 ‘현 정부를 길들이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을 담았다. 촛불집회가 진정한 직접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1부와 문화정치학적으로 분석한 촛불에 대해 다룬 2부, 그리고 촛불의 숨어 있는 주체에 대해 짚어 본 3부까지 촛불집회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이 이어진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에서 ‘촛불소녀와 더불어 촛불집회의 상징이 되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모차 부대에 대해서도 이 책은 전혀 다른 입장을 보인다. 1부 첫장 에서 저자는 유모차 부대의 등장을 ‘유모차에 탄 아이들의 절대적인 나약함을 ‘무기’로 삼은 것’이라고 표현하며 ‘나약한 동료 시민을 곤경에 몰아넣은 것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던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전반적으로 ‘이론은 늘 비관주의적이어야 한다’는 1부 두 번째 장의 주장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지만 지나치게 회의주의로 빠지는 부분이 눈에 띈다. 대표적인 것이 1부 첫 장이다. 저자는 폭력이 수반되지 않아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다시 한 번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경우 다른 식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책에서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발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방법은 제시하지 못한다. 단지 ‘왜 그렇게 무기력 했을까’ 라는 비관적인 논조로만 첫 장의 끝을 맺어 아쉽다.

비판 일색으로 보이지만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속에서도 촛불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해 6월 10일 집회 중 일어난 일이다. 컨테이너 장벽 앞에 연단을 쌓는 것에 대해 ‘장벽 앞에 연단을 쌓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는 의견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연단으로 표출하자’는 의견이 갈렸다. 결국 컨테이너 높이의 스티로폼을 쌓았지만 경찰 해산 전까지 시민들간의 토론과 연설은 계속되었다.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해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자치의 힘을 과시했다’는 한 문장 외에 어떤 평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토론을 통해 조금씩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촛불집회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을지 모른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가 말하는 것처럼 아무리 꺼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해 촛불은 언젠가 다시 타오를 ‘가능성’이기 때문이다.(박고은기자)   

대학신문(09. 03. 28) 촛불을 그리워하는 그대에게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5%를 기록할 것이라고 한다.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정치에 신경 쓰기 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정치가 설 자리를 잃어버린 이 때, 『당대비평』 기획위원회는 촛불시위에 다시 주목한다. 경제 문제에만 관심을 갖게 되면 정치는 실종될 수밖에 없거니와 ‘촛불에 대한 성찰’은 한국 민주주의의 오늘을 사유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를 비롯해 인터넷 논객, 기자, 교수 등의 필자들이 참여해 2008년을 뜨겁게 달군 촛불시위를 성찰한다. 『당대비평』은 “그간의 촛불 담론이 긍정적 효과에 주목했다면 이 책은 촛불 주체들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 한계를 살펴보고자 했다”며 집필 의도를 설명했다.

촛불시위는 복잡한 쟁점들을 담고 있는 사안이었다. 저자들은 각자의 전공 분야에서 촛불시위를 분석한다. 그들은 촛불시위 때 과학 담론이 정부, 대중, 전문가 사이에서 어떻게 사용됐는지, 비정규직 문제에 촛불 주체들이 왜 참여하지 않았는지 설명한다.

『당대비평』 한보희 기획위원은 촛불 주체들의 정체성을 ‘법’을 통해 살펴본다. 당시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집시법과 도로교통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범법자로 여겨지곤 했다. ‘법에 대한 무지는 핑계가 될 수 없다’는 형법의 원칙은 모든 실정법이 그 원리로 따르고 있는 ‘법들의 법’ 중 하나다. 이에 따르면 촛불시위 참여자들은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법들의 법’조차 국민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법의 속성을 고려하면 이는 섣부른 결론이 될 수 있다.

국민이 국민일 수 있는 자격은 법률로 그 요건이 정해진다. 그렇다면 국민의 자격을 부여하는 법률 판결의 주체가 국민보다 우선한다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헌법으로 제정된 권력의 주체인 ‘대한민국 국민’과 헌법을 만드는 권력의 주체인 ‘대한국민’을 구분해 이 딜레마를 해결한다. 법 속에 ‘대한민국 국민’이 있다면 법 이전에 ‘대한국민’이 있는 것이다. 이런 법적 해석을 바탕으로 저자는 “그동안 ‘대한민국 국민’으로만 살아오던 이들이 촛불시위를 통해 ‘대한국민’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촛불은 꺼졌고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 책은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라며 우리를 채근하지 않는다. 대신 촛불에 대한 관심 혹은 반성만은 끄지 말 것만을 당부한다. 행동에는 관심과 반성이 선행돼야 하기 때문이다.(유병준기자)  

09. 03. 29. 

 

P.S. 그간에 나온 '촛불 관련서'를 다시 '호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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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시 들추어 본 촛불 시위 관광기
    from Post-Modern Times 2009-03-29 19:39 
    하나,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의 당선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그 동안 간헐적으로 드러났던 '시대 정신'이 구체적인 실체로, 하나의 인간으로 등장한 모습에 몸서리 쳤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다. 정책이고 뭐고 간에 그냥 저 한 사람, 저 대표자, 가 싫다는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한국 땅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선거 과정, 당선, 그 이후에 전개된 별의 별 상황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
  2. jjjismy의 생각
    from jjjismy's me2DAY 2009-03-29 22:04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Sati 2009-03-29 22:02   좋아요 0 | URL
아는 분과 휴대폰 얘기하다가, 애니콜 기본 벨소리중에 "여보쪠요. 쪈와와쪄요." 이거가 좋긴 하지만 삼성꺼라 번번이 싸이언을 사게된다고 했더니, "긍정적으로 살아. 그냥 사. 삼성 없으면 어쩔려구? 우리나라 1위 기업인데."하더라는... 나로 말하면 삼성이 바다에 기름부어놓고 배째라 하고 있는 것이 미워서 불매운동중인데, 아무데나 지네 편한데 갖다 붙이는게 '긍정'의 '시크릿'이라는. 반말 ㅈㅅ요^^

로쟈 2009-03-29 23:28   좋아요 0 | URL
사회가 덜 성숙하고 시민사회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국민들이 호구 노릇이나 하지요...
 

다들 아는 얘기지만, 탤런트 장자연씨의 자살과 관련한 경찰의 수사가 진행중이다. '급물살'을 탈 거란 얘기도 나오지만 아직은 답보상태이고 어젠가는 여당의 원내대표조차도 신속한 수사를 촉구한 바 있다. 지금은 검열 때문에 온라인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사건 초기엔 '장자연 리스트'가 돌아다니기도 했다. 복자(가린 글자)가 한 자씩 들어가 있었지만 대부분 유추해서 알아볼 수 있는, 한국사회의 유력한 인사들이었다. '미디어오늘'의 표현을 따르면 이들이 '더러운 포식자들'이다. 이번 수사도 유야무야로 넘어가고 그들이 계속 '포식자'로 이 사회에 군림한다면 아무리 WBC에서 야구대표팀이 기량을 뽐낸다고 하더라도 한국사회에 희망(?)은 없다. 더럽고 수치스러운 사회로 남을 뿐이다. 칼럼의 주장대로 그들이 '엄정한 법의 심판대'에 세워지기를 기대한다(이번 사건이 어떻게 종결되는가는 과연 한국사회에서 법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확인해볼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미디어오늘(09. 03. 24) 더러운 포식자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어둠의 포식자들이 여성 연예인들을 상대로 자신의 성욕을 채워온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한 여배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탤런트 장자연씨의 죽음! 형식은 자살이지만 내용은 타살이다.

한 여배우를 죽음으로 내몬 그 무서운 포식자들을 어떻게 법의 심판대에 세울 것인가.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는 이름들은 검은 발톱으로 대한민국을 찍어 누르고 있는 ‘무소불위 포식자'들이다. 그 포식자들의 면면이 하도 어마어마한지라 경찰마저 벌벌 떨고 있는 모양새다. 말 바꾸기와 시간끌기를 하면서 미적거리고 있다.

경찰의 늑장수사를 보다 못한 정치권이 쓴 소리를 하고 나섰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23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장자연 리스트’라고 불리는 것은 한국 사회 상류층의 ‘모럴 해저드’의 극치”라면서 “경찰이 좀더 적극적으로 수사해 한국 사회 상류층의 모럴 해저드가 없어지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홍 원대대표는 이어 기자들과 만나 “대한민국을 세탁기에 넣고 돌려야 한다. 상류층 윤리가 (일반 시민들과) 상당히 다르다”고 말했다.

진보신당 심상정 공동대표는 라디오에 출연, “장씨가 문건에서 밝힌 대로 노예적 성 착취가 자행됐다면, 그 사무실이야말로 여성의 아우슈비츠”라며 “여성을 착취하는 먹이사슬의 최상층 포식자에 대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실체가 공개돼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마저 꼬리를 내리게 하는 저 무서운 포식자는 대체 누군가. ‘장자연 리스트'엔 유력 일간지 대표와 재벌 총수 등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심상정 의원의 말대로 대한민국 최상층 포식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유력 일간지 대표가 누군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 땅의 여론을 쥐락펴락 하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이미 그 구체적인 이름이 저자거리 술좌석의 안주로 오르내리고 있다. 그가 여배우의 인권과 사회적 윤리를 짓밟으면서 냄새나는 욕정의 찌꺼기를 내뿜고 있을 때, 자신이 만드는 신문의 지면에선 얼마나 많은 위선적 기사들이 독자들을 훈계하고 있었을까.

재벌총수의 이름이 ‘장자연 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재벌들이 주연으로 등장했던 여배우와의 스캔들이 어디 한둘인가.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천민자본주의'가 불식되지 않는 한 재벌가의 사람들과 여성 연예인들 간에 얽히는 추문은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반재벌, 반기업 정서'를 탓하기 이전에 먼저 재벌들의 극심한 모럴 해저드부터 어찌 해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

장자연씨가 죽기 직전 한 지인에게 남겼다는 글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일부만 옮겨보자. “근데 이렇게 누구에게라도 말하지 못하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회사도 아닌, 술집도 아닌 웃긴 곳에서 생각하고 싶지 않는 일이 일어났고…. 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벗으라면 벗어야 하고. 여기저기…. 새로운 옷이 바뀔 때면 난 또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는 요즘이야." 

세상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음침한 밀실에서 신문사 대표와 재벌총수라는 사람들이 던지는 끈적거리는 눈길과 손길을 거부하지 못한 채 받아들여야 했던 한 여배우의 좌절감과 수치심, 분노를 상상해보라. 오죽했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고 했을까.

아무리 막강한 돈도, 권력도, 지위도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을 수 없다. 아직도 고 장자연씨와 같은 상황에서 신음하고 있을 다른 연예인들을 생각해보라. 장자연씨의 죽음을 헛되이 해선 안 된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더러운 포식자들을 엄정한 법의 심판대에 세워라! 그 범죄를 명명백백히 밝히고 그 이름도 공개하라!(박상주 논설위원)  

09. 03. 24.  

P.S. 여배우와 '포식자들'의 유착/착취관계는 사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20년 전엔 이런 소재를 다룬 영화 <서울 무지개>가 대종상을 석권한 적도 있다(비슷한 시기에 나온 영화 <빨간 여배우>도 이 계열에 속한다). "돈과 명성을 동경하는 유라, 고향으로 가기 원하는 준. 준을 책망하며 스타가 되기위해 발돋움 하려는 유라. 하지만 준은 유라를 도와 준다. 스타가 되기까지 유라 자신도 모르게 배후에서 어떤 어른이 도와주지만 그녀는 행동을 규제 받고 애완동물처럼 취급된다. 비로소 자신이 꿈꾸던 정상이 허위와 고통의 가면이라는 것을 깨달은 유라는 준의 사랑을 그리워한다. 빠져 나가려 하지만 더욱 조여오는 현실..."이란 식의 줄거리였다. 차이라면 '유라'는 자살하는 대신에 정신병원에 감금된다는 것 정도. 결론은 '죽거나 혹은 미치거나'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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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자연 관련 수사와 신뢰 없는 사회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24 20:40 
    요즘은 TV 뉴스를 거의 보지 않기 때문에 종종 라디오에서 시사뉴스를 듣곤 한다. 오늘 방송된 CBS 시사자키에서 경찰의 장자연 리스트 수사 중간발표에 대한 의견 인터뷰를 옮겨놓는다.   CBS 시사자키(09. 04. 24) “故 장자연 수사결과, 경찰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 진행 : 변상욱 대기자(CBS 라디오 '시사자키 변상욱입니다') ▷ 출연 : 민주당 김상희 의원 경찰이 오늘 장자연 리스트
 
 
열매 2009-03-25 12:36   좋아요 0 | URL
어제자(3.24) 뉴스데스크의 끝맺음멘트가 압권이더군요.
"야구에 열광하는 사이 '박연 차리스트'는 신구 권력층을 맹수처럼 할퀴었고 장자연 수사는 거북이처럼,YTN수사는 토끼걸음으로 갔습니다.'장자연 리스트'와 연관 있는 쪽이 '박연차 리스트'를 띄워서 덮어보려고 해서 흥미롭습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슬그머니 출국해서는 수상한 냄새가 납니다. 추부길 전 비서관은 이례적으로 영장심사를 포기한 뒤 입을 굳게 다물어서 누구에겐가 무언의 약속사인을 보내 심상치 않습니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48273

보는 제가 철렁하며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로쟈 2009-03-25 14:50   좋아요 0 | URL
오늘 기사를 보니 '살을 베이고 뼈를 베는 싸움'이라고 적었더군요. 추부길 하나 엮어넣고 초토화를 시키겠다는 계산이 섰겠지요. '장자연 리스트'처럼 불리한 싸움은 미적거리고요...

비로그인 2009-03-25 15:08   좋아요 0 | URL
처음 뵙습니다. 로쟈님.
근데 제 개인적으로는, 로쟈님의 페이퍼에 이런 글을 드려서 그렇지만 남자들 대부분 여자들을 돈으로 사서 성관계를 맺는 일이 많이 희귀한 일은 아니지 않았나 싶습니다.......

포식자들만이 아니라 남성 사회 전체가 그런 일이 많지 않았나요? 어찌보면 그 포식자들은 남성 문화 전반에 대한 반성으로 가야지, 있는 자들 혹은 권력을 가진자들로 한정 시킨다는 건 결코 문제의 해결이 아닐것 같은데요. 로쟈님.

로쟈 2009-03-25 14:5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남성문화 전반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모든 남성이 권력 상층부의 '포식자'는 아니죠. '우리 안의 이명박'이 문제되는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명박'의 책임이 면책되는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나'라도 그랬을 텐데라는 문제의식이 실제의 '범죄' 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건 같은 경우는 자신의 우월한 지위나 권력의 남용이고, 성적 착취죠. 대부분이 남자들이 여자를 돈으로 사기도 하지만, 이 '포식자'들은 '돈'을 내지도 않은 것 아닌가요? 죄에도 경중이 있으며,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해서 모든 '악'이 동급으로 취급될 수는 없습니다...

비로그인 2009-03-25 15:01   좋아요 0 | URL
저는 그들이 돈을 내고 내지 않았고가 문제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여자를 돈을 내고 이용했으니 다르고 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이건 엄연히 거래이고 저들은 권력의 남용이다 라고 말한다는 건 여성의 몸을 어떤 이유건 남성이 자신이 가진 무엇으로 이용했다는 것에서는 동일하지 않을 까 싶습니다.
저의 의견은 저들에게 면죄부를 줄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저들과 함께 모두가 비판받고 반성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 저는 남성이 여성의 몸을 어떤 의미로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도구쯤으로 삼는다는 문제에 있어서 남성 상층부의 포식자만이 비판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상층부 포식자들에 대한 면죄부는 말씀하신 대로 당연히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구요.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요.

로쟈 2009-03-25 17:56   좋아요 0 | URL
"상층부 포식자들에 대한 면죄부는 말씀하신 대로 당연히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구요"라고 동의하신다면, 의견 차이라고 할 건 별로 없겠습니다. 다만 현대인들님은 거기에 덧붙여 "저들과 함께 모두가 비판받고 반성해야 한다"고 보시는 거지요. 저는 그런 의견이 '물타기'로 오용되지만 않는다면, 공감합니다. 덧붙이자면, "남성이 여성의 몸을 어떤 의미로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도구쯤으로 삼는다는 문제"가 걸린 거라고 생각지는 않구요(그건 염결주의적 태도라고 봅니다. 우리는 모두 이성뿐만 아니라 타인을 수단으로서 이용합니다. 문제는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것이지 '수단으로' 이용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서요). 결과적으로 좀 주목을 끄는 페이퍼가 돼버렸지만, 사실 이번 사건이 제대로 수사될 거라고 예상하지 않습니다. '리스트'도, 적어도 공표되진 않을 겁니다(알 만한 사람은 다 알더라도). '법'과 '권력'은 '그들'의 편일 테니까요. 그게 한국사회의 진실입니다. 다만, 그런 진실에 불만을 토로할 수는 있고, 또 제2, 제3의 '장자연'을 예방할 수는 있겠죠. '포식자들'도 좀더 주의하게 될 테니까요... 그들의 사생활은 '음지'가 적당합니다...

paul 2009-03-25 22:46   좋아요 0 | URL
한 인간의 처절한 최후가, 여성과 남성의 성차의 문제로, 또 다시 남성의 욕망의 폭력적 분출로 "해석"되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어느 막다른 상황에 놓인 생명이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 앞에서 떨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슬픔을 넘어서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어떤 무력함마저 느낍니다. 인간의 욕망, 그리고 그것을 가리며 휘장처럼 화려하게 걸쳐진 권력과 또 그것에 아첨하는 자들과 짐짓 자신을 그들과 다르다는 듯, 동경하는 마음을 감추려 목소리만 높여 단죄의 칼날을 세우는 자들, 모두가 공범이라는 생각만 듭니다. 저는 모든 자살은 타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단죄가 제 2, 제 3의 또 다른 피해자들, 자신을 파괴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처연한 비관론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약한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처참한 최후에 대해서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머리 숙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악'에 의해 합리화되지 않는 지점까지 누군가는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에게 그러한 단죄만큼 중요한 것은, 뼈져리게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싸움이 끝났다는 생각은 오산이라는 것을.....
여성이든, 남성이든, 사회가 되었든, 우리의 내면이 되었든 마찬가지입니다.

로쟈 2009-03-26 02:04   좋아요 0 | URL
이번 사건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도 적지 않더군요(피해자의 자업자득이라는). 여러 이유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실정이므로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의 견적이 얼른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다만 이번 사건은 '가해자'들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므로 이들의 책임을 엄정하게 추궁하고 밝힐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 또한 상식이라고 믿습니다...

HugoWonchulKIM 2009-03-26 23:44   좋아요 0 | URL
포식자, 성상납,매춘...그런게 아니라 방법이 다를 뿐인 강간 또는 성적노예 sexual slave 에 관련된 내용이 아닐까요.

로쟈 2009-03-27 17:10   좋아요 0 | URL
포식자 등도 그런 의미를 갖지요...
 

교수신문에서 문화비평 칼럼을 옮겨놓는다. 필자가 인도사 전공자인 이옥순 교수여서 눈길이 갔다. 식민지 한국의 인도 인식을 다룬 <식민지 조선의 희망과 절망, 인도>(푸른역사, 2006)를 비롯해서 다수의 관련서를 쓰거나 우리말로 옮겼다. 같은 영어 문제라고 해도 '인도에서의 영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니까 조금 다른 얘기가 나온다. '우리에게 영어란 무엇인가'란 질문이 결국 '인도인에게 영어란 무엇인가'란 질문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인식, 그걸 좀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우리는 모두 인도인이다?!). 여기저기서 밑도 끝도 없이 영어에 목 매달더라도...   

교수신문(09. 03. 16) [문화비평] 영어는 힘이 세다!  

연전에 인도에 있는 유명한 영어기숙학교를 방문했다가 재학생의 절반이 한국인이어서 놀란 적이 있다. 맹모를 능가하는 한국 엄마들의 교육에 대한 열성이 어제오늘의 현상은 아니지만 세상과 차단된 그 먼 히말라야 산중의 기숙학교에서 그들을 보니 반가움에 앞서 복잡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그 학교 뿐 아니라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인도의 웬만한 ‘좋은 학교’에서도 한국 학생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교육을 위해 해외로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의 입장은 다양할 것이다. 입시위주의 국내 교육에 대한 반감과 그 대안적 선택일 수도 있고, 일찍이 영어로 공부를 시켜 자식을 무한경쟁의 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하려는 욕심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인도에서 만난 아이들은 거의 다 현지교육에 만족한다고 대답했다. 시설이 좋고 커리큘럼이 다양하며 교사진도 훌륭하다는 평이었다. 입시로부터 해방감과 영어가 능숙한데서 오는 만족감도 컸다

그럼에도 영어가 교육의 대세인 우리나라에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그 아이들을 만날 때도 찾아왔다. 교육학에 문외한인 내가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이방의 문화에서 성장하는 것의 문제를 논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인도 근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영국이 인도에 부과한 영어교육의 목표와 그 부정적 효과를 어느 정도 알기에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우상’이 돼가는 영어교육에 대해 일말의 우려를 갖는 것이다. 인도에서 영토정복을 마무리한 영국은 19세기 전반에 제2의 식민화, 곧 인도인을 영국의 문화에 동화시키는 단계로 나아갔다. “일단 전함과 외교관을 보낸 뒤 영어교사를 보낸다”라는 말대로 영국이 시작한 가장 중요한 정책은 인도인에게 영어교육을 부과하는 거였다. 그 이유는 영어로 교육받은 인도인이 머지않아 “피와 피부는 인도인이지만 관점과 취향, 도덕과 지성은 영국인”으로 식민통치의 열성적인 협력자가 되리라고 여긴 때문이었다.

‘갈색 피부의 영국인’인 인도인들이 영국의 통치를 당연시하고 영국산 상품을 선호해 경제적으로 이득이 될 거라는 전망은 영어로 교육받은 힌두들이 자기의 종교를 지키지 못하고 ‘갈색의 기독교인’이 될 것이며 “우리 문학을 통해 우리에게 친숙해진 인도의 젊은이들이 우리를 이방인으로 여기진 않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기 훨씬 전부터 인도에서 영문학이 학교와 대학의 학과목으로 채택된 건 그런 연유였다. 그 결과 양복을 입고 영어에 능통하며 영국적 취향을 가진 ‘유색인 영국신사’가 탄생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가 “우리들의 정신은 유아시절부터 영문학으로 구성됐다”고 고백했듯이 초서와 밀턴을 읽으며 영어교육을 통해 이방의 문화에 노출된 그들은 점차 유럽을 선망하고 그 문화와 가치를 우수하다고 내면화하면서 “인도인의 복잡한 맘을 이해하기 어렵게 됐다” 자신의 전통과 사회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세상이 촘촘히 연결되고 사람의 이동과 교류가 빈번해진 오늘날에 소통의 언어로서 영어의 중요성은 한층 높아졌다. 식민지시대 인도인이 그랬듯이 영어를 배워 경제적 반대급부와 사회적 위상의 이동을 추구하는 건 비판받을 일이 아니다. 영어라는 창구를 통해 넓은 세계를 내다보고 배울 수 있는 이점도 크다. 험한 세상을 건널 ‘다리(橋)’를 하나 더 갖고 있는 셈이랄까. 그러나 유용성만 강조되는 영어교육에도 이면이 없을 순 없다. 식민지시대 인도의 고등학생은 영어와 모국어를 배우는 데 주당 19시간을 들였다. 언어만 학습한 그들에게 큰 미래는 없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목도되는 영어에 대한 과도한 강조도 청소년에게 다양한 걸 배우고 경험할 기회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아쉽다. 영어가 성공과 직결되는 상황에서 영어에 투자 기회가 적은 계층이 사회적 이동의 가능성을 갖지 못한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무엇보다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건 그 언어의 기반인 문화와 전통에 동화되는 동시에 자신의 언어를 소홀히 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사회와 전통으로부터 소외됨을 의미한다. 오늘날 영어로 ‘미드’를 보는 청소년들은 미국의 문화에 친숙해지면서 ‘우리의 것’에서 멀어진다. 피와 피부는 한국인이지만 관점과 취향은 거의 미국인인 그들을 보면 일제강점기 일본어교육에 목숨을 걸고 반대한 조상들이 떠오른다. 일본에서 해방된 지 반세기만에 우리는 영어에 의식마저 사로잡혀버린, 식민지적 무의식에 포박당하고 말았다. 언어는 때로 총보다 강하다.(이옥순 서강대 동아연구소·인도근대사) 

09.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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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징글리쉬
    from Post-Modern Times 2009-03-17 18:57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당시 잠시 고등학교 영어 교사직을 하신 적이 있었고, 그 반대 급부로 집에는 출판사에서 홍보차 보내 준 각종 어린이용 영어 교재가 쌓여 갔다. 당시 그 영어 교재들을 믿기지 않게도 흥미진진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실은 듣기를 강요한 어머니에 의해 조작된 기억일 확률도 조금은 있다.) 그래서 믿기지 않게도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가장 기대가 되던 교과 과목은 영어였다. 영어, English. 그런데 중1때 영어 선생님이,..
 
 
노이에자이트 2009-03-17 22:11   좋아요 0 | URL
지금의 50~60대들도 젊은 시절에 서양 것에 물든 놈들이라고 욕을 많이 먹었지요.전환시대의 논리나 우상과 이성에서 리영희 씨가 당시 70년대의 젊은이들을 그런 식으로 많이 비판했지만 역시 그들도 이제 나이가 들면서 청소년들이 보기엔 그저 보수적인 한국 특유의 노땅이 되어 버렸지요.

로쟈 2009-03-19 00:50   좋아요 0 | URL
'식민주의'가 청산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돼요...

2009-03-18 0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19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