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의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특집호에서 책과 관련한 고인의 삶을 조명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98). 광복 이후의 현대 정치사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고, 가장 많은 책을 썼으며, 가장 많은 장서를 간직한 ‘3다(多)’ 기록의 보유자"라는 사실 정도는 기억해두는 게 고인에 대한 예의일 듯싶다...    

시사IN(09. 08. 22) 책에 대한 예의를 알던 사람  

대통령에 당선된 뒤 청와대로 거처를 옮기며 DJ가 가장 고심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측근들에 따르면, 일산 자택에 있던 책 3만여 권을 옮기는 문제였다고 한다. 결국 이 책 중 태반은 청와대로 옮겨지지 못한 채 주인이 퇴임하기까지 사저 서고를 지켜야 했다.

책에 관한 한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얘깃거리를 많이 남긴 대통령도 드물다. 김 전 대통령은 광복 이후 정치인 중 책을 가장 많이 읽고, 가장 많은 책을 썼으며, 가장 많은 장서를 간직한 ‘3다(多)’ 기록의 보유자이다. 1993년에는 한국애서가협회가 주는 ‘애서가상’을 받은 일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독서 습관이 학력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목포상고를 수석으로 입학한 재목임에도 불구하고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가슴속에 늘 ‘배움에 대한 갈망과 대학에 대한 한’이 있었고(<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이를 떨치기 위해 더 악착같이 책을 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삼상지학(三上之學). 곧 말 위(馬上)와 베개 위(枕上)와 화장실(厠上)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 평생을 따라다닌 그의 생활 신조였다.     

 

김대중도서관(위)에서는 책을 유난히 사랑했던 DJ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3다(多)’ 기록의 보유자
김 전 대통령의 독서가 더 풍부해지고 깊어진 것은 감옥 생활을 통해서였다. 특히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서 생활하던 기간(1981~1983년)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지적 행복의 나날’이었다. 이 기간 그는 철학 신학 정치 경제 역사 문학 등 다방면의 책을 동서양에 걸쳐 두루 읽으며 사상의 폭을 넓혀갔다. 일생 동안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책으로 꼽은 <역사의 연구>(아널드 토인비 지음)를 읽은 것도 이때였다. 야당 총재나 대통령 시절 분주한 일상에 쫓길 때면 ‘감옥에라도 다시 갔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는 것이 그의 푸념 아닌 푸념이었다. 책 읽을 시간이 없음을 그만큼 아쉬워한 것이었다.

오늘날 공공도서관 네트워크에서 ‘정치인 김대중’ 키워드로 검색할 수 있는 책은 80권가량이다. 이들 DJ 관련 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쓴 책과 남이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쓴 책이다. 남이 쓴 책은 또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DJ의 생애나 말글을 기록한 책이 그 첫째로 <김대중 수난사-인동초의 새벽>(김진배 지음),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일본 NHK 다큐멘터리팀 구성)가 이 분야 대표작으로 꼽힌다. 두 번째는 이른바 ‘김대중 죽이기’를 시도한 책이다. 이 책들은 DJ를 음해하려는 군사정권의 사주에 의해 쓰였다는 의혹을 받곤 했다. 이 부류 원조로는 1986년 경향신문사 출판국 이름으로 발행된 <김대중 정치방황 30년>이 꼽히는데, 그 뒤로도 <동교동 24시>(함윤식 지음), <김대중 X파일>(손충무 지음) 등이 풍파를 일으켰다(74~76쪽 ‘DJ 죽이기’ 기사 참조). 세 번째는 ‘김대중’이라는 코드로 한국 사회를 읽어낸 저작들이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지식인 사회를 달궜던  ‘김대중 담론’은 선거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72쪽 상자 기사 참조).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쓴 책은 40권 남짓한데, 현재는 거의 절판된 상태이다. 기록에 따르면 DJ가 쓴 최초의 단행본은 1967년 숭문각에서 발행한 <분노의 메아리>라고 한다. 국회도서관 등에서 열람할 수 있는 이 책에는 ‘김대중 의원 국회연설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정치인 초년병 시절 DJ의 맨얼굴을 엿볼 수 있는 희귀한 사료인 셈이다. 이 책 서문을 쓴 박순천 여사는 DJ에 대해 “그는 지금 우리 정계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정치인이다”라고 평가했다. 김 전 대통령이 즐겨 쓰던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용어가 이 책에 처음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그 뒤 <내가 걷는 70년대> <대중경제 100문 100답> 등이 나왔는데, 이는 1970년 그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면서 대권을 향한 비전을 선포한 책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책에서 ‘대중정치’ ‘대중경제’ ‘대중사회’를 골자로 하는 그의 대중민주체제론이 본격 제시된다. 1980년대에 나온 책은 대부분 군사정권으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는 와중에 쓰였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 옥중서신> <행동하는 양심으로> <평화를 위하여> 등이 감옥 또는 해외 망명지에서 쓰였다. 



김 전 대통령이 다시금 왕성한 집필 활동을 벌인 것은 1993년 14대 대선에서 패배하고 정계를 은퇴하면서였다. 당시 정치와 결별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날아가 은둔하던 DJ를 맨 처음 찾아간 출판인이 김영사 박은주 사장이었다. 박 사장은 “유권자를 의식하지 않는 자연인으로서 진솔하게 지난날의 체험을 정리해달라”며 DJ를 집요하게 설득했고, DJ는 결국 집필을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정치인 김대중’이 아닌 ‘자연인 김대중’으로서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털어놓은 최초 대중 에세이집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 책은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겨우 다섯 달 사이에 70쇄를 찍으며 DJ를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에 긴장한 김영삼 정부가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김삼웅씨(전 독립기념관장)에 따르면 당시 출판가에는 김영사가 세무사찰을 당할 것이라는 풍문도 떠돌았다(이에 대해 김영사는 그 시절 세무조사를 받은 일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 뒤 김영사는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이 책 개정판을 냈는데, 현재까지 50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고 한다. 1994년에는 한길사가 ‘오늘의 사상신서’ 시리즈 중 하나로 DJ의 정치사상과 통일철학을 담아 <나의 길 나의 사상>을 펴내기도 했다. 



필자로서의 DJ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일치한다. 한마디로 ‘까다롭고 꼼꼼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DJ의 책을 내기까지 시간이 무척 많이 걸렸던 기억이 난다”라고 한길사 곽명호 이사는 말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완벽주의자였다. 김영사에서 첫 에세이를 쓰기로 한 뒤 김 전 대통령은 “책 쓰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푸념하곤 했다고 한다. 때로는 “박 사장이 원망스럽다”라고도 했다. 전문 서적을 펴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길 나의 사상> 출판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는 김삼웅씨는 DJ의 철저함과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이 책에는 특히 DJ가 강만길 교수(고려대)와 6시간 30분에 걸쳐 나눈 대담이 실려 있는데, 이 대담에 앞서 DJ가 대학노트 12장 분량의 메모를 준비해왔더라는 것이다.

빨간펜 글씨로 가득했던 DJ의 교정지

초고를 넘겼다고 끝이 아니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 전 대통령의 에세이집 <나의 삶 나의 길>과 경제서 <대중참여경제론>을 잇달아 펴낸 도서출판 산하 대표 소병훈씨는, 선거가 임박했는데도 DJ가 ‘원고 OK’를 내주지 않아 애를 태웠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교정지를 빽빽하게 채운 빨간펜 글씨가 DJ 글씨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5고까지 퇴고를 거듭하던 중 확인해보니 DJ 자신이 직접 교정을 본 것이었다”라고 소 대표는 말했다. 그 결과 출판사는 선거를 앞둔 대목인데도 책 광고를 한두 번밖에 집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거운동 기간이 곧바로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최종본 단계에서 DJ는 직접 표지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소병훈 대표에 따르면, DJ는 <대중참여경제론> 표지에 고풍스러운 건물 사진이 배경으로 깔린 것을 보고 “기왕이면 하버드 대학에도 비슷한 느낌의 건물이 있으니 그 건물 사진을 쓰면 더 좋을 것 같다”라고 했다고 한다(<대중경제론>의 개정 증보판이라 할 수 있는 <대중참여경제론>은 1985년 하버드 대학에서 영문본으로 먼저 출간됐다). 소 대표는 그 시절을 회고하며 DJ가 “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책을 만드는 데도 대단한 예의를 차리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출판사 대표쯤이야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는 일반 정치인과 달리 출판기념회에서 자신을 상석에 앉히고 발언 기회까지 준 사람이 DJ였다는 것이다.    

<대중경제론>과 <대중참여경제론>은 최근 대필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등은 <대중경제론>이 경제학자인 고 박현채 교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이 직접 해명한 일은 없다. 그렇지만 소 대표는 “DJ가 박 교수와 공동 작업을 했을지언정 박 교수가 이를 완전 대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DJ의 완벽주의 성향상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자기 이름으로 그냥 나가게끔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DJ 관련 책이 절판됐다고 아쉬워할 것은 없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가면 DJ의 손때가 묻은 책을 볼 수 있다. 출판사들은 앞다투어 DJ 관련 서적을 재출간하는 중이다. ‘김대중 자서전 편찬위원회’가 2006년부터 준비해온 <김대중 자서전>도 조만간 출간된다. 그는 갔지만 책을 남겼다.(김은남기자) 

09. 08. 30.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09-08-30 15:52   좋아요 0 | URL
정태인도 대중경제론이 박현채 작품이라고 했습니다.김일영은 대중경제론이 극단적인 폐쇄경제를 모델로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반대로 정태인은 '대중경제론의 정신을 버리고 개방경제로 김대중이 변신하니 박현채가 김대중을 떠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로쟈 2009-08-31 08:46   좋아요 0 | URL
네, 자서전이 나온다고 하니까 그 내막도 곧 알 수 있을 듯해요...

펠릭스 2009-08-30 18:43   좋아요 0 | URL
김대중의 변신이라 한다면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에 기반을 둔듯하며 보수/진보,좌/우파를 무시하는 시장지상주의는 종교적 실용주의가 개입된게 아닌가 싶은데요.

로쟈 2009-08-31 08:47   좋아요 0 | URL
'종교적 실용주의'는 처음 들어보는데, 의미 파악이 되네요.^^

꿈꾸며사는거야 2009-08-31 08:38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서재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

저도 시사인 이번호 샀는데, 잘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결혼하면 아이들에게도 보여줘야겠어요.ㅎㅎ

로쟈 2009-08-31 08:48   좋아요 0 | URL
중학생 정도가 돼야 할 텐데, 한 15년은 보관하셔야겠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9-01 00:45   좋아요 0 | URL
김대중 음해서적으로 가장 세련된 책이 '정치방황 30년'입니다.가끔 이 책 만든 데 참여한 이들 중 지금도 경향신문에 재직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 궁금하기도 하구요.

통속적인 김대중 음해론의 총집대성은 소설가 이진수가 쓴 <거짓말 선생님>이지요.이 책은 지금도 가끔 변두리 서점에 나오던데 한번 구해서 읽어보세요.전라도 사람은 롯데에서 나온 것 안 쓴다고 사실인 듯 써놨는데 참 거시기하더라구요.김대중이 친북이라는 평가를 듣는 데도 이유가 있다고 썼구요.

로쟈 2009-09-01 20:56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의 서지 정보에 가끔씩 놀랍니다.^^
 

눈에 띄는 칼럼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안 그래도 이번주 시사주간지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특집호를 마련하고 있어서 오전에 한참 읽어봤는데, 저녁에 읽은 한림대 이일영 교수의 칼럼도 분류하자면 추모칼럼에 해당한다. 필자는 김대중과 그의 시대에 대한 재평가와 맞물려 '한국형 사회과학'의 필요성을 제기하는데, '한국형'이란 말에 미리부터 거부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서생이면서 상인'이고자 했던,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결합시키고자 했던 '김대중 마인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생'과 '상인'이라는 일면적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어도 좋겠다. 양쪽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를 넘어설 정치인이 아직 우리 곁에 없다는 점에서도 그는 연구의 대상이 될 만하다. 김대중 마인드에 대해서는 오마이뉴스에 연재되고 있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평전도 참조(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86008). 

 

제6대 국회에서 대정부질의를 하는 김대중  

한국일보(09. 08. 24) 김대중과 한국형 사회과학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논란 속에서 살았다. 한편에서는 그를 '전라도 빨갱이'로 음해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주의자로 비판하기도 했다. 점잖은 척 하는 이들은 "한국은 경제는 일류, 정치는 삼류"라고 하면서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한국 정치를 통째로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는 아직 김대중을 전면 평가할 수 있는 기준과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수입된 '이론'은 현실파악 한계
굳이 따져서 말하자면, 개념 또는 언어의 낙후성, 사회과학과 언론의 후진성을 먼저 거론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근대와 탈(脫)근대에 복합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21세기의 시대적 과제가 눈앞에 있다. 과거의 수입된 사회과학 개념만으로 김대중과 한반도의 현실을 직시하기는 쉽지 않다. 일각에서 벌어지는 전근대적인 언어전쟁이야말로 삼류나 사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다.

복잡하게 변화된 세계는 좌파 대 우파, 또는 진보 대 보수라는 틀로 확연히 갈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과거의 시각과 언어들은 아직 기세가 강하고, 심지어는 '척결'이나 '적출'의 신념과 행동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논점을 프레임에 가두려는 현대적 기술을 흉내 내려는 것으로도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그 본질은 전근대적인 척사론(斥邪論)이다.

근대로의 길목에서 조선의 척사파들은 "중국과 조선은 인류(人類)이나 서양은 금수(禽獸)"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척사론은 21세기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짐승의 자리에 또 다시 '빨갱이'를 올려놓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모두 망쳤다는 것도 척사론의 전통을 잇는 또 다른 형태의 주장이다. 



강동국 교수에 의하면, 국민이나 그에 기반을 둔 국가는 조선말과 대한제국 시절에 서양으로부터 일본과 중국을 거쳐 유입된 개념이다. 그러나 서양에서와 달리 국가나 그 주권자로서의 국민 개념은 순조롭게 정착되지 못했다.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에 의해 유린되었고,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주의에 침탈되었다. 한반도에서 국민과 국가는 철저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해방 이후 국가는 회복되었지만 그것은 매우 불완전한 존재였다. 남북한 모두에서 국가장치는 심각한 폭력과 자원 배분을 왜곡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결국 북한은 '실패한 국가'로 귀결되었고, 남한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성공한 국가'와 그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등장하고 있다.

국가는 현실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절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남북한 양쪽에서 국가의 정통성을 절대시하려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부국강병 일변도로 질주하다가 자멸하고 말았던 일본제국주의의 무모함을 답습하는 경향이 있다. 복지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해 국가를 이용하려는 경우도, 국민이 허약하고 국가가 불완전할 경우 국가사회주의가 실패했던 길을 따라갈 위험을 안고 있다.

민족 개념이 한반도에 유입된 것은 20세기 벽두이지만, 국가나 국민 개념에 비하면 성공적으로 수용되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그 국민이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규정되자, 국가와 국민 개념은 한반도 주민에게 저항의 대상이 되었다. 대신 민족 개념은 일본제국에 저항하는 언어가 되어 결국은 승리자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민족 개념이 통일을 지향하는 언어로 정착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남북한 양측에서 민족 개념은 분단을 유지하고 국가를 강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민족 개념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민족 개념이 남북간 연합에 기능 한다면, 남북한 각각의 개혁과 개방에는 새로운 개념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민족에 대한 한국형 '개념' 필요
필자는 남북한의 혁신과 통합은 지역을 재구성하고 경제조직을 다양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국민국가, 민족, 계급과 같은 기존의 개념을 반성하고 보완하는 한국형 사회과학 개념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서생이면서 상인이고자 했던 김대중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고, 새로운 세계를 위한 대안도 마련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위해 일생 분투한 대정치가의 명복을 빈다.(이일영 한신대 사회과학대 교수) 

09. 08. 24.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펠릭스 2009-08-24 21:18   좋아요 0 | URL
"양쪽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를 넘어설 정치인이 아직 우리 곁에 없다는 점에서도 그는 연구의 대상이 될 만하다"를 조금 비틀면,
-->> "우리가 선생님이다고 부를만한 정치인이 앞으로 나오것소 택도 없제, 인자 쭉정이들만 남아갓고 무엇을 엇쩢가잉!".

국가 -> 민족 -> ?


Sati 2009-08-24 23:10   좋아요 0 | URL
조금 비트신 것이 특정지역에 대한 편견을 갖고 계신 것처럼 보여요.

로쟈 2009-08-26 01:03   좋아요 0 | URL
언제나 돌아가신 분들은 조금 더 커보이긴 합니다. 상징이 되니까요...

펠릭스 2009-08-26 19:41   좋아요 0 | URL
미래형 상징이 되려면 우리의 민주주의 미래를
긍정적 아니면 회의적으로 보느냐가 강건인데.

 

낮에 잠시 집에서 가까운 분향소에 들러 분향을 하고, 오후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과 안장식 실황을 TV로 봤다. 무거운 마음에 해야 할 일들에도 손이 가지 않았다. 한번 더 정권교체가 된 이후에 세상을 떠나셨다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모두가 좀더 흔쾌히 보내드렸을 터인데...     

  

오전에 <인권의 발명>(돌베개, 2009)을 읽기 위한 리스트를 만들어놓으며 떠올린 기사는 지난 주초에 시사IN에서 읽은 것이다. 지난 6월 북미 지역 대학 교수 240명도 한국의 민주주의 위기를 비판하는 시국선언에 동참한 바 있는데, 그중 36명은 외국인 교수였다. 이들과의 인터뷰가 특집기사였는데, 그중에서 김 전 대통령과도 교분이 두터웠던 에드워드 베이커 교수의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최소한 고문은 없어졌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가 전두환 같은 독재 정부는 아니라는 멘트 때문이다(<인권의 발명>에 따르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도 참혹한 고문이 법정에서 합법적으로 행해졌다). 브라보 마이 컨츄리! 하긴 80년대만 하더라도 고문이 횡행하고 '고문기술자'들도 있었던 것이니(김대통령의 장남 깅홍일 전 의원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파킨슨 병을 앓고 있다잖은가) 이 얼마나 장족의 발전인 것인지! 그럼에도 기사를 읽으며 나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하도 '역주행'이 현 정부의 주특기인만큼 그마저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면 한심하면서도 끔찍한 일이다(아래는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 과연 '고문 없는 사회'가 형식적 민주주의의 최대치인 것인지?.. 



시사IN(09. 08. 17) "민주주의의 밀물이 빠지고 있다"  

에드워드 베이커 교수(67)는 하버드 대학 옌칭연구소 부소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하버드 대학 한국학연구소 수석 프로그램 매니저이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도우며 인권·평화 운동을 펼쳤고 이후 아시아인권감시센터를 창립하기도 했다. 잠시 한국을 찾은 그를 8월13일 한양대 연구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신호철 기자)  

 

2003년 8월2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첫 강연에 에드워드 베이커 교수(오른쪽)가 함께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위독한데 한국 민주화 운동을 도왔던 사람으로서 마음이 각별할 것 같다.
어제 세브란스 병원에 문안을 가서 이희호 여사를 만났다.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보지 못했는데, 그건 이명박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희호 여사 말로는 김 전 대통령이 말씀을 듣기는 하는데 말을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거의 주무시는데, 잠자는 건지 의식이 없는 건지 걱정된다.

김대중 대통령을 언제 처음 만났나?
1975년 동교동 자택에서였다. 그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금 아웅산 수치 여사처럼 가택 연금 중이었고, 나는 미국평화봉사단 일원으로 한국에 있었다. 당시 서울 서소문 풀브라이트 하우스에는 나를 비롯한 미국인 친구들이 모여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의견을 나누곤 했다. 이희호 여사는 영어를 잘해서 미국인들과 친분이 있었고, 김대중 선생은 47세에 늦깎이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김 선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더글러스 리드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가 우리보고 동교동에 가볼 생각이 있느냐고 제안했다. 김대중 선생은 한국 민주화 영웅이었으므로 꼭 뵙고 싶었다. 동교동 자택에서 통역은 필요없었다. 우리도 한국어를 꽤 했고, 김대중 선생은 자신의 소신과 정책을 정확하게 영어로 이야기했다. 그가 영어를 참 빨리 배웠다고 생각했다.

이후 미국에서 또 그를 돕게 되었다.

첫 만남 이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1983년 그가 석방돼 미국으로 왔을 때, 이틀 만에 워싱턴 D.C에서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는 갑자기 미국으로 와서 어떻게 생활할지 준비가 덜 돼 있었다. 나는 하버드 대학과 이야기를 해서 국제문제센터 연구원으로 계시게 했다.

미국에서 김 전 대통령은 어떤 대우를 받았나?
그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미국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중에 김대중씨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미국 지식인의 평가는 김영삼보다 김대중 쪽이 더 실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대중 선생이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에게 졌을 때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선생은 하버드 대학에 있으면서도 계속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강력히 내비쳤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그가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을 매우 걱정했다. 1983년 8월21일 베니그노 아키노 의원이  필리핀으로 귀국하자마자 공항에서 암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은 한국에서 똑같은 일이 반복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미국의 김대중에 대한 관심은 한국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 1987년 6월 항쟁 때 당시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개스턴 시거가 한국에 왔을 때 처음 만난 사람이 김대중 선생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전두환에게 1980년 광주처럼 군대로 시민을 치지 말라는 신호였다.  

외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높은 데 비해 한국에서는 반대자가 많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 때는 추도사를 하려다 좌절되는 수모도 당했다. 입원하기 전에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내 생각에는 김대중 선생은 한국에서 아주 역사적인 역할을 하신 분인데, 안타깝다. 요즘 한국이 왜….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많은 잘못을 했다. 노무현·김대중 대통령 때와 비교해 지금은 덜 민주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점이 문제인가?

예를 들어 노동계에 대한 공세적 대응이나 용산 참사에 대한 대처라든지, 남북 관계는 방치한 것 따위. 북한도 책임이 있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맺은 선언과 국가 조약을 이 정부가 무시한 것을 고려하면, 북한이 화를 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쇠고기 수입 문제는 아주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사전에 한국 국민과 같이 토론해야 했는데 그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 미국 방한 때 이 대통령이 자신을 CEO 대통령이라고 소개하곤 했는데, CEO라고 생각하는 건 민주주의 나라 대통령의 마음가짐이 아니다.

CEO라는 말은 한국에서 좋은 이미지로 통용되고 있다.
CEO라는 자리의 특징은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과정과 아주 다른 결정을 내리는 자리라는 점이다. 이게 핵심이다.

미디어 정책도 공세적이다.

얼마 전 미디어법 통과 논란을 지켜봤는데, 권력 기업이 신문·방송 겸영하는 것은 미디어의 집중화와 독점화를 가져오고, 비판 기능은 떨어지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과거 1970년대 동아투위 생각이 났겠다.
동아투위 사태 때 이부영 기자가 소공동 풀브라이트 사무실의 우리 미국인 모임을 찾아왔다. 그래서 동아투위를 알게 됐고, 우리가 돈을 모아 동아일보에 독자 광고도 냈다. 문구가 “언론자유 만세, 미국의 친구 16명”이었다. 동아일보 앞에서 한국인들이 시위하고 있는데 키가 큰 제임스 시노트 신부가 서 있는 모습이 도드라졌던 기억이 난다.  

 

베이커 교수(위)는 박정희 정권 이래 한국 현대사를 눈앞에서 지켜보며 민주화 운동을 도왔다.

이명박 정부를 독재 정부라고 생각하나?
아니다. 전두환 같은 독재 정부는 아니다. 최소한 요즘 고문은 없어졌다.

그럼 노태우 정부와 비슷한가? 김영삼과 노태우 사이일까?

글쎄, 그것도…. 노태우도 겨울 공화국이란 간판 밑에서 여러 가지 나쁜 짓을 많이 했다. 당시 내가 아시안인권감시센터를 세웠는데 그때 한국 민주운동가들 아주 힘들었다. 어떤 선을 그어서 어디까지 후퇴했다고 측정해 말하기는 힘들다. 제일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의 밀물이 빠지고 있다(high tide of democracy is now going backward)는 점이다

09. 08. 2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펠릭스 2009-08-24 11:39   좋아요 0 | URL
'이웃집 아저씨'론을 언젠가 써야겠어요. 이웃집 아저씨는 돌아서면 나를 죽으려 작동합니다. 조직속에서 나의 이웃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직의 적만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등을 맞대고 서로의 이웃를 욕합니다. 아저씨는 어느 공간에, 어느 집단속에 있을 때면 다른 괴물로 변합니다. 조직이라는 미명하에. 해가 지면 낮에 했던 말과 행동을 잊고 은밀한 밤공기를 쏘이며 이웃을 위해 무슨 작전을 합니다.
"너희의 비애가 아무리 크더라도 세상의 동정을 받지마라, 동정속에 경멸의 생각이 들어있다"(플라톤)

로쟈 2009-08-26 01:02   좋아요 0 | URL
그래도 '이웃집 살인마'보다는 나은데요.^^
 

알다시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조문하기 위한 북한의 사절단이 어제 방한했다. 오늘 오전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우리측 통일부 장관과 면담을 가졌으며 김정일 위원장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의 면담도 요청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면담의 성사 여부도 조만간 알려지리라.   

 

아무튼 그런 뉴스들을 잠시 클릭하다 보니 지난주에 학교에서 들고온 책이 생각나 무릎에 올려놓았다. 백낙청 선생의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번혁인가>(창비, 2009). 저자가 한반도 분단체제를 다룬 네번째 책인데, 개인적으론 처음 구입한 책이기도 하다. 나머지 세 권은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창비, 1994), <흔들리는 분단체제>(창비, 1998), 그리고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2006). 저자가 책머리에 적은 대로, 세번째 책이 나온 지난 2006년과는 현재는 상황이 현저하게 다르며 남북관계도 경색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악화일로로 나가던 상황이 그나마 조문 정국으로 어떻게 돌파구를 찾게 될지 향후 며칠간이 중요한 고비가 될 듯싶다.  

두주 전 시사IN에 백낙청 교수와의 인터뷰가 실려서 신간소개를 겸하여 옮겨놓으려고 했는데, 김대통령 서거로 며칠 늦춰졌다(서거 전에 이루어진 인터뷰라 김 전 대통령의 역할론도 언급된다). '변혁의 공부길'로 저자가 이번에 제시하는 '변혁적 중도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도 삼을 만하다.     

시사IN(09. 08. 10) "MB 정부는 파쇼할 능력도 없는 정체불명 정권"  

<창작과 비평> 편집인이자 문학 평론가인 백낙청 교수(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는 보수 진영에서도 평가하는 합리적 진보론자다. 평소 대중 앞에 나서기를 자제해온 그가 용산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시민사회와 야4당 간의 원탁회의에도 참석했다. 무엇이 그를 자꾸 발언하게 만드는지, 현 시국과 남북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시사IN> 특별 인터뷰를 통해 알아봤다.(이숙이 기자)  



용산 관련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렸다. 시국선언은 오랜만인 것 같은데.
이른바 사회원로라는 사람들이 별다른 전문성도 없이 온갖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상당부분 자제해왔고, 앞으로도 자제할 생각이다. 다만 용산 문제는 인륜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민주주의 측면에서도 굉장히 심각하고 상징적인 사태라고 본다. 그것이 반년 넘게 지속되는 마당에 역사의 기록을 위해서라도 이름을 올려놓는 것이 옳겠다 싶었다.

최근 들어 학자나 종교인 등 이른바 지식인 그룹의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시국선언 중에도 의미 있는 것은 잘 안 나서던 사람들이 나서는 것과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서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일반 시민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나, 미디어법에 대해 신문방송학자들이 나서는 것, 그리고 지난해 대운하문제로 서울대 교수들이 나선 것 등이 그렇다. 또 늘 나서던 사람들이라도 위협을 감수하면서 다시 발언하는 경우, 이를테면 최근 전교조 교사들의 시국선언 같은 것은 의미가 크다. 서명한 교사들에 대해 탄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 때는 전교조 노조원이 아닌 일반 교사까지 더 많이 참여했다고 들었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얘긴가?

우리 사회가 이명박정부가 원하는 방향대로만 굴러가지는 않으리라는 징표다. 지난해 촛불이 이명박정부의 노선을 바꿔놓지는 못했지만, 일단 이명박정부 맘대로는 안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그것을 아직 이명박정부나 여당측에서는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아주 모르는 것 같지는 않고, 직감으로 느끼고 오히려 겁에 질려있다고 본다.

‘실제로 바뀐 건 없다’며 촛불 피로증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편에서는 작년의 그야말로 꿈같은 축제가 다시 벌어지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로는 안되는 게 입증되었으니까 옛날식 투쟁으로 돌아가서 제2의 6월항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답은 없어도 ‘그 양쪽 어느 것도 아니다. 또 새로운 사태가 전개될 것이다’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 서거라는 뜻밖의 사건 때문에 일어난 거지만 지난 5월의 촛불은 또 달랐다. 그리고 미디어법 강행처리로 일어난 최근의 파장이 지금 당장은 촛불의 재연을 가져오고 있진 않지만, 이것도 가세해서 다음 단계에는 또다른 양상이 벌어질 것이다.

새로운 양상이라면 어떤 건가?
가령 지난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하지 않았나. 민주당이 별로 잘한 게 없는데도 민주당이 될 만한 곳에서는 그쪽으로 표가 결집됐다. 작년 촛불을 계기로 사람들의 마음이 MB정부로부터 확 돌아섰던 게 표면에선 가라앉았다가, 선거가 벌어지든 전 대통령이 서거하든 뭔가 계기가 있을 때마다 다시 분출하는 형국이다.

이명박정부에 대해 ‘소통부재의 일방통행 정부’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이 정부가 파쇼정권이라는 규정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파시스트 성향을 가진 사람이 그 핵심이나 언저리에 많이 있고 안보관계 기관들은 박정희?전두환 시대부터 줄곧 그런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파시스트적인 행태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건 사실인데, 나는 “파쇼는 아무나 하나?”라고 말한다(웃음). 이 정부는 파쇼할 능력도 없으면서 파쇼적인 기질을 시도 때도 없이 발휘하다 보니까 국민이 엄청 피곤하고 불행해지는 거다.

파쇼를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란 무슨 뜻인가?
파쇼란 과격한 반동이고, 과격한 반동이 아닌 보수는 온건 보수인데, 이 정부는 온건 보수도 아니고 일관된 파쇼도 아니고 그냥 국민들 짜증나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정권이 아닌가 싶다. 유능한 점은 자기들의 사익 실현에 상당히 적극적이고 단기적으로는 꽤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성격 규정이 모호하다. 
보수라면 있는 걸 지켜내려다 보니까 대체로 온건하고 상당히 합리적이어야 한다. 오히려 진보를 추구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좀 과격해지는 거고. 그런데 이 정부는 어찌보면 굉장히 과격한 개혁세력이다. 다만 그 개혁의 내용이 대세를 완전히 거꾸로 읽은 결과다. 이미 미국 같은 본고장에서도 끝난 신자유주의, 규제완화, 부자감세, 이런 것을 관철하기 위해서 아주 과격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걸 관철할 일관된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더 중요한 건 개혁을 제대로 하려면 스스로 개혁된 집단이라야 하는데, 지금 정권 핵심의 다수는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 개혁해야 했던 면모들을 가장 개혁 안된 상태로 지니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개혁하겠다고 나서니 세상만 어지러워지고 사람들이 피곤해지는 거다.

노무현 정권 때 권력기관을 장악하지 못한 게 오히려 반동을 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권위주의적 대통령제를 청산하고 가령 검찰에 대한 대통령의 감독권을 포기한 것 등을 두고 칭송들을 하는데, 인간적으로는 훌륭한 대목이지만 대통령으로서나 개혁세력의 지도자로서 과연 현명한 일이었는지 엄정하게 평가를 해야 한다. 검찰개혁을 제대로 하고 권한을 줘야지 개혁 안된 집단을 그대로 기만 살려줘서는, 결국 본인도 당했지만 국민들이 얼마나 당하고 있나. 그리고 소위 당정분리라는 것도 노무현 대통령이 사실 열린우리당에 대해서 영향력을 안 미친 것도 아니면서, 서로 유기적인 협조관계는 깨버리고, 정당정치에 대해 책임질 건 안 지고, 그런 점은 잘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권은 오히려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주장한다. 그게 통하면서 대선 승패도 갈렸고.
잃어버린 10년’은 정말 선거 구호로는 최고였다. 왜냐하면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그 구호에 동감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집단이 있었다. 하나는 지난 10년간 다른 건 다 누렸는데, 이를테면 부동산 주식 골프회원권 등이 다 엄청 늘고 위장전입해가면서까지 자식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했지만 정권을 마음대로 주무르지 못해서 더 잘살지 못했다는 상실감을 가진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IMF 이후 10년 동안 생활이 진짜 어려워진 다수 서민들이다. 그런데 정권밖에 잃은 게 없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10년’이란 구호를 들고 나오자 실제로 생활이 어려워진 다수 서민들과 소수 특권집단 사이에 일종의 국민연대가 이뤄진 것이다.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무적의 연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 연대가 깨지고 있다. 서민들이 끓는 국맛을 보면서 ‘이명박 찍어줬더니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더 어려워졌다’는 원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있는 정치집단이라면 선거 때 써먹은 건 뒤로 감추고, 지난 정부들의 업적 가운데 계승할 건 계승해야 한다.

반드시 계승해야 하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인권위원회 같은 게 하나의 사례다. 인권위는 지난 10년간 주요 업적이고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사례다. 그런데 이걸 축소하고 압박하면서 차기 의장국을 놓친 건 물론이고 인권국가 등급까지도 강등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런 걸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이 정부 안에 많은 모양인데, 이른바 국가 브랜드와 직결된 일이고 아주 속되게 계산하면 언젠가는 한국의 수출능력에도 악영향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남북관계의 경우도 그렇다. 6?15공동선언은 원칙에 관한 문서니까 이 정부도 전혀 부담될 게 없고, 10?4선언은 구체적인 사업들이 걸려있으니까 ‘원칙적으로 10?4선언 이행하겠다’고 하면서 북측과 만나서 ‘지금은 이걸 다 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라며 선후와 완급을 조정하면 되는데, 왔다갔다 하다가 모든 게 경색이 됐다. 국내의 단기적인 이해관계에 물려 국가 차원의 더 큰 이익을 훼손하고 있는 셈이다.

국내의 단기적 이해관계란 무얼 말하나?
촛불로 정권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조중동이나 극우세력의 지지를 받는 게 우선 급하니 그들이 비판하는 6.15를 들고 나올 수는 없었을 게다. 게다가 북측 정권이 우리 국민 사이에 별로 인기가 없으니까, 큰 틀에서는 ‘정부가 남북관계를 발전시켜야 하는데 잘못하고 있다’ 하다가도 구체적인 문제로 우리 정부가 북측과 부딪치게 되면 대개는 ‘이명박도 나쁘지만 김정일은 더 나쁘다’는 쪽으로 간다. 국정지지도가 낮을수록 그런 정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이 커지기 마련이다. 

남북문제가 꼬이는 1차적 책임이 우리 정부에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오는 주말에 새로 나오는 책(『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에도 썼지만, 이번 제3차 핵위기는 ‘남한발’이라고 본다. 북측은 일이 잘 안 풀리면 핵 보유로 가겠다는 계획을 항상 갖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핵 실험을 한 뒤에도 핵무기를 지렛대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대폭 개선하겠다는 전략을 동시에 세우고 있었다고 보는데, 그 결과 나온 것이 10·4선언이다. 그 10·4선언을 현 정부가 계승했다면 북이 2차 핵실험으로 갈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그럴 경우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남한 정부를 거들면 거들었지 부시처럼 훼방놓았을 리는 없다. 그런 점에서 1차적인 책임은 이명박정부에 있다는 것이다. 다만 분단체제에서는 남북의 분단체제 기득권 세력이 서로 원수처럼 여기면서도 묘하게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그 책임을 전적으로 어느 한쪽에 지우는 건 무리다. 단적인 예로 인공위성 발사 직후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이 나왔는데, 그에 대해 북이 반발하는 건 당연했겠지만 곧바로 2차 핵실험을 강행한 걸 보면 북에서도 종전에 비해 강경세력이 훨씬 힘을 얻은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서(웃음).   

분단체제가 더 공고해지는 건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 분단체제가 더 심하게 고장이 나서 이렇게 일이 꼬이는 거지, 과거에 분단체제가 안정돼 있을 때는 오히려 북이 핵무기를 만들 필요도 안 느꼈었다. 남북대결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남북이 모두 지속가능한 발전은 아니었지만 남쪽은 남쪽대로 경제성장을 했고, 북도 어느정도 성장하며 먹고 살았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남한에 독재정권이 무너지면서 분단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소련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북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곤경에 처하게 됐다. 따라서 지금 대결이 강화되는 건 옛날처럼 안정된 대결체제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단체제가 흔들리다 못해 요동치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거 관리 잘못하면 전쟁까지 안가더라도 남과 북이 엄청나게 더 어려워지는 사태가 온다. 따라서 나는 미국의 지도자들이 한반도 주민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원대한 세계전략의 차원에서라도 이 국면을 다시 수습하려고 나올 거라고 본다. 

결국 칼자루는 또 미국이 쥐는 건가?
가까운 시일에 우리 남측 정부가 나서서 이 문제를 풀어갈 전망은 어둡다고 본다. 북측 역시 우리 대통령을 지나치게 비판하는 등 그 사이 너무 나갔다. 따라서 남북관계만 가지고는 풀기가 너무 어려운데, 북미관계는 좀 다르다. 물론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 실망하는 분위기도 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경우 부시 전 대통령처럼 북의 정권을 전복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출발한 사람이 아니고, 준비 안된 상태에서 북이 습하게 치고 나오니까 좀 기분이 나쁜 것도 있고 또 그사이 협상팀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이래저래 일이 꼬인 것 같다. 오바마는 이걸 계속 꼬인 상태로 가져가서 국내정치에 활용해야 할 처지는 아니기 때문에 빠르면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늦어도 가을에는 북미관계가 변화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절묘하게도 이 인터뷰 바로 다음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뉴스가 터져나왔다). 그렇게 됐을 때 우리 남측은 재빨리 거기 편승을 해서 남북관계를 풀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질질 끌려가다 보면 결국 YS 짝 나게 된다. 경수로 할 때 우리는 협상테이블에 끼지도 못하고 나중에 돈만 왕창 내지 않았나. 북측으로부터 고맙다는 소리도 전혀 못 들었다(웃음)

과거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한때 남북관계 진전이 좌절됐었는데, 김정일 위원장 때도 재연되는 것 아닌가 싶다. 
북측 체제의 성격상 중요한 고비마다 김정일 위원장이 결단하지 않으면 안됐고, 실제로 6·15공동선언이나 10·4선언, 9·19 공동성명이 다 김 위원장의 결단이었다. 후계체제로 갔을 경우 그런 전략적인 결단을 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사실 걱정이다. 개성공단의 경우도 당시 그런 전략적 요충지를 내준다고 했을 때 남쪽에서는 처음에 아무도 안 믿었다고 한다. 임동원 전 국정원장에게 직접 들은 얘긴데, 자기가 현대측 사람에게 “그 말을 믿고 있냐”고 그랬다고 한다 (웃음). 비슷한 일로 우리 정부가 국방부를 설득한다고 해보자. 국회, 보수 언론 다 설득하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일을 북측은 김정일 위원장이 하자고 해서 됐다. 그게 꼭 좋은 시스템은 아니겠지만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는 당분간 그런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라 본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도 건강이 안 좋다. 민주개혁 진영이 자꾸 위축되는 것 아닐까?
저는 김대중 대통령을 어떤 땐 비판하고 반대도 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좀 더 살아계셔야 한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국제적으로 한국의 진정한 국가이익을 대변해서 발언했을 때 세계의 언론이나 지도자들이 주목하게 만들 수 있는 위상을 가진 분이 그분 빼고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고비를 잘 넘기시기를 바란다. 국내에서도 역할이 중요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직 대통령으로서지 특정 정치세력을 이끌어가는 지도자일 수는 없다. 지금 활동하는 후속세대들이 너무 그분에게 의존하지 말고 역할을 잘 해야 한다.

믿고 따를 만한 인물이 없다는 얘기가 많다.
나는 인물하고 국민의 전체적인 기운이랄까 그런 게 맞물려 있다고 본다. 구심점이 있을 때 기운이 확 일어나기 좋은 면이 있는가 하면, 국민들의 기운이 무르익을 때 그에 부응하는 인물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인물이 혜성처럼 나타나서 단박에 해결해주길 기대하지 말고, 그런 인물이 되고자 하는 포부를 가진 사람은 그 사람대로 준비를 하고, 국민들은 그런 인물이 나올 수 있는 토양을 만들기 위해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 인물이 없는데 뭐가 되겠냐고 그냥 앉아 있으면 평생 인물도 안 나오고 일이 되지도 않을 거다.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커질수록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것 같다. 합리적 보수, 합리적 진보가 연대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고.
국민이 현실정치 차원에서 믿고 의지할 만한 세력이 나오는 게 중요한데, 이른바 합리적 진보와 보수가 어느 날 갑자기 모여서 정치연대를 만드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합리적이면서 사람들이 보수적이라고 볼 만한 분들이 진보진영에서도 대화할 만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전체적인 사회분위기가 많이 바뀌리라고 본다. 그런데 이건 편파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이야긴지 몰라도, 합리적 보수의 필요조건 중에는 ‘이 정부는 진짜 보수주의 정부가 아니다’ 하는 분명한 인식이 포함된다고 본다. 공개적으로 반MB 발언을 해야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부의 국정기조나 운영방식이 잘못됐다는 인식을 이른바 진보인사들뿐만 아니라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누구나 공유해 마땅한 상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국민이 방향감각을 잡는 데 도움을 주고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해주리라고 본다.

합리적 진보진영도 그리 큰 것 같지는 않다.
제가 성찰적 진보라는 말을 썼는데, 자기가 믿고 주장하는 진보노선이 과연 진정으로 이 사회를 한 걸음 발전시키는 노선인가를 성찰하는 이들도 있고 안하는 이들도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남북관계발전이나 통일에 대한 적극성이 흔히 ‘진보’의 한 척도가 되는데, 남쪽 정부나 대기업의 이익에만 몰두해서 남북사업을 한다면, 그것도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정말 이 사회의 진보를 가져오는 남북사업이나 통일운동 방식일까. 마찬가지로 자주파 평등파 할 때 평등파의 경우도 그렇다. 한국이 분단된 사회라는 점을 충분히 감안해 신축적인 평등지향 정책을 펴는 게 아니라 교조적인 평등주의를 취한다면, 그 모델이 소련식 사회주의든 북구의 사민주의든 우리 현실하고는 동떨어진 얘기가 된다. 그것은 자칫 우리사회의 건전한 중도세력이 제대로 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을 방해하고 보수세력에게 여러 빌미를 줄 수가 있다. 따라서 진보 노선에 대한 이런저런 성찰이 필요한데, 그런 성찰을 하는 인구가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적다고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미 명성을 지녔거나 조직 안에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런 성찰이 더 부족하다. 그분들은 그만큼의 기득권을 가졌기 때문에 성찰할 필요를 덜 느끼는지도 모른다.

정치세력으로서는 성찰하는 진보와 성찰하지 않는 진보가 함께 가는 게 맞다고 보는 건가?
성찰하는 진보와 안하는 진보를 두부 자르듯이 가를 수 없잖은가? 같은 사람도 어떤 날은 성찰하고 어떤 날은 성찰 안하고 하니까(웃음). 당연히 다 같이 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리없이 결합할 수 있는 철학이랄까 노선이 필요하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내가 주장하는 ‘변혁적 중도주의’가 그런 노선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일부 호응하는 분들도 있고 아직 안하는 분들이 더 많고 그렇다.  



변혁적 중도주의 안에 기존 정당을 다 담아낼 수 있을까?
변혁적 중도주의가 정당의 정강이 되기는 어렵다. ‘잃어버린 10년’처럼, ‘변혁적 중도주의’를 내걸고 선거에 나갈 정당도 없고 그렇게 해서 이기기도 어렵다. 그래서 이건 더 폭넓은 철학이랄까, 기본 노선에 해당하는 거고, 변혁적 중도주의에 민주당 분파, 민노당 분파, 진보신당 분파 (웃음), 이런 건 가능하지 않겠나. 그러려면 변혁적 중도주의의 내용도 더 충실해져야 하지만 각 정파의 내부도 바뀌어야 한다. 진보정당들은 자기들 내부에서의 성찰과 더불어 연립정치 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나는 굳이 합당을 해야 잘하는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나라 선거제도가 연립정치하기에 아주 나쁘게 되어 있지만, 정당들 자신이 섣불리 연립정치를 하다가 자기들 정체성이 의심스러워져서 그나마 갖고 있는 지지세력도 놓친다는 우려를 많이 한다. 하지만 그런 태도로는 항상 소수 지지세력만 붙들고 있게 된다. 이른바 진보정당들이 더 큰 정치를 할 이런저런 훈련을 쌓고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성찰을 거친 진보정당과 연립정치를 할 만큼 개혁성을 확보해야 한다.

시민사회와 정치권과의 원탁회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성과가 있나?
두 번 했는데, 발상은 이런 거다. 지금 국민의 변화욕구는 굉장히 높은 수준에 와 있는데 이걸 담아낼 능력이 정치권이나 시민사회 세력이나 다 부족하다. 그렇다고 해서 시민사회와 정치권이 갑자기 융합하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원탁회의 자체가 해답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정치권하고 시민사회가 만나서 주파수를 조정할 수 있으면 조정해보자 그런 취지다. 그런데 만난 날이 한번은 6.10대회 전날이고, 다른 한번은 미디어법 싸움이 한창일 때이다 보니 그런 장기적인 구상은 묻혀버리고 야당의 투쟁에 시민사회가 서포터즈로 나선 것처럼 비춰졌다. 그 대목에서 응원해준 걸 후회하진 않지만, 아무튼 그게 초점은 아니었다. 문제는 원탁회의란 것도 자주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정당인사들이야 한번이라도 더 언론에 오르내려서 손해 볼 게 없지만, 시민사회 쪽에서는 굉장히 부담을 지고 하는 일이다. 따라서 3차 모임을 언제할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우리 시민사회 입장에서는 모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 해야 한다고 본다. 

그 사이 시민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누구나 활동가로 나서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우리 국민들이 미디어 악법의 불법적인 처리나 용산사태 같은 것을 묵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10월 재보선 같은 때 국민의 문제의식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보고, 지방선거의 경우도 예비후보 등록일을 따져보면 그리 먼 것도 아니다. 따라서 후보등록 전에 범민주세력의 선거공조에 대한 아주 원칙적인 룰이 나오는 게 바람직하다. 어떤 방식으로 할지는 그야말로 정치권의 선수들이 결정할 일이지만, 올가을에는 그런 작업이 시작돼야 한다고 본다.

승자독식 구조가 문제라면 권력체계나 선거구제를 바꾸는 식의 변화가 필요한 것 아닌가?
현행 헌법이 제정된 지 20년이 넘었으니까 손볼 사항은 꽤 있지만, 지금은 헌법 같은 고차원의 얘기를 할 시기가 아니라고 본다. 훨씬 더 절박한 상황이다. 헌법 못지않게 중요한 게 선거법인데, 비례대표 수를 늘리고 소선거구제 비중을 떨어뜨리는 식의 손질만으로도 승자독식 구조는 완화할 수 있다. 개헌을 한다고 하면 그런 선거제도 개혁의 전망이 서는 정도의 상황이 됐을 때 하는 게 맞다고 본다. 87년 헌법이 부족한 점이 많지만 유신헌법과 5공 헌법에 비하면 엄청 좋은 헌법이다.

대통령제 폐해가 많다며 내각제로 바꾸자는 의견도 적지 않다.
내각제라는 게 의원내각제의 줄임말인데 국회가 이런 상태에서 국회의원 내각제가 대통령제보다 낫겠는가. 좋은 국회를 만들려면 정당도 좋아져야 하고, 언론상황도 지금과 달라져야 하고, 무엇보다 선거제도가 개선돼야 하는데 그런 걸 쟁취하기 전에, 가령 지금 18대 국회가 내각책임제를 운영한다고 생각해보라. 끔찍하지 않은가?  

09. 08. 22.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펠릭스 2009-08-23 08:02   좋아요 0 | URL
책의 제목이 '변혁적중도주의'에 대한 자문자답 같습니다.
영화 터미네이트II의 'T1000'처럼 흩어진 몸조각들(분파)이 재융합하여
원형이 된 것처럼, 그 속성이 '변혁적중도주의'로 새로운 정치집단을 형성될 수 있다면 일보하겠지요. 작금에 정치 상황이 보스정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대선때처럼 새로운 인물들이 객토되는 방법이 있을텐데. 두 세수 앞을 보는 고수들은 '조문정국'이 꼭 한 번은 올 거라는 예상을 했겠지요. (결과적으로) 기싸움 그만하고 신판을 짜는 마음으로 건별 가중치를 부여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이끌어 내야하는데.(잘되어야할텐데)

로쟈 2009-08-23 08:51   좋아요 0 | URL
곧 면담이 이루어진다네요...

펠릭스 2009-08-25 15:10   좋아요 0 | URL
두 분이 대화하셨습니다. 한 분은 써 놓은 종이를 보며,
다른 분은 상대의 얼굴을 보며...

펠릭스 2009-09-05 20:45   좋아요 0 | URL
지난 2일 '한반도 통일의 방법론'에 대한 심포지엄이 있었더군요.
백낙천 명예교수는 '포용정책2.0'를, 박세일 교수는 '선진화 포용통일론'을
주장했습니다. 즉 '흡수통일론'은 북한을 실패 국가로 규정하고
남한 주도로 북한의 정상국가화와 근대국가화시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주군이 다른듯 합니다)
 

저녁에 마트에 다녀온 걸 제외하면 하루종일 '재택'근무를 한 탓에 바깥 소식은 인터넷 뉴스로만 접한다. 김 전 대통령의 시신이 오늘 입관되었다고 하니 이제 그의 죽음도 '현실'이 됐다. 내가 기억하는 김대중은 주로 1987년 대선 정국 이후여서(그때 나는 아직 선거권을 갖고 있지 않아서 정당의 선거참관인으로나 투표장에 참여할 수 있었다) 따져보면 길지 않다(그래도 나에겐 얼추 반생이다!). 그 기간 동안 '한국 정치'하면 늘 한쪽에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인물이니 이른바 한국 정치사의 '상수'이다. 이제 그 '상수'를 제하고 '변수들'로만 방정식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당장은 의문이 든다. 그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정치인들이 많이 나선 김에 그의 시대의 공과도 좀더 분명하게 밝혀지면 좋겠다. 그게 가야 할 길의 방향과 보폭을 정하는 데 요긴할 테니까. 그런 생각으로 'DJ노믹스'를 추억하는 기사 하나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8. 20) 디제이노믹스에 대한 추억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 국민의 정부 초기에 썼던 취재수첩을 들춰봤다. 6·25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외환위기를 맞아 하루가 멀다 하고 엄청난 일들이 벌어진 때였다. 수첩엔 그때의 숨가빴던 상황들이 거칠게 담겨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다룬 내용이 많았다. 수첩을 넘기다 ‘디제이노믹스’(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제철학과 정책기조)란 단어에 눈길이 멈췄다. 1999년 8월 어느 날, 청와대에서 경제 관련 업무를 하는 비서관과 저녁을 먹으며 디제이노믹스를 소재로 오간 말들을 적어 둔 것이었다.   

질문은 주로 “디제이노믹스는 어디로 갔느냐”였다. 그는 “지금은 아이엠에프 때문에 옴짝달싹 못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대통령이 하고 싶은 경제정책들을 내놓을 것이다”라는 요지로 대답했다. 실제로 그해 8월15일 김대중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새로운 경제정책 구상을 밝혔다.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 들어도 도발적이다.

“…더불어 성공할 수 있는 경제 번영을 이룩하겠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재벌을 개혁하고 중산층 중심으로 경제를 바로잡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변칙적인 상속과 증여를 통한 부의 부당한 대물림이 없도록 세제를 고치겠습니다. …중산층 육성과 서민생활 향상을 목표로 인간개발 중심의 생산적 복지정책을 적극 펴겠습니다. …근로능력과 의욕이 있는 모든 국민에게는 직업훈련과 평생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에 맞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이런 야망은 그 뒤 대체로 흐지부지 끝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진보 성향의 학자들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표방한 디제이노믹스는 실종됐다고 진단했다.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반민주적 성장지상주의와 야만적 시장만능주의의 악조합’이 굳어졌다고 혹평한 이들도 있다. 과연 이런 비판이 타당할까.

김 전 대통령이 편 경제정책 가운데 디제이노믹스와 딱 부러지게 부합하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확실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업적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 정도가 꼽힌다. 하지만 현행법과 제도에는 디제이노믹스가 곳곳에 녹아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재임 때 뚜렷한 결실을 맺지 못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라면, 구조조정 대상이 된 기업의 구성원한테 구조조정 주체로 참여해 성과를 나눠 가질 수 있게 한 한국형 우리사주제도다. 국민의 정부는 2001년 8월에 근로자복지기본법을 제정하고, 근로자 참여 및 협력 증진에 관한 법률을 비롯한 여러 관련 법령을 개정해 우리사주제를 크게 바꿔놓았다. 주식회사 사원들한테 우리사주제를 단지 재테크 목적이 아니라 경영 참여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미국의 종업원주식소유제도(ESOP)를 우리 실정에 맞게 설계한 제도다. 이를 잘 활용하면 구조조정과 대규모 실업의 긴장관계를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선 항공·철강·자동차 같은 기간산업의 구조조정에 활용돼 성공한 사례가 수없이 많다. 1980년대 미국 크라이슬러의 극적 회생이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제너럴모터스(GM)의 구조조정도 공적자금과 노조의 퇴직연금 출자를 통한 합작이다.

디제이노믹스에 대한 되새김은 자연스럽게 회생절차를 밟고 있는 쌍용자동차를 떠올리게 한다. 정부와 채권단은 쌍용차 회생의 전제로 3자 매각을 얘기한다. 새 주인을 찾아야 회생에 필요한 자금지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새 주인’에서 쌍용차 사원들은 아예 배제되어 있다. 정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한다면, 쌍용차 회생의 씨앗을 디제이노믹스에서 한번 찾아보시라.(박순빈 경제부문 편집장) 

09. 08. 20.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릭스 2009-08-21 16:02   좋아요 0 | URL
고인의 일기에 경천애민(敬天愛民) 사상이 스며있습니다.

로쟈 2009-08-22 10:07   좋아요 0 | URL
국가 지도자라면 의당 갖추어야 할 태도일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은 듯해요...